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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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어간다. 작가 이름 모른 채 읽은 다음에 누가 썼겠느냐 물으면, 열 명 가운데 여섯은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할 듯. 발자크 표 시대소설. 이렇게 재미난 소설을 민음사는 뭐하러 무료 제공하고 별점 구걸을 했을까. 하긴, 요새 세계문학전집 내는 거 보면 알 만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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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4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뒤마를 좋아하는 걸드문트님!

Falstaff 2022-09-14 11:53   좋아요 1 | URL
귀신이셔요, 공쟝쟝님! ㅋㅋㅋ

- 2022-09-14 12:03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이 낭만주의적 작가와 골드문트님의 뉘앙스가 닮았어요!! (저도 뒤마 아저씨 좀 좋음..)

Falstaff 2022-09-14 13:41   좋아요 1 | URL
앗! 저하고 뒤마가... 맞습니다. 제 피부색이 조금만 더 검었어도 똑같았을 듯. ㅋㅋ

- 2022-09-14 14:39   좋아요 1 | URL
저 뒤마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데... 닮으셨다니... 제 마음대로 상상하도록 하겠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긴 거 말고 너낌 비슷해요. ㅋㅋㅋㅋ 역사소설 쓰게 생겼는 데 의외의 낭만주의 아재 감송 ㅋㅋㅋㅋㅋ 먹고 살아야 하니까 대중성을 놓칠 수 없었으나 쓰다 보니 대중적인 거 너무 잘써버린 그런 사람?? 상처받지 마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9-14 0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인데 재미있군요. ㅎㅎ 발자크라 주저했는데 담습니다.

Falstaff 2022-09-14 11:54   좋아요 2 | URL
처음 시작할 땐, 역시 발자크, 했다가 점점 흥미진진해갑니다!
한 인물의 성격이 극적으로 바뀌는 장면, ㅎㅎㅎ 좋더라고요.

유부만두 2022-10-11 13: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라서 주저하신다는 말 저도 동감이었어요.
걱정한 것 보다는 괜찮았....나...흠... 전 인물들 마음, 감정 그려내는 부분이 너무 투박해서 ‘사건‘ 부분을 제대로 따라가면서 즐길 수 없었어요.
너무 아저씨 소설 같...;;;

blanca 2022-09-3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이거 주문각입니다. 골드문트님 믿을게요.^^

Falstaff 2022-09-30 16:50   좋아요 0 | URL
ㅋㅋㅋ 독후감에도 썼는데요, 딱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답니다. 발자크가 퇴고하면서 놓친 게 틀림없어요.

2022-10-1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1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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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 대산세계문학총서 176
허먼 멜빌 지음, 손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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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먼 멜빌, 이라는 이름이 하도 입에 붙어서 그런가, 나는 그의 작품을 많이 읽은 줄 알았다. 그래서 뒤져보니까, 읽고 독후감을 쓴 책이 당연히 <모비딕>, <피에르, 또는 모호함> 그리고 《허먼 멜빌 단편집》 이렇게 밖에 안 된다. 그나마 <피에르, 또는 모호함>은 허먼 멜빌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영문학자가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아무 잘못 없고 전부 지적 수준이 일천한 내 탓이겠지만, 우리말 문장으로 바꾼 본문에 비문이라고 주장할 만한 보도 듣도 못한 문장이 왜란 전의 호환, 마마처럼 창궐하는 바람에 즐거이 감상하지 못해 사실 그건 읽었다고 주장하기도 쑥스러워, 그렇게 따지면 이제 겨우 세 번째 작품임에도, 나는 멜빌의 <모비딕>과 <필경사 바틀비>를 워낙 좋아해 그를 숭배하기로 했다는데, 뭐 아니꼬운 거 있으셔? 만일 당신이 이 <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를 가까운 시일 안에 읽으려 하신다면, 웬만하면 대산세계문학총서 176번으로 나온 이 책을 고르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방송통신대학 출판부에서도 같은 작품을 출간해 판매가 기준 3,600원 저렴하게 팔긴 한다. 그러나 조심하시압! 방통대 출판부 책은 일찍이 읽다가 학을 뗀 <피에르, 또는 모호함>의 바로 그 역자가 번역을 했으니. 물론 전적으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말.


  전형적인 19세기 사람인 허먼 멜빌. 19세기는 지금과 달라서, 뭐가? 강남 빌딩주는 강남 빌딩주하고, 의사는 의사끼리, 변호사는 변호사끼리, 전략까지는 아니더라도 끼리 끼리 혼인관계로 인맥을 도타이 해 한 쪽이 망가지더라도 다른 한 쪽이 그만큼 회복시켜 신분 세습을 가능하게 해주는 반면,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는 절대 한 번에 한 가지만 닥치는 법이 없는 불운이라는 발톱에 한 번 할퀴었다 하면 순식간에 집구석이 거덜이 나고는 했는데(그건 내가 잘 알지), 허먼 멜빌이 전형적인 그런 집안의 자손이라, 아빠가 잘 해오던 무역업에 실패하고 일찍 숟가락 놓는 바람에 허먼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던 형과 함께 여태까지 다니던 학교건 뭐건 일단 다 작파하고 농가 일꾼, 상점 점원 들을 전전해야 했으며, 뉴욕-리버풀 증기선 승무원부터 포경선 선원, 해군 입대 등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타이피>와 <오무>. 별로 읽고 싶지는 않을 만큼 박한 평가에 머무는 이 작품들이 당시 독자들에게 상찬을 받아, 멜빌은 이후 그의 대표작이자 처참한 실패작 <모비딕>을 발효한 바, 서점에 가서 <모비딕>을 찾으면 “해양 수산물 도서”에 꽂혀 있었다고 하니 알 만하지, 멜빌 살아생전 히트 작품은 <타이피>와 <오무> 둘 정도였단다.

  <모비딕>은 다들 읽어 보셨을 터이지만, 너새니얼 호손 한테만 칭찬을 받았고, 이에 열을 받은 멜빌은 제2의 <타이피>를 원하는 대중의 바람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모비딕>보다 더 모던한 <피에르>를 출간하고, 당시에 출간해주지도 않았던 <십자가의 섬>에 이어 사실상 마지막 소설 작품이 될 <사기꾼>까지 연이어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게 말이 쉽지, 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가장이, 19세기에, 돈이 안 될 걸 뻔하게 알면서도 당시 기준으로 보면 암호해독기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난수표 같은 작품을 연이어 뽑아내는 건 보통 깡다구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목구멍에 친 거미줄 앞에 장사 없는 법, 멜빌은 마흔일곱 살이 되는 1866년부터 20년 동안 우리가 아는 이이의 직업, 세관 공무원으로 죽기 5년 전까지 일해야 했다. 멜빌도 그놈의 우라질 연 5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없어서 펜을 던져버리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


  <사기꾼>의 영어 제목은 “The Confidence Man”이다. “신뢰받는 사람.” 근데 왜 이걸 “사기꾼”이라고 번역했을까? 검색해보기 전에 역자 해설에 설명이 나온다. 아참, 위 문단에 쓴 대강의 멜빌에 관한 내력도 역자 해설에서 많이 인용한 거다. 고맙게도 굳이 검색해볼 필요 없을 만큼 나와 있다.

  Confidence-man은 “1849년 이후에 쓰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며 피해자에게 신뢰의 징표로 시계나 다른 물건을 요구하여 받아내는 사기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사기꾼>은 1849년 이후에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1850년대의 사회를 풍자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게 본문만 480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인데, 1850년대 초의 어느 해, 4월 1일, 만우절부터 다음날 해뜨기 한참 전 새벽 두 세시까지, 미시시피 강을 왕복하는 증기선 피델 호의 세인트루이스 – 뉴올리언즈 구간 선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액자처럼 나열되어 있다.

  작품 초장부터 독자들이 의심스러운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이 대거 출연한다. 먼저 피델호 선장실에 붙은 현수막을 소개해야겠다.

  “동부에서 온 것으로 추측하는 사기꾼 수배. 눈에 띄게 어수룩해보이는 면이 있음.”

  그러면서 생긴 모습을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글로 써 놓은 현수막. 이러니 독자가 모든 등장인물을 수상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눈 여겨 볼만한 인물은 특이한 바보다. 해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 생각에만 집착하고, 그렇다고 전혀 불쾌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침입자로, 멀리 가는 건 아니지만 먼 곳에서 왔으리라 짐작하는 인물로, 현수막 앞에 스케치북 만한 종이에다 주로 (하도 많이 인용해 진부하기까지 한) 고린도전서 13장 구절을 써 들고 있다가 저 구석으로 찌그러져 까묵, 잠에 빠지는, 벙어리에 귀머거리로 밝혀지는(정말?) 남자.

  두번째는 절름발이 흑인 거지. 괴상한 생김새에 뉴펀들랜드 종의 개 만한 키로 얼굴이 성인 남자의 허벅지에 부딪힐 정도라니 절름발이에다가 여차하면 난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밝은 얼굴로 군중들을 유쾌하게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 자신을 “깜둥이 기니”라고 한다면서 정체는 주인 없는 개, 즉 해방 노예로 소개한다.

  근데 여기 희한한 인간이 하나 등장한다. 남자다. 한 눈에 관세청 해고 공무원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다리를 절고 날카로운 눈매에 우거지 상을 하고 있다. 딱 봐도 허먼 멜빌 본인 아닌가? 하여튼 이 나무 다리의 사나이는, 절름발이 흑인 거지로 말할 것 같으면, 검둥이의 장애가 거짓이며, 심지어 원래 백인인 가짜 검둥이로 동부에서 사기행각이 발각되어 변장을 한 채 중남부, 당시 세인트루이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당시 의식으로 서부에 가까웠지만 하여튼 지금 지형으로 중남부로 숨어들어온 인간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승객들에게 경고하기를, 여보셔들, 여차하면 당신들 가운데 적어도 몇 명은 저 검둥이 기니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어. 조심하시오. 하고 무대에서 잠깐 사라진다.

  여러 군중들은 목발의 사나이가 한 말에 동의해 검둥이한테 더 끈질긴 비난의 고함을 치지만 그래도 끝까지 목발의 사나이가 하는 말에 반발하는 인물도 적지 않아, 이들의 대표를 두 명만 꼽는다면, ① 키가 크고 근육질이라서 군인처럼 보이는 테네시 주 출신의 감리교파 목사, ② 늙은 검둥이를 신뢰한다며 지갑을 열고 50 센트를 꺼내 주는 시골 상인이 있다. 상인이 지갑을 열 때 지폐와 함께 명함이 한 장 떨어지고 검둥이는 왼발로 이걸 슬쩍 밟아 아무도 모르게 손에 넣는다.

  조금 있다가 등장하는 모자에 상장喪章을 꽂은 남자가 나타나 시골 상인에게 접근해 본격적으로 사기를 치기 시작한다. 자신을 스스로 ‘존 링맨’이라 부르는 모자에 상장을 단 남자는 아예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사기꾼임을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다. 이이가 성공적으로 사기 치고, 배턴을 이어 등장하는 두번째 사기꾼이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 이이는 젊은 성직자에게 다가가 또 한 번의 사기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늙은 검둥이 거지 기니가 책의 30페이지에 자신을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목록에 들어 있다. 검둥이 기니를 변호해줄 수 있는 남자로 꼽힌 인물을 소개하자면,

  상장을 단 신사, 회색 코트에 흰 넥타이를 한 신사, 큰 책을 가진 신사, 민간요법사, 노란색 조끼를 입은 신사, 청동 명패를 단 신사, 보라색 예복을 입은 신사, 군인 같아 보이는 신사 등이다. 그런데, 역자는 페이지 아래에 각주를 달고 이렇게 써 놓았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전개될 각 에피소드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한 명이 변장했을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다.”

  하여간 나는 읽으면서, 이들이 한 명이라는 쪽의 주장에 표를 던졌지만 어떻게 읽든 그건 독자 마음이다. 끝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이것이 아니고, 저 위에서 얘기한 선장실 앞의 현수막에 이름을 올린 동부 출신 사기꾼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백인 남자인지, 늙은 검둥이 절름발이 거지 기니인지 끝내 종잡을 수 없었다. 검둥이 기니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좀 미진한 기분. 이 작품이 그렇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어딘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하여튼 직접 읽어봐야만 알 수 있는 그런 책. Confidence, 신뢰. 이 말이 한 2,197번 정도 나오는데, 나중엔 아주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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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9-13 0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허먼 멜빌도 모비딕, 바틀비에서 호손도 주홍글씨에서 멈춰야 할까요?
허먼 멜빌은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경향이 있는듯요^^

Falstaff 2022-09-13 07:43   좋아요 2 | URL
전 호손의 일곱 박공도 그럴 듯하게 읽었습니다만. ㅋㅋㅋㅋ
멜빌, 아흄. 그렇다고 바틀비에서 멈추기엔 워낙 두 작품의 인상이 강렬해서요. 근데 <피에르>는 스토리 자체가 좀 재수 없기는 했습니다. 하여튼 저는 이 책으로 멜빌은 졸업한 거 같긴 합니다. 워낙 작품 수가 별로 없어서 말입죠. ^^;;;

초란공 2022-09-13 09: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의 <사기꾼> 소개를 읽으니 얼른 읽어보고 싶어지는걸요. 뭔가 에이해브와 멜빌이 결합한 인물같은 느낌입니다 ㅋㅋ

Falstaff 2022-09-13 13:5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럴 수도 있.... 아닌데요, 에이해브하고는 많이 다른 듯합니다. ^^;;

mini74 2022-09-13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비딕 읽었다고 하면 제 주변엔 다들 스타벅이 어디쯤 나오는지만 궁금해하더군요. ㅎㅎㅎ 해양수산물도서에서 빵 터쳤습니다. ~

Falstaff 2022-09-13 13:51   좋아요 1 | URL
근데요, 모비딕 진짜 멋있지 않나요? 아후....
ㅋㅋㅋ 수산물 도서로 분류한 건 실화랍니다. 당시 독자들한테는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말입지요.

프레이야 2022-09-13 1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라질 연 오백 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ㅎㅎ
골드문트 님 역시나 위트 가득한 리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09-13 13:51   좋아요 2 | URL
재미있으셨다니 고맙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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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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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물론 전에도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영문학으로 연구하고, 이를 번역해 널리 알린 이는 인하대학 영문과 명예교수인 신재실 선생으로 알고 있다. 41년생인 신재실은 47년생인 줄리언 반스보다 나이를 5년 반 더 자셨어도 여태까지 반스를 읽어본 걸로 이야기하자면, 이후 어떠한 반스 번역자보다 독자가 읽기 편하게 우리말로 옮겼다. 다른 역자들이 삐질 것 같아 구태여 말을 보태는데, 지금 나는 신재실의 영어 실력이 다른 역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모른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만 영어를 우리말로 바꾼 우리말 문장이 제일 좋았다는 의미다. 이 말을 조금 확대하면, 다른 역자들의 번역서는 조금씩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은 크게 신재실-반스와 기타-반스로 구분하는, 좋다고 할 수 없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내 마음이고 취향이다. 시비하지 말라.


  파르시, 라고 일컫는 집단이 있다. 혹시 <천일야화>를 앙투안 갈랑 판이나 리처드 버턴 판이나를 불문하고 전편을 읽어보셨나? 그걸 읽어보면 유대인은 돈이라고 하면 한 순간에 눈이 홱 돌아버릴 정도의 수전노들이고, 배화교라면 온갖 추악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불한당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라딘과 요술램프>는 저 만주족 변발을 하고 다니는 중국 북쪽의 이슬람 지역이지만 <천일야화>의 주 무대는 페르시아다. 이슬람이 패권을 쥐고 있던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도들이 그렇게 멸시를 받고 있었으니 이들이 어떻게 그 땅에서 살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이들은 처음엔 한 명, 두 명, 나중엔 한 번에 수십, 수백명이 인도 땅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인도에 도착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사람들은 주로 뭄바이에서 모여 살기 시작했고, 이들의 인구가 많아지자 인도 원주민들은 이들을 페르시아에서 온 (배화교)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파르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자동차 생산업체 타타 사의 대표인 타타, 록 가수 프레디 머큐리, 지휘자 주빈 메타 등이 이 파르시들이다.

  이들이 모여 살던 뭄바이는 인도 최대의 경제 도시로 파르시들은 일찌감치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여 인도인과 비교해 부유한 살림을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이 바탕엔 유대인이나 한국인처럼 아이들의 교육에 몰빵하는 내력이 숨어 있었다. 19세기에 뭄바이 파르시 중에서 공부 잘하고 똘똘한 청년 샤푸르지 에들지Edalji라고 있었는데, 이 청년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을 하고 인도 현지의 영국인을 따라 영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영국에서 국교회 신부가 된 샤푸르지는 스코틀랜드 여성인 샬럿 콤슨 양과 결혼을 하고, 스탠퍼드셔의 그레이트웨얼리에서 26년간 교구 목사를 지내던 샬럿의 종조부인 콤슨 신부가 세상을 뜬 후, 영국 국교회의 세계화와 관용 등을 감안한 국교회의 배려로 콤슨 신부의 후임으로 그의 교구를 전부 물려받는다. 이 스탠퍼드셔주, 영국 중부의 탄광과 농업, 목축업을 업으로 하는 ‘완고한’ 19세기 시골 지역에 유색인 파르시 출신, 잉글랜드 시골 사람의 눈으로 보면 검둥이가, 비록 흑인노예의 해방은 벌써 이루어졌지만, 잉글랜드 국교회 목사로 부임해 일주일에 한 번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지는 국교회 중앙에서 한 번 숙고해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파르시 출신 신부와 스코틀랜드 토박이 샬럿 사이에 순서대로 아들 조지와 아들 호레이스, 딸 모드를 두었으나 이 세 아이들은 그레이트웨얼리 사람들의 눈에는 작은 체구를 한 유색인, “튀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가운데 맏아들 조지가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며, 놀랍게도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조지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총명했지만,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상상력을 충실하게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소설 장르의 주인공으로 치면 어울리지 않는 총명함이긴 하지만 남의 상상력이라도 충실히 따라할 수 있는 정도면, 쉬운 말로 해서 ‘될성부른 떡잎’ 수준은 된다. 그래 부모가 조금 기대를 했건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놓고 보니 거의 전과목이 낙제 수준이며, 광부 집안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 합류하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는데, 귀가하는 도중 바지에 똥을 싸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부모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글쎄, 무자식이 상팔자라니까. 그러다 조지가 근시인 것이 밝혀져 자리를 앞으로 옮기니 성적도 쑥쑥 올라가고, 여전히 아이들한테는 따돌림을 당하긴 해도 바지에 변을 실금하는 일 같은 건 단박에 뚝 끊어져 버렸다.

  이후 열두 살에 상급학교인 러질리 학교로 기차 통학을 하기 시작했고, 집안에서 하녀로 지내는 엘리자베스 포스터가 이달지 신부에게 조지가 자신을 성적으로 희롱했다고 거짓으로 고했다가 주의를 받고, 아버지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 모든 사람들에 관한 사악한 내용을 알리는 한편 부모에 관한 벽서를 쓴 것이 밝혀져 해고를 당하고 만다. 열여섯 살이 된 조지는 버밍엄의 메이슨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첫번째 시험에 합격해 수습변호사가 된다. 이제 5년 수습기간을 마치고 마지막 시험만 통과하면 사무변호사 면허를 받을 수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제관 현관 앞에 커다란 열쇠가 떨어져 있어 경찰에 넘겨주니 그걸 조지의 절도로 인식한 경찰의 업턴 경사한테 취조를 받게 된 일이었다. 조지와 관련이 없는 월솔의 학교에서 열쇠를 훔친 것이라는 혐의로. 이후 계속해서 새벽 잔디밭 한가운데 빈 우유통 속에 죽은 찌르레기가 든 채 발견되고, 다음날 조지 앞으로 “옛날처럼 벽에 낙서하는 놀이를 계속해볼까”라는 내용의 엽서가 도착하며, 연달아 부모에게 계속되는 악담 편지가 쇄도하지만 행여 조지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부모는 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연이어 백랍으로 만든 국자, 정원용 갈퀴에 꽂혀 있는 죽은 토끼, 현관 앞에 깨져 있는 달걀 세 개, 목 졸려 죽은 새, 심지어 사람의 분변 등을 발견한다.

  이어 몇 년 동안 이런 행위가 멈추는 듯하더니, 세월이 흘러 어느새 조지가 사무변호사 최종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고, 버밍엄 법률가협회로부터 동메달을 받은 후, 버밍엄의 뉴홀 스트리트 54번지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소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여전히 그레이트웨얼리의 집으로 통근을 하고 있었는데, 집 근처 목초지에서 탄광에서 쓰는 나귀의 복부가 내장이 쏟아지지 않을 절묘한 깊이로 절개된 채, 밤 사이 과다출혈로 쓰러진 채 발견되어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하필 전날 저녁때 일상적인 습관으로 동네를 산보한 적이 있는 조지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고, 수색영장 없는 가택 수색이 아버지의 허락 하에 진행이 되어, 축축한 조지의 겉옷에 묻은 포유류의 털과 혈흔 몇 점이 증거로 구속이 되고 만다. 이어 장면은 짧지 않은 법정 드라마를 거쳐 징역 7년형을 선고, 루이스 감옥과 포틀랜드 감옥에서 수형 생활 3년만에 조건부 가석방된다. 이 기간 동안 조지는 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개>를 읽고 도일 씨의 천재적인 추리능력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리고, 가석방 후 변호사 사무실에서 허접한 일을 하던 조지는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인 아서 코난 도일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무죄를 밝혀주기를 부탁한다. 때마침 삶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했던 아서는 런던의 호텔 로비에서 조지를 만난 순간, 본능적으로 조지의 무죄를 알게 된다. 무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 이 중요한 차이점이라니. 이렇게 해서 원래 제목 <아서와 조지>가 서로 연결이 된다.


  이미 영국에서 셜록 홈즈를 통해 전무후무한 인기를 구가하며, 놀라운 추리능력을 과시한 바 있는 아서 코난 도일 경. 세상에 나올 때부터 적극적인 성격과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체질의 아서는 당장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해 조지를 수사했던 경찰서의 서장과 담판을 짓는 등 눈부신 활약을 시작하는데, 독자는 몇 가지를 의심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줄리언 반스. 그러면 조지와 아서가 주장하는 길을 따라 곧바로 직진할 턱이 없다. ① 정말 스스로 주장하듯 조지가 진짜 무죄일까? ② 아서 코난 도일 경의 확신에 찬 무죄 확신은 절차와 공정, 그리고 이성에 입각한 생각일까? ③ 조지와 아서의 주장이 옳다면, 아서의 작품을 통해 숱하게 본 셜록 홈즈의 능력을 감안해볼 때 과연 진짜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힌트를 드리겠다. 아서 코난 도일이 탐정 셜록 홈즈에게 사건을 맡길 때는 언제나 결말을 미리 정하고 시작했지만, 조지의 일은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건을 접하게 된다는 것. 그게 뭐? 그건 직접 읽어보셔야지. 안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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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9-09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얄밉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던데…ㅠ
전 오래 전에 신간으로 나왔을 때 1권 겨우 읽고 포기했습니다.
호불호가 있다는 얘기가 있긴 했는데 영국문학 좋아하는 편이라
읽을 수 있으려니 했는데 못 읽겠더군요. 지금쯤 다시 읽으면…
새로 알았네요. 신재실 교수.

즐건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Falstaff 2022-09-09 13:30   좋아요 2 | URL
ㅎㅎㅎ 2권 읽으셔요. 2권 들어가면 더 재미납니다. ^^
반스 초기작이 아휴, 읽기 나름에 따라 무지 어렵기도 하더라고요. 근데 이건 후기작이라고 볼 수 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더군요. 즐기시기 바랍니다!
한가위, 맛난 음식 많이 드시고 살만 찌지 마세요. 전 벌써 6백 그램, 한 근 쪘습니다. 흑흑흑.....

coolcat329 2022-09-09 2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사고 싶었던 건데 잊고 있었어요. 원제는 아서와 조지였군요.
골드문트님 덕분에 신재실 번역가를 또 알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제가 모르는 줄리언 반스 책 많이 번역하셨네요. 이 책 재미나다는 말씀이시죠? ㅋ
골드문트님 즐거운 추석 되세요!

Falstaff 2022-09-09 22:12   좋아요 3 | URL
저는 그리 재미있게 읽지 않았습니다. ㅋㅋㅋ
<시대의 소음>이던가요? 쇼스타코비치의 한 시절에 관한 전기를 썼듯이, 이번엔 코난 도일과 이민가족의 아들인 조지 에들지의 전기라고 해도 괜찮은데요, 전 체질상 이런 전기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죠. 작가가 도서관에서 여러 자료를 오랜 시간 들여 탐구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쏟아서 가필을 하는 것이 그리 재미있지 않더라고요.
저하고 맞지 않다 뿐입니다. <...소음>을 재미나게 읽으신 분은 아주 좋게 읽으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coolcat329 2022-09-09 22:33   좋아요 2 | URL
아 알겠습니다. 일단 소음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09-10 08:06   좋아요 3 | URL
이 책을 읽으시면요, 다 읽고나서 제가 쓴 독후감을 한 번만 더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ㅋㅋㅋㅋ 제가 뭘 하나 숨겨놓았답니다. 그게 뭔지는 책 읽고 일 주일 이상 시간이 가면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9-10 09:54   좋아요 2 | URL
네~~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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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폭군 안젤로
빅토르 위고 지음, 곽광자 옮김 / 소명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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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가 극작가로도 당대를 휘어잡은 유명세를 떨쳤다는 건 알고 있어도 정작 그의 희곡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을 무슨 이유였을까? 그의 소설들, <레 미제라블>, <파리 노트르담>, <웃는 남자>, <93년>등이 너무 뛰어나 그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설에 비해 희곡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였을 수도 있고. 아마 그랬으리라. 얼핏 생각나는 위고의 유명 희곡 작품으로는 <에르나니>, <환락의 왕> 정도가 있다. 둘 다 우연하게도 베르디에 의하여 <에르나니>, <리골레토>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만들어져 더 친숙했을 터이기도 하다. 이번에 고른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는 그냥 쇼핑을 하다가 위고의 희곡이 눈에 띄어 별 생각 없이 사서 읽은 책인데, 정작 읽다가 보니 내용의 많은 부분이 아밀카레 폰키엘리가 작곡한 <라 지오콘다>와 상당히 유사해, 안토니노 보토 지휘의 EMI 음반에 포함되어 있는 대본집을 꺼내 확인해봤더니 오페라의 원작이 맞긴 하단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오페라 <메피스토펠레>의 작곡가이기도 한 대본가 아리고 보이토가 연극을 전제로 쓴 희곡을 오페라 대본으로 다시 만들면서 더욱 드라마틱하게, 베리즈모 오페라 답게, 상당한 부분에 수정을 가해 원작과 많이 다르게 각색했다.


  작품의 배경은 16세기 중엽 베네치아의 두번째 수도인 파도바. 14세기에 만들어져 베네치아 공국의 공포정치에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 십인 위원회의 밀정이 도시에서 암약했던 시절이다. 이들을 굳이 설명하자면 북한 보위부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악명이 얼마나 떠르르 했는지, 베네치아에 이어 공국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파도바의 시장일지언정 십인회 밀정들의 보고서에 이름이 올라갔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시장 본인이 항상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고 위고는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하여 시장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베네치아 정부에서 파도바를 통치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치가 하달되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달된 지시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독재자 또는 폭군 비슷한 악명을 갖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1549년 부근의 파도바에서 시장을 맡고 있는 안젤로 말리피에리는, 베네치아의 저수지 물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 지참금은 지참금대로 별도로 하고 매년 현금 10만 두카토를 벌어들일 수 있는 브라가디니 집안의 아름다운 아가씨 카타리나와 5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나, 결코 한 번도 아내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지라 넘치는 리비도는 좋은 말로 하면 배우, 좀 나쁜 말로 하자면 여자 광대패의 일원인 라 티스베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을 하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이 안젤로 시장은 불 같은 질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서 아내 카타리나가 외갓남자인 로돌포와 육체적으로는 순결하지만 정신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인 티스베의 숨겨놓은 애인이 있더라도 만일 눈에 걸렸다 하면 모두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6세기, 위고가 작품을 쓴 것이 1835년이니 여성주의나 인권의 시각으로 감상을 하면 좀 신경질 나는 부분이 당연히 있을 터.

  문학작품을 보면, 당연히 21세기 막장 드라마를 포함해도 그러한데, 질투가 심한 사람의 배우자한테는 우연히 애인이 있다. 그럼 이게 우연이냐 필연이냐, 이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하여간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불쌍한 파도바 시의 시장 안젤로 말리피에리 선생의 아내와 정부, 카타리나와 티스베 한테도 역시 애인이 있었으며, 안젤로 시장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여자 두 명의 애인이 로돌포, 단 한 명이었던 거다. 즉, 안젤로가 좀 더 똑똑해서 아내와 애인 공동의 적수인 로돌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수만 있었다면 이런 19세기적 낭만주의 작품은 햇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 극작가는 뭘 먹고 사는가. 안젤로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자기의 연적이 한 명인지, 연적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막이 내려간다. 폰키엘리 오페라에서 안젤로 시장의 역할을 맡은 알비세 공작은 아주 작은 배역, 아내의 바람기를 눈치채고 어서 사약을 들라, 명령만 한 채 무도회에 참석하러 가는 걸로 끝을 내지만, 위고의 작품에서는 아내 카탈리나에게 연인 로돌포가 있는 것도 모자라, 카탈리나를 연모하다가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여겨 이를 앙갚음해주겠다는 일념하에 작품을 드라마로 끌고 가는 십인 위원회의 밀정 오모데이도 등장한다. 즉, 오모데이의 협잡에 의하여 아내 카탈리나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긴 안젤로 시장이 도끼로 아내의 목을 치려다가(서양에선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 주로 귀족들에게 사용했고, 평민과 천민들은 주로 교수형에 처했다), 티스베가 계략을 내 절두형 대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독약을 먹여 죽이자고 꼬이고는 독약 대신 열두 시간 동안 죽은 것처럼 모든 신진대사를 멈추게 하는 비약을 먹이는 것으로 만들었다.

  라 티스베에게는 함께 비첸차에서 구걸해 밥을 빌어먹는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무 뜻도 모르면서 노래를 불렀고, 가사의 내용이 베네치아 정부를 모욕하는 것이라 지나는 길에 노래를 듣고 열을 받은 비첸차 시장이 즉각 저 거지 여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시장의 어린 딸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팍, 꿇고나서 하는 말이, 저 여인이 가여우니 목숨을 살려주십사. 아버지는 딸의 고운 심성이 갸륵해 거지 여인을 살려주었고, 여인은 그게 너무나도 고마워 구리로 만든 십자가를 어린 아가씨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이후 십 수 년이 흘러 티스베는 배우가 되어 파도바로 흘러들어 왔으며, 어린 아가씨 역시 파도바 최고의 권력자인 시장의 아내가 되어, 이제 둘이 로돌포라고 하는, 2백년 전에 파도바의 지배자였던 가문의 장손을, 파리 다락방에 사는 미미의 애인은 아니지만 하여간 잘 생기기만 한 연인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누가? 티스베가. 사실 로돌포 입장에선 티스베가 나중에 자기 입으로 얘기했듯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손이 가요, 손이 가, 자꾸 손이 가는, 새우깡 비슷한 용도로 티스베와 접촉을 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죽음까지 담보할 수 있는 사랑을 한 대상은 시장의 부인인 카탈리나였던 것.

  이러니 티스베 입장에서 카탈리나를 어떻게 하고 싶겠어? 기회만 되면 콱 죽여버리고 싶었겠지. 그러나 아직은 카탈리나가 저 오래 전에 자기 엄마의 목숨을 살려준 마음씨 고운 어린 아가씨였던 걸 모르고 있는 상태. 그러다가 십인 위원회의 밀정 오모데이가 그럴 듯한 상을 차려주어 이제 카탈리나의 목숨을 단칼에 보내버릴 수 있는 찬스가 온 순간, 시장부인의 처소에 걸린 저 먼 옛 시절의 구리 십자가를 보게 되어 지긋지긋한 팔자 타령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데, 이후는 생략.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에서는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악당 바르바나가 눈썹을 휘날리며 지오콘다의 눈 먼 어머니를 지하 수로에 빠뜨려 죽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지오콘다를 한 번 자빠뜨려보려고 온갖 악행을 다 하지만, 위고의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에서 바르바나 역을 하는 오모데이는 오직 카탈리나를 향한 복수에 눈이 멀어 2막에서 그냥 싱겁게 로돌포와 대결을 하다가 맥없이 죽어 자빠진다. 그리하여 드라마틱한 만족감을 누리는 측면에서는 당대의 오페라 대본가였던 아리고 보이토가 쓴 <라 지오콘다>가 더 멋있다.


독약은 이렇게 쓰는 것!  아밀카레 폰키엘리, <라 지오콘다> 3막,지오콘다의 아리아 "자살!"
안토니노 보토 지휘,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최고 전성기 1952년의 마리아 칼라스. (1952년 녹음. 저작권 소멸. 마음껏 즐기시라!)


  다른 예로 티스베가 가지고 있던 몰약은 열두 시간 동안 신진대사를 멈추게 하는 약하고, 진짜 독약하고 두 가지였다. 위고는 진짜 독약을 써보지도 않는데, 이건 반칙이다. 이 법칙은 20세기 들어와, 작품에 일단 총이 등장하면 한 번은 방아쇠가 당겨져야 한다,로 바뀌는데, 강력한 독약임을 자랑했음에도 어째 그건 소리소문 없이 그냥 사라지느냐 말이지. 이 독약의 처리에서도 폰키엘리가 더 강력하다. 그래 이래저래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도 한 번 감상해보시면 훨씬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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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9-06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이 가요. 손이 가. 🤣
친절하신 골드문트님! 음악 좋네요.
위고가 희곡도 썼군요. 위고는 여러모로 당대 능력자 같습니다.

Falstaff 2022-09-06 14:02   좋아요 1 | URL
새우깡도 좋지만, 음악 좋지요!
이 판이 칼라스 본인이 꼽은 자신의 최고 명반입니다!
후대에 칼라스가 어떤 소프라노였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 판을 들어보라 권하라고 했습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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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 대산세계문학총서 176
허먼 멜빌 지음, 손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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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과 대표작 <모비딕>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사기꾼>이 나왔으니 어찌 일독을 미룰 수 있었겠는가. 165년 전에 출간한 소설. 그러나 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면 나처럼 쌍코피 줄줄 흘릴 듯. 이런 포스트 모던도 있었던 거야? 코피 때문에 별점 하나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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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4 14: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포스트 모던, 쌍코피!! 왠지 연상이 확 그려지는.... 난해할 듯합니다. ^^

Falstaff 2022-09-04 15:06   좋아요 4 | URL
ㅎㅎㅎ 게다가 광막한 광야도 몇 번 펼쳐집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

그레이스 2022-09-04 2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미술은 어차피 해석할 필요 없지만 텍스트는 ...!
포기를 부르는 포스트 모던!

Falstaff 2022-09-04 21:32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이이는 아예 마음 먹고 대중들하고 친하게 지내길 포기한 사람 같더라니까요 글쎄!

다락방 2022-09-04 2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쌍코피... 라뇨. 읽고싶어요, 체크합니다. 쌍코피라뇨.

Falstaff 2022-09-04 21:33   좋아요 2 | URL
분명히 저는 쉽지 않다고, 바람돌이 님 댓글을 통해서는 게다가 광막한 광야도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즉, 책임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2-09-04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요?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리에 솔깃!

Falstaff 2022-09-05 06:41   좋아요 3 | URL
글쎄 정말이라니까요!
<피에르, 또는 모호함>도 염병할 번역이 문제지, 그것부터 포스트 모던이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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