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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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인물은, 물론 전에도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영문학으로 연구하고, 이를 번역해 널리 알린 이는 인하대학 영문과 명예교수인 신재실 선생으로 알고 있다. 41년생인 신재실은 47년생인 줄리언 반스보다 나이를 5년 반 더 자셨어도 여태까지 반스를 읽어본 걸로 이야기하자면, 이후 어떠한 반스 번역자보다 독자가 읽기 편하게 우리말로 옮겼다. 다른 역자들이 삐질 것 같아 구태여 말을 보태는데, 지금 나는 신재실의 영어 실력이 다른 역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모른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만 영어를 우리말로 바꾼 우리말 문장이 제일 좋았다는 의미다. 이 말을 조금 확대하면, 다른 역자들의 번역서는 조금씩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은 크게 신재실-반스와 기타-반스로 구분하는, 좋다고 할 수 없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내 마음이고 취향이다. 시비하지 말라.


  파르시, 라고 일컫는 집단이 있다. 혹시 <천일야화>를 앙투안 갈랑 판이나 리처드 버턴 판이나를 불문하고 전편을 읽어보셨나? 그걸 읽어보면 유대인은 돈이라고 하면 한 순간에 눈이 홱 돌아버릴 정도의 수전노들이고, 배화교라면 온갖 추악하고 야만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불한당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라딘과 요술램프>는 저 만주족 변발을 하고 다니는 중국 북쪽의 이슬람 지역이지만 <천일야화>의 주 무대는 페르시아다. 이슬람이 패권을 쥐고 있던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도들이 그렇게 멸시를 받고 있었으니 이들이 어떻게 그 땅에서 살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이들은 처음엔 한 명, 두 명, 나중엔 한 번에 수십, 수백명이 인도 땅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인도에 도착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사람들은 주로 뭄바이에서 모여 살기 시작했고, 이들의 인구가 많아지자 인도 원주민들은 이들을 페르시아에서 온 (배화교)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파르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자동차 생산업체 타타 사의 대표인 타타, 록 가수 프레디 머큐리, 지휘자 주빈 메타 등이 이 파르시들이다.

  이들이 모여 살던 뭄바이는 인도 최대의 경제 도시로 파르시들은 일찌감치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여 인도인과 비교해 부유한 살림을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이 바탕엔 유대인이나 한국인처럼 아이들의 교육에 몰빵하는 내력이 숨어 있었다. 19세기에 뭄바이 파르시 중에서 공부 잘하고 똘똘한 청년 샤푸르지 에들지Edalji라고 있었는데, 이 청년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을 하고 인도 현지의 영국인을 따라 영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영국에서 국교회 신부가 된 샤푸르지는 스코틀랜드 여성인 샬럿 콤슨 양과 결혼을 하고, 스탠퍼드셔의 그레이트웨얼리에서 26년간 교구 목사를 지내던 샬럿의 종조부인 콤슨 신부가 세상을 뜬 후, 영국 국교회의 세계화와 관용 등을 감안한 국교회의 배려로 콤슨 신부의 후임으로 그의 교구를 전부 물려받는다. 이 스탠퍼드셔주, 영국 중부의 탄광과 농업, 목축업을 업으로 하는 ‘완고한’ 19세기 시골 지역에 유색인 파르시 출신, 잉글랜드 시골 사람의 눈으로 보면 검둥이가, 비록 흑인노예의 해방은 벌써 이루어졌지만, 잉글랜드 국교회 목사로 부임해 일주일에 한 번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지는 국교회 중앙에서 한 번 숙고해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파르시 출신 신부와 스코틀랜드 토박이 샬럿 사이에 순서대로 아들 조지와 아들 호레이스, 딸 모드를 두었으나 이 세 아이들은 그레이트웨얼리 사람들의 눈에는 작은 체구를 한 유색인, “튀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가운데 맏아들 조지가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며, 놀랍게도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조지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총명했지만,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상상력을 충실하게 따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소설 장르의 주인공으로 치면 어울리지 않는 총명함이긴 하지만 남의 상상력이라도 충실히 따라할 수 있는 정도면, 쉬운 말로 해서 ‘될성부른 떡잎’ 수준은 된다. 그래 부모가 조금 기대를 했건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해놓고 보니 거의 전과목이 낙제 수준이며, 광부 집안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 합류하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는데, 귀가하는 도중 바지에 똥을 싸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부모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글쎄, 무자식이 상팔자라니까. 그러다 조지가 근시인 것이 밝혀져 자리를 앞으로 옮기니 성적도 쑥쑥 올라가고, 여전히 아이들한테는 따돌림을 당하긴 해도 바지에 변을 실금하는 일 같은 건 단박에 뚝 끊어져 버렸다.

  이후 열두 살에 상급학교인 러질리 학교로 기차 통학을 하기 시작했고, 집안에서 하녀로 지내는 엘리자베스 포스터가 이달지 신부에게 조지가 자신을 성적으로 희롱했다고 거짓으로 고했다가 주의를 받고, 아버지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 모든 사람들에 관한 사악한 내용을 알리는 한편 부모에 관한 벽서를 쓴 것이 밝혀져 해고를 당하고 만다. 열여섯 살이 된 조지는 버밍엄의 메이슨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첫번째 시험에 합격해 수습변호사가 된다. 이제 5년 수습기간을 마치고 마지막 시험만 통과하면 사무변호사 면허를 받을 수 있는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제관 현관 앞에 커다란 열쇠가 떨어져 있어 경찰에 넘겨주니 그걸 조지의 절도로 인식한 경찰의 업턴 경사한테 취조를 받게 된 일이었다. 조지와 관련이 없는 월솔의 학교에서 열쇠를 훔친 것이라는 혐의로. 이후 계속해서 새벽 잔디밭 한가운데 빈 우유통 속에 죽은 찌르레기가 든 채 발견되고, 다음날 조지 앞으로 “옛날처럼 벽에 낙서하는 놀이를 계속해볼까”라는 내용의 엽서가 도착하며, 연달아 부모에게 계속되는 악담 편지가 쇄도하지만 행여 조지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부모는 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연이어 백랍으로 만든 국자, 정원용 갈퀴에 꽂혀 있는 죽은 토끼, 현관 앞에 깨져 있는 달걀 세 개, 목 졸려 죽은 새, 심지어 사람의 분변 등을 발견한다.

  이어 몇 년 동안 이런 행위가 멈추는 듯하더니, 세월이 흘러 어느새 조지가 사무변호사 최종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고, 버밍엄 법률가협회로부터 동메달을 받은 후, 버밍엄의 뉴홀 스트리트 54번지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소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여전히 그레이트웨얼리의 집으로 통근을 하고 있었는데, 집 근처 목초지에서 탄광에서 쓰는 나귀의 복부가 내장이 쏟아지지 않을 절묘한 깊이로 절개된 채, 밤 사이 과다출혈로 쓰러진 채 발견되어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하필 전날 저녁때 일상적인 습관으로 동네를 산보한 적이 있는 조지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고, 수색영장 없는 가택 수색이 아버지의 허락 하에 진행이 되어, 축축한 조지의 겉옷에 묻은 포유류의 털과 혈흔 몇 점이 증거로 구속이 되고 만다. 이어 장면은 짧지 않은 법정 드라마를 거쳐 징역 7년형을 선고, 루이스 감옥과 포틀랜드 감옥에서 수형 생활 3년만에 조건부 가석방된다. 이 기간 동안 조지는 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개>를 읽고 도일 씨의 천재적인 추리능력을 눈여겨 보게 된다. 그리고, 가석방 후 변호사 사무실에서 허접한 일을 하던 조지는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인 아서 코난 도일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무죄를 밝혀주기를 부탁한다. 때마침 삶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했던 아서는 런던의 호텔 로비에서 조지를 만난 순간, 본능적으로 조지의 무죄를 알게 된다. 무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 이 중요한 차이점이라니. 이렇게 해서 원래 제목 <아서와 조지>가 서로 연결이 된다.


  이미 영국에서 셜록 홈즈를 통해 전무후무한 인기를 구가하며, 놀라운 추리능력을 과시한 바 있는 아서 코난 도일 경. 세상에 나올 때부터 적극적인 성격과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체질의 아서는 당장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해 조지를 수사했던 경찰서의 서장과 담판을 짓는 등 눈부신 활약을 시작하는데, 독자는 몇 가지를 의심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줄리언 반스. 그러면 조지와 아서가 주장하는 길을 따라 곧바로 직진할 턱이 없다. ① 정말 스스로 주장하듯 조지가 진짜 무죄일까? ② 아서 코난 도일 경의 확신에 찬 무죄 확신은 절차와 공정, 그리고 이성에 입각한 생각일까? ③ 조지와 아서의 주장이 옳다면, 아서의 작품을 통해 숱하게 본 셜록 홈즈의 능력을 감안해볼 때 과연 진짜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힌트를 드리겠다. 아서 코난 도일이 탐정 셜록 홈즈에게 사건을 맡길 때는 언제나 결말을 미리 정하고 시작했지만, 조지의 일은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건을 접하게 된다는 것. 그게 뭐? 그건 직접 읽어보셔야지. 안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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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9-09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얄밉습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던데…ㅠ
전 오래 전에 신간으로 나왔을 때 1권 겨우 읽고 포기했습니다.
호불호가 있다는 얘기가 있긴 했는데 영국문학 좋아하는 편이라
읽을 수 있으려니 했는데 못 읽겠더군요. 지금쯤 다시 읽으면…
새로 알았네요. 신재실 교수.

즐건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Falstaff 2022-09-09 13:30   좋아요 2 | URL
ㅎㅎㅎ 2권 읽으셔요. 2권 들어가면 더 재미납니다. ^^
반스 초기작이 아휴, 읽기 나름에 따라 무지 어렵기도 하더라고요. 근데 이건 후기작이라고 볼 수 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더군요. 즐기시기 바랍니다!
한가위, 맛난 음식 많이 드시고 살만 찌지 마세요. 전 벌써 6백 그램, 한 근 쪘습니다. 흑흑흑.....

coolcat329 2022-09-09 2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사고 싶었던 건데 잊고 있었어요. 원제는 아서와 조지였군요.
골드문트님 덕분에 신재실 번역가를 또 알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제가 모르는 줄리언 반스 책 많이 번역하셨네요. 이 책 재미나다는 말씀이시죠? ㅋ
골드문트님 즐거운 추석 되세요!

Falstaff 2022-09-09 22:12   좋아요 3 | URL
저는 그리 재미있게 읽지 않았습니다. ㅋㅋㅋ
<시대의 소음>이던가요? 쇼스타코비치의 한 시절에 관한 전기를 썼듯이, 이번엔 코난 도일과 이민가족의 아들인 조지 에들지의 전기라고 해도 괜찮은데요, 전 체질상 이런 전기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죠. 작가가 도서관에서 여러 자료를 오랜 시간 들여 탐구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쏟아서 가필을 하는 것이 그리 재미있지 않더라고요.
저하고 맞지 않다 뿐입니다. <...소음>을 재미나게 읽으신 분은 아주 좋게 읽으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coolcat329 2022-09-09 22:33   좋아요 2 | URL
아 알겠습니다. 일단 소음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09-10 08:06   좋아요 3 | URL
이 책을 읽으시면요, 다 읽고나서 제가 쓴 독후감을 한 번만 더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ㅋㅋㅋㅋ 제가 뭘 하나 숨겨놓았답니다. 그게 뭔지는 책 읽고 일 주일 이상 시간이 가면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9-10 09:54   좋아요 2 | URL
네~~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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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폭군 안젤로
빅토르 위고 지음, 곽광자 옮김 / 소명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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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가 극작가로도 당대를 휘어잡은 유명세를 떨쳤다는 건 알고 있어도 정작 그의 희곡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을 무슨 이유였을까? 그의 소설들, <레 미제라블>, <파리 노트르담>, <웃는 남자>, <93년>등이 너무 뛰어나 그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설에 비해 희곡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였을 수도 있고. 아마 그랬으리라. 얼핏 생각나는 위고의 유명 희곡 작품으로는 <에르나니>, <환락의 왕> 정도가 있다. 둘 다 우연하게도 베르디에 의하여 <에르나니>, <리골레토>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만들어져 더 친숙했을 터이기도 하다. 이번에 고른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는 그냥 쇼핑을 하다가 위고의 희곡이 눈에 띄어 별 생각 없이 사서 읽은 책인데, 정작 읽다가 보니 내용의 많은 부분이 아밀카레 폰키엘리가 작곡한 <라 지오콘다>와 상당히 유사해, 안토니노 보토 지휘의 EMI 음반에 포함되어 있는 대본집을 꺼내 확인해봤더니 오페라의 원작이 맞긴 하단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오페라 <메피스토펠레>의 작곡가이기도 한 대본가 아리고 보이토가 연극을 전제로 쓴 희곡을 오페라 대본으로 다시 만들면서 더욱 드라마틱하게, 베리즈모 오페라 답게, 상당한 부분에 수정을 가해 원작과 많이 다르게 각색했다.


  작품의 배경은 16세기 중엽 베네치아의 두번째 수도인 파도바. 14세기에 만들어져 베네치아 공국의 공포정치에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 십인 위원회의 밀정이 도시에서 암약했던 시절이다. 이들을 굳이 설명하자면 북한 보위부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악명이 얼마나 떠르르 했는지, 베네치아에 이어 공국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파도바의 시장일지언정 십인회 밀정들의 보고서에 이름이 올라갔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시장 본인이 항상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고 위고는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하여 시장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베네치아 정부에서 파도바를 통치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치가 하달되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달된 지시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독재자 또는 폭군 비슷한 악명을 갖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1549년 부근의 파도바에서 시장을 맡고 있는 안젤로 말리피에리는, 베네치아의 저수지 물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 지참금은 지참금대로 별도로 하고 매년 현금 10만 두카토를 벌어들일 수 있는 브라가디니 집안의 아름다운 아가씨 카타리나와 5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나, 결코 한 번도 아내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지라 넘치는 리비도는 좋은 말로 하면 배우, 좀 나쁜 말로 하자면 여자 광대패의 일원인 라 티스베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을 하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이 안젤로 시장은 불 같은 질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서 아내 카타리나가 외갓남자인 로돌포와 육체적으로는 순결하지만 정신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인 티스베의 숨겨놓은 애인이 있더라도 만일 눈에 걸렸다 하면 모두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6세기, 위고가 작품을 쓴 것이 1835년이니 여성주의나 인권의 시각으로 감상을 하면 좀 신경질 나는 부분이 당연히 있을 터.

  문학작품을 보면, 당연히 21세기 막장 드라마를 포함해도 그러한데, 질투가 심한 사람의 배우자한테는 우연히 애인이 있다. 그럼 이게 우연이냐 필연이냐, 이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하여간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불쌍한 파도바 시의 시장 안젤로 말리피에리 선생의 아내와 정부, 카타리나와 티스베 한테도 역시 애인이 있었으며, 안젤로 시장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여자 두 명의 애인이 로돌포, 단 한 명이었던 거다. 즉, 안젤로가 좀 더 똑똑해서 아내와 애인 공동의 적수인 로돌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수만 있었다면 이런 19세기적 낭만주의 작품은 햇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 극작가는 뭘 먹고 사는가. 안젤로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자기의 연적이 한 명인지, 연적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막이 내려간다. 폰키엘리 오페라에서 안젤로 시장의 역할을 맡은 알비세 공작은 아주 작은 배역, 아내의 바람기를 눈치채고 어서 사약을 들라, 명령만 한 채 무도회에 참석하러 가는 걸로 끝을 내지만, 위고의 작품에서는 아내 카탈리나에게 연인 로돌포가 있는 것도 모자라, 카탈리나를 연모하다가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여겨 이를 앙갚음해주겠다는 일념하에 작품을 드라마로 끌고 가는 십인 위원회의 밀정 오모데이도 등장한다. 즉, 오모데이의 협잡에 의하여 아내 카탈리나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긴 안젤로 시장이 도끼로 아내의 목을 치려다가(서양에선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 주로 귀족들에게 사용했고, 평민과 천민들은 주로 교수형에 처했다), 티스베가 계략을 내 절두형 대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독약을 먹여 죽이자고 꼬이고는 독약 대신 열두 시간 동안 죽은 것처럼 모든 신진대사를 멈추게 하는 비약을 먹이는 것으로 만들었다.

  라 티스베에게는 함께 비첸차에서 구걸해 밥을 빌어먹는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무 뜻도 모르면서 노래를 불렀고, 가사의 내용이 베네치아 정부를 모욕하는 것이라 지나는 길에 노래를 듣고 열을 받은 비첸차 시장이 즉각 저 거지 여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시장의 어린 딸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팍, 꿇고나서 하는 말이, 저 여인이 가여우니 목숨을 살려주십사. 아버지는 딸의 고운 심성이 갸륵해 거지 여인을 살려주었고, 여인은 그게 너무나도 고마워 구리로 만든 십자가를 어린 아가씨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이후 십 수 년이 흘러 티스베는 배우가 되어 파도바로 흘러들어 왔으며, 어린 아가씨 역시 파도바 최고의 권력자인 시장의 아내가 되어, 이제 둘이 로돌포라고 하는, 2백년 전에 파도바의 지배자였던 가문의 장손을, 파리 다락방에 사는 미미의 애인은 아니지만 하여간 잘 생기기만 한 연인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누가? 티스베가. 사실 로돌포 입장에선 티스베가 나중에 자기 입으로 얘기했듯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손이 가요, 손이 가, 자꾸 손이 가는, 새우깡 비슷한 용도로 티스베와 접촉을 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죽음까지 담보할 수 있는 사랑을 한 대상은 시장의 부인인 카탈리나였던 것.

  이러니 티스베 입장에서 카탈리나를 어떻게 하고 싶겠어? 기회만 되면 콱 죽여버리고 싶었겠지. 그러나 아직은 카탈리나가 저 오래 전에 자기 엄마의 목숨을 살려준 마음씨 고운 어린 아가씨였던 걸 모르고 있는 상태. 그러다가 십인 위원회의 밀정 오모데이가 그럴 듯한 상을 차려주어 이제 카탈리나의 목숨을 단칼에 보내버릴 수 있는 찬스가 온 순간, 시장부인의 처소에 걸린 저 먼 옛 시절의 구리 십자가를 보게 되어 지긋지긋한 팔자 타령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데, 이후는 생략.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에서는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악당 바르바나가 눈썹을 휘날리며 지오콘다의 눈 먼 어머니를 지하 수로에 빠뜨려 죽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지오콘다를 한 번 자빠뜨려보려고 온갖 악행을 다 하지만, 위고의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에서 바르바나 역을 하는 오모데이는 오직 카탈리나를 향한 복수에 눈이 멀어 2막에서 그냥 싱겁게 로돌포와 대결을 하다가 맥없이 죽어 자빠진다. 그리하여 드라마틱한 만족감을 누리는 측면에서는 당대의 오페라 대본가였던 아리고 보이토가 쓴 <라 지오콘다>가 더 멋있다.


독약은 이렇게 쓰는 것!  아밀카레 폰키엘리, <라 지오콘다> 3막,지오콘다의 아리아 "자살!"
안토니노 보토 지휘,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최고 전성기 1952년의 마리아 칼라스. (1952년 녹음. 저작권 소멸. 마음껏 즐기시라!)


  다른 예로 티스베가 가지고 있던 몰약은 열두 시간 동안 신진대사를 멈추게 하는 약하고, 진짜 독약하고 두 가지였다. 위고는 진짜 독약을 써보지도 않는데, 이건 반칙이다. 이 법칙은 20세기 들어와, 작품에 일단 총이 등장하면 한 번은 방아쇠가 당겨져야 한다,로 바뀌는데, 강력한 독약임을 자랑했음에도 어째 그건 소리소문 없이 그냥 사라지느냐 말이지. 이 독약의 처리에서도 폰키엘리가 더 강력하다. 그래 이래저래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도 한 번 감상해보시면 훨씬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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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9-06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이 가요. 손이 가. 🤣
친절하신 골드문트님! 음악 좋네요.
위고가 희곡도 썼군요. 위고는 여러모로 당대 능력자 같습니다.

Falstaff 2022-09-06 14:02   좋아요 1 | URL
새우깡도 좋지만, 음악 좋지요!
이 판이 칼라스 본인이 꼽은 자신의 최고 명반입니다!
후대에 칼라스가 어떤 소프라노였냐고 누가 묻는다면 이 판을 들어보라 권하라고 했습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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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 그의 변장 놀이 대산세계문학총서 176
허먼 멜빌 지음, 손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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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과 대표작 <모비딕>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사기꾼>이 나왔으니 어찌 일독을 미룰 수 있었겠는가. 165년 전에 출간한 소설. 그러나 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면 나처럼 쌍코피 줄줄 흘릴 듯. 이런 포스트 모던도 있었던 거야? 코피 때문에 별점 하나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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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4 14: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포스트 모던, 쌍코피!! 왠지 연상이 확 그려지는.... 난해할 듯합니다. ^^

Falstaff 2022-09-04 15:06   좋아요 4 | URL
ㅎㅎㅎ 게다가 광막한 광야도 몇 번 펼쳐집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

그레이스 2022-09-04 2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미술은 어차피 해석할 필요 없지만 텍스트는 ...!
포기를 부르는 포스트 모던!

Falstaff 2022-09-04 21:32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이이는 아예 마음 먹고 대중들하고 친하게 지내길 포기한 사람 같더라니까요 글쎄!

다락방 2022-09-04 2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쌍코피... 라뇨. 읽고싶어요, 체크합니다. 쌍코피라뇨.

Falstaff 2022-09-04 21:33   좋아요 2 | URL
분명히 저는 쉽지 않다고, 바람돌이 님 댓글을 통해서는 게다가 광막한 광야도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즉, 책임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2-09-04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요?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리에 솔깃!

Falstaff 2022-09-05 06:41   좋아요 3 | URL
글쎄 정말이라니까요!
<피에르, 또는 모호함>도 염병할 번역이 문제지, 그것부터 포스트 모던이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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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즈워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0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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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년에 미네소타의 작은 도시에서 출생한 싱클레어 루이스는 스물아홉 살이 되던 1914년에 <우리의 미스터 렌 – 어느 신사의 낭만적 모험>(레인보우퍼블릭스, 2019)을 발표하면서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린다. <우리의 미스터 렌>의 주인공 윌리엄 렌 씨는 월급 19달러를 받는 내근직 영업관리 사원으로, 증기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일주한다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박봉을 쪼개 정기적금을 붓고 있지만, 상사가 어이, 빌, 이라 부르기만 하면 3초 이내로 그의 책상 앞으로 달려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여차여차 해서 정말로 증기선을 탄다. 만약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망상을 지닌 영국인들을 위해 그들의 정찬 테이블에 오를 운명이지만 엄연히 살아 있는 소를 항해 중에 배 안에서 돌보는 임무를 띄고 영국행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시작한 작품.

  윌리엄 렌 씨 이야기가 나오고 15년이 흐른 1929년, 싱클레어 루이스는 이른바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대표작품 <배빗>을 내고 연달아 <에로스미스>와 <엘머 갠트리>를 출간한 여세를 몰아 <도즈워스>까지 발표하여 이듬해인 1930년에 미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마흔다섯. 루이스는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이걸로 나는 끝이야. 이 상에 부응해서 살 수가 없어.” 역자 후기에 나오는 얘기다. 그만큼 루이스에겐 노벨상의 부담이 엄청났던 거고, 이후, 꼭 노벨상의 저주 때문에 그랬겠는가만, 두 번의 결혼생활이 비극으로 끝나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게 됐으며, 그저 그런 작품들만 쓰다가 1951년에 로마에서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후기 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있을 수 없는 일이야>(현대지성, 2018)는 지난 세기 중후반에 히트했던 미국 드라마 <V>의 원작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파충류 외계인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대신 파시즘화 되어버린 미국에서 반 정부운동이 벌어지는 광경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싱클레어 루이스는 <우리의 미스터 렌>부터 시작해서 <배빗>(열린책들, 2011)을 거쳐 이번에 읽은 <도즈워스>처럼 그렇게 크지 않은 이야기에 강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같은 본격적 가상 정치소설은 아무래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도즈워스>의 주인공 새뮤얼 도즈워스는 작가 루이스보다 딱 열 살이 많은 1875년생이다. 데뷔작의 주인공 빌 렌 씨와는 다르게 크고 당당한 체구에 갈색 콧수염을 기른 큰 머리의 사나이였다. 예일 대학의 1896년 졸업생으며 당시엔 실력 있는 풋볼 선수로 특히 하버드와의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낸 스타였단다. 무대는 가상의 제니스 시인데 매사추세츠와 함께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도시. 문명의 전성기인 1903년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새무얼, 샘 도즈워스는 학창시절의 룸 메이트이며 훗날 제니스 시의 유력한 은행 회장이 될 토머스 J. 피어슨 등과 함께 파티에 참석을 하는데, 현대 과학의 총아이지만 전통적인 마차에 밀려 3년 안에 사라질 유행 장난감인 자동차를 타고 마치 권력을 쥔 느낌을 향유하면서 우주를 지배하는 기분으로 무려 시속 32 킬로미터로 질주해 도착했다. 샘은 20년이 지나 1924년이 되면 자동차가 마차만큼 흔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의 우상인 리처드 하딩 데이비스가 회장으로 있는 레벌레이션 자동차회사로 이직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때 파티장에 나타난 열아홉 살의 귀엽고 아름다운 프랜시스 볼커. 유럽에 오래 체류하며 이것저것 공부한 덕에 온갖 외국어를 섭렵하고 있는 아가씨로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허먼 볼커의 외동딸이다. 허먼 볼커로 말하자면 제니스에서 가장 큰 집에서 살며, 시의 자금조달과 상품판매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계 이민자의 대표격이었다. 샘은 프랜시스, 프랜을 차에 태워 시속 32 킬로미터의 놀라운 속도로 자동차를 몰아 이날 자정에 호숫가에 앉아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고, 그해 11월에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한다. 열아홉, 혹은 스무 살이 된 프랜은 당혹해 한다.


  “오, 샘. 하지만 난 너무 욕심이 많아! 제니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갖고 싶어!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어 예쁘장한 모습으로 카드놀이나 하고 싶진 않아! 난 찬란한 걸 원해! 거대한 지평선들! 우리 함꼐 그런 걸 찾을 수 있을까?”


  샘은, 당근이지, 대답을 하고, 그해 안에 결혼해버리고 만다.

  이후 정말로 샘은 레벌레이션 자동차회사에 입사해 자동차에 특별한 비전을 갖고 있는 터라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마차 비슷하게 생긴 지금까지 자동차의 모양을 기다란 직선, 즉 유선형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 그러나 당시 사고방식에 의하면 ‘헛소리’를 발의하게 된다. 게다가 극히 일부 부르주아 계급만 마치 특권처럼 가질 수 있는 자동차마저 최대로 싼 가격으로 많은 고객에게 파는 것이 최대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하니 이런 창의적 도라이를 좋은 시각으로 봐줄 회사는 당시 미국에서도 없었다.

  여차하면 잘릴 위기를 맞은 샘. 샘은 한숨 돌리면서 이 시간 동안 재무기술을 배우는 데 사용하며, 장인인 허먼 볼커의 재산을 활용해 레벌레이션 자동차회사 주식의 23 퍼센트를 확보해 부사장 겸 생산관리자, 요새말로 COO 자리에 올라, 최초로 문 네 개 모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제품이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켜 이후 20년간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는 바람에 샘은 너무도 바쁜 생활을 하느라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 새 쉰 살이 됐고, 돈 계산과 자동차 생산과, 기술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 개발과, 주식 동향과 골프 핸디캡에 신경쓰느라 환갑이 넘은 외모를 갖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1925년. 어느새 프랜도 마흔한 살. 프랜은 그동안 취미생활과 피부관리와 쇼핑에 힘써 얼핏 보기엔 서른한 살 또는 이십대 후반의 외모를 지니게 됐다.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은 생기는 법이라서 스무 살 난 딸 에밀리는 열네 살 연상으로 1차 세계대전에 대위로 참전한 전직 테니스 선수, 현직 밴더링 볼트와 너트 사(社)의 부지배인 해리 매키와 결혼 날짜를 잡았고, 아들 브렌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예일대 3학년에 재학중이다.

  샘 도즈워스는 이제 흠잡을 데 없는 미국의 실업가로 공화당원이며, 높은 관세와 금주법, 미국 성공회를 지지하는 레벌레이션 사의 회장 자리에 앉은 백만장자다. 저택은 가장 세련된 지역인 리지크레스트에 있으며 아내 프랜에게 비아냥을 받기는 하지만 동판화에 안목이 있고, 가끔 베토벤을 들으러 음악회 나들이를 하기도 하고, 인상적인 연설을 할 줄도 안다. 반면에 이제는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거나 비극적으로 패배하거나, 열대 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흘러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유닛 자동차 회사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레벌레이션의 주식을 모두 양도하고 은퇴는 시기가 도래한 것.

  독자는 22년 전에 샘이 프랜에게 청혼할 당시, 프랜이 당황하면서 샘에게 한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22년 동안 프랜은 인디애나 주의 어떤 정치인도 자신보다 솜씨 좋게 적을 회유하고, 친구에게 조언하고, 하는 일 없는 정치기구를 만들지 못할 입담 실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런 솜씨로 이제 은퇴해서 가진 거라고는 여차하면 깔려 죽을지도 모를 백달러 지폐 뭉치와 시간밖에 없는 샘을 요리해 샘에게 유럽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유럽에서 돌아오자는 말로 부부를 얽매지 말기. 넉달 뒤에 돌아오자고 정하지 말기. 4년이라도 마찬가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꼭 거기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당장 배 타고 돌아오기. 원할 때 돌아오고, 내킬 때 내키는 곳으로 떠나자는 거 말고는 아무 계획 없이 지겨운 미국의 도시를 떠나기.


  어떠셔? 그럴 수 있겠지? 일찍이 유럽에서 교육받은 부잣집 외동딸을 꼬여 결혼을 하고, 어쨌든 장인 덕에 회사 임원을 거쳐, 비록 자기 실력과 역할이 제일 큰 역할을 했지만 회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이십 년 넘게 미국 땅을 떠난 적이 없으니, 퇴직을 기념하여 정처없이, 계획없이, 무한정으로 그러나 말처럼 정말로 4년은 되지 않을 것이 확실할 정도로 유럽, 런던, 파리, 베를린, 로마와 반도의 여러 도시, 스페인과 그리스 등을 다니면서 넘쳐나는 돈을 바탕으로 미국엔 단 한 명도 없는 공, 후, 백, 자, 남작들과 교류해보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 그래서 이 행복해 보이는, 또는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부는 맏딸 에밀리가 결혼하고 3주 후인 1926년 2월, 3만2천 톤급 S.S.얼티마호를 타고 뉴욕항을 떠나 영국의 사우샘프턴으로 향하면서 드디어 한 부부의 개인사적 일대 로망의 막이 올라간다. 즉,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얘기. 본론은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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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9-02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백만장자, 아이비리그 풋볼선수, 공화당...
뭔가 전형적인 미국드라마 냄새가 나는데요?
정작 중요한 내용은 이게 아닐듯한데...^^
V, 파충류 외계인 기억만 남아있는데, 원작이라 하기엔... 앙꼬 없는 찐빵 같네요 ㅋㅋ

Falstaff 2022-09-02 13:47   좋아요 2 | URL
아주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 맞습니다.
헨리 제임스가 유럽에 가서 돈 하나 가지고 허풍 빵빵하게 부리는 <아메리칸>하고 비슷한 분위기인데요, 그거보다 조금 더 재미납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2-09-02 0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이었군요. 최초인데다가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았으니 부담이 컸을 만도 하겠어요.
그렇지만 그 이 후의 삶은 참 안타깝습니다.

유럽에 처음 가는 남편과 유럽에 빠삭한 아내, 이 부부의 여행이 굉장히 기대되네요.ㅎ

Falstaff 2022-09-02 13:48   좋아요 3 | URL
그래도 노벨상 상금이 얼만데요. 주면 일단 받고 보는 겁니다.
나중에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죠.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9-02 18:54   좋아요 1 | URL
오 그럼요! 당근 받아야지요~^^ 주말 잘 보내세요!

다락방 2022-09-02 10: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배빗> 가지고 있고 읽으려고 시도만 두어번 하다가 말았는데, 배빗이 이 작가의 작품이군요!
아 책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곧 따라 읽겠습니다!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부라니, 어떤 계기로 ‘아 이게 이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될지 그것도 궁금하네요. 크-

그나저나 저는 소설을 쓰게 된다면 문학상 받고 싶었는데 안 받는게 오래 사는데 도움이 되는걸까요?

Falstaff 2022-09-02 13:50   좋아요 2 | URL
이이의 대표작이 <배빗>이라 하더라고요. 저는 읽은지 오래라 크게 기억나진 않는데 하여튼 속물 미국 중산층이 온갖 헛짓을 하고 다니는 걸 재미나게 읽었던 거 같습니다.
이 책 재미나요. 다락방 님은 거 참 고소하다, 라는 쪽도 있고, 간혹 빡칠 때도 있고 그럴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생각만 해도 재미나네요. ㅋㅋㅋㅋ

레삭매냐 2022-09-02 1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싱클레어 루이스 다른 책 구해서
읽다 말았나 봅니다.

휴머니스트 세문으로 나온 책들
죄다 관심이 갑니다.

본론 확인하고 싶어지네요.

Falstaff 2022-09-03 16:40   좋아요 1 | URL
옙. 싱클레어 루이스, 재미있는 작가입니다. 휴머니스트도 괜찮은 출판사고요!!!

mini74 2022-10-07 21: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한 잔 하고 계신가요 ㅎㅎㅎ 당선 축하드립니다 *^^*

그레이스 2022-10-07 21:53   좋아요 2 | URL
100%
저도 축하드립니다.
도즈워스! 제가 장바구니 들어갈때마다 절 쳐다보고 있어서... 찔리는 책이네요 ㅋㅋ
언젠가는 읽겠죠?

Falstaff 2022-10-08 17:22   좋아요 1 | URL
옙. 어제 고꾸라졌다가 오늘 하루 벌벌 떨었습니다. ㅋㅋㅋ 술이 웬숩니다, 웬수.
미니 님, 그레이스 님, 고맙습니다.

이하라 2022-10-07 2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Falstaff 2022-10-08 17:25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

꼬마요정 2022-10-08 1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저도 이 책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다른 흄세 책만 사고 있네요 ㅎㅎㅎ 골드문트님 글 보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꼭 읽고야 말겠습니다^^

Falstaff 2022-10-08 19:48   좋아요 2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thkang1001 2022-10-09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Falstaff 2022-10-09 12:33   좋아요 0 | URL
옙! 고맙습니다!!
댓글저장
 
아담 비드 1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0
조지 엘리엇 지음, 유종인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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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5년에 걸쳐서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를 국내 최초로 완역한 전 한양대 영문과 교수 유종인은 책의 제일 앞에 「소개의 글」을 첨부했다. 많은 독자들이 서문 격의 글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곧바로 본문을 읽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서라면 웬만하면 「소개의 글」을 먼저 읽어 두는 편이 좋겠다. 특히 나처럼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작품의 무대가 1799년 6월부터 1807년 6월까지 약 8년에 걸친 시기의 영국 중북부 농촌지역이었는데, 갓 태동한 감리교단에 의한 개혁적 사고방식과 특히 여자 설교자의 강연 등의 활동, 그리고 국교회와 감리교를 대하는 도농都農 간의 시각 차이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좋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개의 글」 속에 스토리의 일부를 미리 짐작할 수 있기도 하지만 역자 유종인은 절묘한 트릭을 숨겨놓은 채 서문 격인 「소개의 글」을 썼다는 것만 귀띔한다.


  스토리의 80 퍼센트 이상이 펼쳐지는 농촌 헤이슬롭 마을은 사실상 대지주이자 귀족인 도니손 가문에 속한 소작농장과, 소작농장주에 고용된 인부, 마을의 각종 소상공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1799년 6월의 어느 날, 큰 규모의 소작농장을 운영하는 포이저 씨 댁 스무다섯 살 처조카이자 감리교 여자 설교사이기도 한 다이나 모리스 양이, 마을의 그린 광장에서 농촌에는 별로 많지 않은 감리교도들을 모아 놓고, 당시가 그랬듯 즐길 일이 별로 없는 시골마을 답게 많은 국교도들도 마치 무심한 척 구경하고 있는 가운데 거리낌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어 주는 듯한 눈빛을 한 채, 순백의 꽃잎에 뽀얀 색조가 살짝 가미된 하얀 꽃을 연상시키는 얼굴로 설교를 했다. 조지 엘리엇에게는 엘리자베스 에번스라는 이름의 독실한 감리교도 여자 설교사인 친척 아주머니가 있었다. 메리 보스라는 어린 미혼모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죽여 영아살해죄로 사형 선고를 받자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는 감옥으로 메리를 찾아가 죄인과 함께 밤새 기도로 지새우고 형장에까지 동행했다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다이나 모리스 양의 모델이 바로 엘리자베스 에번스다.

  또다른 주인공이자 작품의 타이틀 롤인 건장한 체격과 완력을 지닌 미남 목수 아담 비드는, 자신이 여태 모은 돈을 전부 써서 나폴레옹 전쟁에 징집당하는 것을 막아준 동생 세스가 감리교로 개종했음에도 여자 설교사에 대해 마땅하지 못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비록 인파에 섞이지는 않았지만 마을의 대표 목수 버즈의 목공소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길에 먼 발치에서 다이나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이때 우연히 말을 타고 현장을 지나던 나이든 신사는, 국교도임에도 먼저 설교사 다이나의 훌륭한 연설에 깊게 공감을 하고, 많은 인파 가운데 단연 눈에 띈 건장하고 선량해 보이는 아담 비드의 모습에 경탄한다. 이 나이든 신사의 정체는 책의 가장 끝 부분에 가야 밝혀지는 바, 치안판사 코노렐 타운리였다. 당연히 타운리 판사, 다이나 모리스, 아담 비드는 판사의 정체가 밝혀지는 책의 뒷부분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조지 엘리엇은 자신의 아버지인 로버트 에번스를 모델로 삼아 아담 비드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 이름이 메리 앤 에번스였던 조지 엘리엇 역시 작은 농가 출신으로 완전한 독학으로 공부를 해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 이이는 거의 완벽한 남자 주인공으로 아담 비드를 만들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근육질에다가 꼿꼿한 척추를 지닌 색슨 계 6피트 키의 남자. 겨우 180cm? 18세기 말에 180이면 지금 키로 얼마나 될지 상상해보시라. 여기에 깊숙한 바리톤 목소리, 멋진 육체, 잿빛처럼 까만 머리카락, 선이 분명하고 날카로운 눈엔 북부 켈트 혈통도 좀 섞여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지성인다운 정직한 표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하는 행실 하나, 하나, 똑 부러지지 않는 것이 없다. 다 늦게 야학을 다녔는데 야학의 교장 바틀 메이시 선생이 가르친 모든 학생들보다 빨리 글을 배우고 썼으며, 계산 및 응용능력을 익힌 바 있다.

  그러니까, 두 명의 여자 주인공, 두 명의 남자 주인공 가운데 딱 절반, 그것도 절대 선을 행하는 주인공들은 전부 조지 엘리엇의 집안 사람을 모델로 한 인물들이다. 감리교 여자 선교사를 지낸 엘리자베스 에번스의 아바타인 다이나 모리스와, 친아버지 로버트 에번스를 모델로 한 아담 비드. 다이나 모리스는 작품에 나오는 최고의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매력의 정도로 치자면 단연 일등이고, 아름다움 또는 예쁨의 측면으로 말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등은 헤티 소렐에게 양보하더라도 하여튼 그 다음 순번으로 거론할 수준이다. 조지 엘리엇이 <아담 비드>를 발표한 것이 1859년. 이 시절에 나온 많은 소설작품의 주인공이 대부분 선남선녀에 훌륭한 외모를 가졌지만, 엘리엇의 경우엔 조금 다르다. 1799년 6월에 열일곱 살이었던 다른 한 명의 여자 주인공 헤티 소렐한테 엘리엇의 최고로 아름다운 외모를 주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이 한 명 때문에 주위가 다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 헤티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아담 비드>에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철부지일 뿐. 헤티, 헤스터 소렐이 대표적이다.

  헤티야말로 <아담 비드>, 이 19세기 신파극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 더구나 헤티의 순진한 방종과 사치지향, 허튼 믿음은 신파를 흥미진진하게 몰아가기까지 한다. 정말이다. 이건 직접 읽어봐야 하는데, 이 재미있는 19세기 작품에 섣부른 스포일러가 될지도 몰라 함부로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엘리엇의 대표작인 <미들마치>에서도 비슷한 여성 로저먼드가 있으나, 적어도 로저먼드는 소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기나 하지, 헤티는 적수공권 고아인데도 그렇다는 게 문제다.

  형 아담에게 충직한 아우 세스 비드, 본인은 설교사 다이나를 사랑해 청혼까지 했다가 미역국을 먹지만, 근동에서 비할 바 없는 최고의 신랑감인 형이 제일 아름다운 소녀인 헤티와 결혼하게 될까봐 걱정을 할 정도. 다행스럽게도 헤티는 아담에게 관심이 없다. 아니, 있지만 남편으로서는 아니다. 그냥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 버리자니 아깝고 가지고 있기는 싫은 남자. 자신의 반도 따라올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쁜 축에 드는 메리 버즈 아가씨한테 아담이 에티켓 수준의 호의를 표시하는 것조차 기분이 나쁘더라도 자신을 향한 사랑은 눈곱만큼도 인정하지 않는다. 조지 엘리엇은 헤스터, 즉 헤티 소렐의 아름다운 외모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고운 건 아니다. 어떤 아름다움인지 인용해본다.


  “자, 그럼 이제 다시 그 길고 짙은 속눈썹을 바라보라. 무엇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눈들이 기만, 횡령, 그리고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 짙은 속눈썹으로 덮인 커다란 푸른 눈동자에 깊이 있는 영혼이 존재할 거라는 착각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흐리멍덩한 눈을 보면 역겹게 느껴지기에, 두 눈은 모두 결론적으로 역겹다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두 눈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1권, p.269)


  천애고아로 외삼촌 댁에 얹혀 지내는 헤티는 비록 소프트 치즈를 만드는데 최고의 솜씨를 가지고 있더라도 시간만 나면 거울 들여다보며 머리 손질하느라 바쁘고, 용돈을 모아 싸구려 장식품을 사느라 다 써버리고 만다. 아담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청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헤티 앞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스무 살의 아서 도나손, 지주 가문의 유산 상속인 손자이며 현역 대위. 한 달 여 뒤, 돌아오는 7월 30일에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아 성대한 성인식을 할 예정이며, 소작농장의 모든 사람을 초청하느라 어윈 교구 목사와 동행해 포이저 씨의 홀 팜 농장을 들러, 눈에 확 들어오게 어여쁜 헤티를 보고 자신과 두 번 춤을 추어달라고 예약을 한다. 역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스무 살 아서 도나손은 넘치는 리비도를 여태 잘 돌보며 건전하게 살아온 올바른 청년이었으나, 책 표지의 카피처럼 “봄날 같이 예쁜” 헤티를 보고도 참아야 한다고, 만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몇 번을 다짐했지만, 세상에 다른 건 몰라도 소설에서 그게 가능하면, 그게 소설이니?

  헤티는 진심으로 아서를 사랑하게 되고, 아서 역시 진심을 다해 자신을 사랑하는 줄 오해하여, 그에게, 지주댁 손자 나리에게, 꾸미기 좋아하는 천성을 감추지 못해, 귀금속 귀고리와 비싼 목걸이 로켓을 사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철부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그러나 아뿔싸, 이를 계기로 헤티는 자신이 아담을 습관이나 장난처럼 사로잡고 있을 뿐, 결혼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며, 만일 결혼하면 가난한 집에서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까지 떠맡을 수밖에 없는데 자신은 사치스러운 희망, 비단 드레스와 비싼 향수를 향유하는 꿈을 이루고 싶어, 실제로는 그럴 수 없음을 알아챌 수 있었음에도, 젊은 지주의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만 빠져 있게 된다.

  이렇게 비극은 시작한다.


  아직 <사일런스 마너>는 읽어보지 않아 정확한 말은 아니지만 조지 엘리엇은 작품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당시 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게 큰 문제이건 아니건 간에. 그러면서 역시 큰 목소리로든, 작은 목소리로든, 뭔가를 주장한다. 반유대주의를 반대하거나, 기초적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을 주장하거나, 혼인제도의 불합리성을 부각시키려 하거나, 계급의 차별에 항변하거나, 하여간 뭔가를 한다. 이게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작가와의 차이점 같다. 이 작품도 지금 관점으로 보자면 내용이 지극히 신파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계급과 대중들의 교파 주의 같은 문제점을 거론하고 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성인 아담의 입을 통해 범죄와 처벌에 관한 진정한 책임 소재를 논의함으로써 여성주의적 시각을 발제하는 것일 터이다.

  빅토리아 시대 소설이나 조지 엘리엇의 팬이라면 딴 군말 없이 읽어야 할 작품.




* 책 표지는 작자 미상의 <나탈리아 곤차로바 푸시킨>의 초상화다. 책 속지에는 "표지: 이미지 코리아"라고만 되어 있다. 왜 나탈리아의 초상을 표지로 했을까? 얼굴이 예뻐서? 그녀의 부박함 때문에? 예쁜 얼굴의 그림을 고르다보니 그렇게 됐을 듯. 나탈리아는 천부의 외모와 바람기로 당대 러시아를 주름잡았고 언니의 남편, 프랑스군 장교 조르주 단테스와도 깊은 사이라, 이를 알게 된 작가 푸시킨이 장교 단테스와 결투를 벌여 겨우 서른일곱 살 팔 개월 만에 세상을 접게 만든 여인이다. 죽은 사람이 왜 하필이면 푸시킨인가 말이지. 그가 일흔까지 살았다면 러시아 문학, 그리고 세계의 문학이 얼마나 풍요로워졌겠는가. 예쁜 얼굴이 작품의 주인공 헤티를 연상시킬 수 있어서 나탈리아를 표지 모델로 했겠지만, 헤티는 허영기가 있기는 했어도 절대 헤픈 여성은 아니었다. 이 책이 인기 작가 조지 엘리엇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잘 팔리지 않는 건, 표지 디자인의 촌스러움이 크게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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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30 0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설 내용도 그렇고 표지 이야기도 그렇고 흥미롭네요.^^

Falstaff 2022-08-30 09:49   좋아요 3 | URL
ㅋㅋㅋ 역시 제일 재미있는 소재는 불륜과 질투인데요, 여기에 특급 조미료가 있다면 그게 바로 또 결투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수컷들의 난장판.
자신의 작품 <에프게니 오네긴>에서 결투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낸 푸시킨. 아, 좀 더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심지어 자기가 결투한 장소마저 작품하고 비슷하다네요.

포스트잇 2022-08-30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철부지일뿐˝...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08-30 11:04   좋아요 2 | URL
그러고보니 제가 읽은 조지 엘리엇에는 철부지 아름다운 아가씨가 골고루 등장하는군요. <미들마치>에선 본문에 썼듯 로저문드가 있고, <다니엘 데론다>엔 그웬덜린.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은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나지 않는군요.
저는 조지 엘리엇이 좋습니다. 로맨스에 목을 매는 동시대의 이름난 여성 작가들 보다 훨씬 좋아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2-08-30 1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 진짜 이 책 궁금한데, 문트님이 말씀하신 그 표지 문제때문에 도무지 손이 안 가네요. 그리고 이 출판사에서 나온 이 시리즈 다른 책 가운데 학을 뗀 책이 있어서.... 번역 문장도 좀 의심스럽고요....

Falstaff 2022-08-30 11:17   좋아요 4 | URL
오, 이 책의 번역은 괜찮습니다. 물론 오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독자가 허용할 정도입니다.
역자 유종인이 조금 예스러운 우리말로 번역을 했고, 기독교인인 듯 아주 상세한 성서 주석을 달아서 비기독교인이 읽기에 좀 피곤할 뿐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통해 윌키 콜린스의 <흰 옷 입은 여인>을 읽고나서 긍적적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좀 그런 책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뭐가 그럴까요. ㅎㅎㅎ

잠자냥 2022-08-30 11:21   좋아요 3 | URL
다행히 문트 님은 읽으실 일 없을 것 같은 책입니다. 피츠제럴드 작품이었어요. ㅎㅎ

mini74 2022-08-30 12: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폴로스강의 물방앗간? 만 읽어봤어요. 재미있었는데~ 표지의 여인이 바로 그 유명한 푸시킨의 아내군요. ~

Falstaff 2022-08-30 16:27   좋아요 2 | URL
저도 <플로스 강....>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요, 을매나 좋은지 단박에 조지 엘리엇의 팬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이거 뭐여,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들하고 다르잖여? (팬들께는 죄송합니다.)
담부터 계속 조지 엘리엇을 따라 다녔는데, 공통점이, 책값이 만만하지 않더라고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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