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가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정철 지음, 김갑기 옮김 / 지만지한국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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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 집에 국문학 전집 비슷한 책이 한 질 있었다. 정여사가 여고 국어 교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황조가黃鳥歌>에서 시작해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은 향가와 고려가요, 시조, 가사문학, 판소리 대본 등 갖은 우리 문학 전반이 실려 있었는데, 까까머리 소년이 하루는 우연히 그 전집을 꺼내 읽어보고 나름대로 대단한 흥미를 느꼈었나보다.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어쩌면 있던 사실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기보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일지 모른다. 열서너 살 시절에 닥치는 대로 읽은 향가, 고려가요, 시조, 가사, 판소리 대본 등은 한 시절 소년으로 하여금 장래에 국문학 또는 한문학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가리가 더 커짐에 따라 물리, 화학과 수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 감에 따라 결국 방향을 바꿔버렸지만 우리 고문에 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엔 이과생들도 고문을 배웠고, 교과서에 나온 훈민정음과 <조침문>, <상춘곡>, <관동별곡>의 부분들을 달달 외우지 않으면 종아리를 맞던 시절이었다. 본고사 고문 문제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마치 수학의 로그 문제를 틀리는 것처럼 합격은 물 건너 간 거라고 하면서. 그땐 문법도 왜 그렇게 재미났었는지 몰라. 지금은 고문이나 문법, 다 잊었지만.


  <관동별곡>을 배운 고등학생 시절, 가사歌辭 속 풍경의 놀랍도록, 영웅적인 속도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한 번 보자. 고문 지원이 안 되어 그저 비슷하게 현대어로 적어보겠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도라다리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고 믈너나니 옥졀이 압패셨다.

  평구역 말을 가라 흑슈로 도라드니

  셤강은 어듸메오 티악은 여긔로다.”


  계속 이어지지만 여기까지만 보자. 강호, 송강 정철이 사직하고 내려와 있던 전라도 담양 대나무 숲에 자연을 벗하는 병이 깊어 있었더니, 덜컥 관동 팔백리를 관장하는 강원도 관찰사를 하란다. 그래 성은이 망극할 수밖에. 연추문으로 대궐에 들어가 나중에 선조라 불릴 임금을 배알하고 경회남문을 바라 물러나는 송강의 손에는 왕명을 전하는 교지 한 장과 함께 옥으로 만든 관직의 패인 옥절이 들려 있다.

  다섯 마디에 작자는 전라도 담양 땅에서 한양까지 올라와 경복궁에 들어 왕을 배알해 사령장을 받았고, 다음 두 절 만으로 부임지인 원주 땅을 밟는다. 간단하게, 양주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로 돌아가니 횡성(섬강)은 어디인고, 여긴 원주, 치악산이로세. 딱 두 행, 한 문장으로.

  물론 이건 시라서 굉장한 축약이 가능했겠지만, 만일 같은 내용을 헨리 제임스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소설에서 묘사했다면 최하 3백 쪽, 원고지 천 매 가까이 필요했으리라.

  위의 인용문을 우리나라 최고의 정철 권위자인 역자 김갑기는 이를 풀어 이렇게 썼다.


  “자연을 사랑하는 버릇이 고치지 못할 병처럼 깊어져 물러나 쉬고 있더니, 강원도 관찰사의 명을 내리시니, 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갚을 길이 없구나. 연추문(延秋門) 달려들어가 임금을 뵙고 물러나니, 옥으로 만든 강원도 관찰사 신표가 앞에 서 있구나.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여주의 여강을 돌아 강원도 감영이 있는 원주에 도착했다. 이곳 섬강은 어디쯤인가? 치악산은 바로 여기로구나.”


  해석문을 읽으면 내용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되 원문이 가지고 있는 운율을 전혀 살리지 못해 가사문학을 읽는 맛과 멋을 재현해내는 데는 실패한다. 3.4.3.4/2.4.3.4/2.4.3.4 //3.4.4.4/ 3.4.3.4 // 3.4.3.4/3.4.3.4의 율조. 이쯤 되면 이거, 과학 아닌가?

  물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정철이 대단한 문인, 특히 시인이기는 했지만 역시 그의 정체성은 전형적으로 권력을 위해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치꾼이었다. <관동별곡>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임금에 대한 노골적인 아첨으로 시작해, 강원도 관찰사로 떠나면서 이렇게 노래하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겠다고 다짐한다.


  “궁왕 대궐 터희 오쟉이 지지괴니

  쳔고흥망을 아난다 모라난다.

  회양 네 일홈이 마초아 가탈시고

  급댱유 풍채를 고텨 아니 볼 거이고.”


  철원, 예전 태봉국의 궁예 대궐을 지나며 보니 까마귀 까치가 지저귀는데 저것들이 천고의 흥망을 알까 모를까, 금강산 부근 회양 땅이 우연히 중국 회양과 이름이 같아, 나도 (중국 역사상 목민관으로 이름이 높은) 급장유처럼 선정을 베풀어 보겠노라, 하고 다짐하지만 정철의 깊고도 깊어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상은 숭왕崇王 사상. 때는 16세기말, 조선사에서 제일 유능하게 신하들끼리 싸움을 붙여 은근히 왕권을 세우는 방면에서 도가 튼 선조의 의도대로 반대파인 동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단연 최전선에서 눈썹을 휘날리고 백성이야 굶어 죽든, 노예상태로 빠져가든 별로 상관하지 않던 정철은 <사미인곡>이나 <속미인곡>, <성산별곡> 그리고 <관동별곡>에서도 빠짐없이 태평성세만 노래한다.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각 고을을 한 곳도 빠짐없이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게 꼭 미덕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원주에 터를 잡고 각종 중대사를 다루어야 마땅할 터이지만, 요새처럼 하루 만에 뚝딱 다녀올 수도 없는 원격지를 몇 달에 걸쳐 지붕 없는 가마를 타고 건들건들 흔들리며,


  “한 잔 먹새근여 또 한 잔 먹새근여

  곳 것거 산 노코 무진무진 먹새근여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우히 거적 덥허 주리혀 매여 가나

  뉴소보당의 만인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모 백양 속에 가기 곳 가면

  누론 해 흰 달 가난 비 굴근 눈 쇼쇼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해 잰납이 파람 불 제야 뉘우찬 달 엇디리”  (정철, <장진주사> 전문)


  우리나라 최고의 술꾼 가운데 한 명 답게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자작 사설시조 <장진주사>를 읊으며 유람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말이지. 이이에겐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고, 곳간 또한 풍족해서 요순시대에 필적해야만 했을 것이다.


  정철을 읽는 심사가 참 복잡하다. 마치 저 훗날 불란서의 조각가 “로댕”처럼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가 되라고 친구가 뜻과 관계없이 음가音價만 보고 지어준 호, “미당” 서정주를 보는 것 같다. 시 하나는 정말 절창 중의 절창이지만 딱 시 만 좋은 시인. 숱한 정치인들을 모진 고문 끝에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리고, 참형에 처하고, 곤장을 맞아 죽게 만든 정승 출신의 시인. 그래도 나는 이이의 시를 상찬할 수밖에 없다. 비록 유배를 간 강화에서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지만, 평생 잘 먹고 잘 마셨으니 큰 시인의 관을 쓴 이의 자존심으로서는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우히 거적 덥허 주리혀 매여가나 / 뉴소보당의 만인이 우러 녜나” 크게 유감은 아니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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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7-22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강이 부모 시묘살이를 제가 사는 동네에서 해서 근처 송강 이름을 딴 지명이 많습니다.
가끔 산책하다 송강 시비공원도 지나는데 정철의 시조가 큰 돌에 여러개 새겨져 있어요.
저희 아파트 바로 뒤는 송강이야기공원이랑 이어지구요.
근데 골드문트님 십대초반에 시조 읽고 국문학을 전공할 결심을 하셨다니 역시 다르십니다. 👍

Falstaff 2022-07-22 16:20   좋아요 2 | URL
음하하하... 고양 사시는군요!
그 동네 둘레길이 무척 부러운데요.

ㅋㅋㅋㅋ 애초에 창작 말고 우리 고전이나 한문학을 하고 싶었습죠. 그러다 집안이 망가져 물리, 화학, 수학하다 말면 취직이라도 하는데, 국문 한문 공부하다 말면 먹고 살지도 못한다고..... ㅋㅋㅋㅋ 세상 사는데 제일 중요한 게 빵이잖아요. 그래서 결정적으로 이과 쪽을 택했습죠. 뭐 인생이 다 그래요. ^^

mini74 2022-07-2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상춘곡 외우면서 맞은 세대입니다 ㅎㅎㅎ 아이들이 무지 싫어하는 분 중 꼭 정철이 들어가죠. 전 관동별곡에 임포 등 신선 이야기 좋아했어요 신선과 술이야기 뭔가 골드문트님과 어울립니다. 이게 시험문제로 나와서 그렇지 그냥 즐겁게 읽으면 참 좋은데 말이지요 ㅠㅠ

Falstaff 2022-07-22 16:22   좋아요 1 | URL
오, 상춘곡도, 조침문도 진짜 좋아요. 그때 지금처럼 좀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으면 정말 잘 외웠을 텐데 말입죠.
ㅎㅎㅎ 신선, 도교와 술. 정철의 <장진주사>도 좋고요, 이백의 <장진주>도 아주 절창입니다! 관동별곡에 이백이 그리 많이 등장하는지 이번에 읽고 깜놀 했답니다. ㅎㅎㅎ

바람돌이 2022-07-22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저 송강의 시 볼때마다 왕타령하는거때매 미치는줄 알았음다. 도저히 좋아할수 없는인데 역시ㅠ골드문트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라 시를 아셨군요

Falstaff 2022-07-22 16:25   좋아요 1 | URL
특히 <사미인곡>에서 ˝님˝을 왕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진짜 연애하는 내 님이라 생각하면 기가 막힌 연애시인데, 우리나라 학교 교육, 그거 문제예요. ㅎㅎㅎㅎ
고딩 때 이런 이야기 했다가 국어 선생께 장난이 분명한 귀싸대기 한 대 얻어 터졌습니다. 그분도 제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토닥이신 거니까 제 표현 ˝귀싸대기˝를 단어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

잠자냥 2022-07-22 09: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려가요, 한시, 가사 문학 참 좋아했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국문과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ㅋㅋㅋㅋ

제가 그 시절 정말 좋아했던 시는, 지금도 좋아하지만 정지상의 <송인>입니다. 아직도 외워요. ㅎㅎ

우헐장제초색다
송군남포동비가
대동강수하시진
별루년년첨록파

캬..... 특히 마지막 종장 다시 읽어도 좋네요...

雨歇長堤草色多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리네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까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푸른 물결에 이별의 눈물이 더해가는데

mini74 2022-07-22 09:40   좋아요 3 | URL
헉 자냥님 저도 송인 진짜 좋아해요. 그래서 김부식 싫어한 ㅠㅠ

잠자냥 2022-07-22 09:48   좋아요 3 | URL
정지상이라는 이름도 뭔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Falstaff 2022-07-22 16:28   좋아요 3 | URL
오, 그럼요, 우리나라 먹물들이 쓴 한시 가운데 멋있는 것이 을매나 많은데요.
정지상은 당대의 문장가 아닙니까요.
저는 정지상, 하면 귀신이 되어 화장실에서 김부식한테 빨강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하다가 철천지 원수 김부식의 부랄을 터뜨려 죽인 이야기가 젤 재미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7-23 2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관동별곡 배웠던 생각납니다.
저는 외우라고 해도 안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어서(바틀비^^)...
요즘에는 시경도 그렇고 옛시가 좋은듯요
감출듯하며 내보이는 감정이 있어요^^

Falstaff 2022-07-25 06:14   좋아요 2 | URL
오호, 그러셨군요. 한 시절의 레이디 바틀비. ㅋㅋㅋㅋ
아이고, 요새 길고 재미난 소설을 읽다보니 알라딘 로그-인 할 시간도 없어서 이제야 답글을 답니다. ㅎㅎㅎ
 
이방인의 아이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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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 홀링허스트. 1988년 <수영장 도서관>을 출간해 이듬해 서머싯 몸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홀링허스트는 네 번째 장편소설 <아름다움의 선>이 2004년 부커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7년 후, 2011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장편소설 <이방인의 아이>가 다시 부커상 예심long list에 올려 놓았다.

  88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모두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의 시대적 배경은 1913, 1926, 1967, 1979~80, 2008년이다. 그러니까 굳이 ‘대하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홀링허스트의 작품이 늘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남성 동성애를 다루었다. 내가 읽은 지난 네 편의 홀링허스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하면, ① 영국 최고의 명문대학 옥스퍼드 출신, ② 귀족 부르주아, ③ 대리석 조각 같은 외모의 미남자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옥스퍼드와 필적하는 또다른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 출신이며 준남작의 장자로 3천 에이커(367만 평)의 토지와 작위 세습권을 가지고 있고,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대신 한 시절엔 이와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은 시詩적 천재를 가진 매력남이 등장한다. 세실 밸런스.

  런던 근교 북부 미들섹스 지역에 너른 잔디밭과 사람이 직접 만든 바위 정원, 연못, 그리고 장미와 베고니아, 월계수 나무가 있는 정원이 딸린 널따란 저택이 있어 이를 ‘투 에이커스’라고 했다. 이 집은 성실한 프랭크 솔 씨 대에 이르러 저택의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으나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1913년에는 과부 프리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기만 한 장남 휴버트, 케임브리지에 다니는 똑똑한 외톨이 조지, 그리고 어여쁜 열여섯 살 막내딸 다프네가 몇 명의 하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1913년의 늦여름, 이 집에 학창시절 내내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던 둘째 조지가 자기보다 두세 살 많은 학교 선배 세실 밸런스와 함께 오면서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아무나 가입하지도 못하고,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비밀에 붙이는 전통을 지닌 케임브리지 클럽에 세실의 도움으로 가입을 하게 된 조지는 당연히 세실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교감을 넘은 사랑의 감정이 자라난 것.

  세실의 입장에선 자기가 물려받을 3천 에이커의 토지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안 될 2 에이커의 땅에 지은 저택에 무슨 볼 것이 있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 왔겠느냐는 말이지. 조지와의 사랑,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감정을 이제 바야흐로 직접적인 몸의 언어로 소통하고 싶어하는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렇게 조지는 믿었다.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는 그게 맞았다.

  때는 1913년. 1차 세계대전을 불과 1년도 남지 않은 시점. 이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등장하는 남성 동성애자들은, 마치 <수영장 도서관>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찰스 낸드위치 경처럼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걸 절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바로 형사입건이 될 수도 있었으니. 그래 작품에 등장하는 19세기 태생의 20세기 초반 게이들은 빠짐없이 여성과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다. 세실은 게이이지만 솔 가문의 외동딸인 다프네에게도 어느 정도 호감을 표시한다. 그래 굳이 구분을 한다면 게이와 바이섹슈얼의 중간 정도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독자에게 그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바로 다음해,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바로 왕립 버크셔 연대 6대대 대위로 참전한 세실 테우크로스 밸런스는 1916년 7월에 프랑스 마리쿠르에서 전사해버리고 만다. 이때 나이 스물다섯 살. 주인공인줄 알았던 인물이 불과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다.

  1부에서 ‘투 에이커스’ 저택에 3일 동안 방문한 세실은 숲 속 깊은 곳에서 조지와 성접촉을 한 번 했고, 이때 부근을 지나던 다프네를 발견한다. 다프네는 예전 소녀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서명첩, 즉 사인북에 여러 유명인사의 사인을 받아 보관하고 있었으며, 열여섯 살 감수성 많은 소녀답게 괜찮게 생긴 부잣집 ‘시인’ 도련님이면서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운 면모에도 호감을 느껴 세실에게도 서명을 부탁해 사인북을 건넨 상태였다. 다프네가 오빠와 세실의 동성애를 알았는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독자로서는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어쨌거나 세실은 여태, 물론 사인북을 건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전혀 손대지 않고 있던 공책에, 이후 백 년 가까이 영국인의 애송시이며 자신의 대표 작품이 될 <투 에이커스>라는 시를 써서 서명을 하고 다프네에게 돌려준다. 독자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이 시가 과연 다프네에게 헌정하는 것인지, 연인인 조지를 향한 것인지 미궁에서 헤맬 것이다.


  세실은 1부와 동시에 작품 속에서 사라진다. 독자는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여태 주인공인줄 알았던 등장인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남은 7백쪽은 어떤 스토리로 이어질까 싶어서. 걱정하지 마시라.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특기,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는 솜씨를 나머지 7백쪽에 걸쳐 멀미가 날 만큼 즐기거나, 독자에 따라서는 고통을 받을 수도 있을 터이니.

  한 번 초대받아 한 가정을 방문하면 방문객은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를 하는 것이 백인 소설에선 그냥 상식이다. 세실 역시 막내딸 다프네를 자기네 집, 가훈인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라고 도들새김한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건물인 콜리 저택에 오빠 조지와 함께 초대한다. 그래서 다프네는 밸런스 남작 가문의 드넓은 콜리 저택을 두 번 방문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한 세실이 다프네와 다른 한 여성에게 보낸 서면 청혼장에 승낙하기도 전에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한 후, 옥스퍼드 재학중에 참전했다가 폭탄 파편에 왼쪽 발가락 세 개를 절단한 채 퇴역한 세실의 동생 더들리와 결혼해버린다. 당시엔 이런 일이 그냥 보편적이었단다. 전사한 형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것이. 물론 승낙 편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승낙한다고 썼지만 보내기 전에 공증을 받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다프네 아가씨는 콜리 저택에 처음 방문하자마자 저택의 위용과 화려함과 사치에 매료되어 이 집에서 살고 싶다 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나중에 얘기한다.

  다프네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실하기 그지없는 장남 휴버트도 전쟁통에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둘째 조지는 전쟁이 끝나고 영국사 공부를 계속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머리가 벗겨지고 자신의 성적 취향과는 달리 당시 율법에 따라 남자만 좋아할 수 없어서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역사를 공부한 매들리와 결혼해 아이 없이 평생을 대머리로 늙어가며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 한 권을 부부 공동으로 출간한다. 아주 나중엔 세실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연애를 조금은, 아주 조금 감지할 수 있게 둘 사이의 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내기도 하지만 그건 1967년 동성애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이후였음은 물론이다.

  세실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자 다프네의 남편 더들리는 애초 작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던 남자로 성장 과정 중에 형 세실의 시적 천재에 늘 비교가 되면서 은근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더. 전쟁 중 야간정찰을 하다 자기 곁에서 죽어간 빌리 프리도에게 지나치게 집착해 이 증상이 신경쇠약에까지 이르러 성격이 많이 비틀어졌는데, 읽는 사람은 형 세실로 미루어 보아 이것이 밸런스 가문에서 형질처럼 내려오는 동성애적 성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친절한 홀링허스트는 책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결론은 오직 독자 몫으로 둔 채. 나는 양성애자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1916년에 형이 죽자 평소 집에서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어머니 밸런스 부인은 준남작, 귀족이란 신분과 막강한 부르주아의 금권으로 직접 프랑스로 건너가 평민 출신 병사들이 위험을 무릅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세실의 시신을 영국으로 운구, 콜리 저택의 교회에 안장하는 것도 모자라 유명한 이태리 조각가를 초빙해 등신대 대리석 조각을 만들어 교회에 안치하는 데 이른다. 가뜩이나 약간의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더들리는 전쟁에서 가져온 신경쇠약과 합해져, 정상에서 많이 어긋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있으나 좀 어색한 일탈을 저지르는데 특히 아내 다프네, 맏딸 코리나, 그리고 아들 윌프리드를 대하는 방식에서 그러했다.

  세월이 지나 세실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장군’ 밸런스 부인은 온갖 손님을 콜리 저택에 초대해 성대한 추모식을 열고, 전기작가 서배스천 스토크스에게 세실 밸런스 전기를 위촉해 초대받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주선한다. 여기에 소환된 인물 가운데 창창하게 젊은 나이에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청년 화가인 레벨 랄프도 끼어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가 끝난 밤, 세실의 동생 더들리의 주도로 모든 참가자는 떡이 되도록 술에 절었고, 이 와중에 리넨 실로 숨어든 레벨 랄프와 다프네는 아침이 밝도록 서로의 몸을 탐했으며, 얼마 후 야반도주해 살림을 차리는 데 성공한다.


  다프네의 맏딸 코리나는, 2차 세계대전 중 포로로 잡혔다가 죽음 바로 앞에서 목숨을 구한 후유증으로 광장 공포증에 평생 시달리다 결국 자기 머리에 총알을 박아 죽을 운명인 점잖고 온화한 은행 지점장 레슬리 키핑과 결혼해 존과 줄리언을 낳는다. 아들 윌프리드는 엄마 다프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다가 슬그머니 작품에서 사라지지만 어엿하게 남작 작위 계승자다. 다프네는 두번째 남편 랄프가 죽고 다시 제이콥스 씨와 결혼하지만 아이는 없고 의붓자매가 있는데 딸이 제니, 옥스퍼드를 거쳐 불문학자가 된다. 의붓아들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등장해 세실 밸런스를 연구하는 폴 브라이언트와 다프네의 면담을 연결해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세실이 쓴 역사적인 시 <투 에이커스>의 내력을 밝히는 것이 주제다. 이를 위해 1부에서 독자가 알아채기 힘든 단서 몇을 제시하고 이후 세실 사망 10주기 추도식, 다프네의 70번째 생일 파티, 전기작가 폴 브라이언트와 다프네의 면담, 그리고 열린 결말로 끝나는 종지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처음엔 홀링허스트 특유의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잘 읽힌다. 잘 읽히고, 또 잘 읽힌다. 그러나 꽃노래도 삼세번이지, 한참 지나면 혓바닥이 쑥 빠진다. 세상에나. 한 행위를 위하여 작가는 해당 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장황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준비한다. 한 번 더 얘기하면,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여태 읽은 앨런 홀링허스트도 읽으면서 장황한 느낌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기억엔, 별로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이번엔 880쪽을 6백쪽이나 550쪽 정도로 줄여도 충분히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하는 건 작가의 권리이니 독자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해도 적당히 해야지, 그걸 읽고 지겹다, 재미있다 판단하는 건 독자의 권리다. 저 앞에서 이 작품을 “대하소설”이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이의 책을 읽으면 며칠 동안,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 가운데 도대체 몇 명이나 게이가 있는 건지 궁금해 하다가, 누군가 내 엉덩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주위를 둘레둘레 관찰하게 된다. 정말이다. 의심스러우면 한 번 읽어보시라. 남자 등장인물 셋 가운데 두 명은 게이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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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7-19 0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을 거라서 줄거리는 실눈 뜨고 휙휙 넘기며 읽었는데, 대충 감이 오는군요. 이 작가 잘 쓰긴 하는데 너무 길죠... 대부분의 작품에서 한 100~200쪽은 덜어내면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이 책은 더 그렇군요.

그나저나 마지막 문단 정말 공감갑니다. 이 사람 책 읽고 나면 내 주위 남자들 도대체 얼마나 게이인가.... 궁금해지고, 저는 지나가는 남자들 엉덩이(만) 한참 보게 되더라고요. 흠, 저게 게이들 눈엔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나?????????? 이런 심정으로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7-19 15:47   좋아요 3 | URL
아이고, 4부 들어가니까 혓바닥이 쑥 나오더라고요. 정말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렇게 정성을 들여 따박따박 자판을 두드렸으니 정성은 가상하되, 읽다가 졸도하는 줄 알았습니다. 날씨나 좀 선선했어야 말입니다. ㅋㅋㅋㅋ 다 팔자예요, 팔자.

그죠, 전 어디 다니면서 여자 말고 남자들 유심히 살펴보게 되더랍니다. 팔자 걸음 안 걸으려고 신경 팍팍 썼다니까요. 가뜩이나 요새 치질이 도져서 께름칙한데 말입죠. ㅠㅠ

잠자냥 2022-07-19 15:58   좋아요 3 | URL
치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치질조차 다르게 생각됩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 2022-07-20 15:04   좋아요 2 | URL
저에겐 정말 알고 싶지 않지만 유행처럼 운명처럼(아마도 요즘 문학에선 유행인 거 같고 ㅋㅋ 푸코에 에리봉 땜이롱ㅋ) 알게 되는 것이 있사오니 그것이 바로 게이 섹슈얼리티…ㅋㅋㅋ 작년 여름 이맘 때 쯤 수영장 도서관 읽다가 더워서 포기했던 생각이 나네요…ㅋㅋㅋ 전 좀… 알고 싶지가 않은 데… 왜 자꾸 등장하냐고 ㅋㅋㅋㅋ 디디에 에리봉이 잠깐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 데, 이미 홀링허스트가 다 써놔서 그냥 자기는 푸코 전기 썼대요 ㅋㅋㅋ (에리봉아 잘했어..ㅎㅎㅎ)
그나저나 걸드문트님 치질 쾌차하시길…(응?)

Falstaff 2022-07-20 21:19   좋아요 0 | URL
제 증상은 전형적인 알코올에 의한 것으로, 아직은 병원에도 가본 적 없는데, 아이고, 불편하긴 불편해요.
(이런 얘기 해도 좋을 지 몰라.....)
샤워할 때 만져보면 두 군데가 도톰하게 부어올라서 말입죠, 근질근질 화끈화끈. 이러니 엉덩이에 눈길주는 아저씨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요.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공쟝쟝님! ㅎㅎㅎㅎ

바람돌이 2022-07-19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앨런 홀링허스트 작품 중 딱 1개만 읽자 하면 혹시 뭘 추천하실까요? 읽을까 말까 고민되는 작가인데 1권 정도 읽어보고 싶어서요. ㅎㅎ

Falstaff 2022-07-19 20:0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 홀링허스트의 진짜 애호가는 위에 댓글을 다시 잠자냥 님이신데요, 저도 그분의 얘길 듣고 읽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섣불리 짹짹거리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암만해도 부커상을 받은 <아름다움의 선>을, 단 한 권만 읽으시겠다면 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두 번째로 <수영장 도서관>을 꼽겠습니다. 좀 과격한 게이 섹스 장면이 나오긴 해도 벽돌같이 단단한 구조를 지닌 좋은 장편이라고 생각해서 말입죠.
근데 믿지는 마세요. 전 진짜 아마추어, 좋게 봐줘봤자 딜레탕트랍니다. -_-;;

잠자냥 2022-07-19 21:1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애호가는 아닙니다만, 단 한 권 읽으신다면 <아름다움의 선> 추천합니다.

그레이스 2022-07-19 1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지막 부분때문에 장황, 꽃노래 삼세번 다 잊었어요.;;
남과북 생각이 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에피소드와 이유를 갖고 있나보네요 ^^;;

Falstaff 2022-07-19 20:0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남과 북>은 홍성원 말고 게스켈 말씀하지는 것이지요?
에피소드라기 보다, 한 행위의 정당성을 주기 위하여 왜 그런 행위가 나오게 됐는지 그걸, 아이고, 너무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바람에... 이이는 확실히 빅토리아 시대 전문가예요 ^^;;;

그레이스 2022-07-19 20:15   좋아요 1 | URL
지금 찾아보니 우리나라 영화도 있네요^^;;
 
위험한 관계 대산세계문학총서 68
쇼데를로 드 라클로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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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은 2015년까지 쇼데를로 드 라클로라는 이름은 당연히 몰랐었고, 이 <위험한 관계> 역시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것을 사람들이 읽어보고 좋다고 지지배배거리는 줄 알았었다. 근데 케네디 책을 암만 읽어봐도 별로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없었던 기억이다. 그래 한 번 더 검색을 해보고 이 쇼데를로 드 라클로란 작가가 쓴 <위험한 관계>도 있다는 걸 알아 사서 읽어봤더니, 무려 175 개의 편지로만 쓰여진 서간체 장편소설이었다. 본문만 550 쪽에 이르는. 참,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발몽>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명배우 콜린 퍼스가 주인공을 한 적도 있고, <위험한 관계> 제목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배우 존 말코비치가 발몽 역을 한 것도 있으며 <스캔들>이란 제목으로 전도연과 배용준, 그리고 이미숙이 출연하는 조선시대 버젼도 있는데 이 가운데 존 말코비치 버젼이 갑이라고 한다. 나는 스캔들, 전도연과 배용준 만 봤다. 이번엔 넷플릭스가 업데이트한 건 하이틴 19금이라는데 볼까 말까?


 일단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본다는 신조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출판사가 약간 과장해서 말한 것을 내가 한 번 더 과장해, 이 <위험한 관계>야말로 19세기 위대한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의 출발선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이 그토록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 토대가 프랑스에 그만큼 잡놈 잡년들이 많이 살았던 때문이었으며, 그 인류학적 특징이 한 세기 전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날 뿐더러 문학적 스토리 상에서도 그들의 조상님으로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 거참, 어렵게 썼다. 반성한다.

 벌써 몇 번에 걸쳐 이야기했듯, 어려서 가정교육 잘 받은 내 입장에선 이런 종류의 난잡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발몽 자작과 메르퇴이유 남작부인을 중심으로 범 사회적으로 인간사냥을 권장하는 내용, 무슨 뜻이냐 하면, 남잔 여잘 사냥하고 여잔 남잘 잡아 잡숫고, 뭐 이런 식인종들이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일찍이 한 번 읽고 몸서리치며 경원했던 사드 후작의 글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어째 보는 눈이 그렇게 없냐고 타박하겠지만, 물론 나도 그런 타박에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암만 그래도 남작 부인이 자작한테 어느 처녀 아이의 처녀성 제거를 권장하고 자작 역시 기어이, 그것을 당시 수준으로 말하자면 동영상 생중계 하는 장면이라든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숙한 여인을 무너뜨리기 위한 파렴치 행위 같은 것들의 묘사는 아무리 세월의 때가 많은 묻은 나도 읽기에 즐겁지 아니했다. 내 취향엔 이런 류의 글보다는 차라리 인터넷 야설이 더 낫다. 요즘엔 보기 힘들어서 그렇지.

 때는 프랑스 혁명 전, 브루봉 왕가의 최고 방탕시절. 왕족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브루주아부터 브띠까지 일부 양심있는 인텔리 층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신민들이 음탕과 혼음과 배반과 물질만능과 수탈과 탐욕과 착취를 하거나 당하던 시절에 피울 수 있었던 최고의 악의 꽃을 볼 수 있는 책. 그리하여 드디어 1789년은 올 수밖에 없었고 그 족속들의 대가리가 단두대의 퍼런 칼날 아래서 툭툭 동백꽃 모가지 떨어지듯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소설. 하지만 어디서도 그런 역사 의식이나 사회의식 별로 찾을 수 없는, 그러나 현실을 과장하여 잘린 단면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엉뚱하게도) 차갑게 인식할 수 있는 (내가 읽기에 그렇다는 얘긴데) 드라이한 하이퍼 레알리즘 소설.

 여태까지 쓴 것과는 별도로 재미있고 기념할 만한 소설인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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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17 1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은 여적 못 보고 영화는
각각 다른 버전으로 세 개인가
봤는데 정말 재밌게 본 기억이
납니다.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의 타
락상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인
가 보네요.

Falstaff 2022-07-17 12:30   좋아요 1 | URL
하여튼 계속해서 영화화 하고 있는 작품이니 제가 콕 집어들지 못한 뭔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ㅎㅎㅎ
일단 함 읽어보시고 결정을 하심이 좋을 듯합네다.

Falstaff 2022-07-17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뎃 공지다.
7월 19일, 울 아빠 제삿날. 시간 나면 앨런 홀링허스트 <이방인의 아이>. 시간 안 나면 담날.
7월 22일, 정철 <송강가사>
7월 26일, 박솔뫼, <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나네 그거.

coolcat329 2022-07-17 13:27   좋아요 1 | URL
혹시 1차 세계대전 나가서 발가락 세개잘린 인물 나온다는 소설이 <이방인의 아이>인가요?
오 앨런 홀링허스트 계속 읽으시네요.
저도 한 번 도전해보고는 싶은데...🤤

Falstaff 2022-07-17 16:14   좋아요 0 | URL
넵! <이방인의 아이> 맞습니다.
홀링허스트가 이번엔 아주 대하 드라마를 썼습니다. ㅋㅋㅋㅋ
함 읽어 보셔요. 도서관 이용도 괜찮습니다.

yamoo 2022-07-17 1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말코비치 나오는 영화를 재밌게 봤습니다만..책은 갖고 있는데 도무지 읽을 생각이 없어요..ㅎㅎ

Falstaff 2022-07-17 12:41   좋아요 0 | URL
오, 야무님, 오랜만이고, 무지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
옙. 저도 처음엔 기대에 찼지만 진도가 나갈수록 점점 지루하게 읽은 책입니다.
근데 말코비치, 참 기묘한 게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

moonnight 2022-07-17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은 못 읽었는데 존 말코비치 주연의 영화를 ebs에서였나 우연히 보고 깜놀@_@;;;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런 막장@_@; 이러면서ㅎㅎ;;;;
라이언 필립과 배용준 주연의 영화도 봤는데 콜린 퍼스 버전은 못 봤네요. 궁금하군요^^

Falstaff 2022-07-17 12:4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들은 얘긴데요, 콜린 퍼스 버전은 망작이라고들.... ㅋㅋㅋ -_-;;;
아마 이 작품이 세계 몇 대 소설, 이렇게 회자되는 모양이더라고요. 근데 솔직히, 현혹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

coolcat329 2022-07-17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영화 참 재미나게 봤어요.
말코비치, 글렌 클로스, 미셸 파이퍼 나오는 거랑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라고 라이언 필립, 리즈 위더스푼 나오는것도 있죠.
다 봤지만 위험한 관계하면 무조건 말코비치가 제일먼저 떠오릅니다.

레삭매냐 2022-07-17 13:34   좋아요 3 | URL
발몽이란 제목의 프렌치 무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coolcat329 2022-07-17 13:39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네요.

Falstaff 2022-07-17 16:15   좋아요 1 | URL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건 적어도 흥행엔 실패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무리 망작이라도 평작 수준은 된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말코비치 나오는 건 얼른 봐야지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2-07-17 16: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교롭게도 요즘 그 시대의 프랑스 소설을 계속 읽고 있는데 그저 먹고 얘기나누고 사랑하고~~
저는 위험한 관계와 스캔들 봤어요^^
미셸 파이프가 엄청 예뻤다는 기억이 나요~~
저 같이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인간들이 왜그리 복잡하게 사는지 이해불가입니다.
넘 피곤해요^^

2022-07-17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2-07-17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유? 하고 보다가... 웃었습니다.
너무 간단하게 정리해버리셔서...;;
하이퍼 레알리즘!
계속 저랑은 너무 먼 문학을 리뷰하시네요.^^
암튼 잘 보고 갑니다.
이 번역자 평가가 좋던데...^^

책 소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2-07-18 05: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근데 맞는 얘기 같나요? ㅋㅋㅋㅋ
아이고, 하이퍼레알리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작품에 무슨 하이퍼레알이 있겠습니까.
옙. 역자 윤진은 저도 좋아하는 이입니다. ^^

안광지배철 2022-08-1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책을 읽지 않고 있는데요 잘못된 선입견 때문인 것 같습니다,프랑스 역사를 잘 모르지만,라클로 작가는 프랑스 혁명기에 오를레앙 공의 비서였다지요 예나 지금이나 비서라는 직책은 소위 오른 팔이고 복심이고 그가 입을 열면 뒤집어 지지요,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당통,데물랭,로베스 피에르 등은 꽃다운 나이인 이,삼십대에 길로틴에 처형되었다는데요,아무튼 혁명파든 반 혁명파든 제 명대로 산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가는 혁명의 반작용을 등에 업고 등장한 나폴레옹에 의해 장군에 올라 60 여세 까지 살았고요,오래 산 것이 죄는 아니지만 뭐가 있지 않았나 싶어서요 제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겠지요,,,,

Falstaff 2022-08-11 19:1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입.... 주둥이 만 깠지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답니다.
사는 일이 다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때는 바야흐로 격동의 시기인데 재수 좋아 줄 잘 서서 기요틴의 핏방울로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잘 먹고 잘 살았으면 당사자는 애초에 장땡을 잡은 거군요.
세상은 절대로 평등하지 않으니까요.
 
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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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시작하는 ‘오늘’은 뛰어난 지휘자로 평소에 한 30년 선배이자 거장 브루노 발터와 20년 정도 선배인 오토 클렘페러와 동등하게 비교 받기를 원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던 지휘자이면서 스위스에서 가장 큰 콘쩨른의 대주주로 막대한 부를 향유하고 있던 에트빈이, 보면대 위에 놓인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 원본 악보를 넘기다 악보의 오른쪽 페이지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상태로 넘어지면서 90세를 훌쩍 넘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언젠가 이이가 ‘나’의 어머니 클라라에게 이 G단조 교향곡이야말로 여태까지 인류가 만든 음악 가운데 최고의 것이라고 했단다. 41개의 모차르트의 교향곡 가운데 단조가 딱 두 곡 있는데 둘 다 G단조다. 25번과 40번. 작가는 당연히 40번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25번 역시 ‘발랄한 우수의 아름다움’으로 40번과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같은 사단조인 25번 교향곡의 매력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왕 모차르트 얘기가 나와서 조금만 더 해보자면, 모차르트 음악 가운데 단조 음악에 좋은 작품이 많다. 매우 다양한 양식으로 작곡을 했으나, 하이든은 교향곡과 현악사중주, 베토벤 하면 교향곡, 슈베르트는 가곡, 바그너나 베르디는 오페라, 이런 식으로 분류를 꼭 해야 한다면 모차르트는 오페라와 피아노 협주곡, 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치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20번은 근데 G가 아니라 D, 라단조다. 다양한 음반 가운데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하고 클라라 하스킬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판을 소위 명반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또 애청곡인 현악오중주 K. 516이 사단조다. 아마데우스 콰르텟의 연주가 내가 자주 즐기는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상당히 앞 순위에 올라 있다. 아무쪼록 기회가 닿는다면 들어보시기 바란다.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사단조, K.550. 3악장. 미뉴에트.

이이의 40번 교향곡은 미뉴에트마저 혁신적인 낭만성으로 넘실거린다.


  이 에트빈이라는 키 큰 작자의 죽음으로 첫 페이지가 열렸다. 결말은, 그의 장례식이다. 그러니까 죽음과 장례식날까지의 며칠 동안 ‘나’는 ‘나’의 어머니 클라라가 평생 사랑했던, 사랑도 사랑 나름인데, 심장과 애간장이 곰삭은 곤쟁이젓처럼 푹 절여져버렸을 정도로 간직했던 사랑에 관하여 쓴 것이라고 보면 된다. 작가는 작품의 첫 문장마저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


  저 먼 시절, 적도 아래 아비시니아의 산간지대에서 개를 신으로 섬기는 부족과 사자를 섬기는 레오니 부족이 굶주림으로 인한 결투를 벌였다. 싸움에 진 레오니 족의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은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몰라도 극도의 기아와 갈증 상태에서 베르가모의 도모도솔라 근처 알프스 어느 골짜기 마을 입구까지 이르러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를 발견한 동네 여인이 탈진한 그의 발목을 끌어 돌로 만든 움막집에 들인 다음, 깨끗하게 씻기고 갈증을 풀어주고, 함께 잠들었는데, 검둥이가 마을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여인의 집에 들어와 보니, 여인은 발가벗은 채 잠에 빠져 있고, 검둥이는 이미 죽어 있었단다. 9개월이 흐른 후에 여인은 아들을 낳아 ‘도메니코’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연히 짙은 갈색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나귀를 몰고 떡갈나무 포도주 통을 산을 넘어 운반해 먹고 살던 짐꾼 도메니코는 열두명의 아들을 두었다. 물론 딸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 아들이 울티모. 많은 아들이 도메니코보다 먼저 세상을 떴더라도 여전히 아들이 많아 굳이 막내 울티모까지 험한 짐꾼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울티모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시골 교구신부가 그의 재주를 알아채고 브릭 예수회 기숙학교의 사생으로 보내, 신성한 학교 덕분에 평생 모든 종교적인 것에 대하여 극도의 거부감을 지니게 된 울티모는 그곳에서도 실력을 발휘해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스위스 국립공업전문대학에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장학금 수혜를 입어 학비 없이 졸업한다. 기계전문기사 자격증을 따 갓 24세에 기계공장에 입사했고,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대기업으로 변모한 회사에서 부사장단의 일원으로 굉장한 부자가 된다. 자주색 피아트 오픈카를 들여놓았는데 그건 도시에서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한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후 아내가 죽었고, 어려서부터 이상한 기질로 외가 친척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한 딸 클라라는 예상치 못한 미인으로 성장했으며, 본인은 목석 같은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다가 다가온 1929년 10월 26일, 검은 금요일의 다음날 아침, 울티모는 조간신문을 통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전 재산이 날아가버렸다는 소식을 읽고 뇌졸중을 일으켜 그날 아침에 파리에서 돌아온 클라라의 품에 안겨 숨을 멈춘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골짜기 출신 울티모는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피부의 증조부, 갈색 피부의 조부, 구릿빛 아버지에 이어 태양의 아이와 같은 피부색을 지닌 클라라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빛나는 미모를 갖게 된다. 말년 팔자가 험해서 그렇지 세상에 날 때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이이의 나이 스물 근처에 이르자 늘씬한 다리, 검은 두 눈동자, 도톰한 입술을 하이힐, 모피, 자동차 바퀴만 한 커다란 모자로 치장한 채 아버지와 함께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를 관람하곤 했다. 아니, 주인공인 클라라보다는 이이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연인이라고 여겼던 지휘자 에트빈에 관해 말해보자.

  가난한 야심가 에트빈. 젊었을 때까지 지독하게 가난했다. 음악에 관해 굉장한 관심이 있었지만 하다못해 임윤찬처럼 아파트 상가에서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한 에트빈은 지방 작곡가에게 간곡하게 요청해 무료로 개인 레슨을 받는 기회를 잡는다. 그러다 작곡보다는 지휘에 천재가 있다는 걸 발견한 스승의 권유로 지휘법을 공부하게 되고, 천부적으로 비즈니스 마인드가 충만했던 젊은 에트빈은 음악학교의 남녀 학생들을 모집해 자신의 교향악단인 “청년교향악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에트빈의 마케팅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청년향’을 특화해 히트 상품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레퍼토리가 아니라 교향악단이 연주를 기피하는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첫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버르토크, 젬린스키, 그리고 지방 작곡가의 곡을 선정하고, 앞쪽에 앉은 연주자의 친인척과 친구들의 갈채와 뒷자리에 앉은 청중들의 야유를 동시에 얻어내, 어쨌든 장안의 화제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이때 나중에 베를린에서 연주자로 성공하고 부헨발트에서 살해당할 운명인 여성 첼리스트의 친구 자격으로 앞자리에 앉았던 클라라와 에트빈의 첫 눈길, 서로 눈이 마주쳤는지도 모른 채 교환된 첫 눈길을 주고 받는다.

  천재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이기적인 품성을 에트빈 역시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겠다. 쉽게 말해서 그냥 인간으로의 에트빈은 그가 좋아했던 리하르트 씨들처럼 재수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얼마 후 클라라에게 교향악단의 행정과 회계, 그리고 정기권제도, 초청공연, 솔리스트 접대, 단원 복지를 총괄하는 “무급” 총무직을 제안하고, 클라라는 이를 받아들인다. 평생 부유하게 살았던 스무 살 남짓의 클라라는 청년향의 업무를 위해 아버지한테 받은 돈과 아버지 집의 방을 사용하는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다. 에트빈에 대한 선의, 호감 때문이었겠지. 클라라의 무급봉사, 금전적 지원을 에트빈이 몰랐다고 볼 수 없지만,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클라라를 자신의 충실한 수하처럼 부리는 에트빈은, 청년향의 첫번째 출장공연인, 제 3회 현대음악 주간의 파리 연주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한 라벨로부터 격찬을 받는 대성공을 이루고, 이에 감격한 파티 끝에 클라라의 방에 들어 기어이 자빠뜨린다.

  클라라는 에트빈을 사랑했겠지. 근데 에트빈은? 천만의 말씀. 아니올시다. 위에서 이미 얘기했듯, 파리 공연을 마치고 다음날부터 1박 2일로 끝난 기차여행 끝에 돌아온 1929년 10월 26일 아침, 클라라는 돈 한 푼 지니지 못한 가난뱅이 고아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여기까지만 하자. 이후 드라마는 전형적인 신파극으로 접어든다. 물론 클라라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에트빈은 그가 겪은 숱한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이지 애초부터 사랑은 무슨 사랑.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질로 적지 않은 말을 들어온 클라라는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사랑을 버리지 못한다. 당연하지. 그게 버린다고 버려지는 건가. 난 책을 읽는 도중에 클라라는 자신이 선택을 해서 하여간 평생 품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한 번 해봤지만, 클라라의 남편과 아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남편은 자신의 죽음이 아내와 갈라놓기 전까지 변변한 정 한 번 받아보지 못했고, 아들은, 책을 읽어보시라, 하여튼 이 두 명의 남자들이 안타깝기 한이 없었다.

  감각적으로 돋보이는 문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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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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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과 베트남전 중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 노동인구의 부족을 체감하면서 이민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꾸어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도 주로 파시스트들의 공포정치에 불만을 품은 인텔리 계층을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 이민을 감행했다. 당시에 미국행 비행기에 가장 많이 오른 인종이 라틴 아메리카의 유색인들이었다. 저 아름다운 카리브 해의, 영연방 앤티가에서 열아홉 살 아가씨 루시 조지핀 포터도 섬을 나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에서 비행기를 타고 홀홀단신으로 미국 뉴욕주의 공항에 내려, 열아홉 평생 처음 북반구의 1월 겨울을 체험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고향인 앤티가 섬에서는 정말로 근사한 외모를 가진 덕택에 평생, 쉼없이 여자들에 둘러싸여 살던 아버지와, 남편 때문에 속을 썩이며 사는 것을 숙명으로 아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가며 외동딸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심통맞은 삼신할매는 딸이 아홉 살이 되자 이제 산도가 막힌 줄 알고 살던 부부에게 내리 아들 세 명을 점지해주었으며, 첫아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부부의 모든 기대는 한 순간에 아들(들)을 향하게 된다. 부부는 아들 출산과 동시에, 비록 잘 생긴 아빠가 다른 여자를 통해 낳은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 본인도 모를 정도이지만, 갑자기 금슬이 좋아져 아들이 자라면 여왕이 사는 영국에서 공부를 시켜 변호사나 의사로 만들기 위해 뒷바라지 빵빵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이런 다짐을 옆에서 들은 열 살 먹고,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누나는 슬슬 속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는 단 한 번도 나한테 의사, 변호사, 유학 얘기를 해본 적이 없잖아.

  전형적으로 할머니들이나 달고 다닐 구식 이름을 가진 루시가 얼마나 똑똑하고 공부도 잘 했느냐 하면, 퀸 빅토리아 여학교에 다닐 때, 학교 대표로 만장하신 귀빈, 학부모, 학생들 앞에서 영국시인이 수선화를 보고 쓴 길고 긴 시, 정작 루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황한 시를 외워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낭송을 해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시가 루시에게 조금의 감동이나 공감을 주기는커녕 왜 남의 꽃을 찬양해야 하는지 속이 뒤집히는 걸 그들이 알지는 못했지만.

  이런 딸은 고향 앤티가에선 당연하게 여겨진 딸 차별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해, 드디어 사춘기에 돌입, 정상적인 2차 성징이 도드라짐과 동시에 성격을 좀 삐딱하게 변해버린 것 같다. 이해 하시겠지? 하여튼 카리브 지역에서는 보통일지도 모르지만 동아시아에선 너무 일찍 아닌가 싶을 정도의 성적 경험을 솔직하게 적어간다. 열네 살 때 ‘태너’라는 남자 아이와 이른바 (*락* 님이 처음 언급하셨던)텅슬라이딩 키스를 경험하는데, 어이가 없거나 쇼킹하게도, 루시는 이 경험을 통해, 혀라는 부위가 별 맛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이어서 진짜 성경험까지. 작가 킨케이드의 펜은 거침이 없다.

  이렇게 몇 년 더 살다가, 남동생이 셋 생기고 부부는 다 큰 딸까지 네 명의 아이들을 양육할 여력이 없게 되자 맏이에게, 살아가면서 한 순간도 좋게 얘기해본 적이 없는 간호사를 갑자기 여성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직업이라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더니, 미국에서 딸을 넷 키우는 중산층의 베이비 시터를 하며 야간학교를 다니며 간호사가 되라고 하면서 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태웠던 것. 이리하여 19세 젊은이 특유의 반항기로 똘똘 뭉친 루시 조지핀 포터는 결코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 쓰인 출생증명서와 여권, 체류 허가증 등등을 소지한 채 미국 땅을 밟은 것.


  미국 땅을 처음 밟은 1월 중순, 루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몇 개가 있다. 엘리베이터, 아파트, 냉장고, 냉장고 속의 음식을 먹는 것, 자기 개인용 화장실과 욕실 등등. 취직한 가정은 머라이어와 루이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생긴 네 명의 어린 딸, 루이자, 메이, 제인, 미리엄, 그리고 요리사 겸 가정부와 이제 새로 베이비 시터가 되는 루시, 이렇게 여덟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여주인 머라이어의 말대로 그들이 루시와 가정부를 정말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머라이어와 루이스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품성을 지닌 전형적인 60년대 백인 미국인 중산층 가정을 꾸려간다.

  그러나 카리브해와 서인도제도, 미국에 사는 문명인보다 훨씬 더 자연과 유사하게 살아온 루시는 선량한 미국인 주부 머라이어의 생각이 낯설다. 다행스럽게 루시의 생각을 별 필터 없이 그대로 밝혀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고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머라이어도 참 괜찮은 여자다.

  루시의 생각은 참으로 다양하게 반항적이다.

  제일 먼저 고향에서 숱하게 경험했던 남자들의 바람기와 허세, 그리고 이런 점이 비단 앤티가 섬의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선량하기 그지없는 미국 남자이자 자신의 주인집 남자이기도 한 루이스도 똑 같은 짐승이란 것.

  섹스에 관한 솔직하기 그지없는 묘사. 그렇다고 톡톡 튀게 야하거나 그런 거 아니니까 괜히 김칫국 마시지 마시라. 내 의견으로는 서인도제도 유색인종들이 적도의 태양 아래 세상 어디보다 자연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건강한 자연으로의 섹스 관념이 아닌가 싶었다.

  백인들, 특히 식민모국인 영국과 미국적 네오 제국주의에 대한 반식민 의식, 미국 자본주의와 미국식 속물에 관한 서인도제도 사람의 시각을 통한 관찰 등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루시의 건강한, 그리고 스무 살 젊음 고유의 권리인 반항적 시각이란 의미다.


  짧은 작품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 건 모든 이에게 공개하는 독후감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루시가 미국 땅에서 벌인 좌충우돌에 관해서는 직접 읽고 확인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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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7-12 0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텅 슬라이딩 덕분에 제가 소환되는 리뷰로군요. 마침 저도 이 책을 사둔 바, 이제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루시가 성장하면서 생각하는 바를 따라가는 게 책을 읽는 재미가 되겠군요. 후훗.

Falstaff 2022-07-12 12:18   좋아요 2 | URL
죄송합니다. *락* 이라고도 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때 다락방 님의 얘기가 얼마나 재미있고 재치 있어서 뒷골이 땡땡해지던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슬쩍 그냥 쓸까, 하다가 알라딘의 눈 밝은 독자께서 혹시 표절 운운하실까봐, 그게 아니더라도, 어엿하게 그건 제 아이디어가 아니니까 원래 사용하신 분을 거론하는 것이.... 비록 ‘다*방‘ 이 아니고 ˝*락*˝ 이라 해 좀 더 알기 어렵게 하더라도 밝혀야겠다. 싶어서 말입죠. ^^;;;
이 책은 솔직히 별점을 세 개 줄까, 네 개 줄까, 고민하다가 재치있는 문장 덕에 하나를 더 줘서 네 개를 준 것입니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coolcat329 2022-07-12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글 읽어보니 소설에서 코믹함이 느껴지는데 맞나요?
루시라는 인물이 엉뚱하면서도 굿센 그런 여성같아요 ㅎ

Falstaff 2022-07-13 08:04   좋아요 2 | URL
오, 코믹하지는 않습니다.
루시는 기성세대의 눈길로 보면 삐딱하고 반항적이고 저만 잘난 젊은이일 수 있습니다. 문장은 그래서 시니컬합니다. 저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글을 통해 여성차별, 남성 속물성과 남성 위주의 사회 (근본적으로 카브리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인), 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 섹스, 자연성 등등 많은 이야기를 자잘하게 풀어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근데 분량이 너무 짧아 그냥 툭, 던져놓고 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게 아쉽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