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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아이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다시 홀링허스트. 1988년 <수영장 도서관>을 출간해 이듬해 서머싯 몸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홀링허스트는 네 번째 장편소설 <아름다움의 선>이 2004년 부커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7년 후, 2011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장편소설 <이방인의 아이>가 다시 부커상 예심long list에 올려 놓았다.
88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모두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의 시대적 배경은 1913, 1926, 1967, 1979~80, 2008년이다. 그러니까 굳이 ‘대하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홀링허스트의 작품이 늘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남성 동성애를 다루었다. 내가 읽은 지난 네 편의 홀링허스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하면, ① 영국 최고의 명문대학 옥스퍼드 출신, ② 귀족 부르주아, ③ 대리석 조각 같은 외모의 미남자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옥스퍼드와 필적하는 또다른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 출신이며 준남작의 장자로 3천 에이커(367만 평)의 토지와 작위 세습권을 가지고 있고,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대신 한 시절엔 이와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은 시詩적 천재를 가진 매력남이 등장한다. 세실 밸런스.
런던 근교 북부 미들섹스 지역에 너른 잔디밭과 사람이 직접 만든 바위 정원, 연못, 그리고 장미와 베고니아, 월계수 나무가 있는 정원이 딸린 널따란 저택이 있어 이를 ‘투 에이커스’라고 했다. 이 집은 성실한 프랭크 솔 씨 대에 이르러 저택의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으나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1913년에는 과부 프리다, 아버지를 닮아 성실하기만 한 장남 휴버트, 케임브리지에 다니는 똑똑한 외톨이 조지, 그리고 어여쁜 열여섯 살 막내딸 다프네가 몇 명의 하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1913년의 늦여름, 이 집에 학창시절 내내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던 둘째 조지가 자기보다 두세 살 많은 학교 선배 세실 밸런스와 함께 오면서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아무나 가입하지도 못하고,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비밀에 붙이는 전통을 지닌 케임브리지 클럽에 세실의 도움으로 가입을 하게 된 조지는 당연히 세실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 사이에 교감을 넘은 사랑의 감정이 자라난 것.
세실의 입장에선 자기가 물려받을 3천 에이커의 토지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안 될 2 에이커의 땅에 지은 저택에 무슨 볼 것이 있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 왔겠느냐는 말이지. 조지와의 사랑,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감정을 이제 바야흐로 직접적인 몸의 언어로 소통하고 싶어하는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렇게 조지는 믿었다.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는 그게 맞았다.
때는 1913년. 1차 세계대전을 불과 1년도 남지 않은 시점. 이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등장하는 남성 동성애자들은, 마치 <수영장 도서관>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찰스 낸드위치 경처럼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걸 절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바로 형사입건이 될 수도 있었으니. 그래 작품에 등장하는 19세기 태생의 20세기 초반 게이들은 빠짐없이 여성과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다. 세실은 게이이지만 솔 가문의 외동딸인 다프네에게도 어느 정도 호감을 표시한다. 그래 굳이 구분을 한다면 게이와 바이섹슈얼의 중간 정도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독자에게 그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바로 다음해,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바로 왕립 버크셔 연대 6대대 대위로 참전한 세실 테우크로스 밸런스는 1916년 7월에 프랑스 마리쿠르에서 전사해버리고 만다. 이때 나이 스물다섯 살. 주인공인줄 알았던 인물이 불과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다.
1부에서 ‘투 에이커스’ 저택에 3일 동안 방문한 세실은 숲 속 깊은 곳에서 조지와 성접촉을 한 번 했고, 이때 부근을 지나던 다프네를 발견한다. 다프네는 예전 소녀들이 흔히 가지고 있던 서명첩, 즉 사인북에 여러 유명인사의 사인을 받아 보관하고 있었으며, 열여섯 살 감수성 많은 소녀답게 괜찮게 생긴 부잣집 ‘시인’ 도련님이면서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운 면모에도 호감을 느껴 세실에게도 서명을 부탁해 사인북을 건넨 상태였다. 다프네가 오빠와 세실의 동성애를 알았는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독자로서는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어쨌거나 세실은 여태, 물론 사인북을 건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전혀 손대지 않고 있던 공책에, 이후 백 년 가까이 영국인의 애송시이며 자신의 대표 작품이 될 <투 에이커스>라는 시를 써서 서명을 하고 다프네에게 돌려준다. 독자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도 이 시가 과연 다프네에게 헌정하는 것인지, 연인인 조지를 향한 것인지 미궁에서 헤맬 것이다.
세실은 1부와 동시에 작품 속에서 사라진다. 독자는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여태 주인공인줄 알았던 등장인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남은 7백쪽은 어떤 스토리로 이어질까 싶어서. 걱정하지 마시라.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특기,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는 솜씨를 나머지 7백쪽에 걸쳐 멀미가 날 만큼 즐기거나, 독자에 따라서는 고통을 받을 수도 있을 터이니.
한 번 초대받아 한 가정을 방문하면 방문객은 자신의 가정으로 초대를 하는 것이 백인 소설에선 그냥 상식이다. 세실 역시 막내딸 다프네를 자기네 집, 가훈인 “오늘을 즐겨라. Carpe Diem”라고 도들새김한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건물인 콜리 저택에 오빠 조지와 함께 초대한다. 그래서 다프네는 밸런스 남작 가문의 드넓은 콜리 저택을 두 번 방문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한 세실이 다프네와 다른 한 여성에게 보낸 서면 청혼장에 승낙하기도 전에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한 후, 옥스퍼드 재학중에 참전했다가 폭탄 파편에 왼쪽 발가락 세 개를 절단한 채 퇴역한 세실의 동생 더들리와 결혼해버린다. 당시엔 이런 일이 그냥 보편적이었단다. 전사한 형의 약혼녀와 결혼하는 것이. 물론 승낙 편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승낙한다고 썼지만 보내기 전에 공증을 받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다프네 아가씨는 콜리 저택에 처음 방문하자마자 저택의 위용과 화려함과 사치에 매료되어 이 집에서 살고 싶다 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나중에 얘기한다.
다프네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실하기 그지없는 장남 휴버트도 전쟁통에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둘째 조지는 전쟁이 끝나고 영국사 공부를 계속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머리가 벗겨지고 자신의 성적 취향과는 달리 당시 율법에 따라 남자만 좋아할 수 없어서 케임브리지에서 함께 역사를 공부한 매들리와 결혼해 아이 없이 평생을 대머리로 늙어가며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 한 권을 부부 공동으로 출간한다. 아주 나중엔 세실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연애를 조금은, 아주 조금 감지할 수 있게 둘 사이의 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내기도 하지만 그건 1967년 동성애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이후였음은 물론이다.
세실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자 다프네의 남편 더들리는 애초 작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던 남자로 성장 과정 중에 형 세실의 시적 천재에 늘 비교가 되면서 은근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더. 전쟁 중 야간정찰을 하다 자기 곁에서 죽어간 빌리 프리도에게 지나치게 집착해 이 증상이 신경쇠약에까지 이르러 성격이 많이 비틀어졌는데, 읽는 사람은 형 세실로 미루어 보아 이것이 밸런스 가문에서 형질처럼 내려오는 동성애적 성향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불친절한 홀링허스트는 책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결론은 오직 독자 몫으로 둔 채. 나는 양성애자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1916년에 형이 죽자 평소 집에서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어머니 밸런스 부인은 준남작, 귀족이란 신분과 막강한 부르주아의 금권으로 직접 프랑스로 건너가 평민 출신 병사들이 위험을 무릅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세실의 시신을 영국으로 운구, 콜리 저택의 교회에 안장하는 것도 모자라 유명한 이태리 조각가를 초빙해 등신대 대리석 조각을 만들어 교회에 안치하는 데 이른다. 가뜩이나 약간의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더들리는 전쟁에서 가져온 신경쇠약과 합해져, 정상에서 많이 어긋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있으나 좀 어색한 일탈을 저지르는데 특히 아내 다프네, 맏딸 코리나, 그리고 아들 윌프리드를 대하는 방식에서 그러했다.
세월이 지나 세실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장군’ 밸런스 부인은 온갖 손님을 콜리 저택에 초대해 성대한 추모식을 열고, 전기작가 서배스천 스토크스에게 세실 밸런스 전기를 위촉해 초대받은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주선한다. 여기에 소환된 인물 가운데 창창하게 젊은 나이에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청년 화가인 레벨 랄프도 끼어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가 끝난 밤, 세실의 동생 더들리의 주도로 모든 참가자는 떡이 되도록 술에 절었고, 이 와중에 리넨 실로 숨어든 레벨 랄프와 다프네는 아침이 밝도록 서로의 몸을 탐했으며, 얼마 후 야반도주해 살림을 차리는 데 성공한다.
다프네의 맏딸 코리나는, 2차 세계대전 중 포로로 잡혔다가 죽음 바로 앞에서 목숨을 구한 후유증으로 광장 공포증에 평생 시달리다 결국 자기 머리에 총알을 박아 죽을 운명인 점잖고 온화한 은행 지점장 레슬리 키핑과 결혼해 존과 줄리언을 낳는다. 아들 윌프리드는 엄마 다프네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다가 슬그머니 작품에서 사라지지만 어엿하게 남작 작위 계승자다. 다프네는 두번째 남편 랄프가 죽고 다시 제이콥스 씨와 결혼하지만 아이는 없고 의붓자매가 있는데 딸이 제니, 옥스퍼드를 거쳐 불문학자가 된다. 의붓아들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등장해 세실 밸런스를 연구하는 폴 브라이언트와 다프네의 면담을 연결해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세실이 쓴 역사적인 시 <투 에이커스>의 내력을 밝히는 것이 주제다. 이를 위해 1부에서 독자가 알아채기 힘든 단서 몇을 제시하고 이후 세실 사망 10주기 추도식, 다프네의 70번째 생일 파티, 전기작가 폴 브라이언트와 다프네의 면담, 그리고 열린 결말로 끝나는 종지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처음엔 홀링허스트 특유의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잘 읽힌다. 잘 읽히고, 또 잘 읽힌다. 그러나 꽃노래도 삼세번이지, 한참 지나면 혓바닥이 쑥 빠진다. 세상에나. 한 행위를 위하여 작가는 해당 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장황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준비한다. 한 번 더 얘기하면,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여태 읽은 앨런 홀링허스트도 읽으면서 장황한 느낌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기억엔, 별로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이번엔 880쪽을 6백쪽이나 550쪽 정도로 줄여도 충분히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하는 건 작가의 권리이니 독자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해도 적당히 해야지, 그걸 읽고 지겹다, 재미있다 판단하는 건 독자의 권리다. 저 앞에서 이 작품을 “대하소설”이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이의 책을 읽으면 며칠 동안,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 가운데 도대체 몇 명이나 게이가 있는 건지 궁금해 하다가, 누군가 내 엉덩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주위를 둘레둘레 관찰하게 된다. 정말이다. 의심스러우면 한 번 읽어보시라. 남자 등장인물 셋 가운데 두 명은 게이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