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맹인 안마사 문예중앙시선 32
심재휘 지음 / 문예중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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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휘는 처음 읽는다. 며칠 전에는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던 반면, 이번엔 심재휘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였다. 아이고, 무식하면 가만이나 있지. 차라리 시치미 딱 떼고 조용히나 있던지 말이지. 이게 뭐야, 자만심 상하게시리.

  ‘재’자 돌림 심재휘는 강릉 출신의 1963년 토끼띠 교수님. 눈치를 보아 빠른 63년이라 범띠일 수도 있겠다. 고려대학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취득. PhD를 딴 1997년에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심재휘는 현재 대진대학 문예콘텐츠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제 나이 들어 학과장 자리를 후배한테 넘긴 거 같다. 개나 걸이나 다 등록되어 있는 네이버 인명사전에 심재휘의 이름은 없다. 그게 오히려 특색있군. 근데 인터넷 책방 응24에는 심재휘에 관해서 두 가지 자료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고려대학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강사로 재직 중인 심재휘. 거참 조금 헷갈리는 데 이 시집을 낸 시인 심재휘는 대진대 교수가 맞을 거다. 지가 설마 대학에 내는 이력서를 거짓으로 썼겠어?


  제일 앞에 배치한 시부터 톡 쏘는 맛이 있다.



  옛사랑


  도마 위의 양파 반 토막이

  그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빈집을

  봄날 내내 견디고 있다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겹겹이 쌓인 껍질의 날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있다    (전문 p.13)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양파 하나 자르면서 옛사랑을, 그리 허망했던 맹세를 떠올린다. 그래서 눈물 좀 찔끔거렸을까? 자꾸 옛사랑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다 진짜로 만나면 사고친다. 하긴 뭐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느냐고? 넘겨짚지 마시라, 안 알려준다.

  옛사랑을 시집의 선봉에 세웠다고 이런 시들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도서관에서 특히 시집을 골라 읽으면 앞서 읽은 독자가 좋게 읽은 시에 표시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 책에서 그런 시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소개해보자.



  어떤 무늬



  오후의 병실에 해가 지나가고

  나는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본다

  아주 천천히 몇 점의 온기가

  그의 걸음처럼 내게로 온다

  체온을 띠고 만나는 서로의 젖은 뼈 사이에는

  바람에 이는 잔물결들만 가득하다


  가장 적은 피와 살로 연명하는

  이생의 몸 하나를 만질 때

  내 아버지라는 무늬의 벽지로 도배해놓은

  이토록 낯익은 방 안에 들어와 볼 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생에 어룽대며 비쳤던

  벽지의 무늬


  그의 폐가 서서히 저물듯이 저녁이 오고

  나는 때늦은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린다

  낡고 여윈 무늬 하나가

  나를 쳐다본다


  아버지라는 무늬의 방

  누군가 이 방의 문을 걸어 잠근다면

  나는 그 안에 영원히 갇히게 되겠지만

  방 안의 무늬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겠다    (전문 p. 28~29)



  소설 속의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대개 취미생활로 술 마시기와 식구들 두드려 패기, 고기 안 먹는다는 딸 입 속에 억지로 탕수육 쑤셔 넣기, 오토바이 뒤에 개 한 마리 줄로 묶고 달리기, 치마만 입었다 하면 누가 됐든 자빠뜨리기, 도리짓고땡과 섰다 같이 비 오는 날 우산 쓴 남자와 개구락지 그림 구경하기 등등인 반면 시 속의 아버지는 개구락지의 사촌형인 두꺼비가 손등에 앉은 것처럼 막노동을 하면서 가족 먹여 살리느라 선비손이 거친 손으로 변해버렸거나, 라면을 끓이는 한이 있어도 그게 딸들과의 기쁜 만찬으로 변하게 하거나, 평생의 궁상을 접고 이렇게 세상을 마감해 남은 자식들 앙가슴을 울리고 만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소설이라는 산문은 삶의 곤고함에서 나오고 시라는 운문은 삶의 그리움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냐, 아냐. 이런 주장은 틀림없이 염병일 거야. 좋아. 실제의 아버지는 소설에 가까울까, 시에 가까울까? 참 나. 남의 시 읽으면서 별 엉뚱한 생각을 다 하네. 이런 분도 계시고 그런 새끼들도 사는 거야. 그게 인생이잖아.


  이 시집의 2부는 “북쪽 마을에서의 일 년”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위도 45도. 추운 곳. 처음 나오는 시의 제목이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나는 북쪽, 그러면 저 캄차카 반도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타이가 삼림을, 그걸 지나쳐 광활한 벌판과 목초지대, 그리고 사막을 연상한다. 내 상상 속의 북쪽 마을은 유라시아 반도의 북쪽, 한대림freezing forest과 황량한 벌판과 초원, 한때는 열대 삼림지역이던 거친 사막은 당연히 한 시절 나의 로망이었다.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3연과 4연은 이렇게 쓰였다.



  눈 쌓인 뒷마당가에는

  전나무 숲이 어둠을 품고 잠들어 있다

  마지막 남은 원주민인 듯

  마음이 서러운 갓 이민자인 듯

  자작나무 한 그루 젖지 않은 전나무들 사이에 서서

  온몸에 눈을 맞고 있다

  좁고 둥근 그의 발치로 달빛은 내려와

  여윈 뿌리를 손으로 가만히 덮어준다


  눈부신 날에 누군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자작나무 쪽으로 한 사람의 발자국이

  밤눈 위에 곧게 나 있다   (부분 p.64~65)



  무슨 근거로 이 시를 읽고 유라시아 대륙의 위도 45도 근처라고 했느냐고? 일간 시에서 위도 45도, 겁나 추운 곳이라 말했고, 시집의 제목이 《중국인 맹인 안마사》이며, <변방에서>라는 시 속에는



  섣달 중에도 흐린,

  옛 만주국의 어느 변방을 걸으면

  갑자기 들켜버린 마음처럼 나타나는

  러시아 거리가 있다

  (중략)

  1월의 햇살처럼 말없이 빛나는 곳

  영문도 모르는 중국 소녀들이

  조잡한 가로등에 기대어 서툴게

  눈빛을 보낸다 (하략)   (부분 p.22)



  얼핏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오르는 바람에 국경의 밤 비슷한, 그러면서도 친근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원주민”이니 “마음이 서러운 갓 이민자”라느니 해서 영낙없이 이 시인이 드디어 나의 로망, 유라시아 북쪽의 타이가 숲을 건드리고 마는구나, 잠깐 감격했다는 것이지. 근데, 하긴. 명색이 대학 교수인데 일년 동안 러시아의 타이가 숲에서 살았겠느냐고. 아무리 안식년이라 해도 그게 안식하라고 주는 안식년은 아니잖여? 그잖여? 눈치를 보니 딸과 함께 타이가 숲이 아니라 캐나다의 한 도시에서 살다 온 모양이다. 캐나다야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다 밀림이고, 원주민은 별로 구경할 수 없어도 있기는 있고 이민자는 많겠지. 그래서 좋다가 김 샜다. 그건 시인 책임 아니다. 미리 김칫국물 벌컥벌컥 마셔버린 내가 후졌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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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1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아사다 지로, <창궁의 묘성>
수요일. 존 밴빌, <오래된 빛>
금요일. 한일연극교류협의회 편, 《현대일본희곡집 10》

stella.K 2025-04-11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 리뷰 참 재밌게 잘 쓰십니다. 저는 어제 거의 25만년만에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고 번역시도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선전해 읽기 시작했는데 뭔 말을 하는 건지 당췌 모르겠더군요. 번역시 좋고 나쁨을 떠나서 내가 시를 안 읽어도 너무 안 읽었구나 좀 반성이 되더군요.
소설 같은 시. 딱 제 취향인데ᆢ
근데 너무하십니다 시인의 이름 딱 봐도 남자 이름인데. ㅋㅋ

Falstaff 2025-04-11 16:02   좋아요 1 | URL
앗, 읽기 좋으셨습니까? 기분 좋습니다. 저는 우짰든 번역시는 읽지 않아요. ㅋㅋㅋ
휘는 대개 남자 이름에 들어갔었는데요, 20세기 후반 들어 여자 이름에도 왕왕 쓰더라고요. 빽빽이 소찬휘? ㅎㅎㅎ

stella.K 2025-04-11 16:40   좋아요 1 | URL
ㅎㅎ 하긴 탈랜트 이휘향 씨도 있죠.~

얄리얄리 2025-04-11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궁의 묘성>이라니요. 생각지도 못했던 책제목을 여기서 봅니다.ㅎㅎ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는데,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날 듯합니다.

Falstaff 2025-04-11 17: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독후감을 겁나게 길게 쓰기도 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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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양산
마쓰다 마사타카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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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현 기타마쓰우라에서 1962년에 태어난 마쓰다 마사타카는 나가사키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토로 가서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철학哲學. 금속공학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철학을 했든, 금속공학을 했든 자기 전공과 상관없이 극장 주변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에 극단 “스페이스 앤드 타임 씨어터”를 창단해 7년간 운영하며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극작가가 직접 극단을 만들어 자기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건 우리한테도 낯설지 않다. <속살>을 쓰고 연출도 한 이은준 역시 스승 박근형과 함께 극단 “골목길”을 창단했고, 12년 후에는 스스로 독립해 극단 “파수꾼”을 만들어 자신의 대표작인 <속살>을 직접 연출했다. 교토조형예술대학의 객원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릿교立敎대학 현대심리학부 영상신체학과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영상신체학映像身體學이 무엇을 가르치는 공부인지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릿교대학에 전화해볼 생각까지 나지는 않는다. 설마 카메라(영상) 앞에서 신체를 어떻게 노출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건 아니겠지?

  <바다와 양산>은 1994년에 기시다 구니시 연극상과 오사카 가스gas 주식회사가 후원하는 OMS 연극(대상이 아니라) 특별상을 받은 작품으로 1년 전 OMS 대상을 받은 <비탈 위에 있는 집>과 더불어 마쓰다 영상신체학과 교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미리 내 감상을 말하자면, 딱 내 취향이다. 괜히 잡다한 대사와 과장된 연기 같은 거 없이 속으로는 쌓인 거 많아도 겉으로 특별하게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 다분히 그리고 특히 일본인에 많은 감정 숨기기와 조금 다른,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속 삭힘’ 같은 연극. 그리하여 공연을 직접 보면 혹시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짜냐, 내 취향에 맞을 거 같은 걸.

  역자 송선호의 작품 해설을 보면 마쓰다는 주요 작품의 무대로 일본식 거실인 “차노마”를 선택했다고 한다. <바다와 양산> 역시 마당이 보이는 차노마를 무대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 “평범한 부부의 삶과 죽음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지만 인물들의 심리와 내적 갈등을 정교하고 깊이있게 묘사한 아름다운 작품”이라 말한다. 내가 읽은 감상과 상당히 가까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규슈 지방의 작은 도시에 고등학교 교사이자 소설가인 요지洋次와 불치병에 걸려 곧 세상을 떠야 하는 아내 나오코直子가 세들어 살고 있다. 무대는 관객석 가까이 차노마가 있고 그 너머에 마당을 배치했다. 막이 오르면 요지가 마당쪽을 보며, 그러니까 객석을 등지고 앉아 손톱을 깎고 있다. 이어서 등장하는 주인집 여자 세토야마 시게. 시게는 사실 요지에게 밀린 월세를 독촉하려고 온 것이지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못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겠지. 고등학교 교사이고 소설가라면 수입이 웬만할 터인데, 극중에 시게의 작품을 받으러 출판사 직원이 와서 원고료도 주고, 지붕 수리하는 것을 도와줄 정도이니 그럴 것 같은데, 병든 아내의 진료비와 약값으로 많이 써서 그런지 사는 건 궁색하다. 세토 아주머니가 퇴장하고 나오코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등장한다. 병세가 조금 호전이 되어 시장에 다녀왔고, 오늘 길에 조금 지쳐 공원에서 잠깐 쉬다 오는 길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공원 벤치에 양산을 두고 온 거다. 그래 잠깐 부부끼리 서로 자신이 가서 양산을 가져오겠다고 하다 남편이 공원에 간 사이에 주인집 남자 세토야마 다케후미 씨가 와서 운동회에 사람이 모자라 요지가 장애물 경주에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한다. 시게 다시 등장. 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간 나오코는 그곳에서 기절해버리고 만다.

  의사 등장. 그리고 앞으로 3개월을 살 수 있다는 시한부 선언. 요지는 차마 나오코에게 의사의 판정을 이야기할 수 없다. 게다가 요지는 학교에서 잘렸다. 왜 잘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여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말한다. 출판사 직원이 요시오카가 야간 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한 다음에야. 요시오카가 집에 와 지붕 물받이 수리를 도와주었고, 요시오카를 보고 있던 나오코는 전에 요지의 원고를 받으러 왔던 다다를 떠올린다. 그 여자 이름이 다다였어. 요지와 깊은 사이였던 것이 분명해. 사실이다. 그러나 극이 끝날 때까지 요지는 죽어가는 나오코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나오코 역시 자신이 그걸 알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도쿄 본사로 발령받아 전근 인사차 마지막으로 원고를 받으러 온 다다를 다시 직접 보고, 차까지 끓여 대접을 하면서도. 나오코 마음까지 평안한 건 아니겠지. 나오코는 다다의 찻잔을 엎지른다. 갑작스러운 침묵. 요지가 다탁을 닦으려 하고, 나오코는 그런 요지의 팔을 급하게 나꿔채 자신의 무릎 위에 돌려 놓는다. 이제 세 명 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다다는 더 이상 자리에서 버틸 수 없어 서둘러 퇴장해버리고 만다. 요지가 뒤따라 나갔다가 돌아와 아내와 마주친다. 나오코는 요지에게 부탁한다. 나를 잊지 마. 이날 부부는 바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다다 때문에 버스를 놓쳐 이들은 바다에 갈 수 없다. 이런 묘사가 참 좋다. 대사가 아니라 행동, 그것도 간단한 그러나 치명적인 행위로 무엇보다 효과적인 호소를 하는 장면. 이런 것이 한 번 더 나온다.

  다음해 1월. 나오코가 죽었다. 요지가 나오코의 유골을 들고 집에 온다. 우리나라하고 장례의식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죽어 분골을 아파트에 들고 들어온 걸 알면 아파트 주민들 난리난다. 반면에 일본은 집구석마다 다 귀신이 있어서 분골을 집에 모셔놓고 밥도 차려주고, 절도 하고 향도 지핀다. 우리나라하고 같은 점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거. 그래서 요지는 상을 펴고, 코끼리 밥솥에서 밥을 퍼 올려놓고 먹다가 마당을 보니 눈이 내린다. 요지는 무심하게 평소 나오코가 앉아 있고는 하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이봐… 눈 내린다….”라고 말하지만 당연히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요지는 그저 후루룩 소리내며 밥을 계속 먹으면서 막이 내려간다.


  서양, 그러니까 유럽과 아메리카의 연극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들은 주로 대사로 사건을 설명하고, 전개하며 해결하는 반면에 마쓰다는 절제된 대사와 절제된 행동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공백이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는 거대한 자원/재료임을 기막히게 보여준다. 여기에 껌벅 넘어간 거다. 차이콥스키 5번 교향곡 4악장 종결부분의 짧지 않은 휴지기. 그 정도도 아닌 현악사중주 중의 극히 짧은 완벽한 소리 없음 상태와 비교할 수 있는 여백의 힘이란. 이 양반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지만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책이 이것 말고 없다. 이 책도 절판. 정가가 7천원인데 상태가 별로인 중급 헌책이 1만5천원. 2만원 부르는 곳도 있다. 우리 희곡에 이런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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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4-09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짜시기는요? 그냥 좋아하시면 되죠. ㅋㅋ
마지막 단락 읽으니까 화~악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5-04-09 16: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좋으면 걍 좋은 것이지요. ㅎㅎㅎ
이 책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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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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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 참 구경하기 힘든 것 가운데 시인, 소설가, 극작가 중에서 남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 구경을 하는 거다. 이미 문학판은 여성시대라고 전에도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시중에 구병모라는 이름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이야, 오랜만에 남자 작가가 떴구나, 반가워하던 일도 있었다. 구병모의 작품을 꼭 읽어본다고 작심을 했건만 어떻게 지내다보니 세월만 죽였다가, 이번에 탁, 골랐다.

  <파쇄>. 단편소설 딱 한 편으로 책 만들어 비싸게 팔아먹는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 가운데 한 권.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페이지 수 적고, 판형 작고, 페이지 여백 널럴하고, 최소한의 활자만 들어가게 만든 신묘한 편집으로 찍은 위픽시리즈는 한 나절이면 책 다 읽고 독후감까지 쓴다. 준비, 땅, 해서 첫 페이지 딱 넘기니까, 엇, 이게 웬걸. 느와르. 10대로 보이는 여성이 산 속에서 성인 남자이며 전문적인 킬러로부터 수련을 받는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분히 저 오래 전 홍콩 영화에서 가족 몰살당한 청년이 외진 곳에 은거하며 홀로 사는 무림의 절정고수한테 무술을 배우는 것과 동일하다. 즉 초보와 비슷한, 이때 초보라고 하는 것도 우리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절정의 고수지만 고수들이 보기에 초보라는 뜻의 초보라서 상당한 싸움과 살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수준을 일컫는데, 이 초보가 고수의 지도편달 아래 날이면 날마다 저 먼 계곡에서 물을 날라와 큰 항아리에 채우고, 온갖 험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다가 상처도 입고 뭐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시험을 거쳐 결국 사부를 능가하는 초절정고수로 하산하는 것까지. 다만 단련하는 것이 쿵푸가 아니고 진짜 살육, 암살, 저격, 작업 후 도피, 은닉 기술 등을 총망라한다. 세월이 가니까 맨손 싸움에서 칼, 총으로 진화하는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아직도 취권, 당랑권, 외팔이 드래곤 하면 장사가 되겠어?

  그러나 아뿔싸,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는다. 나, 이런 거 안 좋아한다. 많고 많은 장르 중에 하필이면 죽고 죽이는 이야기를. 그러지 않아도 살기에 팍팍한 세월에 말이지. 그래서 얼른, 후딱 읽어 치웠다.

  놀라운 일은 책 다 읽고 독후감 쓰려고 작가 구병모를 검색해보는 중에 생겼다. 세상에. 구병모가 여자다. 본명 정유경.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76년 용띠 여사님. 피시식. 그럼 그렇지, 요즘 세상에 남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가 어디 흔해? 이제 여성 작가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쓴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월이다.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다. 나하고 맞지 않아서 좀 그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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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4-0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젊은 여성작가’ 분들이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길’을 놓고서 꽤 자주 글을 쓴다고 느낍니다. 여러모로 보면, ‘예전 젊은 남성작가’ 분들이 쓰던 글감이고 글결이었습니다. 이제는 ‘글쓴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여러모로 보면, ‘예전 젊은 남성작가’는 집·마을·학교·군대에서 몸소 깊게 겪은 바 있는 갖은 ‘폭력’을 녹이고 풀어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길’을 썼다면, 또 ‘예전 젊은 여성작가’는 한국전쟁이며 일제강점기라는 굴레를 거치면서 겪은 숱한 죽음을 녹이고 풀어서 썼다면, ‘요즘 젊은 여성작가’ 분들은 ‘사람을 죽이는 솜씨 아닌 솜씨’를 길들이는 ‘군사훈련’을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는 나라’라는 틀에서 바라보면서 쓴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은 피나고 쓰라린 나날’을 녹이고 풀어서 쓰는 ‘죽임질’ 이야기하고, ‘남성가부장권력 마초사회라는 고달프고 괴로운 나날’을 녹이고 풀어서 쓰는 ‘죽임질’ 이야기는 글감과 얼거리와 맺음말이 사뭇 다르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둘 모두 ‘평화’라든지 ‘삶’하고는 맞물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다만, 오늘날 ‘젊은 여성작가’ 분들이 쓰는 소설은 “나중에 연속극이나 영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쓴 밑글(시나리오)” 같다고 느껴요.

그냥 문학을 하고, 그냥 글을 쓰면 될 텐데 싶어서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Falstaff 2025-04-07 10:23   좋아요 0 | URL
구병모가 76년생이면 오십인데요, ˝요즘 젊은 여성작가˝라 부르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하는 데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그게 자기 삶 또는 지난 삶에 대한 아쉬움이면 어떻고, 돈이면 어떻습니까.

hnine 2025-04-07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병모 작가가 남성인줄 아셨군요 ^^
장르 소설, SF소설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작가로 알고 있는데, 이 희곡의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이네요.

그나저나 취권...추억의 영화 이름에 추억 돋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인가, 아버지와 극장 가서 봤어요. 동생들은 연령제한때문에 저만 으쓱하며 보고 왔던 영화였지요.

Falstaff 2025-04-07 10:16   좋아요 0 | URL
정말 남성 작가인 줄 알았습니다. 책 다 읽을 때까지요. ㅋㅋㅋ
취권을 중1 때 보셨다면 저보다 아주 조금 후배님이시네요. 왕우王羽의 외팔이 드라곤은 모르실 거 같고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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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속삭임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나윤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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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인생. 곳곳에 지뢰가 매설된 이차 함수. 발밑에서 언제 터질 지 모르고 아예 안 터질 수도 있는 지뢰. 명작은 아닐지언정 사람 마음 속의 소심하지만 귀여운 비루함을 스타르노네는 귀신처럼 포착해 독자를 미소짓게 한다. <끈>과 <트릭> 별점에 조금 박했던 것도 5별의 작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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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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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의 소도시 니츠키도르프에서 독일계 소수민족 신분, 즉 북부 체코에 사는 독일인을 일컫는 주데텐 독일인을 제외하고, 동남부 유럽 지역에서 생활하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바나트 슈바벤 Banat Schwabian 신분의 1953년생 뱀띠 여사님이다. 니츠키도르프는 2021년 12월 현재 인구가 1,5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독일인들이 많이 모여 살아 독일어만 사용하고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루마니아 사람들은 다중이 모인 곳에서 자기들 모국어로만 대화하는 이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겠지만. 뮐러 가족이 언제부터 루마니아에서 살았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현지의 부유한 농부이자 상인이었다고 한다. 동구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다음에 집구석이 거덜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중에 나치군의 SS 대원으로 활약한 아빠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트럭 운전을 해야 했고, 엄마 카타리나 기온은 전쟁이 끝나고 소련의 점령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을 강제로 수용하던 우크라이나 소재 노동수용소에서 5년을 견뎌 1950년에 22세의 나이로 해방을 맞았다.


  작품 속 방앗간 주인 빈디시의 아내 카타리나 역시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해 돌아온 여성으로 설정했는데, 당시 소련 치하의 노동수용소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곳이었다. 작품 속 생활력 강한 빈디시의 아내는 수용소 첫해는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냈지만 이후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차례로 경비원의 철제 침대를 찾아가 감자를 먹었고, 의사의 철제 침대를 찾아가 사흘 동안 탄갱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질병증명서를 얻었으며, 사토장이 즉 무덤파는 인부의 철제침대에 들은 대가로 마을 초상집에서 가져온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늙은 러시아 여인의 집에 가서 노파를 돌보다가 초록색 트럭을 타고 수용소에서 해방된다. 물론 그동안 카타리나의 생명과도 같았던 겨울 외투, 털 담요, 털조끼, 털양말을 각기 빵 열 조각, 다시 빵 열 조각, 설탕 한 그릇, 옥수수 가루 한 그릇을 받고 팔아 텅 빈 위장을 달랬다.

  1950년에 마을에서 빈디시와 카타리나가 만났다. 빈디시는 러시아에서 죽은 바르바라와 결혼할 생각이었고 카타리나는 전사한 요제프와 결혼하려 했지만, 이제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서, 빈디시와 카타리나는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무덤들 사이, 예배당 뒤편 풀밭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결혼했다. 빈디시는 카타리나가 소련에서 살아나오기 위하여 자기 몸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것이라,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소련에서 있었던 일을 입에 올려 카타리나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이건 죽음 앞에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였는데 세상에 비밀이 없는 법이라서 동네 한 아줌마한테 이야기를 들은 무남독녀 외동딸 아말리에도 “엄마는 소련에서 창녀짓을 했잖아.”라고 식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람에 엄마의 기가 넘어가게 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빈디시가 아내를 미워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건 아니다. 무뚝뚝한 시골 사람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마찬가지인 루마니아의 시골 사람들답게 아무 생각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툭툭 말을 던져놓고, 그 말이 듣는 이의 가슴에 어떤 상처를 줄 것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빈디시의 아내도 그렇다. 2년 전에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후에 빈디시가 좀 집적거리려 할 때마다, “의사가 하지 말라고 했어. 당신 좋으라고 내 방광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라며 싹 돌아눕는 거다. 빈디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여간 아내가 몰인정한 인간인 건 맞다고 생각한다.

  세월은 아마 1970년대 초중반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도 없으며, 정치적으로는 차우세스쿠의 독재가 극을 달려 니콜라예 차우세스쿠 공산당 서기장은 국가의 아버지, 그의 아내 엘레나 차우세스쿠는 국가의 어머니를 칭하면서 당시 국제 독재자 연합 가운데서도 아주 효율적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세뇌하던 시기였다. 이에 염증을 느끼던 독일계 소수민족 주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루마니아를 떠서 조국 독일, 이 가운데 주로 서부 독일로 가기 위하여 공산주의 체제 특유의 길고 길며, 복잡하디 복잡한 행정절차를 밟고 있었다. 빈디시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방앗간을 하고 있는 빈디시는 소위 기름칠이라고 칭하는 뇌물을 이장과 경찰서장, 우체국장, 신부 등등에게 돌렸는데 주로 밀가루 몇 자루 씩이었다. 하루는 이장 집에 역시 잘 빻은 밀가루 두 포대를 실어다 주고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방 안에서 뭔가 낑낑대는 소리가 나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슬쩍 문을 열어 보니 남편이 내려다보는지도 모르고 카타리나는 침대에서 열심히 자위를 하고 있다가, 남편을 보자 별로 놀라지도 않고 동작을 멈추었다. 빈디시는 자기 손길과 몸을 거부하며 혼자 열심히 즐기며 살고 있는 아내를 통해, 세상의 종말을 본 듯한 그리고 빈디시 자신의 종말을 맞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뭐라 하기도 참 거시기해서 그저 “방광이 어떠니 하더니 바로 이거였다는 말이지, 귀부인 마나님.”하고 말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속으로는 조금 켕기기는 했지만, 아내는 곧바로 그르렁거리며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에휴, 카타리나, 나이들어 힘든데 백 번 잘했다. 그짓을 뭐 복잡하고 힘들게 해, 혼자 간단하게 해결해버리고 말지. 하지만 문제는 있다. 내가 두 아이 키우면서 둘 다 사춘기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자기 방 하나씩 주면서 딱, 말했다. 너네 방에서는 너네 마음대로 해. 근데 자위하다가 들키면 그건 자위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야. 짤짤이 면허 취소시켜야 해! 카타리나야 너도 조심 좀 하지 그랬니. 아무리 남편이라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잖아. 입장 바꿔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이왕이면 손가락이라도 좀 씻고 잤으면 좋았을 걸.


  동네 야간경비원도 독일인이다. 조금 모자란 듯. 그는 절대 독일로 가지 않을 사람이다. 그냥 살던 루마니아 작은 도시에 머물러 여생을 보낼 심사인 것이 틀림없다. 그가 방앗간 앞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얕은 잠에 들었다.  빈디시가 벤치에 앉아 말을 붙혔더니 야간경비원은 빵을 씹으면서 나지막이 말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이이의 아내가 한 시절 빵가게 주인과 살과 뼈가 타는 불륜관계를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먼저 죽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나는 집사람을 전부 용서했어. 빵가게 주인 일도 용서했고 도시에서 한 짓도 용서했어. 그러나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다니 그것 하나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아내가 살았을 때 동네에서는 빵집 주인이랑, 그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도시에 나가서도 뼈와 살을 불태웠던 모양인데 그걸 용서한 거하고, 자기 혼자 내비두고 빨리 죽은 건 참 용서하기 힘든 것이, 어떻게 인간이 세상의 거대한 꿩인 것과 연결이 되는지 이건 책이 끝날 때까지 모르겠다.

  좀 모자란 야간경비원. 근데 특히 서양 소설에서는 이렇게 조금 모자란 사람이 놀랍게도 세상의 지혜를 많이 알고 있다. 많아도 정말 많이 알고 있다. 당시 해외 이주 서류에 경찰서장의 확인이 필요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성당 주임신부가 발행한 세례증은 왜 필요한 지 모르겠다. 이 시절 루마니아에서는 당연히 해주어야 할 대민對民 서비스도, 우리나라 1960~70년대가 딱 그랬듯이, 맨입에 되는 게 없었다. 근데 경찰서장과 신부는 취향도 신기하지, 주민등록은 우체국이 문 닫은 시간에 우체국 안에 매트리스를 깔고 경찰서장이 그 위에서 여자한테만 서명을 해준다고 하고, 언제나 서장의 입에서는 독하고 드러운 술냄새가 풀풀 난다는 놀라운 정보를 전해준다. 가톨릭 성당의 신부는 정상적으로 성당 안에서, 다만 성당은 성당 건물인데 사제관에 놓인 신부의 철제침대 위에다 마을 사람들의 세례증을 전부 펼쳐놓고 그걸 찾아야 한다는데 신부 역시 남자는 안 되고 여자하고만 서류를 찾는단다. 빈디시 생각으로는 아내 카타리나가 우크라이나, 당시엔 소련이었던 곳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비슷한 일을 했던 터라 한 번만 더 눈 질끈 감으면 될 거 같았지만, 현명한 바보 야간경비원이 하는 얘기가, 자네 아내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네. 딸내미 아말리에는 좋을 거야.

  아말리에? 세상에나. 아직 어린 아이를 어떻게. 야간경비원은 한 번 더 훈수를 둔다. “걸을 때 앞 발꿈치가 벌어지면 이미 경험을 한 거야.” 아직 시간은 좀 남았다.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빈디시는 아말리에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자기 짐작으로는 모피가공사의 아들이자 유리 기술자로 저 높은 산 위에 지은 공장에 다니는 루디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애초에 벌써 처녀가 아니라 짐작하고 있지만 혹시 또 알아? 이 말을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는 딸 아말리에가 확실히 숫처녀인 것으로 믿고 있다. 아말리에가 처녀가 아니면 세상에 누가 또 처녀란 말이야! 그러나 물론 몇 달 후이지만 아말리에가 우체국 외출 준비를 하다가 아버지 앞에서 핸드백이 열리며 뭔가 반짝이는 것이 떨어졌다. 엄마가 묻는다.

  “그게 뭐니?”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약.”

  “무슨 약?”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무슨 약은 무슨 약. 위대한 1960년대에 여성 해방을 이루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피임약이지.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 지나 아말리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체국의 매트리스 위에서 주민등록등본에 경찰서장의 서명을 받아오고, 덤으로 목에 검붉은 키스마크도 찍어 온다. 며칠 후에는 성당 사제관에도 가서 신부가 시키는대로, 그 엄숙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지시사항, “립스틱을 지워라.”, “슬립을 벗어라.” 그리고 당연히 립 서비스겠지만 “넌 참 예쁜 사과 두 개를 가지고 있구나.”에 이어 “두 다리로 내 등을 감아봐라.”에 고스란히, 아무 말도 않고 착착 일을 수행한다.

  20년 전에는 엄마가 배고픔과 소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몸을 허락했고, 이제는 딸이 루마니아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대표하는 경찰서장과, 신의 권력을 대표하는 가톨릭 사제에게 육체를 허여하고야 만다. 뭔가를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일 뿐이다. 살기 위한 것.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독후감에서 말한 적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그게 다른 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못할 일은 없다, 라고. 그래, 살기 위한 것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란 없는 거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발끝을 벌리고 걷는 아말리에를 보고 난 후, 이제 아말리에 차례인 것을 눈치 챈, 적어도 강하게 짐작하기 시작한 아빠 빈디시가 사람들이 이제 아말리에 차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장엄미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채 눈을 감고,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


  딱 10년 전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었다. 지금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는 것만 어렴풋하다. 당시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해 문학동네에서 광고를 많이 해 그만큼 기대가 컸건만 어째 그리도 합이 맞지 않는 것처럼 읽히던지. 그래서 오래 헤르타 뮐러를 멀리하고 지냈다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어도, 주저하면서 골랐다. 그런데 지금은? 매력적이다. 부사와 형용사를 과감하게 생략한 건조하고 짧은 문장으로 주인공 빈디시 일가와 마을 주민들의 상황, 독재정권과 사회주의적 재분배라는 이름의 착취 같은 것을 실감나게 이야기한다.

  진작 읽어볼 것을 그랬다. 앞으로 좀 더 파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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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04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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