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 한국희곡명작선 36
정상미 지음 / 평민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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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극작가 정상미. 1979년 7월, 서울 강남 출생. 이이의 프로필을 보면 “어울리지 않게 강남에서 태어났다.”라고 썼다. 막내 이모가 1979년, 당시 기준으론 상 노처녀, 서른을 훌쩍 넘기도록 결혼을 하지 않자, 강남에서 농사짓는 사내에게 시집갔다고, 불쌍하다고, 언니, 그러니까 정여사께서 눈물을 찔끔거리던 시절이다. 거기 가려면 앞으로 들어설 서초역 1번 출구부터 걸어서 ‘40초’씩이나 걸리는 저 무지렁이 시골 동네였다. (끝까지 땅을 팔지 않아 나중에 진짜 부자가 돼 아직도 돈방석을 깔고 앉아 산다.) 어울리지 않기는 뭐가 어울리지 않나? 사방에서 땅 위로 솟은 건 칠성사이다 입간판 하나밖에 없던 동네였는데.
  하여튼 점점 자라서 추계예술대학 문창과에 진학해 소설을 전공한다. (그 여자 데려다주느라고 숱하게 가봐서 아는데) 161번 버스를 타고 굴레방다리 정류장에서 내려 공업학교 길 건너편 방향으로 쪽 올라가면 나오는 추계예대 문창과엔 장르별로 전공이 따로 있나보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가 4강에 오르는 바람에 전국민이 우리나라 자체가 세계에서 4등쯤 하는 줄 알았던 200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 4년 구성작가도 하고, 논술강사, 기자생활도 했다지만 번듯한 기자였다면 어디 기자였는지 밝혔을 테니 하여튼 그저 그런 기자 생활도 하며, 이때 아마추어 연극에 관여를 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이 된 2008년, 일본으로 건너가 극단 “문학좌 文學座”에 입단해 3년 동안 연출을 공부했었나보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처음 써본 희곡 <그들의 약속>이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로 등단한다. 에이, 설마 정말로 난생 처음 쓴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당선할 수 있었을까. 습작은 죽어라 하지 않았겠어? 나 좀 알아달라고, 발표한 첫 작품이란 뜻으로 이해 해야지. 근데 이 해, 2012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극작가 가운데 계속 극작을 해서 희곡집을 출간한 이는 아직까지 정상미밖에 없는 거 같다. 그러니 이이의 재능을 뽐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가뜩이나 극작가의 일을 시작한 것에 “혹독한 대가를 치루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사람한테. 그래도 정상미는 “극장을 찾는 이들이 잠시라도 웃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말이지.
  시중에 나온 이이의 책은 <낙원상가> 외에는 그림까지 포함해 50쪽에 불과한 작은 희곡집 <제발, 결혼>과 <2012 신춘문예 희곡 당선 작품집> 뿐이다. 이것들 외에 2014년에 공연이 이루어진 것으로 <내 마음의 슈퍼맨> 등이 있는 것 같다. 희곡 단행본 말고 예를 들면 좀 거창하게 ≪정상미 희곡집 1≫ 같은 걸 냈으면 좋았을 뻔했다. 뭐 사정이 있겠지.

 

  <낙원상가>는 종로3가 탑골공원 노인들 이야기다. 할아비 셋과 할어미 둘.
  장기풍. 76세. 이름에 어울리게 탑골공원 장기계의 고수다. 바둑, 장기 할 때 그 장기. 젊은 시절에는 단역 영화배우로 이이의 말을 곧이 믿자면 신성일보다 출연작이 더 많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던 어느 날, 안방 옷장 구석에서 영화감독 주머니에나 들어 있을 지포 라이터를 발견하고, 그걸 모른 척했다. 아내는 장기풍이 모른 척하는 걸 모른 척하다가, 결국 당신이 하는 연기가 지겨워 못살겠다며 나가버렸다. 그래 자기도 단역배우 때려치우고 색소폰 연주를 배웠는데, 다 늦게 배운 가락이라 정말 죽기 살기로 연습을 해 겨우 단계에 올라, 미군부대 클럽부터 시작해 전국 각지에 안 가본 카바레가 없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토록 많던 카바레가 싹 사라져버려 이젠 쪽방에서 홀로 지내며, 나름 연예인이라고 쪽 빼 입은 차림으로 탑골에 나와 장기도 두고 기분을 낸다. 요새는 낙원 빌딩 문화센터에서 이문희라는 75세의 여인을 만나 왈츠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으며, 사랑을 이어가려고 하지만 자기 신세가 좀 그렇다.
  김주식은 79세.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 참전 용사다.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인헌 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아들 내외, 손주들과 함께 살지만, 말이 좋아 아들 며느리가 모시는 것이지, 부자지간 세대차이로 날마다 또다른 전쟁터다. 요즘엔 죽은 아내와 조상의 묘를 파헤쳐 화장해 산골을 하겠다고 아버지한테 날마다 대드는 아들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다. 이러니 탑골에 나와 장기를 두어도 마음이 즐거울 리가 없다. 어느 날, 원각사지 12층 석탑 근처에서 이말자라는 70대 할미를 만나 모텔에 대실을 하고 나오는 걸 훈수꾼 최만동에게 들킨다. 김주식은 이말자가 생긴 것도 곱고 마음도 착한 것 같아 은근한 생각도 들었지만.
  최만동은 쪽방 보다는 좀 나은 곳에서 혼자 산다. 가족은 있으나 떨어져 살고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온갖 모멸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하지만 탑골에 모인 모르긴 해도 독거노인들에게 몇 백 원씩 푼돈을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만동은 2백원, 3백원, 5백원, 천 원을 위하여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노인한테 무료로 제공하는 대중교통과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다니고 있다.
  75세 여인 심남순은 이른바 탑골 삐끼. 찻집으로 손님을 데려가 매상을 올려주면 찻값의 일정비율을 수수료로 받는다. 이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이는 남자 노인을 상대로, 차 한 잔 마시러 가요, 커피 한 잔 사주세요,를 수없이 시도한다. 그래 영감들한테 얻어 마시는 커피, 생강차, 쌍화차 때문에 늘 위통에 시달린다. 물론 상대를 골라 가능하면 몸을 내놓기도 하지만 가끔은 늙은 자신의 가슴을 보고 ‘납작만두’라고 비아냥 거리는 치사한 노인도 있다. 그런 것들은 벗겨보면 어떻게 하나 같이 미더덕이나 오만둥이하고 닮았는지 말야.
  역시 75세 이문희는 소위 박카스 아줌마다. 그러나 심성은 낭만파. 낙원상가의 문화센터에서 왈츠를 배우다가 색소포니스트 장기풍과 친해진다. 장기풍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살며 손주들은 해외유학중인 줄 안다. 그러니 집안 좋고, 말하는 거 보면 배운 거 많을 거 같고, 손주 유학 보낼 정도의 재산이면 그것도 괜찮고, 무엇보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인격이 있어, 가능하면 그와 사랑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몸의 매매를 전제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장기풍은 분위기가 삼삼해지면 손주들이 귀국하는 날이라 가족끼리 식사가 예약되어 있다고, 터치를 삼간다. 그런 그의 몸가짐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오직 하나의 의심은, 장기풍이 한 말이 사실일까? 하는 것. 탑골에 나온 노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전직 대기업 사장, 임원, 장군출신의 퇴역군인, 유명학교 교수들을 필두로 우리나라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왕년의 명사들이 모두 출동한 것 같으니.
  그러나 정작 이문희는 가명. 한 시절의 명배우 문희의 이름을 따, 딱 그녀만큼의 삶을 살고 싶어 이문희라고 거짓 이름을 사용하는 박카스 아줌마로 본명은 이말자. 나중에 베트남 참전 용사 김주식과 모텔에 두 시간 동안 들었던 인물이다.
  이 다섯 노인들이 펼치는 일상극. 애초부터 비극으로 준비했지만 정상미는 이를 가벼운 터치로 그려나간다. 하마터면 무거운 저기압이 팽배할 노년과 죽음의 시간이 인생이 뭐 다 그런 거지, 경쾌한 뽕짝 리듬을 타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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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1-10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탑골 삐끼가 있었다니ㅋㅋㅋㅋ지나가며 보기에는 그저 평화로운 곳이던데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군요. 골드문트님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경쾌해요.👍

Falstaff 2022-01-10 10:15   좋아요 3 | URL
옙. 막내 사촌동생이 종로 성당에서 혼인미사 올릴 때 한 번 가봤는데요, 아이고, 거기 은근히 살벌하더라고요. ㅎㅎㅎㅎ 늙어도 수컷들만 있어서 그런가봅니다.

mini74 2022-01-10 1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윤여정 나온 죽여주는 여자가 떠오르네요. 안그래도 엄마가 노인정가면 다들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네요.

Falstaff 2022-01-10 10:27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저도 윤여정 생각했답니다!
은제 한 번 봐야지 안 되겠습니다.
전 그래서 늙어도 노인정엔 안 가는 걸로.... ^^;;

바람돌이 2022-01-10 10: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교사 출신들은 노인정 가면 안돼요. 노인정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전직 교장출신, 다음이 교사출신!!! 어디서든지 가르치려 들어서..... 다 똑같은 노인들인데 제가 생각해도 왕재수일듯요. ㅎㅎ
여기 나오는 노인들은 모두 제 부모님 세대라 좀 짠하네요. 요즘 들어서 부모님들 보면서 아 저분들은 무슨 힘으로 이날 이때까지 버티고 살아왔을까싶은 생각도 하고, 어제는 친정엄마랑 얘기하면서엄마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편한 때 아냐? 라고 물었던 것도 떠오르고 하네요.

Falstaff 2022-01-10 11:02   좋아요 4 | URL
ㅋㅋㅋ 정여사께서도 노인정에 잘 가지 않으셨습죠. 그게 다 이유가 있군요.
에휴. 더 늙어봐야 알게 될 거 같아요. ㅎㅎㅎ

얄라알라 2022-01-12 12: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탑골GD 연예인 기사 뜨거울 때, 알고리즘 떄문에 탑골공원 자료 보던 때가 생각나네요.

코로나 이전엔 지나다 보면, 장기(? 바둑?) 하시는 데 모여계신 분들 많았는데 이젠 코로나라 완전 다른 풍경이겠죠. 직접 접근하긴 어려우니 이렇게 [낙원상가] 읽으며 알아봐도 좋겠네요 ㅎㅎ

Falstaff 2022-01-12 13:00   좋아요 3 | URL
저도 가보진 않고, 그냥 지나가봤는데도 위에 댓글로 썼다시피 조금 살벌하더라고요. 노숙인들, 박카스 할머니들, 눈매가 사나운 노인들이 공원 밖 인도에서 서성거리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는 않더군요.
에휴, 그런 데 가서 소일거리 안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말입죠.

그레이스 2022-01-12 14: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언제적 161번이예요?
왠지 낯설지가 않아서 생각해보니 대학 다닐때 버스였네요^^

Falstaff 2022-01-12 14:38   좋아요 2 | URL
ㅋㅋㅋ 학교 앞에 161번이 정차했었나봅니다!
하긴 신촌 로터리 쪽으로 갔으니 한 두 학교가 아니긴 했습니다만.
 

첨부한 사진보다 더 있는데, 지금 알라딘 창고에서 책 찾고 있거나, 배송중입니다.

일단 오늘 도착한 것까지만.

기다렸다 한 방에 다 올리는 것이 예의겠지만 말입죠, 사진이라도 찍다가 아내한테 걸리면, 이거 다 새로 산 거니? 부터 시작해 아이고, 바가지를 어떻게 견딥니까. 자기 뽕브라 세트로 사는 건 하나도 안 아깝고 서방 책 사는 게 그렇게 아깝니? 제가 번 돈가지고 내돈 내산이다, 해봤자 이도 안 들어갑니다. 사는 게 이렇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마누라가 친구들 만나 칼국수 먹으러 간 사이에 얼른 사진 한 장 박고 일단 손에 들어온 것들만 재빨리 올리겠습니다.



크... 보기만 해도 배부릅니다. 하긴 지금 멸치장국 말아서 배추김치 하고 국수 한 그릇 먹었더니 실제로 배도 부르네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정말 오래오래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꺼내고 다시 넣었다가 꺼내길 반복했던 책입니다. 워낙 비싸서 말입죠. 이제 정가인하 해서 팔고 있지만 아직도 비싸서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살까 망설이다가 저질러버렸습니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아이스퀼로스 전집,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그래도 집에 책 읽는 방 있으면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하는 책이라 생각해서 올해 무조건 읽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애증의 디킨스. 그의 첫 번째 작품 <픽윅 클럽 여행기>. 하여튼 디킨스는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하여튼 사서, 하여튼 끝까지 읽고, 하여튼 뭔가 좀 그러네, 하는 하여튼 시리즈입니다. 하여튼.


한스 폰 그리멜스하우젠의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는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발음 조심!)도 아니고 17세기 작품이라 안 읽는 걸로 했는데, 작년말에 읽은 어느 책에서 계속 거론을 하는 바람에 사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오에 겐자부로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고딩 시절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어서 지금은 작품의 분위기만 생각납니다. 그래 다시 한 번 읽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마음이 그렇지 쉽지 않더군요. 올해가 시작하자마자 무조건 <마의 산>부터 주문을 해버렸습니다.


아인 랜드는 상당히 이름이 높은 작가인데 그의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파운틴 헤드> 철학적 분위기로 쓴 로맨스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쉽지 않을 거 같은데다가 길기까지 합니다. 1,570쪽에 달하는 대작으로, 2022년의 가장 큰 도전이 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아, 끔찍해!


이외에 나이폴 <자유국가에서>, 트레버 <밀회>, 나스피니 <불만의 집>, 루슈디 <피렌체의 여 마법사>, 서울연극제 희곡집, 몇 권의 시집, 킨케이드 <루시> 등이 보이는군요.


앞으로 도착할 것 가운데 주목하고 있는 건, 보부아르의 <레 망다랭>, 펠레빈의 <스너프>, 막장 졸라의 <대지>, 유제니디스의 <불평꾼들>,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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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01-08 13: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년치 양식 쌓아놓은 것처럼 든든하시겠어요~!!

Falstaff 2022-01-08 13:53   좋아요 4 | URL
ㅎㅎㅎ 므흣하지요 뭐.

얄라알라 2022-01-08 22:15   좋아요 3 | URL
저도 나름 책 열심히 읽는 편이지만, 이 정도면 햇살과함께님 말씀처럼 저같은 사람에겐 ˝1년치 양식˝이네요. 하지만 골드문트님은 3개월이면 다 읽어버리실 듯^^ 아직 창고에서 포장으로 못 나온 책들도 있다 하시니, 정말 많이 구매하셨네요. 와우!

햇살과함께 2022-01-08 22:31   좋아요 3 | URL
ㅋㅋ 맞아요 저에겐 몇년치 양식이지만 골드문트님껜 3개월도 안되실 듯^^

Falstaff 2022-01-09 09:5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읽어봐야 알지요!

단발머리 2022-01-08 13: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책 중에서 저는 <루시>를 도전해볼만 합니다. ㅎㅎ 저희집 앞 도서관에 <픽윅 클럽 여행기> 새거로 꽂혀있던데 골트문트님 리뷰 읽고 나서 읽을지말지 결정해볼께요 ㅋㅋㅋㅋㅋ 끝내 걸리지 않으시고 사진 계속 올라오기를 바랍니다^^

Falstaff 2022-01-08 13:54   좋아요 4 | URL
ㅎㅎㅎ 무슨 겸양의 말씀을.

다락방 2022-01-08 13: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는 저도 시도해보고 싶은데 계속 뒤로 미뤘거든요. 서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음에 도착하는 책들도 사진 찍어 보여주세요! 호호

Falstaff 2022-01-08 13:55   좋아요 4 | URL
그죠? 아인 랜드, 쉽게 손이 가지는 않지요? 아, 저도 이거 참. ㅎㅎㅎ

페넬로페 2022-01-08 14:1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쳐다만 봐도 제가 왜 뿌듯한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숲출판사 책은 그래도 몇 권 읽어서 반가워요. 마의 산은 을유문화사인가요?
죄다 어렵고 두꺼운 책들이네요^^

Falstaff 2022-01-08 15:10   좋아요 6 | URL
ㅎㅎㅎ 책 좋아하는 분들 마음이야 다 비슷합지요.
<마의 산> 을유 맞습니다. 을유가 두 권짜리로 냈잖아요. ㅋㅋㅋ
아무리 어려워도 하여튼 시작을 하고 봐야지요 뭐. 끝까지 가던, 도중에 작파를 하던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할 일이고요. ^^

프레이야 2022-01-08 15:3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책자랑 귀엽습니다.
로마제국쇠망사만 겹치네요 ㅎㅎ
자명한산책도 귀엽게 살짝 끼워놓으셨네요.
참 다양하게 폭넓고 깊게 읽으시니 대단하십니다. 희곡도 관심있게 보시는 것 같은데 그 분야 관련해 무슨 작업을 하시는지 급 궁금합니다 ㅎ. 근데 더럽게 부자되는 법 ㅋ 재테크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ㅎㅎ 소설이네요. 저는 책이든 음반이든 뭐든 옆지기 뭐 사는 걸로 한마디라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ㅎㅎ 경처가 골드문트 님.

Falstaff 2022-01-08 15:14   좋아요 5 | URL
ㅎㅎㅎ 희곡 가지고 감상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음반 사는 건 일단 크기가 책과 비교해서 작으니까 무조건 회사로 배송을 시켜 가방에 넣어 집으로 배달하는 전략을 썼다가, 걸렸습니다. 그저 몇백 장 정도 적당하게 사면 별 말이 없을 텐데, 천 장이 넘고, 이천 장이 넘고, 삼천? 단위가 자꾸 올라가니까 아이고, 말이 달라지더라고요.
책도 그렇고 음반도 그렇고 하여튼 선을 넘어도 보살인 사람은 요괴인간 말고는 없을 거 같습니다. 흑흑흑....

프레이야 2022-01-08 15:34   좋아요 5 | URL
아무래도 전 요괴인 듯요 흐흐흐 ㅋㅋ

망고 2022-01-08 14: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앗 저 어제 갑자기 아인 랜드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미드 ˝매드맨˝ 안에서 언급되었던 소설이라고 구글 검색해서 찾았는데 이런 우연이ㅋㅋㅋ아인 랜드 책들 읽고 싶은데 다 너무 어마어마한 벽돌들이라 겁나서 시작도 못 하겠어요ㅜㅜ 골드문트님 리뷰 기대할게요😁

Falstaff 2022-01-08 15:15   좋아요 6 | URL
그죠, 게다가 철학적이기도 하다고 구라를 푸는 걸 봐서, 지금 잘한 일인지 하면 안 될 일을 한 건지 헷갈리고 있습니다. ㅜㅜ

- 2022-01-08 15:0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을 읽는 사람이 있다!! 그 희극을 본 사람들의 우화를 읽은 적은 있어도 그 희극을 진짜로 읽는 사람이 있다니!!! ㅋㅋㅋㅋ 신기하닼ㅋㅋㅋㅋ
고전의 고전 책탑 흥미롭습니다… 저도 이 달의 책탑을 쌓기위해 책을 사러…(응?)

Falstaff 2022-01-08 15:16   좋아요 5 | URL
ㅎㅎㅎ 일단 읽은 후에!!!
뭐 다 팔자 아니겠습니까. 허벅지를 치든, 땅을 치든 간에요.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1-08 23:32   좋아요 1 | URL
저 읽었어요✋

그레이스 2022-01-09 08:43   좋아요 2 | URL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 아리스토파네스를 이어서 읽었죠
반가운 맘에...
그냥 말해봤습니다 ㅋ

Falstaff 2022-01-09 10:00   좋아요 1 | URL
전 소포클레스 읽고 넘 좋아서, 나머지도 다 해치워야겠다, 싶었는데 베르길리우스 읽고는 그만 어떻게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베르길리우스도 정말 좋았어요!!!

coolcat329 2022-01-08 15: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전! 책탑입니다. 전쟁론은 저도 탐이 나네요. 책장에 꽂아두면 멋질거 같아요.
디킨스 책은 천페이지 넘겠죠?
근데 이 책들 아내분 들어오시기 전에 어디 숨겨놓으시는건가요? ㅋ

Falstaff 2022-01-08 17:04   좋아요 4 | URL
디킨스 1,268 페이지라고 쓰여있군요.
일단 책들이 방에 들어오면 무조건 전에 있던 책이라고 우깁니다. 으떻게 할 거예요, 뻔히 알고 있지만 알고도 속아주는 거겠지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2-01-08 15: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야 사진 보기만 해도 3일은 굶어도 될거 같아요~!! 술먹는 것보다는 책사는게 더 싸고 좋은거 같아요 ^^

저도 이 짤에 자극을 받고 책을 사러 가겠습니다~!!

안걸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Falstaff 2022-01-08 17:06   좋아요 5 | URL
제가 즐기는 진로 25도 짜리는 세 병(한 번에 사는 단위)에 4,950원, 한 병에 1,650. 어떻게 술보다 책이 더 싸겠습니까. 전 혼술, 집술 전문이니까요. ㅋㅋㅋ
걸리지 말라는 말씀이 참으로 위안이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ㅋㅋㅋㅋㅋ

청아 2022-01-08 16: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혹시 장칼국수 드시러 가셨을까요?ㅋㅋㅋ저에게는<전쟁론><마의산>눈에 쏙 들어오고 <불만의집>이랑<국가에서>는 아마도 잠자냥님 영향력이겠죠?^^* 저도 구입한 책 두권이라 더 반가워요! 벌써 책꽂이로 잘 숨었길 바랍니다ㅋ

Falstaff 2022-01-08 17:09   좋아요 5 | URL
팥칼국수 먹었답니다. ˝근데 왜 물어보는데?˝ 라고 물어볼 때, ˝아냐 그냥.˝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ㅋㅋㅋㅋ
옙. 잠자냥 님 취향이 저하고 많이 비슷해서 별 다섯이면 유심히 관찰을 합니다. <불만의 집>은 마침 헌책이 나왔더군요. 그래 주저없었고, 나이폴은 저도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우... <전쟁론>이 예상외로 인기가 좋은 걸요!

mini74 2022-01-08 17: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책 사면 미리 막 화냅니다. 내가 엉 ? 포인트 모으고 엉? 적립금 받고 엉? 그리고 당신 술 한 번 먹는 거 보다 적게 들고 어!! 막 이러면 누가 뭐래 라면서 더 사 더 사 막 도발을 합니다. 진짜 기둥뿌리 뽑아볼까하지만 간이 작아서 ㅎㅎ 김축드리옵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8 19:33   좋아요 3 | URL
오, 좋은 방법입니다!!!
ㅋㅋㅋㅋ 책, 음반 좀 더 산다고 절대 하우스코너, 우리말로 집구석 기둥뿌리 무너지지 않습니다. 분발하셔도 괜찮아요. ㅎㅎㅎ

stella.K 2022-01-08 20: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느 집이나 그노무 책이 말썽이군요.
저도 얼마 전 어무이와 거의 10년만에 또 한바탕 했습니다.ㅋㅋ
저는 당신 옷 사 입는 거 가지고 뭐라고 안 그러는데
왜 제가 책 사는 거 가지고 뭐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면 안나카레리나의 첫 문장이 생각나요.
예외적으로 책 가지고 구박받고 불행한 건 어느 집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ㅋㅋ

골드문트님 주말엔 페이퍼 잘 안 올리시는 걸고 알고 있는데
마음이 급하긴 급하셨나 봅니다.ㅋ
제목이 그래서 전 도선생님 200주년 기념판을 사셨나 했습니다.
골드문트님도 벽돌책 좋아하시는군요.^^

Falstaff 2022-01-08 20:44   좋아요 4 | URL
ㅋㅋㅋ 뭐 201호나 202호나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옙. 저는 벽돌책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끔가다가 책 소개할 때 무게로도 말하고는 합니다. <미들마치>는 돼지고기 세 근 반, <황금가지> 지하철에서 읽다가는 손모가지 결딴 날 무게 등등 말입지요. 앞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가 이 페이퍼를 읽지 못하게, 읽을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ㅋㅋㅋ 도선생 특별판, 하니까 생각나는 게 말입죠, 출판사 열린책들, 정말 마케팅 (마케팅? 장사?)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는 겁니다. 재판 찍으면 될 걸 하이고..... 그 정성으로 움베르토 에코를 다시 번역해주면 얼마나 고맙겠어요 글쎄.

그레이스 2022-01-09 0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기번 6권으로 줄었나요?!
제껀 시커먼 색인데(지금 책장을 보니 허연색이네요 ㅎㅎ 왜 시커먼색이라 생각됐을까요?)
나이폴도 그렇고

토마스 만만 같네요(을유) ㅠ

많이 겹치는데 새책 부럽다...ㅋ

아인랜드는 원서만 있는데...ㅠ

Falstaff 2022-01-09 10:04   좋아요 2 | URL
<...쇠망기>는 민음사 말고 다른 출판사 책으로 가지고 계실 겁니다. 저 사진에 나오는 거 직접 받은 소감은, 쓸데없이 화려한 장정으로 비싸게 만들었는지 짜증나더라고요. 사마천 <사기>도 그러더니 말입니다.
저도 나이폴, 헌책방에 있었더라면 당연히 그걸로 샀을 텐데요. 원서를 읽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ㅎㅎㅎㅎ

유부만두 2022-01-08 23: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디킨스랑 못 헤어지셨군요. 그럴줄 알았어요.

Falstaff 2022-01-09 10:05   좋아요 2 | URL
아, 디킨스. 정말 애증이라니까요. 이젠 진짜 안 읽을 거예요. 저것만 읽고. ㅋㅋㅋ

수이 2022-01-11 1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렌체 읽으시고 좋으면 저도 콕! .... 더럽게 부자되는 법..... 저건 뭔 책인지 갑자기 급궁금해지네요.

Falstaff 2022-01-11 13:21   좋아요 1 | URL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서쪽으로>를 쓴 하미드 작품인데요, 제가 이 두 작품을 읽어봤더니 하미드의 글빨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부자되는 법>으로 이이의 우리말 책을 클리어하려고 마음 먹은 책이랍니다.
다락방님은 읽으셨나, 책을 가지고 계신가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확인해보니 리류를 이미 쓰셨군요. 아이고, 이런 참. 땡투를 미쳐 생각 못했습니다. 흑흑..
 
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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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한 시절에 신드롬 수준으로 독자를 열광시켰던 작품. 난 화이트헤드라면 대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떠올라서 일단 기가 팍 죽는다. 화이트헤드, 이 백두 선생으로 말할 거 같으면, 일찍이 야심차게 <관념의 모험>, 한길사, 한길 그레이트북 시리즈 1번에 빛나는 책을 폈다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밝히건데, 단 열 페이지도 읽어내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책을 번쩍 들고 방바닥에 내팽개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나아가, 철학이란 그냥 하면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듣는/읽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면서 말하는/글 쓰는 인간을 폼 나게 만드는가를 집중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위대한 철학자다. 그 이후 함부로 철학책에 접근하는 우를 범하게 되지 않았으니 안 읽어도 인생살이에 전혀 문제가 없는 철학책을 사고, 읽고, 독후감 쓰는 경제적, 시간적 낭비를 삼가게 만든 고마운 책, 고마운 철학자일 수도 있겠다. 철학? 이제 내가 읽는 철학책은 오직 금속공학을 다룬 것에 국한한다.
  하여튼 콜슨 화이트헤드, 이이의 성씨 때문에 저 알프레드 노스 백두 선생하고 일가붙이인 줄 알아서 일찌감치 야코도 좀 죽었고, 한 번에 너무도 많은 독자들이 상찬을 거듭해, 이거 함부로 읽었다가 괜히 나만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코 깨지는 수가 있을 거다, 생각했을까? 아니. 여기서 더 솔직해져야 한다. 그저 제목을 대강 보고 책 읽기를 포기했었다. <니클의 아이들>이 아니라 <너클의 아이들>로 읽었던 거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코비드 19 이후로 늘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나는 다초점 안경을 이용하는데 마스크를 하니까, 처음 마스크 시작할 때가 아마 2020년 2월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래서 안경을 벗고 다니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책 읽을 때는 안경을 벗고 읽었는지라, 취미생활엔 부족함이 없었다. 나머지 세상은 무척 혼미해졌다. 안경을 끼지 않고 사니 얼마나 좋은가, 눈에 뵈는 게 없어지니까 말이지. 근데 PC 화면이나 휴대폰 액정을 보면 조금씩 에러가 생긴다. 이래서 ‘니클’을 금속으로 만든 폭력 기구 ‘너클’로 읽었고, 그래 청소년 시기 난폭한 아이들의 생존기구나, 싶어서, 사나운 이야기를 유난히 싫어하는 취향 때문에 멀리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 헌책이 나왔기에 이제 한 번 읽어볼까, 싶어서 선택한 거다.

 

  미국 조지아주의 주도 애틀랜타에서 남쪽으로 370 킬로미터를 내려가면 플로리다의 주도 탤러해시가 나온다. 플로리다, 라고 하면 의례 마이애미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탤러해시가 명색이 주도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탤러해시에는 당연히 흑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쪽 사람들은 그곳을 프렌치타운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헤리엇이란 이름의 육십대 노파가 살았다. 이 할머니의 아버지는 길을 가던 백인 여자한테 길을 양보해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실관계 확인이나 사건 조사도 없었으니, 기소도 되지 않은 상태라서 판사는커녕 검사 얼굴도 한 번 못보고, 하여튼 죽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아도 답은 똑같았다. 그냥 죽었어. 백인 경찰들에 의한 폭력에 의하여, 라는 암묵의 인정.
  탤러해시에는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기지, 육군 캠프 고든 존스턴과 데일 마브리 군 공항이 생겨 갑자기 흑백 군인들이 휴일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때 헤리엇의 남편 몬티는 동네 술집에 들렀다가 세 명의 사망자가 생긴 백인 군인들과 동네 흑인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몬티와의 사이에서 보기에 불안할 만큼 어두운 분위기의 여성으로 성장할 에벌린만 낳은 헤리엇은, 딸만 바라보고 키워 결혼시킨다. 사위 퍼시는 점잖고 무게있는 청년이었지만 아들, 헤리엇의 손자 엘우드를 낳은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다음에 과하게 야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퍼시는 집을 떠나 서부로 가서 행운에 도전해보겠다고 선언을 하고, 자기 아들 엘우드를 외할머니 헤리엇의 슬하에 남겨둔 채, 아내 에벌린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게 당시 보통의 남부 흑인 가정이었나보다.
  헤리엇은 유서깊은 리치먼드 호텔에서 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근면하게 일을 해왔고, 딸 에벌린 역시 리치먼드에서 일 하다 절도사건에 연루되어 해고를 당했다. 딸이 사라진 후에 손자 엘우드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서 학교가 끝나면 호텔의 주방에서 숙제를 하던지, 읽을 거리를 찾아 읽던지 했는데, 이를 유심히 살피던 사장 파커 씨가 엘우드를 좋게 봐 언제라도 파트타임으로 자기 호텔에서 일을 하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정도로 엘우드는 소위 싹수가 있었다.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백인 상전한테 말대답 안 하고, 머리 좋고 등등. 그러나 엘우드는 4대에 걸쳐 한 호텔에서 일을 하는 게 어딘지 마땅하지 못한 거 같아서 이탈리아 이민인 마르코니 씨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말로 엘우드는 공부를 잘 해, 동네에서 그리고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갈 예정이라, 수입의 반은 생활비로, 나머지 반은 대학 등록금을 위해 저축하기로 할머니 헤리엇과 합의를 보았다.
  엘우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조지아 주에서 한 흑인 여성이 버스를 타고, 법에 의하여 금지된 좌석에 털퍼덕 앉았고, 이를 마땅하지 않게 여긴 당국에서 여성을 처벌한 일이 발생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흑인이 극장에 들어가려 했다가 입구에서 처음엔 차갑게, 나중엔 폭력적으로 입장을 거절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미국 북부에서도 흑인들이 남부 지역으로 와서 흑인의 출입이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테이블을 점거하는 등의 흑인 인권운동이 발생한다. 할머니는 또 때를 맞춰 엘우드에게 마틴 루서 킹의 연설이 담긴 레코드를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었으니, 손자는 할머니의 뜻에 맞게 단단하게 인권 의식을 다지게 된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힐 선생을 마침 탤러해시에서도 벌어진 시가행진에서 만나 친한 관계를 맺는다. 엘우드가 학과 공부도 탁월했던지라 힐 선생은 탤러해시 남쪽에 있는 흑인 전용 대학인 맬빈 그리그스 기술대학에서 탁월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대학 강좌를 개설해 참여할 것을 권한다. 엘우드는 영국 문학에 관한 강의를 듣기로 하고, 첫 수업을 받기 위해 11 킬로미터를 걸어가던 중 흑인이 운전하는 눈부신 초록색 61년식 플리머스 퓨리 승용차를 얻어타고 가다가 순찰차의 검문을 받는다. 순찰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플리머스를 훔치는 건 검둥이 뿐이야.”
  차량 절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미성년자 엘우드에게 판사는 교도소가 아닌 감화원 격으로 기숙 고등학교에 준하는 니클 아카데미로 갈 것을 선고한다.

 

  처음엔 돌볼 사람이 없는 소년이나 경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모아 인성교육과 직업교육을 시켜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려고 만든 니클 아카데미는, 점차 감화원 비슷한 곳으로 변하면서 책에 의하면 흑백 차별없이 원생들에게 끝까지 가는 수준의 폭력을 구사한다. 1921년 기숙사 화재 당시엔 43구의 소년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 가운데 일곱 명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세 명은 일종의 감옥에 갇혀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로 질식해 죽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사우스플로리다 대학 고고학과 학생 조디는 니클 캠퍼스 북쪽, 낡은 작업장과 학교 쓰레기장 사이에서 비밀묘지를 발견한다. 유해를 조사해보니 금이 가거나 구멍 뚫린 두개골은 물론이고 대형 산탄이 갈비뼈에 잔뜩 박힌 백골이 한 두 구가 아니었다. 이런 놀라운 발견은 ‘당연히’ 흑백의 차별이 어쨌거나 겉으로는 사라진 2천년대였으며, ‘당연히’ 전국적으로 방송을 탔고, 아직 늙어 죽지 않은 유일한 ‘얼’이란 이름의 당시 교사는 폭력이 저질러진 적이 없었다고 인터뷰를 한다. 그러나 니클 출신의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며 5년째 연례 동창회를 열기도 하는데, 뉴욕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엘우드 커티스는, 누군가가 스펜서 학생주임에게 복수하기 위해 직접 가죽 채찍을 만들어 스펜서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몇 시간 동안 창문을 바라보다가, 복수하지 말자고 스스로 설득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읽고, 그냥 끝까지, 계획대로 해치우지 왜 그랬어, 라고 독백을 한다.
  도대체 니클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직접 읽어보시라. 너클은 소수를 상대로 하는 반면에, 니클은 6백명에 달하는 감화원 원생 전부를 대상으로 사나운 폭력을 저질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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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08: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국판 형제복지원 같은 걸까요? 그나저나 퐐님 골문트로 회춘하시고 매우 정력적으로 읽고 쓰시는 느낌이예요 ㅋㅋㅋㅋ

Falstaff 2022-01-07 08:54   좋아요 5 | URL
서양 것들이 훨씬 잔인한 거 같아요. 물러터진 놈은 더 물러터졌지만 독종들은 아휴, 어려서부터 말도 못합니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어른들 상대로 하는 장난 좀 보셔요. 종자들이 이러니.... 형제복지원보다 좀 더 심하다고 생각하시면 딱 맞을 거 같은데, 암만해도 픽션이라 좀 과장은 있겠지요.
ㅋㅋㅋ 이 독후감이 작년 12월 31일, 폴스타프란 이름으로 쓴 마지막 독후감이었습니다.

다락방 2022-01-07 08: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사놨는데 리뷰 읽으니 내용이 힘들것 같아요 ㅜㅜ

Falstaff 2022-01-07 09:27   좋아요 3 | URL
옙. 그나마 사납지 않은 것들만 쓴 것이 저 정도입니다.
우리처럼 마음 약한 사람은 안 읽으시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습니다. ㅜㅜ

- 2022-01-07 10:48   좋아요 3 | URL
우리 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들….. (에잇 ㅋㅋㅋㅋㅋ 이 악평가들이 ㅋㅋㅋ)

단발머리 2022-01-07 09: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었는데 골드문트님 리뷰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근데 올해부터 골드문트님이신 거에요? 폴스타프님은요? 그 분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07 09:28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의 시간이 벤자민처럼 거꾸로 돌더니 이제 회춘해서 골드문트, 황금입술, 금순(金脣)이가 되어버렸습니다.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01-07 09: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전작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인상 깊게 읽었더랬어요. 그런데 힘들었거든요, 더 가까운 시대 배경인 소설이니 더 힘들겠네요. 너클이나 니클이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군요. 리뷰 감사합니다.

마스크 안경은 겨울엔 더 괴로운 조합이에요.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참, 백두 선생이라 쓰셔서 생각났는데요, 예전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인슈타인을 꼭 일석 선생이라고 칭하셨던 기억이 나요. ^^

Falstaff 2022-01-07 09:33   좋아요 2 | URL
근데 실제로는 이렇게 힘든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 거 맞지요? 그러니까 콕 집어서 소설로 쓰는 거라고 믿겠습니다. 아휴, 이런 작품은 정말 힘들어요.
거기다가 엘우드, 이 흑인청년은 또 말 그대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설정도, 완전 미국 스타일이어서 말입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ㅋㅋㅋ 그렇네요. 아인슈타인. 일석 선생이라. 재미있습니다. 저도 써먹어야겠습니다.

새파랑 2022-01-07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나름 반전에 놀랐습니다 ㅋ 그런데 책을 읽는동안 내용이 좀 괴로워서 그의 다른 책은 손이 안가더라구요 ㅜㅜ

Falstaff 2022-01-07 10:04   좋아요 4 | URL
ㅎㅎㅎ 전 읽는 내내, 도대체 이렇게 백퍼 미덕으로만 이루어진 청년이 있다는 말이지, 이 지구상에? 라는 의문이 너무 컸습니다만.
저도 그런 반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습지요.

다락방 2022-01-07 10:23   좋아요 3 | URL
반전.. 이 있다구요? 😱

Falstaff 2022-01-07 11:07   좋아요 3 | URL
옙. 반전 있습니다. 아메리칸 스타일로요. ㅋㅋㅋㅋ

망고 2022-01-07 1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실제 플로리다의 소년 교정시설에서 벌어졌던 실화라고 해서 책 읽고나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ㅠㅠ 시대배경도 같고 이런 사실이 최근에 알려진것도 소설 그대로라고요ㅠㅠ 암튼 이 책 읽으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Falstaff 2022-01-07 11:08   좋아요 3 | URL
아, 실화 배경이군요.
읽으면서 20세기 중반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우. 이런 책은 그저 일 년에 한 작품 정도만 읽어야지 힘들어요.

coolcat329 2022-01-07 10: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
작가 어느 인터뷰에서 하버드 출신에 유명 작가인 당신도 차별을 겪었냐 물으니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차별을 겪었다고 한 말이 기억나네요.

저는 이 책 읽고 형제 복지원 생각이 나더라구요.

Falstaff 2022-01-07 11:10   좋아요 4 | URL
흠. 작가 인터뷰를 반 만 믿을께요. 작가한테 넌 아시아 사람들 차별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기는 하지만 진짜 만나도 안 물을 거 같아요. 깨물 거냐고요? 아니 그거 말고요. ㅎㅎㅎㅎ

얄라알라 2022-01-07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접 읽어보시라.!!!!˝

옙!!골드문트님. 어느 책이나 그렇지만 특히 소설과 에세이는 직접 읽어야만!

‘니클‘을 ‘너클‘로 잘못 읽으신 에피소드에 ^^

Falstaff 2022-01-07 18: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모르게 날린 멘트 같습니다.
˝직접 읽어보시라.˝
아이구, 민망스러워라. 이제 그만 쓸 때도 됐는데요. ㅎㅎㅎㅎ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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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개띠 시인.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70년생 작가들이 좀 있는 거 같아서 위키피디아로 1970년을 검색해봤더니, 세상에나, 1970년생 유명인 가운데 5월 7일, 대한민국 희극인 ‘황봉알’이란 자의 이름은 올라와 있어도 1970년생 시인과 작가 가운데서는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 딱 한 명만 올라와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여튼. 난 문태준을 한 일흔 살 넘은 시인인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월북했다가 숙청당한 소설가 이태준을 염두에 두었나, 포항제철의 신화를 만든 박태준을 떠올렸던 건가. 어쨌거나 예상외로 젊은 시인이었다.
  왜 늙었네, 젊었네 말이 많으냐고? 글쎄 이이의 시를 한 번 읽어 보시라. 나보다도 한 세대 앞선 예전 시인이나 쓸 법한 단어나 의태어나 어미활용을 능수능란하게 하니 어찌 이이의 젊음에 놀라지 않았으리오. 예를 들어 첫번째로 실린 <새> 속에서, “새는 날아오네 / 산수유 열매 붉은 둘레에 // 새는 오늘도 날아와 앉네 / 덩그러니 / 붉은 밥 한 그릇만 있는 추운 식탁에 // 고두밥을 먹느냐 // 목을 자주 뒤쪽으로 젖히는 새는” (전문)을 봐도 “~오네”, “앉네”라는 표현. 또 “고두밥을 먹느냐”는 의문문 형의 어미 같은 것도 요즘 시인들은 별로 쓰지 않는 어미활용이다. 아마 거의, 거의 쓰지 않을 걸?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도 제일 앞쪽에서 “어룽어룽” “조촘조촘” “물렁물렁” “슬금슬금” “들썽들썽” “생글생글” “간질간질” “까닥까닥” “미끌미끌” “얼금얼금” “들썩들썩” “끔벅끔벅” “조마조마” “조금조금” 등의 의태어/의성어 사용을 언급하고 있어, 그걸 유심히 읽었던 아마추어 독자의 어깨를 으쓱으쓱하게 해준다.
  시 낭독으로 이야기하자면 두번째 시로 실린 <한 송이 꽃 곁에 온>의 초두에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 귀가 대신 가 /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라 하며 마지막을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로 끝내고 있어서 적어도 시인이 잠깐 눈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눈 대신 귀라고 한 바, 아무래도 제일 먼저 인상 깊었던 시는, 이것,

 


  귀 1

 


  초여름 밤에
  미끄러운
  산개구리 내려와
  연못은
  울퉁불퉁하고
  산개구리는
  청포도알을 낳고
  청포도알을 낳고
  나의 연못은
  청포도잎처럼 커져  (전문)

 


  인데, 앞의 시에서 눈이 멀어져 귀가 대신 갔다는 얘기도 했고, 시의 제목이 또 <귀 1>임을 감안하면, 이 시는 초여름 밤에 산개구리가 연못에 내려와 청포도알 같은 알뭉치를 낳는 걸 보고 쓴 시가 아니라 밤에 방이나 마루에 걸터앉아, 아니면 마당에서 산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은 귀가 눈 대신 미물의 수정, 산란하는 정경을 상상해서 쓴 시라고 읽어야 마땅하겠다. 연못에 산개구리들이 잔뜩 몰려 들어와서 수면이 개구리들의 대가리와 등짝 때문에 울퉁불퉁하고, 서로 엉겨 산란과 방정을 하는데, 연못 밑에 낳은 알이 꼭 청포도알 같았을 거라는, 바로 여기가 내가 읽은 포인트로, “같았을 거”란 감상이었다. 이런 시를 70년 개띠가 썼으면 분명 시골 출신일 터, 앞날개를 보니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단다. 음. 이런. 암만해도 문태준, 심상치가 않다. 그래 있는 건 시간하고 돈밖에 없어서 문태준을 검색해보니, 아아, 이이의 시집 ≪맨발≫을 읽었고,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비여”라는 제목으로 독후감도 썼다. 아놔, 그때도 1970년이 아니고 1950년생인줄 알았다고 적었었다. 어쩐지 씨, 눈에 익더라니까.

 

  시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하나 있다. 바로 ‘시’ 자체가 그렇다. 아니다. 시 자체가 “그런 거 같다.” 예컨대 내가 잘 인용하는 황지우의 <귀소歸巢의 새 2>도,

 

  “숲새는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관 속으로 날러가부럿다 지 울음으로 숲 둘레를 막아놓고 그 숲에 집 지은 숲새는 가청권 몇 옥타브 우에서 끝없이 목이 쉬었다……사이사이에……지가 깃든 수풀 밖으로 또 다른 숲이 있능가없능가 의심하면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1983. 한자는 전부 한글로 변환했음)

 

  가청권 몇 옥타브 위에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는 숲새가 시인이고, 숲새의 울음이 시, 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라 해석할 수도 있다. 가청권의 밖에 있다는 거, 그것도 몇 옥타브나 위에 있다는 건, 보통의 청각 가지고는 감각할 수 없다, 훈련받은 지성이 뒷받침한 자들만 쾌락을 얻을 것이란 황지우 특유의 (밉지 않은)오만일 수도 있다는 거. 황지우가 이렇게 노래하고 25년이 지난 2008년에 문태준은 시를 자신의 목숨이라 선언한다.

 


  두꺼비에 빗댐
  ᅳ 詩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抒情)  (전문)

 


  문태준은 어느 날 집 마당을 어슬렁어슬렁 걷는 두꺼비를 본 모양이다. 나는 작대기 세 개를 달고도 쫄병생활을 할 때, 작대기 네 개짜리 고참이 작업하다가 기어 나온 두꺼비를 삽 뒤판으로 두드려 잡아 껍데기 벗겨 구워 먹는 걸 눈으로 직접 봤지만 시인은 구워 먹는 대신, 두꺼비의 여유작작하고 달관한 듯한 여유, 그리고 습한 구석을 찾아 들썽들썽 가는 것을 보고, 허벅지를 탁, 친다. 아, 이게 시로구나. 하고. 따뜻하고 밝은 양지가 아니라 겨우 습하고 찬 곳에 바쳐질 문태준의 서정, 감정이 시며 자신의 목숨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 시가 별 거냐, 사는 게 시고, 시가 사는 모습이지.
  시집의 4부에 재미있는 시가 나온다. 시집을 다 읽자마자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소개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시다.

 


  이별이 오면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전문)

 


  세상 살면서 이별 한 번 못해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인간이다. 인간도 아닌 인간이다. 양희은의 노래 가사처럼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은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그럼 여러분도 그 우라질 이별이 얼마나 아픈 건지 잘 아시지?
  문태준은 이별이 오면 바짓단을 씀벅 걷어올리고 엉덩이를 아래위로 들썩거리며 쓱삭쓱삭 바지락 껍데기가 깨져라 치대며 씻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단다. 시를 읽으면서 즉각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이별의 순간 차라리 이런 모습과 소리를 들어서, 그래서 오늘 겪는 가장 아픈 곳이 깔깔하고 깔깔한, 깔깔하고 웃을 만큼 깔깔하거나, 상처가 여기저기를 후벼 파 깔깔하고도 깔깔한 것이 서로 개흙처럼 엉겨버렸으면 좋았을까? 세상에 이런 역설을 터뜨릴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어떤 시인은 이별을 말장난을 하느라고, 이 별에서 벌어지는 사건, 뭐 이런 식으로 쓰는 것도 봤는데, 거기다 대면 문태준의 이별, 이 생각 속 놀라운 시청각 효과야말로 이이의 시를 절창으로 과장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않으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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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06 08:5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 꼭 교고서에서 본 원로시인같기도 하네요. 이별이 오면 이란 시 좋은데요. ㅎㅎ 그럼에도 저 시인은 바지락 소리는 들었지 씻어보진 않았나보다 우씨 바지락도 이별한 맘도 아프겠지만 씻는 손도 아프다는 ㅎㅎ 바지락 꼬막 좋아하는 이랑 사는 아줌마는 이런 생각을 ㅠㅠ

Falstaff 2022-01-06 08:58   좋아요 4 | URL
ㅎㅎㅎ ‘이별이 오면‘ 정말 재미나지요? 바지락 씻는 소리와 동시상영되는 씻는 장면도 있잖아요. 분명히 음식점 같은 곳에서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바지락을 가득 넣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주머니를 봤을 거예요. 리듬에 맞춰 들썩들썩. ㅋㅋㅋ
저희 집도 바지락, 홍합, 꼬막 이런 거 좋아하는데요, 바지막과 꼬막 사오면 아내가, 홍합은 제가 손질하는 걸로 정했습니다. 고무장갑 끼고 씻으면 별로 손 안 아파요. 그래도 아프면 속에 얇은 면장갑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 덧끼우면 안 아픕니다.
시인이야 갱상도 문둥인데 어디 씻어봤겠습니까. ㅋㅋㅋㅋ

라파엘 2022-01-06 0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찮은 시인인 것 같네요!! 그나저나 있는 건 시간하고 돈 밖에 없으시다니 ㅎㅎ 누구든지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골드문트님처럼 삶이 인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드려요 ^^

Falstaff 2022-01-06 09:22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말씀 고맙습니다.
늘 안분하며 살아야지 욕심 내봐야 저만 살기 팍팍해지더라고요. ^^

청아 2022-01-06 09: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아니 골드문트님이 별 5개를 주셨다니 일단 그것부터 놀라서 들여다보니 <한 송이 꽃 곁에 온>이 저는 가장 느낌이 좋네요. 눈이 멀어 귀가 대신 가다니!!

Falstaff 2022-01-06 09:24   좋아요 2 | URL
넷이냐, 다섯이냐, 이거 가지고 좀 오래 고민했습니다.
넷 반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 싶더군요.
얘기하신대로, 눈이 멀어 귀가 대신 갔다는 거에 저도 벙~쪘습니다.
그러니 아무나 시인이 되는 거겠습니까!!

바람돌이 2022-01-06 10: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별이 오면 읽으면서 저는 욕함요. 이런 우라질!!!
온몬이 속속들이 아프려면 바지락을 지가 씻어야지 왜 딴 사람보고 씻고 저는 소리만 듣겠다는 거야? 이별의 고통을 속속들이 느끼는데도 무아지경으로 바지락을 박박씼으면 소리뿐 아니라 오감 전체로 고통을 함께할 수 있을거야 이러면서 역시 남자는 시인조차도 감수성이 2% 모자라군 이러면서요. 이 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을 후련하게 씻어라고 했으면........ ㅋㅋ

Falstaff 2022-01-06 10:17   좋아요 4 | URL
ㅋㅋㅋ ‘우라질‘ 드라마에서 예전에 한석규가 세종임금으로 분장해 직접 농사를 지으며 이런 우라질, 이라고 하는 거 들었는데요.
자기가 바지락 박박 씻으면 씻는 소리야 들리겠지만 자기 엉덩이가 아래 위로 들썩들썩하는 건 바라보지 못할 터이니 반밖에 느낄 수 없을 거 같은 걸요.
제가 읽기엔 ˝들려주었으면˝이란 라임을 따라가느라 그런 거지, 시각적 효과도 대단합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22-01-06 1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저도 <이별이 오면> 너무 좋아하는데, 이제나저제나 골드문트 님의 이 시집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렸습니다! 으하하하하

Falstaff 2022-01-06 11:08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저도 이 책 페이퍼에 다락방 님이 인용하신 <이별이 오면>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데요! 딱 써먹기로 한 시가 턱, 나오니까, 우와, 내 눈도 이만하면 괜찮은가 보다 싶더라고요!!!

프레이야 2022-01-06 1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개명하셨군요 ㅎㅎ 골드문트 님.
문태준의 시 좋아합니다.

Falstaff 2022-01-06 11:09   좋아요 3 | URL
넵! 올초부터 바꿨습니다.
가정법뭔 판사님이 기꺼이 좋다 하더라고요. ㅋㅋㅋㅋ

stella.K 2022-01-06 16: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천에 문인 쓰리 스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연수, 김중혁, 문태준. 심지어 같은 연배라고 들었습니다.
와, 위키피디아 너무하네! 우이씨~

물론 골드문트님 보다 젊긴 합니다만 그도 50 넘고보면 더 이상 젊다고도
할 수 없죠. 무엇보다 그가 시골 출신이란 게 그런 시가 가능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근데 이 리뷰 정말 잘 쓰셨네요.
전 시 잘 안 읽게 되는데 한 번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별에 대한 탁월한 작가와 독자의 안목도 그렇고.
˝깔깔하고 깔깔한, 깔깔하고 웃을 만큼 깔깔하거나,
상처가 여기저기를 후벼 파 깔깔하고도 깔깔한 것이
서로 개흙처럼 엉겨버렸으면 좋았을까?˝ 음...유구무언입니다.

알라딘이 이달의 당선작에 시 리뷰에 당선을 준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 리뷰 당선됐으면 하네요. 흐흐

Falstaff 2022-01-06 16:27   좋아요 2 | URL
오, 재밌게 읽으신 거 같아서 기분 좋습니다.
지난 달에 김사인 시집 독후감으로 제가 3만원 벌었습지요. ㅋㅋㅋㅋ
문태준이 쓴 시어들에 비해 느므느므 젊은 나이라는 거였습니다. 70년생인데 50년생인 줄 알았을 정도로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06 2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제가 봐도 70년생 같지가 않아요. 교과서에 실렸을 시 같기도 하구요.
저도 <이별이 오면> 정말 좋네요~바지락 박박 씻어 개흙을 다 씻겨내면 이별의 아픔도 씻겨 나가는 기분일거 같아요. 이별을 극복하고 다시 삶을 시작하겠다는 희망도 보이고 ‘엉덩이를 들썩들썩‘ 건강함이 느껴지는 시에요.

Falstaff 2022-01-06 20:3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정말 재미난 시인입니다. 앞으로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 2022-01-06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이 오면 바지락을.... ㅇ ㅏ... 따라갈 수 없는 감송이다... 바지락.. 바지락 칼국수먹고 싶다.. 바지락바지락바지락락..

Falstaff 2022-01-06 20:33   좋아요 1 | URL
아, 그렇지요?
공쟝쟝님 공감하지 않으시면 실망할 뻔했습니다. ㅋㅋㅋㅋ

- 2022-01-06 20:41   좋아요 1 | URL
… 슬펐습니다 (훌찌럭) 바지락도 좋고 저 두꺼비도 좋네요.. 그렇지만… 전 산문형 인간이라 시는 정말인지… ㅋㅋ 그래도 바지락 슬펐다… 훌찌럭…

Falstaff 2022-01-06 20:57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시 따위를 읽는데 무슨 산문형 운문형이 있겠습니까!
톨백작도 내 맘에 안 들면 다 늙어 집 나간 늙은이에 불과한 게 문학 아네요? ㅎㅎ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법 김숙종 희곡집 1
김숙종 지음 / 연극과인간 / 201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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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종.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한다.

 

  “충남 부여 거기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005년 신춘문예 <싱싱 냉장고>로 등단했습니다. 서른 전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작가의 길을 꿈인 듯 걷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죽은 순간까지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자 꿈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작가를 아는 것이 좀 부족한 듯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고졸 5년차 급여가 대졸 신입, 1년차 급여와 같은 걸 알고, 일을 잘 해서 그랬는지, 사장이 직접 아무데라도 좋으니 대학 졸업장 한 장 가져오라고 해 들어간 곳이 숭의여대 문예창작과였단다. 근데 또 알아보니까, 김숙종이 고졸 5년차, 대졸 신입에 관한 불평등을 자주 입에 올리는 모양이다. 회사 입장에서 대학에서 배운 기간 동안을 경력 처리해준 거 아닌가? 걔네들은 자기 돈 써가며 공부할 때, 얘네들은 돈 벌며 경력 쌓았으니, 이 정도면 그냥 퉁 칠 수 있는 수준 같은데. 즉, 비교적 평등하거나 고졸에 더 이로운 수준 아닐까 싶다. 아, 나는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이런 주제로는 더 말을 잇고 싶지 않으니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작 이이가 다니던 회사 사장은 일을 잘 해 아까워 대학을 가라고 했겠지만, 실제로 공부를 해보니까 자기한테 글 쓰는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어떠셔? 사장한테 좀 미안했을 거 같다. 그지?
  그런데, 희곡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기만 하면, 하여튼 최종심사, 이른바 short list까지 늘 올라가는데, 이게 김숙종에겐 희망고문이었나보다. 아예 예심에서 떨어지면 자기 재주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다시는 도전하지 않고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열심히 약이나 만들겠지만, 이건 될 것도 같고, 당선 작품이 자기 것보다 좀 못한 것도 같고, 이렇게 깨끗하게 네 번이나 미역국을 먹었단다. 그러다가 2005년에 <싱싱냉장고>가 당선, 기어이 극작가 목록의 말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 작품 역시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의 마지막 작품으로 실려 있다.

 

  김숙종의 작품을 여섯 편 읽어보고 내린 결론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 데뷔작인 <싱싱 냉장고>부터 절찬리에 공연했던 <콜라 소녀>,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은 물론이다. 제일 앞에 실린 <템프 파일>은 당연하고 두번째 실린 <배웅>과 <애플 혹은 사과> 모두 다 그렇다. 과거 또는 현재의 ‘나’가 또다른 과거 또는 현재의 ‘나’를 만나는 <애플 혹은 사과>를 제외하면, 물론 연출에 따라서 이것도 그럴 수 있겠지만, 모두 “실제로 무대 공연이 가능한 희곡”이란 것도 현대 극작품으로는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애플 혹은 사과>를 무대에 올리기 어려우리라 생각하는 건 숱한 발화성 물질을 모아 놓았을 쓰레기장에서 물건을 태우고 밟아서 끄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막과 무대장치 등 역시 발화성 물질 투성이인 실 공연 무대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이의 작품을 소개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이 어떤 이유로 그로테스크하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밝힐 것이 있으니,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글쎄 유령이었다는 거야!”를 말해야 한다는 것. 물론 첫 작품 <템프 파일>을 읽은 후면 <배웅>이나 <콜라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대강 짐작이 가겠지만 전혀 모르는 채로 읽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표제작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으로 말하자면,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을 만큼 대표작이고, 말 그대로 연일 만석과 셀 수 없는 앵콜공연을 기록할 정도로 성공작이라 따로 소개를 해야 마땅하다. 2008년 2인극 페스티벌 희곡 공모 당선작이기도 하다. 김숙종이 부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시골마을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소위 농촌봉사를 온 대학생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주로 남학생들은 노동을 하고, 여학생들은 동네 아이들 학습지도와 (지긋지긋한 여성들의 세월이여!) 식사당번을 주로 했을 터이다. 아이들이 보기엔 구름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겋게 생기기도 잘 생긴 도시에서 온 언니 오빠들이 사실 알고 보면 어림없을 만큼 덜 성숙한 청년들이었음을 알 턱이 없어서, 이들이 함부로 표현한 ‘순수한’ 애정과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 줄 알았을 것이다. 김숙종 자신이 집으로 돌아간 이 도시 출신 언니 오빠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어서, 다시 편지를 보내도 여전히 답장을 받지 못하는 일종의 배신, 비록 그들이 현장에서 보여준 애정과 관심이 진심이었다는 건 나이가 든 지금도 믿고 있지만, 현장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아이들의 마음 속에 여지를 두고 떠난 건 잘못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맞다. 잘못된 거다. (나도 경험 있다. 반성한다. 그래도 난 답장은 해줬다.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믿기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예 가지 않은 것만 못했다.)
  여기에 한 가지 보태자면 앞에서 이야기한 네 번 신춘문예 최종심사까지 올라가 미역국 먹은 일. 김숙종은 회사 사장이 ‘아무’ 대학이라도 좋으니 졸업장을 따오라고 했을 때, 왜 문예창작과를 선택했을까.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십 수년 전, 부여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 동네 살 때, 도시에서 농촌봉사활동을 온 흰 피부의 도시 언니 오빠들 가운데 특히 정이 많이 들었던 누군가가 혹시 이이에게 글짓기를 지도했고, 넌 글짓기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작가가 되면 성공하겠다고 다분히 립 서비스를 펼쳐, 어린 마음에 꿈을 만들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추리해본다. 하여튼 작가는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하기도 전부터 극작을 시작했으며 무려 네 번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가 바나나 껍질을 밟는다. 그러니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 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태다. 그러니, 인간이여, 섣불리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주지 말라. 아니,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이런 심리상태에서 희곡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이 시작한다. 단 두 명만 출연하는 2인극이다. 먼저 김종태. 어려서 ‘사이나’ 즉 시안화칼륨, 또는 청산가리를 이용해 꿩을 잡아먹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서른여덟 살, 독신의 만화가. 만날 방안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리기 때문에 운동부족으로 통통하고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형이 스케치북을 사 주며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만화가나 화가가 되면 성공하겠다는 믿음을 주어 그게 평생의 소명인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나 세상일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여전히 거의 완전한 무명의 만화가로 겨우 밥만 먹고 산다.
  양상호. 백과사전 외판원.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느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지금은 한 가족이라 가족끼리 동침을 삼가는 율법에 따라 가까이하지 않는 아내를 꼬드기기 위하여 한 시절 교회에 다녔고,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선하게 보이는 행위를 친절한 언어로 수행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꾀죄죄한 몰골을 한 동네 꼬마가 그림을 곧잘 그리는 것을 알고, 꼬마에게 스케치북까지 선물하며 스케치북에 꽉 차게 만화를 그리면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헛된 믿음을 준 것을 당연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만화만 잘 그리는 코찔찔이 소년이 서른여덟 살의 장년이 된 어느 여름날, 남의 집 현관문이 저절로 열리게 만드는 재주가 남다른 양상호가 화장실이 급하니 선처를 부탁한다는 애절한 호소를 해 김종태의 집에 들어오고, 능수능란한 영업력을 자랑하는 고수답게 52권에 달하는 백과사전을 195만원에 사고 팔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든다. 김종태. 시간이 흐르면서 양상호가 저 먼 기억 속에 만화가의 꿈을 심어준 채 다시 찾아오겠다는 허튼 약속을 날리고 사라져버린 교회 형인 것을 알아낸다. 만화가의 꿈은 그저 꿈이었음을, 허튼 희망을 주는 건 못할 짓이었다고 벌써 자각하고 있던 김종태는 이제 양상호를 벌주기로 결심을 하는데, 어떤 벌인지 내가 일러드리지 않을 건 벌써 짐작을 하고 계시리라.

 

  재미있다. 내가 희곡을 읽은 내력이 보잘것없어 삼가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말 탁월한 우리의 현대 희곡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쉽고 익숙하다. 희곡집 구입을 머뭇거리시는 분을 위한 추천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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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1-04 09: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작가가 있었군요. 작가 이력이 참 재미납니다. 정말 농활 간 대학생 청년이 꿈에 부채질을 했을까요? ㅋㅋㅋ 저도 농활 가서 그런 적 있는 거 아닌가 돌아봤는데 전 애들하고 놀기는 했어도 꿈 부풀리는 이야기는 안 했던 거 같습니다. ㅋㅋ 아 근데 답장은 안 했네요; 잘못했네 잘못했어...

암튼 이 작가 책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01-04 09:54   좋아요 5 | URL
ㅎㅎㅎ 잠자냥 님도 농활 경험이 있군요.
전 걍 땅만 파다 온 거 같은 기억입니다. 특히 아이들하고 접촉을 피했는데, 그래도 편지가 와서 답장 한 번 해준 적 있습니다.

이 책은 별 다섯 주긴 했지만 명작이라거나 그런 수준은 아니고요, 뭤보다, 제목처럼 쉽고 재미있습니다. 현대 프랑스 희곡 읽다가 이 책 읽으니까 을매나 개운한지 말입죠. 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04 1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어요. 무엇보다 쉽다니~~♡

처음에 골드문트님 요리책 보신 줄 알고 놀랐어요. ㅋ

Falstaff 2022-01-04 11:5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요리책.
딱 그 작품이 대표작인데요, 막판 정말 역발상적 결말이 재미납니다! ^^

stella.K 2022-01-04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쿨캣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골드문트님은 소설 전문인데 웬 요리책...?
이젠 거기까지 지경을 넓히시려나 보다 했습니다.ㅋㅋ
근데 정말 재밌을 것 같아요.
작가 이름이 약간 독특하네요.
하지만 꿈조차 없으면 삭막해서 어찌 살겠습니까? OTL~

Falstaff 2022-01-04 16:48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렇습니까, 요리책?
제가 간단한 먹거리는 좀 만들지요. 저한테 배워서 큰 아이도 음식 만들어 지 딸한테 먹이는 거 찍어 보내고 그렇습니다. ㅋㅋㅋ
주말에 한 끼는 거의 빼지 않고 제가 만들어 마눌한테 상납합니다. 이젠 귀여움도 좀 받아야 할 때거든요. 읃어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ㅋㅋㅋㅋ

꿈은 꿈일 때 좋지, 그걸 특히 해도 해도 안 되는 걸 (사실 아주 조금의 차이로 말이지요) 기어이 하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에휴... 전 생각만 해도 불쌍하고 그런 걸요.

stella.K 2022-01-04 19:01   좋아요 3 | URL
ㅎㅎㅎ 노후보장 확실히 하시는군요.
잘하셨습니다.
울엄니는 일찌기 청상이 되셨는데
교회에 비슷한 연배의 권사님들 얘기들으면
이 나이에 영감 시집살이한다고 푸념이 이만저만 아니더군요.
아마 울아부지도 살아계셨으면 엄마깨나 들볶았을 것 같은데
그런 거 보면 엄마 늦복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앗, 제가 골드문트님 앞에서 별소리를 다합니다.
용서해주시와요. >.<;;ㅋ

mini74 2022-01-04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희 엄마 일기장에 아버지는 망할 놈 ㅠㅠ 저희 아버지는 직장다니는 선비? 타입이셨거든요. 딱 직장만 , 모자라는 생활비도 다섯아이 학비며 공부며 집안 공사조차도 엄마몫. 그럼에도 엄마는 아버지 마니 그리워하십니다 ㅎㅎ 울 남편이 그렇게 물도 못 맞추면서 커피 타준다는데는 이런 이유도 있겠군요. 별 다섯개 , 설렙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4 19:2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인생입지요.
이 책 어렵지도 않고 별 다섯을 향유할 명작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만, 무엇보다, 쉽고, 재밌습니다.

그레이스 2022-01-04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닉네임 바꾸셔서 그냥 지나갈뻔 ㅎㅎ
남의 집 대문을 열게하는 외판원 ^^
전 여기서 알라딘 장바구니를 열게하는 골드문트님을 봤습니다 ㅎㅎ

Falstaff 2022-01-04 19:24   좋아요 3 | URL
아하, 낚시꾼을 보신 거네요? ㅋㅋㅋ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