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수탉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규현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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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짐작도 안 했다. 이 책이 열네 단편을 실은 단편집이란 것은. 투르니에도 단편소설을 썼다는 거 자체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책의 제목도 근사했다. 《황야의 수탉: Le Coq de bruyère》. 저 러시아 땅엔 푸시킨이 타타르나 몽고족 등의 이민족이 침략할 징조가 보이면 긴 울음을 우는 <황금 닭: Leq d'Or>을 만든 적이 있잖았나 말이지. 책 제목 하나 가지고 대단한 서사를 가진 장편소설일 것이라고, 벌컥벌컥 김칫국물부터 들이켰구나. 단편집이란 걸 알고 지레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요즘 유난히 단편소설집을 자주 읽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비교적 짧은 작품들, 소설과 비교해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희곡을 연달아 읽었기 때문에 좀 유장한 장편을 읽고 싶어서였고, 미셸 투르니에라면 이 기대를 충족시켜 주리라, 기대가 커서였을 것이다.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가 제일 먼저 만든 인간은 유방이 달린 자웅동체라고 주장하는 <아담가家>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속옷만 보면 흥분을 넘어 환장하는 주인공을 다룬 <페티시스트 - 1인 단막극>까지 참 다양한 주제들이다. 심지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대신 등장한 산타 할머니, 사제가 설교단에 오르는 순간부터 울어제끼는 아기 예수 역을 맡은 진짜 아기에게 풍만한 가슴을 내미는 <산타 할머니>도 들어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작품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표제작 <황야의 수탉>의 주인공은 환갑이 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근육과, 펜싱실력과, 전설적인 마장마술은 30대 초반의 신체 건강한 장정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신사다. 투르니에의 주요 무대인 알랑송의 펜싱장엔 제1 기병대에서 가장 출중한 두 검객이 사브르를 겨누고 있었는데 결국 깊은 찌르기로 승리를 거둔 인물은 반백의 퇴역 대령 기욤 조프로아 에티엔 드 생 퓌르시 백작이었다. 이 양반이 사브르만 잘 찌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다른 걸로도 숱하게 찌르고 다녀 근 40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귀스틴 생 퓌르시 백작부인의 복장이 터져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나이 먹으면 저절로 시들겠지, 라는 일말의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40년 내내, 어떻게 쉬지 않고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는지 말이지. 알랑송 사람들도 백작의 이 찌르기 실력을 처음엔 비웃다가, 어느 수준에 이르니 감탄을 하다가, 이젠 경외의 수준에 달해 생 퓌르시 백작에게 “수탉”이라는 별호를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이이의 집에 나이 많은 하녀가 이젠 은퇴해서 새롭게 쉰 살 먹은 하녀가 들어와 사달이 생기는데, 설마 원기 왕성한 백작께서 못생기고 힘만 센 으제니한테 흑심이야 품으려고. 으제니의 열여덟 먹은 조카 마리에트면 몰라도. 희극 같지? 희극은 분명 희극인데 작가 푸르니에가 한 사람의 인생에 호락호락하게 희극을 선사하지는 않을 인물이니 문제다.
  표제작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만큼 또 재미나게 읽은 작품이 40톤 화물을 정기적으로 남프랑스까지 수송하는 스무 살의 트레일러 운전수 피에르와 그보다 두 배 이상 많이 산 것 같은 파트너 가스통의 이야기 <은방울꽃 휴게소>였다. 이 책이 이규현 번역이다. 유럽 언어에서도 경어와 평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경어는 경어고, 평어로 말할 거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쓰는 평어와는 좀 다르지 않나?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피에르와 가스통은 평어를 쓰는 사이다. 나이가 두 배 차이 나는데도 불고하고. 그래서 스무 살짜리 피에르가 가스통을 호칭하는데, “자네.” 말은 평어, 우리말로 해서 반말을 쓰되, 가스통이 젊어서 사고라도 쳤으면 아들뻘인데, 아빠뻘한테 자네, 라고 하기엔 무리라 그저 “형님” 수준으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얼빵 없어진다. 그리고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네’로 일관하면, 미쳤을까? 의심하게 된다.
  성실한 운전수 피에르한테는 펄펄 끓는 스무 살의 피가 흐른다. 도버해협 근처의 블로뉴에서 새벽에 고속도로에 올라 리옹까지 왕복해야 하는 일. 첫날 새벽엔 언제나 피에르가 운전을 하고 파트너 가스통은 의자 뒤 공간에서 잠을 잔다. 트레일러 타보신 분은 알겠지만 진짜로 의자 뒤편에 작은 공간이 있다. 오랜 운전에 피곤해지면 차에서 내려 스트레칭을 하고, 이 공간으로 옮겨 잠깐 눈을 붙일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다. 고속도로를 타다가 은방울꽃이 하나도 없는 ‘은방울꽃 휴게소’에 들러 차 청소도 하고, 점검도 하고, 운전자도 바꾸는데, 잠깐 쉬는 틈에 피에르가 적은 수의 소떼, 그리고 소들을 돌보며 잔디에 앉아 있는 뤼지니 마을의 아가씨 마리네트를 만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휴게소와 들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 이들은 무도회를 이야기하고, 라디오를 켜놓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이 떨어진 상태로 왈츠를 추기도 한다. 바야흐로 스무 살 핏줄에 불을 붙여버리는 마리네트. 어떻게 됐을까? 어떻긴 어때. 순식간에 불 맞은 들짐승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인간이라면 절대 옆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가스통의 진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피에르. 이 아이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비극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한 시절엔 만발했지만 그 위에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은방울꽃이 한 송이도 남아 있지 않은 은방울꽃밭 옆의 은방울꽃 휴게소에서 시작하는.
  이외에도 <트리스탄 복스>, <베로니크의 수의壽衣> 등 재미있는 작품들이 들어 있는 책. 그러나 전편이 다 좋은 수준은 아니고, 무엇보다 아마 품절일 걸? 위에서 얘기했듯 몇 몇 부분에서 번역한 우리말 표현이 깔끔하지 않은 것도 있고, 전통의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는 예외적으로 오타도 몇 개 눈에 보인다. 그러니 안 보인 오타까지 합하면…… 이런 얘기는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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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0 08: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 단편집이 있군요.
새상품도 있고 중고도 나와있네요. 바로 주문했어요. 늘 몰랐던 책 소개 고맙습니다 ^^
역시나 재미나게 읽었어요.

Falstaff 2021-11-10 08:58   좋아요 5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어주시니 제 기분도 좋고, 어깨도 으쓱으쓱하고. 고맙습니다!
^^

얄라알라 2021-11-10 10:14   좋아요 3 | URL
와 프레이야님 정말 발 빠르심,
Falstaff님의 추천에 바로 주문하시다니요.
폴스타프님께서 ‘경어와 평어‘ 이야기를 해주신 덕분에 저도 다음에 혹시 이 단편집 읽는다면 유의해서^^

coolcat329 2021-11-10 09: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황야의 수탉 🐓 제목이 멋지네요.
은방울꽃 휴게소가 저도 맘에 들어요. 도서관 가서 요것만 읽어봐야겠어요 ~

Falstaff 2021-11-10 09:43   좋아요 4 | URL
ㅎㅎ 좋은 선택입니다. 제일 재미난 것들이예요.

새파랑 2021-11-10 09:1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품절 느낌이 나는데 역시 막줄에 품절이라고 알려주는 폴스타프님 ㅋ 작품이 전반적으로 혈기왕성(?)한 느낌이 나네요~!!

Falstaff 2021-11-10 09:44   좋아요 4 | URL
이이가 철학교수 지원했다가 미역국 먹은 사람입니다. 혈기방장하지만은 않습지요.

얄라알라 2021-11-10 10:14   좋아요 4 | URL
하하하 책고수님 새파랑님은 표지만 딱 보셔도 ˝품절 느낌˝ 아시다니!^^ 하긴 저도 이 책 아주아주 옛날에 도서관 서가에서 보았던 그 표지 그대로이네요.

얄라알라 2021-11-10 10:15   좋아요 4 | URL
이분이 철학 전공의 레비스트로스 강의도 들었다고, 들은 것 같아요^^ 철학교수 지원이라는 부분 더 알아보고 싶네요

새파랑 2021-11-10 10:37   좋아요 2 | URL
표지가 좀 오래된(?) 느낌이 나서요 😅

Falstaff 2021-11-10 10:48   좋아요 3 | URL
ㅎㅎㅎ 요즘 인터넷에 하도 많은 정보가 떠서, 이젠 오히려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하여튼 푸르니에가 철학에 깊이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황금구슬>이란 책도 근사합니다.
<마왕>이 대빵이고요. 아마 <방드르디>는 다들 읽어보셨을 걸로.... ^^;;

잠자냥 2021-11-10 09:5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여 그대, 어찌 이리도 품절 상품을 잘도 들이대는가?
그대 뺨을 갈기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다가 도로 집어넣었소. 우리에겐 아직 까방권이 남았으니...
그나저나 단편 읽으면 장편 읽고 싶어진다는 그대의 말에 깊이 공감하오.

페넬로페 2021-11-10 10:12   좋아요 4 | URL
까방권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 입니까? ㅎㅎ

잠자냥 2021-11-10 10:15   좋아요 3 | URL
그건 제 마음대로입니다. 이제 몇 장 안남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1-10 10:45   좋아요 3 | URL
엇, 이럭저럭 다섯 개 까방권 얻어서 이제 두 개 소멸하고 세 개 남은 걸로.... ㅎㅎ

페넬로페 2021-11-10 10:12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은 1일 1독서 1리뷰를 하시는 겁니까? 어쩐지 이건 골드문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 종류의 얘기가 있는 단편집이라 좋을것 같아요.
도서관에 검색해봐야겠어요^^

잠자냥 2021-11-10 10:19   좋아요 4 | URL
주정뱅이라서 술 취해서 책을 막 읽어 젖힌다네요!

Falstaff 2021-11-10 10:45   좋아요 3 | URL
암만해도 내년 정월 초부터 골드문트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1-11-10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방드르디는 제 인생책^^ 그 서문에서 철학 이야기가 나왔떤 것 같은데, 아...다시 찾아봐야할봐요^^ falstaff님께서 숙제 주셨습니다 ㅎ

Falstaff 2021-11-10 12:03   좋아요 3 | URL
아, 인생책입니까? ㅋㅋㅋㅋ
저도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전도 즉 생각의 거꾸러짐을 확 느꼈던 기억입니다.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함께 말입죠.
숙제하듯 책 읽지 마세요.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 어쩝니까. ㅎㅎㅎㅎㅎ

그레이스 2021-11-10 12:19   좋아요 2 | URL
저도 이 책 3번은 읽은듯요
혼자서 한번, 토론하기위해 한번, 청소년용으로 한번 말씀하신 것처럼 사고의 전복이 일어난...!

Falstaff 2021-11-10 14:39   좋아요 2 | URL
윽! 세 번 읽으셨으면 찐 팬 인증입니다! ㅋㅋㅋ

얄라알라 2021-11-10 1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정 인생책이었습니다! 저에게 19살 때 책 선생님이 있었거든요. 책을 한 아름 안겨주며 ˝너가 좋아할 거같아˝했던. 그 친구 덕분에 처음 <방드르디>접하고 불문학과 개설하는 교양 수업까지 기웃거리며 들었던

Falstaff 2021-11-10 14:43   좋아요 2 | URL
아우, 좋은 친구를 두셨군요.
제 동무들은 다 술꾼들입니다. 책 이야기 하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 한 명 있었군요. 지금은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교수하는 사제네요. 짜식이 전화 한 통이 없어요 그래.

얄라알라 2021-11-10 12: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께서도, Falstaff님께서도 ˝사고의 전복˝이야기하시니까, 정말 반갑고 좋습니다!

Falstaff 2021-11-10 14:44   좋아요 2 | URL
전복... 사고의 전복 보다도, 저는 완도 전복에 쐬주 한 병이 더 좋은데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1-11-10 21: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황금수탉, 하니까 ‘황금물고기’ 생각나요.
le Poisson d’or 결국 금붕어인데 어감의 차이가 괭장하지요? ^^

Falstaff 2021-11-10 21:27   좋아요 1 | URL
아휴, 전 불어 몰라요. 겨우 읽을 줄만 안답니다. ㅋㅋ
 
브로크백 마운틴 에프 모던 클래식
애니 프루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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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핑 뉴스>를 흥미롭게 읽어, 적어도 한 권은 더 읽으리라고 점찍어놓았던 애니 프루, Adna Ann Proulx의 단편집을 읽었다. 위키피디어 자료에 의하면 이이는 2018년까지 다섯 편의 장편소설과 네 권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이외 아홉 권의 논픽션이 있다. 1935년 을해생 돼지띠로 올해 나이 여든일곱. 아직 글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신간은 없다고 가정하면 더욱 더, 몇 권 되지 않는 저작들이 번역, 출간되지 않는 것이 매우 아쉽다. 내가 읽은 두 권 외에 데뷔작인 <엽서>가 지난 세기에 나온 적이 있지만 출판사조차 없어졌다.
  이이는 코네티컷에서 잉글랜드 부계와 프랑스-캐나다 모계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내내 미국의 북동부 지역의 각처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버몬트, 노스캐롤라이나, 메인, 로드아일랜드 등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을 가진 올망졸망한 주들에서 살았다. 작가의 추억이 서린 곳에서 조금만, 물론 우리나라 땅을 기준으로 하면 먼 거리지만 미국인들의 거리 기준으로 하면 얼마 멀지 않은 뉴펀들랜드를 무대로 한 <시핑 뉴스>를 읽으면서, 남자들은 언젠가는 얼음조각이 자박자박한 바다에 거꾸로 박혀 죽고, 여자들은 언젠가는 과부가 되는 땅의 황량함을 그렇게 잘 묘사했겠거니 했었다. 그렇지 않은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그 땅위에서, 하늘도 안 보이고 앞도 안 보이던 거대 밀림 속에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를 뽑아내 건설한, 개척자라고 부르는 초기 침략자들의 야만적인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던 땅 위에서의 삶을.
  그러나 틀렸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단편소설로 눈길을 돌리면, 애니 프루는 세 권의 단편집 제목을 <와이오밍 이야기>, <와이오밍 이야기 2> 그리고 <와이오밍 이야기 3>으로 펴냈다. 프루는 버몬트에서 30년 동안 살며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하고, 조너선, 질리스, 모건과 실비아, 순서대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살다가, 뜻한 바 있어서 1994년에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간다. 물론 연중 일정기간은 <시핑 뉴스>의 무대,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지내기는 하지만. 와이오밍이라는 완벽한 내륙지방이자 황량함의 측면에선 셔벗 수준 바닷물과는 정 반대의 삭막한 환경에 지배받는 지역에 거주하며, 이 놀라운 적막과 가혹한 기후, 연간 80도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온도차와 폭설 등에 대하여, 처음엔 놀랬다가, 점점 반했을 수도 있는데 사실 반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어서 그건 그냥 넘어가고, 하여튼 와이오밍이라는 야만의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알리고자 마음먹는다.

 

  데뷔작 <엽서>로 펜-포크너 상, 우리말로 최우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애니 프루는 와이오밍으로 이사하기 바로 전 해인 1993년에 <시핑 뉴스>로 퓰리처 상과 전미 도서상을 휩쓴 다음이다. <시핑 뉴스>는 2001년에 영화로도 만들었고, 이 덕에 애니 프루도 주머니가 두둑해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제 1997년부터 와이오밍을 무대로 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브로크백 마운틴>.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78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을 휩쓸고, 같은 해 골든 글로브에선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주제가상을 꿀꺽, 해치워버린다. 나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보지 않았다. 2005년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낸 시절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봉급 좀 더 받아볼까, 아니면, 잘리지 않고 좀 더 오래 다녀볼까, 이 둘 중의 하나를 위해 새벽부터 일하고, 술 마시고, 바가지 긁히고,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 아이들과 아내 사이에서 미치고 팔짝 뛸 당시였으니 말이지. 아, 인생은 언제나 엿 같아, 하면서.
  물론 시간이 있어도 안 봤을 거 같기는 하다. 동성애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제발 부탁하는데, 나더러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지 마라.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그이들 취향은 존중하겠다. 이게 기본 마음가짐일 뿐. 그래도 같은 남성끼리의 섹스 씬이 나온다면 아직은 조금 어색할 거 같다. 뭐라 하지 말고 시간을 좀 더 달라. 적응이란 건 한 번에 확 해버리는 게 아니잖은가. 하여튼 <브로크백 마운틴>을 써서 애니 프루는 또다시 오 헨리 상을 받고, 영화로 만들어 이번엔 대박을 쳤는데, 얼마 만큼이냐 하면, 작가 자신이 리브레토, 대본을 써서 오페라로도 만들어 2014년 1월에 마드리드의 레알 극장에서 세계초연을 했을 정도였다. 너무 많이 놀라지는 마시라. 숀 펜과 수잔 서랜든이 주인공을 한 영화 <데드맨워킹>도 오페라로 만들어 미국에서 공연했고, 오페라가 CD 및 DVD로도 팔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참,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다. 안 그냐? 남자 복이 없어서 세 번 이혼을 했지만 덕분에 다양한 아이들이 생겼으니 그것도 뭐, 좋게 생각하자.

 

  모두 열하나의 단편소설을 실은 책. 장소는 모두 와이오밍 중북부지역. 미국에서 열 번째로 넓은 면적이지만 가장 적은 인구가 산다는 와이오밍 주. 서부의 관문이라고 일컫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한 잠을 자고 기내식까지 먹어도 계속 펼쳐지는 황무지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면 그리 많이 틀리지 않는다. 요즘 말고 30년 전 비행기로 그랬다는 말씀.
  딱 하나의 단편에서만 주인공이 와이오밍이 아닌 매사추세츠에 산다. 로키산맥의 북쪽, 빅혼산맥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기이한 땅의 목장을 1936년에 떠나 갖은 고생 끝에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고, 결혼했고, 또 결혼했고, 통풍기와 보일러 청소사업과 영리한 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은퇴했고, 지역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별 스캔들 없이 빠져나와 이제 편안한 노년을 지내는 동부의 부유한 80대 노인에게, ‘진드기’라는 영어 단어인 ‘틱’이란 이름을 가졌으나 여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조카의 아내로부터, 노인의 친동생 롤로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비행공포증이 있는 노인 메로는 그동안 철저한 건강관리를 해왔기 때문에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자신해서 캐딜락을 몰고 와이오밍까지 달리기로 결정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먼저 주간洲間고속도로에서의 교통사고와, 폭풍우와 폭설, 길 읽어버림과 함께 저 먼 시절 퍼포먼스가 있었던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 애비와 에벤을 통해 본 듯한 장면을 회상한다. 날은 추워지고, 눈은 펑펑 내리는데, 바람은 매몰차게 불지, 사고 난 다음에 현금주고 산 중고차는 또다시 개골창에 박혔지, 키를 꽂아 놓은 상태에서 문이 걸려 버렸지, 돌로 창문을 깨서 문을 여니까 조수석 스위치는 개방되어 있던 상태였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지, 광활한 미국대륙에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위급배낭은 사고 낸 차의 트렁크에 있지, 딱 이럴 때, 60여 년 전에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 온,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젊은 여자, 뒤에 지나가면서 한 번 철썩 때리고 싶게 만드는 말 궁둥이를 가지고 있는 여자, 아버지가 쓰다버린 찌꺼기가 아니라 온전한 내 것을 갖고 싶어 집을 나오게 만든 여자가 들려준 목격담, 겨울나기용 수송아지 도살 장면, 기어이 메로 노인으로 하여금 나머지 평생을 채식주의자로 만든 엽기난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 <가죽 벗긴 소>가 인상 깊었다.
  거의 다 만족할 만한 단편들. 이 작품집을 읽고 <시핑 뉴스>도 매력적이었지만 애니 프루는 단편이 백미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결론을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궤적을 따라가는 것보다, 호흡을 빨리 해 독자에게 결론에 대한 준비시간을 제공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간략한 문장으로 그리는 대자연의 황량한 아름다움도 책을 읽는 즐거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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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1-09 08: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핑뉴스 영화는 엄청난 망작이에요. 피하십시요! 전 라로님 조언을 무시했다가 엄청난 후회를 했지만요. ‘브로크백’ 꼭 읽어야겠군요. 풍광묘사나 사람들의 무심한 (하지만 섬세한) 행동 묘사가 또 얼마나 끝내줄까요?!!

Falstaff 2021-11-09 09:32   좋아요 3 | URL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시핑뉴스는 안 보겠습니다!!
미국 서부의 광활함은 여성 작가들이 더 뛰어나게 묘사하는 거 같아요. 윌라 캐더를 비롯해서 말입니다. ^^

그레이스 2021-11-09 09: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이예요. 눈이 시릴만큼 아름답다는 걸 글로 느꼈어요, 자연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동성애에 관한 글은 낯설고.... ;;

Falstaff 2021-11-09 09:34   좋아요 5 | URL
예. 이런 책이면 얼마든지 지갑을 비울 수 있다니까요. ㅎㅎㅎ
문장도 참 좋더라고요. 진즉 읽을 걸 그랬습니다. 영화가 너무 유명해 오히려 늦었나봅니다.

잠자냥 2021-11-09 09: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전 요즘 출근길에 단편 한 개씩 읽고 있는데(오늘 아침에도 읽었습니다. 오늘 제가 읽은 챕터는 ‘어느 박차 한 쌍‘에서 프리즈 부인이 드디어 떠나려는 부분입니다), 정말 묘사며 비유며 아주 찰지고 재미납니다. 코맥 매카시 쪽보다는 애니 프루가 그리는 서부 풍경이 더 마음에 들고요. 정말 좋은 단편집입니다.

Falstaff 2021-11-09 09:37   좋아요 5 | URL
오. 바로 이 책을 읽고 계시는구먼요! 와우!!
ㅎㅎㅎ 코맥 매카시 이야기 하지 않으려 무지 참았는데 결국 나오는군요.
저도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서, 저 위 유부만두 님 답글에 윌라 캐더 같이 여성 작가들이 더 뛰어나게 묘사한다고만. ㅋㅋㅋㅋ 뭐 전적으로 취향 차이겠지요.

잠자냥 2021-11-09 10:15   좋아요 4 | URL
저도 이 책을 이제야 읽는데,(저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를 보기는 했는데, 영화 때문에 호들갑(?) 떠는 분위기가 싫어서 그땐 이 책을 읽지 않았어요. ㅎㅎ), 읽고 보니 코맥 매카시를 미국 서부 장르의 제왕처럼 평가하는 분위기에 좀 반발심이 들더라고요. 암튼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훨씬 좋습니다요. 특히 ‘세상 끝자락의 레드월 목장‘에서 그 덩치 큰 카우걸 딸내미 캐릭터 정말 흥미로웠어요!!

아침 출근길에 읽으니 졸립지 않아 좋긴 한데, 이 책 이거 조용히 집에서 독서하면 더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ㅎㅎㅎ

Falstaff 2021-11-09 10:27   좋아요 3 | URL
매카시의 서부는 잘 쓴 무협지라고 생각합니다. 풍광묘사 같은 건 다음으로 하고, 스토리 자체가 마초적이라 사나워요. 물론 안 그런 것도 있겠고, 겨우 두 권 읽고 이렇게 평하는게 정당하지도 않겠지만,우짰든 더 이상은 읽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윌라 캐더나 레슬리 마몬 실코만 알았다가, 아우, 프루가 서부 소설을 이렇게 많이, 근사하게 썼다니 깜짝 놀랐습지요.ㅎㅎㅎㅎ
* 레슬리 마몬 실코, <의식> --- 절판!!!

조용히 집중해 읽으면 훨씬 더 좋습니다. 전 단편은 그래야 읽혀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1-11-09 11: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핑 뉴스의 작가와 이 책의 작가가 같군요. 전 이작품은 영화로만 봤었는데~ 윌라 캐더의 풍경묘사 너무 좋았는데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Falstaff 2021-11-09 12:12   좋아요 4 | URL
예. 꼭 읽어보셔요. 참 좋습니다.

coolcat329 2021-11-09 1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단편집이군요! 시핑뉴스는 읽다 포기했는데 그 주인공 웃긴 남자 생각하면 다시 도전해볼까도 싶지만 우선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11-09 19:31   좋아요 2 | URL
옙. 단편집입니다. 무지 재미납니다! 저도 시핑 뉴스는 잘 쓴 책이지만 뻔한 결론 때문에 별 셋 준 인간입니다. ㅋㅋㅋㅋ

이 책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저 다음에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와이오밍으로 이민이나 가버릴까요? ㅎㅎㅎ

잠자냥 2021-11-10 00:03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여 멋진 박차를 준비하고 떠나시게나~ ㅋㅋㅋㅋ

Falstaff 2021-11-10 08:19   좋아요 2 | URL
겨울에 영하 40도, 여름에 영상 40도. 조금, 아주 조금 무립니다. ㅠㅠ

유부만두 2021-12-12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니 프루가 추천한 서부 카우보이 소설 “파워 오브 도그 (토머스 새비지)” 읽어보세요. ^^

Falstaff 2021-12-12 09:48   좋아요 0 | URL
옙. 접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만희 희곡집 1
이만희 지음 / 월인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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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54년 말띠 아저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뻤던 영화배우 정윤희와 동갑이다. 세월이 흘러 이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대한민국 연극계의 거장이라 불러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연극에 관한 책을 전문으로 발행했던 도서출판 월인, 이제는 이름을 ‘연극과 인간’으로 바꾼 회사에서 1998년에 초판을 찍은 책. 내가 읽은 건 2004년 중쇄본이다. 지금은 절판 상태. 대신 아르테arte 출판사에서 네 권으로 된 <이만희 희곡집> 세트가 나와 있다.
  이이의 바이오그래피를 보면, 충남 대천에서 태어나, 고교 연극의 명문인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1978년에 동국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에 동아일보 장막희곡공모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미이라속의 시체들>로 입선해 극작가로 등단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만희 희곡집 1》에 <돼지와 오토바이>라고 제목을 바꿔 실려 있다. 1980년에는 전라남도 도청이 있던 광주에서 교사자리를 얻어 내려갔다가 뜻을 같이 하는 친구와 함께 소극장을 꾸릴 궁리를 하다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녀비행>을 쓰지만 1996년에야 무대에 올린다. 등단 1년 만에 자기 작품을 올리기가 쉬운가 어디.
  우경 신문이라 일컫는 동아일보가 매년 동아연극제를 개최하는 등, 사실 우리나라 연극계를 가장 많이 지원하고 있는 법인이다. 이만희는 장막희곡공모에 당선하지 못하고 입선으로 등단한 것이 종내 께름칙했는지 서른 살이 되는 1983년에 <풍인>으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 희곡부문 수상함으로써 기어이 어깨에 힘을 주고 만다. 이이의 연극관련 수상 경력만 해도 서울연극제 희곡부문, 백상예술상, 영희연극상, 동아연극상, 대산문학상, 한국희곡문학상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지경이고, 여기다 영화관련 수상까지 보태면 지금이 오후 세 시인데, 내일 해뜰 때까지 읊어야 할 듯.
  이이의 대표작으로는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와 <피고지고 피고지고> 등을 꼽는다. 도서출판 월인에서 찍은 《이만희 희곡집 1》은 <목탁구멍>만 실었다. <피고지고 피고지고>는 2편에 들어 있으나 역시 절판. 읽어보려면 역시 아르테 책을 선택해야 한다.

 

  <처녀비행>은, 요새 처녀비행, 처녀림, 처녀출판,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 극작품을 쓴 때가 1980년이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당시 광주의 모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으면 당연히 작가의 말대로 작품에 ‘광주와 연극’을 함께 담아보려 노력을 했어야 할 터이다. 이만희도 그런 의욕과 울분을 작품 속에 삽입해보려 했지만 습작기 때여서 그랬는지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1980년에 썼으나 1996년에야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늦게나마 무대에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연극계의 중견 이상으로 발전한 이만희의 작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작가 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습작이라는 티가 난다. 소위 옵니버스 형식의 작품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표현방식이 80년은 모르겠고, 96년에 공연하기엔 많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표현방식을 다 시험해본 다음에 끝에 가서 결국 최소한 일곱 명의 등장인물의 홀딱 쇼로 맺는 것도 이제는 그렇게 유치해보일 수가 없다. 실제 90년대 한 시절에 소극장의 홀딱 쇼가 문화적으로 자그마한 문제점으로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고.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 이후 “목탁구멍”>은 분명히 처음 읽는 것임에도 주인공인 중 도법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 장면이 너무 강한 클리셰가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서너 번은 본 것 같은 문제제기. 수 명의 강도가 남자를 묶어놓고 그가 보는 앞에서 아내를 여럿이 돌려가며 강간하는 범죄. 문제는 범죄가 끝나고, 사건이 해결됐거나 아니거나와 관계없이, 20세기 남자들(어쩌면 지금도! 많은 남자를 포함해서)의 편협한 도덕이나 정조관념 때문에 분명히 아내가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다른 남자의 체액이 내 아내의 몸속에 들어왔고, 피부를 터치했다는 이유로 가정과 아내(또는 연인)와 (만일 있다면)자식과 자기 자신까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들. 나는 분명히 이런 주제로 쓴 소설을 읽어봤으며, 비단 최불암 아저씨 나오는 <수사반장>은 아니었을망정, 물론 설이나 추석 특집 <수사반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 편이 아닌 통속극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것도 같다.
  이러니 어떻게 내가 이만희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인 <목탁구멍>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이런 생각이 드니까 작품의 내용마저 김동리의 <무녀도>, <등신불>과 김성동의 <만다라>에서 특정 씬을 변용한 것이 아닐까 의심마저 잠깐 품었다니까. 설마 그렇게 했을까. 당연히 아니지만 하여튼 그만큼 중요한 클리셰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며, 진심으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라는 뜻은 아니다. 바로 어제 미셸 비나베르가 쓴 <어느 여인의 초상>을 읽어서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이만희의 작품 가운데 <불 좀 꺼주세요>처럼 비나베르와 유사한 다원구조를 가진 작품도 있고, <목탁구멍>이나 <문디>, <돼지와 오토바이> 같은 ‘극중 극’의 형식을 가진 것도 있어서 다양한 방식을 즐길 수 있었다.
  현대 우리 연극계의 거장이며 대표적인 극작가라고 일컫는 이만희의 희곡집 한 권은 읽었다. 괜찮은 선택이었고, 즐길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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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11-09 0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용!! <돼지와 오토바이> 연극으로 본 거 같은데 맞는지는 희곡 읽어봐야알 거 같아요~ 아주 오래 전이라~ㅎㅎ

Falstaff 2021-11-09 08:27   좋아요 1 | URL
아, 연극을 보셨군요! 부럽습니다. ㅎㅎ
 
어느 여인의 초상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3
미셸 비나베르 지음, 서명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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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미셸 비나베르는 1927년에 파리에서 고미술상을 하는 유대 혈통의 아버지와 변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미셸 그린베르크로 태어났으니,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 겨우 열두 살, 파리가 나치 치하로 떨어졌을 때 열세 살. 이때 아빠가 잡혀갔을까, 아니면 도망쳤을까. 성장기 때 아빠의 존재가 중요한 거 아닌가 싶어 궁금했다.

  이이의 할아버지 막심 비나베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로라하는 법학자이자 변호사였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가솔을 몰고 크림반도를 거쳐 파리로 망명했다. 유독 파리에 몰려 있던 러시아 귀족, 부르주아들의 중심에서 이들의 연대를 이루고, 정체성을 확보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손자 미셸이 태어나기 몇 개월 전에 숟가락 놓고 만다. 할아버지 정보는 찾을 수 있건만, 정작 아빠가 나치 치하에서 생존했는지는 도무지 검색이 안 된다.

  미셸의 딸 아노크 그린베르는 프랑스에서 여배우로 활약하고 있고, 46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자 연기상인 은곰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렇다고 이이의 가족이 딴따라 집안이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미셸 비나베르는 극작을 하다가 마음먹은 바가 있어서 세계적인 면도기 회사인 질레트에 임원으로 십여 년 근무한 적이 있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으며, 역시 돈이 있어야 뭐든 할 테니까 말이지, 그 후에 본격적으로 극작에 뛰어들어 2006년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대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많이 배웠지, 좋은 집안 출신이지, 질레트에서 임원도 해봤지, 그래서 돈도 많지, 키 크고 잘 생겼지, 유명한 딸 두었지, 다른 상도 아니고 프랑스 최고 상인 아카데미 프랑세스에서 대상도 받았지, 참 지독하게 재수 없는 인간이다. 안 그런가?


  초장에 왜 이렇게 작가 미셸 비나베르의 아버지 타령을 했는가 하면, 이 책 <어느 여인의 초상>의 주인공 ‘소피 오자노’가 초장에 자기가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옛 연인, 지금은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인 사비에 베르제레의 집에 찾아가 밥도 먹고, 한 번 하고 난 다음에, 권총을 뽑아 옛 연인의 이마에다 한 방 쏘고, 이어서 가슴에 또 한 방, 마지막으로 자빠진 사비에의 관자놀이에 대고 다시 한 방을 쏴 죽여버린 엽기 사건을 재판하는 과정에 변호사 (서양 애들은 이름도 참) 깡세 씨가 이게 다 아버지의 냉정한 교육 탓이라 강변하는 장면 때문이다.

  주인공 소피 오자노는 작가 미셸 비나베르와 27년생 동갑내기로, 열세 살 때인 1940년에 큰오빠가 자신이 지휘하는 잠수함에서, 작은 오빠가 비행훈련 중에 죽고 만다. 이게 다 독일군하고 싸우거나 싸울 훈련을 하던 중인데 아직 열다섯 살도 되지 않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독일 장교는 물론이고 독일 사병들과 팔짱을 낀 채 산책하다, 이를 고깝게 본 학교 당국의 처사로 퇴학을 당한 적이 있다(고 재판정의 검사는 주장한다). 열일곱 살 때인 1944년에는 됭케르트의 베르마슈트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쉰다섯 살 먹은 군의관 슐레징어 대령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독일에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전쟁이 끝나고 의과대학에 진학해 만난 남자가 바로 사비에 베르제레. 둘이 할 건 다 하면서 소피는 자기가 진짜 사비에를 사랑하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비에는 공부도 잘 해서 모든 시험을 통과하는 반면, 소피는 나이 많은 조교수 꼴로나 씨에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몸을 제공하고, 그걸 학생들이 다 알게 되는 무리수를 두지만 그럼에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 학생들은 꼴로나 씨가 시험을 위한 비정상적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라고, 부도덕한 관계를 비난하지만 사비에는 오히려 소피를 두둔한다. 서로의 사이에 사랑이 깊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이별을 한 상태에서, 소피는 비엔나에서 르구이라는 기술자를 만나 또 몸과 마음이 친밀한 관계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소피는 사비에가 프랑신느라는 여성과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 소피의 정신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떼를 쓰다시피 하여 주소를 알아낸 다음, 총포상에 가서 권총을 사, 범행을 저지른 것. 글쎄, 과문한 쇤네가 보기엔 정확하게 소시오패스인 거 같은데, 이 당시엔 그런 단어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니 쉽게 ‘미친년’이라고 했을 것 같다. 그래서 재판정에 오드브르 박사라고 정신 감정사까지 등장하지 않았겠나.


  책을 읽으면 하여튼 뭔가 배우게 된다. 이 책은 본문보다도 오히려 역자 해설을 통해 궁금한 점이 풀렸다. 내 의문은 유구한 드라마의 전통을 지닌 프랑스 희곡이 20세기,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 별로 재미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아호, 그런데 이것도 소위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논리로 풀 수 있었다. 물론 역자 서명수가 이렇게 얘기한 건 아니다. 그가 쓴 해설을 읽어보니 그게 이 말이다, 싶다.

  역자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발표한 것으로 우리나라 출판사 “연극과 인간”의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시리즈에서 소개한 재미없는 작품들에 관해서는 별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 연극계, 50년대의 부조리극과 60년대 정치극, 그리고 50년대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브레히트의 서사연극이 1968년 5월 혁명을 맞으며 정점에 달했고, 68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일종의 유토피아는 70년대에 들어 열기가 급속하게 식어,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시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지극히 평범하지만, 개별적으로 보면 치열하기 그지없는 진짜 삶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인 문제들, 한마디로 일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썼다.

  아하, 그래서 1970년대, 넓게 잡아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희곡을 퉁쳐서 ‘일상극日常劇’이라고 하는구나. 부조리극과 정치극, 서사연극이 꽃을 피우고 이에 대한 반작용을 등장한 것이 바로 일상극인데, 이래서, 물론 전혀 문외한인 내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재미있지 않다는 거였다. 어쨌든 프랑스 일상극의 기수가 질레트에서 임원 생활을 마감하고 1969년부터 연극판에 뛰어든 미셸 비나베르라고 한다.

  일상적인 삶이라고 하지만 <어느 여인의 초상>이 그리 쉽지는 않다. 물론 어렵다고도 할 수 없지만.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무대는 재판정과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이 등장해 장면을 만들 수 있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배우는 두 공간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가능해서 이것을 따로 분리해 이해해야 하는 건 독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연극을 직접 본다면 훨씬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공연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법이니, 형법을 다룬 <어느 여인의 초상>이란 희곡을 읽을 수밖에 없어서 기어코 뇌를 써가며 대사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런 작업을 반가워하시라. 이런 걸 독자의 머릿속에서 따지며 나름대로 무대를 만드는 “나 홀로 연출”이야말로 희곡을 읽는 재미 가운데서도 으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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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1-05 09: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부조리극과 정치극, 서사연극이 꽃을 피우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일상극이라는 말씀 참 재미나면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희곡의 재미는 정말 내 머리속 ˝나 홀로 연출!˝이지요. 암요. ㅎㅎㅎ

Falstaff 2021-11-05 15:27   좋아요 4 | URL
아 씨. 답글 달았는데 지워졌어요. 아 씨....파.....르

저도 역자 해설 듣고나서야 재미없는 일상극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되더라니까요. 68세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 ㅋㅋㅋ 이후 급격하게 내리막. 인생이 다 그런가 봅니다.

희곡은 2차원, 극무대는 3차원. 차원을 확장하는 건 독자의 권리니까 오히려 더 재미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ㅋㅋㅋ

청아 2021-11-05 13: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살인의 이유가 냉정한 교육탓이라는 대목을 보니 음주운전으로 4명을 죽게하고 부자병이라던 미국 소년이 떠오르네요.

Falstaff 2021-11-05 14:19   좋아요 4 | URL
그건 변호사가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낮추기 위해 주장하는 것이지요. 정신이상, 조현병을 강조해서 사형을 면하고자 하는 거하고 비슷하게....

바람돌이 2021-11-05 17: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희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무대를 상상할 능력이 부족해서... ㅠㅠ 그런데 이 희곡의 주인공 진짜 대단하네요. 저런 사람 옆에 있을까 후덜덜.... ㅎㅎ

Falstaff 2021-11-05 18:27   좋아요 2 | URL
이 희곡 작가 정말 대단하잖아요? ㅎㅎㅎ 다른 기업도 아니고 질레트에서 10년이 넘게 임원을 했다니, 아이고..... 질투 팍팍! ㅎㅎㅎ
그런 분 있고, 이런 인간 있고 그게 다 인생입지요 뭐. ㅋㅋㅋㅋ

coolcat329 2021-11-05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히 질레트 임원이었다는 점에 심한 질투를 하시네요 ㅋㅋㅋ

이 분 잘생겼다 하셔서 검색해보니 젊은 시절 사진이 없어 아쉽지만 한 가지 조금 놀란게 첫 희곡 작품이 <한국인들>이라네요. 한국전쟁을 소재로 썼다고.

저는 희곡 읽은게 손에 꼽지만 오늘 또 프랑스 희곡의 흐름에 대해 배웠네요~^^
근데 소피 이 여자 헐! 이네요.

Falstaff 2021-11-05 21: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질레트 임원이라서라기보다, 자기가 원할 때 임원으로 턱, 들어가 한 십 년 근무하다가, 자기가 원할 때 사원증 픽 던지고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부럽군요.
아마 러시아 특권계급 출신이란 것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었을 거라고, 질투어린 의견을 내봅니다. ㅋㅋㅋㅋㅋ
 
검은 이야기 사슬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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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를 매우 흥미롭게 읽어 이이의 다른 책도 꼭 한 권 읽어야겠다, 싶었다가 마침 눈에 띄어 골랐다. <어떤 작위……>가 장편소설이었던 반면 《검은 이야기 사슬》은 무려 마흔다섯 편의 단편 또는 이야기, 혹은 메모를 모은 책이어서 더 관심이 갔다. 사실 보통의 단편집인줄 알았다. 45편이 245쪽에 실려 245÷45=5.4, 평균 5.4쪽 분량의 손바닥 소설이란 걸 알았다면 과연 ‘선뜻’ 집어 들었을까 싶기도 하다. 온라인 구매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현상. 오프라인이었으면 선 채로 몇 편 읽어보고 그냥 살포시 놓고 나와 버렸을 듯.
  그러나 단정하지 마시라. 여전히 정영문은 내 기호에 근접한 우화와 문법과 특유의 문자 유희를 즐기고 있으니. 문자 유희? 그렇다. 예를 들어 스물아홉 번째 소설 <막연한 공포에 대한 상상>의 피날레는 다음과 같다.

 

  “다만 그는, 이것은 내가 그 전모를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 수도 없는 공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야, 라고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208쪽)

 

  “알지 못하는”, “알 수도 없는”, “알 수 있을”의 연속과 “뿐이야”와 “뿐이었다.”의 반복. 이를 통한 독자의 혼돈과 집중을 유도하고, 동시에, 작가가 의도 했든, 하지 않았든, 문장을 발음할 때의 음악성까지 부여하는 효과를 낸다. 이런 문자 유희는 책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의 빈번한 사용은 심지어 전에 읽은 <어떤 작위……>에서도 이런 형태의 문자 유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기억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정도면 가히 정영문 문장의 한 특징으로 봐도 되겠다 싶지 않을까. 물론 이런 유희가 언제나 즐거운 건 아니다. 가끔 짜증도 나긴 한다.
  제일 먼저 ‘문자 유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책의 분위기가 유희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책의 제목을 왜 《검은 이야기 사슬》이라고 했느냐 하면, 마흔다섯 개의 단편 또는 이야기나 메모의 색조가 대부분 ‘검은 이야기’, 상복의 색깔, 죽음과 유사한 자리에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짭쪼름한 소금의 맛을 탐하는 할머니가, 하나 있는 손자가 자신의 품을 떠날까봐 손자의 눈을 파내는 소설을 떠올렸다. 이 작품이 제목은 잊었지만 아마 박상륭의 단편집 《열명길》에 나오는 이야기일 듯하다. 하여튼 이 탐욕스러운 노파를 떠올린 순간 정영문의 다른 책은 모르겠고 하여튼 《검은 이야기 사슬》은 박상륭이 집중적으로 탐구한 죽음과 (종교라기보다는) 신god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앞에 실린 작품 <임종기도>는 말 그대로 죽음을 앞에 둔 환자를 위하여 임종기도를 하는 목사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다. 한겨울의 오밤중에 신자들도 소명의식도 별로 없는 목사를 찾는 난쟁이가 그를 이끌고 역시 난쟁이인 아내의 죽음의 침상으로 데려간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가는 길엔 분명히 있었던 사과 과수원도 없어지고, 교회도 없어지고, 자기 집의 침대 위엔 예의 난쟁이가 누워 있는 우화. 이걸 ‘우화’ 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두 번째 작품 <장의사>도 그로테스크의 극치를 달려, 역시 밤중에 내가 전화해서 방문했다고 하는 장의사가 처리해야 할 시신이 바로 나 자신이다. 장의사는 이미 죽은 나의 내의만 입은 시신을 발가벗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숙한 솜씨로 내 몸에 딱 맞는 수의로 갈아입힌 다음 관에 넣지도 않고 그냥 둘러매고 나가 나귀가 모는 마차에 싣고 미리 파 놓은 무덤에 던져넣은 후 흙을 덮어버린다는 이야기. 주인공 ‘나’는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죽어 있는 상태다. 세 번째 작품에서도 장애인이 등장한다. 이번엔 제목 자체가 <곱사등이>다. 화자이며 작가인 ‘나’와 단둘이서 신과 죽음에 대해 토의하다 저 까마득한 높이의 다리 위 난간에 서더니 자신을 밀어달라고 부탁하는 곱사등이의 등을 기꺼이 밀어 추락시키는 ‘나’.
  이어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작품이 이렇듯 다 어두운 죽음과 이미 죽음 비슷한 자리로 추락해버린 신, 장애, 유령상태 등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거나 애초에 상상하기를 거부하는 저 어두운 두려움 너머의 세계를 천착했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학교를 졸업해서 직업을 얻는다. 기억하는가,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무근로자 착취를. 퇴근은 아무리 빨라야 아홉 시고, 토요일 야근은 기본이며, ‘ㅇㅇ절’은 휴일 ‘ㅇㅇ날’은 근무일, 일요일 출근이 미덕이었던 시절. 나도 이런 블랙홀에 빠져 2010년이 지나서야 희망퇴직 대상자 신분이 되어 기어 나온다. 그러니 20년 넘어 책은 무슨 책. 내 독서에도 이렇게 큰 공백이 있다. 《검은 이야기 사슬》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춘식은 딱 나의 공백기, 1990년대의 소설적 지형을 “해가 저문 낯선 숲길을 걸으며 주위를 살피는 것 같은 불안감이 배어 있다.”고 묘사하면서 이들의 대표선수로 장정일, 배수아, 송정아, 백민석과 함께 정영문을 들며, 이들을 정의하기를 “굳이 집단을 버리고 탈주한 소수인, 정신병원을 탈주한 이들”이라 했다. 심지어 나는 대표선수 가운데 송정아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다. 뭐든지 흐름이 있는 즐길 거리에 일정기간 단절이 생기면 그건 치명적이다. 그리하여 정영문의 소설 가운데 몇몇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 같다.

 

 

  자화상

 

  내가 그린 나 자신의 자화상에서 나의 얼굴은 나의 발바닥에 눌려 일그러져 있다. 그 그림을 보며 나는 발에 좀더 힘을 싣는다. 그러자 그림 속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그때서야 나는 발에서 힘을 뺀다. (전문)

 

 

  이것이 한 편의 작품이다. 근데 이 책의 표지엔 “정영문 소설”이라 쓰여 있다. 그러니까 이것도 한 편의 소설이라 주장해 서른세 번째 소설로 목차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오, 소설에선 1990년대에 벌써 소설의 해체와 개별화, 파편화를 시작했다는 말일까? 근데 조금 의심이 들긴 한다. 예컨대.

 

 

  방안에서

 

  이 방의 사물들이 감히 내게 대들지 못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죽은 듯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기세에 눌려서라고, 나는 믿고 싶다. 하지만 점차 나는 그 믿음을 잃으며, 오히려, 내가 방안의 사물들의 눈치를 보고 있으며, 그것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

 

 

  이 서른아홉 번째 작품 같은 것은 내가 보기에는 전형적인 작가 메모로, 이런 메모들이 합종연횡을 거쳐 단편이나 장편으로 발전해가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 난 아마추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묻지 마시라.
  (사이)
  독후감 쓰는 중에 오랜만에 작은 아이가 오는 바람에 등심 구워 쐬주 마셨더니 지금 제정신 아니다. 후진 독후감 읽어주시는 분들의 이해를 앙망할 뿐.
  (다음 날 오후)
  다시 평론가 김춘식이 말한 90년대 한국소설. 이 가운데서도 정신병원을 탈출한 몇 명의 작가들의 경우, 당시 소설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절이라서 <방안에서>나 <자화상> 같은 단편斷片 또는, 단장斷章이 하나의 단편短篇소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두 단편 또는 단장은 소설책이 아니라 시집에 싣고 ‘시’라 주장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론 시나 소설 같은 장르의 구분이 별 의미는 없으나, 만일 시인 민영이 “외로울 땐 눈을 감는다.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이라 쓰고 그걸 소설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난 책을 읽는데 진보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작가 메모는 여전히 작가 메모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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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1-04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정아는 저도 처음 듣네요. 장정일, 배수아, 백민석은 20대 때는 좀 읽었는데, 배수아 정도 빼고는 이젠 손도 안 가네요. ㅎㅎ 그래서 정영문도 손이 안 가나 봅니다.

Falstaff 2021-11-04 10:34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거 읽자마자 검색해봤더니 시를 쓰더라고요. 시집 두 권이 나왔는데 읽을 마음은 생기지 않는 걸로.... 장정일도 시 썼지만 안 읽은 것처럼요. ㅎㅎㅎ
전 배수아 포함해서 이젠 정신병원 탈주자들은 좀 멀리 해야겠습니다. 백민석도 두 권 읽은 걸로 충분했어요.

stella.K 2021-11-04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걸 두고 소설의 해체라고 하는군요.
정말 메모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래서 유독 저 시대 때 소설가들 욕을 많이 먹었던 걸로 압니다.
하지만 뭐든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소설다워야 한다는 걸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팔님의 일상을 슬쩍 넣으셔서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1-11-04 19:4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기쁘네요. 근데 그 시절 사는 게 다 그랬어요. ㅠㅠ
이 책 읽고 소설의 해체라는 건 전적으로 제 생각으로 쓴 거예요. 다른 곳에서 혹시라도, 안 하시겠지만 정말 혹시라도 인용하시면 크게 창피하실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제 입이 싸서 고민이 큽니다. 흑흑흑....

coolcat329 2021-11-0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설의 해체...처음 듣는 말이고 저도 저게 어떻게 소설일 수가 있지? 싶습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는 찜해둔 책인데 작가 특유의 문자 유희를 기억해둬야겠네요.
오늘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1-11-04 20:30   좋아요 1 | URL
에이... 설마 처음 들으실라고요. ㅋㅋㅋ
하여튼 재미나게 읽으신 거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한 번은 읽을 필요가 있는 우리 작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

바람돌이 2021-11-05 0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90년대 제가 소설을 거의 읽지 않던 시기군요. 이름만 간간이 들은 사람들이네요. 폴스타프님 글을 보다 보니 제 취향과는 좀 떨어진 듯해서 저는 폴스타프님의 독서력과 글에만 감탄하고 갑니다. ^^

Falstaff 2021-11-05 08:30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처럼 책 좋아하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늘 다른 분들의 서평, 리뷰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님도 물론이고요! ^^

그레이스 2021-11-05 0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흔 다섯개... 기억은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작위의 세계 저도 갖고 있어요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11-05 08:33   좋아요 1 | URL
작품들이 그로테스크해서 이 책은 권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작위...>는 미국의 사막과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그로테스크하지는 않습니다. 아니면 좀 덜 그렇던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