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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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설터. 본명이 제임스 아널드 호로위츠. 이름만 가지고도 러시아에서 이민 온 가족의 일원이란 걸 알 수 있다. 제임스 호로위츠는 뉴욕 맨해튼에서 자라, 호레이스 만 학교를 졸업한 후, 스탠퍼드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저울질 하다 17세 1개월의 나이에 미국식 못말리는 애국심에 충일한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아버지가 졸업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가 2차 세계대전 중이라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2년에 전투기 비행사로 자원한 호로위츠는 미그기 몇 대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쌓기도 했는데, 이때 한국 땅에서 보고 들은 걸 바탕으로 장편소설 <사냥꾼: The Hunters>을 출간하기에 이르고 이때 필명으로 제임스 소금쟁이, 영어로 제임스 솔터Salter를 사용한다. 이후 솔터, 우리나라 발음으로 ‘설터’가 자신을 호칭하는데 더 익숙해지자 아예 호로위츠 집안의 호적을 파버리고 맨해튼 설터 씨의 시조가 돼버렸다. 그래 두 아내와의 사이에 얻은 다섯 자식들, 앨런, 니나, 클로드와 제임스(쌍둥이), 테오 모두 설터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왜 이름에 집착했느냐 하면, 작중 주인공의 이름이 블라디미르 벌랜드, 애칭으로 비리 벌랜드인데, 선대에 정확한 지명은 주인공도 모르지만 하여튼 러시아 남부지방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란 걸 몇 번이나 밝히기 때문이다. 비리처럼 러시아나 동부 유럽 출신으로, 비록 이민 3세인 비리는 구사하지 못하지만, 이디시 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흔히 아쉬케나지 유대인이라 한다. 이들에게는 다른 인종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가 음악을 연주하는 천부의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제패한 고리대금 기술이다. 물론 순서로 치자면 고리대금 기술로 충분한 현금과 금 등 주로 유동자산을 확보하여 여유가 생긴 후에 음악을 연주하고 즐겼을 것이다.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 비리 벌랜드의 아내 네드라가 주장하기를, 돈이 없는 유대인은 이빨 없는 개와 같단다. 여기서 돈 없는 유대인, 이빨 없는 개는 당연히 자기 남편 비리를 일컫는 말.
  비리 벌랜드의 직업은 건축가다. 영국의 전설적인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피터 애크로이드, <혹스무어> 참조)을 숭배하지만 세속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기엔 조금 모자란 수준. 그러니까 아내한테 돈 없는 유대인 취급을 받는다. 자신은 런던과 파리 등을 견학해보았지만 아내는 아직 미국 땅에서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 네드라 벌랜드는 소위 전업주부. 뉴욕 시외의 강변에 넓은 땅에 커다란 집을 짓고, 마구간과 작은 나무 숲, 정원을 가꾸며 산다. 말은 자신이 집안일을 모두 한다고 하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가사일을 하면서도 두 딸 프랑카와 다이앤을 티 하나 안 묻히고 키우며, 오전에 뉴욕으로 장보러 나가서 레스토랑에 들러 점심 먹고 돌아와 요리를 하고 초청한 커플(들)과 함께 조촐한 저녁 파티 또는 만찬을 하는 걸 규칙으로 할 정도라면 말은 안 해도 도우미가 있었으리라 보인다. 근데 미국 영화에서 흔하게 보는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벌랜드 여사님께서는, 이 여사님이 비록 시골 세일즈맨 홀아비의 외동따님이긴 하더라도, 스스로도 결혼을 잘 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기가 바랐던 결혼 또는 배우자는 입고, 먹고, 자는 것뿐만 아니라 기타 행위를 위해서도 구애받지 않게 해줄 정도로 부유한 삶을 보장해야 했던 것. 비리 벌랜드가 가난한 유대인이라는 건 단지 네드라 벌랜드의 눈에 그렇다는 것이지 당신이나 내가 생각하는 가난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걸 처음부터 머리에 콱 찍고 책을 읽기 바란다. 네드라가 바라던 포드가나 카네기가의 후손은 아닐지언정 부르주아 바로 아래의 중산층이란 것을.


  확실한 건, 돈 많은 사람들이나 근근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행복을 바란다는 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행복이다. 이들이 행위 하는 건 이미 숱하게 많은 TV 드라마, 막장 드라마 말고, 보통의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장면들인데, 그렇다고 책이 쉽게 읽히는 건 아니다. 둘째 딸 다이앤이 다섯 살에 <가벼운 나날>이 시작해 두 딸의 엄마가 될 때까지 시간이 후르륵 지나 속도감도 있는 작품인데도 그렇다.
  비리와 네드라는 두 딸을 키우며, 행복하게 지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부부가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침실에 놓인 두 개의 침대에서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되는 과정을 겪는다. 고인 저수지도 가끔 비워줘야 하는지라, 비리는 작은 아파트를 얻어 새로 고용한 아름다운 비서 카야 다우트로와 하고 한 날 낮거리를 벌인다. 그러다가 카야에게 새롭고 막강한 남자가 생기자 실연당해 크고 큰 슬픔에 젖는 비리. 네드라는 네드라대로 벌써부터 비리가 자주 집에 초대하고는 했던 친구 지반과 뼈와 살이 타는 휘청거리는 오후를 보내고, 지반 하나 가지고는 만족을 하지 못해 새롭게 하나를 더 장만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들의 외도는, 실제로는 그렇기가 참 힘든데 용하기도 하지, 끝까지 서로에게 들키지 않는 천생 연기자들 수준이다.
  비리는 네드라만 인정하지 않는 그럭저럭 성공한 건축가. 네드라는 유한 여성. 이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일까. 가정은 남들이 보기에 행복한 수준 이상이고, 둘 다 바람을 피우고 있을지언정 서로 사랑하는 마음까지는 변하지 않은 부부, 건전한 의식수준과 교양. 비리는 네드라의 오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드디어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 그렇게 숭배했던 17~18세기의 거장 크리스토퍼 렌이 지은 교회 건물을 감상하고, 박물관 구경을 하며 런던에 매료되어버린다. 이때 벌써 네드라의 나이가 마흔. 부부는 그동안 결혼 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하는 쪽으로 노력해왔으며, 행복의 형태 역시 결혼을 시작했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고 여행의 마지막 밤에 아내 네드라는 “오늘 나는 당신을 몹시 사랑해. 내 가슴을 다해서 당신을 포옹해.”라고, 남편 비리가 잠에 빠진 동안 새로운 남자 앙드레에게 편지를 쓴다. 네드라는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빠진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자유.


  십여 년 전에 “우리 이혼하면 행복할까?”란 카피가 유명했다. 네드라는 여전히 비리를 사랑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한 달 후에 이혼해버리고 유동자산의 절반을 지닌 채 집을 나간다. 물론 집을 비롯한 부동산도 소유의 절반은 네드라의 것이고, 두 딸이 비록 다 크긴 했으나 얼마 남지 않은 양육의 책임은 비리가 지기로 한 것 같다. 자세한 설명은 없더라도. 어쨌든 네드라는 지금도 비싸기로 악명이 높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인근의 아파트를 구하고 새롭게 연극에 관심을 둔다. 반면에 비리는 이혼의 충격으로 새롭게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스트레스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올 줄 모른다. 비리의 돈벌이에 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없어 독자들이 알 방법은 없지만 그것도 잘 해봤자 현상유지 아니겠나 싶을 정도의 의욕상실 상태다. 네드라는 연극에 관심을 가져 배워보려 했으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고, 개성있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때는 1970년대 초반. 네드라는 직업이 없는 이혼녀. 천성이 사치스러운 40대 초반. 내 눈엔 앞길이 캄캄하다. 유동자산이란 건 말마따나 일단 쓰고 뒤 돌아서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여태 살아온 수준이 있어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비싼 아파트를 얻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월세를 꼬박꼬박 물어가는 것도 힘들 텐데, 연극을 배워보겠다고 하고, 연애도 해야겠고, 연애 상대는 걸뱅이 비슷한 연극배우. 네드라도 참 딱하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책임도 져야 한다는 걸 오랜 세월을 두고 꼬박꼬박 잊은 듯. 그리하여 몇 년 후, 네드라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젊은 여자와 새살림을 시작한 비리에게 편지를 해 만 달러‘만’ 빌려달라고, 나중에 꼭 갚겠다고 얘기했다가, 어린 이탈리아 여인에게 거절을 당하고 말지. 나 같으면 굶어 죽더라도, 전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편지는 혀를 끊는 한이 있더라도 안 보내겠다.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가벼운 나날>은 이런 서사를 중심으로 읽으면 바람직하지 않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모습, 그 쓸쓸함을 좇아가는 작가의 시선을 보는 것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데 필요할 듯하다. 누구나 다 옳고 그른 삶을 산다. 한 사람이나 한 식구들의 사는 모습에 집중하는 것보다 가정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무수하고 무수한 가벼운 날들이 모여 만든 삶을 느껴보는 것이 백 번 좋다.
  작가의 시선이 내 수준엔 동감하기 힘든 상류 수준이라 유감이긴 하다. 네드라 눈엔 이빨 없는 개 같더라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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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1-10-18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첨 인사드립니다. 여러분들 페이퍼에서 소문 듣고 살짜기 서재구경하러 왔습니다. 친구 수락 감사합니다^^ 수년전 사놓기만 하고 못 읽은 설터 중 한 권이네요. Falstaff님 덕분에 읽은 느낌이에요ㅎㅎ; 예전에 직장동료들과 얘기하다가 부자의 기준이 너무 달라서 당황했던 기억 나네요. 제가 어떤 이에 대해 와 부자사람이었구나 감탄했다가 그게 뭐가 부자냐며 비웃음 당한-_-;;;;

Falstaff 2021-10-18 20:16   좋아요 1 | URL
아이고, 뭐 별 거 있나요. 그저 그냥 사는 얘기 위주로 할 뿐인데요.
반갑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마시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ㅋㅋㅋ
 
에쿠우스 범우희곡선 6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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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셰퍼는 1926년 5월, 영국 리버풀에서 앤소니의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다. 런던 세인트 폴스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3년간 광부 생활을 한 후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사학을 전공했다고 했으니 여유 있는 가정은 아니었겠다. 졸업 후에 쌍둥이 형제 안소니와 합작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단박에 저 소련의 스트루가츠키 형제를 떠올리는 대목이지만, 셰퍼 형제는 그들과 달리 합작 작업을 한 5년 만에 끝내고 각자 독립적으로 희곡과 소설을 쓰게 된다. 앤소니는 희곡 <탐정>을 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도 하지만, 피터가 <5중주>와 공전의 히트상품 <에쿠우스>를 발표해 훨씬 유명세를 탄다.
  <에쿠우스>는 1973년 여름에 영국 런던 올드빅에서 국립극단에 의하여 초연되고, 74년 10월에 뉴욕 폴리머드 극장에서 공연하기 시작해 77년 10월까지 1천2백 회 공연하는 기염을 토한다. 주인공인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은 앤소니 홉킨스가 맡았고, 이어서 리처드 버튼, 레너드 리모이, 앤소니 퍼킨스가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에도 1975년 9월 실험극단 전용 소극장에서 초연한 이후 1991년 5월 현재 1천8십 회를 공연했다고 한다. 내가 연극 <에쿠우스>를 본 것은 1980년인지 81년인지 그랬는데, 역시 안국동 실험극장 공연이었으며 당시 열일곱 소년 알런 역은 이미 고인이 된 강태기가 열연했다. 다른 배우들은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무섭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다.
  작품은 소아 정신과 의사가 말(horse)을 향해 병적이고 종교적인 매력에 빠진 열일곱 살 먹은 소년을 치료하는 내용이다.
  피터 셰퍼는 1970년경 차를 타고 영국의 시골을 달리다가, 서포크Suffolk 근방의 작은 마을에서 열일곱 살 소년이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친구에게 약 1분 동안 듣는다. 이게 전부다. 셰퍼는 이 사실만 가지고 두 해 반에 걸쳐 희곡 <에쿠우스> 작업을 한다. 따라서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사건 이외의 것은 전부 창작이다.

 

  작품을 번역한 신정옥 선생은, 이미 셰익스피어 독후감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특히 드라마 번역에 권위가 있는 영문학자다. 내가 지금 어떻게 <에쿠우스>의 독후감을 써야 할지 고민하면서, 도무지 풀리지 않아 선생의 해설을 뒤적이다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단 한 문장으로 두 명의 주인공, 청소년 신경정신과 전문의 다이사트 씨와, 환자 알런 스트랑의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해놓았다.

 

  “알런에게서 슬픈 반역과 이단과 원초에의 정열을 찾아볼 수 있다면, 다이사트에게서는 회의와 권태와 무력감과 자기 연민의 소리를 읽을 수 있다.”

 

  인용하고 보니, 이것이 작품의 주제다. 한 젊은이의 반역과 이단, 원초적 정열과, 중년의 권태와 무력감과 자기 연민의 충돌.
  권위적인 가정과 부모 슬하에서 평범하게 지내던 알런. 지금도 여전히 소년이지만 5년 전 썰물의 해변에서 말을 타고 알런 곁을 지나치던 선량한 청년이 말을 타보고 싶어하는 알런을 눈치채고 말 등에 태워준 적이 있었다. 말의 목줄기에서 흐른 땀이 알런의 허벅지를 적시면서 따스한 말의 체온과 근육의 움직임을 다리로 느끼는 동시에 말의 훈김에 따라 후각을 자극하는 말 냄새. 재갈을 물린 입. 크게 뜨고 응시하는 눈. 알런은 단박에 말, 에쿠우스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빠른 속도로 구보하는 말 위에 탄 외아들을 본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 씨는 당장 기수 청년에게 항의하고, 알런을 내릴 수 있게 거칠게 잡아당겨 기어이 말에서 떨어뜨리고야 만다.
  이후 알런은 특히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에 일부러 아들의 뜻을 꺾으려 드는 아비가 몇 명이나 될까. 인쇄업자 스트랑 씨는 나름대로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바보상자, TV 수상기를 없애고 책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인쇄업자의 아들이 책을 읽지 않는 점이 마땅하지 않은 것. 나도 아버지란 거 좀 해봤는데, 아쉽다. 애초에 자식한테 이기길 포기한 내가 똑똑한 거 같다. 아니나 달라, 알런은 옆집에 가서 TV를 계속 본다.
  이런 식이다. 알런은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방과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곳에서 다섯 살 많은 질이란 아가씨와 친해진다. 원래 성실한 성격의 알런은 질이 마굿간에서 일하는 걸 알고는 주말에 자신도 그곳에서 일할 수 있게 말해달라고 부탁해, 비록 배설물 치우는 일에 불과하지만 마굿간 일을 얻는다. 오년 전 썰물의 바닷가에서 경험한 말의 매혹을 잊지 못했던 것. 알런은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마굿간 주인 해리 달턴 씨의 마음에도 들어, 한밤이 되면 몇 주에 한 번씩 알런이 몰래 말을 끌고 나가 실컷 달리다 온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할 정도가 된다. 그러나 항상 최고의 순간에 사건이 생기는 법.
  질이 알런을 꼬드긴다. 시내에 나가 성인 영화를 보자고.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간 알런. 스웨덴에서 만든 성인 영화에서는 어린 여자아이가 토플리스 차림이 되고, 점점 기분이 묘해지는 찰나에 이르러 알런의 뒤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 프랑크 스트랑 씨와 눈이 마주친다. 당장 알런의 이름을 부르며 기어이 아들과 여자친구 질을 영화관 밖으로 끌어낸 스트랑 씨. 질이 먼저 자기가 졸라 저질 영화관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고, 스트랑 씨는 포스터 제작 등의 사업상 일로 영화관 주인을 만나러 갔다가 관객석에 없는지 찾아보러 들어간 것이라 변명한다. 알런은 처음엔 속으로 아버지가 더러운 놈, 늙은 사기꾼 일벌레라고 욕을 하다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아버지 역시 볼품없는 생식기를 달고 다니는 평범한 남자인 것을.
  질은 바로 이날 밤, 알런과의 섹스를 위해 장소를 모색하다가 여섯 마리의 말밖에 없는 마굿간을 떠올리고, 알런과 함께 안으로 든다. 질은 전혀 상관하지 않지만, 알런은 말들이 자신과 질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건초를 모은 창고 안으로 갔고, 그것도 모자라 질더러 문까지 꼭 닫으라 주문한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이제 본격적인 행위로 들어가는데,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여러분도 다 아시지 않는가. 알런이 말 여섯 마리의 눈을 모두 찔러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주제 가운데 하나가 젊은이의 슬픈 반역과 이단과 원초에의 정열이라고. 이 정도면 됐다. 명작 가운데 한 편이니 직접 읽어보시기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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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5 10: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에쿠우스! 전 아쉽게도 강태기가 하는 에쿠우스를 못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강태기 때문에 유명해진 연극은 아닐까 싶습니다. 전 그때 넘 어려서 실험극장이 어딨는지 몰랐다능ᆢㅋㅋ

Falstaff 2021-10-15 11:05   좋아요 3 | URL
그때 먼저 책을 읽고 극장엘 갔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ㅎㅎ 너무 먼 시절이네요. 그립지만 다시 가고 싶지는 않은. ㅋㅋㅋㅋ

청아 2021-10-15 1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여기서 끊으시다니ㅠㅠ 그러나 저에겐 <에쿠우스>가 있습니다ㅎㅎ🤭 반역과 연민의 만남이라..극과 극이네요!

Falstaff 2021-10-15 11:31   좋아요 1 | URL
ㅋㅋㅋ 독후감 올리려고 들어갔더니 미미 님 뒷모습이 보이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얼른 읽으셔요. 재미납니다. ^^

잠자냥 2021-10-15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같은 책인데, 지만지는 가격이.... 16,800원! 후덜덜.......

Falstaff 2021-10-15 12:14   좋아요 1 | URL
아이고... 지만지 거 참. 좀 너무해요. 하긴 지들 마음이니까 뭐라 할 얘기는 없지만서도. ㅋㅋ

coolcat329 2021-10-15 14: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 제가 태어나 처음 본 연극입니다. 공짜표가 있다고 누가 꼬셔서 갔죠 ㅋ
그때 기억나는건 말들이 일렬로 서 있고 정동환 배우가 의사 역을 했었어요. 정동환 배우의 고뇌에 찬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심각한 내용에 즐기지는 못했던거 같습니다. 책 꼭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1-10-15 15:05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정동환이면 다이사트 의사 역으로 대빵이었을 거 같습니다.
그 양반이 배우 가운데서도 발음 정확하기로 유명하잖아요. 냉정하게 대사 치는 거 하고요. 그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조시마 장로 역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셔요. 제가 희곡은 여간해서 추천하지 않잖아요. 근데 이건 예외입니다. 더구나 예전에 극을 보셨다면 꼭, 꼭 읽어보셔요. ㅎㅎㅎ

coolcat329 2021-10-15 15:25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그 분 발성과 발음이 굉장히 까랑까랑 정확해서 그거에 홀려서 본 기억이 지금도 나네요. 책 꼭! 보겠습니다.
 
소녀와 여자들의 삶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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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캐나다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앨리스 먼로, 사실 나는 이이와 합이 별로 좋지 않아 처음 《디어 라이프》를 읽고 나서 ‘그냥 그런, 흔한 작가’ 정도로 취급을 했고, 두 번째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정말 별로였는데, 세 번째 《거지 소녀》에 읽은 다음에야 그럴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읽은 <소녀와 여자들의 삶>이 그러니까 네 번째 먼로인데, 이 책이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또한 내게는 마지막 먼로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작품이 읽는 사람 나름대로 다 적절한 감상이 있을 것이다. 독자가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점은 모두 개별적이라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비겁하게 이렇게 실드를 쳐놓고 독후감을 시작하려 한다. 그만큼 앨리스 먼로의 애독자층이 두텁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출판사와, 평론가와, 책가게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여덟 부part로 나누어져 있고, 이 순서는 주인공 델 조던 양의 소년기부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를 떠날 때까지다. 자연스럽게 성장소설로 구분할 수 있다. 잘 쓴 성장소설은 거의 모두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독자가 믿는다. 정말 자기 이야기인지 단순히 허구 이야기거나, 이웃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각색한 건지는 오직 작가만이 아는 영역이다. 여기까지는 동의하는데, 여덟 부part가 마치 개별적인 단편소설로 읽힌다. 그 정도로 독립적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연작 장편이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옳겠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각 부가 너무 독립적이고 완성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완벽한(솔직히 얘기하자면 단편소설의 ‘거의 완벽함’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지만) 단편의 형태를 지닌다는 것. 앞쪽의 파트(에피소드)를 읽고 불과 몇 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른 에피소드)를 주인공인 델 조던 양과 같은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 다르지 않은 배경을 지닌 같은 시각을 연이어 경험하는 것이 독자에게는 무지하게 지겨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조던 양이 더 성장해서 사춘기를 맞고, 연애 비슷한 이성교제를 하고, 가벼운 페팅도 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 지겨움이 많이 사라지지만 작품의 초, 중기까지는 읽다가, 내가 이러다가 미치고 말지? 하는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내 독법이 비루하여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 읽어볼 생각까지 했을까.

 

  앨리스 먼로가 1931년생이다. 13학년, 우리식대로 하면 고3 졸업시험을 앞두고서야 개신교 연합 부흥회에서 처음으로 흑인을 보았을 정도로 격리된 시골의 작은 마을과 도시. 그러니까 1940년대의 캐나다 시골을 무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있었던 것들을 별다른 의식 없이 그대로 묘사하기만 해도, 전쟁 중 도는 전후의 남성, 권위적 사회상이 그대로 노출될 수 있다. 전쟁이란 빠짐없이 여성의 수탈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 당시에 10대를 지낸 먼로 역시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묘사함으로써 여성이 어떻게 차별과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먼로가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건 아니지만 일단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는 있다.
  재미있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나처럼 한 번 책을 잡으면, 책을 끝날 때까지 오직 읽고 있는 작품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의 독자에게 권하지는 않겠다. 한 파트를 읽고 며칠 있다가 다음 한 파트, 한 주일쯤 있다가 또 한 파트, 이렇게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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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4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건 저를 위한 책이군요.
전 책 읽다 딴짓 많이하거든요.ㅎ
노벨문학상 저와는 별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관심 없었는데
작년인가? 티저북 읽은 적이 있는데 의외로 괜찮아서 뭐래~했습니다.
폴스타프님은 참 성실한 독자십니다.^^

Falstaff 2021-10-14 12:35   좋아요 2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어찌 됐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죠, 노벨상보다 부커나 공쿠르 받은 책들이 더 좋아요. 물론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요.
흠... 만일 제가 성실하다면 좀 일찌감치 성실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럼 이모양으로 살 거 같지 않은데요. ㅋㅋㅋㅋ 물론 지금 후회하며 사는 건 아닙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것입지요.
 
오스카와 루신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7
피터 케리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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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살던 박물학자 고조 할아버지의 이교도 아들이자 성공회 신부 오스카의 좌충우돌. 무대는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 남태평양 호주의 시드니와 저 벽촌지역까지 펼쳐진다. 곳곳에 도사린 흥미유발의 뇌관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읽는 재미가 별로 없다. 원작은 안 그럴 거 같은데, 이게 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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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0-13 14: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놀라워라, 재밌을 거 같아서 기대 중인데, 별 셋에 재미없다니... 이게 웬일!

Falstaff 2021-10-13 15:10   좋아요 4 | URL
지금 720쪽까지 읽고 바야흐로 클라이맥스를 향하려는 중입니다. 뭐 아직도 밍밍하지만요. 이게 부커상 수상작이고, 비록 <한밤의 아이들>에게 양보했지만 역대 최고의 부커상 후보 가운데 하나였다고 하네요.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 워낙 쉬지 않고 읽어서 눈이 피로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클라이막스, 깔딱고개 남았으니 깔딱고개 넘어봐야지요.

유부만두 2021-10-13 15:13   좋아요 6 | URL
애써주십시요, 독서의 선발대, 알라딘의 기미상궁, 아니 기미대감 팔스타프님!

Falstaff 2021-10-13 15:15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천만 다행입니다. 기미내관, 기미내시.... 아니어서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0-13 16:21   좋아요 4 | URL
네 이놈, 폴스타프! 기미내시 녀석이 어느 안전이라고 시방 기미대감 노릇을 하려 드느냐? 어서 썩 물러가서 읽지 못할까?

Falstaff 2021-10-13 16:30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 세월이 변해서 말입죠, 기미내시나 잠자냥 님이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그거 없는 건 마찬가진데 이리 차별하시면 곤란합지요. 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10-13 15: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 문장은 너무 점잖은 건가요?

Falstaff 2021-10-13 15:11   좋아요 3 | URL
ㅎㅎㅎ 아무래도 그런 것도 있겠지요. 영어가 짧아 원서는 읽지 못하겠고 참...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요.
 
수상한 자 - 연인번역희곡총서 1
브라니슬라브 누쉬치 지음, 김상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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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브라니슬라브 누쉬치는 극작가, 풍자작가, 소설가, 수필가, 그리고 현대 세르비아어의 수사학자 등, 하여튼 펜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트를 향해 펜을 던지는 일 빼놓고 뭐든지 잘 해서, 세르비아의 고골로 불린다고 한다. 누쉬치는 1887년에 이 작품 <수상한 자>를 완성했지만 세르비아 왕조의 부패와 무능한 공무원들을 사정없이 풍자하는 내용이라 실제로 공연을 하기까지는 35년이란 세월이 더 필요했다.
  웃기는 건, 이 사이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의 화마가 1915년 드디어 세르비아에까지 튀어, 누쉬치는 자신의 원고 가운데 아끼는 작품들을 친한 이에게 맡겨두고, <수상한 자>는 월세 살던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그냥 ‘버리고’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맡겨둔 작품들은 가택수색의 와중에 몽땅 불태워지고, 팽개쳐버린 <수상한 자>만 알바니아 사람의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것.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나온 시리즈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 안에는 그래도 다행히 읽어본 작품도 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루이 14세 시절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빗대 소비에트 정부를 풍자했다는 <위선자들의 밀교>. 이 작품을 비롯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흔쾌하게 선택할 예정인 게오르크 카이저가 쓴 <메두사의 뗏목>, 류보미르 씨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이 들어있어 기대를 품게 만든다.

 

  연인번역희곡총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나온 <수상한 자>는 전형적인 희극이다. 연출에 따라 얼마든지 슬랩스틱 코미디로도 만들 수 있고, 스탠딩 코미디로도 가능할 것 같다. 읽어보면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나라 방송 희극 대본가나 연출가 가운데 이 작품을 슬쩍 차용한 적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야 우리나라가 콘텐츠 선진국이지 20세기 후반만 해도 소위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그까짓 지적재산권 따위는 개나 줘라, 하고 노골적으로 일본의 유사 방송을 베껴오기 일쑤였으니, 당시만 해도 거의 금단의 영역이었던 공산주의 동유럽 극작가가 쓴 작품의 일부를 가져와 변주를 거쳐 선보이는 정도는 양심의 가책 따위조차 느끼지 않았을 듯하다.
  * 말이 나와 하는 얘긴데, 예능 프로그램은 무슨 “예능”이냐. 그냥 오락 방송,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될 것을 ‘오락’이란 말을 쓰기 어째 어감이 좋지 않은 듯하니 예능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언어 인플레이션이 보통 아니다. 난 이런 게 별로 좋지 않다.

 

  19세기 말의 세르비아에 ‘예로띠예 빤띠치’라는 이름의 우체국장이 살았다. 이이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취미를 가졌으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심심하기만 하면 우체국에 쇄도하는 편지를 개봉해 읽어보는 것. 원래 다른 사람들 훔쳐보는 게 재미나는 일이라 한 번 맛을 들인 예로띠예는 점점 간이 커져 편지의 발신, 수신인을 가리지 않게 되고, 그게 사달이 나 드디어 징계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라. 명색이 주인공, 아직 연극은 막도 올라가지 않았다. 이후 옛 말로 ‘사바사바’에 관해 훌륭한 재질을 타고 나서, 이번엔 엉뚱하게도 경찰서장의 자리에 오른다. 덩치만 무지하게 크지 겁이 엄청나게 많아 자신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해놓고 제일 먼저 자신의 안위부터 따진 다음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며, 병력의 배치나 작전 수행, 범인 취조 등 하여튼 뇌 세포의 활발한 운동을 전제로 하는 어떤 일도 자신의 전문적인 부하들의 입을 빌리려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들어 낙하산 타고 떨어진 인간들의 공통점이기도 해서, 우리나라 공기업에도 이런 인간들 숱하게 깔려있으니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터이다.
  예로띠예는 아내 안자와의 사이에 외동딸 마리짜를 두었는데, 도무지 딸에 대한 애정이 없는지 마리짜가 열아홉 살 때까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가, 열아홉부터 스물하나 까지는 부모더러 결혼 상대를 찾아달라고 요구했지만 어떻게 된 엄마, 아빠인지 상대를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제 부모에게 자신이 직접 남편감을 찾아내겠다고 머리 조아리며 말씀드리고, 약국의 약사 보조를 하고 있는, 참, 민망해서 이거, 유럽 사람들 이름이 이상하긴 한 걸 감안해 들으시면, ‘조까’라는 이름의 청년을 찾아낸 거였다.
  그런데 예로띠예 씨도 참. 이 경찰서장이, 그동안 뭐했는지 여태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경찰서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비차’한테 꽂혀서 딸을 주기로 결심을 한 거였다. 왜냐하면, 비차가 인물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교양까지 없지만 특별하고도 탁월한 능력이 하나 있으니 이 군郡 지역의 상인, 농민, 시민들의 뒤통수를 후려쳐 현금을 알겨내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나이 서른 조금 넘어 벌써 직장은 취미생활로 다니고 있는 중일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뭐. 요즘 같으면 뭐라 그러더라, 파이어 족? 근데 문제는, 마리짜가 비차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하는 터, 이게 희극에서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이지.
  마리짜가 뇌를 짜 일단 조까를 자기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유럽 호텔에 방을 잡게 했다. 때는 19세기 말이라 마리짜가 호텔에서 조까를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이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동네 전체에 소문이 나 결혼하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
  그러나 생각한대로 다 되면 연극이 아니지. 때를 맞춰 중앙정부에서 일급비밀의 암호 전보가 와, 이 지역에 혁명적이고 반정부적인 수상한 자가 침투했으니 즉각 잡아 대령하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정부도 이 수상한 자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젊은이라는 것만 확실하단다. 그럼 독자들은 순식간에 눈치 챌 수 있는 것. 마침 유럽 호텔에 묵고 있으면서 마리짜의 지시대로 방 밖으로 전혀 나오지 않는 조까가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 체포당할 것임을. 그리고 진짜로 독자의 짐작대로 일이 벌어진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수상한 자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있는 터. 원래 혁명분자들은 몸 안에 자폭 장치를 달고 다니는 법이라서 초동 취조는 서기관들에게 맡기고 잠시 출타를 한 겁쟁이 예로띠예 서장이 시간이 지나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자 드디어 경찰서 내부로 들어와 시민 가운데 뽑힌 증인 두 명과 모든 서기관, 서기 보조 들이 보고 있는 가장 큰 사무실에서 앞으로 자기 사위가 될 청년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이름이 뭔가?
  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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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2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름 탈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0-12 09: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너무 재미있겠는데요. 조까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12 10:12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거 20세기 초 희극이잖아요. 악당들은 다 물 먹고 사랑은 언제나 맺어지지 않겠습니까. ㅋㅋㅋㅋㅋ

- 2021-10-12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뭔가?
조까.
탈락!!!

Falstaff 2021-10-12 10:13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죠. 어감이
경찰서장 예로띠예 씨가 유대인이 아니어서 더 확실하게 탈락이었을 겁니다. ㅋㅋ

- 2021-10-12 16:03   좋아요 2 | URL
요즘 퐐스타프님 중간에서 끊기 실력이 아주 물이 오르셨어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12 16:09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걸 제가 좋아해서 나날이 연구 발전시키는 중입니다!!!

stella.K 2021-10-12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바사바. 친근합니다. ㅎ 글 제목도 좋고.이거 사바사바아닙니다.ㅋㅋ

Falstaff 2021-10-12 11:10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알라딘에서 사바사바 할 일이 있나요 뭐. ㅋㅋㅋㅋ

scott 2021-10-12 1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반전 ㅋ zocca 인것 같습니다 세르비아 에서 흔한 이름인뎅 ㅎ ㅎ

Falstaff 2021-10-12 13:12   좋아요 4 | URL
아, 세르비아엔 조 서방이 많군요! 오호~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