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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1862년 뉴욕 부르주아 가정의 2남 1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나 한평생 호화롭게 살다 간 이디스 워튼. 그래서 이이의 작품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은 작가와 비슷한 계층의 부르주아 미국인들의 속물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 디킨스 씨와 트웨인 씨의 작품엔 신사들이 등장하지 않아 흥미를 끌지 못하더군요. ─ 난 그게 지극히 마음에 들지 않아 이후 워튼 읽기를 머뭇거리게 된다. 더 이상 워튼의 라이브러리를 추가하지 않고 몇 년을 지내다가 <이선 프롬>을 읽는데, 도시 부르주아 계급의 시각에 고정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워튼이 소외와 고립과 파괴와 불모(불임)의 가상의 산골지역 스탁필드로 옮아온 것부터가 의외였으며 숲과 눈 속에서 스산한 희생의 삶을 묘사한 것도 신선했다. 그렇게 해서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그만 읽겠다는 봉인이 풀어진다. 하지만 처음 읽었을 때는 상쾌한 전환이었던 <이선 프롬>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품 속에 신파가 과하게 포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해 또다시 선뜻 워튼 읽기를 망설였다. 딱 이럴 때, 다시 워튼의 책 <여름>을 샀다.
<여름>의 무대는 뉴잉글랜드 매사추세츠주로 짐작할 수 있는 가상의 산악지역 노스도머다. 노스도머는 이글 군郡 정도의 행정구역에 소속되고 산악지역 이글리지와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글리지를 영어로 쓰면 Eagle Ridge, 산마루 정도로 번역을 하지만, <입석부근>의 주인공이라면, 리지Ridge를 저 설악의 공룡능선이나 용아능선 같은 날카롭게 솟은 바위 능선을 일컬어, 독수리 능선, 이글리지라고 하면 일종의 단절된 벽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노스도머에서 그나마 가까운 도시가, 주인공 채리티의 눈에는 엄청 큰 도시지만 사실 소도시에 불과한 네틀턴이며, 네틀턴보다 더 큰 도시로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하는 스프링필드가 있다.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빼지 않고 작은따옴표를 써서 표현하는 ‘산’ 지역이 있다. ‘산’은 이글리지 아래 자리한 곳으로 무법자들이 사는 일종의 향, 소, 부곡 같은 곳이다. 물론 주민들을 불가촉천민이라 규정하지는 않지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산골 노스도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한 극빈의 삶을 살고 있으며, 여차해서는 ‘산’에서 외부로 나가는 사람도 없고, ‘산’ 속의 누군가가 죽어 장례를 위해 이륜마차를 타고 올라가는 마일스 목사 이외에는 누구도 접촉하기 꺼리는 곳이다.
십이삼 년 전, ‘산’의 한 명이 범죄를 저질러 오랜 세월 감옥에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이때 죄수는 자기의 상대편 변호사, 그러니까 피해자 측인 로열 씨에게 특별한 부탁을 한다. ‘산’에 부양능력 없는 여인이 낳은 자기 딸이 있는데 아이를 데려다 키워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슬하에 자녀가 없어 부탁을 승낙한 로열 씨는 며칠 후 말을 타고 ‘산’에 올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내려와 이름을 관용, 채리티라고 짓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 채리티 로열이라 했다. 단 정식 입양을 하지 않아 로열 씨는 채리티의 후견인일 뿐이지 양부가 아니다. 애초부터 그러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로열 부인은 세상을 뜨고 만다.
채리티는 동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해처드 부인이 운영하는 “오노리어스 해처드 기념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는데, 스스로 ‘산’에서 데려온 아이라는 것, ‘산’은 더러운 곳이며 거기서 태어난 것만 해도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통념을 잘 알고 있다. 열여덟 살이 된 채리티 양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맞아 만개하기에 이르렀고, 누가 봐도 매력적인 아가씨였으며, 스스로 좁고 작은 노스도머에서 답답증을 어렵게 이겨가고 있던 차였다. 이러던 어느 날, 해처드 여사의 집에 여사님의 사촌 동생이자 젊고 매력적인 건축가로 미국의 옛 건축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루시어스 하니가 도착해 두 뜨거운 가슴에 불이 붙고 만다.
이건 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일 년 전인 열일곱 살 때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로열 변호사께서 채리티의 방에 들어오려다가 실패하고 방문 앞에서 약간 거친 언사로 채리티에게 청혼하는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 사이엔 적어도 스무 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채리티가 보기엔 바보 같은 꼰대가 말도 안 되는 일을 말도 안 되게 지껄였을 뿐이다. 채리티 입장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로열 씨 입장에서도 여태 기다리고 기다렸을지 모른다, 채리티가 열여덟 살의 성인이 되기를 앞둔 시기를 여태 기다렸을지 누가 알겠나. 다만 채리티의 감정을 감안하지 않았을 뿐. 하여간 이날 로열 씨의 무례한 청혼 사건 이후에 채리티는 집에서 대단한 권력을 움켜잡게 된다.
그러는 한편, ‘산’ 사람들과도 약간의 안면이 있는 채리티가 루시어스 하니의 옛집 관찰 일을 도울 사람으로 둘이 함께 온갖 지역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애정을 쌓는다. 그러면 독자는 작품의 스토리를 눈치 채실 수 있을 듯하다. 채리티-루시어스-로열. 선하고 젊은 남녀와 늙고 약한 악당? 그건 직접 읽어보시라.
내가 주목하는 건, 채리티의 심성이다.
이디스 워튼은 처음부터 끝까지 채리티의 관점에서 작품을 써갔기 때문에 독자들도 당연히 채리티 입장에서 읽는다. 그것을 조금 바꿔보자.
채리티는 다섯 살 때 로열 씨를 따라 ‘산’에서 내려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문명인’이 사는 곳에 편입된다. 로열 씨는 채리티를 키우다가 나이가 차 해처드 여사의 권유로 네틀턴의 기숙학교에 입학시키려다 자신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막판에 포기하는데, 이는 채리티 역시 로열 씨가 너무 외로울까 싶어 도시로 떠나기를 망설이기 때문이었다.
채리티가 열일곱 살이 되면서 도서관의 사서였던 위도라가 폐렴으로 죽어, 해처드 여사에게 돈을 벌고 싶다고, 마을을 떠날 수 있을 만큼, 또는, 로열 씨의 청혼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면 집에 자기하고 같이 지낼 여자를 한 명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고 싶다고 호소하여 월 8달러의 높은 임금으로 주 2회 두 시간씩 고용계약을 맺는다.
집안에서 채리티와 로열 씨의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여기에 루시어스가 등장하니 둘의 사이엔 더욱 짙은 의심과 질투 같은 갈등이 깊어간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 년 전에 청혼을 받아 거절한 일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로열 씨에 의한 성폭행 미수로 단정한 채리티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겁날 것 같은 환경에서 벗어날 특별한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 열여덟 살의 성인이 되었고, 월수입이 있으면 이제 후견인의 보호망 밖으로 ‘스스로’ 나갈 계획을 해야 하건만, "피후견인"일 뿐인 채리티는 하는 일마다 불평불만이고, 로열 씨 하는 일 모두가 재수 없다고 여기기만 할 뿐이다. 그동안 번 돈은 루시어스에게 창피하지 않을 옷차림을 준비하는 데 모두 쓰고 만다.
십삼 년을 키우고 후원해준 로열 씨. “그가 잘못을 범했던 단 한 번(청혼 사건)을 제외하고 채리티에게 그는 다만 노스도머처럼 피할 수 없지만 흥미롭지 않은 혹독한 현실이거나, 운명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여러 조건들 중 하나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이디스 워튼이 규정한 채리티의 진짜 모습이다.
‘산’ 사람 리프 하이엇이란 사람이 있다. 사고는 치지 않지만 채리티를 포함해 노스도머 사람 누구도 가까이 않는다. 그러나 채리티가 루시어스와 함께 ‘산’ 부근의 집터를 둘러볼 생각을 하자, 여태 한 마디도 해보지 않았던 리프 하이엇과 말을 튼다. 나중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좋은 관계를 미리 만들어두고, 아니면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인간. 채리티는 아쉽게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인간들, 사회생활 하면서 숱하게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는 루시어스와 채리티 사이에서 벌어진 연애의 결과를 놓고 활발한 논의를 하고 싶을 듯하다. 그러나 공개 독후감에서 노출하면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어 차마 꺼내지 않았다. 그저 채리티가 테스하고는 다르다는 것 정도만 귀띔한다. 양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