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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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아송>,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레닌의 키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옌롄커.
  1958년 8월에 중국 허난성 뤄양시 쑹현현(현 정부는 청관진 소재)에서 태어난 옌롄커(閻連科). 내가 알 수 있는 옌 씨의 출생지는 쑹현 현까지다. 쑹현 현에 속한 마을이거나 현의 수도인 청관진(鎭)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자세하게 중국의 행정구역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이 작품 <사서>는 중국에서 천지개벽,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전 중국 각지에서 먹물이 들었거나, 중산계급 이상이거나, 동네 이장에게 미운털이 박혔거나 하는 인물들을 몽땅 색출해 ‘하방’이란 이름으로 시골지역으로 이주시키고, 이들에게 “노동을 통한 재탄생”의 기회를 주었을 당시를 시간적 공간으로 한다.
  장소는, 중원 땅 황허 남쪽 본류에서 백여 리 떨어진 광활한 모래사장으로 명나라 시대부터 대표적인 유배지였으나 수백 년 동안 유배 온 죄수들의 제방공사와 토지 비옥화 작업으로 땅이 ‘땅의 꼴’을 잡자마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이젠 유기수들이 노동교화로 곡식과 면화를 심는 대농장으로 이름을 위신구(育新區)라고 하는데, 이 안에 모두 99개의 구(區)가 있으며, 총 구성원 127명 가운데 95퍼센트를 중국의 최상급 지식인들로 모아놓은 마지막 제 99구를 만들었다. 작가 옌 씨는 이 제 99구를 책임지고 인솔하는 인물을 ‘아이’, 말 그대로 코밑에 솜털만 난 10대 초중반 남자 아이로 설정했다.
  이 문제적 아이, ‘아이’는 당연히 본명이 있지만 책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 아이는 공화국 설립 전에 한 여자아이가 일본인의 심문에도 정보를 말하지 않았다가 일본인에 의하여 작두로 목이 잘렸으나, 공화국 설립 후에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99구가 수확 목표량, 달성 수준에 사활을 걸어 터무니없는 목표설정과 달성 재촉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작두를 앞에다 내놓고 작두날 안에 자기 목을 집어넣고는, 어서 내 목을 잘라라, 아니면 달성목표에 동의하라, 이런 식으로 99구를 끌어간다.
  하여튼 아이가 이끄는 99구는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량과 밀 농업 이후 강철제련 목표에서 훌륭한 달성률을 보여 자신의 상부인 진, 현, 시, 성의 칭찬과 시상을 성취하고, 이어서 베이징에 상부의 상부의 상부, 즉 마오로부터도 근사한 상을 받아내 본인이 영웅으로 불리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야망은 혼자만 가지고 있나. 아이의 99구는 현에서 가장 특별한 성취를 올리기는 했으나 현장은 99구의 결과에 2등 상을 수여함으로써 아이의 베이징 행을 막아버리고 다른 당근의 제시하여 또 직사하게 일만 하도록 만든다.
  아이의 꿈. 진-현-시(책에서는 지구地區)-성-수도로 이어지는 영달의 로얄 로드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기 때문에 저 앞에서 행정구역 소개를 상세하게 했다.
  하여튼 이 왕도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수학, 화학, 물리, 생물 등의 올림피아드를 중국이 싹쓸이 하는 이유도 이 왕도를 또박또박 걷는 학생들만 선발하기 때문이다. 올림피아드 출전 대상자 서너 명을 뽑기 위해 전국 23개 성, 5개 자치구, 4개의 직할시에서 과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딱 한 명만 선발해 모두 32명의 학생이 최종 시험을 치룬다고 한다. 중국 인구가 14억 명이다. 말이 14억이지, 우주공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 땅에 사시는 모든 중국인들의 분변 슬러지를 드럼통에 담아 그걸 한 줄로 세울 경우 304일 만에 달에 도달해, 인류는 오직 중국인이 싸질러 놓은 똥오줌 슬러지만 부여안고 달까지 기어 올라갈 수 있다는 걸 감안해보시라. 그렇게 촌-진-현-시-성-수도의 왕도는 멀고도 먼 고난의 길이다.

 

  제일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겨우 네 작품을 읽고 옌롄커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사서 四書>는 제목만 딱 보면 『시경』과 매우 관련이 있는 <풍·아·송 風·雅·頌>과 유사할 거 같지만 내용은 <레닌의 키스>에 가깝다. <레닌…>에서 레닌의 시신을 망해버린 소비에트에서 구입해 와 현을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키우겠다는 허황된 야망에 찬 현장 류잉췌의 도전기가, <사서>에서는 아이가 현장의 귀띔을 받아 맹목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것과 유사하고, 실제로 중국의 현대사에 있었던 1950년대 대기근으로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던 비극도 <레닌…>에 이어 다시 재현된다. 하방 지식인이 등장하는 작품도 낯설지 않다. 천쯔두와 주샤오핑의 공동작품인 <뽕나무벌 이야기>를 비롯한 드라마, 소설 등을 이미 읽었다.
  아직까지도 공산주의 체제가 과시해온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한 명의 지배자가 불쑥 나타나 무진장 오랫동안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독재체제를 마음대로 펼치는 정치구조를 자랑하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역사상 모든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그랬듯, 프롤레타리아의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 그런데 여태 내가 읽은 옌 선생의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지식인들의 타락과 도시빈민을 넘는 도시천민과 시골 극빈자들의 험한 광경을 날것으로 보여주기에 머뭇거림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가뜩이나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는 출판업계가 흔쾌하게 옌렌커의 작품을 찍어줄 턱이 없어서, 옌렌커는 자신의 현실 풍자적인 작품에 대하여 수시로 자기 검열을 한단다. 오직 하나, 진짜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최고 지식인들의 하방, 농업이란 육체노동을 통한 의식 개조 또는 재탄생, 40년대 후반의 강철제련운동, 대기근 등을 거치며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유물론>의 번역본을 낸 학자마저 풀씨를 먹는 참새의 똥을 삼키는 장면 역시 옌렌커의 자기검열을 통한 것이라 봐야 하니까 그의 자기검열 필터가 성기긴 한 모양이다.
  책에 등장하는 99구의 인물을 거론하면, 책임자이자 권력자인 아이, 구성원의 일상을 “죄인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아이에게 일러바치는 작가, 참새의 똥을 삼키는 <유물론>의 대가인 학자, 학자와 사랑에 빠진 1세대 자수성가형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 성서를 발로 밟으면 혜택을 주겠다는 아이의 제안을 거절하는 종교(인), 한자 자전과 사전편찬에 권위를 떨친 바 있는 교수, 놀라운 아이디어로 성에서 최고의 철 제련 성과를 만들어내고 위신구를 빠져나가는 실험(조교) 등이다.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문화혁명시대까지 막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속에서 매 페이지마다 희열 없는 고초를 겪으며 오직 하나, 집단 노동교화 농장 위신구를 벗어나 자기 집, 가족, 직장으로 돌아갈 희망 속에서 고난을 겪거나 고난에 대항해 부러져 세상을 뜨고 만다.

 

  여기까지라면 아무 이의 없다. 근데 옌렌커가 좀 무리하는 게 눈에 띈다. 결정적 무리는 책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넋이 나가게 해, 에이 썅, 이게 뭐야 여기까지 잘 와서, 이런 생각이 들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책을 읽지 말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중화인민공화국에 살고 있는 작가가 하더라도 3백 년 전에 옌롄커가 이 책을 썼다면 로마 교황청에서(교황은 무슨, 교왕이면 됐지, 라고 여기는 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에도) 보낸 암살자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른 새에 죽어 자빠지든지, 이탈리아나 스페인까지 유괴당해 화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전혀 동의할 수 없을 정도로 근거 없고 난데없는 무리수라고 보이나 어디까지나 나는 아마추어다. 변죽만 울리고 입 싹 닦으면 얄밉기는 할 텐데, 그렇다고 왜 이런 의견을 피력하는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당연히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에필로그 격인 마지막 장 <시시포스의 신화>. 그걸 왜 넣었을까? 독자에 따라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읽는 것 같지만 내 눈엔 진짜 잘 그린 뱀 다리다. 본문 가운데 아이와 작가가 수레를 끌고 40도 경사의 언덕을 오르는 장면 나오면 됐지 뭘 더 원하는 게 있다고 시시포스의 신화 운운하는지. 말이 나왔으니 하는 건데, 40도 경사는 언덕이라고 부르지 않고 “산” 메산山 자를 쓴다. 그런 경사를 무거운 수레에다 손만 척 얹고 슬슬 걸어가는 장면 나오잖는가 말이지. 제주도 가면 도깨비 언덕이라고 부르는 곳. 보기엔 오르막인데 차에 기어 빼 놓으면 차가 저절로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는 착시를 유발하는 장소. 중국이라서 오르막이 40도 경사라고 우겨도, 중국인들의 유서 깊은 과장과 허풍을 미리 감안해서 들을 줄 아는 동방예의지국 사람들이, 구태여 시시포스의 신화라고 쓴 시시포스의 구라까지 읽을 필요는 없었을 거 같다는 촌평. 아쉽다. 이런 것들을 감안해도 참 잘 읽은 소설인데, 뱀의 다리가 확실히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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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9-07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음..리뷰읽고 달려가서 미리보기로 조금 읽어보니 재밌을것 같은데요. 풍자와 은유로 점철된듯한 느낌.
무리수가 심해 뱀 다리가 길다 하신거죠? 결정적 무리수가 너무 궁금합니다🤔

Falstaff 2021-09-07 13:00   좋아요 3 | URL
이 책은 제가 아는 분이 최고의 옌롄커라고 자신있게 얘기해서 선택했습니다만, 기대가 워낙 커서 그랬든지 하여튼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말씀하신대로 풍자, 은유, 해학 등등이 난만해서 끝까지 재미나게 읽히더라고요. 옌롄커가 워낙 입심이 좋은 작가라 일단 기본으로 별 두 개는 먹고 들어가니까요. ㅋㅋㅋ
도서관이나 중고책 구입하시면 좋겠습니다. 결정적 무리수는 사실 책의 앞에 조금 맛보기로 나오는 건데요 그걸 구체적으로 확 터뜨려버리는.... 하여튼 그런 거 있습니다.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3: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검열 예방작에 저 정도 표현이 등장한 걸 보니. 과연 검열 그물이 성기나 봐요. 뱀이 예전엔 진짜루 다리가 있었대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다죠. ㅋ 저는 폴스타프님 리뷰로 이 작품 읽은 걸루^^;;

Falstaff 2021-09-07 13:43   좋아요 2 | URL
뱀한테 진짜 다리가 있던 때가 아마 6.25 전이죠? ㅋㅋㅋㅋ
옌롄커가 좀 거칠어서 안 좋아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괜찮은 선택입니다. ^^

coolcat329 2021-09-07 17: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옌렌커 책이네요~^^물론 안 읽었지만요. 별4개니 그냥 기분좋네요.
사실은 이 작가 책 중 <인민을...>을 읽다가 도서관에 반납한 경험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더라구요🥱
사서는 기대해봅니다.

Falstaff 2021-09-07 19:28   좋아요 3 | URL
아후. 사셨으면 무조건 읽으셔야 합니다! 냅두면 나중에 애들이라도 읽겠지, 하는 건 걍 희망사항이예요!!!! ㅋㅋㅋㅋ
인민봉사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만큼 야~하지도 않고요. ㅋㅋㅋㅋ
 
- 문정희 시집 민음의 시 205
문정희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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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희의 시는 수십 년 전부터 숱한 문학지를 통해 읽어왔다. 잡지에서 읽은 몇 편의 시를, 마치 시인의 거의 모든 작업을 읽은 것으로 확대하는 오류를 겪은 나머지 정작 시집을 사 읽을 생각을 못했다. 그게 여기까지, 오늘까지 온 거다. 근 40년. 그것 참 희한하지. 진짜로 이이의 시를 읽어보니까, 낯설다. 시인의 나이 예순여덟에 낸 시집인데 시는 아직도 알통이 울근불근하다. 목청 또한 귀에 익숙한 메조소프라노의 맹렬한 구호 선창 같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실린 <강>이란 시를 보면,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 울다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자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囚人)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뒤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 자신을 통째로 죽인 희생을 채찍으로
  우리를 제압하던 당신을 배반할 수 없어
  물 밑에서 숨 쉬던 모반과 죄책감까지
  브래지어 풀듯이 풀어버렸다

 

  어머니 장례 날,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
  말하라, 이것이 햇살인가 허공인가
  나는 허공의 자유, 먼지의 고독이다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 (전문)

 


  척 봐도 여성주의 시다. 그런데 스타일은 80년대 구호가 생각난다. 물론 시집의 초판이 2014년이라 지금 시각으로 볼 때 조금 촌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80년대 구호니 뭐니 이리 까탈을 잡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나. 독자가 그렇게 읽었다니 말이지. 엄마가 죽고, 장례를 지내고, 마리를 만나 영화를 본 다음에 한 침대에 든다. 며칠 후 식민지 알제 해변에서 권총으로 아랍 청년을 쏴 죽이는 뫼르소. <이방인>을 모티브로 문정희는 고려, 조선, 누대의 여인들, “식민지들”, 이라고 했으니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른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도 포함하여, 죄 없이 죄 많은 수인, 과거의 여성들 또는 여성형과의 이별, 단절을 선언한다. 여성 압제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현모, 양처, 정숙을 대표 개념으로 해서. (몇 년 후에는 우리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정숙’까지 이별, 단절의 대상으로 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르지만 뭐.) 그래 현모와 양처와 정숙이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새로운 개념과 사랑을 나눠 새로운 어머니, 새 여성형을 낳겠다는 건데.
  왜 하필이면 식민지 알제리였을까. 그냥 시인이 <이방인>을 다시 읽었든지 아니면 책꽂이에 있는 책등을 보고, 어머니를 장사지낸 후의 생식행위와 여성을 연결해 시를 쓰고 싶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여기서 ‘평화’ 한 가지를 더 포함시켰으면 어땠을까, 이왕 “식민지들”을 시 안에 초청한 바 있고, 알제리와 식민모국 청년 뫼르소가 등장했겠다, 과거 식민해소를 위한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유지를 기원하면 그림이 더 커지고 좋았을 텐데. 전쟁과 이어지는 폭력의 물결 속에서는 염병한 현모, 양처, 정숙이란 이데올로기의 종식은커녕,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위한 사랑마저 불가능하다는 걸 시인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도 말이다. 역사 이전 시절부터 인류의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야만이었다고 본다. 야만의 가장 구체적이고 오래된 역사적 증거는 전쟁과 폭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젠더 간 불평등의 제거를 위해 제일 먼저 모색해야 하는 건, 진영 갈등의 유발이 아니라 항구적이고 물리적인 평화에 도달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시인이 알제의 청년을 인용한 터에 이것까지 엮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위의 시 <강>에서 보듯, 예순여덟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문정희의 시는 팔팔하다. 노익장. 노익장?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학교에서 은퇴하고도 여전히 힘이 펄펄 나 좁은 땅 구석구석을 다니며 시낭송회에 참가해 마치 쥐약을 판 듯 시를 읊고, 문학을 심사하고, 특강을 하고, 가끔 보내온 독자의 문자를 읽고 감동해마지 않기도 하다.

 

  시 낭송을 하고 온 날이면
  꼭 시장에 나가 쥐약을 팔고 온 것 같다
  요즘 세상에 쥐가 어디 있는가
  나의 삶은 사뭇 육체적으로 변해 버렸다
  심각한 포즈, 은은히 떨리는 음성
  문학을 심사하고 우수 추천 시인 목록을 쓰고
  특강을 하고
  독자가 보낸 문자에 감동까지 주고받고 나면
  쥐약 장사의 수완만 날로 눈부신 것 같다 (<쥐약> 1연)

 

  자신의 삶, 이라기보다 요즘/노후 생활을 겸손하게 그린 것이리라. 나도 그렇게 읽었다. 그러다가 몇 분이 지나서 시집을 뒤적거리다 다시 읽어보니까, 이 시를 만일 만년 시인 지망생, 혹은 실력은 있으나 유명하지 않아 팔리지 않는 시인이 읽으면 참 거시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명시인이 보기에 문정희가 얼마나 부러울까.
  시집에 들어있는 시를 크게 분류하면 ① <강>과 비슷한 여성주의, ② <쥐약> 류의 시인 자신의 모습, ③ 시인들의 끝나지 않는 고민인 시에 관한 사색, 그리고 ④ 기타, 이렇게 거칠게 네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겠다. ③의 범주에 드는 재미있는 시가 있어 소개한다.

 


 나의 펜

 


  나의 펜은 페니스가 아니다*
  나의 펜은 피다

 

  하늘이여 새여
  먹어라

 

  아나! 여기 있다
  나의 암흑
  나의 몸
  새 땅이다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두 번은 없다    * Pen is penis 변용 (전문)

 


  첫 행, “나의 펜은 페니스가 아니다”에 퍽, 한 방 맞은 느낌. 영어로 Pen is penis를 반대로 말한 거다. 음, 그런 뜻이군. 했다. 그럼 우리말로 하면 이건가? “나의 펜은 좆도 아니다.” 노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좆이 뭐냐, 좆이? 좋다 순화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게 그거인 외래어, 중국어를 써서 다시 해석해보자. “나의 펜은 음경이 아니다.” 아, 이건 또 너무 해부학적이다. 시니까 시인의 여성주의 철학을 넣어서, “나의 펜은 남근이 아니다.” 좋다. 그럼 그렇다 치고 첫 연을 보면, “나의 펜은 남근이 아니다 / 나의 펜은 피다” 이런. 남근 수난시대. 평생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다가 왼쪽 다리에 차이고, 오른쪽 다리에 걷어차이며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 슬픈 기관이다. 사실 그게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르지 않으면 진짜 볼 거 없는 부속물인데, 언제부터인지 야만과 폭력, 특히 성폭력과 마초의 대명사로 불리기 시작해 나름대로 불만이긴 할 터. 하지만 참아라. 오랜 세월 동안 해 온 업보가 있으니. 문정희가 쓰는 시는 이제 피다. 생명의 씨톨이 되는 건 포기했지만, 생명의 중추적인 순환계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하늘과 새에게 먹으라고 자신을 내던진다. “아나! 여기 있다”고. 근데 말이지, 시인이여 부탁이 있으니 제발 나한텐 주지 마시라. 당신의 암흑, 당신의 몸, 새 땅을 먹을 마음이 없으니. 문정희의 시와 나는 아무래도 합이 맞지 않는 거 같다. 나는 외침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이는 구호 선창에 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도 있다.

 


  스무 살

 


  스무 살은 나이가 아니라 눈부심이다
  커피에 적시어 먹는 마들렌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다가 그만 사라진다
  눈만 크고 괜히 사나운 고양이같이 야옹거리며
  별 하나를 캐 보려고
  궁리하는 사이
  스무 살은 산뜻한 돌림병처럼 왔다 간다
  그 바람에 첫사랑이 스쳐 가는 것도 모른다

 

  스무 살은 고귀한 보석을 거기 두고 온 것을 알고
  남은 생애 동안
  두 눈이 빠지도록 그리워하는 풀밭이다

 

  날개를 펴서 미처 부딪혀 보기도 전에
  자유보다 더 많은 상처를 증거처럼 남기고
  얼떨결에 떠나 버린다 (전문)

 


  와우! 브라보! 저런 스무 살을 겪은 모든 인류에게 경배를! 스무 살이 눈부심이라고? 지나고 보니? 음. 시인은 아무래도 근본이랄까 태생이랄까, 아니면 종족 자체가 아예 나하고는 다른 거다. 스무 살은 혼돈이었는데. 부드럽고 달콤하게 사라진다? 아이고, 나도 저렇게 한 번 살아나 보고 여기까지 왔어야 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고, 하는 일마다 쿵쿵 보이지 않는 벽에 마빡을 부딪는 진퇴양난의 시절. 그게 나의 스무 살이었는데. 시인은 얼마나 좋았을까. 저런 시절을 이렇게 소중하게, 늙어서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으니. “고귀한 보석”같은 스무 살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을까. 부럽다, 진심으로. <쥐약>을 읽는 무명시인의 마음이 <스무 살>을 읽는 내 마음과 비슷하겠지. 썅.
  그래도 마음에 드는 시 하나는 찾았다. 이거나 읽고 떨어져야겠다.

 


  물구나무

 


  하늘을 좀 즐겁게 해 드리려고
  하늘 향해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꽃이 피면
  하늘과 땅이 함께 웃으시겠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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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9-06 1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가만보니 시집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네요.
(리뷰 다 읽고 제목을 봤어요)
페니스 Pen is 는 좀 아재개그같지만🙄
폴스타프님 덕분에 재밌게 문정희를 읽었습니다. 폴스타프님
분석도 알통이 울근불근!

Falstaff 2021-09-06 10:19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고 어깨가 으쓱으쓱해집니다!
아이고, 전 분석 못해요. 그냥 읽은 감상이 그렇다, 하는 겁지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9-06 12:54   좋아요 2 | URL
Pen is penis 증말 아재개그네요. 아 미쳐... ㅋㅋㅋㅋ ㅠㅠ

붕붕툐툐 2021-09-06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니스에 대한 단상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관점이네요~ㅎㅎ
스무살은 스무살 제 조카에게 보내줘야겠어요~^^

Falstaff 2021-09-06 12:2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물구나무 재밌지 않나요?
스무살 조카한테 보여주시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합니다. ㅎㅎㅎㅎ

새파랑 2021-09-06 1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무살> 시는 정말 좋네요. <나의 펜>은 마치 폴스타프님이 쓰신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Falstaff 2021-09-06 14:25   좋아요 3 | URL
아오, 새파랑님도 혹시 저하고 안 맞는 거 아녀요?
스무살이 좋아요? 아이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내 펜은 뭐 그렇다고 쳐도 말입죠. ㅎㅎㅎㅎ

새파랑 2021-09-06 13:27   좋아요 3 | URL
아 폴스타프님은 안좋으셨군요 😅 저는 폴스타프님도 좋다고 생각을 했나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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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진탕 마셨다. 아침에 깨니 미안하다. 해장으로 콩나물국 끓이고 달걀 프라이 두 개 부친다. 딤채에서 새 김치 꺼낸다. 밥 두 공기 푸고 아내를 깨운다. 술마시고 왔으니 이 정도 해도 괜찮다. 커피 내려 가져다 바친다. 늙은 아내, 트림 꺽하고는 산미 좋고 맛있는데! 기분좋다. 얻어맞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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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04 09: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불금에는 진탕 술이죠~!! 역시 프로필 사진과 행동 일치

Falstaff 2021-09-04 09:2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일용할 양식이지요!

초딩 2021-09-05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나쁘지 않은 술 마신 다음 날의 전경입니다. :-)
 
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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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읽어간다. 다른 독자는 어떻게 읽었을까, 싶어 들어와봤다. 내돈내산 한 나만 호구됐다. 이런 책을 왜 ‘무료제공‘하나? 읽을 각오 단단히 하지 않은 독자는 사놓고 못 읽을 책. 광고 오지게 해도 읽을 사람만 읽을 책. 엉덩이 질긴 독자여, 일독 도전하시라! 난 책씻이 겸 술 마시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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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9-03 16: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일선물로 받아 떡하니 갖고 있습니다.
이 책 좀 어려운가봐요.
도전해야겠어요^^
즐술하십시요^^

Falstaff 2021-09-03 16:50   좋아요 5 | URL
아오, 겨우 450쪽인데, 무려 나흘이 걸립니다. 유려한 문장이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 책입니다. 여러 생각할 거리도 있고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3 16:59   좋아요 5 | URL
저기.... 450쪽이 겨우에요?? 무려 나흘?? 일 하신다면서요. 술도 마신다면서요. 책을 언제??? 속독하세요??

독서괭 2021-09-03 22:15   좋아요 2 | URL
와 겨우 450쪽이라니 폴님 스웩~~

Falstaff 2021-09-03 22: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전 몇 주 있으면 은퇴합니다.
회사에서도 이제 뒷방 늙은이라 일을 주지 않아요. 그래 하루 한 시간 정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북플 들락거리다가, 책도 읽고 그렇습니다.
아이고, 이런 건 안 물어보시는 것이 좋았는데, 제가 입이 좀 빨랐습니다. 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9-03 16: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좋으시겠어요. 읽고 마시고. 유다 읽음 술 생각이 절로 나나 봐요.^^ 엉덩이 착석이 요구되는 책이라는 거죠. 흠.흠.흠.

Falstaff 2021-09-03 16:51   좋아요 5 | URL
드디어 긴 고문이 끝난 걸 자축하는 겁니다. ㅋㅋㅋㅋ
게다가 불금이네요! 퇴근 5분 전이고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3 16:57   좋아요 4 | URL
저도 퇴근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부러우면 진다는데 부러워 지다 죽겠습니다.^^;;

Falstaff 2021-09-03 21:53   좋아요 0 | URL
부러워하지 마세요. 다 일장일단, 뭐든지 다 좋은 거 없고, 다 나쁜 거 없잖아요. ^^

막시무스 2021-09-03 17: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책걸이를 불금에 땡겨서 해주는 센스를 시전하셨군요!ㅎ 오늘 약주하시기에 정말 좋은 날씨입니다! 즐겁고 맛난 술 드십시요!ㅎ

Falstaff 2021-09-03 21:53   좋아요 0 | URL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아이고, 얼근 하네요. ㅋㅋㅋㅋ 인생입지요.

붕붕툐툐 2021-09-03 17: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술 마시는 거 부럽습니다!! 저는 <유다> 패쓰하겠습니다!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03 21:53   좋아요 0 | URL
훌륭한 선택입니다.
이 책은 함부로 권하지 않을 겁니다. ㅎㅎㅎㅎㅎ

그레이스 2021-09-03 18: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놓고 아직 안읽은 책인데...
각오하고 읽어야겠네요 ;;

Falstaff 2021-09-03 21:55   좋아요 1 | URL
사셨으면 읽으셔요!
피같은 돈 주고 사셨는데 아이고, 꼭 읽으셔야 합니다.
아주 괜찮은 작품입니다. 그레이스 님한테 맞을 것도 같습니다. 다만 좀 장황합니다.
그래도 좋은 선택인 거 같아요!!!

coolcat329 2021-09-03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4일 걸린다면 저는 열흘 걸릴 책이네요. ㅎ맘 편히 패스하겠습니다.
이 작가 책 <나의 미카엘>을 생각하면 어떤 스타일일지 감이 잡히는듯도 싶어요. 한나 그 여자 이해안가서 참 고생한 책이었거든요.

지금 맛있게 한 잔하고 계시겠죠?
저는 지금 마시고 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Falstaff 2021-09-04 09:11   좋아요 0 | URL
옙. 안 읽으셔도 만수무강에 전혀 이상 없습니다. ㅎㅎㅎ
읽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중도작파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선택입니다!!!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NFF (New Face of Fiction)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이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기 전에 류드밀라 스테파노브나 페트루셉스카야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 이이는 당연히 소설가이고, 희곡, 동화, 만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70대엔 가수로 데뷔한 이력까지 있다.

 

  페트루셉스카야는 1938년에, 일찍이 신사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아지트로 유명한 모스크바의 웅장한 메트로폴 호텔에서 태어나, 볼셰비키 지식인이었던 아버지가 국가의 적으로 찍힌 1941년까지 그 호텔 건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이후, 현재 지명 ‘사마라’ 당시 쿠이비셰프로 도망을 기도한 아내와 딸 루드밀라를 버리고 만다. 작가와 어머니는 당연히 역경에 처해 쿠이비셰프의 수용시설, 길거리 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작가 류드밀라 페르루셉스카야의 작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공동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당시 류드밀라의 별명이 “모스크바에서 온 성냥개비”였을 정도로 비쩍 마른 몸매였다고. 이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모녀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이이의 작품집 《지금은 밤》에서 보듯이, 소련에서는 공동 아파트에 사는 극빈자라 하더라도 머리 좋은 청소년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에 갈 수 있어서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진학해 저널리즘을 공부해 학위를 딴다.
  페트루셉스카야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소비에트 작가인 동시에 동유럽에서도 가장 큰 찬사를 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유럽 잡지 <퍼블리셔 위클리>는 이이를 두고 생존해 있는 가장 훌륭한 러시아 작가라고 쓴 바 있다. 이이의 작품에서 독자는 포스트모던 경향, 심리학적 내면, 동시에 체호프에서 볼 수 있는 역설적 터치 등이 섞여 있을 거라는데, 하여튼 이건 위키 백과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내가 읽고 느낀 것이 기초해볼 때, 이건 과장이다. 뒤에 얘기하자.
  페트루셉스카야는 인생의 황금기를 불행하게도 철의 장막 안에서 보냈다. 이이가 쓴 작품들은 하나 같이 KGB에 의하여 검열을 받았고, 그렇게 해서 붉은 점의 대머리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하기 전엔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후 세상이 좋아지자 그동안 출간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최소수량만 시중에 나와 독자가 접하기 극히 힘들었던 이이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이런 와중에 작품이 조금은 과대포장된 것 같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도 페트루셉스카야의 책을 찍겠다고 출판사마다 이이의 전화번호를 찾느라 눈알을 뱅뱅 돌렸던 것인데, 왜 그랬냐 하면, 책이 잘 팔리니까, 돈이 들어오니까.

 

  이이의 대표작으로는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간한 《시간은 밤》과 단편집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를 꼽는다고 한다. 《시간은 밤》. 재미있게 잘 읽었다. “출판사에 의하여 지원받은 도서”에 대한 독자서평 없이 평균 별점 4.7에 빛나는 잘 짜여진 단편집이지만 내가 《시간은 밤》을 읽은 시점이 하필이면 같은 러시아 여성작가, 그러나 수도capital면 같은 수도냐,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물론 태어날 때는 레닌그라드였지만) 출신이며 페트루셉스카야보다 한 살 언니인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쓴 매혹적인 중단편집 《티끌 같은 나》를 읽은 바로 뒤라서, 물론 페르투셉스카야를 이렇게 읽은 것도 내 팔자이긴 한데, 토카레바에 비해 아주 조금, 약간의 라면 스프 같은 맛이 빠져있는 느낌이 들었다. 안다, 알아. 토카레바는 오래 약사로 일하다가 나중에야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작가로의 경력이 페트루셉스카야하고 비교할 수조차 없겠지. 그런데도 하여튼 그렇다니까, 내 입맛엔.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를 넘어 공산주의를 채택한 것이 소비에트연맹. 공산주의,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그대로 화폭이나, 화면이나, 극장무대나, 초등학교 학예회 단상이나, 원고지 위에 올려놓는 걸 가장 싫어하고, 못견뎌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인간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들여 일단 귀싸대기 한 대 후려치는 것으로 시작해, 두드려 패고, 고문하고, 또 고문하고 다시 고문해 체제 전복의 죄명을 자백하게 만든 다음, 재판을 통해 유배를 보내거나 형장의 이슬로 만들기 좋아했던 체제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였던 거다. 상황이 이런데 어려서부터 모스크바 성냥개비라는 별호를 받았던 페트루셉스카야 같은 작가가 있으니, 유소년기의 경험이 작가의 영원한 샘물이 되는 건 당연하여, 그걸 펜으로 그리는 것이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인 바에,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제일 잘 하는 걸로 먹고 살며, 좋아하는 걸로 즐기는 법,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벌어지는 짓을 쓰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이래서 페트루셉스카야는 소비에트 시절 내내 지겹도록 검열을 받아야 했고, 무수하게 삭제를 당했으니, 비록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이런 내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와 이 작가의 작품이 어찌 어여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방의 문화계에서 보면 말이지. 솔직히 1920년대 이후 태어난 서양 작가의 경우에 포스트모던 경향이 하나도 없이 작품을 쓴 사람 있어? 있으면 두 명만 대보시지. 없다. 심리학적 내면을 작품에 포함시키지 않고도 소설을 쓸 수 있었나? ‘체호프 식 역설적 터치’ 대신 ‘도스토옙스키 식 죄의식’이나 ‘톨스토이 식 도덕관념’을 넣어도 전혀 문제 없……지? 아, 지금 내가 페트로셉스카야를 비난하고 있는 거 절대 아니다. 오늘의 책,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를 다른 방면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위키 백과의 틀림없이 과장된 찬사에 조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뿐이다.

 

  페트루셉스카야의 다른 직업은 희곡, 동화, 만화(영화) 시나리오 작가. 여기서 희곡만 제외하면 동화와 만화. 이들의 공통점은 어린 고객을 위한 작업이란 뜻이고, 특히 1930년대 생인 작가의 경우라면 어려서 숱하게 들은 노변담화, 즉 옛이야기가 작업의 커다란 자산이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어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가운데 생각보다 엽기, 공포물이 많다. 전 세계 동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캐릭터가 귀신, 도깨비, 괴물, 유아살해 같은.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는 러시아의 여러 잡지에 실렸던 것들을 모아 2009년 10월에 미국 펭귄 북스에서 초판 출간했다. 이 책에 실린 모두 스물한 편의 단편은 소비에트 시절이나 그 이전 시절을 무대로 온갖 엽기 귀신, 도깨비, 괴물, 유아살해, 혼돈, 이것들을 다 합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충만하다. 동시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는 2009년 12월에 베스트셀러로 치켜 올렸던 바, 작품이 미스터리와 우화적 요소를 담뿍 담고 있다고 평했다.
  동화와 만화영화 시나리오 창작에 깊게 관여했던 소설가가 생각하기에, 내가 알고 있는 옛이야기를 보다 현대적 옷을 입혀 다시 꾸며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유아살해를, 20세기 초중반에 바닥 세척용으로 쓰던 가성소다, 즉 양잿물을 뒤집어 씌워 죽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다른 방을 쓰고 거실과 욕실,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웃 여자가 아이 엄마이자 친구가 외출한 사이 방문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한 아이의 발목을 향해 양잿물을 좌악 뿌려, 아이고 어머니, 잔인하게도 처리하는 걸, 미스터리와 우화적 요소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이건 70세에 육박한 소설가가 어릴 적 들어 알고 있던 우화 자체를 성인 독자 읽으라고 변주하기로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쓴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첫 작품인 표제작부터 마지막 <검은 외투>까지 모두 다 그렇다.
  그리하여 이 책을 여름은 여름이되 날 선선해진 8월 말이 아니라, 진짜 찐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7말 8초의 성하에 읽으면 정말로 좋을 납량물로 보는 게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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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3 08: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보면, 시 한 편 잘못썼다고 호텔에 감금하는 벌을 내려서 주인공이 호텔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삶을 살게 되거든요. (혹시 읽으셨나요?) 그런 벌이 있으니까 이런 소설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작가는 실제 그런 삶을 얼마간이지만 살았던거군요.

그나저나, [시간은 밤] 이라면 제가 또 가지고 있습죠. 이 책은 패스하고 시간은 밤 읽으면 되니까 오늘은 충동 당하지 않고 얌전히 갈 수 있네요. 호호.

Falstaff 2021-09-03 08:51   좋아요 2 | URL
<모스크바의 신사> 주인공이 저 위에 이름을 올린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잖아요. ㅋㅋㅋㅋㅋ
페트루셉스카야의 아버지가 로스토프 백작과 비슷한 ˝인민의 적˝으로 찍혔었나봅니다. 이 와중에 처자식이 저 시골로 도망가려고 하니까, 스탈린한테 걸렸다 하면 무조건 사형에 처해질 위기라는 걸 직감하고 처자식을 버렸겠지요. 에휴, 하필이면 그때 태어나 모진 고생을 할 건 뭡니까.
금요일에 별 셋짜리 나오면 다부장님이 호호호 웃으시는군요! ㅋㅋㅋㅋ 참고하겠습니다!

다락방 2021-09-03 08:59   좋아요 2 | URL
앗. 저 방금 모스크바의 신사 폴스타프 님 리뷰 보고 왔어요. 이 이름이 그 이름인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아니, 그런 이름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그나저나 모스크바의 신사 별 다섯 리뷰여서 너무 씐나요! 저도 그 책 재미있게 읽고 팔지 않고 갖고 있는 책이거든요. 그 리뷰 읽고나서 궁금한건데, 그런데 우아한 연인에는 별 셋 주셨네요? ㅋㅋ 저는 우아한 연인 먼저 읽었었고 그거 너무 좋아서 모스크바의 신사 나오자마자 읽은 거였거든요. 그런데 우아한 연인 읽고 <월든> 읽었다가 월든 너무 재미없어서 깜짝 놀랐어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03 09:20   좋아요 3 | URL
우와.... 진심으로, 진심으로 다락방님이 <우아한 연인> 먼저 읽고 그게 재미나서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셨을 거다, 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거꾸로 읽었는데요, 기대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우아한 연인>을 읽으니 이게 영 아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우아한 독후감이 별 셋 주고도 이달의 서재로 뽑혔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건, <월든>이 느므느므 재미없다는 겁니다. 재미로 읽는 책은 아니지만 (번역 때문이지는 모르겠고요)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이고....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9-03 09:23   좋아요 2 | URL
월든 저도 재미 없었어요.. 심지어 헨리 소로 성격 꽤 나빠 보임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9-03 09:24   좋아요 3 | URL
저도 월든 읽고 소로 싫었습니다 ㅋㅋㅋㅋㅋ 뭐야 이사람 으으 했어요 ㅋㅋㅋㅌㅌ

독서괭 2021-09-03 11:38   좋아요 1 | URL
<모스크바의 신사> 엄마가 읽고 재밌다고 저 갖다 주셨는데..아직 고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ㅜㅜ

Falstaff 2021-09-03 12:22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모스크바의 신사>는 오늘 시작하세요. 하여튼 금요일이나 연휴 전에 시작하시는 게 좋습니다. 한 번 열었다 하면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일 시작하시면 직장에서 하염없이 졸 수도 있습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1-09-03 13:31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그렇다면 <우아한 연인> 먼저 읽어주시면 안돼욤? 🙄

Falstaff 2021-09-03 13: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9-03 13:40   좋아요 1 | URL
헛.. 폴님, 그정도로 재밌나요? 다락방님, <우아한 연인>은 사야하잖아요. 이미 오늘 또 추가주문하는 바람에 이번달 주문 끝났어요. <독서공감>이 곧 올거란 말이죠 ㅎㅎㅎ

Falstaff 2021-09-03 14:13   좋아요 1 | URL
괭님, 모스크바 신사 재미있어 하는 건 남녀노소가 없다니까요!

잠자냥 2021-09-03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도 이거 첫 단편만 읽고 일단 내려놨는데! 여름이 다 갔어요!!! 그럼 내년 여름에? ㅎㅎㅎ

Falstaff 2021-09-03 09:24   좋아요 3 | URL
앗! 내년 여름은 이 책 때문에 션~하게 보내겠네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1-09-03 11: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으아 첫줄의 작가 풀네임 너무 어려워서 입속으로 굴려봤어요 ㅋㅋㅋ 절대 못 외울 것 같아요 ㅋㅋ 위키의 평에 대한 폴님의 시비걸기 넘 재밌습니다. 그리고 이 책 리뷰로 얻은 결론은 <티끌 같은 나>를 읽어야겠군.. 이네요!>ㅁ<

Falstaff 2021-09-03 12: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러샤 이름이 좀 그런데, 나중엔 익숙해집니다.
옙. 이 책은 지금 품절이기도 하고 그러니 <티끌....>부터 ㅎㅎㅎ

그레이스 2021-09-03 1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카레바에게서 아주 조금 라면수프가 빠진 맛을 알기 위해서는 토카레바 먼저 읽어야겠네요^^
신사배리린든읽고 있는데 폴스타프님 리뷰 보고 ...암튼 재미있네요. ㅎㅎ

Falstaff 2021-09-03 12:27   좋아요 3 | URL
와우 신사배리린든 읽으셔요? 아참, 그거 제가 별 닷 개 준 소설 아닙니까. <허영의 시장>은 별로더니 베리 린든 보니까 진짜 디킨스 라이벌이더라니까요! 판매지수가 오르지 않아 나중에 백자평 하나 더 썼다는 거 아닙니까. ㅎㅎ

토카레바하고 페트루셉스카야, 아무나 먼저 읽으시면 되는데, 하여튼 전 토카레바가 조금 더 좋았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1-09-03 12: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밤을 먼저 읽어봐야 겠네요~!! 저도 <티끌 같은 나> 좋았었는데 약간 스프가 빠지더라도 좋겠죠? 😅 여름이 가서 아쉽네요 ㅜㅜ

Falstaff 2021-09-03 12:56   좋아요 3 | URL
글쎄 아무나 먼저 읽어도 된다니까요. ㅋㅋㅋㅋㅋ
전 여름 가니까 살 접히는 곳에 땀 안 차서 좋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