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와 화로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임화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8년 서울 낙산 근처에서 출생한 카프 시인. 엣다 모르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한국전쟁 이후 북으로 간 시인, 작가들 가운데 빛나는 사람들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 북쪽의 체제를 택함으로써 수십 년 간 베일에 싸인 작품들 덕에 신비의 안개를 두른 전설들도 있다. 나는 이 가운데 한 명으로 임화를 꼽겠다. 아놔. 시집 읽다가, 읽다가, 읽다가, 도중에 때려치우기는 또 처음이다. 내가 이래봬도 박상률의 시집도 끝까지 읽은 사람이다. 근데도 도무지 못 읽겠다. 실로 카프 문학의 정점인 건 맞다. 그러니까 이이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부지기수고, 연구한 결과물을 엮은 책들도 그리 많겠지. 근데, 고운 꽃노래도 삼세번 아냐? 투쟁과 혁명과 고난의 행군의 목소리를 그리 일관되게 부르짖으면, 나중엔 도대체 이게 시, 그니까 노래인지, 구호인지, 그것도 아니면 유인물이나, 심지어 삐라 아냐, 싶은 마음이 든다. 진짜다, 읽어보시라. 지금 박노해나 백무산의 시를 읽는 사람 있어? 아니다, 다시 묻겠다. 박노해나 백무산의 시를 읽는 사람 아직도 많이 계신겨?
  같은 의미로 카프의 시는 고인에겐 아쉽지만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시집의 명패가 얼마나 예쁜가. <우리 오빠와 화로>라니. 그렇지? 좋다. 전문은 아니더라도 한 연만 소개한다. 어떤 오빠이고 어떤 화로인지.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 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부분)


  감잡히지? 어떤 오빠라는 거. 임화 이이가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1935년 제2차 카프 검거 때 진영의 대표 자격으로 카프 해산계를 일경에 제출한 다음에, 이젠 더 이상 카프 문학을 할 수 없으니 변신할 필요가 있어 선택한 것이 난데없이 다다이즘, 내가 보기에 초현실주의다. 다다이즘하고 초현실주의의 공통점이 무척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카프문학이 극적으로 배격하는 사조라는 거.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 비슷할 듯. 임화의 신상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1차 카프 검거 당시엔 붙잡혀 들어가 몇 개월 살다가 불기소 의견으로 방면되어 나와, 적어도 유치장 짬밥 맛은 봐서 이 경험을 (위에서 인용한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처럼) 두고두고 울궈 먹는데, 2차 카프 검거 때는 그동안 걸린 폐결핵으로 검거 대상 리스트에서 지워지고, 대신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을 해 평의원으로 활동해야 했다.
  뭐 기분이야 이해가 간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투쟁하다가 난데없이 제국주의 일본에 보국報國, 나라의 은혜를 갚는 단체에 들어가야 했으니 오히려 더 심하게 반동의 형태를 취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다 그렇잖아, 안 그랴? 그때 이후 임화의 시에선 도무지 두 눈을 뜨고는 못 봐주는 “영탄의 해일”이 넘실거려, 나로 하여금 한 눈을 감고, 마치 스무 살 청춘인 듯 윙크를 하고(두 눈 뜨고는 못 읽어서) 시를 읽어야 했으니 어찌 시집을 끝까지 넘길 수 있었겠느냐고.
  에잇. 내가 또 카프 시를 읽으면 성을 간다. 사 놓은 건 빼고.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11-12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임화 (저 표지의) 늙은 얼굴은 별로 안 잘생겼네요... ‘우리 오빠‘도 어쩔 수 없군요ㅋㅋㅋㅋ

Falstaff 2020-11-12 15:4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세월 이기는 장사가 어딨어요. 저도 이렇게 변했는데.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12 15:44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하라 “그 옛날 그 궁둥이 어디로 가고 뉘신고 하노라”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1-16 09:38   좋아요 0 | URL
제 왕년의 사진 업로드 했습니다. 토요일에 삭제 예정. ㅋㅋㅋㅋㅋㅋ
드뎌 토요일, 삭제 했습니다. 2박3일 동안 쪽팔림이 무한이었습니다.

잠자냥 2020-11-12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나만 보기 아까운데 다들 어디 갔셨어욬ㅋㅋㅋㅋㅋ 다락방 님!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0-11-1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잠자냥 2020-11-12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 청년 임화와 폴스타프 무엇이 같고 다른가.
임화 http://artichokehouse.com/team/im-hwa

폴스타프 오늘 낮술 거하게 한잔한 것으로 밝혀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11-12 16:19   좋아요 0 | URL
아티초크 사진은 랭보 뽀샵 같은데요? ㅋㅋㅋㅋㅋㅋ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소개 : ˝춘원 이광수에게 사사를 받았으며˝랍니다. 골 때려요. 이게 사실이면 이광수가 구보 박태원의 학생이었다는 건데, 춘원이 구보보다 16세 많거든요, 당시에 열여섯 살 차이면, 이광수가 박태원의 아빠 뻘입지요. 뭐 배움에 나이 차이가 있겠습니까만, 그렇죠?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11-1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했다‘, ‘사사받았다‘. 굉장히 많이 틀리는 표현 같습니다. ㅎㅎㅎ 걍 가르침을 받았다고 쓰면 쉬운 것을-

Falstaff 2020-11-12 16:07   좋아요 0 | URL
책 앞날개엔 ˝개인적으로 문학적인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라고 씌어 있어요. 을매나 좋아요, 이해하기도 쉽고. 괜히 잘난 척들을 하려고 참나. ㅎㅎㅎ

알라딘고객센터 2020-11-1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용에 불편을 끼쳐 송구합니다. 저자파일 수정하였고 반영에 평일1-2일 소요 예상됩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0-11-12 19:45   좋아요 0 | URL
윽! 서재에 올라오는 글을 전부 모니터 하시는 거예요? @@ 와.......!!!!!!!

Falstaff 2020-11-14 07:59   좋아요 0 | URL
고치긴 하셨는데, ˝이광수에게 사사하였다˝는 어색하고요, 이왕 수정하시려면 ˝이광수를 사사하였다˝가 훨씬 낫습니다. ^^;;
 
젊은 개예술가의 초상
딜런 토머스 지음, 이나경 옮김 / 아도니스출판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어찌 고르지 않고 배길 수 있었을까. 글쓴이가 딜런 토머스이잖은가 말이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미국의 유명 가수 밥 짐머만이 딜런 토머스를 숭배한 나머지 이름을 밥 딜런으로 고쳤다니. 이름까지 고친 그는 몇 십 년 후에 가사lyrics가 예술이라고 노벨 문학상까지 거머쥐어 버렸단다, 으악.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딜런 토마스의 시는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다. 물론 번역시는 읽지 않는다, 라고 작정을 하기도 했고 영시를 즐길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딜런 토마스라는 웨일스 출신의 시인. 이이가 쓴 소설집이, 외국 작가가 쓴 단편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별 부담 없이 읽는 연작 형태의 성장소설이라니. 그리고 단편집의 저 도발적인 제목을 보시라. ‘젊은 개예술가의 초상.’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생각나게 하는 제목인데 거기다가 젊은이의 삐딱한 시선까지 곁들여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개예술가artist as a young dog'라고 했다. 제목으로 진짜 개쩐다.
  그러나 모두 열 편이 실린 이 단편집이 쩌는 작품들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작가 자신이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스완지의 농촌과 작은 도시와 해변에서 자라는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파노라마라기보다는 시간별로 열 점의 수채화를 전시해놓은 것 같다. 자신의 리얼한 체험이라고 믿는 독자는 없겠지? 소년이었을 때, 사춘기 시절,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각 단계에서 작가가 상상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묘사했는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정당한 변주 기법이 들어갔을 터. 변주를 하지 않았다면 ‘개예술가의 회고록’ 쯤으로 제목을 달았겠지.
  그래. 수채화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극단적 은유의 나열로 골이 지끈지끈한 바로 다음에 담백한 수채화 구경을 하니 좀 개운해지는 것 같기는 한데, 다분히 도회적 취향인 나하고는 찰떡궁합까지 가지는 못해, 뒤로 갈수록 점점 곤란한 지경 근처까지 가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선 책의 편집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각주와 더불어 후주를 단 것까지는 좋다. 근데 후주가 무려 서른아홉 페이지에 달한다. 주석註釋 특유의 작은 활자로. 이미 서른세 페이지에 달하는 연표를 달고도 시시콜콜 작가가 왜 이런 ‘주석이 달릴 만한 단어나 문장’을 사용했는지 극히 세밀한 설명을 일반 독자에게 해줄 필요가 있을까? 이 작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해봤자 내 인생에 더 이상 수능시험을 치를 일은 없을 텐데. 주석이 있는 페이지로 건너가서 주석을 해독하는 일이 정작 본문을 읽는 것보다 더 까다로우면 어떻게 하냐고.
  이런 수준의 단편을 모아놓았으면, 그것이 불과 240쪽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적당한 분량의 해설, 연표, 주석을 붙여 좀 얇은 책으로 해도 충분히 좋을 것을. 암만 생각해도 편집자의 의욕이 과했다. 솔직히 말해, “친절한 의도는 고맙다.” 근데 과했다.
  수채화 같은 단편들. 그건 보장. 수채화 좋아하시는 독자들에겐 후회 없는 선택이리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0-11-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특별히 제임스 조이스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죠?
소설을 수채화처럼 쓰는거 저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 팔스타프님 이 리뷰 읽으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진단 말이죠. 장바구니 담았습니다.

Falstaff 2020-11-11 14:02   좋아요 0 | URL
옙. 제임스 조이스 작품들하고 유사점은 특별하게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금 읽고 있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완전 조이스인 걸요. 지금 연속해서 깜짝 놀라는 중입니다.
아이구, 전 완전 아마추업니다. 읽으신 다음은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

em 2021-09-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기하게 위 댓글처럼 저도 더블린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딜런 토마스 작품은 시 몇 편과 편지 몇 통, 희곡 등 영어로만 접한 바 있는데 쉽지는 않더라고요. 번역본 중 재미있는 작품이 있을지 찾아보다가 리뷰 잘 읽었습니다.ㅎㅎ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Falstaff 2021-09-07 19:25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을 생각하시게 제가 독후감을 쓴 모양입니다. 하하하.... 하긴 아일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영국 땅이 웨일스이군요!
영어권 독자들은 이 딜런 토마스한테 껌뻑 넘어가는 모양이더라고요. 저야 뭐 극동의 변방 독자로 그것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래도 뭔가가 있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셔요!
 
올랜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4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울프는 이 책 <올랜도>를 쓰는 일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한테 감사를 표하는 ‘서문’을 제일 앞에 달았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긴 한데, 본문 뒤편에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명단을 읽어나가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조카, 언니의 아들, 줄리언 벨. 그의 가혹하지만 예리한 비판이 책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인 버네사 벨의 남편, 그러니까 형부인 클라이브 벨과 눈빛이 마주치기만 하면 스스럼없이 동침을 감행했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버네사는 남편의 애인이기도 한 양성애자, 덩컨 그랜트를 평생의 남자친구로 삼았다. 한 발 더 나가서, 버지니아 울프가 고마움을 표한 조카 줄리언은 1937년에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전사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생부가 엄마 버네사의 남편인 클라이브가 아니라 클라이브의 막역한 친구 로저 프라이 씨라고 굳게 믿었다. 줄리언의 여동생 퀜틴 역시 덩컨 그랜트 씨의 생물학적 딸이라고 했으니, 그것도 20세기 초반에, 이거 참, 대략 난감한 내력이다. 이런 내용은 지독하게 잘 생긴 청년 줄리언 벨의 열한 번째 애인 “K”양의 무척 야한 소설 <영국 연인>을 통해 알게 된 것에 불과하다. K가 알파벳의 열한 번째 철자다. 애초부터 이런 조금 덜 바람직한 가정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줄리언은 사랑과 연애에는 미친 듯이 몰두하되, 결코 결혼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자기가 어려서부터 봐 왔거든. 혼인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정은 이 책에서도 은근히 강조되는데, 그건 내가 설명하기보다 직접 읽어보시기 권하는 바이고,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버지니아 울프가 혼인제도에 대한 약한 네거티브 적 사고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당연하기도 한 것 같고 그렇다.

  작품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는 시기, 1580년대 말쯤에 열여섯 살인, 태생부터 귀족인 가문의 외아들 올랜도가 서까래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무어인들의 참수한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말기로 유명한 미남이자 무능한 장군이었던 로버트 데버루가 연속적으로 패전하기 바로 직전,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찔러 포도주를 퍼마시고는 자신의 애인이면서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여왕의 치마 속 사정(브라질리언 왁싱에 대한 시청각 경험)을 함부로 떠들고 다녀 스스로 명을 재촉하던 시기. 데버루는 결국 괘씸죄에 걸려 죽지 않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가 도마 위에 늘인 목에 망나니의 도끼를 얹었지만 그렇다고 여왕의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터. 그건 1601년 일이고, 이 시기는 데버루의 진심에 여왕이 의심을 품고 있던 때쯤으로 보인다. 이미 환갑 진갑을 넘긴 여왕의 늙은 마음이 공허할 때, 여왕은 올랜도 아버지의 성을 방문했고, 올랜도는 나무 아래서 스코틀랜드와 웨일 지역을 완상하다가 달음박질을 해 와 겨우 시간에 넘기지 않고 장미 향수가 가득 든 사발을 여왕에게 바칠 수 있었다. 근데 여왕이 보기에 열여섯 먹은 청년 올랜도가 근사했거나 귀여웠던 터. 평생 쉴 틈 없이 귀에서는 늘 대포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선 항상 독약 방울과 예리한 단도가 어른거리는 삶을 법적인 처녀 상태로 평생을 살아온 여왕이 젊은이를 간혹 옆에 둔다고 해서 어찌 큰 까탈이겠는가. 여왕은 올랜도를 런던의 왕궁에 불러 왕실 재무담당관이자 중신으로 임명하고 관직의 표지인 사슬과 발목에 가터 훈장까지 차려준다. 그리고 1588년,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 불꽃놀이를 펼치던 날 밤, 당시 관습대로 삼십 일 동안 옷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아 옷 무더기 상태인 여왕이 올랜도를 불러 얼굴을 자신의 가슴 속에 푹 파묻어 버렸다. 여왕이 올랜도에게 바라는 건 침대 위의 봉사가 아니라 노년의 아들로서 자신의 허약한 몸의 수족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 쇠락한 자신의 몸을 기댈 참나무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으나, 마음이 그랬다는 것뿐이고 진짜로 올랜도가 여왕의 방문 밖에서 어느 계집아이하고 키스하는 걸 발견하고는 왕의 칼로 거울을 내리쳐 단칼에 박살을 내버렸고, 남은 생이 끝날 때까지 남자의 배신에 대해 신음하며 온갖 한탄을 늘어놓았다고, 울프가 창작한 전기작가는 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올랜도는 세 명의 영애들과 혼담이 오간다. 클로린다는 흰 속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에 피를 쳐다보지 못하고, 식탁 위에 오른 산토끼 구이를 보자마자 졸도를 하는 데다가 혼인을 하면 남편을 개심시켜 악행을 고치겠는 말에 기겁을 해 파혼을 해버렸고, 얼마 후 천연두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두 번째는 파빌라. 가난한 신사의 딸인데, 어느 날 자신의 스타킹을 찢어놓은 스패니얼을 올랜도의 창문 아래서 채찍으로 반쯤 죽여놓는 걸 보고 그날로 파혼을 해버렸다. 이어 마지막 세 번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신생 식민지 아일랜드의 데즈먼드 가문의 딸인 유프로시니 양으로 잉글랜드 왕궁의 입장에서도 식민지 민심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혼인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으며 올랜도 역시 크게 이견이 없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있나? 때는 1608년, 영국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템스강조차 꽝꽝 얼어붙는 날씨가 연이어 계속될 때, 서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할 시절, 귀족들은 얼어붙은 템스강 위에 천막을 마치 도시처럼 치고 날마다 무도회를 벌였던 터다. 이때 올랜도 앞에 헐렁헐렁한 러시아 식 바지를 입고 기막히게 스케이팅을 하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으니 마르샤 스타니로브스카 다그마르 나타샤 일리아나 로마노비치 공주. 이 사샤 공주는 책이 끝날 때까지 자주 등장해 올랜도의 추억 속에서 기념하게 되는데, 이는 필연으로 반드시 결혼해주어야 하는 데즈먼드 가문의 딸 유프로시니 양과의 파혼을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샤 공주와 올랜도는 야반도주하기로 뜻을 합쳤고, 자정에 만나기로 했으나 그날 밤새도록 뜻밖에 내리는 비만 철철 맞으면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사샤 공주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밤새 내린 비로 해동된 템스강에 여태 정박한 러시아 함선이 유유하게 조국을 향한 항해에 나서고.

  책에서 올랜도는 7일에 달하는 잠을 두 번 잔다. 한 번은 자신이 써왔던 57편의 작품을, 짧은 시 <참나무> 한 편을 빼고, 모두 불태운 날. 당대의 시인 니컬러스 그린이란 자에게 3백 파운드의 연금을 분기별로 나누어 지급하겠다는 호의를 약속했으나 그린은 풍자시를 통해 올랜도의 작품을 더할 나위 없이 장황하며 과장된 허풍으로 일관한다고 혹평한바, 문제는 누가 그 풍자시를 읽어도 혹평을 받은 헤라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시를 올랜도가 썼다는 걸 저절로 알게 묘사를 했다는 점이다. 그래 이 풍자시의 팸플릿을 장원의 가장 더럽고 악취가 진동하는 두엄더미 속에 빠뜨려버리라고 명령을 하고, 이젠 인간들과의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한 날이다. 7일 후 잠에서 깬 올랜도는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특사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여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바스 훈장을 받고 공작 작위를 얻게 된다. 공작의 대관을 받은 날 밤에 두 번째 잠에 빠져 또다시 7일 만에 깨어 눈을 뜬 다음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니, 에그머니, 올랜도는 여자로 변신해버렸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올란도>를 보면 올랜도로 분장한 틸다 스윈톤이 나신으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까지 나는 스토리 중심으로 독후감을 썼다. 책 분량의 반도 오지 않았다. 틸다 스윈톤 주연의 영화 <올란도>도 말했는데, 이 소설은 결코 스토리를 따라가는 작품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그것을 엮어가며 읽는 사람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올랜도>의 주인공 올랜도는 대략 1570년생으로 그가 서른 살까지 남자로 살다가 갑자기 여성으로 변신해 서른여섯 살의 완숙한 여인, 아들 하나를 낳아 잉글랜드 특유의 한사상속의 한계를 피해 예전에 비하면 빈털터리가 됐으나 그래도 유유자적하게 남은 평생을 관조하면서, 시 <참나무>로 문학상을 타 상금 2백 기니를 받고 7쇄 이상을 찍는 유명 작가가 되는 1928년까지 근 360년의 대하 로망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문학과 양성, 여성과 남성에 대한 거대 에세이라고 읽는 것이 타당하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재능있는 여동생 매리가 아니라 유명 ‘남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닉 그린 씨도 자신이 오직 시작making poetry에만 몰두하기 위하여는 당시 화폐 기준으로 연 3백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게 나중엔 ‘여자’를 더 강조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변화 또는 진화하는 것. 물론 문학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인간사 거의 모든 면에 여성과 남성을 측면에서 본 것들을 조망하기 위하여 울프는 올랜도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시키지 않았나 싶다. 참 다양한 측면에서 당대의 지식인이자 부르주아가 양성을 관찰한 기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미스터 렌 - 어느 신사의 낭만적 모험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김경숙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싱클레어 루이스의 작품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렇게 두 권만 읽었으니 결코 그에 관해서 잘 안다고 할 수 없는 처지렸다. 게다가 <배빗>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두 작품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같은 작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전히 상이한 작품이라 좀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던 바, 이번에 <...미스터 렌>을 읽고서야, 역시 싱클레어 루이스는 20세기 초반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는 모습이 훨씬 어울린다고 결론을 냈다. 그렇게 결론을 내버렸다. 실제로 루이스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많은 미국 독자들이 서슴없이 <배빗>을 꼽는다고 한다.
  전에 제임스 A. 미치너의 역작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토론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소설 작가 네 명으로 허먼 멜빌, 스티븐 크레인, 이디스 워튼, 윌리엄 포크너를 꼽은 반면, 반드시 평가절하 되어야 할 작가 네 명의 명단으로 싱클레어 루이스,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을 나열한 적이 있다. 위대한 소설 작가 명단엔 그리 크게 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 가운데 (당시까지만 해도 읽어본 책이라곤 <배빗> 하나밖에 없었음에도) 루이스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어, 오히려 나로 하여금 이후 그의 작품이 눈에 띄는 대로 읽어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그렇지 뭐여? 스타인벡을 이 명단에 포함시킨 거엔 거의 분노를 했던 바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작품들, 이라기보다, <배빗>이나 <...미스터 렌> 같은 자잘한 소시민의 허위의식이나 속물성, 또는 그저 날 것의 사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들이, 소위 서사성의 부족이라든가 철학이나 역사적 소명을 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싱클레어 루이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이변이나 된다는 듯이, 이이를 ‘반드시’ 평가절하 해야 할 작가라고 단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후장대한 것은 중후장대한 것대로, 경박단소한 것은 또 경박단소한 대로의 멋이 있고 맛이 있는 법. 쉽사리 중후장대를 무기로 휘둘러 경박단소를 윽박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의미로 경박단소,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것들은 그것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충분히 심각하게 지고 평생을 살지 아니한가 말이지. 지금 당신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우, 앞뒤를 돌아보라. 거기 누가 있어 중후장대하다고 할 수 있는지. 거개가 다 그만그만하고 고만고만한, 경박단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우리네 세상살이일지어니.
  이 작품의 주인공 윌리엄 렌 씨도 ‘기념품과 장식 소품 컴퍼니’에서 월급 19 달러를 받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독신이라 업무가 끝나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월세 집에 가느니 검표원의 친절한 인사를 받는 즐거움을 누리러 5센트 극장에 가기를 더 좋아하는 서른네 살의 영업사원. 영업사원은 영업사원이지만 필드를 누비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매출 체크하고 서류를 관장하는 내근 영업직원. 그리고 아마도 숫총각이리라. 렌 씨에게도 꿈이 있다. 증기선을 타고 세상 곳곳을 여행해보는 것. 언젠가 이룰 자신의 꿈을 위해 박봉을 쪼개 조금씩 저축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관광안내 책자들을 수집해 산처럼 쌓아놓고 그 속에서 세상 각지의 모든 문물과 문명과 자연을 익혀 나간다. 오직 그것 하나, 여행. 자바 섬의 정글, 스칸디나비아의 백야, 런던 대성당, 파리 박물관 등등, 세상 각지를 순회하는 상상으로 늘 꿈속에 살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회사의 신경질적인 관리자 모티머 길포글 씨의 호출 벨 소리만 들렸다하면 총알 같이 길포글 씨의 책상 앞으로 뛰어가 무수한 질타와 함께 새로운 업무지시를 받아야 하는 형편. 그림이 훤하게 그려지시지? 맞다, 지금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 친척, 이웃이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미스터 렌은 언제나 해고의 위협을 안고 있어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리 드물지 않은 빈도로 자진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는데, 노상 이렇게 지질한 일상이 계속된다면 어디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씨는 우리의 미스터 렌에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종의 돈벼락을 쏟아 부으니, 오래 전에 돌아간 아버지가 남긴 파르테논(뉴욕의 가난한 동네 이름) 집이 팔려 940달러가 국립은행 통장에 입금 되는 일이 벌어진다. 한 방에 자신의 4년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 것. 요즘 우리나라 로또 복권이라야 1등 해봤자 실 수령액이 10억 안팎밖에 안 되지만, 전엔 한 번 터지면 4십억, 5십억도 일상 다반사였는데, 평소 지겨운 봉급쟁이한테 한 번에 5십억 원의 거금이 생기면, 그것 가지고 ‘아더매치’,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 봉급쟁이를 계속 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스터 렌 씨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아, 상습 신경질꾼 모티머 길포글 씨가 어제와 다름없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하기 싫으면 관두시든지, 짜증을 부리자, 뭐 그러지요, 마침 일신상의 이유로 하산하기로 결심을 할까 했던 바입니다, 하고 사표를 써버렸다.
  문제는 이 소심한 미스터 렌이 진짜로 유럽 여행을 하려고 하니, 말은 쉬운데 갈까 말까, 망설임이 가볍지 않은 것. 렌 씨가 가장 신경 쓴 것은 940달러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다는, 거의 강박적인 조바심. 그러던 어느 날, 렌 씨의 눈에 신문광고 구인란에서, 아주 작은 돈을 벌면서도 영국으로 갈 수 있는 경우를 발견하는데,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란 망상에 시달리는 영국인들을 위해 식육용으로 키운 소를 싣고 리버풀로 향하는 배 메리언 호를 타고, 뱃삯대신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노동을 해주면 된다는 국제 대서양 인력 센터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래 선뜻 인력 센터를 찾아가 소개비 5달러를 내고 배에 오르게 되는데, 평생 소심하고 착한 심성으로 오직 펜대만 잡아 본 미스터 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억센 공장 노동자 출신의 피트, 모자 팔던 빈털터리 팀, 모리스 패거리의 부두목 맥가버, 이들의 ‘두목 사탄’ 등의 악당들과, 7년간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다 3개월의 휴가를 받은 선량한 모튼, 그리고 유대인 늙은이들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항해를 시작한 것인데,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 두목 사탄의 지휘로 미스터 렌은 피트와 결투를 벌이게 되고, 놀랍게도 마구 휘두른 미스터 렌의 주먹이 적재적소에 꽂히는 바람에 KO 승을 거두는 일이 벌어진다. 이제부터 윌리엄 렌은 앞으로 간혹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싸움꾼의 본성이 튀어나올 때가 생기기 시작한 것. 미스터 렌이 약간 거친 모습으로 변할 때마다 싱클레어 루이스는 그를 ‘빌렌’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어째 발음이 악당 villain과 비슷한 것도 같고.
  그리하여 선한 심성과 순진한 마음을 그대로 가진 윌리엄 렌 씨가 런던에 도착하는데, 평생소원을 이룰 첫 발을 뗀 미스터 렌이 영국 곳곳, 옥스퍼드, 런던의 펍, 대동물원 등등을 전전하면서 누구를 만나고, 런던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것을 바라게 됐을까? 좋다 가르쳐드린다. 영국에서 미스터 렌은 자신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지리라고. 당신의 경우와 다른지 한 번 보시라. 첫째가 저녁에 집에 함께 갈 사람, 둘째가 동고동락하며 함께 일 할 동료. 결국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데, 미스터 렌은 영국에서 이것을 이룰 수 있을까? 혹시 미국으로 내빼는 건 아냐? 그건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노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