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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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우연하게 표지 그림이 촌스러운 <이런 이야기>를 사서, 정말 별 기대 없이 읽은 후에 무릎을 탁, 치고 나서 단박에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 <비단>도 읽었다. 이어서 여간해 선택하지 않는 ‘얇은 책’ <노베첸토> 마저 찾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바리코의 유혹적 글쓰기에 매료되었나보다. 19세기 말에 토리노 근방의 시골 진흙바닥 한 가운데에다 자동차 정비소를 세운 파르리 씨의 아들 울티모 파르리가 자동차가 아닌 ‘길’을 탐색하는 한 평생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 <이런 이야기>, 최상의 누에알을 얻기 위해 남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시베리아 스텝지역과 바이칼 호를 지나 아무르 강을 따라 드디어 태평양과 만나면 여기서 다시 네덜란드 밀수꾼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카와, 도야마, 나가타, 후쿠시마, 사라카와라에 도착해 다시 배를 타야 도착하는 섬까지 일 년에 한 번 왕복을 해야 하는 역마살 낀 인간 에르베 종쿠르의 이야기인 <비단> 역시 ‘길’이 중요한 매개물이었다. 이번에 읽은 <노베첸토>는 아예 부르주아 상류층부터 가난한 이민자들을 싣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왕복하는 배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이야기 역시 평생을 ‘바다’라는 ‘길’ 또는 ‘물의 유동성’이란 운동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왜 바르코는 자기 소설에서 이렇게 번번이 길에 집착할까, 또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까. 혹시 길, 그것을 따라 걷거나 말을 타거나, 배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비슷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의 보스턴 항구. 승객들이 모두 내린 버지니아 호의 일등실 연회장 그랜드피아노 위에 푸른 색 잉크로 ‘TD 레몬’이라고 인쇄된 상자 안에 이제 낳은 지 열흘이나 됐을까 한 갓난 사내아이가 울지도 않고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누워 있는 것을 필라델피아 출신의 엄청난 거구 흑인인 대니 부드먼이 발견해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기로 결심을 한다. 누구의 아이일까? 1900년, 유럽에서 밀려드는 가난하고 임신한 엄마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삼등 객실 안에서 낳기는 낳았지만 낯선 땅에서 도무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이를 상자에 담아, 누가 데려가 키우더라도 이왕이면 부잣집 마나님이 키우라고 일등실 전용 연회장의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을 터. 선원 노릇 일박이일 하는 게 아니라서 그 정도는 일반 상식이지만 대니 부드먼이 직접 아이를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피부색은 다르지만 진짜 자신이 아버지인 듯한 기분도 들고 그래 자기 이름을 앞에서 붙인 후, 상자 속 인쇄된 ‘TD 레몬’을 합해 아이를 ‘대니 부드먼 TD 레몬’으로 해놓고 보니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아, 제일 뒤에다가 20세기를 뜻하는 이태리 말, ‘노베첸토’를 얹어 아이의 이름을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라고 정해버린 내력이다.
  이날부터 정확하게 8년 2개월 11일 후에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배위에서 커다란 구조물이 쓰러지며 대니 부드먼의 등을 후려 갈겼고, 3일 후에 노베첸토는 두 번째로 고아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애초에 노베첸토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서류 적的 증명 한 장 없는 터이라 이번에 아이를 사우샘프턴에서 하선시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아이는 사라져버린다. 어디 갔을까. 22일 동안 배 안을 샅샅이 수색해도 아이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실족했을 거란 결론을 내리고 슬픔에 빠진 선원들이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하고 있을 때, 이틀 뒤 한밤중, 선원들은 처음으로, 노베첸토가 발을 달랑거리면서 자기가 최초 발견된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갑자기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객실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VIP들 가운데 미국의 유명 보험회사 사장 사모님은 나이트크림 위로 눈에서 흘러내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단다.
  이로부터 20년 후, 인생에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트럼펫 연주뿐이던 화자 ‘나’가 빅토리아 호의 밴드 멤버로 승선한다. ‘나’의 나이는 열일곱. ‘나’는 대니 부르먼 TD 레몬 노베첸토와 점점 친하게 지내, 이 작품 <노베첸토>의 가장 화려한 장면으로 다가간다. 폭풍우가 거센 밤, 빅토리아 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비틀거리며 복도를 배회하고 있다가 급기야 길을 잃어버릴 찰나, 슈트를 입고 완벽하게 안정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노베첸토에 이끌려 예의 일등실 연회장에 입장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노베첸토는 ‘나’에게 피아노의 바퀴 고정용 죔쇠를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이 죔쇠를 풀고 만다. 이어 자기 옆자리에 ‘나’를 앉힌 노베첸토는 큰 파도가 닥쳐 배가 기울 때마다 휙, 휙, 미끄러지는 검은 범선, 그랜드피아노를 지휘하는 선장처럼 꿈같은 연주에 골몰한다. 피아노가 중력에 이끌려 좌르륵 굴러 벽에 부딪힐 것 같은 순간, 마치 무언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확 쏠려 바퀴를 굴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굴리기를 몇 차례, 피아노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정신 나간 발레리노처럼 음울한 왈츠에 맞춰 춤추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 순간 통유리를 향한 돌진이 멈추어지지 않아 이 검은 범선, 검은 발레리노의 왈츠는 끝맺게 되고, 노베첸토와 ‘나’는 극도로 화가 난 선장에 의하여 아래층 기관실에 유폐당해 내려가며 킬킬킬 웃고 있다.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배 안에서 한 평생을 보내는 사내, 대니 부르먼 TD 레몬 노베첸토의 한 살이를 아름다운 문장과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알레산드로 바리코. 피아노 여든여덟 개의 건반으로 여태까지 없었던 음악을 연주한다는 착상까지는 누구나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폭풍우 부는 배에서 피아노의 고정용 죔쇠를 풀 생각을 했을까. 아이디어가 놀랍다.
  혹시 그랜드피아노를 이용해 담뱃불을 붙이는 방법을 아시나? 잘 하면 라면 한 봉지 정도는 끓일 것도 같은데. 정답은 책에 나와 있으니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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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부터 9월까지 읽은 책 가운데 공감하면서, 또는 감동하면서 읽은 책 열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읽은 날짜순서이며 짧은 소개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번 분기엔 대작, 장편들도 몇 있었고 독서하기 쉽지 않은 여름철이 끼어 있어서 마흔다섯 권에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핑계입니다. 그간 책 읽는 데 너무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어 책 읽기를 좀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것도 습관이라고 덜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요. 어쨌든 올해는 근 십년 만에 처음으로 200권미만을 읽는 데 성공할 거 같습니다. 좀 인간적으로 보이지요? 시작하겠습니다.


1. 알레산드로 바리코, <비단>

 

  장교가 되려고 했으나 유럽에서 누에 바이러스가 퍼지자 군문에서 나와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누에알을 구해오는 직업을 갖게 되는 에르베 종쿠르. 그러다가 전 유럽에 누에 병이 도져 이제 종쿠르는, 유럽을 관통해 유라시아 대륙, 시베리아와 스텝지역을 통과해서 바이칼 호까지 도착한 다음 아무르 강을 따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닿고, 여기서 네덜란드 밀수선을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단을 생산하는 일본의 동쪽 끝, 외딴 섬의 주인, 도주島主와 거래를 맺게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가슴에 필생의 그리움을 담을 젊은 여인, 도주의 여자와 눈길을 부딪고 절망적인 사랑을 만들게 되니, 이후 그는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를 가진 채 그리워하며 생을 보내게 되는,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아련하게 슬픈 이야기.


2. 신석정, <그 먼 나라를 아르십니까>

  20세기가 시작한지 10년이 되지 않아 출생한 176센티미터의 시인이, 그리 큰 키를 하고도 어머니와 자연과 노란 나뭇잎과 비둘기 나는 오월의 하늘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썼음에랴. 그러나 이이의 이런 퇴행적 서정시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은 물론이고 한 번의 신사참배도 하지 아니한 선비 그대로의 풍모를 견지했다가, 그 어려운 세월을 겪고 해방을 맞고, 전쟁도 보내고 시민혁명을 겪은 다음에 출현한 군사정권에서 치도곤을 당하니 이보다 서글픈 일이 어디 있으랴. 그리하여 석정은 “나와 / 밤과 / 무수한 별뿐이로다 //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라고 노래하며 자신의 시업을 마감한다.


3. 호르헤 셈프룬,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작가 호르헤 셈프룬은 스페인 공화국의 주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하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가족의 2녀 5남 가운데 똑똑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나, 만일 프랑코가 내전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바다와 같은 집안환경 덕에 애초에 용으로 비상해 가재, 붕어, 개구리를 다스리며 살았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대사로 부임할 당시 스페인 공화국은 거의 완벽하게 망조가 든 상태였으며 이들 가족은 한갓 벨기에 국경을 관리하는 세관공무원에게도 멸시의 눈짓을 받는 처지에 떨어져 있었다. 셈프룬은 네덜란드를 거쳐 스위스의 칼뱅 중학교, 파리 앙리 4세 고등학교에 재학하는데, 이 무렵의 시기를 그린 자전적 작품이다. 쉽지 않다. 역사와 철학과 신학 등이 현학적인 문장으로 갑자기 출몰하며, 구성도 시간적 배열이 아니라 작가가 생각나는 대로 앞뒤로 섞여 있어 여간한 집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름다운 회상과 문장과 안타까움이 충만하니 한 번쯤 힘든 독서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4.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망자들>

 

  첫 장을 열면 1930년대 초중반의 5월, 잘 생긴 장교가 일본식 할복을 준비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이어서 무척이나 예리하게 벼린 단도로 흰 천을 감은 자신의 단전을 푹 찌르고 엎어진 다음, 칼이 꽂힌 대장에는 무수한 통감세포가 분포되어 있는 부위인데,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칼을 상복부 쪽으로 죽 밀어 올려, 칼이 위까지 상처를 입혔는지 덩이진 피를 입으로 울컥 울컥 쏟아내며 죽어간다.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도 이렇게 죽었으니까. 그러나 이 장교의 할복 순간에는 벽에 몰래 숨겨져 있는 카메라가 잘생긴 젊은 장교의 마지막 순간을 계속 촬영하고 있었고, 일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카메라를 회수하여 즉각 인화한 다음 속달 편으로 베를린으로 보내진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전체주의 국가 독일로. 이후 작품은 베를린과 일본을 넘나들며 전개되지만, 스토리에 국한하지 않고도 충분히 즐거운 온갖 비의로 싸여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5. 니콜라 마티외,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2018년 공쿠르 상 수상작. 그러나 한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인간이, 특히 남자들이 인생 중에 가장 욕설을 많이 하는 시기가 사춘기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초반에 무수히 쏟아지는 욕설을 참고 견딜 수 있는 끈기가 필요하다. 그것만 넘으면 여러 인종들의 용광로인 프랑스에서 한 시절을 보내는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다. 내용이야 뭐 성장소설이니 뻔하겠지만, 이라고 생각하시면 오산. 이들에겐 한 시절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강도시로 지나가는 개도 백 프랑짜리 지폐를 물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젠 제철소가 문을 닫아 마티외가 준비해놓은 청소년들의 아버지들의 거의 대부분은 한 시절 같은 직장에 다니던 실업자. 여기에 부잣집 여자애들이 등장하고, 쇠락한 도시답게 마약과 마리화나가 사고 팔리는 음울한 분위기. 그러나 이렇게 남루하게 남겨진 아이들도, 성장한다.


6. 율리 체, <새해>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체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읽는 도중 사고에 대한 예감 때문에 노심초사, 그러면 안 돼, 안 돼 얘들아, 애타는 마음이 당신을 초조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크리스마스와 새해까지 이어지는 연휴에 카나리아 제도로 휴가를 온 부부. 주인공 헤닝은 아직 아내 테레자가 일어나지도 않은 새해 아침에 생각보다 무거운 자전거를 빌려 섬의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을 목표로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마음이 멀어진 것 같은 아내와 어린 아이 둘을 육아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지금 하고 있는 이 고생보다는 덜 할 것이라고, 이것만 견디면 앞으로 닥칠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 하고 페달 밟기를 멈추지 않는다. 헤닝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장애가 하나 있으니 공황발작. 이것은 예상 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난데없이 닥치는데, 저 멀고 먼 기억 속에서 헤닝은 자기도 모르는 채 근본적인 공황의 장소를 향해 근육파열을 무릅쓰고 페달을 밟고 있는 줄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 책이야말로 정말 읽어봐야 맛을 안다.


7. 베른하르트 슐링크, <올가>

 

  쓸쓸한 이야기. 부두 노동자 아버지와 세탁부 출신의 슬라브 엄마 사이에서 엄마의 이름을 이어받은 올가. 서 있게 된 때부터 서서 창 너머 언제나 무엇을 관찰하는 습관을 갖고 있던 아이는 이웃 아주머니한테 글쓰기를 배웠지만 어려서 티푸스로 양친을 모두 잃고 만다. 할머니를 따라 농촌도시로 옮겨간 올가는 도서관에 다니는 습관을 들이고, 교회 오르간 연주자한테 연주법도 배우더니 나중엔 급할 때 미사에서 반주도 할 수준이다, 음악의 나라 독일에서. 남달리 총명한 올가는 교원대학을 졸업해 교사가 되는 것이 꿈.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남매가 있어, 오빠 헤르베르트의 배려로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그나마 나은 환경을 만나 계획대로 교사가 되지만, 헤르베르트가 올가와의 결혼을 선언하자 그의 가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상속권 박탈과 의절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세월은 흐른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세상엔 되지 않는 일이 많고 많다. 올가와 헤르베르트의 사랑은 서로를 향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있었을까.


8. 토마스 만, <요셉과 그 형제들>

 

  토마스 만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긴 장편.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을 3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확장했다. 구약성서의 행간을 소설가적인 눈썰미로 파헤쳐 요란난만한 가족사를 완성한 역작. 야바위보다 더 지독한 사기행각으로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을 받아 쌍둥이 형으로부터 도망한 야곱과, 어머니 라헬로부터 물려받은 천상의 미모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받은 극도의 편애로 교만에 빠진 요셉. 그리하여 형제들에게 당한 죽음의 위협과 마른 우물 속에서 온몸이 묶인 채 사흘을 견뎌야 했던 수난. 그곳에서 구출된 일을 재탄생으로 받아들인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 환관인 궁신의 집 하인으로 들어가 왕의 오른편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신하인 경호대장의 눈에 들어 저택의 집사를 하고, 요셉의 미모에 반한 주인의 아내가 관계를 거절당하자 겁탈범의 누명을 씌워 옥에 갇혀 이번엔 3년. 예언의 능력과 형제간의 화해 등을 신화가 아닌 삶의 눈으로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장인의 솜씨. 이 책을 빼고 올해의 책읽기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9. 토머스 핀천, <브이.>

 

  8백 쪽에 육박하는 장편소설. 게다가 큰 판형. 빽빽하게 지면을 채운 글씨들. 온갖 에피소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발하게 쏟아지는 거한 만찬. 다 읽으면, 한 판 잘 때려먹었다, 감탄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오리라. 뭘 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인간이란 뜻의 슐레밀인 프로페인이 뉴욕의 하수도에 들어가 한 시절 아동들의 애완용으로 키워졌으나 이젠 거대한 크기로 자라 하수도 쥐의 씨를 말리는 위협적 생물이 된 악어 사냥을 하다가, 뉴욕 하수도의 빈 터에 가톨릭 신부가 한 시절 수도를 하던 시설을 발견하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이 책은 그 괴짜 신부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도무지 오리무중의 V.가 무엇인지 어찌 쉽게 말로 할 수 있으랴. 가르쳐드리면 안 읽을 거지? 이 가톨릭 사제의 뒤를 쫓기 위해 프로페인의 뒤를 따라가든지, 아니면 ‘모든 병든 족속’의 가장 나이 많은 멤버 로버트 스텐슬이 자기 아버지 시드니 스텐슬의 V.였을지도 모르는 빅토리아를 찾아가든지 그건 마음대로 하시라.


10. 줄리언 반스, <메트로랜드>

 

  반스의 데뷔작이자 성장소설이며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포함되어 있다고 역자 신재실은 말한다. 성장시절 가운데 16세, 21세, 30세 시점을 꼽아, 16세 시절, 런던 교외 지하철(메트로)이 운행하는 지역에서 화자 ‘나’와 절친 토니가 펼치는 귀엽고도 치기어린 지적 활극. 혈관에 바리케이트와 폭동 또는 혁명의 DNA가 세상 어느 나라보다 진하게 흐르는 프랑스의 1968년을 파리 현장에서 맞은 영국인인 ‘나’는 내적 혁명, 이라고 거창하게 부를 수도 있을 첫 번째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여생을 함께 할 운명적인 여성을 만난다. 다시 메트로랜드로 돌아온 ‘나’는 이제 완전히 청춘과 이별을 해서 어른, 이라기보다 차라리 성인의 영역으로 진입했으니 십여 년 전의 ‘나’ 크리스토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줄리언 반스는 이 작품을 발표하고 이십 년이 되지 않아 영어문학권의 대표적 소설가 또는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될지 몇 명은 알았을 터.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읽기도 편하다.



  아홉 권은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반스의 <메트로랜드>를 목록에 포함시킬까 말까를 여러 번 다시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한 자리를 놓고 궁리를 했던 작품으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로베르토 볼라뇨의 <먼 별>,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 별장, 그 후>, 조태일의 <국토>, 오르한 파묵의 <빨강 머리 여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집, 막스 프리쉬의 <안도라>,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를 대신해도 아쉽지 않을 것들이었지만 제 취향 상 반스를 선택했습니다.
  연휴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댁내 행운 가득하기 바랍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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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는 올가가 특히 읽어보고 싶네요. 와, 존재도 몰랐던 책에 대해 이렇게나 많이 알게 되네요. 저는 올가를 장바구니에 넣겠습니다!!

Falstaff 2020-09-29 09:44   좋아요 0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좀 쓸쓸한 게 계절하고도 어울리겠는 걸요. ^^

비연 2020-09-29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권 보관함에 투척!

Falstaff 2020-09-29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으셔요!

syo 2020-09-2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본 게 하나도 없어요!! 으앜ㅋㅋㅋㅋ
왜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ㅎㅎ

폴스타프님 명절 잘 쇠소서...

Falstaff 2020-09-29 11:07   좋아요 0 | URL
잘못 되긴요. 사이오님 읽은 책 가운데 아는 게 없어서 댓글을 못 달고 있는 걸요. ㅋㅋㅋㅋ
연휴 기간에 책은 그만 보시고, 노세요. 돈 떨어질 때까지 노세요. 노는 게 남는 겁니다. 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20-09-2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읽을 책들을 가네요. Falstaff님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Falstaff 2020-09-29 18:2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추천은 아니예요, 제가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분들의 취향하고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겨울 범 님도 편하게 추석 달을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mini74 2020-09-2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이 라길래 초딩때 본 파충류외계인 이야기인줄 ㅠㅠ 옛날사람입니다. 물욕을 일으키는 글이에요 ㅠㅠ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Falstaff 2020-09-29 20:30   좋아요 0 | URL
아, 초딩 때셨군요. ㅎㅎㅎ 주민등록 앞자리가 비슷하게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ㅋㅋ
근데, 이건 제 기준에 좋은 책이고요, 읽는 분과 합이 맞지 않으면 아주 경을 칠 수도 있으니 매사 불여튼튼입니다. 특히 다이아나던가요, 미모의 빵빵한 아가씨가 생쥐 한 마리를 산 채로 꿀떡 삼키는 소설 같은 거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9 20:4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다이아나랑 줄리엣의 그 브이인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ㅋㅋ

Falstaff 2020-09-29 21:21   좋아요 1 | URL
1980년대의 미국 드라마 <V>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있을 수 없는 일이야>를 대폭 각색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있을 수.....>에서는 어디를 봐도 파충류 인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전체주의 독재가 미국에서 벌어잘 수 있다는 노골적인 비유가 독특합지요. 지금 트럼프의 미국이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루이스를 읽으려면 아무래도 <있을 수 ...>보다는 <베빗>이 좀 더 낫더랍니다.
드라마에서 다이아나가 생쥐 육회 먹는 건 정말 쇼킹이었습니다. ㅋㅎㅎㅎㅎㅎ

coolcat329 2020-09-2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맞이 풍성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가위되세요~

<올가>가 제일 끌리네요.🤭

Falstaff 2020-09-29 22:03   좋아요 1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근데요,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ㅋㅋㅋ
저는 비단, 아르십니까, 찬란한 빛이여, 새해가 좋았는데, 다 취향 따름입니다.
짱고양이 님도 편안한 한가위 맞으시기 바랍니다. ^^
 
메트로랜드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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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놀랍게도 줄리언 반스의 데뷔작이다. 이 책을 써서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서머싯 몸 상을 받고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역자 신재실은 책의 해설을 통해 말한다. 동시에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읽히는 완벽한 성장소설. 주인공 잭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1963년, 1968년, 그리고 1977년을 그리고 있다.
  1963년. 화자 ‘나’이기도 한 크리스는 열여섯 살. 쌍안경을 목에 걸친 ‘나’는 노트와 필기구를 든 절친 토니와 함께 국립미술관에 가서, 그들이 좋아하는, 반다이크가 그린 말에 탄 찰스 1세의 초상화 앞에 빨간 레인코트를 입은 중년 부인이 의자에 앉아 넋을 읽고 감상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30년 안에 세계 영문학을 주름잡을 청년 작가 줄리언 반스의 데뷔작은 시작한다. 줄리언 반스와 존 파울스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로 일부러 이들의 작품을 검색해 찾지는 않지만, 검색을 했다가는 한 번에 다 사서 읽어볼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책을 고르다가 눈에 띄면 일언이폐지하고 일단 사고 보는 이들이다. 이번에도 헌책방에 들렀다가 여태 읽어보지 못한 반스가 눈에 보이기에 주저 않고 집어 들었는데 아이쿠, 이이의 데뷔작이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나’와 토니는 구석진 곳에 놓여 있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소파에 앉아, ‘나’는 망원경으로 이 부인을 묘사하면, 토니는 그것을 받아 적는다.
  “도킹? 아니면 백셧? 마흔다섯에서 쉰 정도. 구매자들이 반품한 상품. 기혼, 자녀들. 더 이상 그녀를 집안에 처박아두지 않음. 표면적 행복, 내면적 불만.”
  위의 인용이 빨간 레인코트을 입은 중년부인에 대한 셜록 홈스 식 분석의 결과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바지 앞섶이 책상모서리에 닿기만 해도 불쑥 발기가 되는 열여섯 살 최 극성 사춘기 소년이 정말 이런 묘사를 해서, 그 노트가 반스의 서랍에 남아 있어 그걸 찾아 썼을까, 아니면 책을 발표한 서른네 살(상은 발표 1년 후에 탔다.)의 반스가 도킹 아니면 백셧에 사는 중년의 부인을 떠올리며 썼을까? 나는 서른네 살의 반스에 만 원 건다. 나 역시 열여섯 살이었을 시절도 있고 서른네 살이었던 때도 있었다. 열여섯에 저렇게 쓸 수 있으면 말이 필요 없는 천재, 그러나 천재가 그리 흔한가, 어디.
  ‘나’와 토니는 전형적인 문과형 소년들. 당연히 이들과 반대쪽에 있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나’와 토니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수학의 특별 수업을 두 개 씩이나 더 듣는 괴물로 보였을 터.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거쳐 은행에 대리로 근무하게 될 거라고 단정한다. 물론 1977년, 14년이 흘러 서른 살이 되어 다시 만난 이들 가운데 은행 대리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하여튼 ‘나’ 크리스 로이드와 토니는 일찌감치 미술, 음악, 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과 언어에 관심이 많아 온갖 감각적인 상태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엄마가 만든 양면코트, 한 면은 빨간 색, 다른 면은 흑백의 체크무늬로 지어 어느 쪽으로도 입을 수 있게 만든 코트가 있었는데, 빨간 코트 상태일 때 주황색 나트륨 등 아래를 지나갈 때 코트는 빨간 색을 잃어버리고 회색으로 변한다는 걸 발견, 주황 더하기 빨강은 회색이란 결론을 내린 후 이를 확신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건 14년 후, 이제 어른, 이라기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변한지 않을 진실이기 때문. 14년이 흐르는 동안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 / 잊지 못 할 사랑을 하고 / 잊지 못할 이별도”해서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린 느낌도 실감했으며,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 지금 행복한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행복함이란 없을 것 같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동안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이거, 나트륨 등 아래에선 빨간 코트와 입술과 손톱이 갈색으로 보이는 거 하나 뿐이란 거다. 신을 믿지 않았던 소년들에겐 색깔은 최종적 가치이며 순수이어서 이것마저 어른들과 관리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기를 원치 않았었음에도.
  이들, ‘나’와 토니는 자신들이 젊기 때문에 절대 선으로 착각을 한다.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들과 다른, 불과 생각 하나가 다른 모든 연령대의 선배들을 비난하는 귀여운 시절을 거치지만 자신들의 이런 치기가 귀엽다고는 절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더 귀여울밖에.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파리 유학을 하는 시절이 딱 하필 1968년. 파리의 1968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요점은 ‘나’가 증권거래소가 소실되고, 파리국립극장이 점령되고, 비양쿠르가 점거되어 탱크가 밤새 독일국경에서부터 굉음을 내며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던 5월 내내 그곳에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영국 청년이 본 1968년의 파리는 학생들이 너무 멍청해서 제 갈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좌절했으며, 체육시설의 부족 때문에 폭동진압 경찰과의 싸움에 몰두하는 현상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단다. 스물한 살의 ‘나’는 비트 쇼몽의 원룸에 싼 방을 얻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다가 파리 체류 한 달 만에 카페에서 로렌스 더럴을 읽고 있던 애닉이란 프랑스 여성을 만나고, 즐거웠으며,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다음, 만나러 갈까 말까 잠깐 고민하고 두 번째 만나, 드디어, 세기적인 기적이여, 드디어 총각 딱지를 뗀다. 1968년 5월 25일 밤. 그러면서 ‘나’는 독자에게 묻는다. 왜? 이상한가? 남자가 자기의 동정을 잃은 날을 기억한다는 것이? 여자들은 정확하게 기억한다는데, 남자라고 기억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정말? 여자들은 자신의 동정을 없앤 날을 정확하게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기억하고 평생을 사나? 나는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거 신기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모든 여자가? 좋다, 양보해서 90퍼센트 이상의 여자들이 기억을 한다고? 우와. 여태 몰랐네.
  하여튼 파리에서 총각 딱지를 떼고, 공부를 하고, 잊지 못할 연애도 하고 실연도 당하고, 다시 이번엔 ‘잊지 못할’이 아니고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나’ 크리스토퍼 로이드는 이제 성인이 되어 런던의 메트로랜드로 돌아온다. 그동안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했으며, 무엇보다 ‘나’가 생각하는 방법 역시 훨씬 성숙해졌지만 그만큼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 그게 세월인 것을 어찌하랴. 삶인 것을. 여태 열여섯 시절과 흡사하게 생활하는 토니. 그는 적어도 ‘나’가 보기엔 여전히 불안하다. 변하지 않아서.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나’처럼 사는 것도 한 세상이요, 토니처럼 정관을 절제해버리고 평생을 자유스럽게 사는 것도 한 세상인 걸. 독자인 내가 보기에 크리스나 토니나 다 거기서 거기다. 둘 다 잘 살았고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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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28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있습니다! ㅎㅎㅎ
열린책들에서 나온 줄리언 반스 책 가운데 절판된 책이 꽤 많더라고요.

암튼 이 책 커버 벗기고 책등 한 번 보셨어요? <메트로랜드봐>라고 되어 있을 텐데 ㅋㅋㅋㅋㅋㅋ
증거 사진...
https://blog.aladin.co.kr/socker/8237959

Falstaff 2020-09-28 09:3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이 포스트 읽은 기억 납니다. 그때도 웃느라 허리가 끊어졌는데, 정작 이번엔 그걸 몰랐네요. ㅍㅎㅎㅎ
집에 가서 저도 한 번 더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절판 또는 품절된 반스의 책은 우리나라 거의 최초의 반스 전문가인 신재실 선생하고 계약이 삐긋거린 거 같습니다. 심지어 신재실 선생이 반스보다 나이가 더 들었거든요. 이런 책이 한 둘이 아니예요. 에휴....

Falstaff 2020-09-28 20:13   좋아요 1 | URL
와, 정말 있어요, 있어!!!
메트로랜드봐! ㅋㅋㅋㅋㅋㅋ
저절로 생각나는 초인 가운데 한 명, ㅋㅋㅋ 나만 바라봐! 공중부양의 달인. ㅋㅋㅋ
 
포옹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158
고지마 노부오 지음, 김상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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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에 중부 일본에서 태어나 1941년에 도교국제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징집, 중국 동북부, 즉 만주 지방으로 파병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나도 고지마 노부오의 작품은 처음 읽어볼 뿐만 아니라 이이의 이름도 ‘도쿄국제대학’이란 학교 이름만큼 신기해 위키피디어 등을 뒤져보니 그리 큰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전후 일본 문학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소설가이며,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다는 거. 위키 백과에선 이이가 일찍이 니콜라이 고골, 프란츠 카프카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1960~70년대 작가치고 이 세 소설가에게 영향 받지 않은 사람 있으면 세 명만 대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하여 결론 내기를, 일본 국내에서는 명성도 있고 문학적 성가도 있을 수 있지만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동감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작가, 정도로 알고 말기로 했다. 근데 도쿄국제대학이란 학교가 정말 있어? 궁금해마지않아 구글 검색해보니까, 있기는 있지만 신주쿠와 가와고에 시에 걸쳐 있는 학교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는데? 고지마가 졸업한 학교는 아닌 모양이다. 혹시 몰라, 전쟁 때 폭탄 맞아 문 닫았다가 20년 만에 다시 열었는지. (확인해보니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을 '도쿄국제대학'이라고 잘못 쓴 거다. 문학과지성사에 알려줘야겠다.)
  <포옹가족>은 도쿄에 있는 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다. 미와 씨 가족. 구성원은 주인공이자 영문학자이며 은근히 돈도 많은 미와 슌스케, 그의 아내 도키코,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 료이치, 중학교에 다니는 딸 노리코, 그리고 집에 들어온 후 점점 집이 지저분하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중년의 가정부 미치요. 흠. 이 작품이 나오고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점잖게 가정부 미치요를 ‘미치요 씨’, 라고 부르기로 하자. 미치요 씨, 이 집안을 미치게 만드는 최초의 단추를 누른 인물이니 충분히 ‘씨’라 불릴 자격도 있다.
  아내 도키코가 미와 씨보다 두 살이든가 연상이다. 예쁘지는 않지만 큰 골격에 시원시원하게 생긴 여사는 남편한테 단단하게 삐친 것이 있으니, 전에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를 받을 때, 미국 측에서 동부인해도 된다고 했던 것을 미와 씨가 아내의 의견을 그냥 무질러버리고 혼자 떠났던 것에 앙심을 품은 게 아직 덜 풀렸을 듯한 분위기. 짐작 하시리라.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60년대 초반의 일이니 일본에서도 이런 일은 아내가 결정은커녕 의견개진도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이젠 역전이 되어 슌스케가 아내에게 단 둘만의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를 해도, 당신처럼 재미없는 사람하고 뭐 하러 여행을 가겠느냐, 하고 타박을 하고, 얼마 전에 면허증을 땄으니 자동차나 있으면 전 가족이 자동차 여행이나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더라도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날 사람은 조지, 미치요, 료이치, 노리코를 태우면 자리가 없을 터이니 남편은 집이나 지켜야 할 팔자라고 싹 입을 닦는다. 물론 아직 자동차를 구입하지도 않았지만 차가 있더라도 말이지.
  어라? 조지? 조지가 누군가 하면, 가정부 미치요 씨가 알고 지내는 미군 군무원 헨리 씨가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영어로 가르쳐줄 겸, 외국인 친구 역할 좀 해달라고 해 승낙을 받았으나 일찍이 존 웨인과 같은 기병대 출신이라고 뻥을 친 헨리 씨가 그만 병이 나는 바람에 조카인지 뭔지 하는 젊은이 조지를 헨리 씨 대신 아이들 친구 겸해 미와 집에 기숙을 시키고 있었던 거다. 일본인들이 워낙 예의가 깍듯한지라 미군기지 병원에 입원한 헨리 씨에게 병문안을 가기로 해서, 당연히 가정부 미치요 씨가 앞장을 서고, 슌스케와 도키코, 그리고 조지가 뒤를 좇았다. 어떻게 하다가 슌스케가 얼핏 조지의 가슴팍을 쳐다보니 넥타이가 암만 봐도 도키코가 사준 것 같아 왠지 좀 망연자실 해진 경험이 있었다. 그것 뿐 아니라 늦은 시간에 조지로부터 전화가 와 슌스케가 받자 멀리 있던 도키코가 득달같이 달려와 수화기를 사납게 낚아채며, 이건 료이치에게 온 전화이니 당신은 신경을 끄라면서 과민반응을 일으키기기도 했지만, 저게 미쳤나 왜 이리 심하게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사케 한 잔 마시는 걸로 정리를 한 적도 있었다.
  슌스케가 책 출간 일 때문에 2주 만에 적지 않은 번역비와 함께 귀가했을 때는 도키코가 외출 중이었고, 아이들도 다 학교에 가서 딱 혼자 있게 되었다. 이때 미치요 씨가 은근히 슌스케에게 접근해 뭐라 하느냐 하면, “선생님, 저기 글쎄, 사모님께서…… 조지와…….” 슌스케는 체통 상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됐다고, 더는 말하지 말라고 했으나 즉각 도키코에게 전화를 해서(어디로 외출했는지는 알았나보다.) 당장 집으로 오라고 하고 점점 초조해 하더니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도키코 여사가 등장하니 일단 집 안으로 들인 다음, 도키코를 확 밀쳐 소파에 쓰러뜨리고는 “당신이 그 자식이랑 한 짓, 세 시간이나 그 자식이랑 붙어 있었어.”라고 외친 다음 왼 손으로 도키코의 머리타래를 잡은 상태에서 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세 번, 탕, 탕, 탕, 얼굴을 구타했다. 도키코가 정보의 출처를 묻자 슌스케는 ‘취재원 보호’ 또는 ‘취재원 비익권’이런 최소의 의리도 무시하고 미치요 씨의 이름을 댔으며, 미치요 씨는 또 조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도키코를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하는 의문. 이상해, 왜 조지가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슌스케가 “그놈한테 아무한테도 이걸 발설하지 말라고 말했겠지?”하고 묻자 도키코의 의문은 더해만 간다. 맞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려. 정말 떠벌였을까? 여기까지 독자도 약간 헛갈리는데, 이어지는 도키코의 결정적 고백이자 남편에 대한 요구로 확정하게 된다.
  “그 녀석, 주제에 베테랑이더라. 내가 도망치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그 사람과 많은 것을 했어.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해줘.”
  이 말, 또는 요구를 들은 슌스케. 하긴 한다. 제대로 하질 못해서 문제지만. 그래놓고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내를 흔들어 깨운 다음에 미국 연수 가기 전에 자신이 유부녀와 벌였던 불륜을 털어 놓으면서, 자신은 심지어 그 여자를 품은 순간에도 여자에 대한 사랑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고 머릿속에는 아내 생각만 가득하더란 하소연을 해버리니까, 이번에도 도키코가 반격을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 그래. 그 여자한테 한 것처럼 나한테 똑같이 해봐! 자 해봐! 못해? 아이고, 천벌을 받았구나!”
  이런 부부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있다.
  이들은 환경을 바꿔보기로 하고 시외에 땅을 사서 새 집을 짓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서양식으로 통유리 집을 짓기는 하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나 있나. 여기저기 하자가 생겨 끊임없이 자잘한 수리를 더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하루는 슌스케에게 도키코가 자기 몸의 이상을 얘기해 종합병원에 가 진찰을 해보니, 의사는 정상이라고 진단을 하고나서, 따로 슌스케를 불러 선언을 하기를 유방암이란다. 발견하기 가장 쉬우며 거의 대부분 남편에 의하여 발견되는 암인데 어찌 이렇게 진행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수 있느냐고 남편의 무심을 질타하면서. 이제 암이라는 절벽을 앞에 놓인 부부. 그들에게 한 때 벌어졌던 불륜, 아니면 적어도 한 시절의 불장난이 뭐가 대수랴.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도 양심이 있지 더 이상은 한 마디도 보태지 못하겠다.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사소설이기는 하지만 전후 모던한 기운이 보태져 그나마 읽어볼 만한 사소설. 일본식 블랙 유머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리 흥미를 끌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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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2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도서관에 신청해둔 거 내일 찾으러 갑니다! ㅎㅎ 그나마 읽을 만한 사소설이라니 더 기대합니다.

Falstaff 2020-09-27 08:22   좋아요 0 | URL
지금쯤 찾으러 가시겠군요. ㅎㅎㅎ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토리 진행이 빨라서 휙휙 넘어가더군요.

다락방 2020-09-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서점 가서 이 책 사가지고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어쩐지 제 취향의 책일 것 같아서 말이지요. 아하하하하.

Falstaff 2020-09-27 15:20   좋아요 1 | URL
흠... 전 다락방 님 취향은 아닐 거 같은데요.
제목을 제가 ˝사랑보다 더 질긴 정˝이라고 적어놓았는데 정말 쓰고 싶었던 제목은요, ˝사랑보다 더 드런 게 정˝이었답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7 15:32   좋아요 0 | URL
안...야한가요? 🙄

Falstaff 2020-09-27 16:0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전혀, 전혀 야하지 않아요. 15금도 안 될 수준입니다.

다락방 2020-09-27 16:10   좋아요 0 | URL
아..............................................................................
 
신이 되기는 어렵다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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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한 시절의 전설 비슷한 자리에 오른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공동작업. 이 형제들의 작품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과 <노변의 피크닉>에 이어 세 번째다. 두 명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 그런지 발표한 중장편만 스물일곱 편에 이르지만 우리나라에는 내가 읽은 세 권의 책만 번역되어 나왔다. 이들의 작품은 소위 ‘장르’문학으로 치는 SF 계열이라 아직까지는 읽는 사람들이 비교적 적어서였겠지만 이젠 SF 독자층도 상당한 두께를 갖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번역 작품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확실한 SF 작품. <세상이 끝날....>에서는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비밀을 풀 과학적 열쇠가, <노변의 피크닉>에선 지구를 방문했던, 놀러왔던, 외계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또는 오물을 인간이 대하는 방식 같은 것을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펼쳐놓았는데, 이번엔 한 편의 무협지를 썼다. 250명의 지구인들이 저 먼 먼 광년 떨어져 태양조차 작게 깜박이는 별로 보이는 곳에, 완전히 지구와 같은 환경에서 지구인과 같은 사람이 사는, 다만 아직 봉건시대에 머무는 별에 보내져 봉건사회가 어떻게 공산주의로 바뀌게 되는지 연구하는 학자들을 그리고 있다. 근데 무협지라고? 그렇다, 내 의견은.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은 지구인들이 22세기 정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별은 지구로 치면 약 천 년 전의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방식대로 역사가 흘러가는 수천 개의 행성 가운데 하나로, 250명에 달하는 지구인을 이 별로 파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지 인류를 돕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일개 관찰자에 불과하여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어떠한 개입도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총 대장의 이름은 돈 콘도르. 별에서의 공식 직위는 좀 거창해서, ‘소안상인공화국“이란 나라의 대법관이자 국가 인장의 수호자, 열두 무역상 협의회 부회장, 자비로운 기사단 소속 기사. 그러나 주인공은 이이가 아니라 아르카나르 나라의 난봉꾼 귀족을 참칭하는 돈 루마타, 안톤이란 본명을 갖고 있는 소련인이다.
  안톤 또는 루마타는 22세기 미래 엘리트가 갖고 있는 지식과, 수없이 단련했을 뿐더러 현지에선 적어도 3백 년이 흘러야 개발하기 시작할 눈부신 검술과 체력, ‘미다스’라고 불리는 금화(이들이 보기엔 신만 창조할 수 있는 순수한 금화)제조기,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져 창으로 결코 뚫을 수 없는 가벼운 재질의 갑옷 등을 겸비하고 있다. 심지어 대장 돈 콘도르는 헬리콥터까지 한 대 가지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그러니까 현지 사람들이 보면 신이거나 신의 수준에 달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소설 속의 인물. 복거일이 쓴 <시간 속의 나그네>의 주인공 이언오. 그는 21세기 인간으로, 26세기에 출발해서 불시착한 타임머신, 시간주머니라는 의미의 ‘시낭’ 가마우지 호를 고쳐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절름발이 과학자인데, 정작 타고 보니까 타임머신은 5백년 주기로 덜커덕, 고장을 내는 거였으니 이언오 역시 16세기 말에 불시착하고 만다. 26세기 인간은 자신으로 하여금 역사가 뒤틀려져버리기를 바라지 않아 불시착과 동시에 자살을 해버렸으나 이언오는, 내가 죽긴 왜 죽어, 라고 규정을 무시한 채 타임머신 밖으로 나와 10년 후에 닥칠 임진왜란에 대비하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건 놀라운 과학적, 사회적 지식과 딱 세 번 쓸 수 있는 비 살상 호신용 무기 한 정, 자살용 독약 키트, 가벼운 재질의 운동성 좋은 옷 한 벌이 다다. 그는 튱쳥우도(충청우도)의 총 관찰사가 되어 자본주의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이 작품도 무협지. <신이 되기는 어렵다>나 <시간 속의 나그네>나 외로이 중원을 방황하며 악의 무리를 타도하는 초고수의 맞장뜨기가 등장하지 않는 반면에 현대화된 지식을 무기로 종횡무진하기에 이르는데, 이런 것도 무협지 맞잖아?
  실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저 먼 먼 광년 떨어진 행성이 아니라 천 년 전으로 간 타임머신의 승조원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어울렸으니, 다른 행성의 인류가 지구인하고 거의 완벽하게 같다는 건 좀 무리 아냐? 천 년 전이면 12세기. 귀족과 영주를 위해 모든 평민, 노예, 상인, 기타 등등이 복무해야 하는 최고의 불평등 시대. 그들의 신은 평민들에게 상전께 말을 하라고 혀를 준 게 아니라 주인의 장화를 핥으라고 주었으며, 그것도 만일 평민의 혀가 엉뚱한 장화를 핥는다면, 그러면 그 혀는 통째로 뽑히게 되는 것이었다. 큰길은 오직 귀족들과, 귀족들에게 물자를 바치기 위한 상인들만 다닐 수 있었고 평민들은 뒷골목이나 피치 못할 경우엔 벽에 납작 붙어 움직여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돈 레바’라는 악당이 왕의 측근에 등장해 모든 지식인, 문화인, 심지어 글을 읽을 줄 아는 귀족 아닌 자들을 잡아 모진 고문 끝에 계급에 따라 교수대에 매달거나 화형에 처하거나, 목을 잘라 죽였다. 그래 모든 지식인, 학자, 문학에 종사하는 자, 심지어 회계원들은 이웃나라로 망명을 가거나 고요히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니, 혹시 이거 스탈린 시대의 문화적 박대와 분서갱유를 풍자한 거 아냐? 그랬거나 말거나, 돈 레바의 경우 말고도 경향각지에서 쉬지 않고 평민 학대와 착취과 살인이 낭자한 꼴을 22세기의 휴머니즘을 몸에 익힌 인간들이 그냥 관찰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10년 전 스테판 오스트롭스키라는 파견자, 돈 카파다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궁병 중대장으로 잠입하고 있었다가 에스토르의 마녀 18명을 공개적으로 고문하는 형리들을 보다 못해 부하들에게 저 자들을 석궁으로 쏴버려라, 라고 명령해 제국법관, 법원 간부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했다가 창에 맞아 죽은 적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 농민전쟁 연구의 권위자로 양모(양털)상인 ‘파니-파’로 위장하고 있던 카를 로젠블룸은 무리스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켜 단숨에 도시 두 개를 점령한 후, 도시를 약탈하던 농민군을 저지했다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농민반란군이 쏜 화살에 목 뒤를 맞고 절명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마타가 별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는 카이산 독재자의 벗이자 심복으로 훌륭하게 위장하고 있던 지구혁명역사 전문가 제러미 타프낫이 갑자기 궁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권력을 탈취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타프낫은 두 달 동안 동료 지구인들과 지구 측의 성난 추궁에 굳건한 침묵으로 답하며 자신이 아는 22세기 제도와 과학으로 황금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으나, 12세기 정도의 문명을 갖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미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쳐 여덟 번의 암살 시도를 운 좋게 피했지만 결국 지구인이 운영하는 연구소 재난수습팀에 체포당해 잠수함에 실려 남극의 섬 기지로 송출된 적도 있다. 이런 것들이 꼭 나쁜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정상보다 조금 더 많은 정의감을 보유한 인간들이 이런 상황을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그렇다. 우리의 안톤 씨는 하필이면 난봉꾼으로 이름이 난 루마타로 위장을 해야 하니 온갖 상류층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적어도 책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질 못한다. 자신은 비록 노력을 해서 심지어 최고 권력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 돈 레바의 정부를 꼬여 침대에 눕히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아뿔싸, 12세기 여인답게 그녀는 이도 닦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목욕은 절대로 하지 않은 채 향수만 듬뿍 뿌려, 떡이 진 머리카락과 입과 겨드랑과 샅과 발가락과, 심지어 손가락 사이에서도 꼬랑 꼬랑 피어나는 악취로 인해 도저히, 도저히, 바지는커녕 조끼조차도 벗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다. 이것으로 실제적인 최고 권력자 돈 레바와의 사이를 망가뜨린 루마타. 정말 돈 레바가 루마타와 다른 지구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종류의 탐욕스러운 악당이었을까? 오히려 욕심이 과해 누군가의 꼭두각시는 노릇을 한 건 아니었을까? 그건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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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9-24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어본적 조차 없는 저자와 그의 소설을 거침없이 읽고 리뷰 올리시는 falstaff님.
ABC의 모렐의 발명 이틀 전에 다 읽고도 어떻게 리뷰를 올릴지 몰라 미루고 있는 hnine 입니다. ㅠㅠ

Falstaff 2020-09-24 12:42   좋아요 2 | URL
전 5년 전에 <모렐의 발명>을 읽고 독후감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더군요.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 고독한 사랑 이야기. 허무하고 고독한 사랑 이야기. 그것보다 차라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