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244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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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연애소설. 무릇 소설의 꽃은 연애소설이라는데 나는 이의가 없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라도.
 책 소개 글에도 나왔듯이 작품은 1913년에 시작해 1914년에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보듯 원고는 포스터의 책상 서랍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바싹 말라가다가 “성인들 간의 합의된 동성애에 관해서는 처벌하지 말 것을 권고한” 1957년의 ‘울펜든 권고’가 법제화된 1967년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도 될까? 이제는 이 작품을 발간해도 여태 쌓아온 E.M. 포스터,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명성이 진흙탕에 쑤셔 박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간을 보다가 그가 죽고 일 년이 지난 1971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1879년에 태어나 퍼블릭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를 졸업한 영국의 상류계급, 노동하지 않거나 변호사나 금융업 등의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신사계급으로 당연히 집안에 하인과 하녀를 수다하게 거느린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19세기에 출생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수 요소인 다독,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신분에서만 나왔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포스터보다 불과 1년 늦게 태어났으며 심지어 포스터와 같은 킹스칼리지 출신의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래드클리프 홀1이 있다. 이 사람도 <모리스>와 유사한 주제의 <고독의 우물>을 써서, <모리스>를 쓴 시기와 비교해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1928년 런던의 하늘 아래 붉은 불온 삐라처럼 자신의 작품을 살포하고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당당하게’ 출판금지 처분을 접수했다. 같은 해, 포스터보다 6년 늦게 태어난 D.H. 로렌스는 동성애는 아니지만 러브씬이 대단히 끔찍하다고 외설이라는 판정을 받아 필생의 역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출판 금지의 월계관을 쓴다. 포스터는 자신의 문제작(이 될 수도 있었던) <모리스>를 세상의 법에 의거한 ‘자유로운 출판’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자유롭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신이 천국의 즐거움이 어떤 맛인가를 확인 한 다음 해에야 세상에 나오게 한 반면, 홀과 로렌스는 기존의 율법은 개나 물어가라고 외치면서 속세의 콘크리트 바닥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물론 <모리스>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연애소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연애소설의 초점은 외로움과 기다림과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것에 결판이 나고, 이 방면에 관해서 E.M. 포스터만큼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말이 쉽지 어떻게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만드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쓰는 작가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것도 “잘 생겼고 건강하고 육체적 매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둔하지만 사업능력이 있고 또 얼마간 속물”의 성향을 지닌 모리스 홀이 작품의 중후반까지 계속 유지하는 신사계급의 위선과 거만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부의 약속을 물리치고 기꺼이 사랑을 좇아 하층 계급으로 스스로 편입한다는 점에서 포스터의 (상대적으로)진보적인 시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 그날 밤 내내 그의 몸은 알렉의 몸을 갈망했다. 그는 그 욕망에 <음탕함>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직업, 가족, 친구들, 사회적 지위를 거기 맞세웠다. 이 목록에는 당연히 그의 의지도 포함시켜야 했다. 의지가 계급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가 건설해 온 문명을 산산조각 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을 위해 계급과 문명마저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작품 속에만 있는 바였으며,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포기, 또는 의도적으로 지연시킴으로 해서 자신의 진보적 운동성이 허구에 불과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런 해석이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책을 발간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작품 역시 영불해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영국 내 문화의 협소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다른 작가들과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터는 홀과 로렌스가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그들을 지지했겠지만(포스터는 1949년 영국 왕실이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정중하게 사양한 이력이 있다) 나서서, 엄혹한 영국의 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적이 있을까? 이건 내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다. 모르고, 또 의심이 들어.
 133쪽 부근에, 이미 모리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버린 클라이브 더럽, 모리스로 하여금 동성애의 즐거움으로 인도해놓고 자신은 다시 이성애의 벽 너머로 가버리면서 진정한 동성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소리만 늘어놓는 개자식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모리스를 떠났음에도 그걸 내색하지 못할 즈음, 그의 어머니 더럽 부인은 모리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라이브는 대신 여행을 해야 돼. 아메리카에 가야하고, 가능하다면 옛 대영 제국령에도 가야 해. 요즘에는 그게 필수코스처럼 굳어져 있으니.”
 “클라이브도 졸업 후에 여행을 가겠다고 해요. 저더러 같이 가자고 했어요.”
 E.M 포스터는 동성 간의 사랑을 위하여 계급과 문명 따위는 폭파해버릴 수 있어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식민지 수탈로 인한 서구 문명의 발전까지는 포기하지 못했다. 포스터는 이 작품을 써놓고 무려 46년이 지난 1960년,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2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 런던의 서재에 앉아 이 책에 관한 열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쓰면서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에 결코 한 줄의 퇴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모리스>가 좋은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혐오하며, (다른 작가와 비교해)작가적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그의 행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1. <고독의 우물>을 쓴 용감한 래드클리프 홀은 여성입니다. 요즘 '여류작가'란 말을 썼다가 꾸짖는 댓글을 여러번 받아(왜요, 남류 독자님?) 젠더에 관계없이 그냥 '작가'라고 썼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까 1920년대에 동성애 소설을 쓴 (남자가 아닌)여자 작가라는 위상이 더욱 E.M. 포스터와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래 '여류'라고 다시 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고독의 우물>은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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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사이의 식사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56
강봉덕 지음 / 실천문학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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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는 ‘시인의 말’을 싣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더 낮아진다는 것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의 말’을 길게 써놓은 시인 강봉덕. 그러나 시인이여, 세상은 시가 없어도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갈 것이며, 특별히, 시를 빙자해 교묘한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면 심지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더욱 특별하게, 껍데기들이 가 주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의 인구증가율까지 높아질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사랑하며 살게 될 거 같으니까.
 공개된 장소에 독후감을 쓰면서 난감한 일은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리 작가, 시인들의 작품에 대하여 ‘솔직하게’ 독후감을 쓰는 일이다. 몇 번 인용을 했지만 누군가가 유명 시인 김x정에게 “이게 시냐?”라고 문자를 보내자 적어도 오줌발 하나에 관해서는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시인이 “이게 시다, 씨발놈아!”라고 답글을 쓰려다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일개 독자의 독후감일망정 혹평을 하면 “xxx입니다.” 자신이 글을 직접 쓴 작가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 쉬운 얘기로 하자면, 쥐똥도 모르면서 함부로 짖지 말라는 취지의 댓글이 달리는 일이 제법 있다. 나? 당연히 나도 몇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대응하다가 이제 그런 댓글 올라오면 안면 덮고 그냥 지워버리고 말지만 절대 개운한 기분을 유지할 수 없다. 당연하지. 작품을 쓴 시인, 작가들은 나름대로 전력을 다 해 자기가 뽑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씨줄과 날줄을 엮었을 터이니. 근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읽기에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을 뿐이란 점. 내가 무식한 것도 알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유사 이래 독자의 수준이 낮은 걸 통탄해마지않았던 쥐뿔도 없는 시인, 작가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궁무진하게 많았지 않은가. 독자의 낮은 수준은 시인, 작가들이 깔고 앉아야 하는 형틀이다. 그걸 핑계로 독자의 혹독하고, 이해할 수 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비평을 비난하지 말지어다. 너희들은 똑똑한 족속이니까.
 시집의 경우엔 한 권 읽으면서 두 편의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면 횡재, 한 편의 시는 본전, 아예 없으면, 꽝이지 뭐. 이런 의미에서 강봉덕의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는 나한테는 꽝이다. 오죽했으면 독후감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것이 책의 뒤 끝에 달린 ‘시인의 말’이었겠는가.
 내 취향에 이 시집은 맞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시들에 관해 독후감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아, 이 다음에 줄줄이 써내려간 나머지는 싹 지워버렸다. 그러나 시인이여, 나는 그저 일개 아마추어 무식한 독자일 뿐이니 당신은 계속해서 시를 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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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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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의 한 밤,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최고급 호텔 메트로폴리탄의 스위트룸에 기거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뉴욕의 일간지 “브루클린 프레스”의 문화부 칼 페이트 부장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실과 내용을 뉴욕 프레스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브루클린 프레스는 1971년에 사명을 뉴욕 프레스로 바꾸고 사옥도 6번가 619번지로 이전했다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다.
 영어로 이루어진 이 날의 인터뷰 내용이 그해 나보코프가 출간한 <창백한 불꽃>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머리말,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무려 280쪽에 달하는 주석, 그리고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보코프와 페이트 부장 간의 대화의 상당한 부분이 영어를 포함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의 운율을 다루고 있어, 그 부분은 해석해 낼 도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언어 또는 문자나 단어를 가지고 노는 희문작업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을 설명하는 도중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숱하게 유사한 언어유희를 펼쳐 영어에 그리 밝지 못한 나를 단어의 늪에 빠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를 짧게 정리해 옮기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하는 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그냥 어떤 의미인지만 파악하셔야 하지, 대 문호와 뉴욕 프레스의 문화부장 간에 나눈 고차원적 문학이야기를 내가 올바로 전한다고는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나보코프는 매체와의 인터뷰를 호환 마마보다 더 싫어했다고 하는데 정말 우연히 그리고 다행스럽게 이런 기사를 구해 읽게 됐다.
 나보코프는 19세기의 끝인 189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이자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후 아버지 블라디미르 디미트리비치는 당연히 백군에 참여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당하는 바람에 크림으로 이주했고 와중에 나보코프는 1919년부터 동생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를 하면서 아버지가 현지에서 러시아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나보코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극우 집단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조국인 소비에트에서 또 다른 암살자를 보내 자신의 심장에도 총알을 박아 넣을지 아닐지, 일종의 습관성 피해망상 비슷한, 결코 병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종류의 두려움에 휩싸인 채 63세가 된 지금(1962년)까지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비교적 안전한 유럽에 살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완전하게 (테러로부터)안전한 미국시절까지 저 의식 깊숙한 곳에서 “가끔 솟아나와 찔러대는 공포”에는 대책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자신이 올해(1962년)에 출간한 <창백한 불꽃>의 기본적 발화점은 러시아 귀족집안 출신이면서 소비에트에 적대행위를 한 부친을 둔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의 집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나보코프와 칼 페이트 문화부장 사이의 대담에 무수한 언어유희가 난무해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검색해 원어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터뷰 가운데에서 유독 희문戱文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이 쓴 4부로 구성된 시 <창백한 불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보코프 본인은 이런 구성을 호프만슈탈의 희곡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염두에 두었으며, 원래는 호프만슈탈처럼 “극중극劇中劇”의 형태를 구상했으나 아예 처음부터 독자를 희롱(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내 영어수준으로 고른 최선의 단어임을 이해해주시라.)하는 것으로, 책을 쓰는 도중에 스토리 라인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영문학자 킨보트라고 명명하고 존 셰이드가 쓴 표제 시 <창백한 불꽃>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손에 넣어 책을 출간할 권리를 얻은 다음, 무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기준으로) 280쪽에 달하는 주석을 달고, 주석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했는데, 자신도 그렇게 플롯을 바꾼 다음에 읽어보니 훨씬 더 흐뭇하더라고 고백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나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 숙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마는 젬블라 왕국의 망명 폐왕廢王 ‘카를 크사베리 프세슬라프’ 이야기를 어떻게 작중 미국의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와 그의 가정사家庭事에 엮어 넣을 것인가 이었다면서, 그 해결을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요약하는 인터뷰 내용을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면에 이미 읽어보신 분은 단박에 이 독특하고 해괴망측한 소설 <창백한 불꽃>의 탄생설화를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하여간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두 시간에 걸쳐 검색을 해 찾아보고 그걸 하루 종일 해석을 해 독후감을 대신하기는 내가 가나다라 익힌 이후에 처음이다. 그만큼 <창백한 불꽃>은 좋은 의미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작품이고, 놀라자빠질 구성으로 만들었으며, 마지막 두어 페이지의 반전으로 최후의 어퍼컷을 먹인다는 것쯤은 미리 아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근데 최후의 카운터 블로우는 출간 당시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벌써 근 60년이 흘러 독서력이 좀 있는 독자들은 책의 70% 정도가 되면 마지막 반전을 눈치 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당신이 진짜로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 가지로 놀라고, 힘겹고, 심지어 짜증나다가 점점 책 속에 푹 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걸?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 위 본문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브루클린 프레스란 언론사는 있어본 적도 없고,
  뉴욕 프레스는 1988년 창간해서 2011년 폐간한 주간지이며,
  뉴욕 6번가 619번지 바로 길 건너 620번지에는 뉴욕 타임즈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나보코프가 묵었다는 호텔은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살던 "메트로폴"리탄 호텔 스위트룸 이었으며,
  신문사 문화부장 칼 페이트 역시 미치너의 <소설>에서 나오는 평론가의 이름 '칼'과 볼라뇨의 <2666>에 출연한 뉴욕 할렘가 신문 <검은 새벽>의 문화부 기자의 성姓의 합성이며,

  호프만슈탈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희곡이 아니라 오페라 대본이며,
  당연히 기사 내용 전부 다, 싹, 구랍니다.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 정말 화딱지 날 정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져서 저도 한 순간 심술이 도져 마음 먹고 구라 한 번 풀어봤답니다.
  진지하게 읽으셨다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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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1-1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킨보트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1-15 11:4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이래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닷!!! ^^

CREBBP 2020-01-2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나서 비슷한 컨셉의 리뷰의 작성을 시도했었는데, falstaff님은 해내셨네요. 그냥 여기저기 작품분석 논문들만 찾아 가며 흥미롭게 읽다가 관둔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0-01-20 11:59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반갑습니다. 한 번 써보시지요. 궁금하네요.
 
유도라 웰티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4
유도라 웰티 지음, 정소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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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유도라 웰티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현대문학사社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가 나옴으로 해서 주로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독자의 한 사람으로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물론 이이가 <낙천주의자의 딸>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은 절판 상태라 읽기가 힘들겠으나, 뜻이 있으면 다 방법이 있는 법, 올해 안에 내가 독후감 쓰고 만다. 그만큼 유도라 웰티의 작품들이 나하고 맞았다는 말이다.
 연표를 보면 웰티가 그리 많은 작품을 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1909년생인데 1943년에 첫 번째 단편집 《초록 장막》을 냈으니 당시가 34세. 43년에 두 번째 작품집 《커다란 그물》, 49년 나이 마흔에 세 번째이자 연표 상에서는 마지막 작품집 《황금 사과》를 출간한다. 이 책 《유도라 웰티 -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은 연표에 소개한 세 권의 단편집 전부를 한 권으로 묶어 번역해놓았다.
 책의 앞날개에 작가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 보면, 웰티는 “미국 남부 문학에서 포크너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미국 남부 문학”을 대도시에 기반을 둔 작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 예로 든 포크너를 위시해서 스타인벡, 캐더, 셔우드 앤더슨, 매컬러스 등을 다 망라한다 해도 이 유도라 웰티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작품으로는 더 그렇다. 웰티는 위 작가들과 비교하면 삐딱하지 않다. 적어도 ‘훨씬 덜’ 삐딱하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안정된 집안에서 곱게, 거기다가 ‘착하게’ 자라 지역 여자대학과 위스콘신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김에 뉴욕에 자리를 잡지도 않고, 어머니가 부르자마자 예스 맘, 하면서 곧바로 다시 귀향해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변변하게 해보지 못한 채 여전히 ‘곱게’ 나이 먹어가면서 열심히 촌구석 사교계 활동에 전념하며 틈틈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당연히 결혼은 선택이지만 이건 지금 논리고, 당시 쁘띠 부르주아, 특히 남부의 족보 있는 가문의 아가씨한테는 필수였음을 상기하자. 이렇게 마흔 살이 넘게 살다가 당시 미국 문학계의 큰 별이며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30번으로 책도 낸 적이 있는 선배 캐서린 앤 포터가 웰티를 방문하고자 했을 때도 늙은 딸이 더 늙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방문을 승낙했을 정도였다니 정말 ‘착하지?’ 그러니까 캐서린 앤 포터가 방문을 했을 때가 1950년대다. 아무리 남부 시골지역이라 해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펼쳐질 때임에도 웰티에게는 예외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을 듯.
 웰티의 작품은 실제 지명인지 아니면 가상지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치즈’라고 하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말이 배산임수지,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부에서 배산임수라는 건 만일 강이 범람했다하면 5마일, 그러니까 6km 떨어져있는 강에서 쳐들어 온 강물이 이층, 삼층집 지붕만 남겨두고 몽땅 잠수시켜버리는 벌판을 뜻한다. 물에 근접해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다. 땅이 워낙 크니까. 시골 사교계의 유력인사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결혼생활을 하는 대신 사진 찍기에 취미를 들려 다양한 계급, 피부색의 미국인들을 필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이런 취미활동이 이이의 단편소설들에서 특징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들어냈음직하다. 특징적 인물? 그렇다. 첫 번째 수록작 <릴리 도와 세 부인>의 주인공 릴리 도는 정신지체아로 세 명의 부인이 릴리를 시설로 보내려하지만 릴리 도는 서커스의 실로폰 연주자와 결혼을 약속한 설정을 했고, <화석인>에선 기형인畸形人을 보여주는 공연에서 하반신이 경화되어 점점 돌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네 명의 여자를 강간하고 지명수배중인 페트리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열쇠>에선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 부부, <쫓겨난 인디언 처녀 킬라>는 닭을 산 채로 잡아먹는 모습을 공연하는 내반족內反足(극심한 안짱다리) 흑인 리틀 리 로이, <클라이티>에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처녀 주인공과 뇌졸중인 아버지에다가 알코올 중독기미가 있으며 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아내가 도망친 오빠 제럴드, <늙은 마불홀씨>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저쪽에도 아들을 하나 둔 중혼자, <자선방문>에선 노인 요양소의 문제 있는 두 할머니, <어떤 외판원의 죽음>에선 심장병 있는 세일즈맨 보먼 씨에다가 <첫사랑>의 주인공 조엘 메이스는 귀머거리고, <황금소나기>의 주인공 스노디 매클레인 여사는 정상인 두 아들을 낳은 백색증, 즉 알비노, <6월 발표회>에선 로크 모리슨이란 소년은 말라리아 투병 중에다가 주인공 에크하르트 피아노 선생은 와병중인 노모를 봉양하느라 맛이 조금 간 상태여서 다음 작에선 방화범으로 현장 체포되며, <달 호수 Moon Lake> 주인공 이스터는 목에 때가 끼어 검은 줄이 생긴 고아소녀, <방랑자>에서 케이티는 뇌졸중이었다가 급기야 숟가락 놓고 만다. 내가 잠깐씩 메모 했던 것만 그렇다는 거다.
 이 많은 결손들. 이게 어디서 왔을까? 웰티가 수집해놓은 1930년대부터 약 20년간 사진을 보고 등장인물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신 스스로가 연애 못해본 마흔이 넘은 노처녀로 뭔가 결핍을 느껴 이런 사람들을 작품에 캐스팅하게 된 걸까. 그건 모르겠다. 물론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에서도 정신지체아가 등장하고 그의 시각에서 본 세상을 묘사하기는 하나 이렇듯 골고루, 다양한 결핍까지는 아니다. 반면에 이들의 일탈은 소설적 시각으로 봐서, 싱겁다. 가장 귀여운 일탈은 재미있게 읽은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에서 주인공 아가씨가 집을 나와 우체국, 전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규모의 우체국에 커튼을 치고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었고, 제일 심각한 건 <클라이티>에서 주인공의 작은 오빠 헨리가 자기 얼굴에다 총을 쏴 총알이 얼굴을 관통해 사망에 이른 것인데 소설은 작은 오빠가 죽은 한참 후부터 시작하니 엽기적 장면은 아예 등장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넘어간다.
 내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읽기에 관해서 소양이 많이 떨어지는 아마추어임에도 조금 건방지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지루함을 참는 힘이 부족한 독자들이 ‘읽어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단편소설답게 한 작품에서 시간적 배열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사람의 관점에서 저 사람의 관점으로 시각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그때그때 상황판단이 팍팍 되어야 하지만 이게 무려 본문만 830쪽에 육박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여덟 시간 내내 집중하고 있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변변한 유머 코드도 없다. 여차하면 지루함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작품씩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읽는 것이라는 건 알고는 있으나, 불행하게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여유’를 부릴 여유가 있겠는가 말이지.
 내가 읽기로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단편집 《황금 사과》, 이 책의 3부였다. 모두 일곱 개의 중단편이 들어 있고 총 356쪽이다. 무대가 미시시피주의 모개나 마을과 매클레인 카운티이며, 시간적 배경은 1900년경부터 현대(1940년대 후반)까지다. 가장 중요한 가족은 역시 매클레인 가문. 킹 매클래인이 알비노인 스노디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는데, 카운티 이름이 매클레인인 것처럼 킹의 아버지가 처음 이 동네로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단다. 그런데 킹은 스노디와의 사이에서 정상인 아들 쌍둥이를 낳고는 집을 나가 일 년이면 일 년, 삼년이면 삼년, 소식을 뚝 끊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소식 하나 없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이박삼일 간 실컷 잠을 자고나서는 또다시 사라져버리는 사이클을 단행해 동네에서 참으로 싹수없는 인간으로 호가 나버린다. 동시에 일종의 신비함이랄까 경외심이랄까 하는 것도. 이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출신 여자 피아노 선생 에크하르트와 이웃들, 킹 매클래인의 쌍둥이 아들이 소위 연작 형태의 중단편을 만든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형태의 작품은 이문구의 <우리동네>나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처럼 그냥 ‘연작장편’이라 부를 듯. 글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이 연작 가운데 <6월 발표회>이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수 있겠다. 그것 말고도 <파워하우스>도 좋았으며 <커다란 그물> 역시 인상 깊게 읽었다. 굳이 단편소설의 내용을 독후감에 써서 나중에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의 김을 뺄 수는 없다.
 내가 읽기로는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가운데 (그래봤자 완독은 이제 아홉 권뿐이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하기는 하나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고 미리 다짐을 해야 할 책. 어떠셔? 관심 돋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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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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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렌마트는 두 권의 책을 통해 희곡만 세 편 읽었다. <노부인의 방문>, <과학자들>, <천사, 바빌론에 오다>. 그러다 <판사와 형리>가 재미있다는 얘기를 듣고 찜해두었고, 이번에 읽었다. 이 책은 단편소설 두 편이 실렸다. 내가 읽은 뒤렌마트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는 상상도 못하게, 무려 추리소설이었던 거다. 표제작 <판사와 형리>는 유명매체에 의하여 죽기 전에 읽어봐야 할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 뒤렌마트 최초의 추리소설이고, <혐의>는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쓴(것 같은) 전작의 바로 후속 작품이다.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는 책을 사도 책 뒤편에 있는 간략한 소개 같은 건 절대 읽어보지 않고 무조건 본문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판사와 형리>를 중간까지 읽었음에도, 설마 뒤렌마트가 추리소설을 썼겠는가 싶어, 틀림없이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라고 확정하지 않고 독자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둔 상태로 끝날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렇다. 짐작이 아니라 단정斷定, 딱 잘라 판단해서 결정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나? 추리소설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집중해야 하고 작품 속에 조금이라도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작은 단서라고 보이는 묘사를 전부 기억해야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될까? 그리하여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노트 꺼내고 볼펜 꺼내서 수시로 메모해가며 읽는 상태, 이른바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진짜다. 그러니 이 독후감을 읽어보시고 진짜로 유명한 작품 <판사와 형리>를 읽어보실 분은 나처럼 이상한 짓 하지마시고 애초부터 추리소설인 것을 아는 상태에서 편하게 읽으시면 되겠다.
 1908년 경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의 지저분한 유대 술집에 마주앉은 스위스 사람 한스 베르라하와 국적불명의 코즈모폴리턴1 가스트만이 마주 앉아 심각하게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인간존재와 완전범죄에 대하여. 철학적 논의 끝에 결국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한 두 사람. 이들이 헤어지기 전에 가스트만은 하늘을 걸고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나는 자네 코앞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며, 그리고 내 범죄를 자네가 입증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늘을 건 내기’를 다른 말로 하면 ‘맹세oath’가 된다. 그가 맹세한 시점부터 가스트만에게는 악이 무슨 철학이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충동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만다. <판사와 형리>의 후속작인 <혐의>에서도 범죄는 허무를 행사하는 자유의지로 규정하는 바, 악의적 자유의지는 뒤렌마트의 추리소설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는 것 같다.
 이후 세월은 흘러흘러, 한스 베르라하는 콘스탄티노플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명수사관으로 성가를 높이다가 이제 고향인 스위스 베른에서 은퇴를 앞둔 경감으로 근무하고 있는 1948년 11월 3일. 트란바하 계곡 도로에 세워둔 푸른 메르세데스 안에서 정수리에 총을 맞은 베른 시경의 가장 능력 있는 형사 울리히 슈미트 경위의 시신을 순찰중인 산골 동네 경찰 알폰스 클레닌이 발견하고나서 기껏 한 짓이라고는 시체를 옆자리로 옮기고 직접 메르세데스를 운전해 베른 시경으로 가서 사망자의 상관 베르라하 경감에게 사건을 인계한 것뿐이다. 경감은 자기 보스 루치우스 루츠 박사에게 그저 마음에 둔 용의자가 있다는 말만 하고 현재 휴가 중인 찬츠 경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목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해 이제 베르라하 경감과 찬츠, 이렇게 두 명이 사건을 해결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40년 만에 나타나는 등장인물, 가스트만. 피해자가 죽임을 당한 이름 없는 산악지역 아래 넓게 퍼진 평원에 자리잡은 저택의 주인이자 슈미트 경위가 죽은 당일 밤에 호화 파티를 연 인물. 나중에 밝혀지지만 슈미트 경위는 무보수로 뮌헨대학의 교수를 하고 있는 프란틀 박사라고 자기 신분을 속이고 가스트만의 파티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망 당시 외투 속에 연미복도 입고 있어서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고. 그러나 경찰의 신분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적인 목적으로 가스트만의 저택에 잠입해 결국 죽음을 맞았다고, 모든 독자들은 생각할 수 있는데, 문제는 상당히 진도가 나갈 때까지 우리의 주인공 베르라하 경감과 가스트만 사이의 악연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점. 자, 이 독후감을 읽으신 분들은 이제 누가 슈미트 경위의 정수리에 권총을 발사했는지 감이 잡히시겠지?
 하지만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다. 이이가 그렇게 쉽게, 마치 20세기 초 영국의 탐정소설 작가들과 비슷하게 결론을 내릴까? 가스트만이 40년 전에 맹세한 것, 경감의 코앞에서 저지를 범죄를 결코 베르라하가 입증하지 못하리라는 건 실현이 됐을까? 만일 그렇다면, 베르라하는 어떤 방식으로 가스트만의 맹세를 뒤집을 수 있을까. 그리고 뒤집었다고 해도 그게 반드시 베르라하의 승리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건 일반적으로 잘 쓴 범죄소설, 추리소설의 경우의 결론일 것이고, 뒤렌마트의 <판사와 형리>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공산주의자, 집시를 가둔 수용소 안에서 마취 없는 수술을 집행했던 고문torture광 넬레 박사를 다룬 <혐의>에서 작가는 특정 범죄행위보다는 사람 혹은 미치광이가 어떤 의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혐의>에서 뒤렌마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알베르 코엔을 읽는 것처럼 화려체와 강건체를 혼합해 범죄의 당연성을 웅변하는 미치광이 집단들의 성명을 발표하는데, 아, 그만 껌벅 넘어갔지 뭐야. 뒤렌마트의 희곡만큼 좋더라, 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매우 색다르고, 색다른 만큼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다. 요새 말로 "짱"이다. 이이는 어쩌자고 쓰는 작품마다 이리 매력이 있는 걸까. 나는 얼른 뒤렌마트의 다른 책 한 권을 골라놓았다.


 

  1. cosmopolitan의 표준말이 ‘코즈모폴리턴’이란다. 여태 ‘코스모폴리탄’이라 썼다. 우리말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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