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살만 루슈디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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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만 루슈디가 쓴 일련의 작품 군을 읽고, 굳이 장르를 대보자면, 인디아 또는 파키스탄 식 붐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붐 문학’이라고 하면 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사이에 한때 유행했던 소위 마술적 리얼리즘을 일컫는데, 루슈디의 작품 속에선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은 마술도 아니다. 루슈디의 다른 작품들, 예컨대 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아 단번에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만든 <악마의 시>, 동화와 소설의 중간쯤에 위치한 <하룬과 이야기 바다>, 마술적 요소로 보면 조금 약한 <한밤의 아이들>까지 모두 이슬람 또는 인디아-파키스탄 사람이 아니라면 묘사할 수 없는 절묘, 기묘, 기상천외한 우화나 마술, 환상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글쎄, 내 경우엔 이 이슬람, 인도/파키스탄의 신비한 이야기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당최 이해하기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였던 것을 고백하고 시작하자.
 내가 생각하기에 살만 루슈디의 역작 <수치>의 가장 큰 수치는, 루슈디가 모국어가 아닌 오랜 세월 자기민족의 식민지배자였던 영국의 언어로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런 의견은 올해 들어 집중해 읽은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어 작가 아시아 제바르를 통해 공감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배자들의 언어로 하필이면 자기 민족의 “수치스러운 현대사”를 써야 했던 것이 두 번째고, 세 번째는 책의 주인공 오마르 하이얌 샤킬의 탄생과정, 그리고 나중에 샤킬의 아내가 될 수피아 지노비아 하이더의 지체장애가 마지막 수치이자 모든 수치의 청산이 되는 것으로 읽었다.
 작품의 무대는 14세기부터 15세기 까지 파키스탄의 현대사. 현대사인데 14, 15세기? 그렇다. 이슬람력歷으로 14세기는 622 + 1,300 = 1,922년부터 2,021년까지이고, 15세기는 그 후 100년 동안이란다.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고, 4부의 제목이 “15세기에는”이니 작품의 초판이 나온 1983년을 기준으로 하면 소위 미래소설이기까지 하다. 작품을 쓰던 1980년대 초반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파키스탄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라 말하기 좀 그런 수준, 이슬람의 각 계파들 사이의 공격과 테러로 치안이 불안한 나라로 구분을 한다. 그래서 책에도 두 명의 국가 원수급 등장인물이 출연을 한다. 라자 하이더와 이스칸더 하라파. 둘은 사촌 동서지간으로 한 때 미모의 유부녀 핑키 아우랑제브를 두고 대립을 하기도 했으나 주인공 오마르 하이얌 샤킬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이스칸더 하라파가 핑키도 얻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 먼저 국가의 수반이 되어, 사촌동서 라자 하이더를 육군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뭐 결국엔 이 육군 수장이 지시해 죽은 채 목이 매달리는 교수형을 받게 되지만. 이 정도면 주가 되는 굵직한 내용은 다 끝난다. 육군 수장이 쿠데타 아니면 어떻게 국가수반을 목매달 수 있나. 그렇게 해서 차기 대통령이 되는 라자 하이더 역시 좋은 팔자로 생을 마감할 수 없을 테니 줄거리는 이미 다 밝힌 것이라는 뜻. 책에서도 처음, 아니면 적어도 상당히 앞부분에 정치투쟁의 결과를 밝혀놓고 진행을 하니 지금 내가 하는 행위는 스포일러 아니……지?
 명색이 장편소설인데 위에서 이야기한 정치투쟁 하나로 된 단일 구성일 수는 없는 것. 그럼 주인공 오마르 하이얌 샤킬에 대하여 좀 알아보자. 오마르 하이얌의 할아버지 올드 미스터 샤킬이 거대한 침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지 못했을 때, 그에게는 무진장한 돈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말과 저택과 거대한 기름진 땅과 무지하게 쌓여있는 가재도구들과 세 명의 딸만 있었다. 하여간 이이가 죽자마자 차용증을 들고 들이닥친 채권자들에게 시세 이하로 평가된 부동산을 다 내주고 세 따님이 마지막으로 속세에서 벌인 일이 영국인들과 영국인들하고 친한 사람들에 국한해 초대한 초호화판 파티였다. 이날 밤, 세 따님 가운데 한 명이 임신을 하게 되고, 셋은 저택에다 무시무시한 엘리베이터를 장치한 후 집 안에 파묻혀 이후 65년 간 고요히 살게 된다. 그날부터 아홉 달 조금 넘게 지나 누구의 아이인지 밝히지 않고 태어난 인물이 바로 오마르 하이얌 샤킬. 이 아이는 한 방에 엄마 세 명을 갖게 되는 팔자를 타고 나, 애초부터 총명한 두뇌로 파키스탄 최고의 외과의사로 성장하지만, 엄마로부터 모든 행위에 대한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키워진 매우 뚱뚱한 남자로 자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대단히 건조하게 읽힌다. 루슈디가 쓴 <수치>를 읽어보면 이런 모든 장면에도 환상과 우화와 마술적 요소가 비프스테이크(거의 날고기) 위에 뿌린 소스처럼 듬뿍 배어 있어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건 지금도, 저 앞에서도, 그리고 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오마르 하이얌은 정말로 특이한 캐릭터의 주인공이다. 이이는 절대로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끌어가는 능동적 주인공이 아니다. 파키스탄의 권력과 소설책의 흐름은 위에서 말한 힘 센 작자 두 명이 죽을힘을 다 해 견인하면, 오마르 하이얌이 견인차 위에 턱,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그냥 묻어가는 구도다. 이스칸더 하라파가 유부녀 핑키 아우랑제브를 인터셉트 할 시절에는 그와 더불어 술과 여자를 비롯한 모든 환락을 같이 했고, 라자 하이더가 하리파 치하 육군총수로 힘을 기르기 시작할 무렵에는, 뇌열병(뇌염과 뇌막염으로 구분하지 못해 대강 이렇게 부르던 병)으로 정신지체가 된 라자 하이더의 큰딸 수피아 지노비아 하이더의 생명을 구해주고 그 아이가 크자 그만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고 만다.
 아, 정말 독후감 쓰기 힘들다. 써놓고 보면 재미난 텍스트를 읽고 어찌 이리 재미없게 독후감을 쓸 수 있을까 싶어 쪽팔리기 이를 데 없다. 루슈디는 책 속에서 스스로 이 <수치>는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사랑은 사랑인데 좀, 아니, 많이 살벌한 사랑 이야기. 삶의 사랑. 삶 속에서 여자와 남자의 사랑. 평생 마음속에 애정이나 증오나 권태나 진력이나 질투를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한 순간에 폭발하거나 표현하거나 실행해버리는 끔찍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한 사랑 이야기란다. 그건 책을 직접 쓴 루슈디의 의견이고, 독자인 나는 영국에서 영국의 언어로 쓴 자기 조국의 (쪽팔린)현대사를 위한 변명 같았다. 재미있다.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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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2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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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많이 읽는 서재 친구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작품. 320쪽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가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살라망카 대학의 의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살라망카 대학 졸업생으로 번쩍 떠오르는 인물이 <사랑과 교육>, <안개>를 쓴 미겔 데 우나무노, 18세기 중엽이 무대인 <운명의 힘>에서 주인공 레오노라의 오라비 돈 카를로가 떠오를 만큼 대단한 학교이다. 수재 스타일인 산토스는 외과의사 수련의 시절을 거친 후, 불과 스물일곱 살 때 산 세바스티안 정신병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왜 그의 이력을 열거하느냐 하면, 책의 주인공 페드로가 비록 외과전문의 자격증을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암이 유전되는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를 암세포를 가진 실험용 쥐를 이용해 규명하려는 (해부학과 관련한 뛰어난 손기술을 지닌)연구원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페드로가 연구원이기도 하고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외과의 자격증을 보유한 상태였다면 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었을지 모르고, 끝을 맺었더라도 만인의 동감을 얻지는 못했을 터이다.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면 아실 것이다.
 출판한 해는 1962년이지만 시간적 배경은 1949년이다. 책 속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를 대표해서 ‘한국’이 등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집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월세를 전전해야 하는 이는 ‘한국인’이라 말이 나오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유럽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거지꼴’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게 되는 기회를 만드는데, 산토스 역시 시기적 배경인 1949년과 불과 1년 차이가 나는 전쟁 시기를 잠깐 헷갈렸던 것으로 보인다.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1949년이라면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해 그리 잘난 것이 없어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내전을 일으켜 3년 동안 나라를 거덜 냈고 이어진 2차 세계대전에 은근히 독일 편을 드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번번한 상공업적 기반시설 하나를 갖추지 못한 지경에 떨어진다. 그리하여 작의 시작부분에 “가난한 민족. 누구도 다시는 노벨상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고, 다시는 지고한 왕의 미소, 위엄을 갖춘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며, 이 메마른 반도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과 강물이 넘쳐흐르기를 바라는 현자의 출현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한다. 실험에 사용해야 하는 쥐가 다 떨어졌다. 그까짓 쥐, 그러나 특별한 암 유전자를 보유한 쥐 하나를 배양하지 못해 비싼 돈을 주고 미국의 일리노이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와야 하는 쥐를 다 써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맞아 절망하고 있을 때, 그의 조수 아마도르가 말하기를 한때 연구소에서 잡일을 하던 무에카스라는 작자가 쥐를 한 쌍 집에 가지고 갔으며 (그때는 쥐가 많아 한 쌍 정도는 그냥 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사람 집엔 이 쥐들이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새장 하나에 한 마리씩 얼마든지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페드로와 아마도르가 무에카스의 집으로 떠나며 이 우화적이고, 사회 비평적이고, 무엇보다 포스트 모던한 단락들이 즐비한, 뛰어나게 매력적인 소설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를 이야기하자면, 페드로와 아마도르가 무에카스의 집에 가서 쥐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도 센 칼잡이 카르투초의 애인이자 무에카스의 큰딸인 플로리타가 쥐들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만들어 왕성한 번식을 유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여간 쥐들의 공급을 확보해놓은 것도 잠시, 한밤중에 페드로가 사는 하숙집에 무에카스가 들이닥쳐 큰딸 플로리타가 죽어간다면서 페드로를 부르러 온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누군가가 야매로 플로리타에게 소파수술을 했고, 와중에 생긴 것이 분명한 자궁벽의 천공에서 무수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어 벌써 가사상태로 들어가 있다. 이미 거의 죽은 플로리타를 관찰한 페드로, 이 외과의사 자격증이 없고 뛰어난 해부학적 손기술을 가진 연구원은 즉시 수혈과 정확한 소파수술이 필요하다는 걸 확신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간다. 물론 수혈 없이. 그리고 역시 플로리타는 죽는다. 며칠 후 공동묘지에 삼단으로 묻히고. ‘삼단’이 뭐냐고? 서양식 매장법인데, 나도 미국 드라마 <과학수사대>를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터로, 땅을 아끼느라 묘혈을 파서 관을 세 단으로 안치하는 방법이다. 며칠 후, 마드리드 과학수사대가 영장을 들고 와 다시 세 구의 시신을 꺼내고 그 가운데 플로리타의 관을 해부해본 결과 의문의 여지없이 ‘타살’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며, 의리 없는 조수 아마도르의 애매한 발언으로 페드로가 플로리타를 죽인 범인으로 체포된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책은 더 복잡한 상황들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이란 작품은 스토리만 좇아가서는 재미의 반도 낚아채지 못하는 전형적인 작품. 나는 읽어가며 페드로가 한밤중에 무에카스에 의해 잠이 깨 그의 집으로 떠나기 전쯤에, 어째 좀 익숙한, 아니면 적어도 한 번쯤 본 듯한 묘사기법이 등장한다는 걸 발견했고, 연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상당한 부분이 비슷하다고 단정을 했다. 하여간 그리 생각하면서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방의 ‘책 소개’를 보니 “주인공의 내면독백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구사한 다양한 문체로 ‘스페인의 <율리시즈>’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 나는 속물이다. 이렇게 딱 찍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씌어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기분이 으쓱하지 않겠는가. 우리 아마추어 독자들에게는 이런 것도 ‘사소한 책 읽는 즐거움’이니 그리 고깝게는 여기지 말아주시기 부탁한다.
 그렇다. <율리시즈>와 매우 흡사하다. 만일 이 책이 조이스의 그것처럼 18부, 어마어마한 분량의 번역문학이라면, 끝까지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읽어보시라. <침묵의 시간>도 기념할 만한 문학적 성과이며, 적어도 <댈러웨이 부인> 비슷하게 명작의 반열에도 올라야 한다. 독자들에게 아직도 낯설게 다가가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39세 때인 196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숟가락을 놓아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의 이른 죽음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만큼 빼어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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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별 다섯 작품이군요!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조만간 곧 읽어보겠습니다. 그 사이 이 책 품절이네요. ㅎㅎ 미리 사두길 잘했네요. ㅎㅎ 이 리뷰도 책 다 읽은 다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19-10-25 10:42   좋아요 0 | URL
옙. 이런 책 품절시키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
 
바라바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4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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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바>도 오래 전 신년 연휴가 3일일 때 거의 한 해도 빼지 않고 흑백 TV를 통해 봤던 영화다. 안소니 퀸이 타이틀 롤을 하고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아마 실바나 망가노도 출연하지 않았나 싶다. 난 그때도 유물론자 비슷한 기질로 영화를 하나도 재미없게 봤는데, 작년에 영화는 진짜 지루하게 봤던 <쿠오바디스>를 소설로 대단히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은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은근한 기대를 걸고 <바라바>를 골라 읽게 됐던 거디었던 거디다.
 책 뒤에 있는 역자 해설을 읽어보면, 작가 라게르크비스트 자신은 스스로를 “신앙 없는 신자, 종교적 무신론자”라고 칭하면서, 주인공 바라바 역시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이런 시각을 갖고 방황과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추어 독자로 드는 의심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가 완역인가, 하는 점이다. 본문이 160쪽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 결정적 작품이 바로 이 <바라바>라는 건, 그가 노벨상을 수여하는 한림원이 자리한 스웨덴 사람이라는 이유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길이가 길지 않다고 해서 책을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 책의 미덕은 성경엔 몇 줄 나와 있지 않다고 하는 산적 두목 바라바에 관한 언급을 저 멀리 로마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바라바가 늙어 로마에 도착할 당시를 다룬 책으로 1905년에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위에서 말한 시엔키에비츠의 <쿠오바디스>가 있는데, 이 <바라바>가 1951년의 노벨 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쿠오바디스>를 능가하거나 대등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막 읽기를 마치고 혹시 이 책이 라게르크비스트의 역작을 대폭 축소한 요약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중이다.
 혹시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무수하게 많이 분포하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께서 몸소 읽어보시면 하느님의 은총에 감동, 감화 받을 수 있을지는. 하지만 아직도 집 나간 검은 양에 머물고 있는 나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비록 짧기는 하지만 읽기가 매우 곤란한 경험 말고는 느낀 게 없었으니, 이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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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 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1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지음, 이난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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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하긴, 터키 작가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이 오르한 파무크 말고 없으니 이이를 몰랐다 한들 어찌 까탈을 잡힐까. 작가는 1909년생. 열네 살 때 터키 그리스 전쟁으로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에서도 중상류 부르주아 생활을 누리면서 돈 잘 버는 아버지 덕에 대학도 다니다 때려치우고 프랑스 말 좀 배워볼까 싶어 프랑스 유학도 하고, 귀국 후 교사로 취직을 하긴 했는데 하고 한 날 지각을 하는 등 심각하게 불성실해 결국 그것도 때려치운 다음 아버지의 동업자와의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제 버릇 개주나, 반년 만에, 아버지 도저히 못 해 먹겠습니다, 두 손 바짝 들고 틈틈이 써 놓은 단편소설을 묶어, 역시 아버지 돈으로 출간했다. 딱 그때를 기다렸다가 터키 병무청에서 입대영장을 발부했으나 신경성 질환이란 묘한 진단서 첨부해 병역 면제 받은 걸로 보아, 우리나라의 숱한 ‘신의 아들’ 사례에서 봤듯이, 여태 자기를 도와준 아버지가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하느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스물여덟 살 때 다시 파리로 날아가 잠깐 놀다 오기도 하는 등 전형적인 오렌지 족 스타일로 지내기도 하다, 스물아홉 살 때 아버지가 명줄을 놓자마자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사방을 둘러봐도 자기 일에 참견하는 사람 한 명 없는 완벽한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뭐든 간에 완전히 좋은 일이란 없는 법이어서 자유라는 것도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법, 자유를 딱 10년 간 누리다가 간경화 판정을 받고 마흔다섯 살 때 뱃속의 복수를 빼 약간만 불룩한 배를 지닌 채 간혼수肝昏睡 상태에서 입으로 피를 쏟으며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도 아직 남은 아버지 돈을 다 쓰지 못하고, 자기가 글 써서 번 돈도 있어 유언을 하기를, 이 돈으로 해마다 제일 잘 썼다고 평론가들이 주장하는 단편소설의 작가에게 상금과 상장을 주라고 해 아직도 ‘사이트 파이크 문학상’을 주고 있단다.
 여태까지 써 놓은 것은 그의 연표를 읽어가며 약간 심술궂게 연표를 각색해본 것이다. 왜 짓궂은 짓을 했느냐 하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사이트 파이크가 부르주아 출신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작품 <해변의 거울>부터 마지막 <필요 없는 남자>까지 모든 단편들의 주인공은 노동자, 룸펜, 유랑극단의 배우, 시골교회 신부, 집 나온 젊은 가장 등 온갖 ‘찌끄러기’들이어서, 부르주아 출신으로 섣불리 서민 코스프레 했던 오르한 파묵의 보자 장수 이야기 <내 마음의 낯섦>처럼 이야기가 전혀 서먹서먹하지 않아 사이트 파이크는 분명히 적수공권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해 소설가가 된 인물일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거다. 그만큼 그의 단편은 등장인물인 하층계급 시민들의 묘사가 친밀하다.
 이이의 단편들은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30~40년대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때론 농촌 마을까지의 모든 서민, 농민, 그 외의 가여운 것들과 부패한 사회 관습에까지 나름대로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으며, 이것을 역자 이난아는 그때까지 터키 문학이 습관처럼 따르고 있던 주류 유럽문학을 지양하여 ‘새로운 언어로 인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책을 읽은 후 여태까지 몰랐던 좋은 작가 한 명을 추가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같은 시기 우리나라 단편소설 작가들처럼 절절하게 공감하는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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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2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 작품 마음에 들더라고요. 처음 듣는 작가라서 확신이 안 서니까, 알라딘에서 미리보기로 단편 한 편 절반쯤 읽다가 마음에 들어서 책까지 샀는데(역시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하하하...-_-) 오르한 파묵보다는 제 취향입니다.

Falstaff 2019-10-22 10:1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미리보기 활용하는 거 참 좋아요. 저도 많이 즐깁니다.
사이트 파이크를 굳이 파묵하고 비교하자면, 하층민에 대한 인위적인 관심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거였어요.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요.
연표 읽어보면 성격이 장편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그거 하나 불만이었습니다. ㅋㅋㅋㅋ

CREBBP 2019-10-22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변의 거울은 조금 어려웠지만, 나중에 정말 좋은 작품들 많더라구요. 저도 처음 보는 작가였지만, 이 책 읽으면서 현대문학 단편집에 대해 더욱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모르는 사람을 알려주는 시리즈라고 ㅋ

Falstaff 2019-10-22 13: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는 한 방에 책을 20~30권 구입하고 초판 출간 순서로 읽는 버릇이 있거든요. 현대문학에서 낸 이 단편집 시리즈를 알고 난 다음엔 책 살 때마다 꼭 한 권 씩 구입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역자가 미덥지 못해 망설이는 책도 몇 권 있기도 하고요.
하여간 무척 기대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계속 출간되기 바라는데, 그렇게 되겠지요 뭐. ㅋㅋ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대지성 클래식 16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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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작품은 미국 중서부의 백인 중산층 부동산소개업자 배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속물성을 풍자한 <배빗Babbit> 딱 한 권 읽었다. 작품이 나름대로 재미있고 생각이 발칙해 귀여운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글쎄 이이가 미국문학에서 과대평가되어 있는 소설가라서 지금이라도 당장 평가절하를 해야 한다고, 미치너의 <소설>에서 평론가와 편집자가 진지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읽었지 뭔가. 그래 다른 소설의 경우는 어떤가 싶어서 사 보게 되었다. 물론 이런 평을 알게 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책방 보관함에 꿍쳐두었던 소설책이지만 하여간 결정적으로 집어 들게 된 건 그런 이유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1776년 7월, 독립전쟁에 승리함으로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후 15년이지나 1789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조지 워싱턴이 3대 대통령 추대 거절 이후 유일하게 3선을 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를 빼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선한 관습법으로 또는 1947년에 개정한 미국 수정헌법 22조에 의거하여 누구도 2선을 초과하여 대통령의 직을 수행한 사람이 없다. 한정된 권력만을 사용하게 허락함으로써 미국은 어느 대통령도 독재 정치를 행할 기반을 제거해버렸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덕인데, 이 책은 수정헌법 22조를 공포하기 전인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 조금 미치지 못한 시기동안, 미국에서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터키, 소련과 유사하게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책의 초간이 나온 시기가 1935년. 그러니 디스토피아에 입각한 미래소설, 또는 가상 역사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인터넷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는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1980년대 중반에 장안의 화제가 됐던 미국 드라마 <V>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또는 이 작품이 모멘트가 되어 만들었다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듯하고, 달리 생각하면 참 잘도 가져다 붙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930년대 초중반에 미국에서도 독재자가 발호한다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생각은, 당시 키 작은 독일의 독재자나 검은 유니폼을 입은 이탈리아의 두체, 그리고 동토의 땅에 자리한 스탈린이라는 이름의 북극곰을 관찰해서, 각개의 악마적 특징을 미국 땅에서 그대로 적용시키면 소설로 작업하기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참 독특한 아이디어이긴 했을 터이다. 1936년 겨울.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민주당 차기 대통령 지명대회에서 전 국민에게 연 5천 달러의 수입을 공약한 버질리어스 윈드립 상원의원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윈드립은 기세를 몰아 대선에서도 공화당 후보를 단방에 넉 다운 시키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데, 오랜 세월 동안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켜켜이 쌓아왔던 단어 ‘각하’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란다. 놀랄 만큼 명석한 참모 리 새러슨은 곧바로 대통령의 사병조직 미니트맨, 언제라도 대통령을 위한 출동을 대기하고 있어서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행동한다는 의미로 Minute Man들을 전국적으로 구성해 단숨에 경찰력을 장악해서 조직을 급속히 거대화하고, 국가의 행정구역을 새로 재편해 각 단위의 우두머리로 전국적 양아치들을 수집해서 한 자리씩 주고는 이름을 ‘코르포스’ 즉 'Corporate'의 약칭이자 복수형인 'Corpos'라고 칭한다. 이어서 당연한 수순으로 야당과 공산당, 유대인, 학자, 언론인, 기타 체제에 반감을 가질 소지가 높은 지식인들을 중점으로 숙청을 하고 전국에 대형 수형소를 건설해 잔인한 고문과 총살형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집행해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은 책이 시작할 때 60세로 출발하는 언론인 도리머스 재섭. 언론인이라고 해도 뉴욕이나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있는 굴지의 언론사 대표라는 말은 아니고, 지역 신문을 운영하면서 주필도 겸하고 있는 나이든 신사 정도로 생각하면 될 터. 지역사회에서 신망을 얻고 있고, 기본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취하고 있는 지식인이지만 공산주의에, 정확하게 말해 모스크바에 터를 잡고 있는 독재자 집단에게는 묘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데, 싱클레어 루이스 자신이 공산주의와 어울리기엔 너무 고상하거나 속물적인 사람이었을 듯하다. 재섭 씨는 윈드립 정권이 하는 일마다 마음에 들지 않고, 해도 너무 한다고 숱하게 불평을 하지만 성향 자체가 내놓고 웅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냥 그렇게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나날을 견디고 있는 상태. 자기 집 하인 비슷하던 덩치 크고 게으르기만 한 섀드 레듀가 하도 버릇이 없어 견디다 못해 해고하자마자, 레듀는 미니트맨에 들어가고 급기야 지역 군수 정도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사사건건 재섭을 물 먹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재섭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떨어지던 자각. 이것이 책의 주제인데, 지금의 독재 상태에서 온 국민이 겁박을 당하며, 미국이 벌일 다음 전쟁으로 수많은 미국 청년을 죽음으로 행진하게 만드는 이 모든 일이 바로 자기, 도리머스 재섭과 같은 이들, 숱한 재섭들의 책임이라는 것. 생각 속에는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책임. 이를 통감한 도리머스 재섭은 곧바로 반정부 투쟁에 들어가 지하 신문과 유인물, 소책자들을 인쇄, 배포하기 시작한다. 내용은 이하 생략.
 싱클레어 루이스는 독재정권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책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의 전부가 자신의 뇌 속에서 재구성한 그림들일 것이며, 그것들은 1935년 이전에 독일, 이탈리아, 터키, 러시아 등에서 벌어진 일을 신문이나 책에서 읽고 자기가 살을 더 붙여 만든 것이리라. 책 속의 독재 체제에 신음하는 미국 사회를 읽어보면, 멀리 갈 것까지도 없이 1980년대 중반까지의 대한민국과 현재 시점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겪어본 사람은 단박에 공감을 할 것이다. 지독한 수준의 경찰국가. 그리고 우습게도 ‘아주 조금’은 2019년의 대한민국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책이 하필 독재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미국에서 나와서 그랬을까. 한껏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숱한 죽음과 고문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째 공감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수십 년 전에 읽은 <안네의 일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혹시 작가가 반독재 투쟁에 절실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투쟁의 경험이 없어서 그랬을까? 정작 당대에 파시즘 또는 지독한 독재에 시달리던 독일, 이탈리아, 터키, 러시아에서는 이 비슷한 글은 쓸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이건 언제나 벌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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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앞에만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냥 미뤄뒀는데, 이 글 보니까 더 영영 미뤄버릴 거 같네요. 하핳하하하하 ^^;;

Falstaff 2019-10-21 10:30   좋아요 1 | URL
그냥 한 번 훑어보세요. 읽지도 않고 중고책으로 팔기는 좀 그렇잖아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