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진짜라면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1
사예신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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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나라에나 다 있지만 유독 중국에서 ‘사회활동’을 하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으로 ‘꽌시’라는 게 있다고 들었다. 꽌시가 뭔고 하니 한자어로 ‘관계關係’를 의미하는 바,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줄’ 또는 ‘배경’, 소위 ‘백그라운드back ground'와 비슷하다. 뭐 우리나라도 크게 다른 바 없어서 요새 밝혀진 것 가운데 꽌시가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놀랄만한 성과 하나를 대자면, 딱 두 주 연구에 참여한 고2 학생이 권위 있는 논문의 제1 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일 같은 거. 이 독후감을 쓰고 있는 시간이 2019년 9월 1일. 2019년 늦여름을 달구고 초가을마저 노랗게 물들일 거 같은 화제의 인물이 형조판서에 올랐는지, 미역국을 자셨는지 결판이 안 났지만, 그이의 따님도 부모 가운데 누군가의 ’꽌시‘가 없었다면 고등학생이 2주 만에 논문의 제1저자가 되는, 십육 세에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법대에 입학한 당대의 수재 아빠를 닮아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중국에서 하찮은 장사를 하던 내 형이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다못해 자기처럼 정말 사소한 사업의 경우에도 이 꽌시가 없으면 참 힘이 든다고 했을 정도니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이 드라마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한 젊은 사기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중앙의 높은 간부의 자제를 사칭하는 주인공에 접근해 꽌시를 만들려는 지방 공무원들의 구태를 희화화하고 있다. 첫 장면은 고골의 연극 <검찰관>을 관람하기 위해 빼곡하게 들어찬 극장 무대에서 단장이 등장해 연극을 시작해야 하지만 VIP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공연을 잠시 미루게 된 것을 양해해달라고 다중의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VIP가 입장하고 바로 뒤를 이어 VVIP가 등장해 드디어 막이 오르는 순간 수 명의 공안이 객석에 들어와 문제의 VVIP이자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문화혁명의 잔재인 하방 중인 지식청년이자, 한 여자를 임신시킨 리샤오장을 사기혐의로 체포해버린다. 먼저 결론을 내리고 이에 대한 과정을 보여주는 연극.
 책 뒤의 해설을 보면 작품 자체가 고골의 <감찰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해설을 보지 않더라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착한 흘레스타코프를 감찰관으로 오해한 지역 유지들이 만드는 블랙코미디가 <감찰관>. 마치 뭔가 있는 듯 거들먹거리는 리샤오장을 중앙 권력자의 막내아들로 자기들 마음대로 단정하고 이를 굳이 부인하지 않은 채 그들이 베푸는 호의를 즐기는 청년이 흘레스타코프를 빼박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감찰관>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 이에 대한 예우로 사예신이 선택한 건 작품 속에서 절찬리에 공연하고 있는 연극 작품을 고골의 <감찰관>으로 정했을 것이다. 그래 리샤오장은 ‘장샤오리’라는 가명으로 기꺼이 사기꾼이 되기로 결심을 해 본격적인 사기행각에 나서는데, 이건 모두 임신한 애인 저우밍화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저우밍화의 아버지가 아직도 지방 농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식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어느 정도인가 하면 중국에서도 뇌물용으로 쓰거나,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 기념 만찬용으로나 쓰이는 최고급 마오타이 술 선물도 다시 돌려주어버렸으니 노인네 고집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게다가 꽌시를 만들려는 지방 공무원은 한술 더 떠, 리샤오장에게 접근해 허위서류를 만드는 법, 거짓으로 말을 만드는 법까지 리샤오장에게 훈수를 두는데, 이런 모습이 읽는 독자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으니, 아직은 (굳이 포퍼의 의견을 따르지 않더라도) 열린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20세기 중국에서 이렇게 정부 공무원들을 비난해도 극작가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 그랬더니, 아니나 달라, 후반부로 접어드니 리샤오장이 자기 아빠라고 거짓말을 해댄 최고 간부 장 위원이 갑자기 베이징에서 현장을 방문해 20년 만에 지역 시의 대표 우 위원장을 만나 리샤오장의 사기행각이 백일하에 밝혀지고 급기야 앞에서처럼 체포된다. 리샤오장은 자기의 거짓 아빠 장 위원을 변호사로 위임한 상태로 재판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진짜다. 읽어보시라.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1979년 9월. 덩샤오핑이 개방정책을 펼치고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으로 아직 문화혁명의 잔재가 완전하게 벗겨지지는 않은 정서 위에, 마음속엔 아직도 홍위병의 엄혹 살벌함이 생생했던가. 제1 저자 사예신 외 2명은 또 한 편의 재미있는 블랙코미디가 될 뻔한 작품을 결국 계몽주의적 연극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어쩌랴,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은 것을.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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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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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선 주커먼. 필립 로스를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친숙한 이름이 될 수밖에 없는 유대인 작가 영감이다. 네이선 주커먼이 미국 문단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단편소설 한 편 달랑 쓴 청년작가였다는데, 이제 로스와 함께 나이가 들다보니 일흔한 살의 유명 작가 노인네가 돼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마음 고생 깨나 했지만, 뭐 그게 인생인 걸. 이 책은 어제 독후감을 쓴 존 벨빌의 <바다>와 더불어 책방 보관함에 몇 년 씩이나 장기 보관했던 것으로 이번에 변덕이 도져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름으로 봐서 전형적인 유대인인 주커먼 선생은 10여 년 전 누군지도 모를 인간(들)에게 살해위협을 지속적으로 받고 견디지 못해 뉴욕에서 약 130 마일 떨어진 아테나 대학 근처의 산골, 사방 반 마일 안쪽으로는 인가 한 채 없는 완벽한 벽촌에 박혀 지낸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립선 암 수술로 인한 요실금증상으로 늘 노인용 기저귀를 착용한 상태로 생활해야 하며 발기부전 증세 역시 남은 생애 동안 완벽하게 주커먼 노인을 지배할 예정이다. 70대에 이른 주커먼 선생의 인식 속에는 암만 생각해봐도 과도하게, 호조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발기부전 증세 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자의식은 책이 진행해감에 따라 더욱 심화 발전시켜 노인의 머릿속에 젊고 아름다운 등장인물과 엉뚱한 대화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게 반복됨에 따라 혹시 늙은 필립 로스가 이젠 글을 좀 쉽게 쓰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다.


 책을 읽으며 <유령퇴장>을 통해 저자 필립 로스 스스로 언제 죽을지 몰라 죽기 전에 반드시 남겨야 할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수행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 독후감을 쓰기 바로 직접, 구글 검색을 해보니 <유령퇴장>이 로스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었다. 이런 책은 돈 받고 팔면 안 되지. 오히려 책 찍어 놓고, 문학공부를 하는 후학들이 책을 읽어준다면 대가로 몇 푼 씩 쥐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건데, 이 책은 노 작가가 후학들에게, 자기 죽은 다음에 자기 생애나 작업 등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유언 또는 당부의 글로 읽힌다. 거기다가 대강 스토리를 입히고, 로스 특유의 맛 나는 입담을 섞어 주물럭 짬뽕을 만들어놓은 거다. 로스 특유의 맛 나는 입담이 뭐냐고? 에이, 다 아시면서. 걸쭉하게 야한 이야기들.
 그동안 필립 로스의 책 다섯 권에 대하여 독후감을 썼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포트노이의 불평>, <죽어가는 짐승>,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한 편도 빠짐없이 재미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 서쪽의 시골 촌마을에 사방 반 마일 안으로는 인가 한 채 없었는데, 어느 날, 전직 변호사이자 아직도 왕성한 생활력을 자랑하는 래리 홀리스 부부가 우연히 그 ‘반 마일’ 떨어진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다. 래리는 인생을 달관하는 경지에 이르러 오직 자신 혼자의 만년을 즐기고 있는 네이선의 삶에 자주 침투해 털이 긴 고양이 한 마리, 털이 짧은 고양이 한 마리를 고양이 용품 일습과 함께 선물하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여태까지 뭐했는지 매사추세츠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 우연히 암에 걸리고 만다. 자신의 부모가 다 암으로 죽었는데 죽는 과정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죽기까지 남은 가족들에게는 또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잘 알고 있던 래리는 스스로 딸이 결혼하기 전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자살을 해버리는데, 이 와중에도 반 마일 떨어져 살고 교류를 나눈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웃 독신남자 늙은이 네이선에게조차 유서를 남겨 촌에 묻혀 혼자 살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며 살라고 당부할 정도의 친밀한 관계 또는 오지랖을 자랑하는 남자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네이선은 3년 전부터 뉴스나 신문 등의 외부세계와 접촉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립선 수술 후의 요실금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처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마운트시나이 병원 비뇨기과 돌팔이 의사에게 처치를 받기로 하고 뉴욕으로 와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일주일 간 머문다. 처치에 관한 상담을 하고 병원 아래층에서 기억에 남는 외국인 억양을 쓰는 목소리를 우연히 발견하는데 그 여자를 가장 최근에 본 것이 48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인지 알아내 메디슨 에비뉴의 작은 식당에까지 따라간다.
 다음날 오전에 비뇨기과 처치를 받은 다음, 곧바로 요실금 증상이 없어진 듯한 마음으로 유니언 스퀘어 남쪽에 있는 헌책방 스트랜드 서점에 들러 우연히 백 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E.I. 로노프의 여섯 권짜리 단편 전집 초판본을 발견해서 산다. 집에도 한 질 있지만 뉴욕에 있는 동안 그의 작업을 연대별로 훑어보기 위해. 여섯 권을 내일 출발할 예정인 뉴욕에서 훑어본단다. (돈이 썩어난다, 썩어나.)


 다음날 예전 뉴욕 살 때 단골로 들리던 이태리 식당에 가서 밥을 먹다 4달러 50센트를 주고 산 <뉴욕 리뷰 오브 북스>를 들쳐보다가 뉴욕의 아파트와 시골집을 1년간 바꿔 살자고 제안하는 광고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드시나? 좋다 그럼 조금 바꿔보자. 광고를 낸 30대 부부는 공교롭게도 둘 다 작가 또는 작가지망생이라서 네이선을 보자마자 유명작가인 걸 알아보고 그의 작품 역시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다 읽은 상태다. 그런데 이들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가 한 명 있어서 이름을 리처드 클리먼이라 한다. 클리먼은 지금 공교롭게도 어제 네이선이 헌책 전집을 산 로노프에 관해 전기를 쓰고 있다가 평소 로노프를 동경해마지않았던 네이선이 뉴욕에 도착했다는 걸 작가부부로부터 듣고 호텔에 전화하기에 이른다. 헌책방의 아르바이트 점원 가운데 한 명도 공교롭게도 클리먼의 친구였단다. 게다가 어제 병원에서 발견한 이상한 억양의 자그마한 노파가 놀랍게도 클리먼의 동거녀 에이미였다. 클리먼보다 마흔 살이나 젊은 여인이며 그의 아내 호프로 하여금 혼인관계는 유지하되 집을 나가게 만든 이.
 이런 현상을 우리는 보통 “우연의 힘”이라고 부르고 더 진지한 사람들은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라고도 한다. 근데 불행하게도 지금 시대는 21세기.
 <유령탈출>이 2007년도 작품이며 로스는 이후에도 세 권의 책을 더 쓴다. 마지막 작품 <네메시스>까지 다 번역해 팔리고 있긴 한데, 읽지 않을 거 같다. <유령탈출>에서 이제 로스의 기력이 다 했음을 본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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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모니터링했던 책이네요 :>

그런데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그래서 예전에 썼던 리뷰를 봤네요.

그나저나 <미국을 노린 음모>는
언제나 나올 지 그것이 궁금하네요.

Falstaff 2019-09-19 15:25   좋아요 0 | URL
필립 로스가 그런 책도 썼나요?
ㅎㅎㅎ 처음 들어보는 제목입니다.

레삭매냐 2019-09-19 17:01   좋아요 1 | URL
원제는 The Plot Against America
로 2004년에 발표된 대안 역사소설
이라고 하네요.

1940년 나치주의자 찰스 린드버그가
FDR을 꺾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상
황을 그렸다고 하네요.

문둥에서 나올 예정이라는 썰이 도는
데 요원하기만 하네요.

Falstaff 2019-09-20 08:5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재미있겠습니다. 저도 은근히 기대가 됩니다.
 
러브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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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 비치’라는 자그마한 해변 휴양도시의 모나크가街, 어느 추운 날 장갑도 끼지 않은 맨 손에 신문지를 찢은 구인광고를 든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등장해 늙은 샌들러 기본즈에게 모나크가 1번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부츠를 신고 짤막한 가죽 상의만 걸친 모습을 본 샌들러 노인의 머릿속에 아가씨의 반질반질한 무릎과 허벅지가 그리 오래 자리 잡고 있게 될 지는 두 명 다 몰랐다. 아가씨의 이름은 주니어. 신문 쪼가리의 구인광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도우미, 성숙한 전문직 여성의 비서 구함. 강도는 약하지만 극비 업무. H. 코지 부인에게 지원할 것. 실크, 모나크가 1번지.”
 그리하여 주니어,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양이 히드 코지 부인의 말벗이 되기에 이른다. ‘히드 투 나이트’가 본명. 그럼 어떤 운명의 여인인지 대충 짐작은 하시겠지? ‘밤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사실 그리 복잡한 사생활을 가진 여인은 아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이런 ‘이야기 취향의 이름’을 가진 아이는 주로 흑인 하층계급 출신이었다고 미국인들은 즉각 반응을 한단다.
 히드 부인이 열한 살일 때 지금은 쇠락해 문을 닫은 코지 리조트 근처에 살며 호텔 주인 코지 씨의 열두 살짜리 손녀딸 크리스틴과 어울려 유년의 시간을 지내고는 했었나보다. 크리스틴의 엄마 메이는 천민 출신(으로 보이는) 히드와 자기 딸이 어울리는 걸 보는 일이 절대로 마땅하지 않아 될 수 있으면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앞 바닷가에 뒤집혀 있는 보트 ‘실레스티얼’에서 놀려 했는데 호텔 안에 공깃돌을 두고 온 걸 늦게 알게 됐다. 그래 히드가 냅다 호텔로 달려가 공깃돌을 찾다가 긴 복도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거한의 빌 코지 사장의 눈에 들어갔다. 빌 코지가 히드 앞에 서서 커다란 손으로 얼굴과 아이의 턱과 아직 전혀 부풀지 않은 젖꼭지 주변의 납작한 가슴을 슬쩍 쓰다듬으며 쾌활하게 웃었는데 바로 그 순간 히드는 아직 뭔지는 모르지만 사장님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스친 사실이 조금은 전율스러우면서도 간질거리기도 하고 좀 아픈 것도 같은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 크리스틴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함을 즉각적으로 깨닫는다. 그러나 바로 직전, 공깃돌을 찾으러 가는 히드를 뒤쫓아 호텔의 한 창문을 넘겨보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코지 사장이 허리춤을 풀고 여자 종업원으로부터 유사 성행위 서비스를 받는 장면을 목격해버렸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광경을 역시 히드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걸 직감처럼 느끼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건 둘의 우정이 언젠가는 금이 갈 충분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당시 홀아비 신세였던 코지 리조트의 사장 빌 코지 씨는 무수한 여인들과의 연애에도 불구하고 불과 열한 살의 아이,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히드에게 청혼을 하고, 기어이 결혼해버린다. 당시 미국 흑인사회에서 조혼이 일반적인 일이었다지만 불과 열한 살짜리 아이와 결혼하는 쉰한 살 노인은 당시에도 다분히 유아성도착증세로 의심받은 수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업 비치 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해 백인 톱클래스들과도 교분이 깊었던 코지 씨는 결혼 후에도 히드가 초경을 할 때까지 함께 침상에 들지 않았으며, 초경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신혼여행에 올랐다고 하니 변태성욕이라고까지는 하지 못할 수준이었겠다.
 그런데 이 일로 난리가 난 사람이 있었으니 빌 코지 씨의 아들 빌리보이의 아내이자 코지 씨의 과부 며느리인 메이 여사로, 코지 호텔과 저택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자기 딸 크리스틴이 상속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졸지에 크리스틴 대신 히드가 상속인으로 정해졌기 때문. 이런 상태로 4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다. 그 동안 당연히 빌 코지씨와 메이,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세상을 등졌으며, 호텔도 문을 닫아 빈 건물이 세월의 풍화작용 앞에 나날이 쇠락해가는 가운데, 코지 저택엔 예전의 소꿉동무이자 할머니-손녀 사이인 히드와 크리스틴이 서로 반목하는 중에도 묵인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이름은 주니어인데 준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부츠 신은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등장해 코지 저택에 입주하면서 온갖 사건과 과거의 기억이 다자간의 시선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토니 모리슨은 흑인 여성으로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내가 읽은 모리슨으로 <빌러비드>와 <재즈>가 있다. 두 작품 다 흑인의 정체성을 밑에 깔고 노예상태에서 탈출해 정착하는 과정을 그리거나(빌러비드), 백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혼혈아가 자신이 흑인이 아닌 백인이라 생각하여 흑인 아버지를 살해한다는(재즈) 내용이어서 <러브> 역시 흑백 문제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것도, 당연히) 생각했지만, 아니다. 미국 내의 흑인이 쓴 문학 역시 인종문제가 아닌 ‘인간문제’인 사랑, 그것도 독하고 질긴 사랑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모리슨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떤, 누구의 사랑인지는 일러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 되어야 알 수 있어, 완벽한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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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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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란 여성이 쓴 한 이란 여성의 일대기. 주인공이자 화자 ‘마수메’는 테헤란 남쪽 120km에 위치한 시아파 교도의 성지 콤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완고한 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가족 전체가 테헤란으로 이사하는데 묻어왔다. ‘묻어왔다’고? 그렇다. 전통과 종교의 굴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두 오빠가 다 큰 여자아이가 큰 도시 테헤란에 간다면 타락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삼촌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동생 파티와 단 둘이 콤의 친척집에 맡겨져 평생 차도르를 걸치고 다녀야 했을 뻔했다. 때는 이란의 팔레비 황제 즉위시절. 놀랍게도 이 때가 이란 역사상 가장 개방되었던 시절로 수도 테헤란에서는 여성들도 차도르와 히잡은커녕 맨머리에 반팔 티셔츠, 야한 색 판탈롱 바지를 입은 채 뚜껑 없는 승용차를 운전해 다닐 수 있었다. 이 시절에 한국과 이란은 각별한 관계를 맺어 테헤란에는 서울 로(路)가, 서울엔 테헤란 로가 뚫리게 된다. 기억나시지? 이런 때 시아파 성지에서 낳고 자란 10대 수구골통 이슬람 남자가 동생과 함께 테헤란에 간다는 건 말 그대로 자기가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여동생을 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하고 비슷했을 수도 있다, 라고 일단 이해하자. 어쨌거나 테헤란에 도착한 마수메는 아버지의 은덕으로 학교를 다니게 됐고, 역시 아버지의 허락으로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으로 차도르와 히잡을 대신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열여섯 살이 된다.
 여자가 여태 감추어두었던 얼굴을 드러내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드러낸 얼굴을 보고 엉뚱하게 자기 심장에 불을 붙이는 남자가 생기기 마련. 종교적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나는, 이슬람 여성은 어려서부터 하도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주입식 교육을 받아 아예 연애감정이 없거나, 능히 자기감정을 자제할 줄 알게 되는 거 아닌가, 궁금했었다. 근데 아니더라. 열여섯, 춘향이 광한루 옆에서 그네 타던 시절이 된 마수메의 가슴에도 아지랑이 속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와 테헤란 국립대학 약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며, 틈이 날 때마다 여학교 앞에 있는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잘 생긴 사이드를 발견한 순간, 그만 마수메의 오금이 탁 풀리며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거였다. 근데 알고 보니 여학생 거의 모두가 이 잘생긴 사이드한테 넋이 빠져 있었던 반면, 사이드의 눈엔 오직 콤에서 온 촌년 마수메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단계로 접어든 거다. 하지만, 아무리 개방된 팔레비 정권이라 하더라도 미혼 남녀가 남의 눈을 무시하고 둘이서 데이트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 여차하면 수십 명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니까. 그래 기껏 생각해낸다는 것이 연애편지. 나도 한 때 연애편지 대필해주고 자장면깨나 얻어먹었는데(물론 짬뽕하고 군만두도 좀 먹었다), 이들 사이의 연애편지라는 것이 기껏해야 이 정도밖에 안 됐다.
 “그대의 몸에 의사의 손길이 필요 없길,
  그대의 섬세한 영혼이 다치지 않길.“
 물론 첫 번째 편지가 이런 수준이었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좀 더 진지해지긴 하지만 둘 다 근본적으로는 이슬람의 신을 믿는 신앙인이라 내 눈엔 건전하기가 짝이 없다. 이건 뭐 부처님들도 아니고 말이야.
 세상에 비밀이 있어? 이들 사이의 편지질은 남동생 알리의 염탐질과 큰오빠 마흐메드의 눈치로 드디어 편지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여동생을 지켜야하는 의무가 있는 오빠들과 아빠는 아예 꼭지가 돌아버린다. 그 길로 (나중에 부랑자가 되어 길거리에서 객사할 운명에 처하는) 작은 오빠 아흐매드가 단도를 부여잡고 여학교 앞 약방에 쳐들어가 고향 콤에서라면 늘씬하게 초승달 모양으로 휜 단검을 사이드의 심장에 박아 넣었겠지만, 수도 테헤란에선 그랬다 하면 자신도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는 걸 충분히 이해해서, 그냥 팔뚝에 자상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거기까지? 천만의 말씀. 피가 흐르는 단도를 거머쥔 채 집에 돌아와서 이제 본격적인 폭력이 마수메의 몸에 가해지기 시작하는데, 아버지가 자리를 뜬 후다. 즉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버지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이슬람식 의미란다. 아, 사이드. 이 남자는 우리의 마수메 가슴, 그 중에서도 심장에 먹줄로 그은 초상으로 자리해, 마수메의 남은 시간 동안 절대 지워지지 않는 재 속의 잉걸불로 타오를 줄, 그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탁월하게 공부를 잘 해 집안의 자랑이었던 마수메가 이제 집안의 수치로 전락해버려 하루빨리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호적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근데 어디 쉽게 자리가 나나? 이슬람 여자인데 학교를 다녔고, 거기다가 공부로 잘했다네? 에이, 그럼 못쓰겠네. 불과 60년 전 한국에서도 여자가 똑똑하면 시집가기 쉽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하나 같이 걸려드는 것이 큰오빠처럼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눈 하나 끔벅이지 않고도 여자를 두드려 패는 습관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건달들만 꼬이는 상황. 마수메는 만사 포기하고 결혼과 동시에 목숨을 끊으려 결심을 해 나날이 초췌해지는데, 이를 불쌍하게 여기는 한 이웃 여자가 있었으니, 잔인한 작은 오빠의 정부 파르빈. 일찍이 자기보다 한 마흔 살 많은 불임의 부자 남자에게 시집을 와 한 많은 세월을 살며 외로움을 동네 깡패 아흐매드에다 대고 풀면서 살던 정 많은 여자로, 이 파르빈은 책이 끝날 때까지 적극적으로 마수메에게 호의적인 도움을 무한정으로 베풀어준다. 이 여자가 어디서 골랐는지 좋은 집안의 잘 배운 남자 하미드를 소개해 얼굴 한 번 못 본 채 결혼, 이후 아들 둘을 두고 갖은 고생을 하며 호메이니에 의한 이란 혁명을 거쳐 꼬부랑 할매가 될 때까지의 이야기.
 이 책의 독후감으로는 책의 줄거리밖에 쓸 수 없었는 바, 그건 내가 이슬람과 이슬람 국가에 대해, 작가 파리누쉬 사니이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위에 소개한 줄거리가 진짜로 책의 내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모두 10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소설의 1장만 대충 요약했을 뿐이다. 좋다, 인심 써서 책 앞, 뒤표지에도 나와 있지 않은 내용 하나를 더 말씀드리지. 우리의 마수메, 그녀가 결코 사랑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아내의 도리를 다해 평생 섬기고 산 남편 하미드는, 공산주의자였으며, 그가 꿈꾸는 혁명 후 이란은 당연히 무신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였다. 어째 좀 팔자가 드셀 거 같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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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금련 중국전통희곡총서 3
웨이밍룬 지음, 김순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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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금련과 무대, 무송 형제. 그리고 돈 많고 힘 센 매력남 서문경. 이들은 시내암의 <수호지>와 소소생의 <금병매>에 동시 출연한다. 시기별로 보면 진하, 설리, 남궁준광이 전성기를 누리던(이들이 어디서 등장하는지는 오늘의 퀴즈!) 원말명초에 쓰인 <수호지>에서 먼저 나왔고, 여기서 반금련과 서문경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거기다가 살을 붙여 명나라 때 쓴 작품이 <금병매>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수호지>를 지금 팔고 있는 책 껍데기와 다른 표지를 한 이문열의 민음사 초판으로 읽었는데, 세상에나, 당대엔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송나라 호걸영웅들이, 하다못해 최고의 인격과 학식과 덕을 지닌 주인공 송강조차, 얼마나 야만스런 행위를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내는지 깜짝 놀랐다. 그게 뭔줄 아시나? 인육, 즉 사람 고기를 포식하는 것. ‘인간은 인간에 대한 이리 상태’의 중국 버전은 ‘인간은 인간에 대한 포식자predator’일 정도다. 영양가 높은 인육을 섭취하는 방법에도 계급이 있어서, 하층민들은 사람 고기를 다져 주로 만두소로 만들어 요리를 해 먹고, 상류층은 소장과 대장을 제외한 내장기관, 즉 간, 허파, 심장 등을 후춧가루 뿌린 소금 기름에 찍어 날로, 즉, 육회로 섭생한다. 어떠셔? 군침 도셔? 아 진짜라니까. 군자에다 영웅으로 이름난 송강 선생도 원수를 잡아 죽여 생간을 소금, 참기름, 후춧가루 소스에 찍어 자셨다니까.
 살인을 저지른 친구 뇌횡을 호송하던 중 범인을 놓아준 죄로 곤장 스무 대를 맞고 창주로 유배된 영웅 ‘주동’이란 자가 있었다. 양산박에선 그의 행적과 의리와 인품을 높이 숭앙해 기꺼이 양산박으로 모시기 위해 꾀를 낸다. 주동이 원래 사람됨이 근사한데다가 학식도 높아 창주 성주가 어린 아들의 가정교사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는데, 글쎄 창주에 누가 오느냐 하면 뇌횡과 높은 이름을 떨치던 지다성 오용 선생이 떴던 거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의리가 깊은 주동이 어찌하여 도둑의 무리인 양산박에를 들어가겠는가. 그래 거절했더니, 글쎄 자기가 가르치던 성주의 아들이 사라져버린다. 주동이 아이를 찾아 헤매는데 뇌횡이 은근히 한 마디 하기를, ‘쌍도끼 이규도 함께 왔거늘 어찌 보이지 않나.’ 워낙 험악하고 잔인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은 이규가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냅다 달려갔는데, 이규는 벌써 성주 아들의 간을 꺼내 소금 기름을 묻혀 육회로 먹고 있었으며, 시체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거였다. 일이 워낙 커져 주동은 결국 양산박 패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런 일화가 무지하게 많이 나온다. 앗, 너무 <수호지>에 관한 사설이 길어졌다.
 <금병매>를 읽어보지 않아 (솔출판사 어떻게 된 거야? 망했나? 아닌데.) 어쩔 수 없이 계속 <수호지> 얘기를 좀 더 해야겠다. 거기에 ‘무송’이란 이름의 영웅이 양산박으로 들어가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양산박에 들어갔다 하면, 그이는 누가 됐건 간에 송나라의 메인 플로우에서 탈락한 아웃사이더로 생각하면 틀림없다. 잘 나가던 무인 무송이 하루는 업무 차 고향 도시에 들렀는데, 벌써 마흔다섯 살이 된 큰형 무대가 그 새 반금련이란 젊고 아름다운 여인한테 장가를 든 거다. 지금이야 마흔다섯이면 한창 때지만 송나라 시절에 사십오 세면 이미 발기부전 증상이 상당히 진전된 할배였다. 물론 이도 거의 다 빠져버렸을 거다. 고우영의 만화 <수호지>를 봐도 무대를 앞니 두 개로 특징하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래 둘 사이에, 금련이 입장에서 보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따거늘 도무지 하늘을 볼 기회가 없어 아이도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 히스테리만 늘어나던 찰나,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은 무송이 눈앞에 있으니 온몸이 근질거리지 않을 수가 있었겠느냐 이거다. 사태가 이러니 우리의 영웅 무송이 또 어찌 형수를 꾸짖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어느덧 몇 날이 흘러 무송이 떠나고 이젠 생과부 신세를 한탄만 하던 금련 앞에 돈 많고, 힘 좋고, 덩치 크고, 활수한 서문경이 등장하니 이들의 로맨스(라고 해주자)는 필수 코스였던 것. 둘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는 떡장수 무대. 어느 날 무대는 독을 먹고 픽 쓰러지더니 그 길로 횡사를 하고, 형의 부고를 들은 무송이 다시 돌아와 사태를 파악해 서문경을 때려죽이고, 금련을 칼로 쪼개 죽이고 자신은 스스로 잡혀 귀양을 가던 중 어찌어찌 해서 양산박 도둑떼에 들게 된다.
 너무 내용을 자세하게 얘기한다고? 천만의 말씀. 이 내용을 알고 있어야 중국 전통 가극인 천극川劇과 월극越劇, 80년대 디스코, 서양의 오페라 등이 마구 섞이고, 등장인물도 송나라 시절 무대, 무송, 반금련, 서문경, 80년대 중국 소설의 주인공인 ‘여사사’, 배나온 대머리 브론스키 백작을 죽자고 사랑해 공작duke 남편과 새끼까지 버리고 집을 뛰쳐나온 안나 카레니나마저 등장하는 신 전통희곡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 여사사가 사실상 희곡을 교통정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읽었는데, 반금련의 행위가 현대의 관점에서 정말로 죽을죄인지, 아니, 죄이기나 한 것인지 새로이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망라한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자소서를 읽고 자기 방식대로 노래하고 춤도 추고, 반금련의 행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근데 내 생각엔, 옛날 것은 옛날 것으로 그냥 좀 내비두면 안 될까, 했다. 꼭 지금의 규범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하긴, 그건 극작가 마음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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