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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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우리나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우루과이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으로 언론인 겸 시인, 소설가라고 한다. 책 뒤에 실린 역자의 작품해설을 보면, “베네데띠는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바르가스 요사, 까를로스 푸엔떼스 같은 붐 소설가들에 대해 ‘그들은 보편 문화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계급을 대변하며,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보통 사람들을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단다. 여러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문장. 마르케스, 요사, 푸엔테스로 대표하는 아몰랑주의 문학, 즉 ‘붐 소설’들은 라틴아메리카의 보편계급이 향유하는 문화에 접근하긴 하는데, 성분이 ‘특권계급’이라서 진정한 보통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뜻. 실제로 요사의 경우엔 정도가 좀 약하기는 하지만, 마르케스나 푸엔테스, 심지어 이들의 15년 정도 후배인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소위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적인 요소가 베네데띠의 <휴전>에선 완전히 제거됐다. 비록 보통사람들의 문학을 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이들의 계급이 상류, 적어도 인텔리 계급이라 “진정한 보통사람들”을 대변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는 한다. 작가 마리오 베네데띠는 집안이 어려워져 14세 때부터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하며 문학청년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책의 앞날개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이 책 <휴전>을 발표한 1959년까지는 경제적으로 “진정한 보통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산 것 같다.
 이 책 초간본이 나온 것이 1960년,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 1959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였다. 1877년생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인가에서 보면 나이 서른에 달하니 이제 자신에게서 청춘이 물러갔다고 선언한 바 있다. 서양인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아직 젊은 나이의 마리오 베네데띠는 책상 위 원고에서 스스로 나이를 스무 살이나 위로 올려버린다. 자신이 젊어서 일을 해봤던 자동차 부품회사의 회계사무실의 한 고참 부장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스스로 나이를 올렸건 나이 많은 고참 직원을 모델로 했건 그건 작가의 자유니까 좋은데, 이 놀라운 스물아홉 살 청년 베네데띠는 정년퇴직을 6개월 28일 남긴 늙은 직원의 심리상태를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해놓았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도 낼 모레가 정년이니까 알지.
 1950년대 말의 우루과이. 당시엔 법정 정년이 만 50세였다고 책의 주석에 적혀있다. 그러니 주인공이자 마흔아홉 살의 홀아비 마르띤 산또메가 이제 ‘겨우’ 마흔아홉의 나이로 죽는 시늉을 하고 있다고 흉볼 건 없다. 당시 세계의 평균수명을 보면 상당한 노년이었음 직하니까. 책은 21세기 현재 우리나라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작은 규모의 팀장 정도를 수행하는 마르띤 산또메의 일기로 이루어졌다. 20년 전에 먼저 간 아내 이사벨과의 사이에 맏아들 에스떼반이 있고, 가운덴 딸 블랑까. 그 아래로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하이메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가족에게 커밍아웃하고 집을 나가버린다. 에스떼반은 줄을 탔는지 뇌물을 줬는지 하여간 낙하산을 타고 보통의 우루과이 사람들이 보기엔 높은 자리의 공무원으로 있다. 머리통이 다 굵은 두 아들과 딸 하나와 삐걱거리는 가정생활. 산또메 씨가 잘못 생각한 거다. 딸은 당시 규범으로 집에서 함께 살 수는 있어도 제 밥벌이 하는 아들 둘은 잽싸게 내쳐 독립을 시켰어야지. 새도 새끼들이 웬만큼 자라면 서둘러 날갯짓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향해 처녀비행을 시키지 않던가. 이를 ‘삭비數飛’라 하지 아마.
 산또메 씨의 일기에 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자동차 부품회사 경리부라는 보통사람들의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화들. 사장 딸과 연애하며 승승장구하는 직원 수아레스. “몇몇 사업가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직원들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사회 최고참 임원, 수아레스에게 승진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며 틈날 때마다 그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는 고참 직원 등등. 이들이 벌이는 나름대로 귀여운 계교와 수작들 역시 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또메 씨의 학창 시절 친교를 나누었던 동창들 역시 작지 않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일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스물네 살의 신입사원 라우라 아베야네다 양과의 연애 이야기다.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다섯. 입사하고 한 보름쯤 일기엔 “날 부를 때면 언제나 눈을 깜박거린다. 미인은 아니다. 뭐, 웃는 모습은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게 어딘가.”하며 좀 시니컬하게 적어놓았다. 그 후 약 한 달이 지난 4월 10일에는 “아베야네다에겐 어딘가 끌리는 데가 있다. 확실하다. 대체 그게 뭘까?”로 한 계단 올라서더니 또 한 달쯤 뒤엔 한 카페에서 라우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라고 고백을 해버리는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라우라가 화답하기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스물네 살의 처녀virgin가 자기보다 스물다섯 살 위의 아버지뻘 남자에게 연정을 느끼는데, 늙은 ‘나’ 산또메 씨는 그녀에게 청혼하기를 계속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불확실한 미래? 10년 후가 되면 자신은 60, 라우라는 여자로서 최전성기인 30대 중반을 맞아야 하는 불균형? 혹시 미래의 어느 날 라우라가 늙은 자신을 버리고 젊은 남자를 찾아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 또는 불안? 이들은 과연 나이 차이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세 자식들의 축복 아래 행복하거나 아니면 행복 비슷한 결혼의 문으로 입장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이건 가르쳐드릴 수 없다.
 반듯하지만 우울하고 기본적으로 염세적 세계관을 가진 은퇴예정자의 삶을 추적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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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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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콜드 블러드>와 <차가운 벽>에 이어 세 번째 읽은 커포티. 짧은 장편으로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지만 마음을 적실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따뜻함과 애틋함과 오래되어 남루한 시절들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 기준으로 수작. 커포티가 스물여섯 살이었던 1951년 작품. 청년시절에 쓴 성장소설이어서 당연히 자신과 비슷한 등장인물을 내세운다. 커포티는 부모의 이혼으로 사촌의 집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곳에 60대 노처녀 숙 포크 양이 있었고, 늙었으되 소녀의 감수성과 순수함과 소심함과 뜻하지 않은 지혜를 지닌 숙 누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 커포티는 이 책을 “깊고 진실한 애정을 추억하며 / 숙 포크 양에게” 헌정한다. 책의 화자 콜린 펜윅은, 엄마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엄마의 장례식 다음날 사촌인 베레나와 돌리 탈보의 집으로 보내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아버지 역시 자동차 사고로 죽는데, 독자로 하여금 아내의 사망으로 인한 우울증이 도져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이 들지만 꼭 그렇다는 증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 ‘나’ 콜린은 아버지의 사촌, 즉 당숙堂叔 아주머니들과 함께 살게 되고, 큰 당숙아주머니 돌리가 나중에 책을 헌정하게 되는 숙 포크 양과 비슷한 모습을 지닌다.
 화자 ‘나’ 콜린은 천애 고아. 고아를 돌보는 두 아주머니는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노처녀.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흑인 하녀 캐서린.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이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인 책에서 작은 아주머니 베레나는 혼자 사는 늙은 여인이 자주 그렇듯 알부자로 소문이 났고, 실제로도 대형 잡화상인 드러그스토어와 포목점, 주유소, 식품점, 사무실 건물 등의 실소유주답게 위풍당당하면서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는 한편, 집 안에서는 당연하게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 독재자에 의하여 압제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 감정의 연대를 이루고 있는 상태.
 여기에 중요한 남자 등장인물이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동네 치안판사였으나 지금은 은퇴하고, 아들 둘에게마저 부담감만을 줄 뿐인 찰리 쿨 판사. 또 한 명은 정신이 이상한 어머니로부터 심한 대우를 받아오다가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 다음부터 여동생 둘의 실질적 보호자 역할을 해온 젊은이 라일리.
 위에 이야기한 등장인물들이 한 패거리로 뭉치게 된 이유는, 돌리가 인디언으로부터 전수받은 ‘민간약초를 달인 약’을 통신 판매하는 것을 관찰하던 베레나가 이게 사업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유대인 사기꾼을 데려와 약의 레시피를 돌리로부터 알아내려하자, 돌리가 캐서린, ‘나’ 콜린과 함께 가출을 감행해 이웃의 숲, 나무 위에 지은 은신처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베레나가 보안관에게 이들을 찾아줄 것을 의뢰했고, 쿨 판사를 포함한 한 무리가 은신처에 접근해 이들을 완력으로 끌어 내리려 하면서 이들은 같은 편이 된다. 우연히 이 동아리를 구성하는 성원들은 하나같이 결손 가정 출신이란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선량한 약자가 되고, 베레나와 보안관과 목사로 대표하는 집단은 완고하고, 형식적이며 변하지 않는 율법에 옭매인 규격화된 권력형 인물로 양분화 된다.
 그러나 이 책을 이리 선량한 약자와 규격화된 권력자의 대립으로 읽히지 않는 것. 이게 <풀잎 하프>의 매력이다. 일상적이면서도 잔잔한 웃음을 물게 하는 문장으로 한 의지가지없는 소년이 선량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는 일이 책의 중심이다. ‘풀잎 하프’가 무엇인가. 책의 문장들을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 한에서 약간 변형해 설명하면, 늦은 9월쯤, 하프 같은 목소리를 한숨짓게 하는 계절에 인디언그래스 풀밭에 들판이 석양처럼 붉게 물들고, 불빛 같은 진홍색 그림자가 그 위로 산들거리며 가을바람이 마른 잎사귀를 튕겨 인간의 음악 소리를 내는 것. 풀잎 하프에 대한 것은 책 앞머리에 이렇게 설명하고, 또한 제일 마지막에 한 번 더 말한다. 마른 소리를 튕기는 이파리 사이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빛) 빛깔이 흘렀는데 저렇게 한데 모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바로 풀잎 하프라고. 이야기를 기억하는 목소리들의 하프라고. 추억. 저 남루한 기억 속의 일화와 장면과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서로 기억하는 목소리. 그걸 통해 한 소년은 성장을 하고, 반추하여 책을 썼다. <풀잎 하프>라는 제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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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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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책이라도 손이 선뜻 가지 않는 작품이 있다. 내겐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도 그 속에 든다. 이 책이 <생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무척 오래 전이었으며,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의 꼭대기에 상당기간 앉아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경우를 궁합이라고 하면, <삶의 한가운데>와 나는 궁합이 맞지 않았던 거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선택하지 않게 되더란 것. 근데 왜 갑자기 이 책을 골랐느냐 하면, 소설가라고 한 때 칭했던 신영숙이가 자기가 썼다고 주장한 <엄마를 당부해>란 작품 속에서 이 유명한 작품 <삶의 한가운데>의, 다른 부분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첫 문장을 과감하게 조금 바꿔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 그때부터 호기심이 발동을 했기 때문이다. <삶의 한가운데>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이 정도면 ‘인상적인 첫 문장’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임팩트가 있다. 적어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문장 자체가 한 문단 속에 다른 문장들과 섞여 있을 만하지 않고, 오직 문단의 가장 앞부분에만 어울린다(고 나는 주장한다). 영숙이는 이 문장을 절대 복사하지 않았다. 걔도 뇌가 있으니까. <엄마를 당부해> 25쪽의 마지막 줄에 있으며 역시 한 문단을 시작하는 문장으로 이렇게 써놓았다.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책을 사서 봤느냐고? 천만의 말씀.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 기능이 이럴 때 좋다. 만일 영숙이가 한 문단을 “긴 터널을 지나니 거긴 눈의 나라였다.”라고 시작했다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다. 누구나 다 어느 소설에서 따 왔는지 아니까. 근데 모녀 관계 어쩌고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영숙이도 이게 <삶의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문장인지 몰랐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영숙이가 습작시대에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밥 먹듯 해온 것이 필사였는데, 필사도 한 두 편이지, 언젠가 부터는 완전필사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좋은 문장이 나오면 아무 생각 없이 공책에 적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이게 사달이 아니었겠나. 공책 한 페이지 넘기면 좋은 문장이 쌔고 쌨는데 그걸 안 써먹어? 한 번 썼는데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그럼 두 번 써먹고, 또 시비가 없으면 다음부터는 상습적 도둑질을 하게 되는 거겠지. 그냥 베낀다는 게 아니라, ‘자매’가 ‘모녀’로 바뀐 것처럼 약간씩의 변형을 거쳐서.
 하여간 이런 이유로 <삶의 한가운데>를 읽기 시작했다. 루이제 린저가 1911년생. 책을 발간한 것이 1950년. 린저 본인이 반나치즘 운동으로 1944년에 투옥되어 종전 후 풀려난 전력이 있다. 이런 경험이 소설의 주인공 니나 부슈만에 어느 정도는 그대로 투영된다. 니나 역시 1911년생이며, 1944년부터 종전 때까지 교도소에 수감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로 설정했다. 성격이 아주 독특한데, 예를 들면 열두 살 위의 언니의 “결혼식 때 부모님이 니나에게 마치 시동처럼 내(니나의 언니이자 화자) 면사포를 들고 가도록 시키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몹시 화가 난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지고는 나의 면사포에 침을 뱉었다.” (7쪽)
 니나의 이런 독특한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요새 말로 하면 극도의 까칠함이랄까. 누가 자신을 칭찬해주는 것도 싫고, 말 한마디를 해도 좋은 어투는 초장부터 출장 가버리는 성격.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현실, 즉 현재의 삶에 적극적으로, 온몸으로 부딪혀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인물이다. 니나의 이런 일련의 행위가 간혹 자신을 위해서, 자주는 타인을 위해서이기는 한데 타인의 눈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게 비치는, 끔찍한 젊음의 고통 속에서 활활 타버리는 여인.
 바뎀바일러에 있는 뢰머바트 호텔의 바에서 니나의 언니인 화자 ‘나’가 실로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동생 니나를 우연히 발견한다. 위스키를 거푸 마셔대는 야성적인 여성. 결코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 있는 모습의 니나. 결혼 후 동생에 관해 한 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외국 생활을 하면서부터 완전히 잊고 있던 니나를 마흔아홉 살이 되어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호텔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독한 니나를 우연히 만나고, 몇 주 후 전화가 와서 자신이 있는 뮌헨에 와달라는 전화를 받아 애꿎은 남편이 피곤해 하건 말건 자동차 운전을 시켜 밤새 달려와서 작품의 첫 문장, ‘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자매들 간의 대화를 시작한다. 니나보다 스무 살이 많은 의사 슈타인 씨가 죽기 전에 니나 앞으로 남겨놓은 일기를 매개로 해서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동생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루이제 린저는 니나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래 맞아, 라고 니나가 말했다. 바로 그거야, 이 이야기는 긴장을 시켜. 왜냐고? 전적으로 스토리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야. 나는 이것을 참을 수 없어. 모두 이렇게 쓰고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는 내 머리에 한 다스나 들어 있어. 그러나 아무런 가치도 없어. 소재는 중요하지 않아.” (149쪽)
 린저는 스스로의 작품에서 소설엔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그럼 뭐가 중헌디? 심리상태다. 불안하고, 좌절하고, 곤경에 처하고, 실패하고, 도와주려다 오히려 면박을 당할 때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을 할까. 슈타인 박사가 묘사하는 니나와, 니나가 설명하는 당시 상황의 차이점. 이런 것들이 린저가 천착했던 진짜 모습은 아니었을까, 린저가 진짜로 쓰고 싶었던 작품은 철저한 심리소설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일의 47그룹과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루이제 린저는 결국 책의 마지막까지 스토리를 이어나가고, 결론을 맺고, 심지어 에필로그 비슷한 광경을 그려내기까지 한다.
 재미있는 소설책. 등장인물의 대사 부분에 따옴표나 기타 부호들을 붙이지 않아 더 감성에 호소하는 것처럼 읽히는데, 이것도 영숙이 분위기하고 유사....하다. 그러니 세상살이 조심해야 하는 거다. 한 번 수상하게 보니까 이것저것 다 이상한 거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나는 앞으로도 집요하게 글 도둑질에 관해서 물고 늘어질 것이다. 작품의 소비자를 이것보다 더 우롱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의 독후감은 결국 기, 승, 전, 글 도둑질. 이렇게 된 것.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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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4-0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매를 모녀로 바꿔치기한 거 보고 당시에 정말 경악을 했습니다.근데 작가 이름과 책 제목은 일부러 바꿔쓰신거죠?

Falstaff 2019-04-02 22:32   좋아요 0 | URL
작가...라기보다, 한때 작가라고 불렸던 인간의 이름과 책 제목은 ^^;; 조금 바꿨습니다. 아직 표절과비평사에서 공식 논평이 표절이 아니고 문자적 유사성이란 주장을 거두지 않는 관계로 괜히 소송에라도 걸리면 그거 정말 귀찮거든요. 물론 쪽팔려서라도 소송이야 하겠습니까만. ㅡ.ㅡ
 

 

 

 3개월에 한 번 씩 이런 추천 비슷한 글을 올리는데, 올해 첫 3개월은, 허허허, 경사로 좀 바빴습니다. 정초부터 아이 이름 하나를 지어 주었고, 이달 말에는 큰애 잔치를 무사히 치뤘습니다. 그래 이래저래 바쁜 관계로 아무래도 읽은 책이 많지 않습니다. 권 수로 55권, 편 수로 51편을 읽었군요. 이 가운데 서재 친구와 하필이면 제 알라딘 서재에서 걸음을 쉬어가시는 분들께 추천할 만한 책을 골라봤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조금이나마 읽는 분들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면 보람이겠습니다.



1.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여인 소피와 광기어린 천재를 지닌 유대인 남자 네이선. 둘의 광적인 사랑은 깊숙한 비밀을 은폐하는 '필연적 거짓'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랑조차 절망. 그만큼 절대적인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은 우울과 체념과,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은폐해온 진실을 짊어져야 하는데, 결국 이들 사랑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2. 조르주 페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동네 양아치 형의 외모를 가진 유대인 작가 조르주 페렉이 입심을 다 해서 만든 한 편의 큰 구라. 70명의 부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한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 헤르만 라프케. 그가 미국의 독일 주간German Week을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배경을 빼곡 채운 자신의 콜렉션을 보란 듯이 과시하기에 이른다. 위대한 컬렉션들은 관객들에게 은밀한 합창을 들려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3. 세르게이 도브라토프, <여행 가방>

 

소비에트에서 쫓기듯 망명길에 오를 당시 세관에서는 세 개의 여행 가방만 허락할 뿐이었음에도, 작가는 겨우 하나의 가방밖엔 챙길 것이 없었다. 하여간 미국에 도착해 어언 20년 가까이 흘러 새로 생긴 말썽쟁이 아들이 벌을 받느라 벽장 속 가방 위에 앉아 있는 바람에, 드디어 처음 열어보게 된 것. 속에는 소련 시절에 애지중지 했던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고 이들마다 독특한 풍자와 허풍과 객기가 반짝거리는데.



4. 치누아 아체베, <사바나의 개미 언덕>

 

영국이 물러가 해방이 됐다고 해도 진정한 피식민은 끝나지 않은 것. 대책없이 주어진 해방을 맞은 아프리카 가상국에서 벌어지는 해방의 후유증과 반half식민의 상징적 체제인 독재 정권의 등장. 지식인들은 독재에 저항하거나 빌붙어야 하고, 인민들은 누백년 이어온 자신들의 정서와 독재 정권의 이해에 따라 갈등을 맞아야 하는데, 이걸 신생국가의 성장통이라고 가비얍게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체베의 팬이라면 놓치지 않아야 할 책.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이 책이 아동들을 위한 동화라고? 천만의 말씀. 이 여행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실체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소인국과 대인국, 도덕적인 말horse들의 나라 등 네 번의 행해를 하면서 걸리버는 두 페이지에 한 번씩 영국과 유럽의 문화와 정치체제와 귀족들의 이면을 날카롭게 헤쳐가며 비틀어버린다. 다만 18세기 소설이라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 터.



6. 쥘리앵 그린, <잔해>

 

소심한 인간의 저 깊숙한 형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잘생긴 필리프. 결혼 첫날 밤의 침상에서 갑자기 높은 소리로 홍소를 쏟아내더니 딸꾹질을 시작하는 아내. 이후 아들을 낳고 부터는 전혀 한 자리에 든 적이 없는 건조한 부부. 이들 사이에 끼어든 한 명의 여인이 있으니 처형.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부유한 남자의 찌질함도 때론 소설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기도 한다.



7.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드디어 출간한 그리스어 직역.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주인공 조르바가 60대 노인이어서 그런가, 이 책은 나이가 들어 읽으면 더욱 좋다는 결론. 스스로 조르바의 팬이었던 고 이윤기 선생도 결국 못보고 갔지만 직역한 유재원 번역본이 나왔다는데 만족하리라 믿는다. 여태까지는 읽어보지 못한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앞으로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 번역의 이윤기 본 <그리스인 조르바>는 잊으시라.



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이 책 역시 조주호에 의한 스페인어 직역이 나왔다. 만연체 문장을 될 수 있는대로 문장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번역한 것이, 나는 진짜 좋던데, 일부 독자들에겐 해독상 어려움을 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백년의 고독>이 정말로 빼어난 명작이란 확실한 동감을 표할 수 있었다. 마르케스가 만든 필생의 고향 마꼰도에서 벌어지는 부엔디아 일가 이야기, 정말 재미있다.



9. 존 파울즈, <만티사>

 

재미있다가 한 순간의 변주로 철학적 사변으로 넘어가는 소설. 주인공 마일스 씨는 자기가 마일스 그린인지 마일스 데이비스인지도 모를 기억상실증에 빠져 있는 환자. 놀랍게도 기억을 관장하는 뇌기관이 생식을 담당하는 중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구라를 침으로 해서 소설의 전반부는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내놓고 읽기 힘들게 만드는데, 후반으로 가면? 상황 역전. 쉽게 읽히지도 않아 자신의 무지몽매를 한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



10. V.S 나이폴, <도착의 수수께끼>

나이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 그저 서인도 제도의 작은 섬 출신으로 별 재미없는 성장소설 쓰다가 운좋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인줄 알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 이제 코스모폴리탄 영국의 런던에 도착해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쓰고, 필명을 얻어 이제 스톤 헨지가 바라다보이는 시골에 정처를 정할 때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데, 자연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을 감상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11. 다니엘 페낙, <산문팔이 소녀>

 

솔직히 다른 작품에 비해 좀 떨어지는 품질이다. 당연 내 생각으로.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건 재미있다는 면. 일찍이 <몸의 일기>를 통해 청소년 시절부터 늙어 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일기형식으로 쓴 전작을 생각하고 읽었다가 갑자기 프랑스판 누아르 소설을 읽게 되어 당황스러웠는데, 아이고, 당연히 억지와 무리가 뒤따르지만 정말 재미있어 그런 거 다 용서가 되는 거, 이거 이해하시겠지?



12. 호르헤 볼피, <클링조르를 찾아서>

 

가상의 수학자 구스타프 링스를 등장시켜 20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벌어진 과학과 수학의 발전,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던 핵폭탄 제조 과정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설명하게 구성된 첩보 소설. 링스 박사가 나치에 의하여 반역죄를 적용받아 분명히 사형 선고를 받을 찰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 지붕이 무너지며 벽돌이 떨어지면서 판사의 해골을 쪼개는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인물. 이제 원자탄 기술이 소련 연방으로 전해지려는 위험천만의 시절에 진짜 스파이는 누구일까. 궁리하지 마시라. 읽기 전엔 절대 알 수 없을 터이니.



13. 리처드 포드, <독립 기념일>

 

지난 삼 개월 동안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 전처와 전처의 남편이 자기 아이들 둘과 살고, 자신은 일정 기간에 한 번의 만남만 허락되는 이혼남 프랭크 배스컴. 이이가 독립기념일 연휴를 맞아 문제아 맏아들 폴과 함께 농구, 야구 명예의 전당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당연히 우여곡절이 있어 재미있는 장편소설 한 편을 쓸만한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아들 폴로 말하자면 부적응증이 심해 매사 삐딱한 전형적 반항기 청소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험난한 연휴 보내기란?



14. 아리엘 도르프만,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친환경 기업정신과 윤리경영을 모토로 한 거대기업의 회장 블레이크 씨. 이이한테 난데없이 닥친 불면증. 이를 다스리기 위해 심리치료를 선택하는데, 있는 게 돈이니, 한 가정에 온갖 소형 CCTV를 설치해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관찰할 수 있는 관음과, 돈을 매개로 해서 해당 가족의 행운과 불행을 조절할 수 있는 가히 신적 인간으로 등극하는 블레이크 씨. 무엇보다 역자 김영미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에 대한 기억이 특별했던 책.



15. 미셸 오스트, <밤의 노예>

 

책 읽기를 마칠 때까지 절대 뒷표지에 쓰인 출판사 책소개를 읽지 마시라. 그것만 피해가면 당신은 참 좋은 소설 한 편을 감상할 수 있으리니. 내가 간직했던 우상, 책의 주인공 필립에게는 자신의 아버지인데, 우상이라 함은 그냥 내버려두고 마음 속에서만 자꾸 확장을 하게 해주어야지, 정말로 우상을 찾아 실체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일정량의 우러름이 깎일 수밖에 없을 것. 이런 것이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등장해 재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16.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

 

붉은 군대의 제대 말년, 그러나 지독한 고문관 이반 촌킨. 그가 시골 한 구석에 불시착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고물 복엽 비행기를 지키라는 보초의 명령을 받고 도착한 자리 바로 옆에는 숫처녀 뉴라 벨라쇼바가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니, 이미 배경부터 교통사고가 예약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붉은 군대와 농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 하는 촌철살인적 농담과 재담들. 후회하지 않으리.



17. 너대니얼 호손, <일곱 박공의 집>

 

욕심많은 유력가가 원래부터 터를 잡고 살던 목수를 마법사로 몰아 종교재판 끝에 목매달아 죽이고 집터와 샘을 빼앗아 그 자리에 박공이 일곱 개에 달하는 지역의 랜드 마크 저택을 지으니 바로 일곱 박공의 집. 목수는 죽어가며 신은 저자에게 피를 마시게 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유력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넓은 넥타이에 많을 피를 쏟은 채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 두 집안에 오랜 세월을 걸쳐 내려온 저주와 복수. 이것은 어떻게 해소가 될지.



18. 허먼 멜빌, <허먼 맬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양심적인 단편선.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으면 족히 세 권의 얇은 단행본으로 만들었을 듯. 총 일곱 편의 중단편이 들어 있다. <바틀비>와 <선원, 빌리 버드>를 읽기 위해 샀다가, 그것들은 물론이고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티노>도 재미있게 읽었다. 인류 문화유산으로 남을 <모비딕>을 쓴 작가가 중단편에서도 이리 흥미로운 시도를 했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19. 주나 반스, <나이트 우드>

 

여성 퀴어 소설. 아마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한 우물> 이후 8년만에 발간한 두 번째 여성 퀴어일 듯.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간 동성애도 이제 새로운 소재가 되지 못하니 새삼스레 그런 방면에 관심을 둘 필요 없고, 딱 하나, 예스럽고 화려한 문장에 방점을 두어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은 독서법이 될 것. 독자는 이 작품 역시 젊은 역자 이예원의 노고에 감탄하게 되리라.



20.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40년이 넘어 재독한 인생책.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년을 파리를 무대로 독일 출신 의사 라비크와 삼류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 작품. 작가 스스로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 망명길에 올라야 해서 라비크의 묘사가 더욱 충실해질 수 있었을 터. 역시 반전문학 하면 레마르크. 이제 그의 또다른 망명소설 하나를 보관함에 두고 있으니 늦어도 6월엔 읽을 거 같다. 안개낀 11월의 새벽, 파리 센 강의 우울.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개선문>을 읽을 이유가 되리라.



21. 트루먼 커포티, <풀잎 하프>

 

반나절이면 계산 다 될 짧은 장편. 그럼에도 성장소설이 품고 있는 아스라함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된 '나'와 두 명의 당숙아주머니들.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흑인 하녀 캐스린. 이야기가 확장됨에 따라 등장하는 아들 둘로부터 소외당한 홀아비 옛 지역 판사, 어려서부터 정신 이상인 어머니에게 혹독한 훈육을 받고 자란 젊은 가장. 이들이 서로 연대하여 서로를 위무하고 어려움의 시절을 관통하며 성장하는 광경이 사람의 가슴을 띵,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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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9-04-01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라는 상투적은 댓글이지만, 진심이랍니다. ^^

Falstaff 2019-04-01 1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표현을 많은 사람들이 쓰니 ‘상투적‘이 됐겠지요. ^^

싱클레어 2019-05-1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민음사패밀리데이에 가서 담아 올 쇼핑 목록을 적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레마르크 소설은 저도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개선문>은 이번에 이벤트로 받았습니다.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사바나의 개미 언덕>, <소피의 선택>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9-05-13 09:15   좋아요 0 | URL
책 선택에 도움이 되면 저도 참 즐겁겠습니다. ^^
 
더 큰 희망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일제 아이힝거 지음, 김충남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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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로 알게 된 ‘일제Ilse'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첫째가 안탈 도라티 옹의 아내이자 멘델스존 피아노 스페셜리스트 일제 폰 알펜하임, 두 번째가 카를 오토 코흐 치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진정한 엽기 마녀 일제 코흐, 그리고 이 책 <더 큰 희망>을 쓴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반half 유대인 작가 일제 아이힝거. 1945년 이후에 독일 땅에서 여자 이름으로 ’일제‘, 남자 이름으로 ’아돌프‘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전에 한 바 있다.
 일제 아이힝거는 모계가 유대인이고 부계는 아리아 사람으로 엄마 직업이 의사, 아빠는 교사. 그러다가 세월이 수상하게 흘러 오스트리아 출신의 키 작고 콧수염 기른 남자가 독일의 총통이 되자, 사랑이고 나발이고 그건 모르겠고 여차하면 자기 목숨까지 위태한 지경에 처한 아빠가 유대인 아내와 유대인의 피가 절반이 섞인 쌍둥이 자매를 팽개치고 이혼을 감행하는 바람에, 일제는 외할머니와 살거나 기숙학교에 머물게 된다. 다행히 불행한 일을 피해간 일제는 일찍이 의과대학에 적을 둔 적이 있었으나 나치 시절에 더러운 유대인이란 딱지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 전쟁이 끝난 다음에야 의과대학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하고 싶은 본성에 이끌려 5학기를 마치고 <더 큰 희망>을 쓰기 위해 학업을 중단한다. 책 뒤에 쓰여 있는 작가 소개를 보면 작품을 쓴 다음에 다시 의사 면허를 땄는지, 그냥 창작에만 전념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책에서는 ‘엘렌’이란 이름의 소녀가 주인공인데, 조부모, 외조부모 가운데 두 명이 유대인, 두 명이 아리안 족의 반半유대인으로, 아버지가 엄마와 자신을 팽개치고 독일군에 입대해버린 상태에서, 엄마마저 자기를 오스트리아 빈에서 외할머니와 같이 살라고 내버려두고 미국으로 탈출을 해버린 처지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일제 아이힝거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하겠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세상의 숱한 작품 속에 작가자신이 들어있지 않은 경우란 별로 없는 거니까. 나는 작가 스스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이야기한 작품마저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픽션이라 생각하며 읽는 인종이긴 하다.
 이 책은 서로 강하지 않은 연대를 이루는 열 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부제가 붙어 있다. 첫 번째 장의 부제는 “큰 희망.” 처음 나오는 두 음절 역시 ‘희망.’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희망봉 주위의 바다는 어두워졌다. 선박 항로들이 다시 한 번 반짝하고 빛나더니 꺼져 버렸다. 비행기 항로는 거드름을 부리듯 아래로 떨어졌다. 여러 섬이 불안하게 모여들었다. 바다는 모든 경도와 위도 위로 넘쳐흘렀다. 바다는 세상의 지식을 비웃었고, 무거운 비단처럼 밝은 육지 쪽으로 바싹 달라붙었으며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어스름 속에서 단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했다. 바다는 해안선을 휩쓸어 원래의 찢긴 모습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3쪽)


 첫 문단을 통째로 옮겨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 자전적 소설이고 반유대인 소녀가 주인공이란 것을 괜히 이야기한 거 같다. 나는 한 번에 수십 권을 사서 순서 초간 발행 순으로 읽는 버릇이 있어서(한 번 이런 나름대로의 룰을 깨고 갑자기 새 책을 사 도중에 읽고 독후감 썼다가 코피난 적 있다. 다시는 그딴 짓 안 할 거다.) 이 책을 살 때는 정보를 알고 있었을지언정, 정작 읽을 때는 사전에 아무 정보도 모른 채 읽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첫 문단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생각해보시라, 정말 자연스럽게 이제 새 희망을 찾아 새로운 대륙, 아프리카가 됐건, 아시아가 됐건, 아메리카가 됐건 간에 첫 출발을 하는 갑판 위 광경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주인공 소녀 엘렌이 밤중에 미국으로 추정되는 타국의 영사관에 몰래 들어와 벽에 걸려 있는 지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별의 별 상상을 다 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리는 광경이다. 영사관엔 왜 들어왔을까. 자애로운 영사에게 부탁을 하면 영사가 서명을 하기만 하면 저절로 발부되는 미국행 비자를 얻을 수 있고, 그렇게만 되면 자유의 여신상도 볼 수 있을뿐더러 그리운 엄마와 상봉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사가 아무리 자애로운 천사라고 해도 어찌 아름다운 엘렌 한 명한테만 특혜를 베풀 수 있느냔 말이지. 아무도 신원을 보증해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를.
 엘렌은 유대인의 피가 반이 섞였기 때문에 가슴에 유대의 별을 달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리안 족속 아이들이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진 않을 터. 유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강변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는 연습에 몰두한다. 누가 빠지면 얼른 구조해주고 대신 예전처럼 강가의 벤치에 자유스럽게 앉아 놀 수 있게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 혼자 남은 일제는 유대 아이들과 어울리려 접근을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내용이 두 번째 장 “부두.”
 유대 아이들은 거의 빈 집에 몰려 들어가 생일 파티를 열고, 엘렌도 생일 케이크를 사려 빵집에 들어갔다가 봉변만 당하는 장면, 많은 나날들 속에 외로이 남겨진 아이들이 스스로 연극을 만들어 구원을 흉내 내며 험한 세월을 유희로 보내고자 하는 장면, 연극에 끼어들어 나치가 오기까지 아이들을 잡고 있어야 하는 임무를 띤 낯선 사내가 오히려 아이들을 도망하게 만드는 장면 등등이 각 부에 주요 스토리를 이룬다. 시간이 갈수록 폴란드로 초대를 받아 떠나는(아우슈비츠 수용소 행을 비유) 유대인들이 늘어나고, 독일 경찰에 붙들려 사라지는 아이들도 많아지는 속에서 드디어 외국 군대에 의하여 빈이 해방을 맞이하려는 순간 까지를 그려놓았다.
 며칠 전엔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1년 동안의 파리를 무대로 한 남성적인 소설 <개선문>을 읽은데 이어 이번엔 전시 하 빈의 유대인 아이들에 관해 여성적인 시각으로 쓴 작품을 연이어 읽었다. 재미있는 비교 감상이다.
 일제 아이힝거는 전후 독일어권 작가들,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 잉게보르크 바흐만, 막스 프리쉬 등과 함께 첫 번째로 등장한 세대로 꼽힌다고 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로 앞 시절까지의 소설문법과 조금 다른 서술양식을 사용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힝거의 작품은 소위 47그룹이라 일컫는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쉽게 읽히기는 하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말씀. 그냥 참고만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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