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의 시 232
김준현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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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는 데도 요령이 생긴다. 예컨대 김준현의 처녀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같은 시집을 펼쳐 처음에 나오는 시 한 두 편을 읽을 경우에는, 일찌감치 책을 끝으로 넘겨 평론가가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본다. 그렇지 않으면 난수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시들을 도무지 읽어낼 도리가 없다. 이때 주의할 건 해설을 대충 훑어볼 뿐 정독하면 안 된다는 것. 당연히 내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만일 애초부터 평론가의 해설을 숙독한 다음에 특히 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평론가의 의도대로만 시가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러면 곤란하지. 특히 시는 독자의 것이지 시인이나 평론가의 것은 아니잖은가.
 그래서 일단 “작품해설”의 앞부분에 휙 일별을 주었다. 문학평론가 임지현은 당연히 무지하게 현학적으로, “인공 언어 제작자, 지구―헵타포드의 비정한 세계의 기록”이란 뻑적지근한 제목을 달아 김준현의 시집을 해설한 바, 이 시집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변종 인간의 자기 기록”이라고 선언을 해놓고 시작한다. 자기 고백이 아니라 “환유적인 자기 기록”이라 하며 고백과 기록의 차이점에 관해 잠깐 설명한다. 그 다음에야 내가 진짜로 관심이 있는 말을 하는 바, 같이 읽어보자.


 “기록은 특정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쓰기 행위이다. 이 시집은 쓰기에 대한 기록이며, 쓰기 주체의 수행성과 쓰기 과정의 비밀에 대한 기록이다. 왜 김준현은 쓰기 주체의 행위와 언어에 집중하는 것일까? 이 시집은 의미의 해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시를 해독하는 비밀 열쇠를 깊이 숨겼거나 아니면 분해해서 시집 전체에 흩뿌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처음부터 비밀 열쇠는 없으며, 그는 그저 허심탄회하게 쓰기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한 “쓰기”는 당연히 시를 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테고, 시집의 테마는 ‘시를 쓰는 주체의 수행성’(말을 평론가처럼 해서 어렵지 쉽게 하자면 그냥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라는 얘기다)과 시 쓰는 과정, 그러니까 시의 재료인 언어를 선택하는 일을 하면서 그 속에 숨은 비밀을 기록했다는 말인데, 시인은 비밀을 해독하는 열쇠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뜻. 이를 더욱 쉬운 얘기로 다시 설명해드리자면,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공감은 애초부터 쥐뿔도 감안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온갖 환유와 은유와 암호로 덮어놓았다는 거다. 완전히 개인적인 노래이며, 자기 직업이 얼마나 비의에 싸여 있는지를,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를 언어로 포장했다는 뜻, 이라고 오해할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오해하기로 작정했다. 물론 시인은 무지하게 심각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단어의 다중성과 동음이의同音異義를 이용한 놀이를 시도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 놀이에 동참하지 못해, 즉 공감하는데 실패한다면, 이젠 독자의 자격으로 시를 읽고 그냥 ‘시인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판정을 해도 비난받지는 않을 거 같다.
 시집의 앞쪽에 있는 시 가운데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이 있었다. 감상해보자.



 쓴 것과 쓰는 것



 양말의 전부는 양말이 뒤집힐 자유 발톱에서 발톱의 색을 벗기면 속이 다 보이는 사람처럼 벗기고 싶은 마음과 벗은 마음의 모양이 다르다 한 사람의 발에서 함께 자란 발톱의 길이가 다 다르다

 집을 나간 개의 이름이 개의 목에 걸려 있을 자유
 집을 나가고 싶은 자유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와
 집이 될 자유가 다르고


 집에 들어서서 콜라의 뚜껑을 비트는 숨소리가 남아 있는 콜라와 같을 때 콜라의 호흡은 언제나 죽음 직접의 것처럼 간신히 유지되고 엄마가 안 보이고


 저 방에 있을까 물음표가 물어보는 것들은 묻기 전부터 있었고 환청이 소리를 낳는 소리라면 엄마의 침묵과 나의 침묵이 다르고


 고구마는 어두운 곳에 두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남아 있는 건 고구마가 자랐기 때문이고
 고구마의 몸을 뚫고 자란 싹들이
 고구마를 더 살게 한다면


 나는 어두운 곳에 있어야 했다 나는 고구마와 다르고 생선과 달라서 생선이 상하면 생선의 냄새가 나고 기분이 상하면 기분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집보다 집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지면에서 나는 입을 벌리고 같은 말을 쓰고 또 쓴다 같은 말들이 다 달라지고 있다   (전문)



 시를 읽는 것이 시가 품고 있는 내용과 공감을 해서, 감정이입을 통해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 장황하게 이 시를 전부 다시 읽어보지는 말고 그냥 마지막 연만 슬쩍 읽어보자. ‘어두운 곳에 있어야 했던 나’를 고구마가 환유하고 있었다가, 난데없이 생선이 등장해 이제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는 고구마와 별개로 냄새가 나고 냄새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 생선이 또 나를 환유하다가, ‘집’이라는 실체의 주거지보다는 ‘집’이라는 언어로 입을 벌리고(노래를 하고) 같은 말을 쓰고(시를 쓰고) 또 쓴단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당연히 모르겠다. 평론가 임지현의 말대로 암호를 푸는 열쇠를 시인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즉, 완전히 ‘개인적인 기록’이란 말이다.
 표제작 <흰 글씨로 쓰는 것>에도 이런 성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략)
 구름의 흑심에도 물기가 있다는데 책과 책의 시체가 쌓인
 여름, 모두 폭우 속에서 혈육이 되어라
 혈과 육이 다 엉키고 붙은 자음모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로 우는 울음소리의 주인들이여, 처음이란 침대에 묻은 약간의 피였을까
 나는 약의 의지로만 흰소리를 하지
 (중략)
 검은 프라이팬보다 단단한 밤이면
 내리는 비가 내린 비를 때리는 자학의 파티 속에서
 나체가 되고 싶다
 내린 비가 내리는 비를 끔찍하게 만드는 세계, 눈이 멀어서
 예외가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
 (하략)


 이 시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시를 쓴 시인 말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역시 내 손을 이미 뜬 시에 대해 내가 뭘 왈가왈부하겠는가, 라고 말 해버릴 것이 분명한 바, 이제 이 작품 <흰 글씨로 쓰는 것>은 모호함의 대양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표류할 거 같다. 내리는 비와 내린 비의 상호 관계 같은 건 시집 전체를 통틀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손가락이 다 있는 장갑을 걸치고
 털모자와 털목도리를 두르고
 털 하나 없는 몸이 말라 가고 있다
 시체 놀이를 자주 하던
 아이의 시체처럼
 죽을힘을 다해 숨을 쉬려던 사람의
 죽을힘  (<거식증> 부분)


 구김살 없는 사람도
 구김살이 많은 소복을 입는 날
 그러나 신발은 언제나 당하는 것   (<신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것이다> 부분)


 이걸 보고 시인의 “조어법造語法”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모국어이되 인공 언어이며, (인공 언어가 모여 있는)시집은 헵타포드라는 이질적 존재의 세계를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건 많이 배운 평론가들이나 할 이야기지 나 같은 무지렁이의 것은 아니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시가 시인의 비공감할 개인적인 서술에 머물면서, 그것도 모자라 풀어내기 힘겨운 암호 안에 가두어두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시를 멀리하게 만드는 아주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라는 장르를 시인과 평론가들만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게 한다고 주장 해야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시를 모르겠다. 암만해도 안 되겠다. 이젠 시집을 사는 일을 대폭 줄일 수밖에. 그건 몇 명의 시인들, 당신들이 조장했을 수 있다.

 



어느 분이 지나시다가 아마추어가 쓴 이 독후감을 읽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쉽게 하지 마시구요 본인 수준에 맞...."이라는 댓글을 썼다가 지우셨다.

이에 대한 변명.

현대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 예를 들어 음악, 미술, 무용 등은 벌써 오래 전에 전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만이 즐길 수 있는 리그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미치너도 그의 훌륭한 작품인 <소설>에서 문학의 경우도 문학의 진화나 진보를 이해하는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것이 진정 훌륭한 작품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요. 아직 수준이 문학의 진화나 진보를 이해할 수 없는 저 같은 다중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만의 리그"가 맞습니다.

조언을 해주신 것처럼 요새 저는 제 수준의 맞는 시들을 읽고 있습니다. 한용운 부터 김소월, 이육사, 서정주, 신석정, 김영랑, 청록파 세 명, 조태일, 신경림, 이성복 등등 말이지요.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이 시집은 제 수준에 맞지 않아서 저는 좋게 평가를 할 수 없는 것 뿐입니다. 만일 다중이 저하고 수준이 비슷하다면 (그런 것 같은데요), 시집이 팔리지 않을 것이고 그건 진화, 진보적 시를 쓴 시인과 출판사, 평론가들 책임 같습니다. 그렇다고 독자의 구미에 맞는 낡은 시를 쓰란 말씀이 아닙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들에 의하여 예술은 발전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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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9-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하게 공감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요.

Falstaff 2018-09-17 12:04   좋아요 0 | URL
여전히 시인들이 공감할만한 시를 계속 쓰고 있지만, 문제는 찾아내기가 힘든다는데 있는 거 같습니다.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박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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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을 졸업하고 절친 ‘유리’를 따라 취업준비하다 스스로 직장생활 체질이 아님을 깨닫는 서나연. 그래 꽃꽂이, 자수, 수예 같은 자격증을 따고, 통통한 몸집에 어울리게 음식 만드는 거, 먹는 거 좋아하는지라 당연히 요리 자격증도 딴다. 나연은 보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으로 뭘 해먹을까 궁리해 냉장고에 들어있는 재고 식재료의 범위에서 가장 맛난 아침을 해먹는다. 아침을 해먹자마자 점심엔 뭘 해먹을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다가 역시 냉장고 안에 들은 재고 식재료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장 맛난 점심밥을 또 해먹는다. 하여튼 책 안에선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이나 반찬 또는 기타 음식을 다시 데워 먹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는다. 점심밥을 먹자마자 저녁엔 뭘 먹을까를 구상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먹는 일 틈틈이 3년째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성우와 만나 영화도 보고, 성우는 좋아하지만 자기는 전혀 관심 없는 농구 이야기도 들어주고, 근데 성우는 언제 결혼하자고 할까, 의심을 해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며 지금은 친구 유리의 애인이자 자신의 ‘말 그대로 친구’, 다만 성 염색체만 자기하고 조금 다른 친구 지훈이하고 저녁 먹은 얘기, 영화 같이 본 얘기 등을,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애인 성우한테 툭툭 던짐으로 해서(얘, 바보 아냐?),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이딴 식이라 성우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천진무구한 20대 후반의 아가씨였다가 이젠 30대 초반의 아가씨.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천진무구, 좀 언짢은 말로 하자면 아무 개념 없이 사는 서나연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 아버지(미국에 사는 별거중인 엄마에 관해서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언니, 고등학교 동창생들 열 명과 그 중에서도 뛰어난 미모의 은주, 대학시절부터 온갖 고민을 공유했던 두 친구, ①수진과, 자기 애인이 될 뻔한 지훈을 재빨리 자기 애인으로 삼은 ②유리, 이들이 주로 연애관계로 엃히고설킨 이야기. 한 마디로 수다.
 일찍이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언니가 엄마 배속에 듦으로 해서 결혼에 이르렀고, 그래 나연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별거를 시작한(것처럼 보이는) 부모를 보며 자기는 어쨌거나 서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생 사랑하면서 살고자 하는 진짜 순진한(어리석은과 비슷한) 나연. 십년을 연애하고서도 다른 여자 새로 만나 결혼해버린 애인한테 걷어차인 은주, 어쩌다보니 ‘네 이웃의 남자’ 즉 유부남과 얽혀버린 똑똑한 수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유리, 이들 사이에서 나연은 지훈과 진짜 친구 사이를 유지함으로써 제 애인 성우와, 지훈의 애인 유리를 돌아버리게 하는 걸 전혀 짐작 못한다. 이쯤 되면 이건 순진, 천진한 게 아니라 좀 모자란 거 아냐? 하여간 마음씨 하나는 좋아서 이웃들 챙겨 먹이는 걸 즐겨하고, 친구를 위해 자기가 연애하고 싶었던 지훈이도 넙죽 가져다 바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 진짜 있기는 있다.
 근데 사람은 보이는 면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걸 차근차근 알게 되는 나연. 이걸 뭐라 해야 해, 성장? 하여간 비슷한 건데, 알고 보니 엄마와 아빠는 서로 느므느므 사랑해 양가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애(나연의 언니)부터 만든 다음, 양가의 입을 다물게 해놓고 결혼에 성공했는데, 진짜로 결혼을 해보니 그 염병할 사랑이란 것의 유통기한이 진짜 짧다는 진실 앞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어쩌다 또 덜컥 나연까지 만들어버리고 만 것. 급기야 나연이 열 살이 되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혼은 아니고, 같이는 못살겠고 해서 별거상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
 언제가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언니란 년의 대학 후배, 같은 동아리활동을 했다는 남자에게 “동아리에서 선언문이나 격문, 이딴 거 전담했겠지요 뭐.” 시니컬하게 얘기했다가 천만의 말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언니가 문학 동아리에서 그놈의 ‘시’를 썼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고 나서 다시 언니를 관찰해보니, 소 안심과 왕새우에 초콜릿 무스 디저트보다는 가래떡 넣고 무친 잡채를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 사람은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다간 코피 터지는 거구나, 하나하나 알아간다. 다른 사례는 생략함. 왜냐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이니까.
 먹는 얘기로 치면, 맛보다는 요리에 중점을 둔 이야기. 레시피 같은 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책만 보고는 아무 것도 성공적인 요리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수준. 맛에 관해서 말하자면 뮈리엘 바르베리의 짧은 소설 <맛>의 아기자기한 혀의 감촉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서, 사실 요리나 맛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와 실연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 해야 마땅하겠다. 중산층 이상 가정의 결혼 적령기 여성들의 사랑 타령. 걔네들도 사랑은 쉽지 않나보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 이별하고,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노래하는 것이 지나가는 청춘이지, 인생 별 거 있어? 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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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김성곤 해설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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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먹먹하다.
 메릴린 로빈슨. 몇 권 쓰지도 않은 작가가 어떻게 책마다 사람의 심금을 이리 저며 놓는지.
 한 여인이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한없이 쏟아지는 비를 철철 맞으며 사랑을 호소하는 452통의 편지와 귀한 금속으로 만든 반지 하나를 하수구에 한 장, 한 장 쏟아버렸다. 9년에 걸친 약혼기간 동안 이 여인 글로리는 어느 새 서른여덟 살이 되었고,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번 돈 모두를 약혼자의 사업자금으로 탕진해버린 데다, 처음부터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기미를 챘으나 구태여 확인하지 않은 바와 같이, 약혼자는 유부남인 것이 드러나 버렸다. 학교를 사직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여덟 남매의 막내 글로리는 어느 날 아이오와 주의 아주 작고 완고한 소읍 길리아드에 있는 옛집, 커다랗고 낡았지만 깊은 병에 든 늙은 아버지를 돌본다는 구실로 피난처를 찾듯 돌아왔다. 길리아드. 로빈슨이 쓴 두 번째 작품 <길리아드>와 같은 소읍이며 성경에 나오는 ‘치유의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단다.
 얼마 후, 여덟 가운데 다섯째인 잭이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동네 제일가는 악동으로 사소한 도둑질과 사고치기를 밥 먹듯 해온 유명한 문제아였다가, 한 소녀를 임신시켜 딸을 낳게 하고도 그냥 떠나버린 탕아.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 잘하는 동생 테디가 대리시험을 치루면서까지 졸업을 시키려했으나 결국 낙제 끝에 졸업하지 못하고 알코올중독에 빠져 헤매다 무슨 이유인지 전과자가 되어 버린다. 출소 후 한 여인을 만나 그 여인에게 무수한 죄를 지으면서도 그래도 최근 10년 동안은 평온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이력을 모두 알아낸 애인의 목사 아버지와 친척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아, 동생이 와 있는지도 모르고 역시 고단한 몸의 잠시나마 뉘려 고향집에 들은 것.
 메릴린 로빈슨의 세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다. 가족. 또는 옛집. 참 모질게도 끊어지지 못하고 좋으나 싫으나, 미우나 고우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긋지긋한 끈. 가족과 형제. 로빈슨은 거의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치명적 약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연대로서의 가족들 사이에 늘 누추하고, 시큰거리고, 떠올리기만 해도 어딘가가 저릿하며, 가슴 속을 텅 비우는 후회와 슬픔을, 새파랗게 날 선 칼날로 썩 베어버리고 만다. 잘 드는 칼날이 피부를 슬쩍 스쳐지나갈 때의 서늘함. 육체적 고통을 느끼기 바로 전까지의 돌이킬 수 없는 살갗의 감촉.
 난 이런 책, 좋아하지 않는다. 경건하고 늘 자상하면서도 엄숙했던 아버지. 이제 늙어 땅거미 지는 황혼을 맞아 누군가가 돌보지 않으면 거동도 못하는 약한 노인. 아직도 자식들에게 성경과 장로교적 태도를 권하지만 이젠 예전 옷들을 입어볼 수도 없이 쪼그라들고 약한 아버지. 삶에 지쳐 갈 곳 없어 돌아오긴 했으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나 삶의 실패의 무게에 눌린 남매. 아버지는 죽음을 향한 막바지 길로 접어들고, 돌아온 탕아는 다시 집을 떠나는 것을 예고하며, 결국 막내딸이 크고 낡은 집에 홀로 남게 되는 이야기. 살면서 부모에게 잘한 거 없었고, 형제간에 애틋하지도 않았던 나는 이런 종류의 책만 읽으면 오히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더 알러지 증상이 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메릴린 로빈슨. 아, 난 이 미세스 로빈슨이 쓴 작품들에겐 두 손 들었다. 어떻게 글을 이렇게 쓰는지. 이게 문학의 힘이고 소설의 힘인가? 시멘트로 발라놨던 내 눈물샘조차 뚫어버리는 약하고, 가늘고, 조심스럽고, 점잖고, 겸손한, 나도 모르는 힘. 아, 모르겠다. 로빈슨 여사. 노래나 하나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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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1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세스 로빈슨>은 정말 오래 전에
영화 <졸업>에서 로빈슨이 부인이 어린
더스틴 호프만을 꾈 적에 나오던 그 노
래가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데 결국 다 보지
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메릴린 로빈슨의 책은 <하우스키핑>
읽다만 게 전부네요...

Falstaff 2018-09-13 12:33   좋아요 0 | URL
옙. 새파랗게 젊은 더스틴 호프만이 등장해서 결혼식날 신부 캐서린 로스를 훔쳐 달아나는 영화요. 당시만 해도 굉장히 선정적인 영화였답니다.
<하우스 키핑> 마저 다 읽으시지.... 그거 은근히 재미나지 않나요?
 
네로의 비밀 -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2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2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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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뭐야!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막스 갈로가 쓴 로마 인물소설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네로의 비밀>은, 첫 번째 작품인 <스파르타쿠스의 죽음>과 달리 이 한 권에서 끝나지 않는다. 뒤로 가면 갈수록, 이렇게 뜸만 들이다가 언제 네로가 죽을까…에서, 지금 죽지 않으면 결말까지 못 가는데, 싶다가 기어이 에이 썅,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제 나오면 틀림없이 다음 권까지 읽어야 한다는 걸 눈치 챈다. 그 허무감이라니.
 네로가 죽인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세네카라는 인간이 있다. 로마 황제 시절의 유명한 철학자로 말더듬이, 절름발이, 간질병 환자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한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간 사람인데, 이이가 작품의 화자인 세레누스의 은사이기도 하다. 세레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조카 아그리피나가 나중에 네로가 되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를 낳을 때부터 시작해 이 책이 끝나는 시점까지, 그리고 다음 권인 <티투스의 승부수>에서 네로가 죽은 다음까지 험한 세월 동안 독약을 먹거나, 동맥을 끊거나, 목이 잘리거나, 맞아죽지 않고 기어이 살아내는데 성공하여 나중에 네로가 죽을 때까지 그를 둘러싼 사건들을 평전 식으로 기록한다. 화자 세레누스처럼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을 우리는 궁극적 승자라고 하는 거 아냐? 하여간 그렇다는 말씀.
 화자 세레누스는 처음부터 세네카가 죽을 때까지는, 아그리피나가 남편을 죽이고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한 다음 황제마저 독살해서 기어이 열여섯 살 먹은 아들 네로를 황제의 위에 오르게 한 후, 네로가 차츰 혼탁해져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배 다른 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자기 대신 권력을 농락하려는 친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양날검으로 처단하고, 후환을 없앤다는 명분으로(사실은 포파이아와 결혼하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친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옥타비아를 죽여 전권을 차지할 때까지, 황제의 옆에서 천륜을 어겨가며 자행한 살인행위에도 불구하고 세네카가 네로에게 옳은 길로 가도록 충언하지 않은, 또는 못한 것을 한탄하기만 한다. 세네카가 죽은 다음엔? 죽기 얼마 전부터 저 촌의 지방도시 작은 별장에 머물러 소낙비를 피하다가, 작품의 화자가 되기 위해 다시 로마로 와서 세네카의 죽음을 지켜보고, 자신이 비난했던 세네카보다 훨씬 더 조용하게, 왕창 겁을 먹고 네로의 눈 밖에 나 죽음을 맞지 않기 위해 조심 또 조심하면서 목숨을 이어간다. 다 그런 거지. 그리고 이런 거, 다 독자가 이해해야 한다. 세레누스 본인이 비겁하게 살아남고 싶었다기보다, 막스 갈로가 그로 하여금 책의 화자 역할을 시키기 위해 창작한 인물이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했듯 결론, 즉 네로가 이 책에선 죽지 않는데 뭘 더 얘기할 것이 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어라? 했던 것만 몇 가지 이야기해보자.


 1. 헨릭 시엔키에비츠가 쓴 <쿠오바디스>에 등장하는 사실상 제일 멋있는 남자, 페트로니우스가 정말 실존했던 인물이었던 거다. 햐, 이 반가움이라니. 이 책에서도 <쿠오바디스>와 같이 자살하기 위해 손목을 그었다가 다시 붕대를 감고 네로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도 등장한다. 물론 시엔키에비츠처럼 명문의 편지는 나오지 않는다. 당연하지, 갈로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 사학자에 가까우니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시엔키에비츠를 능가하는 페트로니우스의 편지, 유머가 가득하면서도 사정없이 네로의 유치한 취향을 비꼬아버리는 날이 퍼런 독설과 비견할 문장을 만들지는 못했을 거다. 기억하시나? 페트로니우스가 네로 개자식에게 보냈던 편지. 한 번 보시라.
 “폐하. 앞으로 만수무강하시더라도 제발 대중 앞에서 노래는 하지 마십시오. 양민을 학살하시더라도, 아무튼 시는 쓰지 말아주십시오. 사람들을 독살하시더라도, 부디 춤은 추지 마십시오. 또다시 불을 지르시더라도, 부탁이니 그 서투른 키타라 연주는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폐하의 벗이자 ‘고상한 판관’인 페트로니우스가 폐하께 드리는 충고입니다.”
 <네로의 비밀>에서도 똑같은 상황에 처한 로마가 다시 등장한다. 다만 작품의 주제가 네로, 한 개인이기 때문에 <쿠오바디스>와 달리 폭군에게만 초점을 맞춰 서술한다.


 2. 몬테베르디가 지은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하고 어째 이리 다를까. 몬테베르디는 자신의 작품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버린다. 포파이아(포페아)의 남편 오토(오토네)가 황후 옥타비아와 공모해서 포파이아를 죽일 계책을 세운다고? 아이고. 옥타비아의 시어머니이자 새엄마이자 사촌언니인 아그리피나가 아들 네로한테 버림을 받고 권력을 잃어버린 후, 옥타비아가 정통 황실의 후손임을 깨달은 아그리피나가 친아들 네로를 제거하고 옥타비아를 내세워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거라 머리를 굴리다 오히려 아들한테 죽임을 당한 이후인데 무슨 깡다구가 있고 측근이 있고 무리들이 있어 모사를 꾸미겠느냐고. 아 씨, 난 여태까지 <포페아의 대관> 내용이 정말인줄 알고 살았다. 이럴 때 김도향이란 이름의 흰 수염 난 옛 가수는 이런 노래 부르더라.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책 읽어보니까 포파이아가 등장할 무렵 네로는 정식 아내이자 이름뿐인 아내인 옥타비아 말고 동성애 전용 남편 한 명, 동성애 전용 아내 한 명, 이렇게 있었는데, 여기에 포파이아가 합세해 <쿠오바디스>의 영웅 페트로니우스조차 “아크로바틱하다”고 할 정도의 난잡하고 고 난이도의 난교파티에 날 새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런 네로와 포파이아의 연애를 이렇게 노래하는 게 말이 돼? 

 

 

 게다가 포파이아가 어떻게 죽느냐 하면, (유부녀가)혼전 임신했던 첫 딸이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죽은 다음, 다시 임신을 해 배가 부른 상태에서, 무슨 일로 꼭지가 돈 네로가 본처 옥타비아를 죽이고 들였을 정도로 죽자 사자 사랑했던 포파이아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차, 바로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지더니 죽고 만다(장출혈이지 뭐겠어). 이중창을 들으면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겠으나, 당시 네로가 저질렀던 미친 지랄들을 읽어보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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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에 의한 드레스덴 폭격, 그리고 2001년 여객기에 의한 뉴욕 무역센터빌딩 테러. 두 사건의 공통점은 놀랄 만한 수의 민간인 희생이다. 책은 우연하게도 두 사건의 희생자가 된 독일 출신 미국 이민가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은 아홉 살짜리 똑똑한 소년 오스카 셸의 시각으로 쓰여 있다.
 나날이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던 가족. 전쟁 중이지만 그나마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됐던 독일 남동부의 오랜 도시 드레스덴에, 갑자기,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무차별 폭격이 벌어져 어쩌면 큰 고모가 됐을 지도 모를 아이를 배에 담고 있는 할아버지 토머스의 약혼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56년 후 평화로운 가을의 어느 화요일 오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두 대의 보잉기가 각각 들이받아, 나, 아홉 살짜리 아들과 함께 엉뚱한 발명을 하고 우주 창조에 관해 토론을 하던 아빠가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다. 할아버지 토머스 셸은 드레스덴 폭격으로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애나와, 애나의 태중에 있던 아이가 사라져버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발음기관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and'란 말을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앰퍼샌드ampersand(&)‘을 써서 “커피 앰퍼샌드 단 것 주세요.”라고 해야 했으며, 이튿날엔 ’...하고 싶다‘란 말이 나오지 않아 대신 ’욕망하다‘로 이야기 했다. 이어서 ’지니다‘ ’일기장‘ ’연필‘ ’잔돈‘ 등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실어증失語症‘이라 하나? 그래서 토머스는 의사소통을 위해 왼 손바닥엔 ’YES‘, 오른 손바닥엔 ’NO‘라고 문신을 새기기에 이른다.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이 두 가지라서. 그리고 늘 공책을 가지고 다니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연필로 쓴다. 이렇게.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이런 페이지가 나와도 독자가 당황하지 않는 건, 이거 말고도 심지어 다음과 같이 아무 글자가 쓰여 있지 않거나, 붉은 펜으로 잔뜩 교정해놓은 장면이 나와도

 

 



 하나도 놀라지 않는 건, 벌써 1759년에 로렌스 스턴이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생각과 인생 이야기>에서 몇 차례 써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조(물론 농담이다) 로렌스 스턴은 특정 인물의 조의를 표시하기 위해 한 페이지를 검정색으로 칠해놓은 적도 있고,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대리석 문양으로 역시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경우도 있었던 건 아실 터.
 토머스의 손자 오스카는, 시신은커녕 옷자락 하나 찾지 못한 아버지를 굳이 매장해야 한다는 엄마의 의견을 좇아 빈 관을 싣고 공동묘지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선량한 리무진 기사 제럴드 톰슨에게 악의 없는 우스갯말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정신치료사 하워드 페인 박사와의 면담에서 의사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좋은 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묻자, 오스카는 “아빠가 돌아가셔서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요?”라고 되물어 확인한 다음, 의자를 걷어차고 그의 서류를 마룻바닥에 내팽개치면서 고래고래 “아니! 있을 리가 없잖아, 이 개새끼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대신 아빠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책의 많은 부분은 집에 놓여있던 파란 꽃병 속의 열쇠, 그것에 맞는 자물쇠를 찾는 일에 할양한다. 우연히 꽃병을 깸으로써 조그만 봉투에 담긴 열쇠를 발견하긴 했지만 용도도 모르고, 어디에 써야하는 지도 모르며 오직 아빠가 봉투 위에 직접 쓴 블랙Black이란 단어 하나를 단서로, 아이는 뉴욕의 모든 블랙 씨를 면담하는 장도에 나선다. 어디에 맞는 열쇠일까. 책의 본문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냐타나서 끝날 때까지 가장 자주 나오는 사진이 등장하는데, 바로 문의 손잡이다. 그럼 혹시 이 열쇠가 손잡이, 문을 열 때 쓰는 용도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는, 열쇠의 모습이 손잡이에 맞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 수 있지만, 넓게, 책 전체를 아울러 2차 세계대전의 드레스덴 공습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21세기의 언더그라운드 제로를 통하게 만드는 문을 열 수 있는 기재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드레스덴, 히로시마와 뉴욕의 재앙과 재앙의 피해자는 “믿을 수 없게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애나가 죽은 후, 애나의 동생과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한 말 못하는 토머스. 몇 년 후 그는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40년 동안. 그러나 아내와 아이와 완전히 이별한 건 아니어서, 토머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면 없는 시간을 만들어 자신과 대양 하나를 두고 떨어져 사는 얼굴 본 적 없는 아들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다 2001년 9월 11일이 지나고, 며칠이 더 지나고, 신문에 난 희생자의 명단에 자기 이름이 들어 있는 걸 알고 대양을 건너온 토머스는 40년 만에 아내를 만나고, 아들 대신 손자 오스카를 만난다. 가방 하나 가득하게 든,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든 토머스. 그는 그토록 많은 편지를 어떻게 했을까. 드레스덴과 히로시마와 뉴욕에서 날벼락을 맞은 보통의 인간들을 완전히 정치색을 배제한 채 비극과 충격의 증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
 이이의 다른 책을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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