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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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에르난 디아즈는 197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군사쿠데타를 피해 스웨덴으로 건너가 열 살까지 살고 다시 귀국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을 졸업한다. 이후 영국 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다시 뉴욕으로 점프, 뉴욕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브루클린에 터를 잡아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다. 지금은 컬럼비아 대학의 히스패닉 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데 2023년에 편집한 위키피디아의 기록이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자. 이이는 두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2017년에 발표한 <먼 곳에서>. 데뷔작이 나오자마자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의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가 미역국 먹었다. 그럼에도 질스 화이팅Whiting 여사 재단에서 주는 화이팅 상을 수상해 5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으니, 으메, 그게 얼마여? 이후 두번째 작품이 2022년에 출간한 <트러스트>이다. 이게 대박. 드디어 미국인의 꿈인 퓰리처 상을 받고, 부커상 최종심에 올라가고,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가 뽑은 2022년 1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금수강산 옥토낙원의 개 잡아먹는 이야기,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와 더불어 21세기에 발간한 모든 문학 작품 가운데 백 권에도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세상에나. 이렇게 읽기 지겨운 소설이 말이지!

  지금 감히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을 “읽기 지겨운 소설”이라고 했느냐고? 그랬다, 어쩔래? 퓰리처상이 아니라 부커상, 노벨상, 책상, 걸상, 밥상, 개근상을 가져와봐라, 눈썹 하나 까딱하는지. 겨우 470쪽밖에 되지 않는 책 한 권 읽는데 3일 걸렸다. 보통 이 정도면 길어야 이틀이면 충분하건만, 이거 진심으로 하는 얘긴데, 소설책이 재미가 없으니까 속도도 나가지 않더라고. 그 정도로 재미없었다. 읽다가 그만 읽을까, 이렇게 많이 망설인 책도 별로 없을 듯. 그러니 당신이 이 책을 정말로 읽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데, 단단히 마음 매조져야 할 것. 뭐,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독자 리뷰 읽어보면 별 다섯 개 만점으로 다섯 개 다 채운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내 눈알이 삐어서 재미없게 읽었다고 보시면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읽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라.


  책은 모두 네 개의 장part으로 되어있다.

  1부 “채권”은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부자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벤저민 래스크의 한평생을 조망했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소설인 셈. 이걸 한 번 따라가 보자.

  벤저민 래스크의 부계 조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1662년에 코펜하겐을 떠나 클래스고로 이주했다. 벤저민의 고조 할아버지 대에 와서 식민지에서 생산한 담배 거래를 백 년 이상 점점 크게, 점점 크게 벌이다가 벤저민의 아버지인 솔로몬 벤저민 씨는 담배회사의 지분을 몽땅 사들인 후, 머지않아 미국 동부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담배 무역상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솔로몬 래스크 씨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시가와 시가릴로(얇은 시가), 파이프 담배를 공급했고, 이런 성공은 씨의 탁월한 대화술과 정치적 연줄을 제공하는 능력이 밑받침이 된 것이 물론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씨는 뉴욕 웨스트 17번가에 타운하우스를 건설해 그곳에서 벤저민을 낳는다. 최고의 부호로 이름을 높인 솔로몬 래스크 씨는 쿠바에 작은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월동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아내 윌헬미나는 허드슨강 동안에 여름 별장, 뉴포트에는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아들과 오래 묵었다. 그러니까 부부/가족은 여름과 겨울, 일년의 반 동안은 서로 코빼기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태도와 지능, 순종적인 성품이 잘 조화된 아이들을 일컫는 단어인 “모범적”인 어린이 밴저민은 단 한 가지, 다른 아이와 어울리기 꺼리는 것만 빼면 어디 한 구석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들어간 기숙학교에서 벤저민은 여전히 무감각한 태도로 전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낸 영재였다. 기숙학교 졸업반일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한 방에 훅 갔고, 다음 해 졸업 직전인 5월엔 어머니마저 폐기종으로 숟가락 놨다. 그럼에도 벤저민은 대학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래스크가 특유의 혈통이 벤저민 대에서 끊어진 것으로 봤다. 뉴욕으로 돌아간 벤저민은 거의 대부분 성공을 거둔 분야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는 선대와 다르게 서툰 스포츠맨이었고, 무감각한 사교가였으며, 열정 없는 술꾼에 냉담한 도박사이자 뜨뜻미지근한 연인이었다. 억눌러야만 하는 욕구도 없는 데다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담배회사의 총수였다. 벤저민한테는 담배사업만큼 재미없는 일이 없어서, 회사 경영을 임원진에 맡겨버린 것도 모자라, 쿠바에 있는 초호화 아버지 별장도 별장 안의 온갖 귀중품과 더불어 현지의 반half 사기꾼 대리인을 통해 홀랑 팔아버렸다.

  그러다가 1907년의 불황이 다가왔다. 성격이 이랬으니 벤저민 래스크는 홀랑 거지가 됐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장기 유럽 여행 스케쥴을 짜던 벤저민이 갑자기 무슨 냄새를 맡았다. 아버지 별장 판 돈을 비롯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동산current asset을 주식에 투자했었는데, 그걸 한 방에 몽땅 팔아 금채권을 산 거다. 유럽? 거긴 안 가도 돼! 금본위 화폐 시대에 금채권을 확보했으니 이제 기다리는 건 하늘에서 쏟아질 돈벼락뿐이었다. 수많은 은행이 지급불능사태를 맞아 문을 닫건 말건 불황은 벤저민에게 황금알을 쑥쑥 낳아주었고, 그동안 신경쓰지 않은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한 규모로 증폭되어 있었다. 자신의 자산을 관리해주고 있던 J.S. 윈슬로 회사의 총수인 윈슬로 2세가 벤저민의 공격적인 투자에 회의를 품자 그동안 불편하지만 긴밀하게 협력해왔던 투자회사를 단박에 해고해버리고 직접 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벤저민이 보기에 금융계와 투기는 죽을 수 있지만 균 하나 없는 깨끗한 생물이었다. 생각하고, 말하고, 서명하면 끝나는 일.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 필요가 조금도 없는 유일한 무균질 작업. 완전히 자기 성격에 맞는 일이었다. 1907년에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대표 찰스 바니가 자살하자마자 전세계 증시에 공포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고, 벤저민은 민첩하게 탄력성을 확보한 기업의 저평가된 자산을 인수해버리기 시작했다. 돈 놓고 돈 먹기의 귀재 J.P. 모건이 벤저민을 지켜보다가 넋을 잃고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지만, 벤저민은 싹 잘라 거절했을 정도. 이렇게 일이 커지니 아무리 벤저민이라도 직원을 고용할 수밖에. 심부름꾼부터 시작해 타이피스트, 그러다가 이제 제대로 공부한 회계사가 필요했고, 점점 커져 다양한 종류의 인력을 모았다. 초기에 모인 인재 가운데 벤저민이 혐오하는 금융계의 모습을 다양하게 지니고 있던 셸던이란 작자도 있었는데, 그는 어느새 벤저민의 사업을 위한 완전한 대변인으로 변해 있었다. 1914년 취리히 은행가로 출장을 떠난 셸던은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곳에서 발이 묶였다. 이때 그곳에서 명성은 있지만 재산은 없는 올버니의 오랜 명문가 브레보트 댁의 외동따님 헬렌을 알게 된다. 이 헬렌이 몇 년 흘러 10대 후반이 되자 벤저민 래스크와 혼인을 해 헬렌 래스크가 된다.

  브레보트 씨는 심령술, 연금술, 최면술, 강령술 등 다양한 신비주의에 함몰된 인물로 평소에 딸과 긴밀한 유대를 지니기도 했다. 당연히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미쳤겠지. 그래서 그런지 헬렌은 결혼을 하고 1930년대 대공황을 만나, 벤저민이 1907년 당시의 불황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친 수준의 천재성을 발휘해 지상 최고의 부자가 된 후, 미국의 문화, 특히 음악과 학교, 전시회 등을 위한 활수한 기부를 이어가다가 아빠 브레보트 씨와 비슷한 정신 질환을 앓는다. 헬렌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반드시 아버지가 입원했다가 행방불명이 된 바로 그 스위스의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곳에서 다양한 치료를 받다가, 별로 효과가 없자, 벤저민이 투자한 독일 제약회사가 제안한 주치의의 처치를 받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예상한 바와 같이, 죽는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총기가 빠진 벤저민은 이후 그저 그런 투자가 수준으로 급전직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 속에 머물기 시작한다.


  이게 삼류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작품 “채권”이다. 근데 당시에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미국사람들은 벤저민과 헬렌 래스크가 실재하는 투자 귀재 앤드루와 밀드레드 베벨 부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책을, 평소엔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앤드루 베벨도 읽었다. 절대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베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재산의 힘으로 책을 낸 출판사를 통째로 사버린 후, 작가 배너에게 거액을 주고 평생 저작권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시중에 나도는 책의 전량 회수, 창고에 쌓인 회수품과 재고품 전량 소각. 평생 저작권 계약을 맺을 때 지불한 거액의 계약금은 막강한 변호사 집단에 의한 연속적 소송으로 거덜을 낸다. 소송을 해서 벤저민 측이 져도 상관없다. 배너가 방어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고 그때마다 거액의 변호사 비용이 들 터이니.

  작가는 그렇게 처리하면 끝이다. 그러면 이왕 퍼져 있는 소설은 어떻게 할까? 앤드루 베벨은 직접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그게 2부. 3부로 들어가면, 자서전을 쓰기 위한 도우미, 한 번도 정식 문학 수업을 받아본 적 없는 글 좀 쓰는 여성 타이피스트 아이다 파르텐자를 고용한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노년에 접어든 아이다 파르텐자가 뉴욕 웨스트 17번가의 베벨 박물관에 들어 자료를 다시 찾아보며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4부는? 투자의 귀재 앤드루 베벨의 아내 밀드레드가 쓴 일기. 이게 “일기”이니 유일하게 사실과 근접한 기록일 터.


  정말 재미없게, 지루하게 읽은 책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별점을 주면 다섯 개 만점에 넷 정도를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왜? 앤드루 베벨은 자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능력, 돈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진짜로 그렇게 행동을 한 인물이다. 삼류작가 해럴드 배너의 책을 읽고 인생을 무참하게 끝내버렸을 수 있고, 남들이 보이게 베벨이 배너의 조종을 울렸다고 “오해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독자 마음이다.

  혹시 말이지, 천하 제일의 부자 앤드루 베벨이 뭔가 아내 밀드레드한테 꿀리는 것이 있어서 삼류작가이기는 하지만, 삼류작가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해럴드 배너를 고용해 신경정신 질환으로 숨을 거두는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던 건 아닌가? 재무적으로 거덜을 냈다고 하지만 천문학적인 현금을 가지고 있는 베벨이 그정도 보상을 해주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 여기저기 내가 그 새끼 손 좀 봤어, 소문이 나게 만드는 건 말 그대로 껌 씹는 수준일 거고. 이미 책을 읽어볼 사람은 다 읽은 다음이니까. 애초에 자서전도 출간할 마음이 없었으면서 그냥 쓰는 흉내만 냈던 거고. 이미 죽은 아내에게 그리도 헌신적인 남편이란 소문만 나게 말이지. 그래서 3류 작가가 쓴 소설 속의 소설 <채권>이 그렇게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내 생각이 맞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랬으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는 전제로 별점을 주면 네 개 정도이다, 하는 수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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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9-10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역국도 어디서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다르겠죠? 어떤 상은 후보만으로도 영예가 되기도 하겠죠. 약간의 호불호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작가가 난 사람이긴 한가 봅니다. ㅋ

Falstaff 2024-09-10 18:33   좋아요 1 | URL
이 양반 꽤 인기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같은 언어가 아니라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 지도 몰겠습니다. ^^;;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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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정사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레이엄 헨드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스스로 껄걸 웃기까지 했다. 손을 뻗어 딸의 눈을 가려야 되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첫 문단이다. 으, 튄다. 그러니까 아빠와 딸이 보는 앞에서 엄마가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였다는 얘기 아냐? 근데 그걸 보면서 딸의 시선과 관계없이 껄껄 웃었다는 거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반스라고 해도 이거 쇼킹한 걸, 흠. 당연히 다음 문단에서 의문은 해소된다.

  “물론 그 배후에는 바버라가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 바버라는, 스크린 상에서 정사를 즐기고 있는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니까 남편과 딸이 극장에 가서 지금의 아내 앤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는데, 여기에 그레이엄도 모르고 있던 두 번째 아내 앤의 정사 씬이 나왔다는 거다. 알았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간다. 당연히 결혼 전이기는 하지만 앤이 한 시절 영화배우였고, 그래서 영락없는 B급 영화에 출연을 했으며, 스타였던 적은 없으니 단역이었는데,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장애인 형사와 약 2분에 걸친 말 그대로 베드 씬을 찍었던 거다. 근데 이상하다. 단역이 2분간? 영화에서 2분이 짧은 시간은 아니다. 2분 동안 앤은 놀라움, 노여움, 경멸, 의심, 뉘우침, 공포, 또다시 노여움을 번갈아 연기했고, 잠깐 벌거벗은 어깨를 보여주는 데 그쳤다. 2분이라?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

  그레이엄과 결혼 전이고, 예술의 한 형태인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불과하니 그가 껄껄 웃을 수 있었다. 심지어 청소년 관람불가인 영화임에도 보호자 동반이란 명목으로 딸 앨리스와 함께 보면서. 근데 더 웃기는 건 전처 바버라가 전남편 그레이엄에게는 영화 속에 딸이 다니는 학교가 나온다고 해서 학교 친구 여럿이 함께 보기로 했다고 하고, 딸 앨리스한테는 아빠 그레이엄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쓰레기 또는 형편없는 매춘부, 앤이라는 여자의 가장 자신하는 배역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면서 이 사달을 만든 거였다. 바버라는 앤이 예전에 영화배우를 했으며 어떤 영화에 출연했고, 그 영화에 무슨 장면이 있는데, 지금 런던의 빈민구역에 있는 재개봉관인 할레웨이 오데온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정답: 바버라가 스파이를 많이 두고 있었다고, 나중에 자기 입으로 말한다.


  1977년 4월 22일. 그레이엄은 바버라와 별 불만 없이 15년의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며, 10년 동안 같은 직장에 다니며 직종을 바꿀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런던대학 현대사 교수다. 여전히 바버라를 좋아하지만 적어도 최근 5년간 바버라와의 관계에 대해 긍지를 느끼지는 못했다. 딱 이날, 그의 새로운 사랑의 꿀맛이 스타트 라인을 출발했다. 랩턴 가든스에서 열린 잭 랩턴의 파티에서 호스트가, 낙하산을 타는 여성이라고 앤을 오랜 친구 그레이엄에게 소개했다. 그레이엄이 신경외과 의사이긴 한데 전문의는 아니고 지금 수련의 과정이라면서. 잭 랩턴의 직업은 대중 소설가. 특기는 지금처럼 이야기 만들어내기. 앤의 진짜 직업은 옷을 구매하는 바이어였다. 여섯 단위의 금액, 그러니까 백만 파운드 미만까지 권한이 있는 구매팀 대리였다. 당연히 이전 직업을 이야기해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때 그레이엄의 나이가 서른여덟. 앤은 서른하나. 물론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의 꿀맛”을 본 건 아니었다. 영국인으로는 믿기지 않게 그레이엄은 결혼 생활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도의 경험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며칠 후 그는 자신을 속이고 2973-8013, 전화로 데이트를 신청했으며, 만났고, 저녁밥을 같이 먹었고, 그냥 각자 집에 갔다. 두 번째 만나서 또 밥을 먹고 헤어졌다. 앤은 자연스러웠고, 솔직했지만 어느새 그레이엄은 육체의 통신망을 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세 번째 만나서, 했다. 이제 비로소 그레이엄은 쾌락에 눈뜨고, 복잡한 접근법과 얼떨떨한 향락까지 알게 됐다. 다 그런 거다. 늦바람이 무섭다니까.

  앤이 생각하기에 (1977년 기준으로) 여자가 서른 살이 넘으면 만날 수 있는 남자라고는 ①유부남, ②동성연애자. ③정신이상자뿐인데, 이 가운데 그래도 유부남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커플은 쉬지 않고 섹스를 하더니 이제 자신들의 관계를 바버라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연히 바버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말이 쉽지 어디 이런 말을 꺼내기가 만만하겠어? 그레이엄은 결심 세 번째에 자기한테 애인이 생겼음을 (건조하게) 말하고, 그래서 집을 나가야겠다고 선언했으며, 아내한테 (당연히) 독한 말을 들으면서 최소의 옷가지만 챙겨 그날로 처자식을 집에 두고 떠난다. 바버라는 즉시 이혼, 완전하고도 진부한 간통이혼을 요구해, 그레이엄이 주택 융자금을 계속 내고, 딸의 양육비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집기와 가구와 자동차까지 바버라의 소유로 남긴 채, 바버라가 평생 노동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이혼서류에 인감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곧바로 앤과 결혼식을 올린다.

  서양 사람들, 너무 성급해. 뭐가 급해서 이혼하자마자 다시 결혼을 하나 그래. 더 시간을 두고 주민등록부터 시작해 바이오그래피와 건강진단서를 비롯한 제반 조건을 교환하고 토론한 이후에 해도 좋을 것을 말이지. 어차피 할 거 다 하고 살면서. 이렇게 대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결혼을 했으니 앤은 자신의 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겠지. 혼인신고서에 지장 찍은 후엔 굳이 얘기해 줄 필요가 없었을 터이고. 근데 그게 비극의 씨앗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이야기가 필요해요, 이야기가. 아니면 간혹 오셀로로 변신하는 수가 있거든.


  오셀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셀로한테는 원래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 것이었던 손수건이 있고, 토스카에서는 스카르피아의 부채가 있듯이, 그레이엄한테는 바버라가 보게 만든 영화의 베드씬이 있었던 거였다. 처음에 그레이엄이 장면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고 했다. 맞다. 웃었다. 뭐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 누가 자기 마누라가 훌떡 벗고 영화에 나오는데, 그걸 알지도 못했다가 갑자기 보고나서 거 기분 좋다, 하겠나? 하여튼 그레이엄은 영화를 보고 와서 앤에게 영화 이야기를 했고, 하다가 보니, 베드 씬의 남자와 영화 말고 영화를 찍는 중이나 찍은 후에 정말로 섹스를 하긴 했느냐, 라고 물어봤는데,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앤이 워낙 솔직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저 위에서 앤의 미덕 가운데 하나가 솔직함이라고 했잖여, 그래서 처음엔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성기에 최고를 즐거운 시절을 보낸 추억의 이야기이기도 했겠지. 이왕 결혼을 했고, 다 지나간 것을 굳이 숨길 이유도 없다. 그런데, 그게 자기 생각이지.

  아내의 과거에 집착하는 남자. 그것도 매우 심한 질투심을 느끼면서. 본인도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내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집착하게 되는 난센스. 아내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를, 몇 번씩 보고, 함께 출연해 베드 씬을 찍은 모든 남자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뒤지고, 도서관이나 영화 관련 기관에서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을 복사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없는, 진짜로 없는 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스토리는 이쯤에서 그만.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지 아니면 벌써 그쳤을 텐데, 혹시라도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 복간될 지 모르니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그 장면이 내가 좋아하는 쪽은 아니지만 하도 뒤통수를 때려 정신이 다 얼얼하다. 이걸 일러드릴 수는 없겠다.

  이렇게 끝을 맺는 줄리언 반스는 또 처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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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9-09 0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뭡니까 폴스타프님. 마지막 장면을 알려주셔야죠 -_-

Falstaff 2024-09-09 07:19   좋아요 1 | URL
아휴, 안 됩니다. 진짜 충격적이었습니다. 헉! 했다니까요.
혹시 읽어보실 분을 위해 저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걸 무릅쓰고... 흑흑...

수이 2024-09-09 07:23   좋아요 1 | URL
내일 도서관 가야겠군요 🤔

잠자냥 2024-09-09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전 압니다.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9-09 16: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자냥 님 알고 있는 걸 아는 폴. ㅋㅋㅋㅋ
그럼 결말을 차마 얘기 못하는 것도 느므느므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충복
하인리히 만 지음, 남기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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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만은 1871년에 독일 북부 뤼베크 자유시의 곡물상인이자 시의원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브라질에서 온 마리아 루이사 다 실바 사이의 다섯 아이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일 혈통이 반, 포르투갈과 원주민 혈통이 각각 반의 반이었다. 맏이 하인리히는 엄마 쪽을 탁해 활달하고 감정적이었던 반면에 동생 토마스는 오리지널 독일 성향으로 무뚝뚝하고, 재미없고, 엄격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형제 상봉한 뒤로 토마스의 아들 클라우스 만을 비롯한 토마스의 자식들마저 아버지보다 다감하고 다정한 하인리히를 더 따랐다고 한다. 작품 성향도 완전히 다르다. 192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이야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읽기 위해서 조금의 인내가 필요한 상징과 아이러니, 심리묘사, 서사, 성서를 기본으로 한 작품을 주로 쓴 반면에, 내가 읽은 하인리히는 (<충복>을 포함해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과 <앙리 4세> 이렇게 세 작품밖에 안 되지만) 기성의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해학 섞인 풍자로 엮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형제들이 다 늦게 화해할 때까지 우애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만 형제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첫 발자국을 이 소설 <충복 Der Untertan>이 찍는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쓴 <충복>은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의 좌익 진영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는다. 작품 속에서 하인리히 만은 빌헬름 2세 치세의 민족주의와 황제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말로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 고용주 (쁘티)부르주아로 살고 있는 변질된 자유주의한테도 서슴없이 손가락질을 날린다. 따라서 책 좀 읽겠다 마음먹은 독자들에게 큰 장벽으로 등장하는 <마의 산>에서 완쾌되지 않은 7년의 요양소 생활을 뿌리치고 1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에서 보듯, 초기에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입장에 섰던 토마스와 뜻을 같이 할 수 없었을 터이다. 훗날 토마스는 자기 친형이 쓴 <충복>을 “국가적 중상모략”이니 “무자비하고 무자비한 유미주의” 작품이니 하고 내놓고 반대의견의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니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형제간 싸움박질 하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지 않게 해야지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는 말이지.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상봉했을 때, 둘 다 반전주의자요, 반 나치, 즉 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굳어졌고, 그래서 화해할 수 있었으니.


하인리히(왼쪽)과 토마스 만


  충복忠僕.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내 종.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풍자적으로 쓰면 충복보다 충견忠犬, 주인을 진심으로 따르는 개와 비슷하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하인리히 만이 제시한 충복의 전형은 네드치히 시의 제지공장 사장 헤슬링 씨의 맏이이자 외아들인 디데리히. 아버지 헤슬링 씨는 오래된 제지공장에서 수공예지를 만드는 공원 생활을 오래 하다가, 마지막 전쟁으로 불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몸에 포탄 파편이 박힌 상태에서 돌아와, 이제는 늙어 공장 운영을 지속하기 힘든 사장으로부터 제지 기계를 구입해 창업을 했다. 아무리 19세기였다 해도 적수공권에서 시작해 가업을 이루어 유지하기 위해서 치밀한 사업가로 변모해야 했고, 만사가 불여튼튼, 매사 엄격하고 신중한 몸가짐을 일상화해야 했는데 이는 아내와 아들과 두 딸로 이루어진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특히 아들을 훈육하기 위한 최선, 최고의 방법은 회초리였다. 헤슬링 사장 역시 사소한 잘못이라도 외아들 디데리히의 엉덩이에 가차없이 회초리를 날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한테 제일 무서운 존재로 등극해버렸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이는 공상을 좋아하고, 겁이 많고, 귓병을 자주 앓았다.

  엄마 헤슬링 부인은?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자주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음, 아빠가 저리 아이를 훈육하는데 엄마가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나더러 물러 빠진 엄마라고 할 지도 모르지, 분명이 이렇게 생각해, 타당한 일 없이 고의적으로 디데리히를 매질하기에 이르렀다. 디데리히 입장에서 아빠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때리는데 엄마는 심심풀이 하기 위해 때리는 것 같아, 엄마에 대한 존경심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별로 생각이 없는 엄마. 심지어 나중에 디데리히가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가 늙어 숟가락 놓아 장례를 치르러 아들이 오자, 엄마는 아버지가 외아들한테 이런 걸 희망했다고 없는 일을 지어낼 정도다.

  “나는 아들 디데리히를 통해서 영생할 것이고, 디데리히는 아버지(사실 주장하는 바는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들이 척 들어보니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엄마처럼 병적으로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든. 어떤 집안인지 감이 딱 잡힌다. 이런 부모에게 배운 것이 있어서 디데리히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여동생들에게 권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받아쓰기를 시키고, 일부러 어려운 문제만 내서 동생들을 매우 잔인하게 처벌해놓고, 시간이 가면 눈물을 짜던 동생들한테 마음이 좋지 않아 용서를 빌고는 했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약하다니까. 근데 마음도 상대를 봐 가며 약해지는 모양이다.

  김나지움 4학년 시절에 학급에 딱 한 명 있던 유대인 급우 앞에 십자가를 턱 내려놓고, 이 앞에 무릎을 꿇으라 요구했다. 유대인 아이가 십자가 앞에서 조아릴 수는 없는 법, 아이는 완강하게 거절했고, 그러자 자신을 둘러싸고 행악을 방관하는 급우들 다중의 힘을 믿어 유대 아이를 줘 패는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디데리히한테 박수와 지지를 보냈다. 아직 1차 세계대전도 터지기 한참 전인데도 그랬다. 하여간 디데리히는 이 일을 네트치히 시의 기독교인 전체를 대표한 일이라 조잘댔고, 학급에서의 권력이 무한상승 했으며, 유대인 징벌의 책임과 죄의식을 집단이 공유하니 마음도 편해진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당연히 교사들도 이 일을 방관하기만 했다. 당시에 전 유럽이 비슷했다. 이후 디데리히는 새로 전임해 온 담임의 총애를 받아, 명예를 감안해 학급 반장과 비밀 감시자를 겸임했으니,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본 것. 그리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학교 내 ‘권력’과 가까워야 한다는 진리를 배운 계기였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베를린대학에 입학한다. 당연히 연애사도 있지만 디데리히의 저급한 인간성이 두드러질 뿐 별것 없으니 연애사는 그냥 넘어가자. 그래도 19세기에 처녀 신세 조져놓고 가세가 기울자 트집을 잡아 아가씨의 아버지한테 모욕을 주어 관계를 끊어버리면 나쁜 인간 맞지? 같은 동네에서 약국 약사를 지망했던 1년 후배 호르눙이 입학하자 “노이토이토니아”라는 클럽에 들어간다. 당연히 처음부터 흔쾌히 들어간 건 아니다. 몇 달간 간을 보다가 앞뒤 사정 보고 들어간 건데, 남자다운 씩씩한 기상과 이상주의를 배우는 걸 목표로 하고, 정식 회원이 되려면 결투를 해야 했다. 진짜 펜싱 칼을 들고. 경기용은 날이 없고 뾰족한 첨단 끝을 동그랗게 만들어 다치지 않게 했지만, 진짜 칼엔 그런 안전장치가 없다. 이때 비벨이라는 이름의, 법학을 전공한다는 것만 가지고 디데리히한테 절대적 존경을 받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선배가 있어서 기꺼이 결투에 응해주는데, 이때 디데리히는 평생 영광스러운 훈장으로 써먹게 될 뺨에 길게 꿰맨 흉터를 갖게 된다. 이게 당대 독일 대학생한테 큰 유행이었다. 남자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성형술이라 보면 된다. 게다가 머리에도 상처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으니 운동을 하지 않아 퉁퉁한 비만 스타일의 디데리히한테는 얼마나 좋은 액세서리였는지!

  그러나 대학 졸업과 동시에 1년 동안 군대 복무를 해야 했다. 군의관이 디데리히를 척 보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는 조만간 네 배 속에 가득 든 기름 덩어리를 제거할 것이다.” 하여간 입대를 해 신병 훈련소에 가서도 이리저리 뺀질거리다가 네트치히 살 때 어린 시절의 주치의 오이토이펠 원장한테 편지를 보내 자기한테 갑상선종과 구루병 증세가 있다고 증명서를 만들어 보내줄 수 있느냐고 편지를 보낸다. 의사 오이토이펠 선생은 우리 주인공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으며, 훗날 디데리히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자유주의자 당원이자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의 신분으로, 민족주의당 디데리히 헤슬링과는 철천지원수로 만나게 된다. 디데리히는 도저히 군대, 특히 훈련소의 격한 훈련을 견딜 수 없어 노이토이토니아 클럽 회원의 권력층 아버지한테 부탁해 거의 모든 훈련에서 열외 조치를 받고, 그것도 모자라 조기 제대를 한다. 그래도 권력이 좋기는 좋다. 나중에 네트치히 시의 재향군인회 간부까지 되는 걸 보면.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아버지도 세상 뜨고, 병역도 마쳤으며, 학위도 따 화학 박사가 되어 금의환향, 네트치히 시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민족주의자당의 실세로 등극한다. 당연히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게. 처음엔 아버지가 남긴 작은 제지공장의 사장으로 시작한다. 황제를 위한 황제에 의한 황제의 나라를 꿈꾸며 전 세계를 지배할 독일 제국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마음이지만, 처음부터 잘 나가는 건 아니다. 젊은 디데리히 헤슬링 사장은 작은 네트치히 시에서도 권력 있는 자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치사한 일을 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한다. 이런 것을 전부 다 하인리히 만 특유의 골계와 풍자 속에서 진행한다. 본문만 759페이지로 작은 분량이 아니다. 그걸 거의 다 이렇게 가공한 블랙 유머로 채우면 독자는? 그렇다. 멀미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지막 결말이 재미있다. 당연히 어떤 장면인지 안 알려드린다. 세상의 찌질한 남자 디데리히 헤슬링의 출세길을 따라가 보시라. 32,800원. 책값이 비싸서 행여 취향에 맞지 않으면 낭패일 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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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9-06 06: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줄리언 반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화요일. 에르난 디아스, <트러스트>
수요일. 마리야 스테파노바, <기억의 기억들>
목요일. 아고타 크리스토프, 《잘못 걸려온 전화》
금요일. 제임스 볼드윈, <조반니의 방>
 
먼고 해밀턴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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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출생해 스물네 살 때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단다.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잭 스페이드 같은 곳에서 20년 넘게 일했다니 틀린 말은 아니다. 수석 디자이너면 뭐해, 열두 시간 교대근무 하는 데. 스튜어트가 대단한 게, 맞교대 하면서 무슨 시간이 났는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썼으니 소설가로도 이름을 높이게 만든 <셔기 베인>이란다. 이게 영국과 미국의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지만 (32곳의 미국 출판사, 영국 출판사 12군데) 하여튼 결국 미국의 독립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어 시장에 나왔고, 2020년에 덜컥 부커상을 받는 바람에 이제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부커상이 그렇다. 무명이었다가 한 방에 스타로 뛸 수 있게 만드는 권위.

  우리나라에서도 <셔기 베인>이 센세이셔널했지 아마? 그래서 한 김 빠지길 기다렸다가 읽겠다고 마음먹었었다가, 날이 가면서 그만 잊고 지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3년 가까이 지났다. 그러다가 인터넷 책방 알라딘의 AI가 나를 위해 이 <먼고 해밀턴>을 추천했다. 나는 무릎을 치며, 아, 이 작가가 <셔기 베인>을 쓴 이지? 기억이 나서 얼른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한 달을 기다렸다가 읽었고, 모두 5백 페이지 분량인데, 270페이지까지 읽은 다음, 도무지 읽어주지 못해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만일 2001년 말에 <셔기 베인>을 읽었다면 분명히 내 돈 내 산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다, 이 책의 독자평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나 말고 감격에 겨워 읽는 독자가 있을 것일 터, 위안을 삼자, 뭐 이 정도 선에서 마감을 하고, 도서관 “내 서재”의 “관심도서” 목록에서 얼른 <셔기 베인>마저 지워버렸다.


  먼고 해밀턴. 원래 책 제목은 <젊은 먼고> 또는 <어린 먼고>다. 열다섯 살이긴 하지만 애가 좀 늦게 되는 아이라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3. 당연히 알 거 다 알고, 어차피 이왕 해볼 거 할 준비가 완료된 ‘일상 거총’ 상태의 탱탱한 사춘기 소년 생각하지 마시라. 주워듣기로 <셔기 베인>에서도 주인공 셔기가 열다섯 살 난 늦된 아이로 알고 있으며, 그 작품처럼 <먼고 해밀턴> 속에도 자전적 이야기가 적지 않게 들어있다고 하니 스튜어트도 좀 그랬지 않나 싶다.

  거의 모든 포유류가 그렇지만 특히 어린 인간종에게는 끔찍할 만큼 슬픈 본능이 있다. 부모, 특히 어미가 아무리 새끼에게 모질어도 새끼는 어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성. 스스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새끼 시절에 생존을 위해 이런 본성이 특화해 진화했을 것이다. 이러다가 대가리가 커져 자기 혼자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오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힘이 세지 않은 엄마한테 박박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기성세대는 이걸 ‘제2의 탄생’이라 주접 떨며 아무쪼록 여드름이 돋기 시작하는 자식 새끼가 큰 탈 없이 사춘기 시절을 지나기 바라는 거고. 근데 그것 마저 지나 이제 성인이 되면 전세 역전이다. 그러니 사춘기 자식을 둔 부모들이여, 미리미리 자식새끼한테 잘 하시라. 나중에 후회 말고.

  우리의 먼고는 그러나 이 시기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엄마 모모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 이름이 모모다. 몸에 털이 많아 모모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모모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자기 아이들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 그렇게 부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는 거다. 원래 이름은 모린. 지금은 대외적으로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인 AA 클럽에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월목 모린”이라 불린다. 실제로는 책에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열다섯 살 때 지금은 ‘빅 하하’라고 부르기로 한 해밀턴 군을 만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래서 임신과 출산을 해서 맏이 하미시, 대외적인 호칭으로 ‘하하’를 낳았고, 이어서 줄줄이 둘째 조디와 막내 먼고를 출산했으니 이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동네 논두렁 건달 가운데 대빵이었던 빅 하하는 어울리지 않게 패싸움에 가담을 했다가 칼을 맞아 드런 세상 겨우 스무 해를 살고 숟가락 놨다. 이후 모모는 술에 빠지기 시작해 곧장 깊은 알코올 의존증으로 접어들었다. 술만 취했다 하면, 혹은 몸에서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기대치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많은 의존자들이 그러하듯이 전혀 다른 인격체로 돌변해 집구석에 뭐 제대로 남아남는 것이 없었다. 그럴 때면 어린 조디는 동생 먼고를 데리고 모모가 찾을 수 없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 지금 엄마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건 엄마 모모가 아니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인간 ‘태티 보글’이라고, 이렇게 달래면서 열여섯 살이 되었다. 이젠 모모도 함부로 자식들 앞에서 테티 보글로 변신할 수 없다. 힘이 달리니까. 완력도 달리니까. 까불면 오히려 제압당하니까. 그러게 내가 뭐랬어, 잘 하라고 했잖아.

  맏이 하미시는 벌써 열여덟 살. 아빠 빅 하하의 대를 이어 글래스고 빈민가이자 개신교 구역 논두렁 건달의 왕초 자리를 꿰찼다.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완력으로 무지르고 그게 괴롭힘으로 나타나고, 특히 늦된 먼고를 남성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거칠게 “키우려고” 나름대로 열심이다. 열여덟짜리 형이 열다섯 살짜리 동생을 키운다고 고생이 자심하겠지? 읽어보시라. 그것도 고생일 듯하다.


  엄마 모모는 자식들한테 관심이 없다. 혹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아이 셋 달린 홀아비 조키와 열애중이다. 자기 생각엔 서로 죽기 살기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독자가 보기엔 조키 생각으로는 그저 섹스 파트너 아닐까 싶다. 집에 불러 며칠 살다가 싫증나면 쫓아버리고, 며칠 지나 또 아래가 궁금해지면 전화 찍 해서 불러올 수 있는 여자. 문제는 모모가 조키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는 거. 처음에 말했듯이 내가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라 단정하지는 못하지 믿지도 마시라. 그리하여 모모는 조키의 집에서 살다가 쫓겨나야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제정신일 수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엄마. 모모 역시 맏아들 하미시처럼 먼고가 사내답지 못하다는 것이 고민이다. 그래서 같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다니는 두 남자, 문신이 촘촘한 젊은 갤러게이트와 쉰 살 이상으로 보이는 세인트 크리스토퍼에게 먼고를 남자답게 대해달라고 함께 2박 3일의 낚시 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래서 대한민국 천안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북위 55도 51분에 위치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도 북쪽으로 아무리 5월(6월인가?)이라도 반바지에 점퍼 하나 입혀서 캠핑을 떠난다.

  두 명은 같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 클럽 회원이면서, 발리니 교도소 감방 동기이며, 여전히 하루 종일 맥주와 위스키, 기타 에틸 알코올을 흡수할 수 있는 모든 액체를 섭취하기에 조금의 게으름이 없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둘 다 양성애자이다.

  먼고는 엄마의 무관심과 엄마를 간절하게 원해서 곱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조금의 불편한 상황에 처하기만 해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일종의 틱 증상을 보인다. 자신도 그것을 알아 얼굴을 긁어대 잘 생긴 모습이기는 하지만 흉터가 많다. 선한 누나 조디 역시 틱 증상이 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히히익, 하며 엽기적으로 웃어버리는 것. 이외에도 아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 유독 나이 많은 남자한테 끌려, 학교 선생과 밀회 끝에 임신하는 바람에, 선생은 교장한테 전화 한 통으로 사표를 가름한 채 도망쳐버리고, 아랫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중절수술을 받는다.

  이 정도면 내가 도무지 더 이상 읽어주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 듯하다. 더글러스 스튜어트는 이 참담한 광경, 특히 먼고한테 벌어지는 참혹한 장면을 발갛게 묘사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불과 몇 달 만에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았던 베스트 셀러 <리틀 라이프>를 다른 버전으로 읽는 일이 생겼던 거다. <셔기 베인>도, <먼고 해밀턴>도 그리고 <리틀 라이프>는 말할 것도 없이 독자 평이 좋다. 굳이 내 독후감을 믿을 필요 없다. 단지 나는 이런 스타일의 작품하고 도무지 맞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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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고니시의 번영과 몰락
베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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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20세기도 20여 년이 흘렀음에도 관중에게 가장 비싼 비용을 치르게 만드는 오페라 장르를 계속 “미식가적 취향”에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한 지에 대해 고민한다. 이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브레히트와 주어캄프의 주석에 그들(브레히트와 주어캄프)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의 오페라는 미식가적 오페라다. 오페라는 상품이기 훨씬 전부터 향락의 도구였다. 오페라가 교양을 요구하고 교양을 전달한다 해도 오페라는 쾌락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기호의 형성이나 전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어떠한 대상이든 즐기는 태도로 접근한다. 오페라는 하나의 ‘체험’이고 ‘체험’으로서 기여한다.”


  인용의 마지막 문장에서 오페라가 “체험으로서” 기여한다고 했다. “으로서”는 자격격 조사이다. 즉 문장을 잘못 쓴 것이 아니라면, “체험”의 과정을 통해서(기구격 조사 ‘으로써’)가 아니라 기호의 형성인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학의 극화 자체”로 관중에게 기여한다고 말한다.

  베르톨트는 이런 개념에 입각해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을 애초부터 오페라 대본, 리브레토를 썼다. 그리하여 <마하고니…>는 애초부터 “향락적”이고 감상자의 쾌락에 기여할 목적이다. 여태까지 지속해왔던 “비이성적 성격”을 가지는데 그것은 “입체성과 현실성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실성이 음악을 통해 제거”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거창한 무대와 오케스트라, 출연진과 합창단, 발레에 드는 비용으로 인민들의 하늘 위에 존재했던 오페라 무대를 이제 시장의 흙바닥에서도 공연하게 만들고 싶다. 이것이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포인트. <마하고니…>를 쓰기 몇 년 전에도 이들은 뜻을 합쳐 <서푼짜리 오페라>를 만들고 공연했다.

  나는 <마하고니…>가 처음부터 오페라를 위해 쓴 것인지 몰랐다. <마하고니…>라는 희곡작품이 있어서 그것을 쿠르트 바일이 하도 재미있게 읽고, 보아, 자기가 오페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서푼짜리 오페라>는 읽어봤으면서도 여태까지 원래 희곡인 줄 알았다. 요즘 출판사 지만지에서 나오는 책들에 슬슬 정나미가 떨어지는 판이었음에도 이 책을 읽으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까지 한 이유는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DVD로 가지고 있음에도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해 (쿠르트 바일의 작품이 재미가 없다니 이게 웬 일이냐는 말이지!) 원작을 한 번 읽어볼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 238쪽의 분량이긴 하지만 원 텍스트는 113쪽에서 끝나고 이어 부록, 삭제 장면, 해설, 작가 소개, 역자 소개가 본 텍스트 분량만큼 첨부되어 있다. 역시 지만지 드라마,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독자한테 별로 영양가 없는 정보를 제공하기에 여념이 없다. 혹시 당신이 브레히트를 전공하거나, 극작에 큰 관심이 있는 지망생이면 아주, 아주, 아쭈? 아주 좋은 정보일 수 있으니 읽어 보시든지.


1998년 찰스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DVD


  극작 특성상 진행이 무척 빠르다. 애초 협업하기로 뜻을 맞춘 쿠르트 바일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달라서 구구절절 독자/관객에게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마하고니라는 도시가 생긴 내력을 성실하게 소개할 의지는 별로 없다.

  막이 오르면 무대에 고장나 멈춘 트럭과 세 명의 등장인물이 보인다. 삼위일체 모세와 지배인 빌리, 그리고 마더 구스 역할인 베크비크. 애초 이들은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이 황량한 벌판에 도착했다. 하지만 앞에는 사막, 뒤에는 이들을 쫓는 경찰, 금을 캘 수 있는 해안으로 가야 하건만 트럭이 퍼져버렸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에 어미 거위 베크비크가 선언한다.

  “좋아, 그럼 여기다 자리를 잡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거면 여기 아래에 자리 잡는 거야. 이봐, 금 찾는 일은 힘든 일이고 우린 그런 일을 할 수 없어. 그렇지만 난 사내들을 잘 알지. 틀림없이 사내들은 금을 내놓을 거란 말이야. 강에서 금을 찾는 것보다 그 사내들한테 뜯어내는 게 더 쉬울 거야.”

  이리하여 세 명의 (범죄자인 것처럼 보이는) 뜨내기가 도시를 만들어 “마하고니”라 이름 짓는데, 마하고니는 그물망이란 뜻이란다. 금을 캐는 남자들인 감칠맛 나는 새들을 잡을 수 있는 그물망.


  작은 주머니에 금 조각을 담아 가슴에 품고 마하고니 시로 들어온 사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갈취하기 위한 방법은? 당연히 여자들이다. 이런 건 특별히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들어오는 법. 마하고니 시에도 제니를 비롯해 여섯 여자들이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등장해 <마하고니…>에서 가장 유명한 노트 “앨라배마 송 Alabama Song”을 노래한다. <마하고니…>는 1928~29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썼다. 그런데 난데없는 앨라배마? 브레히트와 바일 두 명의 독일인은 나중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지만 이 때까지 설마 자신들이 떠날 줄 알았겠어? 그럼에도 금과 꿀과 젖이 흐르는 신세계를 조금은 동경했을 지 모른다. 이것으로 마하고니 시가, 모르기는 하지만, 미국 땅에 있는 가상의 도시 아니겠느냐, 짐작을 할 수 있다. 이 노트의 가사는 브레히트가 독일어로 쓴 것을 <서푼짜리 오페라>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엘리자베트 하웁트만이 영어로 바꾸었다. 유명작 <직조공>을 쓴 게르하르트 하웁트만하고 인척관계인지는 모르겠다. 아닌 것 같다. 마침 유튜브에 올라 있으니 한 번 듣자.



  이후 몇 년 동안 도시는 세계 각처에서 불평 불만 가득한 남자들이 쇄도해 전성기를 만난다. 이제 도시에는 네 가지 미덕 또는 죽을 죄의 기치가 휘날리게 됐으니, 첫째는 폭식, “처먹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의 행위 즉 섹스이며, 셋째는 브레히트 스스로가 매료된 스포츠인 권투시합, 넷째로는 바로 술이다. 주목. Pay your attention. 네 가지 미덕 또는 죽을 죄. 즉 이것은 도시 마하고니의 가장 전성기를 만들었으며, 전성기라고 함은 이제 남은 건 쇠퇴밖에 없다는 얘기로 이 네 가지 때문에 마하고니는 쫄딱 망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쇠망사>가 로마의 전성기인 오현제 시절부터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 것처럼.

  그러면 이제 이야기는 다 끝났다.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다만 이 작품, 오페라를 위한 대본에 관심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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