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이 나온 것이 2010년. 시인의 나이 마흔세 살. 사십대 초반에 쓴 시들을 모아놓은 것이리라. 한 마디로 잘 읽었다. 내 마음에 딱 드는 시들이 많다. 근데 그토록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왜 시인이 되려 할까. 시집의 초판 1쇄가 2010년 2월. 내 책은 초판 8쇄, 2013년 7월. 이 정도면 시집으로는 많이 찍은 편일 텐데 쇄 당 인세로 얼마나 받을까. 56편의 시를 생산하기 위해 몇 달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려면 한 달에 몇 편의 시를 써야할까. 시인으로 생활하기 위해서, 암만 생각해도, “생활”하기 위해서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수돗물처럼 시를 써내야 할 거 같다. 아, 방법이 있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거나,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생활비는 벌어올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면 된다.




 시인은 국경에 산다



 시인의 집에 들러 저녁 때가 되었다


 일 마치고 들어온 시인의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 있던 시인과
 시인의 손님을 위해 밥을 지어 차려주었고
 나는 밥을 먹고 일어나 시인의 방에 들어가 서성인다


 무심코 책 한 권 뽑아들었는데
 책장 저 안쪽에 보이는 반 병의 말간 소주병


 밥을 다 먹고 따라 들어온 시인은
 도로 나가 먹다 남은 반찬과 술잔 하나를 챙겨들고 와
 방문을 닫아걸었다
 숨겨놓은 술병을 열었다


 벌어진 문 틈새로 설거지 소리 굉장히 들리고
 밥 짓는 냄새 격하게 문틈으로 쳐들어왔다
 다시 아무도 살지 않는 집처럼 바깥은 조용했다
 갑작스런 바깥의 고요를 물으니
 이른 출근을 위해 아내는 잠을 자는 중일 거란다


 짠물을 다 나눠 마시고
 더 이상 쓸쓸할 일 없는 작은 판을 치운다


 대문을 잠글 줄 모르지만
 방문은 잠글 줄 아는 시인의 집을 나오는데
 시인의 운명을 수군대는 달빛 참 의뭉하게 가깝다 (전문. 52쪽)



 최하 이 정도는 돼야 시를 쓸 수 있다. 21세기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아내 또는 남편을 얻어 밥을 벌어오게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한 아내/남편더러 밥을 챙겨달라고 해서 먹고, 아내(또는 남편)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소주병을 숨겨가며 조금씩 홀짝이면서, 나 죽기 전에 불멸의 시 한 수를 써내겠노라, 허튼 구름 속을 헤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삶을 바라보는 이병률의 시들을 두고 시집의 앞날개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연하고 오롯하다”고. 어느 형용사가 있어서 시인의 작업을 두고 딱 그렇다고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시들은 조금쯤 궁상맞고,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서늘하고, 조금은 저린다.
 시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동감. 시를 읽으며, 맞아 나도 그랬어, 라는 감정이 생길 때의 우연이라니. 이 시집 속에서 하나 발견했다.




 굴레방 다리까지 갑시다



 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그곳을 지날 적에
 그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하였습니다


 굴레방 다리 앞


 의문이 들 적마다 몇 번 굴레방 다리 앞에 내려서도
 물 저장소가 있을까
 또르르 길게 말린 터널 같은 곳일까
 거적을 뒤집어쓰고 살 만한 안온한 곳일까 궁금하였습니다


 그곳을 맥없이 혹은 격하게 그리워하는 사이
 굴레방 굴레방 중얼거리면
 거슬러 받는 기분이 되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엔가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말하는 것입니다
 굴레방 다리까지 갑시다


 굴레방 다리에 도착해서도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굴레방 다리는 이곳이 아닌 것만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정한 굴레방 다리는
 내가 터를 잡은 곳으로부터 북쪽에 있어야 하고
 아무리 맘속을 헤집어도 찾을 길 없어야 하고
 선뜩선뜩 무슨 일이 일어날 듯이 바람 부는 곳입니다


 무진히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 하나
 유리 조각처럼 가슴팍을 찔러본다는 것은
 어찌어찌 터지는 끝을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84쪽, 전문)



 독자도 시인처럼, 아니, 시인도 독자처럼 굴레방 다리를 모종의 이유로 “맥없이 혹은 격하게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될 수 있으면 굴레방 다리를 지나치지 않으려 하지만 신촌에서 이대 앞을 지나 광화문 육교 옆 레코드 가게 ‘슈바빙’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굴레방 다리, 그곳을 지날 때마다 컥,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무진히” 흩어져 찾을 수 없는 심장 속의 유리 조각을 체험하는, 공감. 이런 것은 특정한 독자만 한 시인의 특정 시를 읽으며 느끼는 공명일 것이다. 공명共鳴. 같이 느끼는 공감을 넘어, 함께 울 수 있는 공명을 시 속에서 문득 찾아내는 일. 가히 오늘의 사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독자로서는.


 참 괜찮은 시집 <찬란>에서 가장 좋게 읽은 시를 소개한다.




 마음의 내과



 이 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린내여서 가늠이 불가하지요 두 개의 달걀을 섞어놓고 섞어놓고 이게 내 맘이요 저것이 내 맘이요 두 세계가 구르며 다투는 형국이지요 길이가 맞지 않는 두 개의 자(杍)이기도, 새벽 두 시와 네 시 사이이기도 하지요 써먹을 데 없어 심연에도 못 데리고 가지요 가두고 단속해봤자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이어서 그 무엇하고도 무촌(無寸)이지요



 한 그릇에 달걀 두 개를 깨뜨려 놓으면 흰자위와 노른자위가 서로 뭉글뭉글, 이게 정말 섞인 것인지 따로따로인지 애매한 그림을 보고 시인은 두 세계가 다투면서, 길이가 맞지 않는 자ruler라서 어디 써먹지도 못하고 만날 서로 팽팽하게 와글대기만 하는 무촌, 촌이 없는 사이, 즉 부부 비슷한 거란다. 그게 바로 내 맘이고 저것도 내 맘이며, 이것은 네 맘이면서도 저것 역시 네 맘인 것.
 이 시집 속의 시에 관해 맘먹고 떠들라고 하면 하루 종일 조잘거릴 자신 있다. 그러나 언제나 넘치면 하지 않으니 못한 법. 이쯤에서 독후감을 접자. 나한테는 오랜만에 만난 맞춤한 시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계 민음의 시 163
윤의섭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책, 특히 시집을 한 권 사서 제일 감격스러울 때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쩌면 그렇게 외우고 싶은 시들이 넘쳐날 때, 그 기분 아시지? 그런데 그런 경우는 사실 상당히 드물고, 더구나 요즘 시집들 보면 하나같이 길어서 도무지 외워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 그래도 시집 한 권을 읽으면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좋다, 이거 한 번 외워버리고 만다, 하는 심정이 들어야 그나마 본전을 뽑는 기분이 든다. 시 좋아하는 분의 SNS에서 본 얘기, “시집 한 권에 한두 편 건지면”이란 거. 그럼 윤의섭의 시집 <마계>는? 완전히 내 취향에만 국한시켜 말씀드리자면, 본전도 못 건졌다. 지금 막 <마계>를 다 읽고 PC 켜서 독후감을 쓰려 앉았는데 “건진 시”는 하나도 없고, 생각나는 시도 별로 없다. 다시 말씀드리는 바, 이건 전적으로 문학적 소양이 없는 내 취향과 결부시켜 하는 말이다. 나는 시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도 없는 시적 무교양의 영역에서 노닐고 있는 일반인이라 시집 <마계>와 속에 든 시들과 시인을 평가할 조금의 자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왜 본전도 건지지 못했는가 하면, 시들이 과하게 암울하다.

 

 들여다보면 마법의 세계다.
 시를 쓰지 않아도 천지에 시가 자란다.
 환상통은 아니다.

 

 위는 시인이 스스로 쓴 서문으로의 자서自序다. 여기서 '환상통'은 환상을 보거나 느낄 때의 통증 즉 幻像痛 또는 幻想痛일 거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앞쪽의 작품들은 자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법의 세계’, 시가 자라는 천지, 즉 자연을 무대로 마법이 벌어지고 있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장대비는 더욱 거세졌다 / … / 그제야 풍경은 홀연히 살아나는 것이었다 / 뭉개진 얼굴로 물의 칼을 등에 꽂은 채 / 아니면 빗물을 다 받아 마실 듯한 기세로 / 하늘과의 경계가 지워진 산등성이가 꿈틀거리고 / (후략) ” <起源> 11쪽 부분

 

 본문에 실린 첫 번째 시가 <起源>이다(기원起源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내 친구 이름이기도 하다). 마법의 세계에서는 하늘에서 거친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도 풍경이 홀연히 살아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이 “뭉개진 얼굴로 물의 칼을 등에 꽂”는 행위이며 쏟아지는 “빗물을 다 받아 마실 듯한 기세로 산등성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왜 뭉개진 얼굴을 한 짙고 검은 구름은 물의 칼을 하필이면 “등”에 꽂았을까? 가슴이나 심장이 아니고. 물의 칼을 받은 객체가 산등성이, 다시 한 번 발음해서, 산.“등”.성.이.라서 그랬을까? 그리고 나서는 또 곧바로 “아니면 (쏟아지는) 빗물을 다 마실 듯한” 장쾌한 마법의 기세로 꿈틀거리는 산등성이. 다시 강조한다. 나는 시를 모르는 그냥 독자일 뿐이다.
 몇 쪽 뒤 <구름의 율법>이란 시를 보면,


 

 “파헤쳐 보면 슬픔이 근원이다 / 주어진 자유는 오직 부유 / 지상으로도 대기권 너머로도 이탈하지 못하는 궤도를 질주하다 / 끝없는 변신으로 지친 몸에 달콤한 휴식의 기억은 없다” 고 구름의 본질을 슬픔으로 규정한다. 구름에게 주어진 오직 하나의 자유는 땅과 하늘 사이 그것도 대기권 너머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부유하는 행위뿐이다. 그리하여 구름은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살지 못하는 중천이라 여기고 / 부박한 영혼의 뿌리엔 오늘도 별빛이 잠든다 / 이번 여행은 오래전 예언된 것이다 / 死地를 찾아간 코끼리처럼 / 서녘으로 떠난 무리가 어디 깃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후략) <구름의 율법> 14쪽

 

 한반도 벨트에서 구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하지만 만일 이 시에서 구름의 율법을 “동녘으로 떠난 무리가” 운운하면 참 맛이 나지는 않을 거 같다. 좋다, 서녘으로 떠난다고 표현하는데 동의한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 사지死地,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코끼리 같을까.
 윤의섭의 시는 내 기준으로는 과하게 죽음 지향적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시집의 뒤쪽으로 갈수록 더 심해지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비겁하게 ‘심해진다’라고 쓰는 대신 ‘심해지는 듯하다’라 표현한다.) 이제 시집에 마지막으로 실은 작품 전문을 감상해보자.




 눈을 부르는 나무



 춘삼월 산수유 텅 빈 가지에 예년 피었던 꽃은 다시 찾아올까
 찾아와 연노랑 꽃 치마 펼치고 다소곳이 앉을까

 그녀 다시는 오지 않았다
 하늘이 먹먹해지고 계곡에는 뼈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바람 소리 차오르는데

 흩날리는 눈가루 저마다 길을 헤매느라 지상에 쉽게 내려앉지 못한다

 길을 잃었다면 손짓을 따라오오
 내 부르는 거친 숨소리 듣지 못했다면 움트는 온기를 쫓으오

 보일 리도 찾을 리도 만무하련만
 산수유 여윈 가지 사이에 메마른 눈길 걸어 놓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언젠가 꽃눈으로 피어날 눈
 그리울 적마다 소스라치듯 내리는 눈   (전문 136쪽)



 시인에게는 춘삼월 산수유 빈 가지에도 연노랑 꽃이 치마를 다소곳이 펼치고 앉는 대신 찬 눈가루가 흩날리고 만다. 물론 언젠가는 꽃눈으로 피어날 싸락눈이지만 가는 산수유 가지에 메마른 눈길만 걸어놓을 뿐이다. 산수유는 개화시기가 매우 빠르다. 3월이면 지리산 밑동엔 벌써 작고 촘촘하게 노란 꽃이 피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산수유 꽃이 아니라 아직도 앙상한 가지 위로 눈가루가 흩날리는 것을 포착한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대신 그것들의 잠복한 슬픔으로 3월에 내리는 싸락눈을 보는 것이겠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나하고, 나로부터, 멀다.





 지금 독후감을 쓰고 세 시간이 지났다. 도무지 주둥이가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기어이 덧쓴다. 시집의 102쪽에 <北巷>이란 시가 있다. 이거 <北港> 아냐? 시를 직접 읽어보시라.



 北巷



 달은 초저녁을 넘기지 못하고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침몰했다
 산봉우리에 간신히 정박한 안개구름마저 거센 폭풍에 사라져 갔다
 그러나 비 내리는 들녘에 서 있으나
 빗물에 젖은 흔적이 없다
 아무도 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장대비 쏟아질 때면 무거운 몸뚱어리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거대한 배 한 척 바다 쪽으로 머리를 드리운 채 쓰러져 있었지만
 아무도 출항에 들뜬 어선의 파닥거리는 지느러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들녘엔 산수유 꽃잎이 흩날리고
 언제 그랬다 싶게 달빛이 교교할 뿐이다
 이젠 유령선에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느티나무로 보이는 돛대와
 푹신한 흙으로 뒤덮인 갑판을
 시퍼런 심해 너머로 끝내 이르지 못한 채 난파한 항해를 잊고 있었다고
 메마른 일지에 적어 놓아야 한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북풍이다
 목숨마저 저버려야 배가 뜰 모양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북항(北港) [부캉] [명사] 북쪽에 있는 항구. 또는 항구의 북쪽 부분.
 북항(北巷) 내용 없음.

 

 네이버 한자사전
 港 1.항구 2.도랑 3.강어귀 4.뱃길 5.홍콩(香港)의 준말
 巷 1.거리, 시가 2.문밖 3.복도 4.궁궐 안의 통로나 복도 5.마을, 동네 6.집, 주택

 

 의문 1. 도대체 뭐야? 민음사, 시집도 교정, 교열이 개판인 거야, 아니면 시인이 제목을 잘못 쓴 거야? 그것도 아니면 진짜 “북쪽에 있는 거리” 또는 “북쪽 복도”란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지역을 칭하는 고유명사야?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말이지. 이렇게 불만을 쏟는 건 내가 정말 무식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혹시 시의 제목 북항이 말하는 걸 아시는 분 계시면 한 수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의문 2. 9행. 산수유 꽃잎이 흩날려? 산수유 꽃잎이 과연 몇 밀리미터 쯤 될까? 날리긴 날리겠지. 근데 그게 참, 세상 살다가 산수유 꽃잎이 흩날린다는 얘기도 듣는다. 어쨌든, 하여간, 좌우지간, 진짜 독특한 표현이란 건 “인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들조차도 민음사 모던 클래식 56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맥그리거. 전에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을 재미있게 읽고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았다. <너무나 많은 시작>과 <개들조차도> 두 권이 있었지만 둘 다 “절판”. 품절도 아니고 판을 끊어버린 상태. 전에 <기적을....>은 내가 구입하자마자 곧바로 “품절” 딱지가 붙어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암만해도 민음사가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그만 두기로 작정을 한 거 같다. (작년에 노벨문학상 받아먹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들만 빼고. 이시구로의 책은 돈이 되잖여? 그래서 좋잖여?) 그래 맥그리거의 다른 책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운이 닿아 알라딘 중고책방에 하나 있는 거, 건져 읽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에 좋은 책들 많은데 왜 절판이 많을까? 나, 전부터 민음사 되게 좋아했다. <사람의 아들> <달궁> <김수영 전집> <숲속의 방> 시절부터. 근데 2010년대 들어와 애정 접었다. 책의 기본인 교정, 교열도 개판.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책이 아무리 좋아도 팔리지 않으면 곧바로 절판. 실험적 소설의 모험출판도 전무. 제발 출판사 이름이나 좀 바꿨으면 좋겠다. 민음(民音)은 너무 크다.
 흠. 괜히 열 올리지 말자. 나만 손해다.
 <개들조차도>. 좀 난감. 첫 문장부터 강력 내공이 솟구쳐 오름.


 “12월 말에 그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시체를 밖으로 옮겼다.

 공기는 악랄하게 차갑고, 새파란 하늘이 냉혹히 꿰뚫어 보며, 얼어붙은 태양 아래 나무들은 백골빛으로 바래 있다. 우리는 잠긴 문 옆에 모여 있다.”


 죽은 시체. 이름이 로버트. 전처 이본과의 사이에 딸 로라가 있다. 로버트는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죽은 상태를 유지하고, 소설은 130쪽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인물들, 즉 로버트의 친구인 마이크, 헤더, 대니, 벤, 스티브, 앤트와 딸 로라, 이렇게 일곱 명의 뽕쟁이, 약쟁이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정체불명의 화자. 로라를 제외한 여섯 명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고, 작가는 아닌 누군가의 시점일 수도 있다. 왜 작가의 시점이 아니냐하면, 문장이 제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 10쪽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일러두기라고 있는데 이렇다.
 “어법에 맞지 않거나 불완전한 문장 사용, 문장부호의 생략 등은 원전을 따른 것이다.”
 글을 써서 밥 먹고 사는 작가의 시점이라면 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어법에 맞지 않을 수도 없고, 주구장창 불완전한 문장을 험악한 욕설과 함께 섞어 쓸 수도 없고, 문장부호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웠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굳이 말하자면 작품의 시점은 죽은 로버트의 여섯 친구들 공통의 시점으로 씌어졌다. 이런 불완전한 원문을 효과적이고 심지어 음악적으로 읽히게, 그것도 뜻이 거의 완벽하게 절단될 수 있도록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어찌 찬사 한 마디가 없어야 되겠는가.
 1960년대 아주 초반 태생의 영국 남자들. 세상은 전에 없이 태평성세에 곳곳에서 함포고복이 드높을 줄 알았었다. 그러나 영국 젊은이들은 그들의 사납고 욕심 많은 조국에 의하여 세상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해야 했던 모양이다.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필두로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이르기까지. 청년들은 세상 구석구석, 평소엔 그런 곳이 있었는지 관심도 없었던 곳에 떨어져 다리가 잘리고, 파편에 맞아 뇌 속에 50 펜스짜리 동전만 한 금속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하고, 떠들썩하고 약간은 난폭한 젊음을 소비하다가 간혹 로버트 같은 이들은 결혼이란 걸 해서 딸도 낳고, 그러나 새로이 발견한 행복의 평원,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은 산산이 해체되고, 나머지 젊은 청춘들은 심심풀이로 시작해 이젠 구제할 수 없는 마약 중독자의 길로 접어들어 자신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 나약하고 불행한 영국시민들의 삶과 죽음을, 바로 그들의 시선으로 적어 놓았다.
 약물 중독자들의 글을 빌었기 때문에 문장은 완전히 끝나지 못하고 중간에서 뚝 끊어지고, 상스런 욕설들이 즐비하다. 그러면서 약물을 좇는, 좇아야 하는 이들의 간절함, 동시에 이젠 더 이상 중독 상태를 계속할 수 없다는 자각과 숱한 결심과 금단현상 등, 21세기 진짜 루저들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죽은 지 약 7일 만에 발견된 로버트의 시체. 당국은 그의 시신을 완강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캐비닛에 보관하다가, 친지(딸 로라)를 발견할 수 없어 친구 몇 명이 보는 가운데 해부를 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원인을 밝힌 다음, 다시 봉합해 장례를 치루는 과정까지를 그리고 있다.
 알콜 의존 정도의 마지막 단계를 넘어선 남편 로버트에 질려 어린 딸 로라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린 이본. 이본과 로라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 또는 확신한 로버트. 자신에게 남은 가장 확실하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었던 이본과 로라의 부재를 영원한 상실로 단정하고 이제 스스로 사형을 선고한 그는 하루에 약 3~5 리터의 사과술을 자신의 몸에 투입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한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로버트의 주위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꼽았으며, 더 이상 바늘을 찌를 혈관이 남지 않은 앙상한 팔과 다리만 남은 친구들의 목 혈관에 조심스레 헤로인, 코카인, 필로폰을 투입해준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조금만 다른 곳에 찔렀다간 그길로 그냥 진짜 천국으로 가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한 실패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고, 시취를 느낀 이웃의 신고로 경찰에 의하여 시신을 발견하고, 상세한 부검과정이 나오고, 장례에 이르기까지 사나운 장면들이 등장한다. 거기다가 마약 중독자들의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들까지 읽어야 하는 독자의 심정이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 사는 이야기. 이런 것도 예상외로 가슴이 아릴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 전쟁과 전쟁에서의 부상, 그 후에 갑자기 등장하는 여전한 젊음과 젊음의 멀미 같은 것 때문에 모든 영국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소수 실패자들의 삶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 역시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장 최근에 물리학 과목을 수강한 것이 무려 38년 전이다. 제목 속에 든 “평행 우주”라는 개념도, 책 속에 나오는 “끈 이론” 같은 것도 당시엔 그런 것이 있는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책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은 현대 물리학의 기초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더욱 재미나게 읽을 것 같다. 숫자 1 뒤에 스물여섯 개의 0을 붙인 숫자만큼의 은하계가 있어야 또 다른 인간 수준의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한다는데, 말이 ‘스물여섯 개의 0’이지 하이고. 아인슈타인 이후의 물리학은 글쎄, 정말 인간 생활에 필요한 건지 아니면 물리학자들이 자신의 천재성을 겨루는 것에만 기능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치 현대 수학이 몇몇 수학자들의 두뇌 경연대회로 전락 또는 (구름 위 궁전으로)승격한 것처럼.
 왜 이렇게 초장부터 초를 치느냐 하면, 작품의 주인공은 책을 열고 이야기가 40%쯤 지나야 등장하는 ‘실프Schilf’라는 50대 초반의 뇌질환을 앓고 있는 늙다리 형사이지만, 실프와, 실프의 경찰학교 제자이자 커다란 손과 거대한 유방을 가진 독신녀 ‘리타 스쿠라’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인물이 제바스티안과 오스카라는 물리학자다. 오스카는 태생부터 천재였음을 스스로도 알고 주위에서도 다 인생해준 인물로, 살면서 자신과 어깨를 그나마 맞댈 수 있는, 물론 자신을 능가하기엔 역불급이긴 하지만 그나마 인간 같은 인간으로 대학 동창 제바스티안 딱 한 명만 인정하는 특출한 인간이다. 190cm가 넘는 장신에 댄디한 외모, 잘 가꾼 화법과 어딜 봐도 조금 거만하다는 느낌을 주는 오스카는 현재 제네바에 살고, 이론물리학에 전념하여 세상의 본질을 단번에 밝힐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독신. 제바스티안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최연소 교수로 임용을 하고 평생교수직을 얻은 물리학자. 아름다운 아내 마이케는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화랑의 대표로, 마이케와의 사이에 똑 부러지는 아들 리암과 여유 있고 폼 나게 인생을 즐기고 있다. 제바스티안의 주요 연구 분야가 바로 평행우주. 아인슈타인이 이미 증명한 바 있는 시간의 가변성을 n번 변주하여 참 형이상학적 물리학을 만들어낸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평행우주 이론이다. 책에 평행우주에 관한 내용이 잔뜩 쓰여 있어서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유클리드 물리학 말고는 아는 게 거의 없는 내가 평행우주가 뭔지 간략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심정, 이해하시지?
 프라이부르크의 대형 병원에서 심장수술 도중 혈액의 흐름에 관한 약을 잘못 사용하여 네 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이는 개발 중인 약을 환자에게 생체실험을 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차에, 수술에 간여한 마취 담당 의사 과장 ‘다벨링’이 살해당한다.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지 못하는 심정. 왜냐하면 살인이 벌어지기 전에 살인의 방식이 ‘옆으로 누워있는 선’ 즉 복선伏線으로 깔려 있어서, 차마 그걸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참혹한 살인사건과 연이은 수술 중 사망사고가 겹쳐 제약회사, 병원 관계자, 집도의사, 사망자 가족 등이 일단 용의자 선상에 올라갈 수밖에 없으나 도대체 단서가 잡히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워낙 파장이 큰 사건을 담당한 리타 스쿠라 경장이 아무리 방방 떠도 갈피를 잡지 못하자 프라이부르크 시장은 주도州都 스튜트가르트 경찰청에 SOS를 치기에 이르렀고, 도지사(겠어 설마? 도 경찰청장 정도겠지)가 실프 경위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천재적인 두 명의 현대 물리학자와 한 명의 천재적 두뇌를 보유한 형사, 그로부터 교육을 받은 적극적인 행동파 여형사, 이렇게 네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를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의 틈바구니에서 본격적인 두뇌싸움이 벌어지는데, 문제는 형사 실프. 이이는 사건의 해결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로 얼른 종결시켜버리자는 가슴 큰 제자 리타 스쿠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근본 원인까지 치밀하게 파헤치는데, 이 과정에서 난데없이 현대 물리학 이론이 마구 쏟아진다. 다 좋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추리소설다운 좀 더 드라마틱한 결말이 나왔으면, 했다는 거. 작가 율리 체 자신이 똑똑한 건지, UN에 근무하며 작가로 데뷔했고, 이후 독일 법조계에 종사하면서 소설을 쓰는 74년 범띠 극성 여성이 평소 자신 스스로가 관심을 크게 두고 있었던 시간의 확장과 평행이론 등을 소재로 추리 소설을 썼단다. 근데 놀랍게도 바쁜 중에도 체가 발표한 작품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거. 난 이런 사람 보면, 뭐 하러 이리 바쁘게 사는지 별로 이해가 안 가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 받지 않는데 뭐 하러 그리 허겁지겁 사느냐는 거다. 그래도 한 세상이고 나 같아도 한 세상인데 말이야. 난 여유 있게, 평생 안 바쁘게 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출판사 [뿔>. 마지막으로 책을 낸 것이 2012년. 그럼 일단 [뿔>이란 브랜드는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근데 문제는 엘러스데어 그레이의 <라나크>,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 <황금 노트북> 같은 것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것. 웅진지식하우스라는 브랜드는 왕성한 작업을 하고 있는 바, 이런 것들도 좀 다시 찍어주시라.


 

 위키피디아에서 작가 제임스 캐넌을 검색해보면, 1968년 콜롬비아에서 낳고(구체적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자라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비리그 가운데 하나인 콜롬비아 대학에서 문예창작 MFA, 석사를 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 <과부마을 이야기 Tales from the Town of Widows>를 미국, 캐나다, 영국에서, 모국어인 스페인 언어가 아니라 영어로 발간했단다. 그러니 이 책을 러시아 문학 전공자 이경아가 번역했다는 걸 나처럼 의아해하지 않기 마시기 바람. 난 노문학자가 서문학 책을 번역한 걸로 단단히 착각하고 틀림없이 영어본의 중역 아니겠는가 짐작했었다.
 굳이 <과부마을 이야기>를 위키피디어까지 뒤져 검색해본 이유는, 책 뒤표지에 쓰인 찬사가 너무 과하다싶어서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콜롬비아 작가가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이의 대표적 작품이 <백년의 고독>. 솔직하게 말하자면, <백년....>은 읽어본지 마치 백년은 된 거처럼 하도 오래 전이라 지금은 그냥 책에 대한 감정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여보 의사양반. 내 가슴에 심장이 어디 있는지 점 좀 찍어줘, 그러시지 않겠습니까요, 그래서 쇤네가 심장의 위치에서 1cm 옆에다 점을 찍어드렸습죠. 그랬더니 아니나 달라, 대령께서 거기다가 권총을 쏴버렸지 뭡니까요, 하는 장면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반군들과 마르케스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 내가 일컫기를 “아몰랑 주의” 작품의 특징을 흔히들 이야기하는 바, 그게 벌써 언제 적 환상적 리얼리즘이냐고. <백년...>이 1967년 아닌가 말이다. 196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소설문학에서 무수하게 쏟아진 아몰랑 주의 작품 또는 아몰랑 형식을 무려 40년이 지난 2007년에 다시 또 써먹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닌 거 같다.
 1992년 11월, 심심산골의 외딴 마을 마르키타에서 사건은 벌어진다. 공산주의 반군이 마을에 쳐들어와 늘 하던 대로, 그게 다 산골마을의 불쌍한 인민들을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 충정어린 행위인 것뿐인데, 투쟁도 뭘 먹어야 하니 산골마을 인민들이 먹을 걸 싹 공출해가고, 투쟁도 리비도가 너무 쌓이면 도무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라서 동네 아무 여자나 그냥 겁탈해버린다. 여기까진 늘 해오던 식이니 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나 그날은 글쎄 거기다가 하나를 더 보태, 열세 살이 넘은 남자들까지 몽땅 혁명군으로 공출을 해버린 것. 당연히 게릴라 대원이 안 될 방법도 있긴 있다. 그들이 쏜 총알을 피하는 재주만 있으면. 그리하여 적지 않은 남자들이 총 맞아 죽고, 죽은 사람보다 월등히 많은 사내들은 울며불며 게릴라 대원의 임명장을 받아들었으며, 딱 한 명,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앙헬 타마카’만이 공산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 자진해서 게릴라 부대에 지원한다. 그리하여 마리키타에선 모랄레스 여사의 기지로 여자 옷을 입어 징집을 피할 수 있었던 십삼 세 훌리오 모랄레스를 포함한 어린 소년 네 명과 로마 가톨릭 신부 라파엘, 이렇게 다섯 명의 남자, 나머지는 전부 여자, 합해서 99명의 주민만 남아 외딴 산골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게 된다. 아, 두 명 더. 어느 깊은 밤, 혼자 떨어져 동네로 들어와 후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세뇨리타 클레오틸테, 비극의 밤에 근동의 커피농장에서 일을 하던 청년 산티아고. 클레오틸테는 과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당시 반정부군에 의하여 능욕을 당했던 적이 있어 극도로 남성을 혐오하는 자칭 숫처녀. 산티아고는 전형적인 동성애자로 여성의 역할을 하는 소위 바텀 전문. 여성의 리비도와 인류의 영속을 위한 측면에선 전혀 필요 없는 남성.
 여자들만 남아 있는 마을. 시기는 비록 20세기 말이었으나 콜롬비아 산골이라는 지역적 구속은 여성들로 하여금 어떠한 일도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으로 쉽게 만들어가지 못했다. 비록 여러 가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줄 아는 비교적 현명한 여성 로살바 파티뇨가 남자가 없는 와중에 피해조사 차 방문한 공무원으로부터 치안판사로 임명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마을은 길거리마다 각종 쓰레기와 집 없는 개와 고양이로 넘쳐나고, 당연히 냄새가 코를 찌르는 불결한 환경에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인플루엔자의 습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긋지긋한 게릴라 부대의 공포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떠나버려, 더욱 황폐해져버린 상태.
 작가는 애초부터 로마 가톨릭하고 맺힌 것이 좀 많았던 모양이다. G.K. 체스터턴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브라운 신부는 못생기고 머리 벗겨지고 배도 나와 겉으로 보기엔 참 인상 좋지 않은 인물을 엔간해선 악당으로 지목하지 않는 반면, 이 책의 작가 제임스 캐넌은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오고, 못생기기까지 한 라파엘 신부를 좌익과 우익 게릴라들보다 더 흉악한 악당으로 만들어버렸다.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종교, 종교라고 해야 콜롬비아에선 로마 가톨릭 말고는 없었으니 당연히 가톨릭이지만 하여간 종교를 배척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너무 했음. 사제와 예수와, 하느님과, 천국과 지옥을 빙자한 이리 상태가 너무 적나라하다. 그렇게까지 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 뭘 가지고 그러는지 궁금하시지?
 기어이 여자들만 남아 16년 동안 거의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마을. 그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사회를 만들고 자연과 비슷하게 변모할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이게 책을 읽는 핵심인데 그걸 알려드릴 수는 없지. 책은 재미있어서 술술 읽히기는 한다. 또 잘 쓴 아롤랑 기법을 쓴 소설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그건 지금이 1960년대가 아니라 21세기라서 그렇게 읽힐 수도 있는 것. 근데 나도 참 무식했던 것이, 콜롬비아의 내전은 20세기에 끝난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세상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한테 관심을 더 가져야겠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장르의 작품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칭하는 독자들과 평론가들이 있을까? 난 솔직히 모르겠다. 정말 <과부들....>을 리얼리즘 문학으로 줄을 그어야 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