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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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독신녀와 유부남의 불륜. 파리에 거주하는 작가와 외국인 남자. 소설의 사실상 첫 문장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로 시작한다. 1940년생인 아니 에르노가 199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이 책에서의 상대 불륜남 A는 1990년에 발표한 <탐닉>이란 작품의 S와 동일인이라고 하며, 둘의 사이에 활활 사랑의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한 시기가 1988년이란다. 1988년이면 에르노의 나이 만 48세. 아이들도 웬만큼 커서 이젠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A가 아르노의 집에 오기로 한 날엔 아이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엄마에게 들르는 것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단다.
 그건 그렇고, 만 48세의 완숙한 여인. 성적인 측면에서의 몸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남자나 여자나 인생의 황금기다. 이젠 자신의 감정을 나름대로 추스를 줄도 아는 나이라고 오해하기 시작하고, 가끔은 흉내까지 내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감정은 추슬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끔찍하게 이해하게 되는 나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고통 말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듯 한 인간을 갈증에 타게 하고 일상의 질서를 무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기다림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행하다. 20대 초중반에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다림의 고통 같은 감정은 점차 희박해지는 또는 희석되는 것이라 여기고 여태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책 속 주인공 ‘나’의 인생은 온통 A로 채워져 있다. TV 드라마도, 생전 처음 본 유선방송에서의 포르노 프로도, 지나가는 여자가 입은 원피스의 모습과 속옷도, PER(파리와 외곽을 잇는 고속 전철) 역의 거지에게 던져주는 동전도(오늘 A에게 전화가 온다면 맹세컨대 처음 마주치는 거지에게 10프랑을 주겠어!), 소파 위에 함부로 던져놓은 브래지어도, 지나가는 생면부지 남자의 얼굴 한 부분에서도 그녀를 지배하는 건 오직 하나, A가 아니라, A를 기다리고 그와의 정열을 불사를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바람이며, 최초의 시도로 전화벨이 울리느냐 마느냐, 울리면 과연 언제 울릴 것인가, 하는 일. 그게 청년이 아니라 완숙한 시기의 중년에게도 유효한 것인지 나는 정말로 몰랐다. 어쩌면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비슷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버렸던 것인지도.
 우스개로 인생에서 가장 꼴불견인 것이 40대 후반, 50대 이후에 “나는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네” 어쩌네 하고 꼴값을 떠는 일이라 말해왔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중년, 노년의 사랑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와 윤소정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지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하지도 않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이제 와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만일 내 주위에 그런 커플들이 생기면 이해는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불행을 선택하겠다. 내 속의 고목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불행을, 또다시 누구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애가 타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방으로 착각하는 환시와, 끊임없이 머릿속에 부유하는 환상과, 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이제 정말로 포기하는 불행을, 그 불행을 선택하는 것을 조금쯤 이해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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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트린 이야기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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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렇게 생겼다. 그러나 절판.

 

 

 

 

이것이 개정판 표지이지만 역시 품절


 

 지은이가 ‘빠트릭’ 제목에 ‘까트린’ 어딘지 뭔가 빠뜨리고 까버리는 수준을 넘어 까서 깨뜨린 듯한 느낌의 이름들.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찍은 책이다. 놀라지 마시라. 본문 107쪽. 삽화가 반. 헐렁헐렁한 편집. 읽는데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지은이가 201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 삽화는 유명한 장 자끄 상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라 부르더>, <까트린 이야기> 이 세 작품으로 난 위대한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책은 누가 읽어도 단편소설이다. 전후 프랑스에서 3년 동안 부녀가 살다가 뉴욕으로 건너가 살고 있던 아내, 엄마와 합칠 때까지를 안경 쓴 소녀의 시각으로 그린 작품. 인간의 허위에 대한 따뜻하고 귀여운 해석도 있고 뭐 그런데 이 정도의 단편소설 딱 한 편을 ‘단편소설의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읽히기 위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열린책들’한테도 푸짐하게 욕 한 바탕 썼다가 방금 지우고 다시 쓰는 중이다. 명예훼손이니 뭐니 지랄들 할까 싶어서. 요즘 나 엄청나게 소심해졌다.
 이 책이 1996년 초판이고 절판이다. 지금 검색해보니까 <발레소녀 카트린>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2003년에 다시 찍었는데 그건 품절이다. 역자 이세욱이 1962년생. 내가 정작 진짜 놀란 것은 이세욱의 단어 쓰는 거였다.


 “내가 안경을 벗으면 아빠도 나를 따라했다. 우리 주위가 온통 부드럽고 오련했다. 시간마저 흐름을 멈춘 듯했다.” (14쪽)


 “오련하다”라니. 참 안 쓰는 단어인데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① 형태가 조금 나타나 보일 정도로 희미하다, ② 빛깔이 엷고 곱다, ③ 기억 따위가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다”고 나온다. 안경을 벗었다니 여기선 ①번 사항일 것이다. 대개 ②번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단어지만.
 또 “그는 내숭스럽고 우악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20쪽)
 “우악하다” 역시 대개 우악스럽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전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쓰는 것도 맞다. 이거 말고도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찾아 사용했는데, 작품의 시대가 전후 복구시대의 프랑스여서 오히려 작품의 분위기를 더 살려주는 기재로 작용한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정말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빠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나하고 맞지 않아서, 절대 그의 작품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하나, 나하고 맞지 않아서, 앞으로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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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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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쓴 <남자의 자리>라는 소설은 아빠가 죽고, 장사를 치룬 다음, 아빠와 작가가 맺었던 관계를 정리하는 짧은 소설이었다. <한 여자>에서 ‘한 여자’는 자신의 엄마를 일컫는 말로, 이번엔 엄마가 노인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망신고를 하고, 장사를 지내고, 매장을 한 다음, 일찍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려 와 새삼스럽지는 않은 엄마가 진짜 죽었구나, 라는 실감을 하고, 펑펑 울고 나서(있을 때 잘할 걸!), 엄마의 탄생부터 결혼, 출산, 맏이의 죽음, 작가의 탄생과 한 가족을 중심으로 엄마가 평생 살아온 내력을 쓴 작품이다.
 아빠가 죽은 다음에 쓴 <남자의 자리>는 좀 건조한 문장으로 만든 반면, 엄마의 죽음을 다룬 <한 여자>는 같은 여자여서 그랬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감성을 충분히 담아 엄마와 딸, 넓게 얘기해서 부모와 자식 간의 복잡한 소통과 헌신 등을 깔아 놨다.
 나 이런 소설 읽고 감동하지 않는다. 세상에 안 죽는 부모 있으면 딱 두 명만 대봐. 간혹 가다 그렇지 않은 부모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이 뼈가 빠지게 고생을 하며 자식새끼들을 위해 헌신을 한다. 그 헌신으로 인해 자식들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번히 알면서도 도무지 멈추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기어코 부모가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 옛 생각하면서 내 부모는 그랬지, 우거지 궁상을 떨어봐라. 너네 부모만 그랬니? 이런 지청구나 실컷 얻어 자실 것이리라.
 나 이런 소설 읽고 감동하지도 않고, 공감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한 여자>가 내가 읽는 아니 에르노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다. (라고 써놓고 보니까 윽, 벌써 사 둔 책이 한 권 있다.) 출판사 ‘열린책들’ 얘네들도 참 맘에 안 든다. <남자의 자리>도 간신히 100쪽 넘고, <한 여자>도 간신히 100쪽 넘는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의 친아빠와 친엄마 이야기다. 두 짧디 짧은 소설을 한 권에 묶어 찍으면 어디 덧나? 꼭 욕 못하는 사람 욕하게 만들고 지랄이다.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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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네 명의 미국 출신 흑인 여류작가들을 읽어보았을 따름입니다. 수백년간 피부색 때문에 노예로 살았고, 내전을 거쳐 신분의 해방을 맞았지만 여전히 차별을 당해온 흑인들. 또 그 가운데 여성들. 이들이 쓴 소설이라면 그냥 얼핏 생각해보기만 해도 뭔가 슬픈, 아니면 적어도 아린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고요. 왜 비오는 봄날의 휴일에 그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라 닐 허스턴

 

 1891년 생입니다. 1960년에 죽을 때까지 극심한 차별을 당한 세대이며, 모르긴 몰라도 문학행위를 한 1세대 흑인 여성 아닐까 합니다. 만년에 빈민 구제소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하니 그리 행복한 일생은 아니었을 거 같습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허스턴의 피부색만 밝히지 않으면 굳이 흑인 여성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질기고 독한 사랑, 주인공 커플 제니와 티 케이크가 만들어가는 맹목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고 사랑하고, 싸우고, 악담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다시 물어 뜯었던 과거의 사랑을 오늘 떠올리는 일, 그것이 행복이라는 우울한 진실. 아름다운 건 자주, 슬프기도 합니다.

 

 

 토니 모리슨

 토니 모리슨한테 조라 닐 허드슨은 큰 이모뻘입니다. 40년 차이가 나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모리슨 부터 진짜 "흑인"에다가 "여성" 문학이 나오지 않느냐, 라는 의견입니다만 제 의견을 믿지는 마세요. 완전 딜레탕트 수준입니다.

 

<빌러비드>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읽어보신 분 꽤 많을 겁니다. 저도 사실 이 책을 시작으로 흑인여성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아주 일천한 경험으로 겁없이 이리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환상소설 적인 면도 보이는데, 그걸 아프리카 취향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아프리카 흑인 문학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곧잘 등장하니 말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탈출에 성공한 노예들의 생존기라고 짧게 얘기해도 좋겠습니다. 심금을 울리더군요.

 

<재즈>

 

 남자 흑인과 여자 백인 간의 혼혈은, 백인들 입장에서 가장 극렬하게 꺼리는 경우랍니다. 백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 아이는 자신이 백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다 자란 후 피의 반이 흑인의 것임을 알고는 흑인 아버지를 살해한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거 다른 작가에서도 봤습니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로스는 여기에다가 유대인의 정체성도 덧붙여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짓궂음을 보여주긴 합니다만. 세월이 흘러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에선 흑백 혼혈의 두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묘사되니 이 <재즈>와 견주면 뽕나무 밭이 빨리도 망망대해로 변한 느낌입니다(오늘은 제이디 스미스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그러나 기본적으로 독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도 질투해야 하는 맹렬한 사랑 이야기.

 

 

 엘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과 13년 차이가 납니다. 작은 이모뻘인가요? 백인 인권운동가와 결혼해서 유럽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합니다. 이이가 쓴 <어머니의 정원>은 사서 읽어보려고 했더니 수필집이더라고요. 전 에세이는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의 대표작입니다.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어 1982년이던가 하여간 그 즈음에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후보로 올랐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먹었던 작품입니다. 서간체 소설입니다. 서간체 소설이 생각보다 재미 없는데,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흑백문제 뿐 아니라, 여성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제3 세계들의 소외도 잠깐 언급합니다. 이런 책을 "양서"라고 하는데 아쉽게 품절입니다.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빨리 간행해주기 바랍니다.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192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소작농에 관한 책입니다. 말이 해방이지 백 년 전 흑인 소작인 신분이란 건 노예와 거의 다르지 않는 질곡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계급에 키 크고 잘 생긴 흑인이 하나 등장하니 바로 그레인지 코플랜드입니다. 당시 빈부, 남녀, 인종 간 겪을 수 있는 모든 차별과 벽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키 크고 잘 생겼지만 못 배워먹은 인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1920년대에 말입니다) 마누라 두드려 패고, 바람 피우면서 집구석 기둥뿌리 뽑는 일이었다네요.

 

 

 글로리아 네일러

 

 1950년 범띠 아줌마네요. 구글 검색해보니까 에휴, 재작년 2016년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답니다. 이이의 작품은 딱 하나만 읽어봤을 뿐입니다.아직 얼마든지 활동한 나이인데 참 아깝습니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이제 드디어 무대가 미국 남부에서 북동부 공업지대로 옮겼습니다. 그래봤자 흑인들이 살 수 있는 곳은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시의 가장 험악한 지역일 뿐입니다. 백인들은 한때는 자유롭게 왕래했던 곳에다 높은 벽을 둘러쳐 흑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지역을 페쇄시켜버린 곳에 브루스터플레이스가 있습니다. 이 극빈의 지역에 모인 여자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그리는 매우 훌륭한 소설입니다. 흑백, 여성, 동성애 등을 소재로 화해 불가능한 폭력에 노출된 흑인 여성들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네일러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입니다. <바람과...>에서 착한 남자 주인공 애슐리를 KKK단에 가입시켜 살아있는 흑인의 신체를 절단한 다음에 불에 태워 죽이게 한, 그러니까 KKK단의 테러를 지지할 정도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로 위의 네 여인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인종주의자까지 포용하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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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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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 안 봤다. 게을러서. 역자 김화영 씨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던 레몽 장. 또 이 양반을 사사한 우리나라 대표적 불문학자가 김치수와 최현무. 최현무 선생은 아시지? 소설 쓰는 최윤 씨. 같은 사람이다. 나는 그이가 번역한 뒤 라스를 읽고도 최현무崔賢茂라는 사람이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쓰고, 몇 년 후에 <겨울, 아틀란티스>를 발표할 최윤과 같은 인물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현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레몽 장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 그리하여 드디어 한국을 방문해 성황리에 강연회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작품 가운데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대상도 받고 그랬던 모양이다. 난 안 봤지만.
 서른네 살 먹은 마리-콩스탕스라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유부녀가 주인공이다. 목소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코끝이 조금 굽었기는 해도 입술이 도톰하고 아주 포동포동하며 피부 빛은 아무리 생각해도 깃털보다는 복숭아를 더 연상시키는 편”이고, “목은 어깨 위로 시원하게 솟아나 있고 팔은 가늘고 허리는 날씬하다. 두 개의 젖가슴은 잘 분리되어 있으며 상체의 크기에 비해서 분명히 너무 풍만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아주 큰 이점이 되고 있다.” 즉 잘 생기고 약간 풍성한 듯싶게 잘 빠진 몸의 소유자이면서, 그러나, “치골과 사타구니에 난 털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곱슬곱슬하고 지독하게 촘촘히 나 있다”는 치명적 함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왜 이게 함정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책 사서 읽어보시라. 보시면, 웃다가, 웃다가, 너무 웃어서, 자.빠.진.다.
 마리-콩스탕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 시절 같이 연극 동아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던 프랑수아즈의 아이디어로 자신이 갖고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목소리를 이용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3주에 한 번씩 신문광고를 한다. 그리하여 곧 열네 살이 될 운신이 매우 어려운 장애 소년, 장군의 부인이기도 하고 원래부터 헝가리의 백작부인이었던 여든 살의 노파, 워낙 바빠 함께 놀아줄 시간도 없는 커리어 우먼을 엄마로 둔 꼬맹이 소녀아이, 파티 같은 데 나가 문화적 대화에 한 자리 끼고 싶어 하지만 책 읽을 여유가 없는 상당한 규모의 금속/비금속 광산업체의 사장. 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받게 된다. 여기에 끼어드는 인간이 글쎄, 레몽 장 본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마리-콩스탕스의 대학시절 지도교수 롤랑 소라. 마리-콩스탕스는 소라 교수한테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직업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이어서 어떤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지 자주 방문해서 귀찮게 물어본다. 자상한 노교수는 책 선택을 비롯한 몇 가지 그녀의 고민에 대해 정성껏 답변을 해주고.
 그리하여 이 책은 마리-콩스탕스가 각각의 고객들에게 읽어주는 텍스트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끔 만드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책을 읽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지 뭐 더 이상이 있을 수 있나? 이 <책 읽어주는 여자>에서도 나오는 작가들을 나열해보면, 모파상, 졸라, 마르크스, 페렉, 클로드 시몽(이 양반의 한국어 번역본은 한 권도 없다), 사드 등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졸라의 <작품>을 딱 꼽기도 한다. 책 속에 정말로 19세기까지 있었던 직업으로서 “책 읽어주는 여자”가 등장해 주인공 클로드와 동거하기 때문에. 그래서 소라 교수가 마리-콩스탕스한테 딱 그 이야기를 해준다. 비가 죽죽 내리는 어느 깜깜한 밤, 열차에서 내려 집에 오다가 한 구석에서 시커먼 뭉텅이가 놓여있다. 뭔가 봤더니 젊은 여자. 그래 클로드는 이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 연을 맺으면서 시작하는 <작품>. 모파상, 졸라 등 자연주의 작가들은 소라 교수가 추천한 책이고, 페렉과 시몽은 마리-콩스탕스가 이 사람들은 어때요, 소라 교수한테 자문을 구한 책들이고, 마르크스와 사드는 고객께서 읽어주기 바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남자 고객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성적 판타지 속에 빠져있다. 아직 대가리가 제대로 크지도 못한 소년은 책을 읽어주는 내내 마리-콩스탕스의 무릎만 바라보고 있고, 다리를 조금만 더 벌려 보실래요? 다음에 오실 땐 빤쓰를 입지 않고 오시면 안 될까요? 이 따위 건의사항이나 제출한다. 광업회사 사장은 페렉의 <W>를 읽어줄 때는 침을 흘리며 자고 있더니 읽기를 마치자마자 그냥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내하고 합의이혼 했고 너무 바빠 여자의 품에 들어본 지 벌써 아홉 달이나 돼서 미치겠어요, 나하고 결혼해주세요, 타령을 하며, 이젠 은퇴해서 부유한 노년을 즐기는 전직 대법관은 고급 장정을 한 고서 <소돔 120일>을 꺼내 남성 동성애 장면을 읽어달라고 근엄하게 지시한다.
 반면에 여성고객들은 전부 자식들을 과잉보호하기에 눈알이 벌겋게 충혈된 상태. 아이가 평상 상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완전하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일차원적 광경이거나, 이미 옛 시절의 유물이 된 과거에 함몰되어 있다. 원래 소설에서 정상적인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지만 해도 조금 너무 하는 듯. (사실 이 표현도 말이 안 된다. “조금” “너무”하다니 말이야!)
 하여간 역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마리-콩스탕스. 나는, 처음부터 직업이라고 해도 나쁠 건 없는데, 프랑스라는 선진국에서 소득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딴지를 언제 걸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결코 이런 쪽으로는 시도하지 않고 우리의 주인공 마리-콩스탕스가 책을 읽어주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다시 실직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억제장치로 마감하고 있다.
 <불운의 미덕>이라는 사드의 소설 한 권을 읽고 사드는 더 읽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책 읽어주는 여자>를 비롯해 생각보다 많은 작품이 <소돔 120일>을 언급하고 있어서, 별 기대 없이 <소돔 120일>을 읽어보기로 작정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리 많은 작가들이 설레발을 푸는지 직접 좀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좀 그렇긴 그런가 보다. 주문하는데 성인 인증하란다. 거 참 은근히 기대되네 그려.
 역자 김화영이 은사의 책을 번역해서 그런지 주례사가 난만하다. 난 그냥 그랬다. 그래서 레몽 장의 소설을 딱 한 권 더 읽어보고 더 읽을지 말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뒤져보니까 <카페 여주인>이란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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