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줄리언 반스. 이번엔 난데없이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변주하여 소설로 만들었다.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일. 더구나 이번엔 주인공이 소비에트 연방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 음악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인물이라면 결코 쉽지 않을 거 같다. 거기에 더해서, 반스의 어려운 결과물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 역시 다른 소설을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반스가 영국인으로 영어로 글을 썼으니 무엇보다 정확한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며, 주인공이 대단한 작곡가이니만큼 음악에 관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겠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러시아 사람이니 또한 러시아 문학도 웬만한 조예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 독자의 100자 평을 보면 마치 이 책을 번역한 송은주 성토장 비슷한 모습인데,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의 넓은 아량을 기대해야 할까? 천만의 말씀. 조건이 영어, (서양고전)음악,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와 문학에 대한 이해, 이렇게 세 가지를 겸비해서 번역하기 어려울 거 같으면, 역자가 알아서 해당 분야 전문가 또는 역자 주의의 잘 아는 아마추어에게라도 적극적인 개입을 의뢰했어야 한다. 그 과정이 빠져 독자가 읽기에 불편했다면 역자로서 도리 또는 직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나? 아주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번역문 자체에서 껄끄러움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내가 둔해서 그렇겠지. 한 번 더 얘기하자면, 오역 자체는 모르겠다. 오역 여부를 검토할 정도면 원서를 읽지 번역서를 선택했겠는가. 다만 음악과, 러시아 문화 같은 거 나오면 실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볼쇼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삿코>와 <이고르 왕자>에 열광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스탈린이 이 갈채를 받는 새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듣고 싶어 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33쪽)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품 <사드코>를 스탈린이 좋아했었나본데, <이고르 왕자>는 영어로 <Prince Igor> 즉 <이고르 공公> 일찍이 타타르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러시아의 (왕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대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 일반적으로 ‘대공’ 또는 ‘공’을 영어로 prince라고 하는 걸 오해했음이 분명하다)영웅을 그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작품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도 혹시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는지 열라 검색해봤는데, 없다. 그러니 분명 보로딘의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것으로 잘못 알거나, 잘못 쓴 거다. 이거 말고도 다른 음악적 작은 오류들을, 안타깝게도 역자가 열심히 퇴고를 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오류를 역자가 그대로 옮긴 것인지는 당연히 확인한 바 없다)
 또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그(쇼스타코비치)의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호함과 난해함은 ‘유로디비’적 태도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유로디비란 러시아어로 마을의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바보인 척하지만 실은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겨 쓰던 사람을 의미한다.” (267~268쪽)

 

 러시아 언어는 발음할 때 구개음화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언어로 ‘유로디비’는 ‘유로지비’ 혹은 ‘유로지뷔’, ‘유로지브이’ 등과 비슷하게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 공작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세째 아들 알렉세이를 유로지비로 말하고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덜' 유로지비 급이다. 이들보다 더 선량한, 심지어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는 것으로 오히려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가 비슷한 듯.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백치'나 심지어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 파르지팔 등, 바보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바보에 가까우며,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칭한다.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기는 사람이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보인다고? 처음 듣는 말이다. 송은주가 ‘옮긴이의 말’을 쓰면서 좀 수상한 곳에서 정보를 가져온 모양이다. 러시아 문학 말고도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주인공 데이비드의 대고모 미스 트롯우드의 친구 딕 씨氏 같은 인물도 유로지비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책이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소설인지, 책표지를 넘기고서야 알았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전적으로 줄리언 반스, 이름 하나 보고 고른 책이란 뜻. 쇼스타코비치 이야기였다면 훨씬 전에 읽었을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 가운데 그의 빛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기점으로 인생의 거대한 굴곡에 닥치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욱 그러하다. <므첸스크....>가 어떤 작품인지 모르는 분들은 절대로 이런 흥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러시아 오페라 가운데 (책 속에서도 중요하게 거론하는)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불의 천사>와 더불어 말 그대로 쇼킹 그 자체인 오페라. 인간본성의 필터 없는 분출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드라마다. “세료자, 키스해줘. 내 입술이 터져 피가 성모상까지 튈 정도로.”
 참 재미나게 읽었다. 책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문장들도 그리 많았는데 그것들을 어찌 다 옮기나. 몇 개 적었다가 그만 뒀다. 그래도 하나만 옮겨보자.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피카소는 거지같은 그림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에 환호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소비에트 권력 밑에서 고통받는 불쌍한 화가는 그 누구도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하셨다. 피카소는 자유로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러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파리와 남프랑스에 부유한 사람처럼 앉아서 역겨운 평화의 비둘기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쇼스타코비치)는 그 피투성이 비둘기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육체적 노예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생각의 노예제도 혐오했다.” (190~191쪽)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건, 새로운 독재자가 나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한다는 뜻이라고 숱한 사람들이 증언했다. 그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민의 것? 웃기는 소리. 예술은 예술을 경험하고는 그걸 좋다, 라고 느끼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 아무한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느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다가온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모든 예술행위는 그걸 창조해내고, 창조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여된 놀이이며 쾌락이다. 예술을 인민을 위한 기재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체제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생을 그만둘 적당한 시기를 놓친 쇼스타코비치는, “바이올리니스트 표도르 드루지닌에게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은 ‘파리들이 허공에서 죽어 떨어지고, 청중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을 뜰 정도로’ 연주해야 한다고 일렀다.” (248쪽)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 영어로 쓰면 Elegy(Adagio), 한국말로 ‘비가(천천히)’. 한 번 들어보자. 소비에트 체제에서 오래 사는 것만큼이나 지루하다는 걸 각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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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카소의 거지 같은 그림,
왜 이렇게 공간이 가는지요.

집에 <개구리>가 없더라구요.
지금 사야 하나 빌려서 읽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Falstaff 2018-02-06 16:17   좋아요 0 | URL
전 피카소 그림 중에 정말로 낙서 같은 <블루 누드>는 좋더라고요. ㅎㅎㅎ 그림은 무조건 보는 사람 맘대롭니다.
<개구리> 빌려보실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지요 뭐.
 
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공동 역자 심규호와 유소영이 2012년 6월에 제주에서 번역을 끝마치고 ‘옮긴이의 말’을 쓸 때까지 이들은 그해 말에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지 몰랐던 거 같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 노벨 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소설가로 꼽힌다.”고 예언을 했지만, 아마 자신들도 예언이 그해에 당장 맞아 떨어지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안 놀랬으면 그건 사람도 아니다.
 네 번째 읽은 모옌이다. <홍까오량 가족>, <열세 걸음>, <풀 먹는 가족>, 그리고 이번 <개구리>까지 나름대로 참 재미있게 읽은 작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모옌이 좋아하여 표본으로 삼은 작가로 로버트 그레이브스(이 양반을 포함했는지가 아리송하다. 모옌 아니면 라오서 둘 중 한 명인데),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꼽았던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네 권으로 조금 과하게 단정을 하자면, 포크너와 마르케스의 결합 유전자가 모옌의 세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대단히 재미있고 중의적인 작품들을 썼음에도 모옌을 읽을 때면 거의 언제나 등장하는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아몰랑 사조思潮’같은 문학적인 환상요소가 다분히 들어있다. 물론 <개구리>에도 잔뜩 있고.
 ‘완신’이란 이름의 한 여성이 있다. 당연히 중국 여인이고, 모옌의 진짜 고향이며 그의 작품들의 지리적 무대인 산둥 성 가오미 현 둥베이 향 출신으로, 아버지는 일찍이 대일투쟁 당시 노먼 베순 박사를 사사한 외과의사로 팔로군 군의관을 역임하다가 의사로 높은 이름을 흠모한 나머지 그를 모시고자, 적군이자 스스로도 외과의사인 일본군 파견대장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독한 배갈 세 근을 마신 다음 나귀를 타고 담판을 지으러 가다가 아군이 뿌린 지뢰를 밟아 폭사함으로써, 독립투사의 딸이란 높은 이름과 출신성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영웅의 딸답게 성격 호방하고, 정의와 사명감에 불타며, 그러면서도 진흙 속에 핀 연꽃 같은 외모로 숱한 젊은이의 심장과 생식기에 더할 수 없이 강한 충격파를 주었으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산부인과 의사 공부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감히’ 이 여성에게 대시를 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이가 우리의 주인공 샤오파오의 오촌 고모인데 여기선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고모’, 샤오파오 뿐만 아니라 샤오파오 또래부터 그 아래 모든 세대의 젊은이들이 모두 ‘고모’라고 호칭하는 인물이다. 나도 그냥 ‘고모’라고 하겠다.
 당시 둥베이 향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조금 어렵게 나오면, 늙고 더러운 산파들은 관습적으로 산모의 배 위로 올라가 압박을 가해 빨리 빠져나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고모가 처음 둥베이 향에서 머리가 아니라 팔부터 나오려고 하는 아이를 받으러 가보니 늙은 산파가 그 모양을 하고 있어서 건장한 팔로 확 밀어 나가떨어지게 한 것도 모자라 냅다 달려가서 늙은이의 턱주가리를 발로 힘차게 걷어차고는, 코가 큼지막하니 잘 생긴 남자 아이를 받아내는 쾌거를 올렸던 것이 1953년. 이 아이가 고모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받은 첫 번째 아이로 이름이 천비. 코가 잘 생겨, 성이 천千이요, 이름을 ‘코’ 비鼻로 했는데, 당시엔 이름으로 신체의 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천비의 두 번째 딸도 고모가 받았고, 그 아이는 눈썹이 너무 고와서 이름이 천메이千眉. 둘 다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왜 중요한, 그것도 아주 중요한 등장인물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하여간 고모가 처녀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은퇴하고 나서도 가끔 받은 아이를 다 합하면 1만 번. 갓난아이의 몸무게가 3kg이라고 가정하면 무려 30톤의 아이를 받았다는 거다. 끔찍하지? 대한민국도 대한민국이지만 중국인들의 놀라운 번식력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을 잊는다. 어떻게 한 사람이 30톤의 아이를 받을 수 있느냔 말이지. 그것도 거의 실수도 없이 말이야. 미모의 산부인과 의사에게도 봄은 찾아와 연애다운 연애, 인생 딱 한 번의 연애를 한다. 상대가 누구냐? 왕샤오티라는 이름의 전투기 조종사.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라면 최고의 엘리트에다 최고의 출신성분으로 더 좋을 수 없는 신랑감이었단다. 그러나 좋은 일 속엔 언제나 마가 끼는 법. 더구나 한 소설의 주인공에게서는. 구름 한 점 없이 곱디고운 날, 왕샤오티는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타이완으로, 장제스의 품으로 귀순하고 만다. 그리하여 1960년대 대기근으로 중국 근대사 상 가장 어렵던 시절의 어느 날, 삶은 토끼고기를 냄비에 담아 고모에게 가져다 주던 샤오파오의 눈에 땅에 떨어진 삐라 한 장을 발견하고, 토끼고기보다 더 먼저 삐라를 고모에게 전해주었는데, 거기엔 타이완에 귀순한 왕샤오티가 잘 나가는 대만 가수와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고, 고모에게 적대적인 부르주아 출신의 의사가 고모를 거짓 증거와 함께 고발했으니, 아차, 당시가 가열찬 문화혁명의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재미있겠지?
 이게 다가 아니다. 이제 1970년대에 접어든 중국은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위기의식이 바로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 실제로 당시 중국은 가족계획을 무지하게 잘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 즉 남조선을 멀리서 벤치마킹하기에 이른다. 계획생육計劃生育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중국의 가족계획은, 중국의 인구가 얼마야? 당연히 한국에 비해, 아니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혹독한 계획생육 작전에 접어들었는데, 누구보다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로 30톤이 넘는 아이를 받는 중이었지만, 이젠 유사시에 접어들어, 그에 못하지 않는 낙태수술을 집도해야 하는 입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만 있나, 쉽게 요약해서 까고 묶고 꿰매는 거, 즉 정관수술까지 그야말로 신기의 솜씨를 발휘하기에 이른다. 이젠 외동아이를 받는 동시에 그거 뭐라나, 그래, 루프 시술까지 자동으로 해버리는데, 중국의 남아선호 역시 한국에 댈 것이 아니어서, 피임에 대한 거부감과 아들이 나올 때까지 연이은 재출산에 대한 열망을 막아야 하는 영웅의 딸, 우리의 고모가 벌이는 눈부신 활약으로 인민들의 깊고 깊은 원한을 사고야 만다.
 그럼 다 나왔다. 미모의 산부인과 의사, 최고의 남편을 만날 뻔했다가 만고의 역적으로 문화혁명을 거치고, 이어서 계획생육으로 숱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과 그를 바라보는 관찰자 샤오파오. 시대가, 당시를 거친 사람으로 하여금 무지하게 많은 이야기 거리를 소유하게 만들었겠으나, 무수한 탄생과 죽음, 여기에 어떻게 됐건 간에 출산을 욕망하는 인간 본성까지 덧붙여 이제 정말로 신화적 탐색이 가능한 지경까지 도달한 것이다. 모옌은 이 마당에 서슴없이 마르케스와 포크너가 애용했던 모호한 환상이란 양념을 톡톡 털어 넣어 마지막으로 한 바탕 씻김굿을 만들었다. 작가 고유의 담백한 문장은 독자를 즐겁게 하며, 역시 곳곳에선 눈물의 지뢰를 묻어놓았으니 이 책을 읽는 당신은 가끔 주변에 누구 없나 눈치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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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5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노벨문학상 받았다고 해서 샀는데
아직도 안 읽고 있네요 그것 참...

그나마 옌롄커의 책들은 부지런히 읽었는데
말이죠.

위화의 <형제> 대단했습니다.

Falstaff 2018-02-05 15:00   좋아요 0 | URL
중국 작품들이 예상 외로 재미나더라고요.
같은 문화권인 것도 많이 영향을 주는 것 같고요.
저도 <형제>는 무척 재미나게 읽었습죠. 이젠 출판사 바꿔서 나오더라고요. 진즉에 그랬어야지, 그 재미난 책이 절판이 뭡니까. ^^

레삭매냐 2018-02-0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alstaff 님의 리뷰를 보면 지금 읽고 있던 책들
죄다 집어 치우고 바로 읽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서 집에 가서 <개구리>부터 찾아야 하나 싶네요.

Falstaff 2018-02-05 16:31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냥 계획대로 읽으세요. 좀 부담됩니다. ^^;;
 
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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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취향에 꼭 맞는 것도 아니면서 눈에 띄면 읽게 되는 작가, 오르한 파묵. <순수 박물관>은 그의 작품 가운데 일곱 번째 읽은 책이다. 1998년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제일 먼저 읽었고, 그 전 까지는 왠지 모르게 손이 가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 읽어봐야 할 작가로만 생각했었다. 막상 직접 보니, 강렬한 제목을 단 <내 이름은 빨강>, 첫 장면부터 대단히 쇼킹한 것이 단박에 작품에 집중하게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으로 그간 파묵을 읽지 않았다는 게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반성하게 만들어, 비록 그의 작품을 검색해 특별히 챙기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족족 사서 읽게 되더란 것. 그 후 다른 작품에서도 무수하게 재출연하는(파묵 읽어보신 분들은 뭔 얘긴지 아실 것이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새로운 인생>, <하얀 성>, <고요한 집>, <검은 책>을 연이어 찾았는데 좋은 것도 있었고 별로인 것도 있었고, 한국어 번역이 괜찮은 것도 있었던 반면, 교정 교열이 개떡인 책도 있었다. 일곱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번역을 한 이난아 선생의 노고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이의 한국어 문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거. 물론 파묵, 나아가 터키 문학을 우리나라에 거의 처음으로 소개하는 ‘앞 선 이’의 애로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거, 참고로 할 텍스트가 없다는 점은 이해한다. 이난아가 비문을 만들었다는 얘긴 아니다. 주어 술어 분명하고 확실한 문장을 사용하였지만 아쉬운 점을 두 개만 들자하면, ① 주어 술어가 확실하나, 확실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기 위해 같은 문장을 서너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자주(‘자주’라는 주관적 서술이 애매하다. ‘일반 번역서에 비해’도 마찬가지고. 흠,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흔하지는 않게’ 정도라고 짐작하시라) 발견된다는 점. ② 우리나라 문장의 특수성 가운데 중요한 하나, ‘주어 생략’. 주격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더 잘 읽힐 경우임에도 원문에 (과도하게) 충실하여 주어 및/또는 주격대명사 ‘그’를 남발함으로 해서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더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는 것. 이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비단 이난아 씨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어떤 문장인지 꼭 집어서 얘기해야 하는지 좀 생각해봤는데,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해서 인용하지는 않겠다. 저·역자가 오탈자, 그러니까 교정, 교열에도 책임이 있느냐는 문제는, 내게는 좀 지루한 얘긴데, 당연하다. 책의 모든 책임은 저·역자와 출판사가 공동으로 져야 하는 법. 그러나 출판사는 개인이 아니라 법인이라서 한 객체에 대한 비난은 대개 저·역자에게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하여, 내가 주장하는 바는 모든 저·역자가 무엇보다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바로 ‘퇴고’. 내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는 책인데, 세상에 나온 다음에 출판사 교정, 교열 책임자 탓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나라의 모든 저·역자들, 제발 퇴고 좀 목숨 걸고 했으면 좋겠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읽은 파묵 중에서 거의 유일한 연애 소설. 베드 씬도 나오지만 불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파묵은 주장한다.
 미국 유학을 다녀와 제법 큰 회사의 사장 자리에 앉아있는 주인공 케말. 소르본 유학을 다녀온 약혼녀와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차가 멈춘 곳이 하필이면 유럽 소비재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샹젤리제 부티크’ 윈도우 앞이었다. 어여쁜 약혼녀 시벨이, 윈도우 안에 걸려있는 제니 콜롱 가방을 보더니, “아, 무슨 가방이 저렇게 예쁘지!”라고 감탄한 것이 1975년 4월 27일이었으며, 앞으로 30년 이상을 더 끌고나갈 사건도 딱 이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많은 일도,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시작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데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걸 우린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며칠 후 ‘샹젤리제 부티크’에 들른 케말은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여섯 달 동안 받은 봉급과 유사한 금액인 1,500리라를 주고, 부티크의 점원이자 케말의 먼 친척이자 며칠 있으면 케말의 애인이 될 퓌순으로부터 아, 무슨 가방이 저렇게 예쁘지! 라는 감탄을 받아 마땅한, 프랑스 수입산과 대단히 비슷한 터키 산 짝퉁 제니 콜롱을 구입해 약혼녀 시벨에게 선물로 주었으나, 시벨이 누군가, 프랑스 유학생이라 한 눈에 짝퉁임을 알아본다.
 됐지? 유럽의 변방 터키와, 짝퉁 명품과, 수입 유럽 소비재 부티크의 판매원과 16세 때 18세라 거짓말하고 미인대회에 나간 전력이 있는 퓌순. 반대편에 프랑스 유학생과 진품 여부를 한 눈에 알아채는 터키의 지배적 부르주아 계급의 딸인 시벨. 이 사이에 낀 우리의 케말. 이러면 본격적인 삼각관계가 형성됐다. 케말은 시간 날 때마다 사무실을 방문한 시벨과 가죽소파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는데, 터키에선 결혼 전에 여자가 순결을 상실하는 것이 가끔가다가는 살인의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하는 사회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의식은 프랑스 유학을 한 시벨에게는 많이 완화되었겠지만 그래도 인식 속에선 여전히 혼전 순결, 혼전 경험, 혼전 동거 같은 나름의 문화흔적에 민감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물론 이런 의식에 있어서는 도시 서민으로 고등학교 졸업 학력, 판매원 출신의 퓌순에겐 더욱, 아니면 훨씬 중요한 일이었던 건 물론이겠지. 그런데 이 케말은 시벨의 처녀성을 결혼이란 얼핏 타당한 이유로 훼손한 것과 같이, 별 의식 없이 퓌순의 것도 훼손시키고 만다. 참나. 섹스라는 것이. 어떤 이들은 사랑을 해서 섹스를 하고, 어떤 이들은 섹스를 해서 사랑을 하는데, 정확한 비교는 아니지만 굳이 구분을 하면, 시벨과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약속한 다음 섹스를 했고, 퓌순과는 (당연히 마음은 끌렸지만) 일단 저지른 다음에 점점 사랑하는 마음이 강도를 높였다고 해야 할까. 이런 구분이 터무니없다면, 누구에게라도 운명적 만남 혹은 필연이 있어, 운명이 점찍은 사랑을 위해 평생을 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케말은 시벨과 퓌순 사이에서 44일 동안, 힘도 좋지, 양다리를 걸쳤고, 이스탄불의 힐튼 호텔에서 퓌순에게도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서 오라 해놓고 거창하게 시벨과 약혼식을 올린다. 행복한 모습을 연출하는 케말과 시벨을 바라보며 젊은이들과 춤을 추고는, 내일 오후 두시에, 그동안 하루도 안 빼고 만나 정을 나누던 아파트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퓌순은 처음으로 약속을 어기고 다음날부터 홀연히 행방을 감춰버린다.
 퓌순이 행방을 감춘 다음에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던 여자는 시벨이 아니라 퓌순이었다는 걸 온전히 알아버린 케말. 이제부터 진짜 이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니 더 이상의 스토리 소개는 안 될 소리다. 아, 이 말은 해야겠다. 진정한 사랑을 잃은 케말이 퓌순을 찾아 헤매며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모든 소품들, 예컨대 귀걸이 한 쪽, 담배꽁초, 석고로 만든 개 인형, 머리핀, 칫솔 등을 모아 박물관을 짓고 그 박물관에 보관을 한다는 것은 알려도 무방할 거 같다.
 진짜로 2012년 4월 27일, 소설책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한지 꼭 39년 되는 날 이스탄불 추쿠르주마 대로와 달그츠 가街가 만나는 곳에 오르한 파묵은 소설에서 나오는 소품들, 예를 들어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 4,213개와 그녀의 귀고리 등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순수 박물관>이 혹시 오르한 파묵의 경험담 아냐? 라고 하는 거 같은데, 내 의견을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들은 파묵한테 낚인 거다.

 

 진짜 순수박물관 건물과 전시된 담배꽁초들. 아~ 드러


 아, 그놈의 사랑. 이렇게 쓰니까 유행가 제목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사랑 그놈, 참. 그걸 잃어버린 케말의 상실감이라니. 구구절절 어떻게 그리 옳은 얘기만 써놓았는지. 왕년에 사랑 한 번 안 해본, 혹은 실연 한 번 안 당해본 인간이 있을까만,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그 쓸쓸함과 혼돈을 정말, 정말 실감나게 묘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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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반란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한기찬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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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막 읽기를 마치고 책을 펴보니 2000년 7월 1일 초판 1쇄다. 어이가 없다. 출판사 이름이 ‘도서출판 자작’인데 그동안 창고에서 얼마나 오래 박혀 있었는지 새 책임에도 불구하고 앞표지를 열자마자 반양장 표지가 바짝 마른 자작나무처럼 제본한 본드에서 쩍, 갈라진다. 도서출판 자작에서 마지막 책이 나온 것이 2008년. 회사 망했다는 뜻이다. 쉬운 얘기로 이제 책 가게에서 품절되면 상당한 기간 동안 구입할 방법이 없으니 뜻 있는 분은 이 독후감 읽기를 여기서 잠깐 멈추고, 일단 쇼핑부터 하시라.
 이 책, 다 늙어 공부하느라 허리가 휜 동무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피터 애크로이드’란 이름이 눈에 띄어 얼른 사본 책. 핫따, 내 취향이다. 근데 제일 마지막에 달린 ‘옮긴이의 말’에 뭐라 씌어 있느냐 하면,


 “피터 애크로이드(Peter Ackroyd)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애크로이드는 애크로이드의 소설보다 더 난해한 인물이다. 애크로이드에 대한 평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것은, 그는 물론이고 그의 작품들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인터넷의 amazon.com에 들어가보면 그에 대한 무지에 가까운 비판과 일방적인 찬사를 접할 수 있다.)”


 흠. 기분 별로다. 이걸 읽으니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려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기껏 내 돈 주고 사서 읽고 난 다음 내가 느낀 만큼 쓴 독후감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쳐다보며 옮긴이 한기찬이 아주 삐딱한 웃음을 머금을 거 같다. (난 도대체 ‘기찬’이란 이름이, 참 나, 기가 차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책 앞날개에 씌어 있는 역자 한기찬 소개를 보면, 얼마나 잘난 인간인가 좀 알고 싶어서 그런 건데, 흠. 명문 사립대학 (국문과)나온 시인이시군 그래. 뭐 별거 아니구먼. 하여간 옮긴이의 말 가운데 저 괄호 안 비아냥거린 것이 영 캥긴다. 좋다, 신경 안 쓴다. 그냥 간다.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분류하느냐 하면,

 B.C 약 3,500년 ~ B.C 약 300년 : 오르페우스 시대
 B.C 약 300년 ~ A.D 약 1,500년 : 아포슬 시대
 A.D 약 1,500년 ~ A.D 약 2,300년 : 몰드위프 시대
 A.D 약 2,300년 ~ A.D 약 3,400년 : 의트스펠 시대
 A.D 약 3,400년 : 현재


 지금 우리는 몰드위프 시대에 살고 있다. 몰드 위프? 무슨 뜻인지 모른다. 책은 이런 경구로 시작한다.


 전인류적이고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 새로운 시대에 나는 종종 우리 행성이 먼 훗날의 관찰자에게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보곤 한다. 우리 행성은 끊임없이 활동하는 하나의 국가처럼, 아니 오히려 허공에 뜬 둥근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일 게 틀림없다.

- 로날드 코르보, 『신지구론』, 2030년.


 몰드위프 시대의 끝무렵에 로날드 코르보란 인류가 태어나 활동할 예정인가보다. 그는 하여간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약 1,400년 이상이 지난 작 중 현재 시점. 몰드위프 시대의 인간보더 훨씬 큰 인류가 살고 있는데, 좀 이상하다. 성castle 안에 존재하는 인류는 어려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고, 역할대로 맡은 바 임무를 하며 생활을 한다. 성 안에는 기계도 없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타원을 운행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전운동도 하지 않지만 낮과 밤이 있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키 작은, 그러나 1,400년 전의 인간과 비교하면 많이 큰 수컷 인간이 바로 플라톤. 이이는 연설가다. 과거의 역사에서 추출한 단편을 보고 그것으로 예전 조상들의 삶과 문명을 유추하는 일종의 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희극작품 하나를 발견한다. 책의 제목은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 책의 어딘가에 ‘찰스 지음’이라고 씌어 있어서 일찍이 『위대한 위산』(정말로 ‘위산’이라고 씌어있다. 작가의 실수인지 역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실수인지는 모르겠다), 『어려운 시절』 같은 책을 낸 소설가의 자취는 있는데 찰스 다윈이란 작자는 처음 듣는 것이라 그냥 디킨스겠지 싶어 그렇게 규정하는 인류학자적인 모습. 웃기지만 1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인류를 추리하는 21세기 초반의 인류학자와 그리 다르지 않은데, 심지어 35세기에는 과학과 기계도 없는 상황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걸 당당하게 어린 백성에게 연설하는 플라톤.
 여기까지 읽으면서 흥미 있는 환상소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논문에선 작가 애크로이드를 줄리언 반스와 더불어 20세기의 샛별처럼 빛나는 영미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예를 들었다는 것이 번쩍 떠올랐다. 좀 더 읽어보자.
 그래, 주인공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플라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땅 위에서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산다면, 플라톤의 거처는 저 위에 있다는 이데아. 35세기에 인류는 이데아에 거처한다는 말인가? 안 알려드린다. 이데아가 어쨌든지 간에 성벽 밖이 너무 궁금하여 견딜 수 없는 젊은 플라톤, 금기의 선을 넘어 도시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와 도시의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로 기소 당한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반역적인 가르침 또는 연설을 했으므로. 반역죄의 유일한 형벌은 뭐?
 여기까지. 얇은 책이다. 도저히 더 이상은 밝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알 것이며, 내가 그랬듯 애크로이드, 이 재미난 이름을 가진 작가가 얼마나 기막힌 상상과 은유의 죄를 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이 책을 상찬하는 걸 비꼬고 있는 역자의 오만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 눈이 다 번쩍 뜨일 것이다.
 단, 작품이 나하고 맞고 안 맞고는 전적으로 당신 소관이다. 낚시질에 넘어가 후회를 한다 해도 내 탓은 추호도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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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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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던 작가 헨리 밀러가 우리 나이 마흔 정도 먹었을 때 머문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밀러가 1891년생이니 마흔이면 1930년. 이때 그는 평생의 역작이자 당대 최고의 외설문학이자, 이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기 전에 꼭 읽어봐야 할 책 1,001 권에 드는 <북회귀선>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미국 출신의 한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치아가 파리에서 글을 씁네, 하며 빌빌거리는 이야기로 미국에서 아내가 보내주는 용돈으로 밥과 술을 먹고 여자를 사는 모습을 밀러 특유의 문명, 문화에 대한 세계관에 입각한 길고 긴 에세이 비슷하게 만든 소설이다.
 이이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 헨리 밀러와 그의 처, 준. 밀러의 파리 시대에 스물아홉 살 먹은 스페인, 프랑스 혼혈인 여류작가 아나이스 닌이 밀러 부부와 가깝게, 몸과 마음이 동시에 가깝게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나이스가 11세 때부터 줄기차게 일기를 써 왔으며, 나름대로 작가라는 이름을 갖고 활약을 했다 한다. 무수하게 많은 일기를 썼는데, 특히 밀러 부부와 인연을 맺은 1930년대 초반에 가장 왕성하게 일기를 쓴 것까지는 좋았다. 개인 일이니까.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자신이 쓴 문장들을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것. 아나이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아나이스 닌 재단 담당자인) 루퍼트 폴이 쓴 이 책 <헨리와 준>의 서문에 의하면, 1966년에 남편의 이름과 애인, 즉 정부情夫 부분을 삭제하고 처음 출간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모든 사람의 실명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게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어보면 인체의 각 부분을 칭하는 단어를 숨김없이 사용한다. 같은 장면이라도, 지금 시선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외설이라 시비를 걸만한 문장도 많다. 이런 밀러, 그리고 당시 외설논란의 중심에 있던 D.H. 로렌스에게 영향을 깊숙이 받은 아나이스 닌의 일기, 더구나 내밀한 자신만의 글쓰기인 일기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묘사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이 한편 당연하기도 하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밀러의 작품, 그것도 밀러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쓸 작품이 아닌, 초기 히트작 <북회귀선>의 초고에 당연히 충격을 받고 매우 신선하다고 느꼈으며 심지어 깊숙하게 영향까지 받은 아나이스는, 작중 인물과 헨리 밀러 자체를 혼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 이상으로 (띠 동갑인) 헨리 밀러에게 얽히는, 즉 의도된 자유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간 것이 아닌지, 책을 읽는 내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면 정말 매력적인 책인 걸 단박에 알게 되리라. 헨리 밀러는 오랜만에 입장권을 훔쳐서 음악회에 잠입해 몽롱한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드뷔시의 곡까지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는, 분위기가 아주 혼탁해지고 있다. 나는 자신이, 만일 내가 여자였다면 성교性交 중에 어떤 기분이 들까, 쾌감은 여자 쪽이 더 예민할까…… 라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북회귀선》 문학세계사 1991 김진욱 옮김. 90쪽)


 야수파 마티스의 그림 속에서는 이런 것도 찾아본다.


 “햇빛은 파열된 직장直腸처럼 출혈한다. 이 망가진 차륜의 바퀴통에 마티스가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79쪽)


 당시가 1930년대 초반. 이런 놀라운 감각과 묘사력과 상상 속에서 배회하는 헨리 밀러를 아나이스 닌은 천재라고 규정해버리고 만다. 위에서 얘기했듯 이미 자신의 삶 자체를 ‘문학적’으로 연출하기로 작정한 아나이스는 충실한 남편 휴고가 있음에도 몇 명의 애인을 두었는데, 책에선, ① 예전부터 관계를 맺었으나 자주 발기부전 증상을 보이는 존, ② 사촌형제로 가끔 한 침대에 들지만 그때마다 근친상간에 관한 의혹을 받아 영 께름칙한 에두아르도, ③ 인터코스가 아니라면 유사성행위라도 꼭 해야 본전을 뽑는 기분이 드는 소설가 드레이크와 불륜으로 얽혀 있다. 이 와중에 1931년 12월, 드디어 헨리 밀러를 만난다. 원래부터 DH 로렌스를 즐겨 읽고 탐구해왔던 닌에게는 모르긴 해도 밀러의 특이한 문화, 문명비판과 성에 대한 의식 같은 건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왔으리라. 거기다가 책의 초반에 밝혀지듯이,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라서 나이든 남자의 사랑에 관심을 두는 심리상태 또는 성향이 있다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숱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이든 그 의사의 키스를 받기도 하는데, 자신과 띠 동갑, 아나이스가 보기엔 듬직한 나이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인물이 바로 헨리. 이들은 곧바로 몸의 잔치로 빠져든다. 아나이스가 비록 진심을 다해 남편을 사랑하지만 침대 위에선 오소독스한 섹스만을 고집하던 부부 사이도, 아나이스-헨리의 기법, 소위 침대 테크닉이 더해져 한층 윤택한 커플로 발전하게 됨은 물론이고, 헨리의 매혹적인 아내 준과 아나이스마저 동성애 바로 바로 전단계로 접어든다. 그러니까 아나이스는 밀러 부부 두 명과 동시에 연애를 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 한다는 말. 여기서 말하는 연애는 몸과 몸의 사랑을 일컫는 것일 뿐, 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정신적 유대관계는 부부 둘 다를 사랑하고 동시에 같은 이유로 질투한다는 뜻이다.
 그냥 이게 다다. 어찌하여 준이 헨리의 곁을 일정 기간 떠나게 되고 그때, 아이고 이런 천우신조가 있나 그래, 아나이스는 헨리와 헨리의 친구 프레드가 같이 쓰고 있는 아파트에 번질나게 드나들며 심지어는 프레드가 훤히 보고 있는 와중에 라이브 쇼도 구경시키기도 하고, 하여간 질퍽하게 놀아난다. 사랑타령이 이어지고, 독자(특히 남성 독자인 ‘나’의 경우)는 헨리의 사랑타령이 점점 수상하게 보이는데 그건 <북회귀선>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헨리 밀러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기적이며 난장판의 성격을 가진 인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서서히 밀러가 아나이스를 ‘이용’하여 그녀의 재산과 몸과 열정을 착취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니 굳이 강조할 것은 없다. 몇 명과 동시에 사랑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빠져드는 딜레마가 바로 질투. 사랑과 질투와 문학을 빙자한 로맨스가 난교를 맺는 작품. 초판이 나온 1960년대 중반엔 모르겠지만 50년이 넘어 지난 지금 <헨리와 준>이 특별한지 그건 모르겠다. 만일 이 독후감을 읽는 당신이 아직 <북회귀선>과 <헨리와 준>을 다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북회귀선> 하나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은 기분 (솔직해서 미안합니다).
 헨리 밀러가 사실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인간이란 걸 알고 읽으시면 한 유부녀의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왜곡시켜 볼 수 있게 만드는지, 놀라운 착시현상까지 보실 수 있을 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이렇게 두가지 번역이 있다. 아니, 동서문화사에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한 권에 든 두꺼운 책도 있는데 그 출판사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권하지 않는 편. (소문이다, 소문. 진짜가 아니라. 오해 금지!)

 하여간 김진욱과 정영문 번역은 둘 다 문학세계사에서 나왔고, 아이고, 사이도 좋지, 나란히 절판이다. 난 김진욱 번역을 가지고 있다. 굳이 읽어보시려면 중고책을 선택하시든지, 아니면 그래도 번역 매끄럽고 동시에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을 다 읽을 수 있는 동서문화사를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북회귀선>은 야하고 좋은데 <남회귀선>은 (전적으로 내 의견으론)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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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3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정말 지루....하지요...? -_-;;; 그런 자극적(?)인 소재를 갖고 이렇게 지루하게 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모범 사례라고나 할까요... 작가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Falstaff 2018-01-31 10:24   좋아요 0 | URL
자기 일기를 쓸 때부터 언젠가 대중에게 발표할 작정을 하고 썼다는 데 만원 겁니다. 그러니 자의식과 감정 같은 것이 과도하게 나타날 수밖에요. 길기만 하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다아아아아고 얘기하면 실례일지 모르겄습니다. ^^;

레삭매냐 2018-01-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7년 전에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버거웠던 독서로 기억합니다만.

Falstaff 2018-01-31 13:12   좋아요 0 | URL
흑, 제 생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다시 읽으셔도 버거우시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ㅠㅠ 이거 읽느라고 꼬박 이틀 걸렸는데, 고생 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