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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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코프는 이 책 영어 판의 (오만한)서문에서 소설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를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반면 독자는 소설 속에서 나보코프 스스로가 독자로 하여금 그리 생각을 하게끔 수시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하여, 저절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위의 표현으로 책의 성격은 대강 나왔다. 범죄 소설이며, 험버트와 닮았다는 건 게르만이 악당이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 “그렇지만 험버트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닐도록 허락된 낙원으로 가는 푸른 오솔길이 있다. 반면 게르만은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작가 서문. 240쪽)라고 선언하여, 책의 제목이 <절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절망Despair을 키릴 문자로 쓰면 영어로 읽는 것보다 울부짖음 소리가 훨씬 우렁차다나.
 반면 역자 최종술은 “나보코프는 ‘예술로서의 살인’이라는 주제 속에 도스토옙스키와 푸시킨의 문맥을 통일시킨다. 게르만의 형상은 라스콜니코프뿐 아니라 푸시킨의 위대한 시인과도 그로테스크한 유사성을 지닌다.”라고 주장하며(260~261쪽) <절망>은 무수한 작품들을 패러디한 완성체로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한 책 <죄와 벌>에선 주인공의 이름을 ‘라스콜니코프’라고 하는 것(민음사, 을유문화사 등)과 ‘라스콜리니코프’(동서문화사 등), ‘라스꼴리니꼬프’(열린책들) 등등 많고 많으니 이름 갖고 시비하는 일 없으시기 바람)
 나는 먼저 게르만과 험버트의 비교는 두 작품을 쓴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그냥 비교해서 얘기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렸고,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유사성에선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고 나니 비단 라스콜리니코프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모든 살인자들과도 어딘지 모르게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역자의 의견에도 동의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염두에 둔 것은 널리 알려졌듯이 1919년 적군이 내전에 승리하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으로 터전을 옮겨 (작품 활동은 훨씬 전부터 시작했지만)스물두 살부터 “블라디미르 시린”이란 필명을 써 발표한 것, 1934년에 잡지에 <절망>을 연재하고 다음 해에 <사형장으로의 초대>와 1937년에 <재능>을 연재한 다음부터 모국어인 러시아를 버리고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근데 뭐 때문에 이리 구구절절 사연이 기냐고?
 잠깐 스토리 얘기 해드리지.
 위에서 잠깐 비쳤듯이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러시아 출신이고 지금 베를린에 살고 있는 초콜릿 사업가인데 싼 가격에 가공기계를 구입하러 프라하에 갔다가 우연히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여겨지는, 그래서 아주 똑같이 생겼으리라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리는 펠릭스란 사내를 만난다. 자기 생각에 둘이 얼마나 닮았느냐 하면, 한 사람인데 둘로 쪼개진 느낌이라 빈혈이 생길 정도라나? 뭐 약간 미친 듯. 왜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기분이 들었느냐 하면, 지금 초콜릿 사업이 거의 망해가는 수준이라 파산선고가 불을 보듯 확실하여, 비록 불법이라도 한 방에 거금이 생길 모종의 범죄를 구상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내용은 책 중간을 넘어갈 정도면 알 수 있다. 완전히 자신하고 똑같이 생긴(생겼다고 착각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해, 자신이 특정한 곳에 가서 범죄를 벌이고 있는 시간 이 펠릭스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잔머리. 물론 나부코프가 이런 뻔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할 인간이 아니라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건 직접 읽고 나서 아시면 되는 거니까 그리 하시고, 자,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자기하고 완전하게(는 아니고 거의) 똑같이 생긴 인물이 특정 행위를 하는 거, 이것과,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 필명을 써서 소설작업을 하는 것과, 이방의 나라에서 자기가 버리고 온 조국의 문자로 작품을 쓰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시 안 계실까요?
 이 소설이 원래는 러시아 키릴문자로 썼다가, 몇 년 후에 영어로 작가가 직접 옮겼다고 하는데,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스스로가 어려서부터 대단한 문재로 인정을 받은 영재였음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어서 당연히 본인도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비교적 젊은 30대 초반에 써서 중반에 출간한 책에도 숱한 말장난, 번역서는 아무리 읽어도 감흥이 없는 그런 말장난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 독자는 그게 아무리 재미난 거라도 뭐 이해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고,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여 상상력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건, 흔히들 뭐라고 하느냐면, 독자가 작가 자신이 겪을 일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의미의 수기手記적 기록이라는데, 설마 <절망>을 나보코프의 수기적 기록으로 읽는 종자들은 없겠지. 내가 읽기로는 이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책상 위에서 머리로만 쓴 소설이라. 주로 러시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역자 최종술의 해설처럼 숱한 작품의 주인공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하다못해 작품 중에 작가가 직접 다른 작품과 주인공들을 불러내는 것들 말이다. 거기에 만일 내 생각도 추가할 수 있다면 필명 사용에 따른 효용이랄까 진실이랄까, 조금 확장하면 비단 필명 사용이 아니더라도 자신 즉 작가와 작품이 서로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 하는 고민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처럼 조금의 쉼도 없이 지옥의 불길을 향한 가시밭길을 가야하는 작가의 숙명도 이야기한 것 아니겠느냐, 하는 백퍼 아마추어의 의견이었습네다.
 (하여튼, 나보코프는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참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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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허명수 옮김 / IVP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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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플레너리 오코너라는 소설가도, <현명한 피>라는 책도 몰랐다. 어느 날 옵서버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100선 리스트를 볼 기회가 됐고, 목록 안에 <현명한 피>가 포함되어 있어서 바로 검색해 사서 읽은 책이다. 한동대에서 선생으로 있는 허명수 씨가 번역을 해 Ivp 출판사에서 찍었다. 그래서 한동대학도 검색해봤다. 건학의 이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사회 및 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지성, 인성, 영성의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까지 뒤져봤으면 이젠 출판사 Ivp. 책 속에 나온다.
 “IVP(InterVarsity Press)는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는 IV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출판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문서 운동을 실천합니다.”
 역자가 개신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의 선생이란 건 문제가 아닌데, 출판사가 위와 같은 조직의 출판부였다는 걸 알았으면, 이 책 안 읽었다. 기독교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1940년대 남부 미국에 성서 지대Bible Belt라고 있었단다. 개신교 근본주의가 아주 맹위를 떨친 보수적인 지역이었다는데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 지역 출신이면서도 개신교 속의 (힘겹게? 글쎄 미국 안에서 신구교 간 얼마나 치고 박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가톨릭을 고수했으나, 신구新舊를 따로 따지지 않고 “종교적 비전과 믿음을 인류 전체를 향한 메시지로 승화시켰다”고 작가소개에 나와 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오코너가 젊은 시절에 루푸스 병이 발병하여 겨우 서른아홉 살에 요절한 작가이며, 남부의 기독교적 작품 활동에 전력했다는 거, 다 좋은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교양이 전혀 없다는 거. 그리하여 나는 250여 쪽에 불과한 짧은 장편소설을 아주 힘겹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반에 남부 촌구석마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보닛 위에 올라 광분한 모습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에 입각해 연설과 설교와 전도를 해오던 할아버지를 둔 주인공 헤이즐 모츠. 나이가 차 징집당해 전쟁에 참가하고 부상을 입어 제대를 해 연금생활자가 되어 다시 남부로 돌아온다. 이젠 할아버지도 없고, 부모는 일찌감치 더 먼저 돌아가고, 연금 덕에 그냥저냥 먹고 살 만하지만 외려 직접 보고 만지고, 들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는 반 그리스도의 입장에 처했다는 거. 책을 열자마자 서문에 이런 얘기 다 나와 있으니 내가 이 독후감에서 새삼스레 스토리를 얘기한다고 해도 그리 잘못된 건 아닐 테다. 하여간 헤이즐은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설립하려 하는데,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는 진리에 봉착. 이후 사이비 종교인이자 사기꾼이자 술꾼이자 가짜 맹인 연설자 부녀를 만나고, 얼마 후엔 진짜 종교 사기꾼을 만나고, 살인이 한 건 벌어지고, 자기 눈에 석회를 문질러 스스로 봉사가 되고 하는 일련의 엽기 라인.
 어째 눈에 익다. 난 책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카슨 매컬러스가 기독교에 관해 소설을 썼다면 딱 이렇게 썼을 거 같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 남부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 그렇지? 어디서 몇 번 읽은 것 같은 느낌.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윌리엄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과 <8월의 빛>과, 거의 장대처럼 키가 크고/크거나 힘이 장사인 여성들을 주로 출현시키는 카슨 매컬러스. 그래, 전형적인 고딕문학이란 장르다(이렇게 생각했는데 기분 좋게 역자해설에서 딱 포크너와 매컬러스를 언급하는 거다. 난 속물. 이럴 때 어깨가 으쓱거린다). 거기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사탄의 태양 아래>같은 광신적인 고행까지 곁들여놓고 나 같은 비종교적 인간한테 옵서버가 선정한 세계 100대 소설이라고 읽어보라고 하면, 그거 곤란하지. 내 눈엔 전부 이상한 인간들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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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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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에 <세일즈맨의 죽음>을 정말 아무 감동 없이 읽었다. 왜냐하면, 그때 내 나이 너무 어려서 세상이 어떨 것이란 짐작도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 그러니 그게 제대로 읽혔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도 세상에다 대고 늘 엄살만 부리던 허약한 젊은이였다. 뭐 지금도 그리 나아진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세일즈맨의 죽음>은 조만간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세일즈맨....>을 다시 읽어볼까 마음먹게 만든 작품이 바로 <모두가 나의 아들>. 이 책을 읽고 얼른 밀러를 검색해서 이이가 공산주의자 아니었나, 확인해봤다.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의 톱니바퀴에 해체되는 가족과 개인이라고 할 수 있어서 검색해봤는데, ‘주의자’ 수준은 아니었다.
 총 세 막으로 구성된 희곡. 밀러 자신이 대공황 시절에 집안이 결딴이 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음식점 접시닦이부터 사환, 운전수 등 안 해 본 잡일이 없었고, 수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미시간 대학을 졸업했다고 ‘두산백과’에 씌어있다. 그러니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자본이 인간에게 함부로 행패부리는 건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거다. 아니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1막에선 그냥 환갑이 지난 늙은 주인공 조/케이트 켈러 부부의 둘째 아들 래리가 2차 세계대전 중 버마 또는 중국 해안 근방에서 실종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일요일의 평화로운 아침. 맏아들 크리스의 초대로 오랫동안 옆집에 살았던 디버 집안의 딸, 앤이 어제 도착해 이제 갓 일어나 식당에서 케이트 여사가 해준 밥을 먹고 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이 아가씨가 앞으로 사건이 벌어질 이 집에 왜 왔느냐 하면, 크리스가 자기 동생의 애인 앤과 결혼할 것임을 부모에게 통보할 예정이기 때문. 제목이 <모두가 나의 아들>이고, 전쟁 중 비행기 조종사였던 둘째 아들은 버마, 그러니까 미얀마 정글 상공에서 실종, 죽음 또는 전사가 아니라 ‘실종’된 상황이라, 일찍이 메릴린 로빈슨의 공감 가는 소설 <하우스 키핑>에서 봤듯이 사라진 가족을 기다리는 고통과 고독에 대한 작품일 것이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밀러 또한 뛰어난 드라마 작가들이 늘 그렇듯이 시치미 뚝 떼고 독자(또는 관객)을 그쪽 방향으로 몰아간다. 둘째 래리가 틀림없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머니 케이트 여사는 결코 첫째 크리스와 앤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는 것.
 여기에 켈러 가족과 조 켈러 씨가 운영하는 회사의 동업자이자 생산담당 부사장 정도였던 스티브 디버 씨의 가족 사이에 오래됐지만 짙은 안개 속에 묻혀있었던 사건이 틈입해온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켈러-디버 회사에서는 항공기 엔진의 헤드를 만들어 군납을 했었는데, 미국 조달청에서 30분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선적을 하라고 독촉전화를 해대고, 만일 납기를 조금이라도 맞추지 못하면 계약이 파기당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만 엔진 헤드에 실금이 간 불량품을 만들어내고 만다. 언제나 건강체질이었던 조 켈러 사장이 하필이면 딱 하루 몸살이 나서 집에 몸져누웠던 날, 납기에 극도로 쫓기는 일이 벌어졌고 스티브 디버 씨는 워낙 새가슴에다가 강박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 불량 엔진 헤드를 납품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불량 엔진을 장착한 전투기 스물한 대가 공중에서 폭파되어 조종사 전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디버 씨는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는 상태인 것.
 이런 상황.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대량주문을 받아 생산라인을 풀가동하며 주문량의 일부씩을 납품하고 있는데, 만일 한 번이라도 납기를 지키지 못하면 대량주문 자체를 취소하겠다고 하는 거. 이건 갑질이 아니라 계약에 의거한 정당한 요구다. 돈 많은 거대 회사가 하는 짓이라고 다 갑질은 아니다. 중소기업이 납기 안에 정상제품을 납품할 수 있다고 처음부터 약속을 해서 성립한 계약이다. 근데 눈앞에 납기일이 닥친 순간 불량제품이 쏟아졌다면? 게다가 대량주문 취소가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치명상을 초래한다면? 당연히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반 상식적 대답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디버 씨는 가족과 나의 복지를 위해 납품을 해버렸고, 그래서 스물한 명의 튼튼한 청년들이 이국의 하늘에서 폭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업하는 게 즐겁고 쉬울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속 편한 건 역시 봉급쟁이다. 디버 씨 봐라. 자기는 진심으로 처자식의 복지와 잘 나가는 회사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불량품을 납품해 지금 교도소에 박혀 있지만, 자식들은 아버지가 너무 불명예스러워 면회는커녕 편지 한 장 써본 적이 없다. 하! 아빠가 날 위해 전투기에 들어갈 불량품을 납품했다고요? 뻔히 공중에서 폭발할 걸 다 알면서도. 그러고도 그게 나를 위해 저지른 거라고요? 내가 언제 회사 물려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요? 자식 키우는 거 다 이런 법이다. 고까워 말아라.
 그래서 이 드라마의 제목이 <모두가 나의 아들>이라?
 천만의 말씀. 난 지금 이 독후감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드라마의 진짜배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다른 얘기들만 열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진짜로 밀러의 <모두가 나의 아들>을 읽은 분들이 이 독후감을 본다면, 참 희한하게도 수박 겉만 핥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여기서 말아야지. 연극을 진짜 연극답게 만드는 마지막 반전의 순간을 확 밝혀버릴 용기까지는 다행스럽게 나는 가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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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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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이런 내용인줄 몰랐다. 예전에 이리 노니는 골짜기, 포천군 이동면 낭유리에서 군역을 치룰 때 국내개봉을 해, 야한 영화라고 소문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못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이제야 원작 소설로 읽었다. 뭐, 야하게 연출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겠지만 굳이 베드 씬을 강조할 필요까진 없을 듯.
 언제나 길 위에 있어야 하는 팔자를 타고난 화자 ‘나’ 프랭크 체임버스. 초장부터 술에 잔뜩 취해 캘리포니아 로스 엔젤레스 근교를 달리는 건초트럭의 짐칸에 누워 정신없이 자다가 발목이 덮개 밖으로 비죽 튀어나오는 바람에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이 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가 ‘쌍둥이 떡갈나무 선술집’ 영화에 자주 보다시피 펍pub 정도로 보이는 미국식 휴게소에 들어가 무전취식을 하고, 마음 좋은 그리스 이민자 닉 파파다키스의 호의로 점심도 얻어먹고 휴게소에서 취직도 하는 것이 첫째 장章. 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길지 않은 소설 가운데 1장을 읽으면서, 분명히 이 책은 로드 무비, 아니면 <길 위에서>를 쓴 잭 케루악 류의 비트 문학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케인이 이 책을 쓴 시기도 1934년의 미국. 어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아, 뭐 그렇다고 꼭 집어서 <포스트맨은....>을 비트 문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다. 소설 한 편 읽는데 그까짓 장르에 대한 잡소리는 안 해도 충분하니까.
 실제로 등장인물 프랭크 체임버스는 팔자에 역마살이 끼어 늘 길 위에 있어야 편안함을 느끼는 인종 같아 보인다. 소설 속에서 형사에게 신문을 받을 때 보면, 정말로 프랭크는 미국의 거의 모든 도시를 다 섭렵했고, 거의 모든 도시에서 크고 작은 말썽을 피웠으며 사소하게 유치장이나 구치소를 들락거린 전력이 있다. 이런 인간이 한 장소에 머무는 경우는? 예, 맞습니다. 여자가 개입을 한 것. 그것도 프랭크의 관습을 초월한 자유분방함, 아니,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저질러버리는 배은망덕은 자신을 어여쁘게 여겨 음식과 일자리를 준 선술집의 주인 닉 파파다키스의 어린 아내 코라와 사랑의 화염을 활활 태워버리기에 이른다.
 내용은 여기까지. 물론 다음 장면은 눈치 빠른 분들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터. 이 책이 나오기 67년 전인 1867년에 이와 비슷한 구도의 소설을 며칠 전에 소개한 적이 있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 여기서도 나이 많은 닉 파파다키스 씨와 그의 젊은 아내 코라. 부부 사이에 어느 날 불쑥 등장한 젊고 기운찬 남자 프랭크. 크! 감 확실하게 잡히실 듯. 맞다. 당신의 감이 맞다. 일은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지는 건 20세기. 보다 적극적인 불륜과 범죄의 하모니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을 뭐라 해야 좋을까? 동시대를 누빈 알프레드 히치콕과 비견하는 고전적 범죄소설이라고 하면 어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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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
헨릭 시엔키에비츠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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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유명한 영화. 오래 전, 연말연시에 연휴 3일 있던 시절, 연휴 기간에 TV만 틀었다하면 어느 채널이건 간에 일 년에 한 번은 구경할 수 있던 영화. 로버트 테일러와 데버러 커가 주인공 비니키우스와 리기아 역할을 했던 바로 그거. 근데 <쿠오 바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에 다 본 기억이 없다. 하도 오랜 세월 조금 조금씩 보다보니 장면이 연결되어 마치 다 본 것처럼 착시를 일으켰던 것. 영화 자체도 그리 재미가 없었던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마 그랬던 거 같다. 그리하여 <쿠오 바디스>를 여태까지 작가의 이름은 모르지만 스페인 사람이 썼을 거라고 짐작해왔던 것인데(왜 스페인이라고 생각해왔는지 나도 모르겠어!), 놀랍게도 폴란드 작가의 작품이다. 그것도 1905년이긴 하지만 어쨌든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내겐 철저하게 무명씨인)헨릭 시엔키에비츠. 이 책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8/129호. 비교적 앞 번호라 초판이 2005년 12월. 내 책은 2009년 8월 초판 5쇄. 일단 5쇄니까 좀 팔린 책이란 얘긴데 왜 난 읽을 생각을 여태 하지 않았을까. 암만해도 영화 탓인 거다.
 아직 이 책 안 읽어보신 분, 거수. 놀라지 마시라. 겁나 재밌다. 두 권에 1천 쪽 넘는 분량인데 하루 종일 책만 읽는다고 가정해도 이틀 동안 밤마다 쐬주 한 병 마실 수 있다. 한 번 책을 들었다하면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얼굴에 물만 칠하고 읽기 시작하면, 때 돼서 밥만 먹고 오후 일곱 시까지 하루에 한 권 독파 가능. 내 연세에 눈이 침침해 나흘 걸렸지 그거만 아니었으면 이틀이면 뚝딱 해치운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 아시겠지?
 남자 주인공 로버트 테일러 비니키우스는 옛 집정관의 아들이면서 장교로 오랜 소아시아 원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청년. 귀향 도중에 약간의  부상을 당해 은퇴한 장군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집에서 치료를 받느라 세월을 좀 죽이는데 (폴란드 민족임을 은유하는)북부 유럽의 친 로마 성향을 띤 리기족族에서 인질로 와 훌륭한 아울루스와 정숙한 폼포니아 그레키나 부부의 양딸 정도로 잘 자란 아가씨 ‘리기나’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다친 것을 다 치료하고 이제 로마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 페트로니우스를 방문해 리기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 고민을 털어놓자, 삼촌이 직접 아울루스 장군을 방문하여 리기나를 품평한 다음, 곧바로 황제 네로를 찾아가 리기나는 인질로 로마에 와 있는 것이라 황궁에서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고하여 아가씨의 충실한 자유인 신분의 하인 우르수스를 동행해 입궁하게 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여기서 주인공 비니키우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또 다른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외삼촌인 페트로니우스(1권 표지에서 나신의 여자가 키스를 퍼붓는 조각상의 주인공이 바로 페트로니우스). 애초부터 종교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 나는 이 책, 페트로니우스 한 명을 읽기 위해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쾌락주의자. 회의주의자. 이 정도로 소개할 수 있는 사람. 다시 한 번 얘기하는데, 난 정말로 종교, 특히 기독교에 관해선 관심이 없다. 그래서 서양 역사에 가장 큰 비극은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와 분방하고 자유스럽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헬레니즘 문화가 뚝 부러졌다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페트로니우스, <쿠오 바디스>의 진정한 영웅이자 주인공인 이 인물이 헬레니즘의 축복을 받은 마지막 인물 비슷하다. 시, 음악, 연극 등에 달통하고, 세 치 혀를 적재적소에 촌철살인으로 날릴 줄 알고, 뛰어난 인물 중에서도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이. 네로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당대 유일한 인물.


 “폐하. 앞으로 만수무강하시더라도 제발 대중 앞에서 노래는 하지 마십시오. 양민을 학살하시더라도, 아무튼 시는 쓰지 말아주십시오. 사람들을 독살하시더라도, 부디 춤은 추지 마십시오. 또다시 불을 지르시더라도, 부탁이니 그 서투른 키타라 연주는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폐하의 벗이자 ‘고상한 판관’인 페트로니우스가 폐하께 드리는 충고입니다.”


 내가 비록 종교엔 아무 관심도 없지만 이 책에서 묘사하는 초기 기독교를 읽고 느낀 것이 많았다. 한 마디로 숭고함. 희생. 헌신과, 무엇보다 사랑.
 카타콤. 그리스에서 온 다신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비의적秘儀的 진리를, 위로는 위성국가의 공주님부터 로마 집정권의 아드님에 이어 저 아래로 노예들, 거기다가 황제의 근위병사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쳐 받들어온 기독교. 정확하게 얘기해서 AD 60년대 초기의 카타콤. 로마의 학정 속에서 미미한 카타콤을 기반으로 생명력을 이어온 기독교. 비록 유물론자를 자임하는 나는 종교란 '의식의 아편'임을 주장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위대한 종교.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정점에서 등장한 기독교. 또는 예수. 그래, 여기서도 문제는 권력이다, 권력. 주피터, 헤라를 위시한 숱한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의 다신을 모신 최고의 전성기가 바로 네로 시대. 전성기라 함은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얘기. 맞지? 서양세계에서 내리막길을 대체할 종교로 ‘사랑’을 얘기하는 기독교가 자리 잡은 것도 참으로 기막힌 행운이며, 그걸 넘어 기적이란 것. 이것도 맞지? (이 책에서 묘사한 작가의 모든 것이 옳다면)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순결, 순응, 청빈의 미덕이라니! 그러나 참 얘기하기 힘든데,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거.
 주피터를 정점으로 무수하게 나열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그들의 권력을 사용해, 카타콤에서 비롯한 겸허한 기독의 정신을 박멸하려 할 때가 전성기였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3세기 이후 근 1,700년 동안 기독교의 전성기 아니었나? 그동안 쾰른에선 무려 700년 동안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대성당을 건축하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오늘도 공사 중이다. 만일 기독교의 하느님이 정말로 있다면 그분이 쾰른이나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졌고 벌이고 있는 겁나게 화려하고 겁나게 비싼 건축물을 보고 정말 좋아할까? 대한민국에 모텔의 수만큼 많은 개신교 교회의 난립도 자신을 위한 봉헌으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왜 이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 시절의 그리스 로마 신들을 보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느끼지? 종교의 순결이 아니라 종교가 갖는 권력이 진짜 문제라니까. 교회의 권력, 교회 내에서의 권력, 다 마찬가지다. 어디서나 일단 권력을 갖게 되면 그까짓 겸손과 순결과 순응과 청빈을 뭐 하러 귀찮고 고생스럽게 짊어지고 다니겠느냐 말이지. (아직도 목자의 품에 안기지 못한 집 나간 검은 양 한 마리의 의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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