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超譯?

  헉! 세상에 超譯이라니, 어떻게 번역을 했기에 번역 이후의 문장이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역超譯의 단계로, 진흙탕의 번뇌 가득한 속세에서 올림포스까지 기어 올라갔을까?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을 낸 출판사는 틀림없이 超譯이란 이러저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그것도 모르냐고 할 것이지만, 超譯은 국어 사전에, 일본어 사전에, 중국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즉 출판사 혹은 역자가 만든 단어일 터인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초역初譯을 잘못 쓰신 거 아닌가 싶다.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번역한" 발췌 번역, 抄譯은 아닐 거 아녀?

 잘못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책의 표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간판, 문패라서.

 잘못 쓴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로 표지에 超譯이라 했는 지, 사실은 궁금하지도 않다.

 걍 우리 말로 써도 충분할 텐데 뭐하러 굳이 한자어로.... 씁쓸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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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3-20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췌번역 초월번역 의미로 쓴거 같아요. 철학자들 저서를 편집 (짜집기)한 원서 표지가 그래요.

Falstaff 2025-03-20 08:12   좋아요 0 | URL
핫, 그렇다면 발췌번역 抄譯이라고 쓰기 쪽팔려서 사전에도 없는 초월 번역이라고 하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재미나요.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결정체 가운데 하나인 루공-마카르 총서를 여는 첫번째 작품.

  나는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열두 편을 읽고, 1번을 열세 번째로 읽었다. 그러니 이제 일곱 편만 읽으면 마칠 수 있다. 문제는 아직 번역을 다 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거 참. 벌써 눈이 침침하다. 책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일곱 편의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작품인데 왜 이제야 번역본이 처음 나오게 되었을까? 유신시대나 5공화국 시대엔 저밀도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반대하지 않는 작품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으나 5공화국 무너진 것이 언제적 이야기냐고. 그러나 지난 일은 뒤돌아보지 말자.


  미리 열두 편을 읽고 1번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등장인물을 이미 어디선가 한 번은 주워들었거나,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들이 이후에 어떤 일을 할 지 알고 있는 상태로 루공-마카르 총서의 첫 발을 떼는 1번을 읽으면 즉각적으로 등장인물을 이해하게 되니까 1번 작품을 원래보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반면에 만일 총서를 순서대로 읽으면 20편의 주인공들을 생산하는 첫번째 여성 아델라이드 푸크와 푸크의 아들 피에르 루공, 아들 앙투안 마카르, 딸 위르실 마카르와 숱한 손자, 손녀들, 과 증손, 고손 관계의 기억은 아마도 이미 휘발된 상태일 것이다. 그래도 총서를 순서대로 읽는 건 큰 매력이 되겠지. 다만 우리 경우엔 특히 앞 번호에서 빠진,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은 작품이 많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OECD 국가 가운데 전편 번역이 나오지 않은 나라도 별로 없을 걸? 우리는 이렇게 드문 나라에 살고 있다. 어때? 프라이드 팍팍 생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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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3-18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루공 마카르 총서 20편 중 한국에 번역된 13편을 다 읽은 독자, 폴스타프!
음, 대단하군
근데 조금 무서워 지는군
사람이 아닌 책 먹는 괴물인가 싶어지네˝
👍👍🤑🤑🤩🤩

루공가의 행운은 1권이라는 것과 아델라이드의 성격을 알 수 있어 좋았는데 재미가 없어서 아직 완독 못하고 있어요^^

Falstaff 2025-03-18 16:17   좋아요 1 | URL
에구, 답글이 늦었습니다. 낮술이 과했습니다.
아휴, 저 괴물 아닙니다. 걍 취미가 잘난 척하는 것인 703호 아저씨. ㅎㅎㅎㅎ
후속 작품을 읽어서 그런지 저 같은 경우는 아델라이드 아줌마 후손들이 어디서 다시 나오는 지 그것 만 가지고도 재미있었습니다. 드릴 말씀은 무지 많은데 에쿠, 이쯤에서...
 
포화 - 1916년 공쿠르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5
앙리 바르뷔스 지음, 김웅권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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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바르뷔스의 책이 번역해 나왔다고? 6년 전 이이의 <지옥>을 흥미롭게 읽었으나 <지옥> 말고 다른 작품이 아직 소개되지 않아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위스망스도, 폰 카이절링도, 스트린베리도 읽기 전이라 기묘하게 세기말적이고 유미주의적이기도 한 바르뷔스의 작품이 깊게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휴대폰에 <포화> 발간 알림을 보았을 때는 <포화>가 <지옥>과는 아주 상반된 성향의 작품이란 것을 몰랐다. 전혀 몰랐다. 새롭게 <지옥> 독후감을 읽어보니 역자 오현우가 “바르뷔스는 에밀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풍의 작품 세계로 프랑스 문학사에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라고 쓴 것은 인용했었다. 당시에 <지옥>은 에밀 졸라 류의 사실주의/자연주의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있는데 왜 난데없이 졸라를 가져와 비교를 했을까, 궁금했나 보다. 그런데 <포화>를 읽어보니 가히 졸라와 비교한 것이 이유가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대표적 졸라 시리즈인 루공-마카르 총서의 첫번째 작품 <루공가의 행운>이어서 두말할 것 없이 비교할 수 있는 바, 앙리 바르뷔스가 <포화>의 20장에서 묘사한 1차 세계대전의 돌격 장면은, 말 그대로 무조건 적인, 인간이 아니라 짐승 수준이라서 졸라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인간짐승’의 단계로 내려선 미친 인간 군상이 눈이 뒤집혀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생생한 장면을 그렸다. 이 정도면 졸라를 계승했다고 해도 언짢지 않을 수준이라 인정할 수밖에. 졸라도 작품당 최소 한 장면은 인간에 의한 무지막지한 질주의 장면을 묘사한 것과 같이.


  신학 학위를 가진 개신교도이자 저널리스트, 연극 컬럼니스트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파리 인근 아니에르-쉬르-센에서 태어난 앙리 바르뷔스는, 어릴 때부터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청소년기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극도의 진보, 극좌 편향을 지닌 시인, 소설가로 활동했다. 서른다섯 살 때인 1908년에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옆방에 들어온 하녀, 레즈비언 커플, 사촌 커플, 성인 남녀 커플의 관계를 훔쳐보는 세기말적이고 유미적인 <지옥>을 읽어보면, 이이가 1918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흥분한 유럽의 좌 성향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소비에트로 몰려갈 때 이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여성과 결혼하고 볼셰비키에 입당한 것이 언뜻 이해가지 않을 수 있다. 유미주의야말로 볼셰비키라면 당장 두드러기를 유발시킨 알레르기 인자가 아닌가 말이지. 그러나 하여간 그랬다. 그 당시 소련으로 간 유럽 청년들의 상당수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한 반면 바르뷔스는 이후 소련과 프랑스를 왔다갔다 하며 지낸 것으로 보이는데(책의 연표에도, 위키피디아 영어판, 프랑스어판에도 나오지 않는다. 프랑스어 판은 구글 번역한 우리글로 읽었다.), 1923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최초의 문학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공산주의, 공산주의면 무조건 몽땅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탈을 쓴 (볼셰비키를 비롯한 권력 독점) 독재형 빨갱이 치하에서 문학 등 예술에 복무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예술활동을 하는 것은 사실 가당치 않은 일이라 교조적인 뻔한 글(<러시아>, <스탈린 전기> 등)을 생산하다가 1935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7차 인터내셔널, 이때는 코민테른이라 불렸겠지만, 하여간 이때 폐렴에 걸려 숟가락 놨으니 향년 61세.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8월에 시작해서 1918년 빼빼로데이 11월 11일에 끝난다. 앙리 바르뷔스는 아빠한테 진보 좌파적 교육을 골수로 받아, 당시 사회주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바르뷔스 역시 전쟁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그룹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놀랍게도 정말로 전쟁이 벌어지자 무려 마흔한 살의 나이로 자원 입대, 그것도 사병으로 입대해 2년 동안 최전방을 누빈 역전의 노병이었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기념비적인 대하소설 <티보가의 사람들>을 보면 진보 청년들의 1차대전 개전 직전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는데 주인공 자크 티보처럼 적극적 반전 입장에 있던 사회주의적 청년 말고 파리에 몰려 있던 나이롱 사회주의자들은 바르뷔스처럼 진짜 전쟁이 터지니까 제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 서둘러 자원 입대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티보가의 사람들>, 이거 명작이다. 꼴랑 1부 “회색 노트”만 줄창 읽지 말고 전권을 통독하시기를 강력 추천한다.

  하여간 최전선에 투입된 바르뷔스는 나이 탓도 있겠지만 자주 부상과 후송을 반복했던 모양이다. 책에서도 나오는 조치 가운데 하나로 나이 들어 무릎 쑤시는 꼰대 병사들한테 조금 수월한 임무를 주게 하는 조치가 떨어져 1916년까지 일선에서 대치하다가 1917년 6월에 제대했다. 그런데 이 작품 <포화>를 발표한 것이 1916년. 아직 제대하기 전의 일이다. 독자는 이제부터 독자의 권리로 추리를 시작한다. 아직 제대를 하지 않고 일선 부대 소속이면서 본문만 48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다른 곳을 모르겠고 눈과 손목과 손가락은 부상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야전병원의 침상 위에 있을 것. 바르뷔스는 전쟁 중에도 수첩과 연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전투 장면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걸 적절하게 짜깁기해 소설형식으로 1916년에 신문에 발표하고, 발표가 끝난 후에 한 권의 단행본으로 찍었는데 그게 1916년 공쿠르 상을 받았다.


  그래서 <포화>는 마치 르포르타주와 소설의 경계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실제 전쟁은 우리의 <고지전>이나 헐리우드 판 <1917>처럼 늘 전투가 벌어지는 건 아니고, 오랜 대기와 고생스러운 행군, 그리고 며칠 동안, 길어봤자 1박2일이나 2박3일동안, 물론 잠은 한숨도 안 자거나 못 자면서, 진짜로 생과 사를 가르고, 당장 총알이 내 심장을 꿰뚫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세로로 두 쪽이 날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향해 처음엔 밀려서 뛰어나가다가 나중에 눈이 휙 돌아가는 바람에 거의 반쯤 미친 상태로 발악하는 심정이 아니면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악을 쓰며 뛰다가, 반 이상은 다행스럽게도 순식간에 죽어버리거나 신체의 상당한 부분이 절단당했음에도 아직 죽으려면 두어 시간은 남은 상태가 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저 달려가는 행위를 일컫는다. 살아남는 것은 용감해서도 아니고, 비겁해서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 포탄의 파편이나 기관총, 소총이 자기 몸을 관통하지 않고 그냥 비껴 지나간 덕택일 뿐이다. 병사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비단 같은 사람일 뿐으로, 내가 전장에 나온 이유와 정확하게 같은 이유로 우연히 저편에서 나를 표적으로 하고 있는 적군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도 적이 될 수 있으니, 이 자연이라는 적은, 나와 적군 모두에게 공통된 적이며, 정말로 피할 수도 없고, 그나마 조금의 인정도 없는 신적인 적이라서 가공할 폭력을 동반하여 이 모든 쇠조각의 폭포와 자연의 폭력을 다만 운이 좋아 명을 보전한 대가로 며칠 간의 휴가가 주어기도 하건만, 그 휴가라는 것이, 전쟁과 전투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후방에 계신 신사 숙녀들이 낭만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처럼 허망함이라니. 심지어 어렵게 휴가 받아 찾아 가 고향집 창문을 통해 바라본 조금 여위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의 옆 자리에 앉은 내가 아닌 병사, 나 말고 다른 수컷을 훔쳐보는 심정. 다 그런 거지. 다 그런 거야. 그런 걸 직접 목격하지 못하는 행운을 기대할 수밖에.

  한 노병은 수색 임무 중에 머지않은 곳에서 포탄이 터져 당분간이지만 귀가 들리지 않고, 두 귀 다 거의 절단된 상태에서, 완전히 잘라지지 않아 너덜너덜하게 간신히 매달려 있다. 이게 웬 장땡이야! 이제 자기는 틀림없이 후송될 것이고, 야전병원을 거쳐 후방으로 보내져 수술을 받은 다음에, 조금 나이가 들긴 했겠지만 아직 어여쁜 티가 가시지 않은 간호사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적어도 석 달 동안 입원을 해야 할 것이고, 퇴원을 해도 위로 휴가가 적어도 세 주일 또는 한 달 이상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노병한테는 전쟁이 끝난 거 같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번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죽는 건 더더욱 아니며,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 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할지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제발 경미한 장애만 가질 정도의 부상만 입게 해주소서. 저도 병사로 낯짝이 있지, 아주 경미해서 얼핏 보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경미한 장애는 기대도 하지 않겠으니 그저 의병제대와 아주 적은 금액의 상이연금을 받게만 해준다면 메피스토펠레와의 계약서에 피를 묻혀 서명이라도 하겠나이다.

  전쟁 장면을 나열해서 썼지만 <포화>는 기본적으로 반전 소설이다. 앞부분은 늘 읽었던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이 르포 형식으로 나열되는 느낌이어서 지루했다가,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하나 싶었다가 하는, 하여간 그런 상태였는데, 중간 부분부터 진짜 전투 예비단계로 접어들면서 관심이 집중되며, 앞에서 이야기한 20장 “포화” 작품 가운데 가장 긴 분량의 챕터의 자연주의적 세밀화가 등장할 때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전쟁소설보다 리얼한, 심지어 졸라의 <패주>나 적을 만나 사격을 하는 도중에도 바지에 똥만 싸 갈기는 노먼 메일러의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보다 훨씬 리얼한 전쟁의 비참함을 그대로 노출시킨 장면은, 혀 끝까지 포르노라고 하고 싶었다가 꿀꺽 다시 삼켰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건 작가가 직접 전쟁, 전투를 경험하고 본 것과 일부 들은 것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추악하지 않은 전쟁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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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열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293
엘리자베스 보웬 지음, 정연희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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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보웬. 태어나자마자 백년을 산 1899년생. 여섯 달만 뒤에 나왔어도 ‘노베첸타Novecenta’가 될 뻔했다. 앵글로-아일랜드인. 즉 저 윗대 조상이 16세기 후반에 웨일스에서 솔가해 아일랜드에 와 정착한 상류계급 집안이다. 외가는 한 술 더 떠서, 엄마 플로렌스 이사벨라 포메로이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아일랜드의 자작 집안이었단다. 집안 내력만 소개해도 A4 용지 한 장은 넘겠지만, 재미도 없는 소설의 독후감을 쓰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하여간 엘리자베스가 여덟 살 때 법정변호사인 아빠 헨리 찰스 콜 보웬이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자, 엄마가 외동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켄트 지역에서 살았지만 엄마마저 1912년, 엘리자베스가 열세 살 때 세상 하직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이모 집에 살면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재미있는 건 지금부터. 엘리자베스 도로시아 콜 보웬은 스물네 살 되던 1923년에 교육행정가 앨런 카메론을 만나 결혼했다는 거. 엘리자베스는 훗날 자신의 결혼생활에 완전히 만족했다고 기술했으니 어떻든 행복한 부부였을 것이다. 근데 이 부부는 한 번도 서로의 성적 교감을 나눈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완전한 섹스리스 부부였던 것. 피가 펄펄 끓는 20대 팔팔한 여성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그랬는지 이후 적지 않은 남성들과 혼외정사를 즐겼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으며, 짓궂기도 하지, 상대방의 이름도 실명으로 써 놓았는 바, 무려 30년간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일곱 살 연하의 캐나다 외교관 찰스 리치, 아일랜드 (단편)소설가 숀 오팔론, 미국 시인 매이 새턴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부는 1952년에 보살 남편 카메론에 해당하는 얘기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머리가 파뿌리는 아닐지언정 회색이 될 때까지 “완전히 만족한” 부부로 살았다고 주장했다.

  1930년에 아버지는 그때까지 아일랜드에서 살다가 죽으면서 보웬 저택(Bowen’s Court)를 딸에게 상속해주어 엘리자베스는 살기는 영국에서 살면서도 이후 휴가 때는 종종 아일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보웬은 이곳에서 영국과 미국의 여성 작가들을 종종 초대하기도 했는데 인물이 다 빵빵하다. 버지니아 울프, 유도라 웰티, 카슨 매컬러스, 아이리스 머독. 우와, 눈 나오지? 원래부터 은수저 물고 나온 여사님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보웬스 코트, 보웬 저택이라고 하는 것이 세칭 Country House라고 하는 것으로, 저택도 저택 나름이지 워낙 규모가 커서 이걸 유지하는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보웬은 영국과 미국을 망라해 강의를 하는 등 죽을 똥을 쌌던 모양이다.

  이이의 중요한 경력 가운데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에서 일했다는 거.

  재미도 없다면서 왜 엘리자베스 보웬의 사생활을 자세하게 소개했느냐 하면 작품 속에서 주인공 스텔라의 아들 로더릭이 로더릭의 아버지이자 스텔라의 전남편인 톰의 사촌한테, 로더릭은 이런 당숙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일랜드의 저택 Country House를 상속받는 일이 생기고, 작품 속에서 현재 스텔라의 직업이 영국 정보부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 일을 하고 있다는 점, 저택을 상속해준 사촌의 아내가 정신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점, 조연 급인 루이는 남편이 전쟁통에 징집되어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여러 남자를 만나다가 덜커덕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게 임신을 하면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다는 점 등등 작가의 바이오와 적지 않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미없는 작품이나마 이런 점을 미리 알아두면 그래도 조금은 재미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심사숙고했기 때문이니, 이 아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정성일쏘냐.


  첫 장면은 1942년 9월의 첫 일요일 오후 런던 리젠트파크 야외 공연장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연주자들이 모여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공연을 한다. 여기에 스물일곱 정도에 헝클어진 머리칼에 퉁방울은 아니지만 큰 눈을 하고 인조 낙타털 코트를 입은 소련 당원 스타일의 여성 루이가 앉아 있다. 조금 후 한 자리 건너, 둘 사이의 자리는 공석인 채로, 38세에서 39세로 보이는 갈색 중절모에 회색 정장을 입은 찡그린 얼굴의 사내 해리슨이 앉아 있다. 남편이 인도로 파병되어 독일해군의 유보트가 두려워 왕래 및 편지가 금지되어 감감무소식인 젊은 여성 루이는 비록 좌우의 크기가 다른 짝눈이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포스가 풍기는 남자한테 끌리는 기분이 들어 접근한다. 그러나 결론은 뺀찌. 해리슨이 여덟 시에 데이트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루이를 물리치고 간 곳이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는 주인공 스텔라의 아파트이다.

  스텔라는 일찍 결혼해 일찍 파국을 맞았다. 근데 이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죽는 바람에 괜히 호적초본에 이혼 경력만 한 줄 보탠 꼴이 됐다. 이 부부의 이혼 내력은, 내가 읽기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작품 내내 스텔라와 스무살 아들 로더릭, 그리고 로드니 가문의 화제거리가 되는 바람에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겠다. 지금 스텔라는 젊은 여성이 평생 독수공방할 수 없는 일이라 짬을 내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했던 바, 현재는 로버트 켈웨이라고 하는 남자와 뜨거운 시절이다.

  로버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벨기에 근방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됭케르크 전투에 참전해 용맹무지하게 임하다가, 이 전투 상황이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대강 아시겠지만, 영국군의 패배로 끝나면서, 뒤로 돌아 돌격할 당시 배에 오르는 동안 부상을 당해 사실상 의병 제대한 신분이다. 됭케르크는 영불해협 근처라서 프랑스 내륙으로 퇴각하는 것보다 배 타고 영국으로 튀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하여간 이때 부상을 당해 수개월간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고, 후유증으로 알게 모르게 다리를 절게 된다. 전시에 그냥 놀고먹을 수 없어 취직을 했고, 눈치상 영국 정부 또는 군에 소속되어 있는 정보기관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끝까지 어떤 기관인지, 정말 그런 기관에서 일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내용을 다 알고 스텔라를 찾아온 진짜 영국 핵심 정보부 요원이 바로 짝눈이지만 어딘가 매력을 뿜어내는 사나이 해리슨이었다. 근데 알고보니까 해리슨이 은근히 스텔라를 좋아한 거 아니냐는 말이지. 해리슨은 사실 가명이다. 책이 거의 끝나갈쯤 해서 본명이 드러나지만 본명이 뭔지 말하고 싶지 않다. 이 해리슨이 은근히 스텔라를 좋아하고 있는 눈치. 아일랜드 로드니 가문에 일차 왕림한 바 있고, 스텔라의 아들인 로더릭의 당숙과 친교를 맺어 저택에 놀러가, 이때 당숙이 죽은 다음에 저택을 로더릭한테 유증하라고 꼬드긴 사람이 해리슨 아닐까 싶게 만들기도 한다. 하여간 이런 해리슨이, 스텔라는 전에 이 당숙 초상 치룰 때 딱 한 번 본 적밖에 없을 뿐인데도, 그냥 찾아갔다. 스텔라는 로버트가 왕래하기 좋게 하기 위하여 현관문도 슬쩍 열어놓고, 방문도 잠그지 않았는데 이렇게 신작로 닦아 놓으니까 나병 환자가 먼저 들어선 꼴이 됐다.

  이렇게 마주 앉게 된 스텔라와 해리슨. 이제 폭탄이 떨어진다.

  해리슨이 하는 말이, 당신도 조국의 정보국을 위하여 일하지 않느냐. 로버트도 정보 일을 하고 있고. 이제 문제는 로버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적국의 이익을 위하여 제공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가 갖고 있다. 아직 내 선에서 이 일을 덮을 수 있지만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스텔라,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덜 피해가 갈 방법은 가능한 빨리 로버트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이다. 한 달 줄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렇게 “요약”을 해 놓으면 흥미진진하겠지?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엘리자베스 보웬이 말이 너무 많다. 본문이 543쪽에서 끝나는데 독자가 기다리는 정보, 첩보물의 드라마틱한 전개와 반전은 눈알을 뒤집어 까고 찾아도 전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스텔라의 로버트에 대한 감정선이 어떻게 변하는지, 로버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스텔라의 비밀을 지키면서 로버트의 집안을 방문하고, 아들 로더릭의 상속 재산을 돌아보기 위하여 아일랜드 저택에도 가보고, 이왕 나왔으니까 그것도 초장에 나왔으니까 스물일곱 정도의 생과부 루이와 스텔라 그리고 해리슨도 한 번은 더 만나게 해야겠고, 이렇게 스토리는 산만하게, 산처럼 크다는 뜻의 ‘산만하게’가 아니라, 난삽하게 벌어지고, 독자는 가뜩이나 543페이지로 많은 분량에다 페이지마다 꽉 들어찬 많고 많은 활자에 여차하면 질식해버리고 만다.

  책을 낸 출판사와 애써서 번역을 한 역자에게 미안한 말씀이지만, 정말 읽기 쉽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문장이 눈에 와 박히지도 않았으니, 당신한테 추천도 못하겠지만, 작가의 명성이 떠르르해 아일랜드 문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몇 년도인가 노벨문학상 강력 후보였으며, 부커상 심사위원이었던 작가임을 유념하시어, 보잘것없는 아마추어가 쓴 독후감에 현혹되지 마시고 읽어 보실 분은 읽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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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3-14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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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여관 범우희곡선 27
이강백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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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에 국립극단, 오태석 연출로 댤오름극장에서 초연한 작품. 밀레니엄 또는 Y2K로 뭔지 모르게 좀 싱숭생숭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작품 구상을 해 쓰기 시작했지만 몇 년 동안 손을 놓고 살았단다. 드디어 21세기가 도래했으나 자신이 애초에 쓰려고 했던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지금 보면 가장 큰 건 아니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지만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인 “세대 갈등”에 대해 더는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던지 <황색여관>을 썼다. 극작가가 보통 극작가가 아니라서, 우리나라 연극계의 지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라 집필을 마치자마자 그해 당장 무대에 올렸다. 2025년. 현재 우리나라를 보면 이까짓 세대 갈등은 기원 몇 세기 전부터 유구하게,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전통이니 그렇다 치고, 빌어먹을 위정자들이 정치 목적상 국민을 이쪽 저쪽, 쉽게 말해 선한 우리와 악한 너네로 짝, 모세가 염불을 해 홍해 바다를 갈라놓듯 짝, 갈라놓은 것이 훨씬, 훨씬, 그리고 훨씬 더 심각하지 않을까 싶다. 보수 1찍과 수구 2찍의 대결을 설명 목적상 진보와 보수라고도 칭하는 거 같은데, 이거야말로 웃겼다. 웃겨도 보통 웃긴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진보가 있댜? 내 눈엔 이짝은 보수, 저짝은 수구. (앗, 이 독후감 쓰고 사흘 지나 이짝 당 당수가 말한다. “우리 당은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라 중도 보수당”이었다고. 이 자들도 자기들의 정체가 보수인 건 알고 있었군. 흠.) 이것들이 애꿎은 시민들을 선동, 현혹해 심각한 수준으로 갈라놓았다. 세대 갈등보다 이짝, 저짝 갈등이 훨씬 심각하지만, 이강백이 이 희곡을 쓴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이짝, 저짝 갈등이 그리 우려스럽지는 않았던 듯하다. 내가 그때를 돌아봐도 그렇다. 그러나 당시에도 두 짝의 싸움은 사회 밑바닥에 이미 파종되어 있던 것이었으며 그때 벌써 싹을 틔워 적어도 묘목 수준까지 컸었는데 눈이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여간 이강백은 자기 주특기, 현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빗대어 우화화寓話化하는 것. 하기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실제/자연을 모방하여 무대 위에서 그것을 다른 형태로 우화, 은유, 변용시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강백은 유신시대 때부터 독특하고, 과하게 격하지 않고, (유신, 5공 같은 독재자 치하에서 특히 빠지기 쉬운 골짜기인)초현실성/추상성 없이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선다. 이 작품 <황색여관>도 마찬가지다.


  사방 80킬로미터, 그러니까 사방 2백리,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재면 합해서 4백리에 아무것도 없이,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딱 하나 서 있는 건물이 황색여관이다. 벌판도 그냥 벌판이 아니라 사시사철 진한 황사바람이 몰아쳐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과 목에 모래가 끼고, 눈은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따끔거리는 황무지.

  이곳에 딱 하나 서 있어서 지붕 위에 “황색여관”이라고 네온사인 간판이 밤마다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에 나오는 적막한 성 가브리엘 고원은 에덴 동산일 정도이다. 여관은, 21세기 모텔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 생각하기 어려울 터인데, 시멘트를 바른 앞마당을 둘러싸고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방엔 화장실도 샤워실도 없다. 저 대문 옆의 공동 화장실과 찬물만 나오는 공동 샤워실에서 볼 일을 봐야 하고, 간단한 세수 정도는 마당에 놓은 수도꼭지에서 해결해야 한다. 나 대학 다닐 때도 이런 여관이 학교 근방에 있어서 술이 과해 꽐라가 된 아이들이 만날 요와 이불 위에 먹은 걸 퍼질러 토해놓고는 했으며, 아줌마 교양영화 좀 틀어주세요, 지붕이 날아가라 소리를 지르면 3분 뒤에 여관의 중앙관리실에서 송출하는 포르노라고도 부르고 쌕쌕이라고도 불렀던 교양영화가 브라운관 18인치 TV를 통해 흘러나왔으며, 또다시 3분쯤이 더 지나면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주와 막걸리를 시멘트 봉지 가득히 사들고 온 사회학과 다니는 애새끼가 자기 오기도 전에 쌕쌕이 시작했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던 기억 또는 추억. 말이 기억이고 추억이지 당시엔 환장이었던 기억 또는 추억.

  희곡을 읽어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만, 황색여관의 주인이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서 여관은 날이면 날마다 손님이 찼는데, 이들은 숙박료 말고 주인한테 가욋돈을 듬뿍 안겨주는 놀라운 일들을 날이면 날마다, 아니지, 이 여관에는 낮손님이 없으니까, 밤이면 밤마다 이런 일이 생겨, 돈을 함빡 벌었다. 사업이 잘 되면 당연히 투자를 해야 하는 법. 주인은 이 여관 지붕을 뜯어 2층을 올려, 1층에 비하면 뻑적지근한 큰 방, 개별 화장실과 샤워실을 비치한 비싼 방을 들인 후 새로이 지붕을 올려 그곳에 “황색여관” 네온사인을 달았던 거다. 화장실, 샤워실이 있는 넓은 방이니 당연히 숙박료가 1층에 비해 무지막지 했지만, 그래도 손님은 늘 있었다.


  앞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이강백은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세대갈등이라 보았다고 했다. 여관에서 세대갈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1층과 2층이다. 2층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공직 은퇴자(전직 장관), 변호사, 사업가로 사회의 대표적인 나이 많은 부르주아로 생각하면 여지없다. 반면에 1층은 배선공, 배관공, 외판원 등 젊은 무산자계급. 유일하게 있는 집 아들이자 대학생이 1층에 숙박한다. 이 대학생은 계급은 (쁘띠)부르주아의 자제이지만 자기 쓸 돈이 언제나 많지는 않은 “젊은” 계층이다. 2007년이면 지금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후기자본주의. 사실 이 작품에 갈등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자본, 나이가 많고 적고가 아니라, 돈이 있고 없고에 달렸다. 얼핏 보면 부유한 장년/노년과 가난한 청년으로 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면 가난한 노년이 또한 얼마나 많은 지.

  손님이 여관에 들어와 방을 선택할 때부터 계급은 정해진다. 그걸 (학생을 제외한) 무산자 청년들은 차별로 인식한다. 방을 선택하는 일은 돈이 있고 없고 간에 확연히, 그리고 제일 앞서 일어나며, 이 정도는 비행기의 1st 클래스석과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처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나눔으로 인식하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못 말리게 기분 나쁘게 하는 게 ‘먹는 거’다. 손님이 들고, 시간이 조금 지나, 사방 2백리에 아무 시설도 없어서 이 여관에서 주는 밥만 먹어야 하건만, A코스와 B코스의 요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A코스는 각종 기본반찬에 소갈비 찜, 닭고기 볶음, 바닷게와 새우를 섞어 끓인 해물 찌게, 송이버섯 구이가 나오고, B코스는 김치와 간장만 담은 비빔밥이다. 당연히 2층 손님은 자연스럽게 전부 A코스를 선택하고 1층 손님들은 울화를 쏟아내며 B코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이제 여독을 풀기 위해 술 한 잔. 여관에서는 소주, 맥주, 막걸리, 이런 술 따위는 팔지 않는다. 유일하게 위스키. 12년, 17년, 21년 묵은 위스키만 판다. 2층 손님 가운데 사업가는 활수하게 21년 묵은 위스키를 사서 2층 손님들하고 맛나게 홀짝거린다. 1층 손님은 12년 묵은 것도 언감생심, 침만 꿀꺽 삼키기만 할 뿐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이고, 위스키? 5년짜리면 어떻고 8년짜리면 어떠냐. 그냥 술이면 되는 것이지 숙성 햇수가 무슨. 졸리와 피트 부부가 주연한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서 이 부자 부부가 한바탕 쌈박질을 한 다음에 마시는 술도 조니 워커 레드, 10년 미만 숙성시킨, 숙성기간 미표시 위스키인데 우짜 고급 위스키만 그리 좋아들 하는지. 하여간 1층 무산자들이 심통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본격적으로 객고를 풀기 위하여 몸 파는 여자 셋을 데려온다. 늙은 여자, 젊은 여자, 그리고 어린 여자. 이들의 면접을 위하여 다시 식당으로 내려온 윗층 손님들은 아랫층 손님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돈을 주고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 이렇게 둘을 데리고 올라가 3대 2로 쇼를 벌인다. 1층 손님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화딱지가 나서 늙은 여자를 자신과 계급이 다르지만 같은 청년 계층인 학생에게 넘겨주고, 꼭지가 먼저 돈 배선공과 배관공이 먼저 2층에 올라가 사업가를 때려 죽여버린다. 이렇게 살육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늙은 인간들이라 해도 여태 살아온 전력이 있지, 이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1층 젊은이들을 차례차례 죽여버려, 몸 파는 여자들이 혼비백산 도망간 여관에서 살아남은 손님은 하나도 없다. 다 죽었다. 싹 죽어버렸다.

  쇼는 끝났다. 왕서방이 등장해 돈을 버는 시간만 남았다. <황색여관>에서 왕서방은 여관 주인 부부. 이들이 그동안 떼돈을 번 건, 숙박비가 아니라 노인/중년과 청년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은 다음에 이들의 가방과 주머니를 털어 거저 얻은 돈 때문이었다. 이 드런 꼴을 보다 못한 주인의 처제와 주방장은 밤이면 밤마다 쏟아져 나오는 시체들을 더는 견디지 못하여 여관을 나가겠다고 하고, 이들 없이 여관의 운영이 쉽지 않은 주인 부부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설득하다가, 급기야 처제와 주방장이 손님 가운데 한 명만 살릴 수 있다면 이 여관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처제는 과연 이 세대간의 살육전을 멈출 수 있을까? 하다못해 세대갈등의 와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지? 아니라고? 읽어보면 안다.

  아무쪼록 세대갈등이 아니라 202X년의 우리나라에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소위 진영갈등, 모세가 갈라놓은 홍해바다의 좁은 길을 따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얼른, 서둘러 통과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향한 즉시 그랬듯이, 다시 바다는 바다끼리, 바다 속 물고기는 물고기끼리, 바다 포유류는 바다 포유류끼리 얼른얼른, 유사이래 단 한 번도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미워하지 말고, 미워해도 지금처럼 극단적인 미움 말고, 그래도 좀 덜 미워해 가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그런 세상을 202X년에는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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