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레슬리 마몬 실코 지음, 강자모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레슬리 마몬 실코, 비록 완전한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의 피가 조금, 사실 그리 적지는 않게 흐르지만, 어려서부터 뉴멕시코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온 작가로 데뷔작 <의식Ceremony>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외와 몰락의 과정을 소설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 아가씨가 백인의 꾐에 넘어가 아이를 낳으니 이 혼혈 아이는 혈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태생부터 종족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알고 있는 어린 엄마는 1920년대, 인디언이라면 오히려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시기에 아이와 함께 살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파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기설기 바람막이만 세워둔 움집에서 누더기에 갓 낳은 아이를 둘둘 말아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와서는 혼혈 아이, 책의 주인공인 타요를 데리고 뉴멕시코 고향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양육을 부탁하고 떠난다. 엄마의 언니, 타요의 이모는, 이모의 건강하고 운동 잘하고 백인 식 학교공부도 빼어난 자랑스런 아들 록키와 함께 타요를 키우며 록키 대신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소와 양을 키우는 목축 일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는다. 록키는 백인의 성공 공식과 같은 코스의 가도를 걷도록 배려하고. 근데 뜻대로 되면 그게 세상살이야?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록키와 타요, 그리고 동네의 젊은이란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입대해버린다. 록키는 모병관에게 동생 타요와 같은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입대하겠다고 타협을 해 그렇게 되는데, 그게 타요로 하여금 최악의 조건이 될 줄은 미처 몰랐겠지. 둘은 필리핀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해병으로 배속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버리고 만다. 그것도 록키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백 퍼센트 가까운 습도와 송곳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록키가 누워있는 모포의 양끝을 포로병들이 들고 행군하는 밀림. 일본군의 개머리판이 관자놀이에 와 부딪는 것보다 비와 더위가 더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행군 속에 문득 타요는 일본인의 얼굴 속에서 사랑하는 외삼촌 조사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고통 속에서 기어이 록키는 절명해버리고.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타요를 비롯한 인디언 참전용사들. 인디언 부족 간엔 백인들의 전쟁에 나가 싸우고 온 것이 별로 자랑할 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전쟁 중엔 캘리포니아에서 참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고, 백인들이 드나드는 바에서 마음껏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고는 극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어려서부터 타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모가 술에 잔뜩 취해 역시 만취한 타요의 엄마와 백인과의 관계를 모욕하자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타요는 깨진 맥주병으로 에모의 배를 쑤시고 LA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백색의 사각형 안에서 서서히 황폐화되는 타요의 정신세계. 필리핀의 한 섬에서 그토록 내린 비를 저주했기 때문에 고향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에도 6년째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자책까지. 그리고 왜 조사이어 외삼촌은 다시 보이지 않을까. 수시로 불쑥 나타나는 일본군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록키, 빗속에서 환영처럼 보이던 조사이어는 내리는 비처럼 술을 마셔야 다시 모습을 드러낼 뿐. 타요의 정신은 완전하게 황폐화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다시 고향, 길쭉한 메사가 있는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이게 책의 거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1부.
 그저 그런 얘기 같지? 그러나 만일 내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작가가 직접 쓴 그대로의 작품을 읽고 싶은 책. 우리가 간혹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했던 말, 그들의 사상 같은 것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들의 자연과 동물과 한 포기 풀, 한 그루의 나무, 돌멩이, 돌멩이 위를 흐르는 냇물, 냇물소리 돌물돌 물돌물*, 이 모든 자연 정령과 인간의 합일된 모습에 감탄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책의 작가 마몬 실코의 글도 이 비슷한 정조情調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위 문단의 끝 부분에 ‘메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로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을 하나 보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2부에서 (일종의)주술사 베토니 노인에게 성공적인 치유 의식을 받은 타요가 3부에선 외삼촌이 남긴 소들을 다시 찾아와 메사의 솟은 언덕 사이에 뚫린 굴에 기거하며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4부는 결론이니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저 넓은 거친 황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소는 백인들이 외국에서 품종 개량해 들여와 키우는 살집 좋고 다리 짧은 종이 아니라 사슴처럼 가는 다리에 구운 선인장과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가며 생존할 수 있는 토종 소이듯이, 지금 완전하게 약탈당한 아메리카의 모든 비옥하고 깨끗한 물이 넘쳐흐르는 토지는 전적으로 원주민의 것이라는 건 슬프게도 사실이다. 희망이나 비전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오직 허가된 것이라고는 술과 매춘과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끝없는 폭력. 보호지역 안에선 국가가 보호를 해줄 테니 안에서 서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는 FBI(로 대표하는 미국 정부). 그러나 백인들은 오직 한 군데, 도무지 생명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황무지만을 아메리카의 원래주인인 원주민에게 불하했으며, 모든 자연과 동식물의 생명과 인간성을 약탈당한 원주민들은 알콜과 약물과, 그걸로 다스릴 수 없는 절망과 빈곤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작가는 비록 참전 인디언들을 모델로 하긴 했으나 현재까지 유효하며, 모든 인디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소외와 절망과 몰락의 상태에 대한 치유의 의식ceremony이라고, 참으로 아름다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의성어/의태어 "돌물돌 물돌물"은 서정춘의 시에서 가져왔음. 어떤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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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쌀알
민퐁 호 지음, 최재경 옮김 / 달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1951년 당시 버마 출신의 중국인 민퐁 호. 자라면서 태국과 싱가포르 생활을 했고, 이 책의 무대가 되는 1974년 언저리엔 태국의 특정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대 태국 농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농촌운동에 투신한 적이 있다고, 지라난 쁘라셋쿨이 책의 서문을 통해 밝힌다. 작가가 화교 출신의 동남아시아 인이라는 얘기고, 그러면 보편적으로 국부의 90% 가량을 가진 부르주아 가정의 자제였다는 거다. 실제로 서문을 쓴 쁘라셋쿨과 호가 처음 만난 곳이 1973년~76년 사이에 대학생에 의하여 진행된 농촌활동이었으며, 두 번째 만나서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이, 쁘라셋쿨이 1976년 10월 군부 쿠데타 이어 공산당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염증을 느껴 전향을 한 다음, 세상살이 다 잊고 미국의 코넬 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였으니, 솔직히 말해서 책의 저자 민퐁 호나 서문을 쓴 쁘라셋쿨이나 부잣집 따님으로 완전 폭망해도 살아남기만 하면 남은 인생을 여유작작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유복한 가정’이 등 뒤에 있었던 종족들이다. 이렇게 구름 위의 신전 출신의 인간들이 젊은 한 시절에 농촌활동으로 농촌의 소작인들을 의식화 시킨 것까지는 바람직했지만, 아차,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노동을 해서 소작료를 제하고 얻는 나머지 말고는 어디 의지가지가 없던 상태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암만해도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실제로 서문에서 고백하다시피 태국의 1973년 민주화 성공, 각 계층의 민주화 입법 및 빈민운동, 76년의 반동 쿠데타, 공산당 입당 및 저항운동, 전향, 여기까지는 청년 지식인들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으나, 공산당 탈당 및 전향에 이어 이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대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미국 유학을 통한 실력배양을 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농촌과 지식인들의 간극을 더 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이런 운동소설의 맹점은, 작년에 독후감을 쓴 <건너간다>의 이인휘, 박노해, 백무산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지식인, 아니 먹물들에 의하여 씌어 진다는 점(물론 이인휘, 백무산, 박노해 같은 작가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현장에서 스스로 의식화한 진정한 지식인 그룹이다). 따라서 젊은 지식인이건 이젠 나이 좀 먹어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식인이건 하여간 먹물들의 시각으로 굴절된 작품일 수밖에 없어서,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결국 인텔리겐치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이해 또는 협력의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마감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안타까운 사실. <아버지의 쌀알> 역시 마찬가지다. 소득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소작인이 갖는 구조. 이것이 무슨 계약이 아니라 그냥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몇 백 년이라는데, 땅을 빌려주고 빌려준 대가로 소작료를 받는 일 자체를 두고 그게 착취니 수탈이니 할 수는 없다.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고 과다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하는 체계가 아쉬운 것이지. 태국의 입법부에서도 이를 직시하고 소작료를 일정 수준(약 33% 정도) 이상으로 정할 수 없다고 법안을 발의 또는 심의 중임에도 굳이 학생 운동가들이 각 지방을 순례하면서 지금까지 절반의 소작료를 내고 있는 것을, 당장 삼분의 일만 내라고 추동한 것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실제로 “정부가 소작료를 수확한 곡식의 삼분의 일로 줄이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150쪽) 농촌운동가이자 책의 남자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 아가씨 진다의 인텔리겐치아 애인 네드가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다. 이건 정말 웃긴 일이다. 입법부가 소작료로 책정하고자 하는 것이 33%, 농촌활동에 나선 학생들이 소작인들에게 지주한테 곡식의 삼분의 일만 내라고 하는 거하고 도대체 뭐가 달라? 입법부에서 추진하는 결정 역시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뽑은 대표들이 하는 거 아닌가? 꼭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건가 말이지. 70년대 초중반 태국의 대학에서는 민주주의에 관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거다. 당시 대한민국은, 얘기도 말자.
 문제는 ① 위에서 말했듯이 지금 정부(입법부겠지 행정부가 무슨 근거로 소작료율을 정하는가)가 법안 심의 중이고, 시국이 거의 완전히 민주정치 단계인데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고작해야 1년을 기다리지 못해 농촌을 들쑤셔서 기어이 소작료 투쟁을 벌였어야 했으며, ② 소작료 투쟁이 벌어진 숱한 농촌에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한 소작인들 다수가 체포에 의한 또는 체포 중 도주과정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까지 다 아는 상태에서 시도를 해야겠는가 하는 것과, ③ 진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해 실행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결국 잡혀가 옥사를 하는데 이제 남은 집안 건사는 남은 딸이 할머니, 동생, 언니, 언니가 갓 낳을 조카까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반면 ④ 어느 날 도시에서 무턱대고 찾아와 농촌활동을 시행한 학생들은, 남자 주인공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별다른 추가적 고통 없이 무난히 학업을 계속한다는 거. 이것들 뭐야? 책에서 민퐁 호는 남자 주인공 네드를 농촌 출신 고아에다가 머리만 무척 똑똑해서 기관 출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특출난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태국 북동부 지역의 소작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 진다와 계속적인 정신적(오직 정신적으로만) 유대를 맺게 하는 결말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드를 진짜 이 책의 작가 민퐁 호와 비슷한 캐릭터로 만들었다면, 운동이 괴멸한 후 결코 두 연인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코넬 대학으로 유학 가는 형식을 취해 집안에서 안전하게 추방해버렸을 테니까. 이 책이 2018년 현재 절판이니 결말 부분도 막 말해버린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얘기해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다.
 책의 절정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좀 논의가 필요한데, 그걸 위해서 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고, 그냥 말씀을 드리자면, 1976년 10월의 쿠데타 장면이 나오는데, 책의 헌사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바칩니다.”에서 보듯이 어느 나라든 당시 군인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탐마샤트 대학에 소작료 투쟁을 위해 모인 전국의 소작인 대표들과 학생들과 학교 근처 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린 장면일 수도 있고, 한 생명의 죽음과 거의 연달아 찾아온 또 한 생명의 탄생, 푸른 벼 이삭이 누런 벼로 늙어 가면서 쌀알을 만들어내는 생명력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1976년 쿠데타 장면이라면 그까짓 것, 1979년의 부마항쟁에 이은 이듬해 광주에서 너무 충분히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한테도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역시 생명력의 발현 장면이 책의 절정이라고 봐야 한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이 장면에서 오해하지 말기. 한 생명이 죽고 이어서 다른 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 모두 다 소작인들이다. 단 한 명의 도시 인텔리겐치아나 부르주아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소작인들. 심지어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사진을 벽에 걸어둔 가난한 먹물이자 남자 주인공 네드도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히려 굳이 넣자면 소작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지주계급의 하수인이자 마름이자 이제 태어날 새로운 소작인의 유전적 아버지인 두싯. 그래, 농촌은 농촌 안에서 알아서 풀어야 하는 거다. 거기서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계급이 섞이기도 하고 역전도 생기고, 서로 싸워 코가 깨지기도 하고 지지고 볶다가 어느 날 자연스럽게 풀려야 하는 것이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엄하게 끼어들어와 감 놔라 대추 놔라, 따따부따해서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시간차가 좀 날 뿐이지 큰 줄기가 민주화되기만 하면 다른 분야도 비슷한 수준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절판. 구태여 찾아 읽고 나처럼 이거 뭐야, 할 필요 없는 책. 한국인들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다.
 도대체가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쌀알, 농촌에서 높은 소작료에 쪼들려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 소작인들을 위한 책인 것처럼 가면을 쓰면서, 정작 책은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바치는 거. 물론 현장에 농민도 있었겠지만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먹물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 빼어나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황석영의 <객지>, 마지막으로 남은 동혁이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무는 거하고 비하면 정말 수준 차 난다. 제 삼 세계 국가의 소설이라 특별한 관심으로 읽었다가 염병, 시간만 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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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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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사기 오래 전부터 ‘만엔’이 무엇일까, 생각 좀 했다. 만 엔萬円, 즉 ¥10,000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근데 ¥10,000 이면 ¥10,000 이지 또 거기에 원년元年은 뭐야. 만일 이 책을 읽는다면 제목이나 내용, 이런 것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소설이라서, 그의 말년 작 <익사>에 숱하게 인용하던 대표작이라서 읽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제목의 의미 같은 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10,000을 처음 얻은 해에 풋볼 시합 어쩌고, 이런 되지도 않은 추리를 했을 뿐이었다. 결국 모든 착각의 원인은 바로 ¥10,000일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책을 사 표지를 보니 ‘만엔’이 한문으로 쓰면 万延, 일만 년을 이어간다는 뜻이었다. 근데 원년元年은? 검색해봤다. 이런, 만엔이 서기 1860년 당시 일본 정부의 연호란다. 만엔 시대는 1860년부터 1861년까지 딱 1년 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만엔 원년이면 1860년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익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 농민반란이 발생한 해라는데, 이 책의 주인공 미쓰의 증조부와 증조부의 동생(그러면 ‘종증조부’라고 쓰면 간단한데 책 끝날 때까지 계속 ‘증조부의 동생’이라 표현한다)이 깊숙하게 관련되었단다. 100여 년 전 사건의 주인공 증조부와 종증조부가 민란에 어떻게 간여를 했고,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정식 사료에선 거론을 하지 않고 이른바 민담 또는 향토사학 형식으로 많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지만 전혀 정확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 형이 아우를 죽이고 그의 허벅지 살 한 점을 베어 물어 삼킴으로 해서 자신이 민란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는 식으로 전해지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건 증조부의 동생, 종증조부는 자신을 따르는 친위대들을 이끄는 민란의 지도부였으며, 민란이 진압되어 친위대 전원이 살해되었을 때 자리를 극적으로 피해 죽음을 면했다는 것. 이들 극렬한 친위대 혹은 행동대원들이 마지막 무렵 민란에 참여한 농민들이 등을 돌림으로 해서 죽창을 들고 증조부의 곳간으로 밀고 들어올 때, 증조부는 총을 쏘며 이들에게 저항했다는 정도.
 세월은 흘러 소설의 일인칭 화자 ‘나’ 미쓰사부로의 형제로 넘어가면, 미쓰사부로는 4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첫째 형은 당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 졸업하자마자 입대해 중국에서 냉혹한 장교로 이름을 떨치다 금방 전사해버리고 만다. 둘째 형은 (아마도 가미가제를 육성하던)해군비행교육단에서 교육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종전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동네 아래쪽에 있던 조선인 집단과의 패싸움 끝에 조선인들에게 얻어맞아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셋째 미쓰사부로가 정식 상속인이 되고, 넷째 다카시는 1960년 6월에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극적으로 전향하여 마치 학생운동이 “우리 자신의 치욕”이었던 것처럼 심지어 미국을 순회하며 연극 <우리 자신의 치욕>을 공연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다음(이 정도면 '배신'을 넘어 '반역'의 수준이다), 증발해버렸다가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귀국한 상태다. 막내로 어여쁜 여동생을 두었으나 이른바 유로지비, 즉 백치 비슷한 상태로 스무 살이 되지 못해 농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화장실에서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느라 동아시아를 떠돌다가 객사해버리고, 어머니는 정신에 문제가 좀 있는 환자였다. 그러니 남은 미쓰와 다카시의 혈관 속에는 친가 쪽으로 증조부와 종증조부의 성향, 즉 집단을 이끄는 능력과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외가 쪽에서 온 정신 이상의 기질이 함께 흐르고 있어서, 어느 형질이 형제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셋째 아들이자 화자인 ‘나’ 미쓰는 아내가 읽던 소세키의 일기에 나오는 영어 단어 몇 개로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languid stillness, weak state, painless, passivity, goodness, peace, calmness(나른한 고요, 약한 상태, 고통이 없는, 수동성, 선량함, 평화, 평온)”(221쪽). 그러니 미쓰는 다분히 외가를 탁한 반면, 진짜 주인공 다카시는 형 부부와 고향 시코쿠 산골에 도착해 풋볼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젊은이들을 규합하는 것이 완전히 종증조부와 빼박이다.
 다카시는 책을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여기다 구태여 써놓을 필요 없는 이유로 고향 시코쿠 산골로 향하지만, ‘나’ 미쓰는 왜? 여기에 오에 겐자부로의 평생을 규정하는 사건이 개입한다. 스물아홉 살, 비교적 초기에 발표한 <개인적인 체험>에 고통스럽게 고백을 하고 일흔네 살에 발표한 <익사>에서도 작가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아들이 뇌 헤르니아 상태로 태어나 수술을 받은 다음 젊은 부부가 ‘관리’하기엔 도무지 역부족이라 소정의 기관에 유치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다. 거기다 책을 열자마자 비극적 자살 사건이 벌어지는데, 미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머리와 얼굴에 온통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항문에 오이를 박은 상태에서 알몸으로 목을 매 자살을 한 사건이 벌어진다. 장모의 기질을 받았으나 여태 완벽하게 자제해오던 아내 나쓰코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하루 종일 위스키에 전 알콜 중독의 상태로 빠져버렸다. 완전한 구석으로 몰린 미쓰가 난데없이 다카시로부터 귀향을 권유받고 상속받은 토지 일부를 처분하여 새 삶을 모색하고자 한 건 당연한, 아니, 당연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인물이 조선인 백승기. “흰 백(白), 되 승(升)에 기초 기(基)입니다.” 라고 517쪽이나 되어야 등장하는 이 조선인은 완전한 산골 깡촌의 촌놈보다 훨씬 못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부락 출신이다. 1945년 종전 후에 벌목공으로 징용을 살던 이들이 돈이 없어 떠나지도 못하고, 쫄딱 망한 일본 정부가 보내주지도 못해 발목이 묶이자 시코쿠 분지 마을의 저편에 집단인 촌을 만들고 토지 일부를 불하받아 살고 있으면서 수시로 시코쿠 촌놈들에게 박해를 받아온 무리. 그것도 급기야 시코쿠 촌것들이 쳐들어와 조선인을 죽이고 무슨 일을 했던지, 다음 싸움에서 일본인, 화자 미쓰의 친형 S가 죽고도 그걸로도 모자라 토지 일부를 정식으로 불하받게 해줄 정도의 패악을 당했던 조선인 부락 출신의 백승기. 그는 조선인이 떠난 토지를 다 수용한 다음, 읍내에 수퍼마켓 체인점을 세워 ‘수퍼마켓 천황’이란 별호를 얻어내는데,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수퍼마켓에 일정한 채무가 있으며,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민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 지역의 랜드마크인 미쓰네 집안의 곳간채까지도 헐어버리는 상황이다. 시코쿠 일대를 장악하고 경제적 패권을 쥔 수퍼마켓 천황과 한 바탕 풋볼 게임을 벌이는 것이 책의 스토리다. 그러면서 지역과 역사 사실과 한 가족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일.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수퍼마켓 천황과 한 판 풋볼 게임을 벌이기로 일을 꾸미고, 젊은이들을 규합하고, 정말로 한 판 잘 때려먹은 진정한 주인공 다카시가 하필이면 학생운동의 투사 출신으로 전향하여 타도의 대상이었던 미국에까지 가서 반성하는 의미의 연극 <우리 자신의 치욕>을 공연하려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학생운동의 놀랄 만큼 용감한 투사였다가, ② 전향해 미국에 대고 잘못했다고 반성하러 가서 몇 번 공연을 하고서는 이탈해, 흑인 거주 우범지역을 배회하다 가벼운 임질에 걸린 경험만 갖고 귀국해서, 다시 ③ 지역의 권력자인 수퍼마켓 천황과 한 판 풋볼 시합을 벌이는 캐릭터.  이런 과거 경력으로 인해서 풋볼 시합이 예상보다 훨씬 격렬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궁리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강하게 들었다.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성향이 더욱 고착되는 경우를 흔히 보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치열한 학생운동의 '가장 폭력적 투사'였던 것마저 깊숙한 곳에 원인이 있었다. 다카시의 모든 행동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숨어 있는 비밀. 그건 정말로 알려줄 수 없다. 책을 읽다보면 다카시가 스스로 밝히기 전에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마침내) 다 알게 되는데, 진짜로 주인공이 비밀을 이야기할 때 독자의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내밀한 즐거움, 그 즐거움을 느끼기에도 조금 과하게 비극적이라는 정도만 말하고 스토리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그런데 참 문제적 인간 다카시의 인간적 번뇌가 왜 그의 형이자 화자인 미쓰를 통해서만 밝혀질까. 물론 타인에 의한 정의야말로 근본적으로 오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마지막 결정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기 위한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하게 내재한 죄의식이 어떻게 한 인간의 인생을 거덜 내는지 참 치밀하게 묘사해놓은 역작이다. 위에서 내가 인상 깊게 생각했다는 조선인 백승기와 완전하게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주인공 다카시다. 백승기는 거의 불가촉천민과 유사했던 ‘부락’ 출신 조선인으로 자신의 출신이란 커다란 핸디캡을 발판 삼아 기어이 그 지역을 정복하는 ‘수퍼마켓 천황’, 일본인을 지배하는 천황이 되는 거 아닌가. 조선인 백승기의 등장이야말로 다카시의 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기막힌 보색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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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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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 맨: A Single Man>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전작 <베를린이여 안녕>을 읽어본 기억이 있어 인터넷 쇼핑 중에 그냥 이름만 보고 딱 고른 책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내 취향에 입각해 말하자면, 재미있게 읽었던 <베를린이여 안녕>보다 훨씬 괜찮다. 이럴 때 요즘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말이 바로 이거다. 대박!
 대박은 대박이지만 조심하시라. 얘기했다시피 전적으로 내 취향에 입각해 대박이라는 것이지 당신 입맛에도 그러할지 아니할 지는 장담하지 않겠다. 이 책을 쓴 1962년,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같은 사람을 서양인들은 ‘퀴어’라고 불렀고, 10년쯤 뒤에는 ‘게이’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쿠바에서 날아온 소련제 원자폭탄을 탑재한 미사일에 대한 공포로 인해 좀 산다하는 집에선 개인 방공호를 파고 응급식량을 사재기해 쌓아 놓는 일이 유행은 아니더라도 드물지 않았으며, 당연히 공산주의에 대한 필요 이상의 공포감은 완전히 혐오와 기피를 동반했고, 일반적이지 않은 ‘퀴어’들은 성도착자로 규정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키자는 주장을 번히 주요 신문과 매스컴에서 외쳐대고 있었다. 즉, 퀴어는, 역자 조동섭의 해설에 의하면, 요새 말로 ‘호모새끼’ 정도의 욕설과 유사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미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알고 있던 사실이라 하나도 놀랄 것이 없는데, 자신의 대리인인 소설의 주인공 조지가 완전한 남성 동성애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을 그대로 썼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다니엘 페나크의 흥미로운 소설 <몸의 일기>를 보면, 주인공이자 이미 늙어죽은 ‘나’의 아들을 동성애자로 설정했다. 그가 말하기를,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로 변하기는 쉬워도 거꾸로는 거의 불가능한데, 이유는 이미 천국을 맛봤기 때문이란다. 물론 나는 ‘천국의 맛’이 궁금하지 않다. 천국의 맛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을 이제는 성 소수자라고 하지 욕설을 퍼부을 대상으로는 생각하거나 지목하지 않는다. 이러기 위해 수백 년이 걸렸다.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는 남성보다 시기가 조금 빨랐는데, 이셔우드와 같은 영국 태생의 레드클리프 홀이 <고독의 우물>에서 거의 커밍아웃을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고독의 우물>이 간행된 것이 1928년. 그러니 대강 32년 정도 빨랐다고 해도 될 듯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실제로는 남성 동성애자가 여성 동성애자보다 더 많은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을 성적 선택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다른 수컷들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여성 동성애보다 남성 동성애를 더욱 불쾌하게 여겨온 것은 아닐까. 결국 이것도 남성에 의한 성 권력 때문이란 얘기. 이성애자인 내가 동성애자의 성적 감각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성애자들 몇 명이 모여 이야기해본 것 가운데 제일 그럴 듯한 건, 최고의 성적 쾌락을 낼 수 있는 방법을 동성애인이 이성애인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냈을 때였다. 그러나 <싱글 맨> 같은 책을 읽어보면 동성애인들 역시 “당연히”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섹스의 쾌락만을 위해 동성의 애인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성애자들은 도무지 ‘아직도’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사람들의 눈을 띄우는 것 가운데 제일 좋은 방법은, 책을 읽는 거다. 그들도 이성애자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사랑을 한다. 이성애자들이여, 그들의 섹스의 방식에 집착함으로써 동성애자들을 모욕하지 말라.
 <싱글 맨> 조지는 영국 출신으로 지금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미국인 교수와 비교하면)나이 많은 교수다. 시 외곽의 좋은 동네에서 약간 호젓한 곳에서 미국인 남자 애인 짐과 오래 살았다. 짐이 어느 여자와 눈이 맞아 대판 싸움도 하고 그러다가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짐이 자기 본가 오하이오에 들르러 가는 도중에 마주 오는 대형 트럭과 정확하고 단호하고 더할 수 없이 강하게 부딪혀 고통 없이 즉사하는 바람에 (사는 게 다 그렇다니까) 지금은 혼자 사는 남자, 싱글 맨이다. 이 조지가 아침에 일어나 다음날 아침에 잠에서 깰 때까지 만 하루를 그린 소설.
 혼자 사는 동성애자 늙은 남성의 하루. 거리와 장소 곳곳에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고, 아직도 젊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이 배회하고, 그러나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가까이 하고 싶지만 내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고, 제자들과 거리감 없이 지내고 싶어 하지만 너무 가까운 관계가 되기에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짜 친구, 남녀관계가 아닌 외로운 진짜 여자 친구와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저녁을 먹어야 하고, 물론 술도 같이 마셔야 하며 가끔가다간 입술에 키스도 당해줘야 하고, 다 쓰러져가는 퀴어들의 집합장소인 술집에 가서 떡이 되도록 위스키를 들이켜야 하는 싱글 맨.
 이게 다다.
 너무 일상적이고 단순하다고?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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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0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설의 싱글맨이 창비에서 다시 나왔더라구요.
역자도 같고 해서 신간 대신 좀처럼 쉽게 구할 수
없던 구간을 중고서점에서 구해다가 읽었던 기억
이 나네요.

저자와 성적 취향이 같은 감독이 연출을 한 영화
버전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킹스맨이 주인공이었습니다.

Falstaff 2018-03-06 14:29   좋아요 0 | URL
ㅎㅎ 영화에선 넘 잘 생긴 남자들만 나와서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ㅋㅋㅋ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마농의 샘 1 펭귄클래식 143
마르셀 파뇰 지음, 조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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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그림, 척 보기만 해도 유명한 삽화가, 장 자크 샹뻬다.

 


 

 이 소설의 탄생이 재미있다. 작가 파뇰의 아름다운 아내 자클린 부비에가 영화배우였던 모양이다. 남프랑스 마르세유 근방의 촌놈으로 태어나고 자란 파뇰은, 늙은 화가 세잔이 자신의 노혼(老魂)을 바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아내에게 주인공 ‘마농’ 배역을 주었으니 이 때가 1952년. 영화는 당시 작품으로는 아주 예외적인 네 시간 가량의 길고 긴 런닝 타임을 갖고 있었으며 화면 가득 남프랑스의 매력적인 풍광이 넘쳐흘렀던 것 같다. 영화를 만들고 어느덧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63년, 영화의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본 마르셀 파뇰은 이것을 다시 소설화하기에 이르고, 조은경은 이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초역은 정성호, ‘주변인의 길’ 1992)로 번역해 웅진<뿔]에서 냈다가, (완전 내 짐작으로 말하자면)저작권 계약변경 등의 이유로 다시 펭귄 클래식 코리아를 통해 웅진<뿔]과 같은 표지의 번역본을 (재)출간했으며, 2018년 1월의 겁나게 춥던 어느 날 밤, 알라딘 중고책 서점에서 내 가방 속에 들어오게 된다. 영화는 1980년대에 이브 몽탕, 제라르 드 파르디유 등이 출연하는 리메이크 작품으로 다시 나왔고, 1부는 <장 드 플로레트>, 2부는 <샘의 마농>, 각 런 타임은 두 시간 가량으로 만들었다. 내 검색실력 가지고는 아마존에서도 파뇰의 아내 자클린 부비에가 등장하는 1952년 필름을 찾지 못하겠다.
 어쨌거나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작품은 남 프랑스 에투알 산맥의 끝자락, 그것도 매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나타나는 주민 150명가량의 작고 작은 산골마을 레 바스티드 블랑슈, 우리말로 ‘하얀 요새’라는 뜻의 촌 동네에서 한 발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남자들은 주로 한 세기 전에 있었던 보불전쟁 또는 이번 세기의 제1차 세계대전, 아프리카 등에 산재한 프랑스 식민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레 바스티드를 떠났다가 상처를 입고 다시 돌아와 동네의 이장 필록센 씨처럼 연금수여자 생활을 즐기거나, 아주 공부를 잘해 세관원 같은 사무 공무원이 되어 동네를 떠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자들은 물론 결혼을 통해 자연스레 다른 지방으로 이주가 가능했지만 그때에도 주변에 있는 비슷비슷한 폐쇄된 이웃동네로 결혼 이주하는 경우에는 시선이 아주 곱지 않았던 것은, 특히 여자 형제를 결혼시킬 때 남자 형제가 느끼는 독특한 상실감 같은 걸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주민 150명 정도가 복닥복닥 살고 있는 폐쇄공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물론 우리나라의 비슷한 장소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이 이주해올 경우 오히려 더욱 폐쇄성이 강화된다는 것이고 흔히들 이런 성향을 ‘텃세’라고 칭한다. 지금은 농촌의 노령화로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우리의 경우도 이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서, 이주민이 농사를 새로 배우며 지어야 하는 경우에 현지민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이들을 교육시키거나 협조하려 하는 대신,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개인적인 성향이 동양보다 훨씬 강한,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많이 섞인 갈리아인의 후예들은 작품의 주인공 가족인 꼽추 장 카도레와 오페라 <베르테르>, <내가 왕이었다면>, <마농>에서 노래했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프라노 출신의 아내 에메, 그리고 어여쁜 금발 소녀 아가씨 마농, 이 세 가족이 새로이 농사를 ‘책’을 통해 배우며 완전한 실패를 향해 조금씩 걸음을 내딛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가장인 꼽추 장 카도레가 또한 장 드 플로레트, 즉 이 동네 출신인 아름다운 아가씨 플로레트가 사이 나쁜 이웃동네 레 종브레로 결혼 이주해 낳은 아들이란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수베랑 가문의 생존자인 파페, 이름은 세자르 수베랑이지만 나이가 들어 ‘파페’ 라고 불리는 늙은이와 이이의 유일한 상속자인 조카 위골랭은, 한때 마르지 않는 샘이 흘렀지만 천하의 게으름뱅이 피크부피그가 오랜 세월 관리를 하지 않아 수원이 막혀 이젠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 숨겨진 옥토, 위골랭의 숙원사업인 카네이션 화훼농장을 위한 천혜의 장소에 장 드 플로레트가 입주하는 순간, 이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완전한 실패를 확약하는 계략을 모의하고 실행한다. 바로 샘의 수원을 콘크리트로 막아버리는 것. 물이 없는 남 프랑스에서는 두 주일 이상 비가 오지 않으면 이집트 콩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농사도 성공할 수 없으나, 장 드 플로레트가 꿈꾸는 것은 토끼 농장이며, 토끼의 사료를 위해 아시아 박을 재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많은 물이 필요한 상황. 세무 공무원이었던 장이 거친 산골에서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진 고생, 스스로를 격심한 위기상태로 몰고가야할 만큼 격렬한 노동을 피할 수 없다. 바로 자기 땅의 올리브 나무 바로 아래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장이 믿는 것은 통계적 수치. 수십 년간 축적된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월별 비 오는 날 수와 강우량으로 아시아 박을 얼마든지 가꾸어나갈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에, ‘책’에서 얻은 그의 계산은 현실과 달리 처음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자신에게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연의 불규칙성과 불확실성은 언제나 엄혹한 법인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파페, 즉 세자르 수베랑이 유독 장의 몰락을 기원한 것은 이제 수베랑 가문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속인이자 조카 위골랭을 통해 가문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반半 본능적 욕구가, 위골랭의 성공을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다? 그건 아니다. 세자르가 평생 독신으로 사는 이유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름다운 아가씨 플로레트였으며, 자신이 식민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는 새를 참지 못하고 원수 같은 이웃 레 종브레의 대장장이에게 시집간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장 드 플로레트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유추하는 건 독자의 권리이고 나는 바로 그 권리를 사용하여 세자르, 즉 파페가 유독 장의 가족에게 혹독했던 건 바로 사랑, 그것도 지독한 외고집 사랑의 반대급부로의 미움 때문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내용은 여기까지. 영화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서 상당히 재미나다. 영화라는 장르 특유성으로 인해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등장하는 치명적 반전을 독후감에 써버린다면 독후감으로는 좋겠지만 이 책을 정말 읽어볼 분들께는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알고 보니 유령이었대!”라고 얘기해주는 것하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스토리 소개는 여기서 끝.
 하나 덧붙이고 싶은 건, 유럽 사람들이 심술부리는 것은 우리 눈엔 정말 살벌하다는 것. 자기가 놓은 덧에 걸린 산짐승을 훔쳐갔다고 총으로 쏴 죽이는 등 하여간 수틀리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해 결과가 죽음에 이르더라도 별로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 살 떨리고 소름끼친다.
 지금부터 진짜 하고 싶은 얘기.
 진실을 감춘 세자르와 위골랭. 자신의 농장에 항상 넘쳐흐를 수 있는 샘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장. 그러면 나머지 주민들은? 물론 샘이 농장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도 농장의 집에서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 즉 진짜 있는 위치까지 알면서도, 단 한 사람만이 돌 위에 화살표를 그려 암시하는 수준으로 힌트를 준 것을 빼면 아무도 항상 넘쳐흐르는 샘에 대하여 농장의 주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꼽추이며 전직이 세무 공무원인 서생출신이 물 한 동이를 얻기 위해 맨발로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미스트랄 속에서 일사병에 걸릴 때까지 산꼭대기 샘으로 쉼 없이 왕복하는 것을 번히 바라보면서도.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수베랑들에 의한 일종의 폭력 또는 기만을 주민 150명이,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침묵을 고수함으로써 그들의 폭력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난 이 장면을 읽으며 2018년 한 ‘여자’ 검사에 의하여 촉발되고 ‘여류’ 시인의 폭로로 번지기 시작한 한국의 Me too 운동, 오랜 세월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으로 방치하거나 동조해온 성희롱, 추행, 폭행의 관례가 떠올랐을까. 직접 샘을 시멘트로 막은 수베랑 사람들만이 죄인이 아니라,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한 라 바스티드 주민 전부 다가 죄인이며, 그리하여 모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마르셀 파뇰은 이미 60여 년 전에 웅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면서 오랜 세월 입 닫고 산 모두가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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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18-03-0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펭귄클래식 코리아는 웅진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인지라 책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Falstaff 2018-03-05 13:0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이래서 짐작은 함부로 하면 안 되고, 했다하면 반드시 ‘짐작‘이라고 써놔야 합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