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집 1 펭귄클래식 25
이디스 워튼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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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년 작 <순수의 시대>를 읽고 20세기 초반 미국 부르주아 계급의 속물성에 완전히 학을 떼서, 다신 읽나봐라, 했다가, 단 한 권의 책만으로 문학적 성가가 워낙 높다고 평가받는 이이의 작품을 다시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기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어서, 그러면 한 작품만 더 읽어보겠다, 마음 바꿔 먹고 읽은 책이다. 1862년생인 워튼이 <순수의 시대>를 쓴 것이 1920년, 우리 나이 59세. <기쁨의 집>은 15년 전 1905년에 발표한 작품. 44세, 일반적으로 봐, 전성기 때다.
 이디스 워튼 자신이 뉴욕의 유서 깊은 명가의 따님으로 태어나 4세부터 10세까지 유럽 각지에서 살며 완전히 개인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은, 뼈 속부터 진짜 부르주아. 그러니 44세 때도, 59세 때도 작품 속의 무대는 뉴욕 부르주아 집단, 정확하게 말해 최고급 사교계에 진입했거나 떨려난 사람들, 특히 여성을 주요 등장인물로 한 소설작품을 쓴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간 독후감을 통해 여러 번 얘기했듯이, 미국의 부르주아로 말하자면 성격이 자신들의 출신지인 유럽에 비하여 오히려 더 반동, 수구, 보수적 집단이었으며, 유럽의 비슷한 계급인 귀족들에게 굳이 뭐라 칭할 필요 없는 열등감 또는 어딘가 좀 꿀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고, 반면에 같은 미국인이라도 서부 출신 부르주아에게 동부 자본가들의 우월감 같은 걸 숨기지 않는 모습, 한 마디로 눈꼴시어서 봐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이런 걸 좀 유식하게 쓰자면, 목불인견이라고 하는데, 딱 두 편의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 본 미국 동부 부르주아 집단으로 말씀드리자면, 비록 내 통장의 잔고가 20만 원밖에 없더라도, 남들 보는데서 없는 척할 수 없어, 송아지 스테이크를 해치운 다음 후식으로 '쿠프 자크'를 먹을 것인가, '페셰 아 라 멜바'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속물 또는 잡것들이다. 쿠프 자크는 모르겠고, 나도 '페슈 멜바'는 안다. 이거 아이스크림 베이스에 복숭아(페셰)를 올린 디저트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명가수 넬리 멜바의 이름을 딴 거다. 거 있잖아 왜, 화폐에 자기 초상 올린 성악가.

 페슈 알라 멜바, 한 번 보실려?

 

 


 네티 크레인이란 자그마한 아가씨가 있었다. 영화수입사에서 타이프라이터로 일을 하다 같은 회사의 멀쩡하게 잘 생긴데다가 상류사회에 근접한 남자와 서로 연애를 한 거까지는 좋았다. 남자가 정성을 바쳐 심지어 어머니의 결혼반지까지 선물하면서 결혼하자고 꼬드겨 속 고쟁이 끈을 풀어줬는데, 남자가 날라버렸다. 아가씨의 연애 건은 졸지에 추문으로 번져 회사까지 그만 두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실직 후 가난한 시절에 결핵에까지 걸려 심각한 상황에 처해지기 바로 전에 미국판 혜민국에 보내진다. 여기서 하느님이 도와 릴리 바트 양이란 천사 같은 은인이 나타나 요양원에 가서 병을 완치하고 고향에 돌아가 자신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동네 친구이자 현직 화물차 운전수인 조지 스트루더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잘 살게 되었다는 얘기.
 이렇게 써 놓으니까, 아하 이 책이 네티 아가씨의 파란 많은 젊은 시절을 그린 건가보다, 라고 생각하면 진짜 오해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 이디스 워튼 자신이 입에 은수저를 물고 나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은수저를 입술 밖에 빼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서 불행한 네티 아가씨가 겪은 몇 년의 고난을 책으로 쓸 역량을 갖지는 못했을 것으로 본다. 근데 왜 이렇게 썼느냐고? 네티 크레인이었다가 네티 스트루더 아줌마가 된 젊은 엄마를 도와 결핵을 완치하게끔 요양원으로 보낸 릴리 바트 양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서. 설마 그거 한 가지 이유 때문이겠어? 그건 아니고, 중요한 변곡점이 되기도 해서 미리 콕 집어주는 건데, 이런 경우, 지금 내가 베푸는 친절을 우리는 흔히 ‘선의’라고 일컫기도 한다. 즉, 선의의 힌트를 드리고 있다는 말씀.
 자, 그럼 우리의 주인공 릴리 바트 양에 관해서 잠깐 소개를 할 필요가 있다. 릴리의 행각을 모두 얘기하자면 차라리 책 두 권 600쪽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니, 앞머리에 작가가 릴리의 성장환경을 묘사한 것을 배경으로 극히 짧게 요약하자면, ① 겁나게 예쁜 아가씨, ② 놀라운 체형과 반듯한 자세에 관한 적당한 한 마디는 ‘거만해 보인다’는 것으로 언제나 숙녀다운, 당황하지 않은 척하면서 즉흥적으로 위기를 넘기는 화술과 ③ 도대체 돈이 궁하다거나 경제적 위기 상황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으며, 내일 어떻게 되더라도 당장 주머니에 현금이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펑펑 써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④ 돈을 벌거나 생활을 꾸려나가는 아무런 재주도 없어서, ⑤ 자신의 미래와 복지를 위해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 참으로 (헛되이) 애쓰는 캐릭터.
 물론 부르주아로 릴리 아가씨의 미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류 사교계의 총아로 어울릴만한 모든 자질과 품위가 넘쳐흐른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며, 베풀 줄도 알고, 개인의 잘못 때문에 비록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지언정 타인의 비행을 발설해 위기를 넘기려 하지도 않는다. 경제적 어려운 상태로 떨어져도 남에게 없어 보이거나 동정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다 미덕. 그러나 참으로 덜 떨어지고 철없고, 한 번도 부르주아였던 적이 없던 내 눈엔 심지어 한심해보이기도 한다. 정말 정 떨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공. 겉으로 보기에, 즉 불멸의 사교계 일원의 눈에는 환상적인 미덕을 갖춘 매력 넘치는 아가씨일지 모르지만, 생활력 젬병이고, 남의 시선엔 전혀(적어도 과하게) 무신경하고, 주제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 일반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30년을 벌어야 만질 수 있는 돈(9천 달러)을 불과 몇 개월 만에 펑펑 써놓고 미스터 트래너가 왜 나한테 많은 돈을 주었는지, 돈을 준 대가가 무엇이 될지 전혀 고민해보지 않는 인물.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책이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였다. 두 작가의 차이점이, 특히 유대인을 묘사하는 관점이 극적으로 달라서 매우 비교가 됐는데, 워튼의 시각으로, 이 책에 나오는 유일한 유대인이자 월가 5번지의 총아이며, 키 작고 인내심 강하며 무엇이든 원하는 건 취하고야 마는 계산적인 로즈데일 씨를 보면서 왜 난데없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도깨비들이 생각났을까? 지하 마법사 전용 은행을 총 관리하는 도깨비들. 작은 키에 뾰족한 코에다가 돈과 금에 관한 한 그것을 제공하는 누구한테나 관용스럽고, 가져가려는 누구한테도 잔인한 유사 고리대금업자. <기쁨의 집>의 경우만으로 워튼을 판정한다면 반유대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책이 나온 시점도 20세기 초. 유럽 전 지역에서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번쩍 들기 시작했을 무렵이기도 해서 누명을 쓴 것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게 보였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나하고는 맞지 않는 작가. 그러나 스토리를 엮어가는 솜씨는 정말 감탄스럽기는 하다.
 내 서재에 더 이상의 이디스 워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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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5-05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까 골드문트님의 이선 프롬 리뷰 읽고 왔는데요 ㅋㅋㅋ 내 서재에 이디스 워튼은 없다!! 하셨지만 역시 인생은 알 수 없군요 ㅎㅎ

Falstaff 2023-05-05 10:5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맞습니다. 인생, 정말 몰라요. 이제는 저도 이디스 워튼을 진지하게 검색해보고 있답니다. ㅋㅋㅋㅋㅋ
 
다니엘 데론다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53
조지 엘리엇 지음, 정상준 옮김 / 한국문화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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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5 크기에다 태권도 유단자가 아니면 결코 격파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판자 수준의 양장제본. 그래서 약 350쪽의 책이 500그램 가까이 나간다. 이런 책 네 권으로 모아 19세기, 종이 귀하던 시절에 그랬듯 빡빡하게 써 놓은 1,410여 쪽을 읽어야 조지 엘리엇의 마지막 작품 <다니엘 데론다>를 끝마칠 수 있다. 메리 앤 에반스(Mary Anne Evans)가 왜 필명을 남자 이름 조지George라고 지었느냐 하면, 몇 가지 설이 있는 바, ① 조지 루이스라고 하는 유부남인지, 애 달린 홀아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아니 좀 묵은 표현으로,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아니하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당시가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에 있어서나, 문화적으로나, 지금 기준으로는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지만 하여간 도덕적으로나 절대로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은 황금기의 빅토리아 시대여서, 1854년에 그들의 동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극심해지자 이름을 ‘조지’라고 했다는 얘기와, ② 아무래도 이이가 활동했던 시기가 19세기였던 만큼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자신이 쓴 글을 독자가 보다 신중하게 읽어주기 바라는 입장에서 필명을 남자 이름으로 했다는 얘기가 (구글 검색해보니 나와)있는데, 흠, ②가 보다 사실에 가까운 거 아닐까 싶다.
 하여간 조지 엘리엇이 쓴 네 권, 8부의 소설이자, 그녀의 마지막 소설작품인 <다니엘 데론다>가 세상에 나왔을 때가 1876년, 조선이 개항을 했던 때이니 당시 영국과 유럽 문명과 문화의식을 감안해서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는 엘리엇의 초기작품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을 읽고 단박에 이이에게 반해버렸다.

 

 

 


 건전하고 (긍정적 의미에서)완고한 영국의 시민계급의 생활과 불행의 극복을 건강하게 서술했던 것이 읽기에 좋았다. 조지 엘리엇의 다른 작품을 알아보니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건 <플로스 강...>이 아니라 <미들 마치>라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사에서 ‘천 줄 읽기’ 시리즈로 나와 있다.

 

 

 

 즉 완역본이 아니라 요약본이라는 뜻. 영어로 읽으려면 ‘로즈마리 에쉬톤’이 19세기 영어를 다시 쓴 펭귄 클래식의 페이퍼 북이 있으나, 내 평생에서 징글리쉬를 쓸 일은 이미 끝났으므로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즉, 조지 엘리엇의 대표작인 <미들 마치>는 아직까진 읽을 수 없다는 것.
 이 마당에 숨겨본들 뭐할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미들 마치> 대신, 그래도 명색이 조지 엘리엇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려면 적어도 이이의 작품은 두 개 이상을 읽어보고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택한 책이 바로 <다니엘 데론다>였다. 표지가 하도 딱딱해서 옆으로 세워 들고 다니면 치한퇴치 용으로 아주 맞춤할 이 책의 그림은 이렇게 생겼다.

 

 

 

 

 각 권의 정가가 21,000원. 책 뒤표지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는 우리 시대 기초학문의 부흥을 위해 한국연구재단과 한국문화사가 공동으로 펼치는 서양고전 번역간행사업입니다.”라고 씌어 있다. 마지막 단어 “번역간행사업입니다.”는 정말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인용한 그대로 썼다. 궁금해서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흠, 진짜 세금 많이 쓰는 곳이다. 한국문화사는 주로 어문학 분야에 집중하는 출판사 이름. 세금 많이 쓰는 재단과 한국문화사라는 출판사가 공동으로 번역해 판매해서 그런지 할인율이 0%. 그래서 위 그림 네 권을 다 읽으려면 무려 84,000원을 들여야 한다. 좋다. 작품만 좋다면야.
 <다니엘 데론다>를 읽으면서, 19세기에 이런 책을 쓴 ‘여류’작가, 조지 엘리엇의 깡다구는 정말 알아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 당시 영국인들의 작품 속(예컨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등장하는 상속제도, 즉 아들에게만 상속권이 주어지는 한사限嗣상속 문제의 불합리성이 부각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여인에 대한 사회적 구속, 그리고 무엇보다 방랑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그들의 도덕, 철학적 우위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을 보자.
 궨덜린. 발음하기 참 까다롭다. 그래서 다시 써보면, 그웬덜린. 훨씬 수월하다. 여자 주인공. 놀랍도록 아름다운 결혼 적령기의 여자. 첫 장면이 도박장의 룰렛에서 돈을 엄청 따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행의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감지하면서 갑자기 도박의 자신감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아니나 달라, 그간 딴 돈을 몽땅 다시 잃는다. 이어서 어머니로부터의 전보. 집안이(19세기 중반 영국의 일시적인 공황 때문에) 거덜이 났으니 즉각 집으로 돌아 오거라. 별로 돈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목걸이를 전당포에 팔아 여비를 마련해 출발하려는데 누군가가 목걸이를 다시 사서, 그걸 돌려받는다. 물론 치명적인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받고.
 다니엘. 이이의 정체는 직접 알아내시라. 4권, 7부에 이르러야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어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께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타이틀 롤을 맡은 주인공답게 전혀 돈에 구애받지 않는 부르주아에다가 학식 또한 뛰어나고, 남 안 되는 걸 눈 뜨고 보지 못해하는 인정 많은 젊은이. 백부이자 속으로는 자신의 친부일 것이라 짐작하는 준남작準男爵이 우리 나이로 세 살 때부터 키워 멀쩡한 신사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준남작은 슬하에 딸만 셋을 두어 자신이 죽으면 한사상속으로 인해 모든 영지는 부도덕하고 심리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사디즘 적, 비정상적으로 비정한 조카 그랜코트에게 넘어가게 예정되어 있는 인물.
 미라. 유대인 처녀. 일찍이 부부싸움 끝에 아버지 손에 위탁되어 어머니와 오빠를 여의고 미국, 헝가리, 체코, 독일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연극, 노래 등을 익힌 어린 아가씨. 도박에 중독된 아빠가 자신을 팔아버리려 하자 돈 몇 푼 쥐고 독일에서 탈출, 엄마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런던으로 오긴 왔지만 완전히 괴멸. 이렇게 사느니 죽자, 싶어 치마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템즈 강에 빠져 죽을 찰라 보트를 젓고 있던 다니엘에 의하여 짧은 목숨 버리지 못해 질긴 삶을 이어가는 아주아주 예쁜 아가씨. 소설에선, 특히 19세기 소설에선 예쁜 아가씨는 대부분 마음씨도 곱다는 건 다들 아시지? 물론 발음하기 힘든 궨덜린 아가씨는 너무나 높은 콧대와 쥐뿔도 아는 거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게 몸에 밴 숙녀가 돼서 가히 재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얼핏 보면 이들이 만들어가는 삼각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단순화시키기엔 조지 엘리엇의 필력이 너무 막강하다. 내 경우에 국한해 얘기하자면, 난 4권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래서 조지 엘리엇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얘기하면? 앞부분이 읽기 쉽지 않았다. 특히 권 별로, 더욱 특별하게 제2 권에서, 조지 엘리엇이 또는 번역한 정상준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문장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균일하지 않았는데, 이런 말은 예를 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유 없이 까탈을 잡는다고 꾸중을 들을 수 있겠다.
 먼저 여러 번 읽어야 했던 문장의 예를 든다.


 “온갖 논란을 벌이는 와중에, 그녀가 그랜코트를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맺어질 사람으로가 아니라 결혼하기 편리한 남자로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자신의 결혼을 변호할 수 없는 이유에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물음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징적인 점이었다.” (2권 224~225쪽).


 지금 다시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세기 대단히 수사적인 작가들은 이런 문장을 많이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하여 귀하의 이해를 요구하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런 식), 인용한 문장은 읽기가 매우 힘들어서 그렇지 비문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문장은 더욱 아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3권과 4권도 같은 작가, 같은 역자가 썼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런 모호한, 또는 난해한, 마치 n차 함수를 푸는 듯한 문장이 별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라, 무려 열 번 이상 읽어야 했던 것도 있다. 보시라.


 “이런 상태에서는 행동에 대한 요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막연한 이미지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또한 환영의 세계에서 충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덧없는 충족조차 거부하며 끊어진다. 이런 상태는 머리털이 희끗희끗하게 세어갈 때 종종 찾아온다. 때로는 젊은 시절의 다양한 감수성이 벗겨져 나가면서 두드러지는 엄청난 이기심의 몸통처럼 맹렬한 완고함과 집요한 습성과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랜코트는 숱이 많지는 않아도 밝고 가느다란 금발을 갖고 있고, 그의 기분이 순전히 기운이 빠져 쇠잔해진 탓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신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나태하게 침체되거나 솜털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상태라도 뭔지 모를 부식성 물질이나 폭발성 물질이 마련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어떤 인부가 아무 원한도 없이 아직 자고 있는 동료의 생명을 짓뭉개려고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린다면, 그에게는 인간의 행동을 어지간히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습득된 동기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신사도 간접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험인물로 만들어 그가 다음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슬프게도 동료애를 깨뜨릴 수 있다.” (2권 198~199쪽)


 특히 2권에 수 없이 등장하는 추상명사들. 몹시 많이 배운 분들은 혹시 이렇게 주장할지 모르겠다. “은유를 이해해야 한다.”고. 기억해주시라. 넘쳐, 넘쳐흐르는 은유의 강물에 독자는 드디어 빠져 죽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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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4-02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번역한 우리말 번역이닷!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서문화사 월드북 138
찰스 디킨스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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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킨스는 더 이상 안 읽으려 했다. 그러다가 다른 책 속에 하도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자주 인용해 말릴 수 없는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검색해보니 동서문화사하고 동천사, 딱 두 출판사에서만 나오는데, 동천사는 총 네 권으로 만든데다 절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두 종은 공히 신상욱 번역. 그러니까 같은 책이란 뜻이고, 좀 오래 묵은 책은 본문만 1,010쪽, 해설까지 합해서 1,118쪽, 무게 1,008 그램, 10% 할인가격이 14,400원의 양장본. 요새 새로 팔기 시작한 책은 두 권으로 1권이 560쪽, 2권이 568쪽, 10% 할인한 두 권의 가격을 합하면 18,000원의 반양장본. 두 종류 공히 가로 158mm, 세로 230mm의 큰 판형에 절대 크지 않은 활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당연히 조금 묵은 책을 사서,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손에 들고 읽었다가 손모가지 결딴나는 줄 알았다. 읽는데만 꼬박 5.5일. 당연히 오후 7시 넘어서까지 읽을 수 없었다. 밤에 책 읽을 시간이 어딨어, 술 마셔야지. 이 책 읽으실 분은 백퍼 경제적 이유로 내가 읽은 1,118쪽의 책을 고르시길 권한다.
 찰스 디킨스가 37세이던 1849년에 분책으로 간행하기 시작한 <데이비드 코퍼필드>. 이디스 워튼이 쓴 <순수의 시대>에 나오는 뉴욕의 부르주아 여성이 뭐라고 지껄이는가 하면, “찰스 디킨스 씨하고 마크 트웨인 씨의 소설 속에는 신사들이 등장하지 않아서 좋아할 수 없어요.”라고 똥을 싼다. 글쎄, 신사 계급이 어떤 인간인지는 내가 한 번도 신사였던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데이비드....>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비록 대고모의 전폭적인 후원과 사랑이 없었다면 도시빈민 신분에서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었지만, 하여간 돈 많은 대고모 미스 트롯우드를 만날 팔자를 타고 나서 신사 계급을 유지한다. 아울러 데이비드 주위에 몰려 있는 인간들은 따뜻한 심성을 가진 평민도 있고, 변호사와 그들의 딸 같은 신사 숙녀 계급도 있다. 분명히 두 계급이 다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를 몹시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으나, 아, 그렇구나, 당시 잉글랜드에도 엄연히 존재했던 귀족 계급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일찍이 산업혁명을 겪어 이제 거의 완벽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된 1840년대 영국에선 부르주아들이 귀족계급을 여러모로 능가했거나, 좀 우습게 알던 때이었겠지만, 천만에, 부르주아들이 귀족계급 앞에서 은근히 꿇리는 듯한 야릇한 열등감까지 없었을 거 같아? 그러니 이건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계급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던 것이 중요한 이유이겠고, 그래서 난, 이젠 뭐 더 이상 디킨스를 읽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라질 빅토리아 시대 작가 가운데 다중을 차지했던 빈민들을 그나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던 이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 전형적인 19세기 중반 이야기책. 제인 오스틴이 죽을 무렵 태어난 영국 작가들, 브론테 자매와 디킨스, 조지 엘리엇, 엘리자베스 개스켈. 아주 전형적인 작품이다. 다분히 교양 계몽적인 소설. 어려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은인을 만나 제대로 교육받고, 유전으로 물려받은 총명하고 착한 마음씨 덕분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신사 숙녀로 살아간다는 거. 독자들이 기억하게 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권선징악의 확고한 규범에 맞게 책의 끝부분에서 자신들의 팔자대로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까지.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며, 당시엔 놀라웠겠지만 이젠 척, 하면 지금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복선이 나중에 어떤 내용일지 번히 보이는 그딴 거. 물론 이런 것 때문에 후진 책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오스틴이나 디킨스, 그리고 여류작가들의 소설책들이 아직도 꾸준히 읽히며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책이 나온 지 근 200년, 150년 가까이 됐음에도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갖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이며, 그건 말 그대로 탁월한 ‘이야기 책’이라서 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나는 이 재미있는 이야기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아무에게도 권하지 않겠다. 서양 소설책을 읽다가 인용되는 부분의 각주에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자주 있음을 발견하고 도대체 이게 어떤 책인가 호기심을 느끼는 인류가 또 있으면 읽어보시라.
 아울러 내가 권하지 않는 것뿐이지, 절대로, 절대로 이 책이 후지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시어, 굳이 내 의견으로 인해 재미난 책을 진짜로 안 읽는 분이 있어서, 이 분이 오랜 시간이 지나 읽어본 다음, 왜 아직까지 이 책을 읽지 않았었나를 따져보며, 나중에 나를 원망하는 건 듣고 싶지는 않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선택과 책임은 당신 몫이다. 근데 하여간 난 권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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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1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요즘엔 대중교통에서 책 읽는 사람을 만나면 화석을 보는 것처럼 신기한데, 더더군다나 저런 두꺼운 책을 ㅋㅋㅋ 들고 읽으셨다니 더 대단해 보입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18-02-13 14:22   좋아요 0 | URL
요새 마누라가 빙판에 자빠져서 어깨뼈가 똑 부러지는 바람에 아주 설거지 당번이 됐는데요(작은 애는 밥 당번), 이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들고 다니면서 읽어 그런가 저도 손모가지가 시큰거려서 아주 고전 중입니다. 흑흑흑.... 문제는 앞으로 6주나 더 남았다는 겁니다. ㅠㅠ
 

 

 

 아이 씨. 지금 네 권짜리 장편소설을 읽고 있는데, 어젯밤에 시 쓰는 최영미가 언제나 막강한 노털 문학상 후보로 알려진 En이 상습적 성희롱, 성추행자라고 자기 시 <괴물>에다 쓴 것이 밝혀져 또 한 번 매스컴을 탄 일이 자꾸 생각이 난다. 도무지 차분하게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동안 글 좀 쓴다는 시인, 소설가들의 입버릇, 손버릇에 대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이왕 이야기가 나온 것, 생각나는 대로 한 번 써보자.


 1. 최영미가 등단한 것이 1990년대 초반. 당시 En과 아주 친했던 그쪽 글쟁이들, 무지막지한 말빨로 인구에 회자되던 작가들. 예컨대 Sok, 또 글은 정말 찬란하게 잘 쓰는데 일찍 죽은 몇 명 같은 이들이 주둥이를 통해 정말 기상천외한 발상을, 원고지 위에다만 써놓았으면 좋을 것을, 술잔을 들고, 앞에 누가 있건 간에 마구 떠들어댔던 건 유명한 일. 솔직하게 얘기하자. 1990년대 초반까지는, 특히 술집이나 회식장소에서 성적인 농담을 해대는 것에 대하여 한국사회는 끝도 없는 관용을 베풀었으며, 더하여 성희롱이 분명한 농담, 이야기 등을 많이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더 인기 있는 인물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는 했다. 물론 보통의 시민들보다 독서량이 많았던 나도 성적 농담을 무지하게 쏟아낸 인간이었음을 고백하고 또 반성하거니와,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것이 ‘성희롱’이란 범법행위로 규정된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지금까지는 절대 여성들 앞에선 입을 봉하고 있음을 밝혀야겠다. 자리에 틀림없이 남자들만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내 주둥이가 예전과 마찬가지로 찬란하게 돌아가는 걸 아직 말리지 못하겠다는 것도.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마저 자신의 기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나도 몇 년 전까지 En이나 Sok 같은 이들이 지난 세기에 여성 문인들이 있는 회식자리에서 거의 전부 입으로만 행해지던, 범법행위란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던 성희롱은 언어로만 저질러졌던 것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최영미 같은 이들의 얘기를 듣고, 그것이 언어는 물론이고, 손을 비롯한 신체기관을 통한 성추행이었으며, 그중 가히 대마왕의 왕좌에 앉아 좌우로 여류 문인들을 거느리던 작자가 바로 En이었음을 알고 참으로 기가 막혔던 적이 있다.


 2. 인터뷰를 보면, En과 문단권력자들에 의한 성추행, 유혹을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당연히) 거칠게 거절하면 10년, 20년에 걸쳐 피해자에게 문학적 불이익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서서히 시나 소설을 쓰는 힘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문학적 쇠퇴’를 변호 또는 변명하는 기재로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도 운동선수들과 유사하게 계속 작품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작품을 만드는 공력이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며, 이때가 진정한 은퇴시기라고, 은퇴하지 않으면 표절의 유혹을 받기도 한다고 조정래가 2015년에 인터뷰한 것이 기억이 난다. 물론 최영미의 경우는 아직 60살도 되지 않았으니까 문학적 쇠퇴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야기했을 것임을 믿어서 의심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전직 작가’가 없기를 바란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도 피해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3. 우리나라 문단에 참으로 비겁한 사람들이 많다. 만일 En이 염병할 노털상을 받았다고 가정하면 끔찍하다. 가문의 영광, 나아가 국가의 영광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쟁하기를 좋아했던 처칠도 받고, 미치광이 히틀러도 수상 후보가 되기도 했던 조털 노털 문학상을 받아 범국가적으로 북치고 장고치고 한 판 잘 때려먹었는데 누군가가 늦게 Me, too. 해버렸다면 가히 해외토픽 감 아니었겠는가. 문단에 자정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다. En이 술을 항문에 빨대 꽂아 흡수하시고 혀끝과 손끝으로 새까만 후배 여류 문인들을 주물렀다면,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 쉬지 않고 지랄을 해댔다면 벌써 문제제기가 되고, 게임도 끝났어야 한다. 문제제기는 하기 싫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인간들. 문제제기? 그건 둘째 치고 En과 추종자들의 눈 밖에 나 자신의 문학인생(알고 보면 문학인생이란 게 어딨어. 다 그냥 ‘인생’이지. 굳이 일반 명사 앞에다가 ‘문학’이란 접두사 가져다 붙이는 거, 이거 진짜, 진짜 웃기는 그들만의 허영 덩어리다)에 스크래치 갈까봐 입도 벙긋 못하는 연놈들이, 한때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핵심 멤버였던 거 아닌가 말이다. 정권에 저항할지언정, 문단권력에는 찍소리 못하는 인간들. 좋다, 잘 먹고 잘 살아라.


 4. 최영미에 의하면 En들이 주로 결혼하지 않은 여류작가들을 타깃으로 했다는데, 내가 알기론 회식할 때마다 대마왕 En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그가 아무리 주물러도 까르륵대고 웃어넘기던 최영미 또래 미모의 인권작가, 여성주의 작가가 있어서,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건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힌트조차 드리지 못하겠는데, 만일 내가 들은 것이 진실이라면, 그 여자의 뇌구조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취소. 정말 취소. 행여 고소당하면 나만 골로 간다. 근데(그게 사실이라면), 늙은이들이, 최영미의 말에 의하면 30년 선배새끼들이 주물럭거려도 싫은 척, 빼는 척 하면서 진짜로 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걸로 귀염 받으며 소위 문학적 동지들의 총애 속에서 살고 싶을까? 잘난 척은 오지게 하면서 말이지. 난 이 언니 책 안 읽은지 30년까지는 아니고 20년은 넘었다. 심지어 이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인권 또는 여성주의)영화도 전혀 안 봤다.


 5. 나는 남성으로, Me too는 수만 년 동안 이어지던 남성중심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번 이상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 통과의례임을 인식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려하는 것은, 인류가 두 다리로 곧게 서서 다니기 전부터 있었던, 여자를 유혹할 남자들의 권리와의 조화 문제다. 당연히 이것도 시간이 더 지나면 적당한 사회적 관습에 의해 선이 그어질 것이 틀림없으나, 남성의 호의적이고 소프트한 접근조차 접근을 당하는 여성 입장에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하게 박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는 우려다. 다행히 나는 넘어가지 않을 나무는 백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쓸데없는 공을 들이는데 (여전히)자신의 모든 힘을 쓰고는 할 것이다. 그거 어쩌나. 조금이라도 빨리 이에 대한 관습적 기준이 만들어지기 바란다. 여자를 유혹하는 권리야말로 천부의 것이 아닌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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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2-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n은 더 까여야 합니다. 작품도 졸라 구린 게.... 허구한날 노탈상 후보는 .... 제에기-
이제 후보에도 안 올랐으면 좋겠어요. 정말 쪽팔림.

Falstaff 2018-02-07 14:10   좋아요 0 | URL
En도 당연히 까여야 하고, 그 추종자들도 까여야 합니다.
그럼 슬프게도 장년 이상 작가들은 몇 명 남지 않을 듯하네요.

낭자 2018-02-07 14: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류‘블로거 님께서는 ‘여류‘작가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드시나 봅니만 그 많은 여성작가들을 ‘여자‘라는 성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 정말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벌써부터 ‘당하고도 침묵한 니들도 더럽다‘는 소리 하기가 즐거우신가요? 정말로 패턴 나오는군요. 어디 단체로 학원 수강이라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18-02-07 16:30   좋아요 0 | URL
반성하겠습니다. 낭자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전 En이 남자의 몸을 만졌다는 얘기를 듣지 못해서 그렇게(‘여류‘작가라고) 썼습니다만, 그리 읽으셨으면 그게 맞겠지요.

Falstaff 2018-02-08 08:43   좋아요 0 | URL
암만 생각해도 ‘당하고 침묵한 자‘들보고‘ 너희들도 더럽다‘, 라고는 한 마디도 안 한 거 같은데, 그렇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 겁나고, 그렇게 읽은 분들이 무섭기도 합니다.
‘알고도 모른 척한 모든 사람들‘을 좀 비아냥 거리긴 했습니다만.
이것도 그렇게 읽게 만든 제 잘못입니다. 역시 반성하겠습니다.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플로베르의 앵무새>,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줄리언 반스. 이번엔 난데없이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를 변주하여 소설로 만들었다.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일. 더구나 이번엔 주인공이 소비에트 연방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 음악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인물이라면 결코 쉽지 않을 거 같다. 거기에 더해서, 반스의 어려운 결과물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 역시 다른 소설을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반스가 영국인으로 영어로 글을 썼으니 무엇보다 정확한 한국어로 번역해야 하며, 주인공이 대단한 작곡가이니만큼 음악에 관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겠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러시아 사람이니 또한 러시아 문학도 웬만한 조예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 독자의 100자 평을 보면 마치 이 책을 번역한 송은주 성토장 비슷한 모습인데,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의 넓은 아량을 기대해야 할까? 천만의 말씀. 조건이 영어, (서양고전)음악,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와 문학에 대한 이해, 이렇게 세 가지를 겸비해서 번역하기 어려울 거 같으면, 역자가 알아서 해당 분야 전문가 또는 역자 주의의 잘 아는 아마추어에게라도 적극적인 개입을 의뢰했어야 한다. 그 과정이 빠져 독자가 읽기에 불편했다면 역자로서 도리 또는 직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나? 아주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번역문 자체에서 껄끄러움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내가 둔해서 그렇겠지. 한 번 더 얘기하자면, 오역 자체는 모르겠다. 오역 여부를 검토할 정도면 원서를 읽지 번역서를 선택했겠는가. 다만 음악과, 러시아 문화 같은 거 나오면 실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볼쇼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삿코>와 <이고르 왕자>에 열광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스탈린이 이 갈채를 받는 새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듣고 싶어 한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33쪽)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품 <사드코>를 스탈린이 좋아했었나본데, <이고르 왕자>는 영어로 <Prince Igor> 즉 <이고르 공公> 일찍이 타타르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러시아의 (왕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대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 일반적으로 ‘대공’ 또는 ‘공’을 영어로 prince라고 하는 걸 오해했음이 분명하다)영웅을 그린,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아니라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작품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도 혹시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는지 열라 검색해봤는데, 없다. 그러니 분명 보로딘의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것으로 잘못 알거나, 잘못 쓴 거다. 이거 말고도 다른 음악적 작은 오류들을, 안타깝게도 역자가 열심히 퇴고를 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오류를 역자가 그대로 옮긴 것인지는 당연히 확인한 바 없다)
 또 책의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그(쇼스타코비치)의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호함과 난해함은 ‘유로디비’적 태도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유로디비란 러시아어로 마을의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바보인 척하지만 실은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겨 쓰던 사람을 의미한다.” (267~268쪽)

 

 러시아 언어는 발음할 때 구개음화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언어로 ‘유로디비’는 ‘유로지비’ 혹은 ‘유로지뷔’, ‘유로지브이’ 등과 비슷하게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 공작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세째 아들 알렉세이를 유로지비로 말하고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덜' 유로지비 급이다. 이들보다 더 선량한, 심지어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는 것으로 오히려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가 비슷한 듯.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백치'나 심지어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 파르지팔 등, 바보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바보에 가까우며,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칭한다. 지적이고 아이러니를 즐기는 사람이 바보나 궁중곡예사처럼 보인다고? 처음 듣는 말이다. 송은주가 ‘옮긴이의 말’을 쓰면서 좀 수상한 곳에서 정보를 가져온 모양이다. 러시아 문학 말고도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주인공 데이비드의 대고모 미스 트롯우드의 친구 딕 씨氏 같은 인물도 유로지비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이 책이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소설인지, 책표지를 넘기고서야 알았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전적으로 줄리언 반스, 이름 하나 보고 고른 책이란 뜻. 쇼스타코비치 이야기였다면 훨씬 전에 읽었을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 가운데 그의 빛나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기점으로 인생의 거대한 굴곡에 닥치는 이야기라면 더욱, 더욱 그러하다. <므첸스크....>가 어떤 작품인지 모르는 분들은 절대로 이런 흥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러시아 오페라 가운데 (책 속에서도 중요하게 거론하는)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불의 천사>와 더불어 말 그대로 쇼킹 그 자체인 오페라. 인간본성의 필터 없는 분출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드라마다. “세료자, 키스해줘. 내 입술이 터져 피가 성모상까지 튈 정도로.”
 참 재미나게 읽었다. 책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문장들도 그리 많았는데 그것들을 어찌 다 옮기나. 몇 개 적었다가 그만 뒀다. 그래도 하나만 옮겨보자.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피카소는 거지같은 그림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에 환호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소비에트 권력 밑에서 고통받는 불쌍한 화가는 그 누구도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하셨다. 피카소는 자유로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러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파리와 남프랑스에 부유한 사람처럼 앉아서 역겨운 평화의 비둘기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쇼스타코비치)는 그 피투성이 비둘기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육체적 노예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생각의 노예제도 혐오했다.” (190~191쪽)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건, 새로운 독재자가 나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한다는 뜻이라고 숱한 사람들이 증언했다. 그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민의 것? 웃기는 소리. 예술은 예술을 경험하고는 그걸 좋다, 라고 느끼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 아무한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느낄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다가온다. 음악, 미술, 문학 등 모든 예술행위는 그걸 창조해내고, 창조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여된 놀이이며 쾌락이다. 예술을 인민을 위한 기재로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체제 속에서 예술가로 사는 일. 생을 그만둘 적당한 시기를 놓친 쇼스타코비치는, “바이올리니스트 표도르 드루지닌에게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은 ‘파리들이 허공에서 죽어 떨어지고, 청중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을 뜰 정도로’ 연주해야 한다고 일렀다.” (248쪽)
 15번 사중주의 첫 악장, 영어로 쓰면 Elegy(Adagio), 한국말로 ‘비가(천천히)’. 한 번 들어보자. 소비에트 체제에서 오래 사는 것만큼이나 지루하다는 걸 각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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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2-0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카소의 거지 같은 그림,
왜 이렇게 공간이 가는지요.

집에 <개구리>가 없더라구요.
지금 사야 하나 빌려서 읽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Falstaff 2018-02-06 16:17   좋아요 0 | URL
전 피카소 그림 중에 정말로 낙서 같은 <블루 누드>는 좋더라고요. ㅎㅎㅎ 그림은 무조건 보는 사람 맘대롭니다.
<개구리> 빌려보실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시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