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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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난한 시집. 난 어제도 잘 모르겠고 오늘도 잘 모르겠고, 내일 읽어도 이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잘 모를 거 같다. 에잇, 다짜고짜 시집의 표제 시 먼저 읽어보자.



 오늘은 잘 모르겠어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전문 28~29쪽)


 

 이게 뭐 좋다거나 시집의 핵심이 된다거나 해서 인용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짧아 전문을 옮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지난밤에는 우리 둘이 서로 사랑을 해 몸을 섞었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려,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도 다 사라져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고, 아 이 다음부터가 문젠데,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 무릎은 가만히 펴”진 상태가 과연 어떤 자세인지 헷갈린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 눈꺼풀이 지그시 닫히면서 동시에 무릎을 가만히 편다면, 이거 어떻게 본격적으로 야한 자세를 취하기 전에 흔히 시작하는 포즈? 이 상태에서 가만히 가만히, 소토 보체, 펴진 무릎만 옆으로 세우면 완전히 자세 나오는 거 아냐? 좋다, 그렇게 감안하고 다시 읽으면, 시인도 거기까진 알겠단다. 근데 새는 다시 날아오기는 하나? 신은 언제 죽지? 여기서 말하는 신이 뭐지? 세상 온 종교에서 말하는 신, 즉 하느님을 말하는 것인지, 시의 첫 부분에서 얘기했듯이 내가 오래 바라보던 당신의 두 눈알을 말하는 것인지 흠, 잘 모르겠다. 여기서 한 발 더 뗀다. 그나저나 당신은, 언제 죽나? 즉, 최종적으로 알고 싶었던 것이, 당신이 언제 죽는지 하는 거야? 즉, 한때 서로 사랑을 나누던 우리가 해체되어 이제 언제 당신이 죽어버리는지 그걸 오늘은 잘 모르겠다는, 것. 설마 이건 아니겠지.


 그러나 내가 읽기에 시집의 전반은 주로 외로움이나 그리움, 각운을 맞춰 “움”으로 끝나지만 엄연히 “외로움”과 “그리움”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면서, 이 두 가지 주제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후략. <형> 69쪽)

 무려 다섯 쪽에 달하는 긴 시의 말미에 가면, 시인의 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형을 만들어 가상의 형에게 자신의 외로움과 시를 쓰는 일 등 자신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인격에 대한 그리움, 또한 그래서 그리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데에 대한 외로움까지 참 기막히게 노래하기도 한다.

 

 (전략)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 형, // 응?” (같은 시. 73쪽) 

 마지막에 여기까지 읽게 되면 독자는 대책 없이 얻어터진 뒤통수를 감싸 안을 수밖에.


 물론 언짢은 것도 없지는 않다.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을 대고 속삭였죠. /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 하지만 선량한 우리는 늘 말하죠. /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중략. 94~95쪽)


 “나는 소원을 빌기 위해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 나는 문득 늙은 청소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요. / 어이, 아저씨, 금요일에 나는 인간이고 싶었어요! / 나는 화들짝 깨어난 그에게 말하겠지요. / 놀라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후략. <나는 시인이랍니다> 부분 96쪽)


 시인에겐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이 벼슬이다. 이 시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작품이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데 그것도 자신이 시인이 아님을 주장하여 진짜 시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히는 건 어쩔 거야. 뭐 크게 틀린 일은 아니지만 시인은 아직도 자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선하고, 엉뚱하고,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한 것도 당연하다는 주장. 뭐 이딴 거, 다들 잘난 맛에 사는 거니까 마음이 넓은 독자들이 이해해주자. 물론 난 이미 까질 대로 까져서, 시인들의 이런 특권 주장을 들으면 저절로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 위로 치켜지는 현상을 금할 수 없다. (불민한 내 경우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실생활에서 엮인 시인들은, 이놈이나 저년이나 어찌 그리 하나같이 못됐는지, 아휴!
 혹시 시인은 헤르마프로디토스라서 그들끼리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 시인들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거 아냐? 난 그렇게 읽히는데, 만일 옹졸한 내 생각이 맞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가식 떨지 마!” (이 문단의 첫번째와 세번째 문장은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열린책들 2012. 262쪽에 나오는 걸 변형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당연히!) 다르겠지만 내가 제일 재미나게 읽은 시는 무지하게 긴 시 두어 개 이후에 나오는 시집의 마지막 작품 <리던던시>. Redundancy, 사전 상 해석에 의하면 듣기만 해도 살벌한 ‘정리해고’는 아니겠고 ‘불필요한 중복’이란 뜻도 있는데 이건가? 아닌가?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던 그건 별개로 하고 일단 읽어보시라.



 리던던시


 이 살픈 머을에 나 훈저 가하 모아 구름우에 망실히 사녀리메. 저 눞인 해롬우에 요살은 가루 눠고 묘살은 세루 눠요. 온 새랑이 서모 삮여 무릍 아훔 닐째 머하면 동념을 아지라지메. 뚜렁 서랑 꾸렁 마랑 옵고 만시나니 이 웊에 까막이 아이닐꼬나. 어뮈여, 우라 잠아에 꾸암만 옵고 만시나니 저 섶에 기럭이 아이닐꼬나. 고오면 가옵구 서오면 서롭다구 어모하모 거오룩지메.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 저니어어는 보자하굼 저 너어어믄 자자하굼. 살픈 달옴 우방지에 다슴마듬 모초록안 오도록히 설펴가메, 이러부낭 저러부낭 삼은 삼답헤 삼다지요. 이러부낭 저러부낭 검은 겁답헤 검다지요. 길세 웊 언닥지난 걔 실을 기리기리 달퍼가메. 한아리에 무유쁜 살믄 꾸암에 누고누벼 모덤 잩게 다홈 모덤 잩게 눈가마메. 어뮈여, 어뮈여. 훈저 사라가겐 훈저 주거가메. 완옥히 주거 아라리 던던시 온눈에 나라가메.“   (전문)


 어떠셔? ‘리던던시’가 Redundancy 맞는 거 같은가? 난 잘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에 ‘아라리 던던시’란 말이 나와 제목마저 헷갈리게 만든다. 그거 보면 제목 ‘리던던시’는 'Redundancy'라고 오해하라 지어 놓은 거 같다. 아니다. 하여간 이 노래는 어찌 보면 고려 가사 같고 어찌 보면 구강구조 또는 혀의 근육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뭔가를 얘기하는 거 같다. “아라리 던던시롬, 아라리 던던시랑”은 분명히 고려가사에 나오는 후렴구 비슷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시인만 알고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언어가 신기한 것이(외국어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를 써놔도 시인이 노래하는 것이 적어도 어떤 분위기인지는 대강 잡힌단 건데, 이걸 보고 이심전심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언어의 공명共鳴이라 해야 하나. 이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굳이 구강구조나 혀 근육 이상으로 보는 것도, 이 시 앞의 앞에 나오는 장시長詩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에서 쇠구조물로 혀를 구강 아래에 가둬둔 채로 발음하는 시인의 실험적 언어 탐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시인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마음은 여전히 혀의 통상적 사용법을 ‘상상적으로’ 작동시킨다. / 그때 마음의 조음 알고리즘에서 벗어난 혀의 소리는 / 격렬한 전투에서 칼과 방패가 부딪칠 때 나는 불꽃 튀는 마찰음이 아니라 / 저능아의 늘어진 혀, 돼지의 구겨진 혀, 광인의 날뛰는 혀가 내는 소리로 폄하된다. // 결국 시를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고 / 숫자와 집합으로 변형한 후 재조합하는 것은 / 억눌린 혀를 장애가 아니라 재료의 한계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 내 뜻이 통한다면 그러한 한계 안에서 시를 읽는 이는 / 장인적 주의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소리들을 일일이 세공하듯 만들어낼 것이다.” (부분. 222쪽)

 

 

 심보선이 시 속에서 철사 등의 금속을 이용해 구강, 특히 혀의 움직임을 구속한 그림


 이 부분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은 바에 <리던던시>가 혀를 구속한 상태 아니면 구강구조의 변형으로 인해 소리들을 세공하듯 만들어낸 시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딱 읽어보면 고려가요 비슷한 형태로 시를 써서, 독자로 하여금 절대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면서 미지의 단어가 주는 이미지만으로도 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후렴구를 섞어 음감까지 줘가며 강조한 것으로 읽히지만. 혹시 이거 라틴 아메리카의 아몰랑 주의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처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수작질?
 하여간 색다른 시인이다. 앞으로 계속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이의 다른 시집 몇 권 더 찾아보는 것도 흥미 있을 듯.
 근데 이 사람 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아예 논문 비슷한 것도 있고 말씀이야. 아무래도 조만간 소설을 쓰지 않을까, 그래야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길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다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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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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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대 어느 날, 20년 전 미국 모처의 고만고만한 악동들이 다시 모여 당시를 회상한다. 악동이라 해봤자 대단한 악동도 아니고 그저 나무 위에 얼기설기 판자를 이용한 작은 아지트를 지어놓고 활기방약하게 뛰어놀던 보통의 소년들. 이들 역시 유년, 소년, 사춘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예전 자신들을 빼다 박은 듯한 아이들을 거느리는 인생의 사이클을 순환하는 중이었으며 당연히 개중엔 정수리가 훤히 비기 시작한 이도 있고, 셋 중의 둘은 복부 비만에 따른 고혈압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이며 오직 딱 한 명만 전과 같은 체격과 조금밖에 퇴화되지 않은 운동능력을 보유했으나 아내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은 보통의 중년들로 성장 혹은 늙어갔다.
 20년 전, 아무런 방비도 되어있지 않은 이들에게 습격해온 사춘기의 혼동과 정체모를 욕정과 갈증은 쉴 새 없이 눈알을 두리번거리며 실체 없는 여성들에 관한 호기심을 충동질 했으며, 이 와중에 하필이면 동네에서, 심지어 카운티에서 가장 예쁜 다섯 자매가 살고 있던 리즈번 가家로 온 눈길을 포함한 모든 더듬이를 곤두세우게 만든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970년대. 미국의 주부들은 출산 후 아기에게 모유 대신 분유를 물에 타 먹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을 수 없을 테니. 보시라, 아래부터 13세 서실리아, 14세 럭스, 15세 보니, 16세 메리, 17세 터리즈. 연년생으로 줄줄이 아이를 생산할 수 있던 계급은 중세 유럽의 귀족 혹은 부르주아 외엔 없었다. 낳자마자 초유부터 생략하고 고용한 유모로 하여금 아이의 수유를 담당하게 만든 여인들은 곧바로 임신이 가능했었고, 그렇지 못한 일반 계급의 여성은 수유를 포함한 육아기간 동안은 임신을 하지 못해 약 삼년 터울로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20세기 들어와 인간의 젖 대신 소젖으로 대신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게 되자 그냥 1년에 하나씩 생산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래도 그렇지 연년생으로 다섯은 좀 심했다. 더 심한 건, 다섯 자매들이 하나같이 빼어나게 예쁘다는 거. 물론 그 중에서 굳이 제일 예쁜 아가씨를 고르자면 네 번째 럭스를 꼽겠지만 비슷한 옷을 입혀놓으면 전부 다 비슷하게 예뻐서 사춘기에 접어든 사내아이들 눈에는 누가 누군지 무구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니 참 이정도면 만족스런 딸 농사라 할 수 있겠다.
 곤혹스런 사춘기 시절 소년 친구들 가운데 폴 발디노라고 있었다. 이태리 출신 고급 마피아를 아버지 및 친척으로 둔 아이라, 이 집 구성원 가운데 남성 어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적대적 타他 마피아 집단(이를테면 양은이파나 칠성파 같은)에 의한 살해 또는 공격의 위협을 감당하며 살아야하는 운명을 견디고 있었다. 드디어 어느 날, 집안에 거창한 비상 탈출구를 건설해 지하 관을 통해 운하로 빠지는 대피로를 완성시켰는데, 신작로 닦아 놓으면 원래 문둥이가 제일 먼저 걸어가는 법, 폴 발디노가 새로 취미를 붙였으니 지하 대피로 탐험. 이를 통해 폴은 자기가 원하는 동네 어떤 집이라도 하수도를 통해 침입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대가로 온몸에서 지독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끊임없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걸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학교사를 하던 리즈번 씨를 도와준 걸 고맙게 생각해 식사초대를 받은 피터가 일찍이 다섯 자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매들 전용 화장실을 사용할 기회가 있어 무수한 여성용품과 그것들의 사용흔적을 발견했고, 여기다 소년들 특유의 과장까지 ‘위대한 경험담’에다 마구 섞는 바람에 자존심이 상한 우리의 폴 발디노는 소년들에게 자기는 자매들이 샤워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겠다고, 그 광경을 빠짐없이 너희들에게 다 말해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친 다음, 예의 하수구를 통해 리즈번 씨 집에 잠입했던 것이다. 가는 길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텅 빈 리즈번 씨네 집. 1층 탐색을 끝내고 2층에 오른 폴, 원래 출신이 마피아 대부네 가정인지라 보통 아이들 보다는 통이 훨씬 큰 그는 이제쯤 거침없이 방마다 벌컥벌컥 열어젖히기 시작했고, 소녀 또는 처녀들 방이 생각보다 단정하지 못해, 침대 위엔 뭔지 모르지만 하여간 색깔 든 오물이 조금 묻은 흰색 면 팬티가 널부러져 있었고, 십자고상엔 브래지어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피터의 허풍이 생각나 목욕탕 문을 왈칵 열어젖힌 순간, 뿌옇게 김 서린 욕조 안엔 마치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것처럼 완전한 알몸의 막내딸 서실리아가 뜨끈한 목욕물에 잠긴 채 양 팔의 혈관으로 붉은 피를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우리의 소년 영웅 폴,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아 피 또는 피를 흘리는 광경에 관한 한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마피아 혈통의 소년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해, 서실리아가 변기에 앉아 아빠 리즈번 씨의 면도칼을 이용해 정맥인지 동맥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양 팔의 혈관을 절단한 다음, 면도칼은 변기에 버리고 자신은 더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앉은 상황인 것을 파악하고, 가문의 가르침에 따라 침착하게 911에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처녀가 자살에 성공했냐고? 아니다. 구급차가 조용한 마을에 사이렌을 요란하게 불며 도착하더니 키 작고 똥똥한 구급대원 한 명과 기 크고 비쩍 마른 대원 한 명, 이렇게 두 명이 서실리아와 리즈번 여사를 태워 병원에 도착해 말 그대로 ‘구급’하는데 성공한다. 정신병리학자의 열성적인 노력과 분석에 따라 서실리아의 사회성 개발을 위해, 아이가 퇴원한 다음 소년들을 초대해 리즈번 가정 최초로 파티가 열린다. 여태껏 파티라고 하면 엄마 아빠가 1박 2일 또는 며칠을 기한으로 집을 비운 아이네 집으로 쳐들어가 가라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구해온 독한 술을 밤새 마시며 최대 음량 비슷하게 로큰롤을 틀어놓고 쉼없이 몸을 흔들고, 소파에서 트렘폴린을 하고, 어질어질한 머리통을 흔들면서 화장실까지 억지로 기어가 밤새도록 토한 다음 또 다시 술을 마시고, 이렇게 밤을 새는 거 말고는 전혀 지식이 없던 소년들이 이리하여 깔끔한 일요일 옷을 입은 채로 수학교사 리즈번 씨와, 수학교사보다 훨씬 더 엄정한 리즈번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즈번 부인이 국자로 떠주는 펀치를 마시며 다섯 아가씨와 별로 재미있지 않은 얘기를 하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익숙하지 않은 파티 분위기에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한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막내딸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문제아인 서실리아가 엄마한테 자기 먼저 올라가 자겠다고 눈에 힘을 주고 주장한다.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니까 억지로 붙들어 매지 못한다는 걸, 원래대로라면 귀싸대기라도 때려 입 닫고 그냥 앉아 있으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동네 꼬마들이 다 모여있는 관계로 엄숙하기 그지없는 리즈번 부인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여, 막내딸이자 사실상 오늘의 주인공 서실리아는 먼저 2층 침실로 올라가는데, 이제부터 집중하시라. 5분 쯤 후, 물리학적 법칙에 의하면 1초에 9.8미터가 떨어지는 건 진공상태에서 쇠공이나 사람의 몸이나 다 똑같다. 중력가속도 초당 9.8미터. 그리고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1초에 9.8미터, 2초면 약 40미터. 이런 속도로 뭔가가 휙, 허공을 나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푹 떨어지는 소리. 땅바닥에 쿵,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뭘 팽개치는 것도 아니고 약간 둔탁한 기분 안 좋은 느낌이 드는 진동이, 정식 파티 장소인 지하실에까지 도달했다. 제일 먼저 이걸 느끼고 뛰어 올라간 사람은 리즈번 씨. 나머지 사람들, 리즈번 여사와 어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독하게 건전한 파티를 즐겨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자리를 지키던 동네 청소년들과 네 명의 자매들이 지상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덤불을 젖혀보니, 거기엔, 쇠로 만든 울타리의 창살모양 뾰족한 세로 골격에 가슴이 관통당해 꽂혀있는 서실리아와, 아이의 머리와 골반 부분을 두 팔로 안고 어떻게 해서라도 쇠울타리에서 서실리아를 빼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리즈번 선생, 마치 빼내기라도 하면 서실리아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2층 방으로 총총거리며 뛰어올라갈 것 같기라도 하는 듯했다.
 이렇게 해서 리즈번 가의 첫 번째로 자살하는 처녀가 탄생하는 것.
 책은 이후 나머지 네 명의 처녀가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언제 어디서 이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성공하는지는 당연히 가르쳐드릴 수 없다. 비록 이 책이 지금 품절 상태이지만 올해 노벨상 받은 가시오 오가피 이시구로의 책이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판매하고 있는 덕분에 조만간에 다시 발매할지도 몰라 지금은 입 닫고 있는 것이 스포일러를 예방하는 일이겠다. 책의 거의 앞부분에 서실리아의 죽음과정이 나오며, 아예 처음부터 다섯 자매 몽땅 자살에 이른다는 걸 전제로 깔고, 20년 전 동네 소년들이 당시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여기까지가 내가 먼저 책을 읽어본 입장에서 얘기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오늘 독후감은 거의 전부 스토리에 집중해서 썼는데, 내가 이런 종류의 자살은 많이 불편해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다. 그나마 작가 유제니디스가 그리 무겁지 않은 필체로, 어떤 경우엔 웃음까지 픽, 흘릴 정도로 책을 썼기 망정이지 이런 종류의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 절망, 감상 뭐 이런 모드로 썼다면 아마 백 쪽도 읽지 못하고 그냥 던져버렸을 것이다.
 다섯 영혼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송신했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었던 모스 부호, 도와줘. 혹은 SOS. 그걸 발견하거나 수신하지 못했던 20년 전의 소년들. 또는 모든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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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랜드 창비세계문학 49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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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4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읽는데 꼬박 3일 걸렸다. ‘읽어내느라’ 고생이 자심했다. 토머스 핀천이 나하고 궁합이 좀 덜 맞는 거 같다. 지금 책방에서 팔고 있는 번역본은 다 읽었는데 한 편도 수월하게 읽히지가 않았다. 내가 미국인이 아닌 것이 제일 중요한 이유고, 그러고 보니 하필이면 핀천을 읽을 때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핀천의 책은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을 해야 문장과 문장이 엮이면서 만드는 교묘한 연결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미국인이면 모를까.) 물론 그렇다고 다른 책 읽을 땐 집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바인랜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카운티의 이름이다.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어 대마를 키우기 위한 미국 내 최고의 장소. 근데, 시점이 1960년대와 1980년대가 사정없이 왔다갔다, 무수한 알파벳 약자, 핀천의 특기인 없는 단어 새로 만들기, 재즈, 블루스, 컨츄리 등 대중음악부터 각 시대별 코미디 프로그램 및 영화제목, 배우 이름, TV 드라마와 등장인물, 연기자 이름 이런 것들이 각 시대별로 마구 쏟아져, 내 입장에선 TV를 보기 시작한 것이 1965년부터인데, 당시 주로 미국 드라마를 싸게 수입해 와 방송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거의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다. <타잔>, <말괄량이 루씨>, <내 아내는 요술쟁이> 이런 것들은 알아듣겠는데, 루씨와 요술쟁이를 연기하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알겠으며, 하물며 루씨와 요술쟁이의 남편 이름과 배우 이름은? 찰리 파커와 마일스 데이비스부터 시작해서 비지스 사이의 시간/연도/시대별 히트작품과 가수들은 또 어떻고. 이렇다보니 613쪽에 나오는 마지막 각주의 번호가 393이다. 각주라는 것이, 책을 읽다가 내용 모르는 단어 또는 인명 또는 노래 제목 또는 노래가사 또는 드라마 이름 또는 배우 또는 역할 이런 게 나오면 그냥 대강 넘어가도 아무 문제없는 걸 번히 알면서도 그것들 위에 작은 번호가 쓰여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각주를 한 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거, 그 순간 책 읽는 리듬이 홀랑 잃어버려 같은 문장, 심하면 앞 문장, 더 심하면 문단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악순환, 이해하시지? 대부분의 각주라는 건 사실 읽어봐야 오래 기억도 하지 못하고, 가끔은 정확하지도 않아 읽으나마나 하다는 게 내 주장이라서, 난 차라리 책 뒤에 따로 후추後註가 있어, 읽다가 정말 궁금해 돌아가시겠는 것들만 찾아볼 수 있는 편을 좋아한다. 처음엔 각주가 훨씬 좋았는데 책 좀 읽다보니 그것도 변하더라. 하여간 그리하여 토, 일요일 아침부터 현관문 밖에 한 발자국도 찍지 않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200쪽 간신히 넘기기 바빴다. 물론 오후 7시 이후엔 책 안 읽었다. 내 좌우명, 다들 아시지? 진로眞露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게다가 요새 방어, 굴, 홍합, 꼬막 등등 맛난 게 지천이란 말씀이지. 어떻게 해 진 다음에도 책 따윌 읽을 수 있으리오.
 자, 위에서 난 미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아시아인이라서 읽기 힘든 거에 관해서 얘기했는데, 또 있다. 핀천의 글쓰기가 너무 자유로워, 심지어 생과 사를 가를 정도라는 것. “타나토이드”라고 처음 들어보시리라 짐작한다. 그게 뭐냐 하면, 굳이 우리말로 펼쳐 설명해서, 업보, 살면서 “선악과 행업으로 말미암음 과보果報”, 라고 네이버 사전에 나오거니와, 주로 악행 같은 것을 저지른 인간(그 인간이 살았건 죽었건 간에)한테 남아 있는 갚아야 하는 (에이 씨, 이담에 뭐라 해야 해!) 하여간 그거, 이해하시리라 믿고 넘어가거니와, 바로 그 업보를 정산해야 하는 살았거나 이미 죽은 집단을 말한다. ‘집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단어의 짧음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죽은 이들도 등장한다는 말씀. 쉬운 얘기로 유령까지 뻔뻔스럽게 마치 산 사람처럼 나와서 같이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할 짓 다 하는데, 물론 육체적 교접은 하지 못하지만, 산 사람도 포함해 죽은 이들까지 모두를 일컫는 타나토이드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디엘DL’이란 백인 아가씨가 깡패 같은 아빠를 따라 일본에 살 때 무사武士가 아닌 자객刺客, 즉 닌자 수업을 제대로 받아 백인 여자 닌자가 되어 초절정 고수로부터 수업을 받는다. 이 닌자 수업을 통해 생과 사를 넘나들고, 바로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특정인으로부터만 사라지게 만들고,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 찔린 사람은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에나 죽게 되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게 자연사인 것처럼 위장이 가능하며, 기타등등 기타등등. 아울러 21세기에나 <007>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기막힌 발명품도 나온다. 한 번 읽어보시라.
 “쌘타로자의 제로 프로파일 페인트 앤드 보디에서 일하는 마누엘과 그의 자동차 도금팀이 개발한, 굴절률을 변조할 수 있는 특허 미세 투명 래커 덕택에 그들이 탄 트랜스암은 설사 도로 감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장자리가 살짝 번뜩이는 것 빼고는 감쪽같이 눈에 안 보였을 정도였다.” (313 쪽)
 이거? 투명 자동차. 007 시리즈에서 얼음 쌓인 동네에 BMW가 투명인 채로 다니는 거 보셨잖아. 그게 벌써 여기서 나온다. 이거 뭥미? 이게 핀천의 상상력인지 아니면 장난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두뇌에 약간의 이상작용에서 비롯한 것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어떻게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느냐고.
 책에 관해 말하자면, 핀천 본인이 1937년생. 소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간적 공간이 1967년가량. 말 힘들게 한다. “소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시간적 공간”, 용서하시라. 달리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1967년이면 미국 역사상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 비록 베트남 전쟁에 쓸데없이 끼어들어가 엉뚱하게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반전운동과 동시에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다 합해 좌파운동의 극점을 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와 자유섹스, 마약, 해피스모크 등, 인류역사상 가장 놀기 좋았던 시기를 딱 그 당시에 접한 토머스 핀천. 당시 자유를 구가하던 세대가 20년이 흘러 닉슨을 지나 레이건 시대를 당하니, 이건, 책에서 핀천이 직접 이렇게 말했는데, 파시즘이 새로이 미국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업종을 불문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노동운동, 가운데서 가벼운 파업 같은 것마저도 사정없이 패 죽이는 달콤 살벌한 시기. 실제로 1980년대와 90년대 초기까지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노믹스로 대표하는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해, 미국에서는 공항 및 관제탑 파업에 대해 대통령 레이건은 파업권보다 국민의 편의를 위한 공익성이 우선한다고 주장하면서 강제로 파업을 깨부수며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소송에서 이겨버렸고,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는 전통적인 강성노조에 의한 탄광노조의 파업을 단칼에 쪼개버리고 만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면서 파업을 벌여 쌍코피가 줄줄 흐른 주인공 가족의 가장이자, 늙은 히피에다가 (정말 이런 것이 있는지 아니면 핀천의 농담인지 모르겠지만)정신이상자에게 주는 연금으로 노동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는 대신 전처와 완전한 단절을 요구받은 대마초 애연가 조이드 휠러 씨와 이이를 둘러싼 많은 친구들, 히피 친구, 마약 중독자 친구, 영화계 친구, 밴드 친구들과, 20년이 지나 80년대가 되어 이제 성인이 된 딸 프레리와 이 아이의 젊은 친구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DL을 비롯한 타나토이드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난장판에 대해서는 614쪽에 이르는 길고 긴 소설책을 진짜로 읽어보실 여러분들을 위해 온전하게 남겨놓겠다. 사실 벌써 책의 내용에 관해선 거의 다 지껄여놓고 이렇게 아닌 척하는 것도 먼저 읽은 사람의 권리요, 당연한 잘난 척이며, 즐길 수 있는 재미, 아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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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돌 창비시선 331
송진권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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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진권은 처녀시집을 내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뼛골에 박힌 선연함을 어떻게 다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 내 시들이 소를 몰고 어둑발 내리는 길을 걸어 / 느지감치 집에 돌아와 저녁상에 앉은 아이의 얼굴 같기를”
 시집 제일 뒤편 <시인의 말> 부분이다. 2011년 뻐꾸기 울음 분분한 초여름에 옥천에서 썼다고 밝히는데, 옥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 뭐? 육영수?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얇은 책 전체를 한 번 읽어보면, 시집을 상재한 21세기, 아직도 주변엔 이런 촌놈 시인이 있다는 것에 먼저 감격하고, 이미 생을 마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시가 많다는 걸 발견하며, 세계를 제패한 그놈의 충청도 사투리, 오지게도 썼다고 학을 뗀다. 옥천 출신 시인. 자기도 알게 모르게 동향의 거인 정지용을 일종의 표식돌로 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다른 고장 출신 시인들 평균보다는 더 많이 정지용을 읽고 외우고, 똑같이 써보고 뭐 그랬겠지. 이런 행위를 다 합쳐 우리는 그걸 ‘영향을 받다’라고 한다. 그래서 처녀시집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시의 제목이 <딸레>. 이 시는 정지용이 쓴 제목의 것을 읽어보지 않았으면 감상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 다행히 난 정지용 전집이 있어 시를 찾아 읽어……보는 대신(요새 세상에 누가 복잡한 책장 뒤져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을 걸 찾겠어!) 간편하게 인터넷 검색해서 먼저 봤다.



 딸레

   정지용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앵도 나무 밑에서
 우리는 늘 셋동무.


 딸레는 잘못하다
 눈이 멀어 나갔네.


 눈먼 딸레 찾으러 갔다 오니,
 쬐그만 아주머니 마자
 누가 다려 갔네.


 방을 혼자 흔들다
 나는 싫여 울었다.


 

 시는 구두점 하나도 중요한 장르. 인터넷에 떠도는 숱한 시들이 정확한지 믿을 수 없어, 결국 책꽂이에서 책 막 빼내고 기어이 저 뒤쪽에 숨은 <정지용 전집> 꺼내 확인했다. 역시 인터넷 자료들, 전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 띄어쓰기하고 구두점에 오류. 다시 고쳐 썼다. 

 

 

 정지용의 <딸레>는 이렇다. 먼저 ‘딸레’라는 이름이 참. 이런 것도 공명이다. 앵도, 즉 앵두를 딸래, 라는 듯한 발음의 이름. 하여간 그런데 어찌어찌하여 눈이 멀어 나와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세 명으로 이룬 동무 가운데 사라졌고, 딸레가 어디 갔나 싶어 내가 찾으러 갔다 오니 그 사이에 또 쬐그만 아주머니까지 없어져, 이제 혼자가 된 나는 그게 싫어 울었다는 시. 이 정지용의 <딸레>는 송진권에 의해 이렇게 변주된다.


 

 딸레 


 송진권


 앵두나무 아래서
 딸레를 데리고 가자
 쬐그만 아주머니는 두고 가자
 바구니에 담아둔 앵두는 뒤엎고
 물크러지기 시작한 앵두는 흔들어 떨구고
 앵두나무 그늘도 흩어버리자
 바늘로 딸레 눈을 찌르고
 딸레를 안고 어르며
 머리를 빗겨주고
 곱게 화장을 시켜 내 각시를 삼자
 방울을 흔들면
 딸레는 노래하고 춤을 추고
 딸레는 눈이 먼 채 밥을 짓고
 딸레는 눈이 먼 채 빨래를 하고
 그래그래 착하지
 딸레는 얼굴도 곱고
 딸레는 마음도 이쁘고
 딸레는 이제 집에도 못 가고 어떡하나 어떡하나 (후략)



 변주도 변주 나름이지, 지용의 간결한 시를 풀어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좀 섬뜩하다. 딸레를 내 각시를 삼기 위해 쬐그만 아주머니를 두고 가서, 혹시 나 싫어 도망갈까 바늘로 눈을 콕 찔러 눈을 멀게 한다니, 나 이런 참혹한 우화가 어딨어. 있다, 있어. 손자 하나하고 같이 저 산골 화전 가꾸며 살던 노파가, 이제 손자가 다 커서 암내 나는 아가씨한테 가려고 날 버릴까 두려워져 손자 눈을 후벼 앞을 못 보게 만든, 박상륭의 책 <열명길> 가운데 한 편. 그러나 송진권의 우화는 ‘내’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래서 둘이는 아들 낳고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더래 / 하는 이야기의 끝처럼 살았으면 싶었지만 / 아무 날 아무 때 어딘가로 나갔다 돌아오니 / 딸레도 없고 아이들도 없고 / 옛날의 앵두나무 아래로 가니 / 앵두나무는 베어지고 / 쬐그만 아주머니도 누가 데려갔는지 없고 / 앵두나무 아래서 / 방물 혼자 흔들다 나는 울었다”가 돼버리고 만다.


 정지용의 깔끔하고 아름다운 시를 이렇게 만들었다. 결과가 좋든 싫든 간에 하여간. 이걸 만약 정지용의 시를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감상이 되겠느냐 말이지. 그래서,
 “* 정지용 「딸레」 변용.”
 간단하게 각주를 달고 말 것이 아니라,
 “* 정지용 「딸레」를 먼저 보지 않고 시를 읽으면 독자는 오리무중일 걸?”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
 자, 송진권의 <딸레>는 위, 아래 다 합쳐 전문을 다 옮긴 셈이니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으면 정지용 먼저, 이어서 송진권의 <딸레>를 한 번 더 구경하시압. 근데 많은 시 가운데 하필 이 시 <딸레>를 제일 앞에다 소개했을까? 하긴 뭐, 시인 마음이긴 하지만.


 이 시집 가운데 불만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시 <산골 엽서> 중에서 두 번째 노래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를 들겠다. 읽어보자.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


 종일 들일하고 들어온 늙은이 둘
 하나는 밥을 안치고
 하나는 쇠죽을 끓인다
 찬장엔 사기대접
 파리똥 앉은 백열등
 켜켜 그을음 묻은 서까래
 밤송이 막아놓은 쥐구멍
 이 정지에서 일곱이나 되는 것들이
 밥을 먹고 몸을 키워 대처로 나갔다고
 김나는 더운 쇠죽 구유에 부어주며
 욕봤다 욕봤다
 짐승 먼저 먹이고
 사람이 먹어야 한다고
 상추쌈 싸 공손히 입으로 가져가는 두 늙은이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
 노는 쌀방개 등허리에
 반짝 모이는 달빛 별빛


 짧은 노래의 제목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에’는 박목월 「사행시(四行詩) 한 수(首)」에서 따왔다고 각주가 달려있다. 일단 시인이 남의 시에서 제목이 됐건 부분이 됐건 이리 자주 따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무엇보다 노래를 다시 읽어보시라. 종일 들일 하고 집에 들어와 밥 짓고 쇠죽 끓여 짐승들 먹인 다음 크게 상추쌈 싸 먹는, 복도 많지, 이(齒牙) 좋은 두 늙은이, 이 늙은이들하고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하고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지? 나는 모르겠다. 두 늙은이가 쌀방개 등허리에서 반짝이는, 할매는 달빛, 할배는 별빛, 이런 거야? 안다, 알아. 늦도록 들에 나갔다가 돌아와 밥짓고 쇠죽 끓여 소 먹인 다음에 상추쌈으로 저녁 먹은 할매 할배들, 그리하여 이제 밤이 된 풍경을 그렸다는 거. 여기서 쌀방개가 뭔지 아셔? 그냥 ‘방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친절하게 얘기하면 예전 논에서 흔하게 보던 물방개. 검은 연미복을 쪽 빼입은 ‘통통한’ 검은 신사 같은 곤충, 기억나시지? 짙은 연미복처럼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는 등허리, 위의 달빛 별빛이 두 이 좋은 늙은이라서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 안에서 노는 쌀방개 운운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이 목월의 시집을 읽다보니 “우렁이 핥고 가는 더운 논물”이란 기막힌 구절이 머리에 팍, 박혀서 자기 시 어딘가에 써먹고 싶은 마음이 과했다, 라는 생각은 왜 드는지 모르겠다. 정말 절창이잖은가. ‘우렁이가 핥고 가는 더운 논물’이라니. 그래서 박목월이지, 박목월. 맞아, 다음번엔 목월 한 번 읽어야겠다!


 여태 까탈을 잡기만 했는데, 사실 지금 시절에 이처럼 시골스럽게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송진권을 발견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동시에, 조만간 이이의 뒤를 이어 (교과서 시 해석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을 빈다면) 토속적 이미지를 이야기로 만들면서 뛰어난 시적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 쓰는 시인이 또 언제 등장해 맥을 잇겠는지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지금 시는 너무 현대화, 도시화, 삭막한 비통과 감상의 과잉분비 또는 배설, 또는 추상 이미지, 기호학적 해석 유발 등으로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느닷없이 읽어본 송진권이 반갑지 않았겠는가. 그의 데뷔 시 전문을 옮기면서 독후감을 끝낸다.



 절골
 못골 5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길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꺼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이 잔뜩 으등그러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눈이 풀풀 날리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거튼 함박눈이 눈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릎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워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디 기분이 참 쵸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까지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그치고 못독 얼음 갈라지는 소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지나온 자리만 밟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런단 죽겄다 싶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라네 한 걸음 띠다 꾸벅 또 한 걸을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른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도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 걸음씩 들어갔다네 눈은 퍼붓는디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런 여자가 웂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른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 거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눔아 거가 워디라고 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거튼 눈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 나가겄냐 뒈질 줄 모르구 워딜 가는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본께 둥구나무에 쌓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러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시상이 왼통 훤헌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강생이거치 집으루 내달렸는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둥구나무 저치 가믄서는 절해가매 아이구 할아버지 할아버지 헌다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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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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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암살자>를 재미나게 읽어 애트우드의 다른 책을 찾아 읽은 것이 바로 <시녀 이야기>. <눈먼…>에서 애트우드는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힘과 재력을 포함한 가정 내 모든 권력을 쥔 남성에 의한 행해진 성폭력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번에 읽은 <시녀 이야기>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발발한 길리아드 내전, 대통령 즉위식을 기해 군부에 의하여 벌어진 집권층 학살과 이어진 쿠데타 및 오랜 독재와 경찰국가 체제를 가정한 의사 역사소설이다.
 길리아드는 미합중국 해체 후 북아메리카 동쪽에 자리 잡은 나라. 이 국가에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란 글에서, “길리어드에는 진정으로 독창적이거나 토착적인 것은 없”고 “그들의 탁월함(주: 지금은 이 단어를 ‘탁월성’보다는 ‘특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합성>에서 발휘”된다고 작가 스스로 얘기했듯이(514쪽), 인류 역사상 안 좋은 쪽으로 모범이 된 몇 개의 정부를 샘플로 만들어냈을 것이다. 길리어드 수뇌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정통 프로테스탄이 아닌, 가톨릭과 침례교를 포함한 모든 이교도를 탄압하여 길리아드는 바야흐로 내전상태에 처해있고, 유대인들에겐 민영화한 운송회사를 이용하여 즉시 길리어드를 떠나게 함으로서 보트 피플로 밀려난 유대인을 과밀하게 싣고 가던 여객선 한 척은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모든 윤리규범은 교조적 기독교 경전에 맞게 시행되어야하므로 국민들은 자신의 재산과 인격과 지위에 따라 적절한 계급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 남자들에겐 사령관, 수호자, 천사, 눈 등의 호칭이 붙어 지휘자, 군인, 스파이 등의 직업이 주어지고, 여자들은 아내, 아주머니, 하녀, 시녀 등의 계급으로 구별한다. 여자들은 모든 사회활동을 금하며 오직 후대를 생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때맞춰 무능한 길리아드 정권은 환경파괴물질을 과감하게 투기하는 동시에, 방사능과 핵폐기물 등 인류에게 최악의 상태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악을 모든 방법으로 완벽하게 배출하여 아메리카를 접한 대서양 인근에 서식하는 어종의 씨를 말리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이제 ‘시녀’가 어떤 계급인지 설명을 해야겠다. 우리말로 ‘씨받이’. 최고위 계급인 ‘아내’는 당연히 남편의 지위에 의하여 자리를 점하게 되는데, 아내가 직접 출산을 할 수도 있고, 출산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다른 여인에게 대신 맡기고 자신은 낳은 아이만 취함으로 자녀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아이를 낳아주는 여자를 ‘시녀handmaid'라고 했다. 아이를 낳고, 한 한 달가량 모유를 먹인 다음에 아이의 양부모에게 꾸벅 절을 하면 곧바로 다음 가정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서 또 임신, 출산, 수유. 즉, 아이 낳는 기계, 다리 달린 자궁 정도의 위치다. 이들은 국가권력과 현 체제에 안주하는 시민들, 예컨대 아내, 아주머니, 하녀 등에 의하여 철저하게 감시당하는 삶을 산다. 남이 알아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대화도 할 수 없으며, 조금의 사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비관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집단 구성원으로 늘 감시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계급 이탈의 기도도 가혹하게 처벌 받는다. 그런데,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이 시녀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계급으로 누굴 꼽았는가 하면, 시녀를 둘 수 있는 지배층에서 봉사하는 아주머니 계급. 즉 수석 하녀를 꼽았다. 탁월한 선택. 동서고금을 통해 알 수 있듯, 가장 가혹하게 탄압을 받는 계급을 가장 효과적으로 조종했던 건 동족 중 바로 위 계급이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반장이 그랬고, 일본 식민지 조선에서 순사들이 그랬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것들 가운데 특히 씨받이, 시녀들에 초점을 맞춰 글을 썼을 뿐이지 진짜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 가혹한 권력이 어떻게까지 비인간화할 수 있을까, 하는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씨받이 이야기이니 당연히 유사이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기 전부터 특히 덩치와 완력으로 우위에 있던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정도로 생각하면서. 남성인간에 의해 지속된 유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20세기와 21세기 와서 겨우 몇 십 년 조금 반성하는 시늉하면서 이제 서로 동등하다거니, 그건 그거고 이제부터 서로 잘 살자느니 어떻거니 함부로 얘기하려는 생각 없다. 하여간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한 독재 또는 통제체제에 의한 인간의 말살로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230쪽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남자라면, 그리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다면, 제발 명심해 달라.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정말이지 그런 충동은 참으로 거역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서 역시 일종의 권력이다.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권력이며, 용서를 유보하거나 베푸는 일 또한 일종의 권력이다. 아마 그만큼 커다란 권력은 없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는 남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란 말. 뒤에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다 권력이란 얘기는 도무지 무슨 주장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거릿 애트우드가 처음부터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구속, 억압, 폭력을 주제로 이 소설을 쓰기로 이렇게 작정을 했었는지는, 아주 몰랐던 건 아니고, 설마 이런 거대 서사에 피해자로 인구의 절반만 해당하게 구상했겠나 싶었던 거다. 이제 실토하자. 독후감 제일 앞자리에 이이가 쓴 <눈먼 암살자>의 대강의 내용을 두었던 건 <시녀 이야기> 역시 근본적으로 <눈먼 암살자>와 같은 부류로 읽어야 함을 비치기 위해서였다.

 비록 작가가 설정한 정치적 음모. 대통령과 요인 암살,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벌어진)군부 쿠데타, 기독교 원리주의와 유대인 추방, 학살 수준의 형벌과 특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 이런 것들이 지난 시절 히틀러 등의 파시스트와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독재정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행태를 종합한 것이고, 그도 모자라 온갖 형태의 자연파괴, 방사능 유출, 아메리카의 지역적 몰락 등, 작가 스스로 주장한 대로, 길리아드 국國을 만들기 위한 뛰어난 “합성”의 결과인데, 이 모든 합성은 결국 여성주의 소설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길리아드에서 여성은 항상 남성으로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아왔는데, 이 장면에서도 애트우드는 놀라운 인류학적 힌트를 던져 넣는다. 반정부 활동을 한 남자를 체포, 고문한 다음, 거의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서, 이 남자를 여자들한테 던져준다. 쉬운 얘기로 공개처형에 처하는 것. 처형은 자리에 모인 여성들 마음대로 행한다. 난 이 장면이 대단히 흥미롭게, 500쪽이 넘는 잘 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행동, 이마를 탁, 치면서 읽었다. 이를 ‘참여처형’이라고 한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쓴 위대한 인류학 서적 <황금가지>를 떠오르게 하는 기막힌 번뜩임. 그러나 인류학적으론 자연스럽지만 인간적으로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행사이자 축제.
 참여처형은 이른바 ‘구제驅除’ 행사의 뒤풀이로 나온다. ‘구제’라는 거 자체가 공개처형이다. 책에선 세 명의 여자, 두 명의 시녀와 한 명의 아내의 얼굴에 흰 보자기를 씌우고 목에 밧줄을 맨 다음 딛고 선 나무 단을 걷어 차버리는 거. 이게 단줄 아시지? 서양의 교수형에선 한 공정이 더 있다. 페터 바이스의 명작 <저항의 미학>에서도 나온다. 목을 매단 사형수의 다리에 집행인이 매달리는 거. 그럼 목뼈부터 척추 등 관절이 우드득 소리를 내면서 탈골되어 보다 빨리 죽일 수 있단다(우드득, 탈골되는 소리가 이 책에 나오진 않는다). 이런 장면을 보며 흥분한 여성들, 그들이 상당한,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자신들도 조그만 잘못만 해도 이렇게 목매달려 죽을 게 번하니까. 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평소 자신들을 핍박해온 남성 하나를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일, 그걸 집권자들이 생각해내고 시행하는 걸, 난 이걸 생각도 못했던 거였다. 애트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양들은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유용했습니다. 평상시 극도로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는 이들 <시녀>에게도 가끔씩 맨손으로 남자를 찢어죽이는 일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게 분명합니다. 이 행사가 어찌나 인기를 얻고 활용도가 컸는지 중반기에는 정규적으로 시행되어 1년에 네 번씩 동지, 하지, 춘분, 추분에 시행되었습니다. 고대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는 다산제의 흔적을 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515쪽)

 

 어떻든, 난 애트우드가 이 거대서사를 여성주의 문학을 위해 사용한 것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없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다.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것이지 그게 옳고 그르고 따지는 건 독자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소설에 대해 느끼는 것은, 이미 있어왔던 사실이나,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가능한 문학적 실제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여성주의 소설을 써도 괜찮을 텐데(마치 <눈먼 암살자>처럼. 얼마나 잘 쓴 여성주의 소설인가), 있지도 않은 디스토피아의 미래, 2045년 이전의 어느 시대 북아메리카에 가능하지 않은 길리아드 국가를 건설해 굳이 또다시 여성을 생식기계 상태로 만들어서, “당신은 여자로서, 남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유혹이나 기분에 절대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고 주장해야 했는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가상 역사라면 원조 여성주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전에 여성주의 소설에 관해 비슷한 독후감 썼다가 코피난 적 있다. 자주 얘기했듯이 난 논쟁을 싫어한다. 혹시 생각이 다른 분 계시면 미리 말씀드린다.
 당신 의견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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