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의 천사 1 세계문학의 숲 26
재닛 프레임 지음, 고정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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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남섬의 정 많지만 무뚝뚝하고 완고한 철도노동자 조지와 시를 좋아해 틈틈이 시를 써서 잡지나 신문에 기고하길 즐기지만 전형적인 자기희생형 어머니 로티 프레임 부부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딸, 아들, 딸, 딸, 딸) 다섯 중 딱 가운데, 그러니까 셋째가 재닛 프레임, 작가 본인이다. 재닛의 소녀시절, 행복은 이 가정을 빗겨 나가서, 여덟 살 때 오빠 브러디가 심한 간질 발작을 시작해 거액의 치료비를 지출할 수밖에 없었고(나중엔 뉴질랜드 국가시책으로 병원비 전액을 국가가 부담하지만), 5년 후 활달하고 조숙한 언니 머틀이 그 또래로는 자연스런 자잘한 사고를 잔뜩 치고 다니는 발랄한 십대 시절을 지내다가 암만해도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무시하는 바람에 놀라운 수영실력에도 불구하고 강에 빠져 죽는다. 재닛은 가난한 집안의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해가며 특히 영어와 불어, 그리고 수학에 두각을 나타내 언제나 우등을 차지해 아버지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집안의 어려운 살림과 수시로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오빠로 인한 긴장된 분위기 같은 것은 재닛으로 하여금 조용하게, 그리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복종하는 습관을 들이고 만다. 자신을 내보이기보다 주위에서 말하는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잘했다거나 착하다는 칭찬을 받는 분위기. 언제나 우등이라서 가난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범학교에 진학 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정, 했다기 보다 당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라 그렇게 된다.
 이 소리 없고, 수동적이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초보 여선생이 사범대학 졸업 후 임용을 받아 초등학교 교사로 가고, 드디어 정교사가 되기 위하여 여러 장학사와 교장 앞에서 공개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날 최초의 일은 터지고 만다. 도무지 견딜 수 있을 거 같지 않은 눈길들의 빗발 앞에서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두려워, 재닛은 교장에게 잠시 교실 밖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교문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의 생에 대하여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그러나 내가 이야기한 작가의 초기 생애는 별개로 하고, 곧이어 8년간 벌어질 지극히 불행하며 그리하여 남은 인생의 큰 굴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수난기와, 수난을 피하고자 행한 유럽생활과 극복으로의 귀환에 대하여 입을 다문 채로 독후감을 쓸 수 있을지는 솔직히 계산이 안 된다. 재닛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일컫는 20대에 경험했던 지독한 불운이 사실 책의 핵심이며, 그녀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경험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미리 밝힌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책을 연 내가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받은 놀라운 충격과 인상과 감정 등은 오직 나만 향유하겠다는 이기심이라고 해야 하리라.
 책을 열면 제일 앞에 영화감독 제인 캠피언이 쓴 서문이 나온다(캠피언 감독이 책과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 상도 하나 받았다). 이것 역시 읽지 말고 곧바로 본문으로 들어가면 더 좋았을 뻔했다. 캠피언의 직업이 영화감독임을 감안하면 서문은 참 잘 쓴 글이다. 그러나 책의 성격상 서문에 두지 말고 차라리 발문으로 뒤편에 두어 다 읽은 독자들과 서로 감상을 나누는 역할을 했으면 어땠을까. 왜냐하면, 독후감의 스토리 소개도 앞부분에만 국한하고, 캠피언의 잘 쓴 서문도 발문으로 바꿨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소설책이 아니라, 난 진짜로 소설책인줄 알고 사서 읽었는데, 유명 작가가 쓴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종의 역사책을 읽는 셈인데 가장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대목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살다보니 내가 다른 인간의 자서전을 읽는 날도 온다. 그렇다. 다 읽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자서전. 스스로 자기가 살아온 날들과 사건을 정리해서 쓴 책.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자서전이 ‘카네기 자서전’. 내 아버지가 사셔서 읽으려 하다가 때려 치우셨던 기억이 난다. “도무지 잘난 척을 들어줄 수 있어야지.” 그 후 난 자서전에 관해 상당한 알러지 증상이 생겨 아마 이 책도 자서전이란 걸 미리 알았다면 틀림없이 구입대상으로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닛 프레임은 확실하게 문제가 있는 사회부적응자이며, 동시에 시인이기도 하고 가장 분명한 것은 소설가다. 시를 쓰고 싶어 했으나 소설가로 성공한 사람. 그래서 그런지 프레임의 문장은 정말로 시 같다. 아름다운 구절들이 곳곳에서 만발한다. 그러나 정원을 물들이는 강한 원색의 장미나 튤립이나 나리꽃이나 칸나가 아니라 제방에 자잘하게 핀 들꽃 또는 저녁 무렵 강물 위를 비산하는 빛의 반짝임 같다. 딱 그 지점에 박혀야 할 강렬한 단어의 찬란함 대신 프레임은 문장들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독자와 함께 글의 느낌에 몸을 맡기는 기분이 든다고 하면 비슷할까. 그렇다. 강렬한 문장이나 단어의 발견은 젊음에나 맡기고, 이제 세월을 거진 살아 한가한 시골 소읍에 박혀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글은 분명 빛나지 않아서 오히려 빛이 나야 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서전’이란 글쓰기에 매우 회의적인데, 기억이라는 것이 당연히 내가 바라는 장면만, 양보한다고 해도 (그게 좋은 것이었든 절대 추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든)기억하기로 결정한 장면을 위주로 구성하기 마련이라, 모든 장면은 지금 생각하는 당시 시절의 굴절된 모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닛 프레임의 경우, 자서전을 쓰기 위해 숱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시골 소읍에서 세 권으로 구성된 자서전을 일 년에 한 편씩 쓴 형태라서, 과연 이것이 객관적일까.
 천만의 말씀.
 이것은 문학작품이다. 그렇다고 픽션도 아니다. 책의 마지막에 작가가 스스로 말한다. 자신은 거울의 도시, 현실을 투영한 삶의 모습이지만 결코 진실한 현실은 아니었던 모든 모습을 만들어왔고, 물론 자기가 만든 많고 많은 모습에 다 조금씩 자신의 그림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결코 자신의 진짜 생김생김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현실이 투영된 거울의 도시와 거울의 도시 주민들을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강제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질곡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이제는 오직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진정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 굳이 이걸 소설이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자서전이라 분류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무방한 문학작품. 이런 경우, 장르의 구분은 아무 소용이 없다.
 편편이 아름다운 글들이 담겨있는 아련한 이야기. 고정아의 번역도 교정 과정에서 조금의 실수와 어색한 점도 없지는 않으나(우리말에 생각보다도 ‘……된다’라는 표현이 드물다. 이런 표기는 대개 영어 수동태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면 자주 생기는 듯하고 어째 난 그게 거슬린다) 참 애써서 작업한 티가 난다. 무엇보다 자주 등장하는 시의 번역과, 원문은 모르겠으나 그걸 한글로 만들어낸 솜씨에 갈채를 보낸다. 아름다운 글을 더 아름답게 만든 것 같다.

 

 * 오늘의 독후감엔 책의 내용과 정말 좋은 부분을 거의 대부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갔다. 내가 좋은 책을 소개할 때 자주 이렇게 하는데 이런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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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정말 하기 싫고, 퇴근 시간은 멀었고, 별로 사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이리저리 책 검색이나 해보다가 아하, 이거 발견했습니다. 전 가지고 있는 책인데요, 동화책 한 권 빼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번역본으로 나왔던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책, 바로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입니다.

저는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읽기 전에 그레이브스란 작가가 있는 줄도 몰랐다가, 읽어보고는 이 정도의 작가를 몰랐다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일인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고 뭐 소위 역대급이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제 수준엔 아주 맞춤직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 유명한)칼리굴라에 이은 제4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노상 침을 흘리는 말더듬이, 절름발이, 흉측한 외모를 지닌 불운한 소생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살아남아 끝내 황제의 위에 오를 수 있었던 총명하고, 정의롭고, 진정으로 인민들을 사랑하는 황제였습니다. 아주 재미나게 읽었던 책입니다. 현재는 절판이고, 민음사와 원작 출판사 또는 역자 하여간 이 비슷한 계약문제가 걸려 다시 찍을 수 없답니다.

근데 이 책을 발견한 거 아닙니까. 알라딘 중고책으로 팔고 있더라고요. 이거 괜한 낚시 아닙니다.

단! 혹시 정말로 책을 구입해 읽어보시고 재미 하나도 없는 책이라 판정하신다면, 그건 제 책임 아닙니다. 흐흐, 저도 빠져나갈 구멍은 하나 만들어놔야 하겠습니다.

 

 

 

각 권 4천원 씩입니다. 내용과 비교하면, 거접니다, 거저.

 

 

 

* 흐흐흐. 어느 분께서 벌써 채가셨습니다. 어떤 분인지 전 알고 있는데, 안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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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604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아카넷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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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당신이 토마스 만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봐야 하며, 팬이 아니면 별로 그럴 필요 없는, 토마스 만 최후의 작품. 한 500쪽 넘게 읽다보면, 어, 이젠 슬슬 마무리로 접어 들어가야 하는데, 라는 걱정이 막 샘솟는 걸 느끼다가 550쪽이 넘으면 드디어 눈치를 채게 되니, 오호라, 중동무이로 끝날 거 같은 걱정. 그렇다. 미완성 작품이다.
 작가가 1905년 작품 구상을 해서 1954년에 <회상록 제1 부>를 발표하니, 무려 50년에 걸쳐 쓴 소설. 그러나 이런 말은 출판사가 책 팔아먹느라 하는 얘기이고, 어느 날 작가가(원래는 ‘만Mann이’ 라고 썼다가, 암만해도 읽는 분이 ‘만이? 무슨 만이?’ 등등 조금 헷갈리실까봐) 오래된 작품노트를 발견해 읽어보고 맞아, 이런 것이 있었어, 재미있군, 이야기를 보태 한 번 써볼 만한데, 라고 생각해 뒤를 이어 썼다고 봐야 한다. 이걸 정말로 가뜩이나 바쁜 토마스 만이 1차, 2차 세계대전과 스스로를 지독하게도 괴롭힌 자기 민족에 의하여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통과하면서, 그 와중에 <마의 산>, <파우스트 박사> 등의 걸작을 쓰다가도 계속 사기꾼 펠릭스의 스토리를 구상했다는 건, 말도 안 됨. 만이 1955년에 죽음을 맞이하니 사실 1부를 쓰고 나선 손가락에 펜 들 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이 작품이 중동무이로 마감하는 미완성이라서 별 볼 일 없느냐 하면, 말이 많겠으나, 여기서 제안을 하나 하자면, 그건 책을 읽어본 사람들만 논의하기로 하면 안 될까? 내가 읽어본 바에 의하면, 비록 작품이 말끔하게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즐길 만하다는 것.
 무엇보다, 토마스 만이 코미디를 썼다는 거, 이거 한 가지만 해도 대단한 거 아냐? 주인공 펠릭스 크룰의 소년 시절이 1부인데 그걸 읽자마자 책 뒤의 작가 연표를 찾아봤다.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펠릭스는 싸구려 샴페인 공장을 하는 아버지와 보통의 엄마, 나이 차가 좀 나는 누나와 함께 사는 부잣집 외아들. 거의 날마다 씀씀이 헤픈 아빠에 의해, 동네 난봉꾼들과 파티를 벌리고 가끔가다가는 돈이 무척 드는 불꽃놀이까지 하는 집이었으니 라인 강을 낀 시골동네에선 진짜 대단한 부자였던 건데, 서서히 망조가 든다. 망조란 것이 얼른, 후딱 진행이 되면 누구나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펠릭스의 아버지 크룰 씨는, 여전히 파티를 즐기고 싶고, 파리에 있는 현지처를 가끔 찾아가 즐기고 싶은 마음이 워낙 커서, 진짜 문제를 찾아 풀기보다는 유사 이래 이 방면에 관한 한 다른 민족보다 월등한 능력을 자랑했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급전을 빌어 당장의 난관을 풀어나갔던 거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덜이 났고, 더 이상 파티와 파리의 현지처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크룰 씨는 자기 심장에다 권총을 한 발 박아버리는 편을 택했다. 남은 가족은 펠릭스의 대부代父 쉼멜프레스터 씨의 우정어린 조언대로 누이는 배우의 길을 선택하고, 엄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하숙을 운영하기로 하고, 펠릭스는 학교부터 때려치우고 대부의 추천으로 파리의 가장 큰 ‘세인트 제임스 앤드 엘버니’ 호텔에 취직하여 훗날을 도모하기로 한다. 반면에 작가 토마스 만은, 내용은 좀 다르지만, 북독일 항구도시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다가 아버지가 죽자 곡물상회를 정리한 다음, 역시 학교부터 때려치우고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뮌헨으로 주거를 옮긴다. 소도시 부잣집 아들 → 아버지의 죽음 → 가업 청산 → 학교 자퇴 → 대도시로 이주. 어때, 좀 비슷한 거 같으신가? 작품을 구상해서 스케치 해본 것이 1905년. 그의 나이 30세. 자신의 청소년 시절하고 비슷하게 그림을 그린 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앞에서 말했다. 이 작품은 명성 높은 작가 토마스 만이 쓴 ‘코미디’ 즉, 희극작품이라고. 펠릭스는 책의 제목처럼, 소년시절부터 사기꾼이 될 대단한 싹수가 보였다. 누군가를 보고 거의 완벽하게 흉내 내는 거, 아버지 서명을 몇 번 연습해보고, 오 하느님, 이거닷, 학교 땡땡이치고 결석 사유서에 아빠 서명해 담임선생에게 내는 거, 바이올리니스트를 유심히 바라본 다음에 거의 완벽하게 운지와 운궁법을 모사해내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활에 바셀린을 왕창 발라 활이 현을 긁어도 아무소리 안 나게 만든 다음 진짜 바이올리니스트와 듀엣으로 연주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고급 휴양지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거, 열네 살에 하녀 게노베바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딱지를 떼게 해주는 거(펠릭스야, 넌 그냥 누워만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등등. 전문 사기꾼의 시각으로 보면 ‘영재’ 수준이다. 떡잎부터. 거기다 점점 자라서 청년이 되자 부드러운 금발에 창백한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만일 옷만 잘 입었다 하면) 이 남자의 외모만 보고도 기꺼이 자빠질 준비를 마치는 수준의 신체조건까지.
 기가 막힌 거짓말을 해서 (아이고, 이 대목이 얼마나 재미나는지!) 병역 면제를 받기 전에 프랑크푸르트의 젊디젊은 백수 앞에 나타난 전문직 아가씨 로짜. 그녀는 슬슬 사기꾼 계에 영재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펠릭스에게 최후의 필살기를 가르쳐준다. 바로 방중술. 이제 갓 스무 살이 됐을 뿐더러 병역의 의무가 없는 펠릭스는 당시 세계의 수도 파리로 진출한다. 비록 하루 열여섯 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엘리베이터 업 앤 다운 맨 Up & Down man에 불과하지만, 어느 옷을 입어도 광채가 나는 펠릭스의 몸에 천한 신분임을 나타내는 대신 말끔하게 보이는 제복이 걸쳐지니, 펠릭스의 나이보다 꼭 두 배를 자신 귀부인이 나타나, 드디어 로짜를 사사한 실력을 과감하게 펼쳐 보인다. 여류작가이기도 한 귀부인을 밤새도록, 까무러치게 만들었을 거 같지? 천만에. 나이 마흔이 된 변기제조업자의 사모님이자 소설가인 우플레 부인은 다른 건 몰라도 성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아, 다른 모든 여인에겐 왕성하지만 아내 앞에서만 유독 발기부전이 되는 우플레 씨 때문에 잔뜩 욕구불만에 찼던 것을 한 방에 다 쏟아내는 데, 여기다 대고 젊음 하나 믿고 덤벼든 펠릭스, 쌍코피 나는 건 뭐 난 책임 안 져. 일찍이 파리에 입성하는 순간 세관검사 때 우플레 부인의 보석상자를 슬쩍 훔쳐 죄책감까지 있었던 펠릭스는 코피를 쏟건 말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끊임없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참 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토마스 만이 이런 순간(앗싸, SM이 뭔 줄 아시나?)을 묘사했다는 거, 실감 나셔? 근데 진짜다. 섹스를 포함하지 않는 사기꾼 소설을 어떻게 읽어! 그걸 토마스 만 선생께서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쌍코피 터뜨리며 밤새 녹초가 되도록 봉사한 대가로 펠릭스는 이 소설이 무진장 긴 장편소설이 될 만한 자금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는데, 이처럼 순간순간 토마스 만이 다음 장면을 위해 배치해 놓는 이런 장치들, 정말 독자로 하여금 기가 넘어가게 만든다.
 독후감 쓰면서, 작품의 스토리를 써내려가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스토리를 몽땅 적어놓을 거 같다.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하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다시 첫 얘기로 돌아가, 만일 당신이 토마스 만의 팬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고, 아니면 마음대로 하시라. 이렇게 얘기하는 건, 책값이 보통이 아니라서. 정가가 25,000원. 허용 할인율이 10%가 아닌 5%. 그래서 현금 줘도 23,750원. 눈알 나오지? 큰 판형에 본문만 583쪽. 다 합쳐 600쪽. 다른 출판사가 이 책 찍었으면 두 권 아니었을까? 그거 감안하시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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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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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씨 451도면 섭씨로 몇도? 233도. 이 온도가 뭘 의미하는지, 누군가는 책을 불사를 때의 온도라고 하는 거 봤다. <화씨 451>을 읽어보면 그것도 말은 된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는 그저 책을 태워버리는 순간 등유가 콸콸 부어지는데, 등유가 어디서 부어지느냐 하면, 방화수放火手가 짊어지고 있는 통 안에서 나온다. 이때 통에 흰 페인트로 쓰인 숫자가 바로 451. 어, 그가 머리통을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 쓴 헬멧에도, 불지를 때 입는 작업복의 소매에도 역시 451이라 씌어있다. 아하, 신기한 이름의 관청 방화서放火署의 고유번호가 451이구나! 그럼 방화서란 기관은? 처음 들어보시지? 몇 십 년 전엔 소방서라고 했었는데, 이제 모든 건물은 방화防火 처리가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지어지기 때문에 소방대원이 필요 없어지고, 필요한 것은 국가시책에 따라 집안에 서재를 마련해서 책을 보관하고 있을 경우, 모든 책과 함께 (방화防火 설비를 파괴한 뒤) 집까지 통째로 태워버리는 사람, 즉 방화放火하는 공무원을 방화대원 또는 방화수라고 하는 것. 같은 방화라도 방화防火는 불나는 걸 막는 일, 방화放火은 불 지르는 일을 일컬으니 읽는데 주의가 필요함. 사실은 같은 방화가 아니다. ‘방’을 발음할 때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글을 쓸 땐 표기방법이 없으니 이것 참. 하여튼 알아서 읽으시라. 원래 훈민정음엔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즉 사성에 관한 표기가 있었는데, 쩝. 글씨 옆에 점찍은 거 보신 적 있을 것이다. 그건 그거고.
 그런데 뭐를 태워? 맞다, 책. 잠깐 다른 얘기.
 이 책을 번역한 박상준(혹시 민음사 사장? 아니겠지)은 80년대쯤에 ‘불량만화’와 ‘불법비디오’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불을 싸지르는 광경을 보면서, 위법성과 유해 여부와 관계없이 수많은 ‘이야기’가 없어지는 걸 안타까워하면서 중국의 분서갱유와 나치 독일에서 퇴폐문학에 대한 화형식을 떠올렸다는데 (옮긴이의 글, 6쪽), 왜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을까? ‘불량만화’는 어떤 걸 얘기하는지 모르겠으나, ‘불법비디오’는 둘 가운데 하나다. 포르노 아니면 불법복제물. 포르노? 좋다, 번역 문학가가 포르노의 자유를 외치는 건 타당하다. 나도 왜 대한민국의 성인들이 떳떳하게 포르노를 볼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해하는 족속이니까. 문제는 불법복제물. 출판인 혹은 출판 산업의 일원이 그걸 분서갱유나 책 화형식하고 같은 선상에 올려놓으면 안 되지. 안 되는 정도가 아니고 큰 문제다. 아, 당장 자신의 입에 들어올 밥을 뺐기는 건데 말이야. 지금은 중국의 불법복제로 큰 피해를 입고 있지만 1980년대까진 대한민국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불법복제국가였던 거, 기억나시지?
 역자가 이런 얘길 한 것은, 이 책 <화씨 451>이 디스토피아의 미래,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분서갱유를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가 내분이 생겨 내란 중인지, 아니면 다른 대륙과의 피할 수 없는 전시상황을 맞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전제사항이 1990년 이후 북미에서 두 차례의 핵전쟁이 있었고, 그 다음에 권력을 쥔 정부가 국민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바지도 못하는 수백만 종의 책의 독서와 보관을 금지시켜버렸다. 그 다음부터 위에서 말한 소방대원의 후예를 방화수로 만들어 책을 보관하고 읽는 사람들을 적발하며 동시에 책들만 봤다하면 등유를 넉넉하게 끼얹고 확 불을 싸질러버려 왔던 것. 방화수들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월수금, 이렇게 일주 3일만 일을 하는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니, 슬로건이란다.
 “월요일에는 밀레이(미국의 시인, 역자 주)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22쪽)
 책이 없는 국가. 그 속에 살아야 하는 국민들은 어떤 상태가 될까? 스포츠! 당연하다. 스피드! 당연하다. 이제 굉음을 내며 시속 3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질주하다 차에 치어 죽거나 차가 뒤집혀 죽는 건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원자폭탄 한 방에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는 꼴을 봤으니 그냥 한두 명 죽는 일은 사건도 아니다. 주부들의 제1차 목표는 거실의 네 벽에 몽땅 벽걸이 TV(그땐 LCD 뭐 이런 아이디어가 없어서, 놀랍게도 굉장히 얇은 브라운관 TV를 벽에 거는 수준이다)를 걸고 하루 종일 TV와 쌍방향 소통을 하며 지내는 것. 주부들은 모든 벽을 둘러싼 TV의 출연진들과 친척관계를 맺은 것처럼 생활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웃 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정원이나 테라스 같은 건 유행을 핑계로 사라지고, 늦게 핀 민들레꽃을 이야기하다가, “꽃을 턱에 문질러 노란 색이 물들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래요.” 뭔가 어디서 읽은 듯하거나 사람의 정서, 심상을 흔들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거나 사라져버리는 미래의 나라. 며칠 전에 쓴 독후감 자먀찐의 <우리들>에서도,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익숙해진 바로 그런 디스토피아의 재현.
 그런데 더 이상 <우리들>, <1984>, <멋진 신세계>는 별로 읽히지 않는 반면, 앞의 세 작품보다 나을 것 없는 <화씨 451>의 인기가 갑자기 확 불타올랐던 건 왜일까? 왜긴 왜야, 그라운드 제로, 뉴욕 무역센터 빌딩 테러에 대한 공포감이, 북미대륙에서의 핵전쟁을 전제로 한 소설이면서도, 새로운 핵전쟁이 다시 북미,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썼으니까 그렇지. 아하, 맞아, 이런 작품이 있었지, 새삼스레 깨달아 영화로도 만들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도 하고 그랬던 것이지.
 다시 얘기한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가상의 디스토피아 소설. 연달아 디스토피아 작품을 읽으니 지루하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든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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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7-12-27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들어봤던 책이네요

Falstaff 2017-12-27 10:50   좋아요 0 | URL
이 양반 좋아하는 분들은 엄청 열광하더군요.
흥미 있으시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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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편의 희곡이 담겨있다. 처음 읽는 스페인 희곡. 극작가 바예호는 글도 잘 쓰지만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는데 스페인 내란 때 아버지와 형이 사형당하고 자신도 공화파에 가담하는 바람에 콩밥을 먹었던 전력이 있다. 이때 감옥에서 희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출소를 하자마자 드라마 창작에 힘을 쏟아 제일 처음으로 쓴 작품이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이고 두 번째 작품이 <어느 계단의 이야기>이란다. 이 두 작품을 문학상, 스페인 판 신춘문예 비슷한 것에 공모를 해서 둘 다 최종심까지 가는 영광을 차지했고, 그 가운데 <어느 계단의 이야기>로 상을 받았단다. 이 정도면 한 마디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다.
 물론 반파시즘 운동으로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정부 편이었겠지만, 스페인 내전에 관한 작품들을 잘 읽어보면 공화정부군은 거의 대부분이, 아니면 적어도 과반수이상이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실제로 코민테른의 지원이 없었다면 히틀러 정권으로부터 막강한 무기와 전투기를 제공받았던 프랑코 군대에 그나마도 대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바예호의 두 작품에 일정 정도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들어 있다고 ‘옮긴이 해설’에 씌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선 사회주의적인지 자본주의적인지 그런 걸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냥 인간살이를 상징하는 기호로 해석하기만 하면 된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배경은 현대적 시설을 한 맹학교다. 주목. ‘현대적 시설’을 겸비했다는 건 이 맹인 학교가 맹인 가운데서도 다분히 부르주아 성향을 갖춘 부잣집 자재만 다닐 수 있는 기숙 사립학교란 얘기. 학생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최상급의 의상으로 꽉 짜진 드레스코드를 지키고 있으며, 이들이 비록 맹인들이지만 자신이 빛을 감지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거리에서 학교로 들어서는 순간 이들의 더듬이 역할을 했던 지팡이를 휙 내던지고 완벽하게 학습된 공간 안에서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정상인과 다름없이 즐거운 학교생활을 누리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선천성 맹인. 낳자마자 맹인인 상태라서 빛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다. 그냥 그런 맹인들의 에피소드라면 당연히 드라마가 아닐 터. 이런 상황에서 역시 선천성 맹인 소년 이그나시오가 이 유쾌하고, 언제나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한 학교에 들어오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불행의 근원은 거의 언제나 호기심. 이그나시오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 아무 어려움 없이 학교 안을 보행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아 지팡이를 버리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그나시오는 불행하다. 본다는 것, 사물의 형태를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자기의 망막 앞에 펼쳐진 어둠과 거의 똑같다고 들은 밤하늘, 그 속에서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은 과연 어떻게 반짝인다는 것일까, 별이라는 건 얼마나 아름답기에 숱한 시인들의 찬미를 받아왔을까, 이 모든 것을 알 도리가 없어 이그나시오는 불행하다. 그의 불행과 우울은 천천히 그러나 급기야 나머지 학생들에게도 전염되어 그리도 즐겁던 학생들 사이에 빛을 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과, 여태까지의 즐거움을 계속 누리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생기고, 자연스레 본다는 것의 궁금증과 못 본다는 것의 불행을 체감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많아진다. 못 보는 것에 대한 불안. 여태까지는 쾌적한 공간이었지만 새로 생긴 사소한 장애 하나만 있어도 보행에 방해를 받아야 한다는 불안. 언제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1)하는 것이라 학교 내에서 이그나시오의 위상은 급기야 교장을 능가하고 많은 여학생들마저 그를 사랑하게 되거나, 남자친구가 이그나시오를 추종하느라 아름다운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느끼고는 질투를 감추지 못한다. 그 정도다.
 작용이 있으면 뉴턴의 제3 법칙에 의하여 반작용이 있는 법. 누군가는 이그나시오에게 대단한 반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여태껏 누렸던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으며, 이들이 행위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처음엔 이그나시오 본인이 원했지만 자신들의 만류로 그리되지 않았던 것, 이그나시오 스스로의 발로 학교를 나가게 만드는 일. 근데 어떻게? 이미 맹인인 교장선생이 앞을 볼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 이유가, 부인 도냐 페피타가 정상인과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을 대단히 못생긴 여성이기 때문이리라는 걸 학생들에게 공포해버린 이그나시오. 어째 결말이 불안하시지? 그래, 당신 생각대로 된다. 하지만, 당신 생각대로 된 다음이 문제이자 진짜 중요한 결말. 그건 안 알려줌. 이래봬도 바예호가 20세기 스페인 드라마의 거장이라, 진짜 중요한 결말은 읽는 사람이 스스로 내려야한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두 번째 작품은 <어느 계단의 이야기>. 제목이 ‘계단의 이야기’라고 해서 계단을 의인화, 첫째 계단이 둘째 계단에게 수다를 떨고, 둘째 계단은 거기다 살을 붙여서 셋째 계단에게 전하고 셋째는 넷째에, 넷째는 … n번째는 n+1번째에…, 이런 거 아니다. 스페인의 중하류층이 사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아파트 주민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소, 계단에서 이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어려운 것을 도와주고, 이해하고, 오해도 하고, 질투도 하고, 싸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애부터 일단 하나 만들기도 하고, 이리 사는 모습을 그린 것. 그렇다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만 열라 떠올리시면 곤란하다. 이 작품이 앞에 소개한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누르고 1등상을 먹은 작품인데 그리 녹록하겠어?
 무대는 1막이 1919년, 2막이 1929년, 3막은 1949년의 같은 장소로 되어 있다. 그러면 1막에서 청소년기를 맞은 이들이라면 2막에선 찬란한 성인으로 삶의 전성기, 아니면 가장 비참하고 남루한 부적응을 겪고 있을 것이고, 3막에선 잘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스페인 언어를 쓰는 인류들이 애 하나는 얼른 얼른 낳는데 선수잖습니까? 이 정도면 대강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 두 작품 다 스토리를 써놓으면 돈 주고 책 사 본 보람이 없어서.
 다만 하나. 두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949년. 스페인에서 프랑코 파시즘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라서 바예호는 정부의 무지막지한 검열을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법으로 피해가야 했을 터. 그리하여 아시아 사람으로는 알아채기 힘든 코드가 숨어 있는 거 같다. 난 그런 묘사가 어디에 있는지 별로 감을 잡지 못했으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읽으면서는 며칠 전에 독후감을 쓴 자먀찐의 <우리들>에서의 규격화된, 자유 없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과 비슷한 압박감을 느껴야 했음을,




1)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무지 지루한 영화의 제목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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