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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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넘겨 본문으로 접어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출간에 부쳐”란 작가의 말이다. 흥, 작가는 처음부터 독자가 속아 넘어가기 바란다. 진짜로 이 작품이 자기 친구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쓴 일기인 것처럼 꾸미는데 여념이 없다. 뭐 정말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구라일 걸? 그러나 이 서문 비슷한 작가의 말 역시 다니엘 페나크의 재미난 소설 <몸의 일기>의 일부라고 읽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지는 않고, 글쎄 좋은 일도 아니고, 그래, “나 책 좀 읽은 몸이야”라고 폼 잡을 데만 효과가 있겠다.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면, 어느 날 작가의 ‘리종’이란 이름의 여자친구(애인 말고 그냥 친구 있잖아, 친구)가 눈을 벌겋게 하고 찾아와 며칠 전에 세상 뜬 평소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자기 아버지의 유물인 ‘몸에 관한 일기’를 좀 읽어보라고 했단다. 리종의 눈을 보니까 밤을 패서 아빠의 일기를 읽은 듯해서 그러마고 하고 반듯한 글씨로 쓴 일기책을 열어보고는, 에그머니, 너무 재미있는 거라, 자기도 꼴딱 밤을 새워 읽고나선 책으로 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도 읽어보게 했다는 거다. 이렇게 초를 쳐 놔야 책, 특히 프랑스의 1923년 10월 10일 생 교육 잘 받은 인텔리 남자의 일기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한테 먹혀들 수 있단 얘기지. 그런데, 굳이 잘난 척하느라 나처럼 이리저리 골 아프게 따질 필요는 없다. 작가가 말한 대로 그냥 그렇구나 하며 읽는 것, 즉 작가의 의도대로 따라 읽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독법일 것이긴 하다.
 아빠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독일군의 독가스를 흠뻑 자시는 바람에 허파에 큰 문제가 생긴 채 귀환한다. 어디서 본 거 같다고? 그려, <티보 가의 사람들>에서 티보 가의 맏아들 앙트와느 역시, 동생 자크가 그토록 반대했던 1차 세계대전에 의무장교로 참전해 독가스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다(이 책은 꼭 읽어보셔야 혀!). 여기서 작가는 기가 막힌 꼼수를 부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일기의 주인공 ‘나’의 아빠(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부친을 “아빠”라고 호칭한다. 여든이 훨씬 넘어서도)가 원래부터 대단한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지긋지긋한 여자인 엄마가, 오랜만에 악당 여자로 등장해서, 아빠와 나를 들들 볶아내는 와중에도, 몸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를 덮은 아빠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나의 지성과 감성을 놀라운 속도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아빠가 죽은 다음 입학한 학교에서 교사들이 '나'가 쓰는 단어와 똑 부러지는 문법, 문장에 기가 막혀 하는 수준. 어린이의 지성으로는 사실상 지독하게 예외적이고 그래서 비정상이지만, 왜 이렇게 설정을 했을까. 사실 이런 거 자꾸 따지면 재미나게 책 읽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그렇게 해 놓아야, 또래에 비해 놀라운 지성과 글 쓰는 실력과 습관이 있는 것이 타당하고, 어려서부터, 십대 초반부터 자기 몸을 탐구하는 목적,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변적 일기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적어나가는 일기를, 거의 지적인 어른의 솜씨로 써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가 12세가 되어 이제 보이스카우트 대원으로 캠핑을 가서 모의 전투를 하다 포로가 됐는데 적군은 나를 나무에 묶어 놓고 철수를 해버렸다. 숲 속에 인적은 없고, 정적 속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들리고, 아니, 그것보다 묶인 내 두 발 일 미터 앞에 뚫려 있는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바글바글 수백만 수천만의 개미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어서, 어느 순간 그것들이 내게 접근하더니 내 몸의 모든 빈 곳에 침입해 나를 자디잘게 뜯어 먹을 수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했고, 하필이면 순간 개미 두 마리가 발끝에서 시작해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거 아닌가.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이 배운대로 절대로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나를 나무에 묶어 놓았고, 대원들의 인기척은 아무 곳에서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고, 개미의 침략과 포식에 대한 극한 공포는 얼마 살지 않았지만 여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크고 높은 비명을 지르게 했으며, 눈앞이 완전히 깜깜해지고 머리통은 빙글빙글 돌며 귀까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하자, 순간, 그만 바지 속에다 그대로 똥까지 싸놓았던 것이다. 아, 그 쪽팔림이라니! 차라리 숨을 멈춰 죽는 게 났겠다고 생각했으나 절대로 숨을 멈춰 죽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나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완벽한 절망 속에서, 열두 살의 소년이 끔찍하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코 한 번도 엄마를, 나를 직접 낳아준 엄마를 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고, 캠프장에서 날 데려온 엄마 역시 보름이 지나도 화를 풀지 않은 채 욕실의 거울 앞에서 내 어깨를 아프게 쥐고는 “거울을 봐, 네 모습을 보란 말이야”라고 날 흔들어댔으나, 내 눈꺼풀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나무에 묶여 비명을 지르며 똥을 싸지른 다음 날부터 나는 내 몸, 오직 내 몸의 현상에 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죽을 때까지 75년 동안.
 책에서 ‘나’는 1920년대 초반 태생으로 요즘 부모처럼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으로 시리얼을 먹을 수 없는 세대. 반드시 세수와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나서야 아침 식탁에 앉을 수 있으며, 구스타프 말러를 좋아하는 척하지 않으면 지식인 그룹에 포함될 수 없었던 첫 세대는 가히 초기석기시대의 인류였으며,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레지스탕스 조직에 들어가 왼팔을 거의 잃을 뻔한 부상도 당했으나 ‘팡슈’라는 활달한 여자 레지스탕의 도움으로 정상을 되찾았고 영광스럽게도 드골 장군으로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의 보답으로 훈장까지 받았다. 이후 학술연구를 계속하다 대기업의 그룹 전체 인사담당 사장 정도의 자리에 있다가 은퇴하고 늙어죽는 인물. 한 마디로 평생 잘 닦인 곧은길을 곧바로 걸어간 복 받은 인간. 대강 그림이 그려지시지?
 그러나, 이런 호강에 겨운 인물도 허약한 몸을 근육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규칙적으로 했으며(쉬울 거 같지? 한 번 해보셔. 하루도 빼지 않고 말씀이야), 어느 날 어려서부터 날 직접 키운 거나 마찬가지인 비올레트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분수 가에 풀이 돋고(생식기 주위에 털이 났다는 뜻), 조르주 삼촌의 설명에 의하자면 이제 본격적인 남성으로 자격이 생긴 기념할 만하게, 아침에 일어나니 내복과 담요에 빳빳하게 풀이 먹여져 있었으며, 그때부터 여인을 향해 날마다 숨 막히는 갈증에 시달리고는 했다가, 한 명의 레지스탕으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갈증을 참아가던 어느 날,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고,  전시엔 야매 의사였던 팡슈가 준 그간의 노고에 대한 선물로 건네 , 아름답고 포동포동한 육체를 가진 퀘벡 출신의 용사 쉬잔에 의하여, 드디어 딱지를 뗀다.
 일기는 이후 자잘한 종용의 발견과 제거, 이러저러한 과정을 걸친 결혼과 출산, 노화, 노화의 심화, 백내장과 수술 후의 개안, 또다시 노화, 계속되는 노화에 따른 몸의 변화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한 남자의 몸. 그 세계.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여성들이 좀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그건 뭐 전적으로 독자들 마음이니 굳이 권하지는 않겠다. 그동안 숱하게 읽은 일기체 소설들. 그것들의 공통점은 거의 감성적인 일기다. 감성적인 일기가 아닌 몸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 그러나 일기라는 형식이 어쩔 수 없이 포함하는 사적인 감정이 일부 들어간 소설. 이렇게 얘기하니까 별로 재미없을 것이라 생각하실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 무지 재밌다. 하루에 완독은 백수가 아닌 현대인으로는 불가능에 가깝겠으나 길게 잡아 하루 반이면 485쪽 거뜬하게 독파할 수 있게 곳곳에 지뢰를 묻어 놨다. 전시에 ‘나’의 별명이 지뢰. 지뢰가 터져 왼팔이 거의 날아갈 뻔해서 팡슈가 ‘지뢰’라는 별명을 붙였다나.
 여기서 나오는 재미난 장면 하나 소개한다. 이게 제일 재미나서가 아니라 짧아서 옮기는 것일 뿐이다.


 “사모님도 스트링을 입고 있지 않나요?
 뭐라고요?
 스트링 말이에요, 끈으로 된 팬티요. 클로델이라면 ‘정오의 분할’이라고 불렀을 만한 옷이죠. 브라질 사람들은 또 ‘치실’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고.“  (414쪽. 클로델은 프랑스의 극작가)


 더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이 나온다. 남자들 소변보는 얘기 마누라한테 해줬더니 껌벅 넘어가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작가 페나크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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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시인선 84
김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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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시집이라고 한다. 앞서 시집 두 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독자들한테 어필했다고 해서 이왕 읽는 거 요즘에 나온 시집을 골라 읽었다. 유명 시인이 내 친구한테 얘기했고, 내 친구가 다시 나한테 옮긴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나이 먹으니 시가 써지지 않는다. 먹고는 살아야겠고, 시는 안 되고, 소설을 써볼까 궁리중이다.” 재작년 표절 시비로 시끄러운 와중에 국내 소설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조정래가 신문에 기고하기를, 작품이 안 써질 때가 있는데 그때가 은퇴할 시기라고. 왜 이 말을 하느냐하면, 신작 시집이 전에 낸 책들보다 좋을 확률은 별로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하여. 실제로 좋아하는 여류시인 가운데 나이 50 넘어가면서 확 글빨 혹은 시빨 (아, 어감 안 좋다. 그래도 욕하는 거 아니니까 참고 들어주시면 고맙겠다) 떨어지는 걸 확인한 적도 있다. 그 시인이 누구인지는 안 알려줌. 한때 워낙 좋아했던 시인이라서. 얘기가 또 삼천포 행인데, 왜 이런 이야기까지 나갔을까? 아하, 작가를 알기 위해 작가의 최근작을 읽어보는 일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걸 잠시 잊었단 말을 하려고 했다가 애먼 곳에 까지 갔다. 앞에 써놓은 헛소리가 김민정의 경우에도 해당한다는 얘긴 절대 아니다. 시인 및 시인의 팬들께선 감안해주시라. 시인의 나이 딱 마흔이면 시인으론 그야말로 절정기라 할 만하니까. 어쨌거나 이 시집은 김민정이 2016년까지 쓴 시들을 모아놓은 것이니 최고 절정기의 시편들이 모여 있지 않을까 싶다.
 시인이 1976년 생. 그러면 딱 만으로 마흔. 불혹? 그건 저기 노나라 때 이야기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마흔은 “모든 죄가 다 어울”리는 나이,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법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1)리는 나이라서, 이젠 시인이 스스로 말했듯이 “날달걀에 비빈 밥을 더는 비려하지 않을 나이 마흔이면 / 모르긴 몰라도 똥 하나는 기차게 싸”는 시절을 만났다. “앙큼하고도 알뜰하여라 / 상큼하고도 살뜰하여라 / 하여간 처녀들이란,”이라고 노래(또는 질투)하면서 “그래 처녀들아 / 너희들은 오늘도 네 안의 그 귀여운 짐승들을 / 진동 호출벨 뒤에 슬쩍 잘도 감춰”놨다고,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은근히 나이 먹은 척을 한다. (<소서라 치자>) 신기한 것이 마흔이란 나이. 마흔이 되면 그 후 언제라도 이젠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은 (건방진)생각이 든다. 시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나이 마흔 먹은 사람의 권리이지 시인 잘못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디자인됐으니까. 근데 정작 마흔 살이 되니까 “이불집 간판을 빤히 올려다볼 때였다 /…/ 꽃자리를 왜 꽃자지로 읽었을까마는 / 찌른다고 해서 죄다 무기가 되는 게 아니란 걸 / 이미 알아버린” 나이라는 것도 알게 되더라는 말씀. (<시집 세계의 파편들>) 다분히 여성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는 마흔 살 먹은 시인의 눈에도 그게 꽃자지라면 찌른다고 해서 다 무기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지 내가 용케도 알아버린 건 / 운전석 유리창을 동시에 내리는 아저씨들이 / 있다 있어서였다 / 수컷은 그때 그 순간에 잘도 싸기 위해 뭔가 / 참아주는 의뭉함이 늘 있는 모양”인 것. 택시 운전수들을 통해 남자는 한 번의 사정을 위해 의뭉스레 위장한 도사림을 갖고 있는 짐승(수컷)인 것을 알아챈다. 유사이래, 저 멀리 고구려의 태조 “주몽도 공정하게 몽정을 했을 거니까 / 기사 아저씨 사타구니께 벅벅 긁는 소리에 / 잠시 귀를 빌려주기는 한다만 워 아주 적당히 / 1588-8910 그때 그 명함의 고딕체 / 다신 없을 것 같은 얽힘으로 곧음 그 믿음으로”(<오늘 하지>) 주몽과 몽정은 다분히 말장난이라 읽히지만 시인이 탄 택시의 기사새끼는 도로 옆에 우연히 같이 서게 된 택시 기사새끼와 창문을 내리고 욕설이 섞인 성적 농담을 걸쭉하게 쏟아낸 다음, 지금 승객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사타구니에 쑥 집어넣고 벅벅 긁어대고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한 여류시인은 자기가 부른 ‘주몽콜’의 전화번호가 고딕체로 씌어있는 명함을 손에 쥐고, 명함을 향한 허약한 믿음으로 순간을 견딘다. 제목 <오늘 하지>는 택시 기사가 시인더러, '오늘 나하고 한 번 하지?' 할 때의 하지가 아니다. 1년 24절기 가운데 낮의 길이가 가장 긴 성 요한 축일, 저 멀리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노래시합 하는 날이다. 시인은 절기 ‘하지’의 음가를 갖고 남성에 의한 일상적 폭력을 장난스레 폭로하고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게 택시 기사의 사타구니가 아니고 꽃자지면 절대 무기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 결국은 권력이 문제다. 밀폐된 택시 공간에선 기사 새끼가, 다른 열린 곳에선 ‘꽃자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중년 여류 시인이. 권력이 문제다, 사는 게 다 그렇듯.
 24절기는 이 시집의 중요한 줄기 가운데 하나다. 우수, 춘분, 곡우,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상강에 이어 동지까지 죽 나열되어 있다. 혹시 시인은 절기에 시 하나 씩을 써놓았지 않았을까? 1년에 24절기니까 보름에 시 한 편 쓰기를 특정 해의 목표로 삼고 있었을지 누가 아나. 그랬을 거 같은데, 아니면 말고. 앞에서 봤듯, 하지를 <오늘 하지>로 표기해서 누구나가 다 알 수 있는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상적이고 폭력적인 성적 문제를 제기했듯이, 모든 절기에 다 수수께끼 하나씩을 숨겨놓았다고,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이원이 주장하고 있다. 나도 이원의 글을 보고서야 알았는데, 곡우의 경우 <엊그제 곡우>라는 제목의 시를 잠깐 보자.


 

 엊그제 곡우



 4월 16일
 어디서 왔는지 모를 내 새끼가
 어딘지 모를 그곳으로 갔다
 …… 내가 침묵하는 거
 너 혹시 들었니? ……

 

 5월 6일
 우리 이모가 죽었는데
 너희 이모도 죽었구나 (중략)

 

 4월 16일
 네 생일인데 네가 없구나
 그리움을 드리움이라 썼다가
 유치해서 빡빡 지운다지만
 네가 없구나 얘야, (후략)

 

 

 이원의 발문을 읽고 나서야 곡우가 언제쯤인가 찾아봤다. 4월 20일 경이다. 그럼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있던 날과 5월 6일, 이모가 죽은 날 가운데 있다. 그 사이에 비가 내린다. 이 비가 ‘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비’가 내린다는 곡우穀雨에서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을 향한 울음 곡우哭雨로 바뀌는 중의를 띈다고 한다. 난 세월호 사건의 날자를 기억하지 못해 참 재미 없게 시를 읽었다. 시 감상하는 것도 힘든다. 이럴 때 각주를 달아 4월 16일의 의미를 알려주면 어디 덧나? 야박하게 말야.
 김민정의 이번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어보면 시들은 길고, 시어는 (발문에서 이원은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부인하지만)가끔 거칠고, 간혹 노골적이기도 하다. 올해 읽은 몇 권의 여류시인이 쓴 시집이 남자시인이 쓴 시집보다 이런 경향이 더 많아진 걸 보니 여자들이 세지긴 세졌다. 나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은 일단 긴장하시라. 함부로 까불지 말고. 손조심, 눈조심, 특별히 거기 조심 확실히 하고. 근데 이런 애국적인 장면도 등장해 나로 하여금 대한민국 여성들의 기개에 즐거이 박수치게 만들기도 한다.



 시집 세계의 파편들



 첫 장면
 중국 샤먼에서 시인 안치와 대담을 했다
 그녀는 나보다 일곱 살이 위였다.
 (중략)
 입 좀 풀자고 한 얘기였는데 그녀가 쌩을 깠다
 아무리 내가 병신 같은 년이라지만
 자존심이 아니라 애국심이 문제 같았다
 (중략)
 짠 년에 촌년에 센 년이 어떻게 중국어로 전해졌는지
 실력 좋은 통역이라더니 거침이 없었다
 (중략)
 자매애…… 함께 화장실을 가도 괜찮다는 사이라니까
 우리는 재래식 와변기마다 쪼그려않을 수 있었다
 고요 또 고요 연이은 고요
 어떤 망설임이 우리의 조준을 이토록 길게 끄는지
 앞서거니 뒤서다가 결국엔 너 터지고 나 섞이는 소리
 쏴―
 죽어도 오줌발로는 지고 싶지가 않았다
 3박 4일 동안 족히 서너 번쯤은 됐을 거다
 그녀는 모를, 나만 아는
 그녀와 나만의 오줌발 내기
 (후략)

 


 중국 전래 화장실 아시지? 칸막이 없이 그냥 변기 구멍만 줄지어 몇 개 뻥 뚫려 있는 거. 요새 시진핑 주석께서 이거 없애라고 지시를 때려 전국에 걸쳐 난리가 났다는 신문기사 못 보셨나, 하여간 거기 두 여인네가 엉덩이를 허옇게 까고 앉아 서로 묻어가려고, 그 우라질 놈의 소리를 좀 묻어가려고 참고 참아, 고요, 또 고요하다가 그냥 쏴― 해버리는데, 이왕 소리가 시작하니 거기서 지고 싶지 않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기개. 아, 정말 대륙을 넘는 웅혼한 기상 아니냐.
 문제는, 당연히 진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문제라 전혀 심각하지 않겠지만, 이 시 <시집 세계의 파편들>의 경우 말고, 시집 전체를 볼 때, 단어 가지고 과하게 희롱을 하지 않았나 싶은 거다. 시인이 언어를 가지고 노는 것이 직업이긴 하지만 세상 어느 것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단어,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어쩔겨? 시집에 들어있는, 시인이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작가들, 박상륭, 구상, 이성복, 이성부, 이이들이 과연 말 가지고 장난을 치던가? 이렇게 말하면 시인은 “나더러 저 푸른 초원 위의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시”(<시의 한 연구>)를 쓰라고 말하는 겁지비? 라고 시비할 수 있겠지만, 글쎄,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 저 푸른 초원 위의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시의 대척점에 말장난 가득한 시편들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뭐 아마추어의 아주 사적인 말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마시고.


 



1) 허연, <슬픈 빙하시대 2>에서 따옴.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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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1
쟈핑와 지음, 김윤진 옮김 / 이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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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목은 <가오싱高興>. 아주 신이 난 상태를 뜻한다. 책의 주인공 류가오싱劉高興의 이름이다. 무대는 시안西安. 일찍이 진나라 시황 영정嬴政이 천하를 통일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한가운데(로 생각했던 곳)에 도읍을 정했으니 이를 일컬어 창안長安이라 칭한 후 당나라 시대까지 무려 1,000년간 세계최고 강국의 수도로 이름을 떨치다, 1943년에 이르러 시안으로 개명을 한 곳. 주인공 가오싱은 상저우商州의 벽촌 칭펑읍淸風鎭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벽촌에서 당시에 고졸이라면 나름대로 엘리트였겠으나 세상일이 뜻대로, 공부한대로, 잘생긴 대로 가는 것이 절대 아니라서) 주먹만 한 땅뙈기를 배정받아 농사일을 하던 차, 일 년 365일 아무리 똥지게를 지고 땅을 후벼 파봐야 별 볼일 없는데다가, 덩샤오핑의 개방정책 바람에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을 변하는 걸 눈으로 보고나서, 우둔한데 덩치 크고 힘만 센 동네 형 우푸와 함께 거대도시 시안으로 돈 벌러 떠나, 몇 년간 시안에서 등골이 빠지게 고생한 이야기를 적은 소설이다. 이쯤이면 팍 와 닫는다. 중국 근현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하는 지지리 궁상. 저번에 이름이 뭐더라, 무지개 그림자, 홍잉虹影의 작품 <영국 연인> 서문을 보면 “언젠가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평론가 한 사람이 내게 꾸짖듯 물은 적이 있다. ‘중국에 관한 책은 왜 이렇게 늘 비참한 겁니까?’라고”라고 나오며, 이에 홍잉은 “이런 유의 문제들은 전부 ‘유형화’(stereotyping)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 중국작가들이 소설을 쓰면 대개 세상살이의 비참함을 강조한다고 서양 평론가들은 주장하며, 중국작가들은 이에 대해 서양 평론가들이 중국문학을 유형화하는 경향이 있어 그렇게 읽는다는 의미 같은데, 내가 읽은 몇 편 안되는 중국 근현대 소설을 보면, 노신, 랴오서, 류이창, 다이 허우잉, 모옌, 위화 등, 뭐 서양 평론가들의 의견을 굳이 아니라고 하기도 좀 그렇긴 하다. 대강 좀 궁상.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디 중국 현대사에서 뿐이랴. 세상 모든 구석에서 일반 민중들의 삶이 언제 한 번 꽃 피운 적 있었나? 하다못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졌던 소비에트 시절에서도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다만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새로이 등장한 지배자가 독재를 행할 뿐’이었음을 봐왔지 아니한가. 다만 중국이란 거대한 나라가 일본 침략과 내전과 혁명과 문혁, 개방과 현대화를 거치면서 문학의 강력한 주제 또한 자연스럽게 거대한 다수, 즉 민중의 삶의 곤고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록 빨리 다시 생겨났지만, 계급이 완전히 소멸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과 중국 소설가들에게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이 그들일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걸 가지고 워싱턴 포스트의 평론가가 중국 책의 비참함을 “꾸짖듯이” 물었다면 서양 평론가의 모습에서 우린 진정한 밴댕이 소갈딱지를 구경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쪽까지, 총 615쪽 전부 아주 징글징글한 궁상이 뚝뚝 떨어진다. 건전하고 총명한(그래봤자 중국의 벽촌 상저우 칭펑읍 기준이긴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가오싱이 동네 형 우푸와 시안 역에서 내려 찾아간 곳은, 예전에 칭펑읍에서 사고를 치고 동네사람들이 멍석말이를 하자고 뜻을 모아 한 문제아를 찾아 쫓고 있을 당시, 가오싱이 돈 조금하고 찐빵 몇 개를 건네줘 시안으로 도망해, 역시 칭펑읍 기준으로 대단한 성공을 한 한다바오. 그에게 당시 중국 내 최고급이었던 고양이 담배를 들이밀며 먹고 살 일을 도모해달라고 해서 얻은 일자리가, 우리말로 하자면 이미 고어 또는 사어가 돼버렸을지 수도 있어서, 청년들이 혹시 이 단어를 알지 모르겠는데, 혹시 ‘넝마주이’라고 아셔? 이런 거였다. 시안이 워낙 큰 도시라 1970년대 대한민국의 넝마주이처럼 큰 넝마를 지고 다니면서가 아니라 수레를 끌고 다니며 그 넝마주이 일을 했으니, 요새 말로 하자면 고물장수. 도시의 모든 폐기물 가운데 재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줍거나 헐값에 사서 이문을 붙여 고물상에다 되파는 직업을 말한다. 시안에서도 40년 전 한국과 같이 그런 일은 완력과 자금력을 갖춘 일종의 집단에 의하여 몇 단계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극히 소수의 상위 몇 명을 위해 다수의 고물장수들이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가 뭐 아는 거 있나, 책 읽어보니 은근하게 그리 주장하고 있는 거 같아서 그런가보다, 사는 것이지.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라, 첫 페이지부터 사달을 내놓고 책을 시작한다는데 있다. 같이 칭펑읍에서 시안으로 와 갖은 고생을 하며 고향에 남은 처자식에게 돈을 부쳐주는 착하고 순박하고 (정의감은 없지만) 힘도 센 우푸가 죽는다는 거. 평소 약속을 하길, 우푸가 죽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가오싱이 죽은 우푸를 칭펑읍에 데리고 가 고향땅에 묻힐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정말로 우푸가 죽었고, 정말로 가오싱이 죽은 우푸를 거적대기에 둘둘 싸 그걸 등에 업고 끙끙거리며 시안 역에까지는 도달했지만, 길가다 죽은 시체의 영혼이 헤매지 말라는 중국 풍습으로 흰 수탉을 시체에 매달아놔야 해서, 수탉을 흥정하는 가운데 신경과민(생각해보시라, 아무리 친한 동네 형이지만 진짜로 죽은 시체를 등에 업어 시체와 내 살이 직접 닿아야 하는 상황에 신경과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없잖여?)으로 과하게 열을 올리는 바람에 근처에 어슬렁거리던 경찰관한테 그만 시체를 들켜버리고 만다는 거. 그리하여 시체는 화장을 한 분골 형태가 아니면 시안에서 나갈 수 없다는 규정에 덜컥, 걸린다는 거.
 이렇게 미리 결말을 얘기해놓고 소설은 시작한다. 당연히 시안에 도착한 이들이 어떤 고생을 했고, 어떤 코미디를 벌였으며, 어떤 식으로 연애를 해서 늦게나마 총각딱지를 뗐고, 어떤 꿈과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떻게 좌절을 했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풀어나가는 것이 이 소설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고, 중국식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끝. 시대의 하부구조, 서양 문학에선 상대적으로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하층계급의 삶과 그 맵고 신 맛을 유머라는 강력한 향신료를 가미하여 재미나게 쓴 책이다.
 지금은 절판이라 중고 책 아니면 구할 수 없는데, 눈에 띄지 않는 거 찾느라 굳이 애쓸 필요는 없는 이유는, 이거 아니더라도 또 비슷한데 훨씬 기발하고 허리가 끊어질 듯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위화의 작품과 유사하니, 만일 위화를 읽었다면 그냥 넘어가도 무방할 거 같다. 난 책 제목에서 큰 기대를 가졌는데, 아마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출, 주연한 이태리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염두에 두었던 거 같다. 이 책과 그 유명한 영화가 어떻게 연결이 되냐고? 아, 몰라, 몰라. 하여간 중고책 가게에서 이 책을 고를 때 난 분명히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머릿속에서 삼삼했었고, 그건 말씀이야, 전적으로 내 맘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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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녀의 짓궂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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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 <염소의 축제>, <세상 종말 전쟁>,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읽은 요사. 이 책의 ‘옮긴이의 말’에도 나오지만 <염소의 축제>와 <세상 종말 전쟁>이 정치와 혁명 또는 쿠데타 같은 한 국가의 거대 서사를 그렸다면 나머지 세 편은 사랑과 섹스에 관한 가비야운 농담 또는 한 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사가 매우 특별한 소설가, 한쪽으론 매우 정치적, 진보적(아니면 적어도 반독재적)이면서도, 한 편으론 사람살이의 지극한 관심이자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며 기회이며 때론 인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될 사람 사이의 사랑과 성에 매우 관심이 많은 작가였기 때문에 이 두 방면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그럼 이 책의 성격은 이미 나온 것이다. 사랑과 성에 관한 사람의 한 살이라는 거. 근데 제목에 ‘나쁜 소녀’라고 했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설레발꾼으로 호가 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나쁜 소녀’라고 할 정도면 우리 같은 동양의 예의바른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철없는 ‘나쁜 소녀’하고는 아예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하는 수준. 어떤 나쁜 소녀인가 하면, 영어로 이렇게 얘기하면 혹시 알아들으실 수 있을지 몰라? Born to be a bad girl.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거짓말의 혓바닥을 달고 나온 예쁘고 날씬하고 작은 몸매의 약간 갈색 아가씨. 매끄러운 피부에 삼삼한 조명이 비추면 차라리 초록색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오른쪽 아랫배에 맹장수술을 한 실금이 나 있으며, 음부 주위엔 숱이 많지 않은 음모가 깔려있고, 향내 나는 제모한 겨드랑이, 살짝 튀어나온 척추 뼈마디, 벨벳처럼 보드랍고 탱탱한 엉덩이에다, 하이고, 19세 미만도 이 독후감을 읽을지 모르는데 여기까지 써야하나 싶지만 엇다 모르겠다, 좁디좁은 생식기까지 겸비한(남자는 뭐, ‘속 좁은 여자’를 좋아한다나 어쩐다나) 위세를 떠느라고, 유사시엔 상대방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주지 않고 그냥 발랑 누워 다리만 약간, 어깨넓이만큼 벌린 채, 본격적인 식후행사의 순서만 주둥이로 우리의 불쌍한 남자 주인공에게 명령하는 나쁜 여자로 성장하고, 이어서 나쁜 중년을 거쳐 한 인생 마무리하는 소설.
 오틸리아, 라는 이름의 페루 소녀. 얘가 이른바 도시빈민의 딸인데 엄마가 부잣집 입주 요리사로 갈 때 죽자사자 엄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바람에 어영부영 함께 부자동네의 괜찮은 집에서 살게 된다. 마음씨 좋은 주인집 아줌마가 체격 차이 때문에 딸이 입지 못하는 옷을 오틸리아에게 입게 해서, 이제 (하여간에) 부잣집에서 공립학교 다니는 얼굴만 예쁜 소녀가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게 되어 동네 소년들은 이 소녀, 자신이 칠레에서 이민 온 귀족 출신이라고 맹랑한 구라를 치고 다닌 ‘릴리’라는 이름의 소녀만 지나갔다하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바지춤에 두 손을 질러놓은 채 침만 질질 흘리게 되는 사태로 치닫게 된다. 물론 단 한명도 릴리가 ‘오틸리아’라는 웃긴 이름을 본명으로 가지고 있는 페루 촌년인줄도 모른 채. 나? 나야 책을 다 읽었으니 무려 470쪽을 넘어서야 알 수 있는 내용을 이리 미리 쓸 수 있는 거다.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소년들 가운데 주인공 ‘나’, 이름이 ‘리카르도’인 ‘나’도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나쁜 소녀의 완전한 대척점, 왜 그런 거 있잖나, 보색대비 이딴 거. 색깔들의 동그라미 완전 반대편에 있어서 두 지점에 있는 색을 옆에 가져다 놓으면 가장 눈에 잘 띄는 현상, 그 대척점에 있는 ‘착한 소년’의 자리가 주어진다.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읽고 계시는 독후감을 쓰고 있는 쇤네 학창시절에, 교수 한 명이 아내가 죽자 인생에 대하여 심각하게 절망해 아직 덜 자란 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호텔(인지 콘도인지 하여간 숙박시설)방을 빌려 혼자 자다가 깜깜한 새벽에 그냥 떨어져 죽은 적이 있다. 이때 교수들 술만 마셨다하면 죽은 이를 이해하는 파와, 뭐하는 짓이냐고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지탄하는 파가 있었다는데, 난 이해파와 지탄파의 말다툼 같은 건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하여간, 만일 이 재미난 책 <나쁜 소녀의 짓궂음>을 지탄파가 읽었다면, ‘착한 소년’이 평생을 걸쳐 코피 쏟아가며 허덕이는 사랑에 관해 이해하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나? 나는 당연히 이 책을 읽으면서 절절 공감한 걸 보니까 이해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뭐. 쉽게 얘기해서 이래봬도 순정파란 말씀.
 이렇게 질금질금만 얘기하니까 감질나시지? 그러라고, 감질나시라고 슬쩍 슬쩍 이야기를 흘리기만 하는 거다. ‘릴리’라는 가짜 이름으로 동네 소년들을 평정한 오틸리아가, 오필리아도 아니고 오틸리아는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본명은 되게 웃긴 이름이라고도 하는데(당연히 난 이 이름이 왜 웃긴 이름인지는 모른다), 점점 자라, 도무지 가난한 집구석에선 견딜 수가 없어하다가 천하의 진리, 삶의 불편을 겪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자기가 돈을 많이 벌 재주가 없으면 돈 많은 놈을 꼬드겨 같이 살면 된다는 걸 알아차려서 500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만들게 되는 거다. 때는 1960년대. 당시 세계 경제 블록에서 페루의 위치나, 페루 내에서 나쁜 소녀의 집구석이나 거기서 거기. 일단 페루에서 떠야겠다고 결정한 나쁜 소녀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쿠바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우선 프랑스 파리로 들어가게 된다. 왜? 당시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했기 때문에 쿠바에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파리를 경유하는 비행 편밖에 없었단다. 근데 소년시절부터 파리에서 사는 걸 일생의 로망으로 여겼던 로베르토 역시 딱 그 시절에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 소설작법 제 1장 3절에 씌어있듯이 주인공들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는 법. 그러나 아무리 많은 ‘빠리의 밤’이 와도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쁜 소녀는 게릴라전 훈련을 받기 위해 쿠바로 떠나 다시 페루 해방 전쟁을 치러야 하는 운명. 에잇, 여기서 그만 해야 하는데, 입이 근질거려서 비록 스포일러일지라도 이번 한 번만 말해드린다. 쿠바의 산악지역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아야 하는 나쁜 소녀. 아시다시피 페루 반군들은 80년대 들어 완벽하게 거덜이 나서 거의 대부분이 밀림 속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는데 주인공이 그리 허망하게 죽으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나쁜 소녀 릴리 또는 오틸리아는 쿠바의 혁명영웅 카를로 시엔푸에고스의 동생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의 2인자 차콘 사령관과 뜨거운 사랑을 맺어 게릴라 훈련을 면제받는다. 대단하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쿠바 현지에 나가있던 유네스코의 고급 외교관 로베르 아르누 씨, 당연히 나이 차가 무척 많이 나는 프랑스 아저씨한테 드디어 안다리후리기를 성공시켜 결혼에 골인, 기어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다시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 ‘착한 소년’ 로베르토와 밤의 역사를 만들게 되는 것. 이때부터 착한 소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쁜 소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한 번 더 사랑하고 이왕 사랑한 거 또 한 번 사랑하고, 사랑한 김에 또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죽도록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했듯, 이해파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반면, 지탄파 입장에선 놀고 있다, 세상 어디에 이딴 사랑이 있어,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난 생각이 하나 들었는데 그걸 소개하자.
 아시다시피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쏟아 1990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 출마에 결선투표까지 갔다가 결승전에서 일본 이민 출신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대결해 38%의 득표로 아깝게 준우승에 그친 경력이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책에서 나쁜 소녀의 돈 많고 힘 있는 애인들 가운데 그녀를 가장 악랄하게 착취한 지독한 가학성 변태로 일본 야쿠자 두목이라고 소개되는 후쿠다로 설정해 나쁜 소녀에게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성적 폭력을 가하게 만들었다. 왜 일본인으로 했을까? 백인이 아니라. 혹시 후지모리, 일본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 아니었을까? 그냥 이딴 생각 해봤다.
 이렇게 자신을 칠레 소녀라고 사기치고 다녔던 페루를 탈출한 나쁜 소녀는 이후 게릴라였다가, 마담 아르누였다가, 또 누구였다가, 다시 누구였다가, 또다시 누구였다가 막 이렇게 진화하며 심신이 고갈되는 다분히 교양소설의 경지에 달하는데, 언제나 그녀를 받아주고 절망하고 후회하고 또다시 받아주던 좋은 소년 로베르토를 나쁜 소녀는 사랑했을까?
 혹시 당신이 이해파가 아니라 지탄파라면, 그래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지 못할 확률이 있다면 하나만 마음에 새겨두시라. 즐거움과 아름다움은, 특별한 경우에는 그걸 즐거움과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거. 이렇게 얘기하니까 근사하지? 쉬운 말로 다시 쓰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재미있게 읽으시라는 뜻.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렇다는 말씀은 아니고, 가끔가다가 적절하게, 물론 내 수준에서 적절하다는 뜻인데, 야한 베드 씬, 제법 나온다. 작가가 요사 선생이니까 당연하다. 혹시 이런 장면 싫어하시면 일독을 피하시고, 관심이 있으시면, 당연히 꼭 읽으셔야지. 선택은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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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 문학동네 시인선 73
고영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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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민? 이 사람이 누구? 해서 인터넷 검색해봤더니 프로야구 선수 고영민이 뜬다. 야구 선수 아래 작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시인 고영민. 1968년 서산 출생 기타 등등. 개인정보가 너무 세세하게 뜨는 거 아냐? 이 양반 생일까지 나오더만. 하여간 보니까 서른네 살에 등단시인이 되어 박재삼 문학상 받은 이력이 있으며, 시단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거 같다. 이상해. 요새 읽는 남자 시인들이 대개 1960년대 충청남도 태생인 거다. 시집 한 권 살 때 이딴 거 다 알아보고 사는 인간이 아닌데 어째 그렇게 됐다. 남자 시인의 경우 신문기사를 가끔 검색해본다. 하도 성sex 관련 이야기가 분분해서. 이런 내가 싫지만 뭐 어쩌겠나. 그런 시인 아니더라도 읽을 시집은 넘쳐흐르는 걸. 이야기가 또 삼천포. 좌우간(난 이 단어 쓰면 좀 캥긴다. 좌우간. 왼쪽과 오른쪽 사이, 딱 그 중간에 뭐가 있기에 좌우간, 좌우지간, 어떤 사람들은 ‘좌우당간’ 이렇게들 얘기하는지. 모르긴 하나 뭔가 중요한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앞에서 읽었던 충남 출신 시인들의 공통점은 겁나게 사투리를 구사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데, 고영민 이 사람의 시에서는 사투리가 등장하지 않고, 검색해보지 않았더라면 충남 출신인지도 몰랐을 지도 모른다. 난 문학작품에 사투리 자꾸 나오는 걸 반기거나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인종이 아니라서 고영민의 이 점에 대해서 흡족했다. 시, 소설에 사투리 좀 쓰지 말자. 우리나라 문학작품도 이제 세계문학을 지향해야 할 때. 번역한 서양 소설 읽을 때,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 나오면 기겁을 하겠다. 들은 말에 의하면 서양 또는 일본 조폭들이 사투리 쓰는 걸 번역할 땐 경상도 사투리 나오다며?
 아, 그러나. 고영민의 시는 아쉽게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물론 여태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다 그랬지만 특히 이번엔 전적으로 내 기호 또는 취향에 입각해 시를 읽은 감상을 쓴다는 걸 분명하게 밝힌다. 이런 의미에서 고영민의 시들이 ②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말씀. 그가 쓴, 이 시집에 들어있는 시들의 품질이 처진다는 의미는 단연코, 조금도 없다.
 시집 한 권을 읽으면 (특별히 시인과 독자의 코드가 맞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적어도 하나 혹은 두 편 정도의 시는 건질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책의 경우(한국 사람들의 경우 적어도 삼 세 번은 얘기를 해야……) 나하고 도무지 그놈의 (드디어!) 코드가 맞지 아니하여, 대단히 불행하게 건진 시가 한 편도 없었다. 그건 아마 시집을 펼치고 읽은 첫 번째 시 <식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였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식 물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구나 노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어진 사내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전기면도기로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몇 날 며칠 병실 안을 넘겨다보던 목련이 진다 멀리 천변의 벚꽃도 진다 올봄 사내의 몸속으론 어떤 꽃이 와서 피었다 갔을까 병실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노모가 침상에 기댄 채 700년 된 씨앗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 아버지가 세상을 뜬다. 그때 병원에 입원을 했을 것이고, 시인은 막내아들이니 당연히 아버지 문안을 갔을 것이고, 그때 이 병실 저 병실, 아니면 아버지 옆 병상에 젊은이 하나가 기관지를 절개해 이중 금속 튜브를 박아 숨도 쉬고, 금속 관 속으로 분홍색의 얇은 고무관을 또 삽입해 기계에 연결해서 고통스럽게 가래를 제거하고, 코에 호스를 꽂아 음식물을 섭취하고, 콘돔의 정액받이 부분을 잘라 링거 줄과 연결해 소변을 보고, 욕창이 생길까봐 늙은 어머니가 시간마다 왼쪽 오른쪽 똑바로 몸을 돌려놓았었나보다. 아픈, 죽어가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쁠 것이 없는, 조금만 더 지나면 가족 모두가 차라리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할, 사내를 보고 시인은 과.감.하.게. 식물이라고 칭한 거다. 언필칭 식물인간을 염두에 두었겠지.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한다.
 그런데 말이지.
 만 24년 동안 시인이 말한 ‘식물’을 화분에 담는 바람에 완전 풍비박산한 집구석의 일원이 이 시를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 거 같아?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저절로 ‘닛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700년 만에 행여라도 씨앗이 싹을 틔울까봐 겁나는 심정을 시인은 알까? 이런 걸 “탱자 탱자 한다.”라고 칭하는 거다. 하필이면 이런 시를 시집의 제일 앞에다 떡하니 박아놨느냐고.
 처음부터 틀어진 시인과 나의 코드는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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