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간다
이인휘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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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소설. 그리고 자전소설?
 무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흥이 많았으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의 쓰라린 가난으로 이후 주욱 우울 모드를 유지하게 됨. 상급학교 대신 동대문 부근의 실 공장에 들어가 고생하다가 월남 갔다 온 셋째 형이 야간학교에 넣어줘 대학까지 다닌 나, 박해운.
 대학 다닐 때 1980년 서울의 봄 겪음. 광주항쟁을 계기로 인간성의 환멸을 느끼고 입대.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공장생활 시작. 절대 노동운동을 위한 공장생활 아님.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아서는 기초적인 의식주 생활 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 이후 노동 강도가 어마어마한 타이어 공장(어디긴 어디야, 한국타이어 영등포 공장이지)에 들어가고, 여기서 노동의식 일깨움. 이후 노동운동 투신. 주로 노동문화운동에 전념하며 틈틈이 글을 씀. 그게 어여뻐서인지 주인공 박해운의 동의도 얻지 않고 잡지에 소설을 실어 등단함. 첫사랑은 실패로 돌아가고 교사 직업의 두 번째 여인과 결혼. 생활비는 아내가 벌어오고 자신은 노동문화운동에 헌신. 가끔 소설도 씀. 당연히 나이 들고 이에 따라 아내가 7년간 아픔. 아내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함(돈 벌이 빼고. 아니 그건 생략했는지도 모름). 아내가 건강을 찾고, 남한강 중상류지역으로 이주하며, 2년 동안 식품회사 제조공장에 들어가 주로 호떡 뒤집음. 노동문화운동을 한 이력으로 여러 소설가, 시인, 가수(싱어송 라이터)들과 교제.
 자. 이게 책의 내용이다.
 1980년대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물론 그 다음에도 획기적인 발전을 없었지만) 공장 노동자들의 급여는 정말 열악했다. 나도 그때 직장생활 해서 안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한다. 집세내고 먹을 거 사면 끝이라고. 인정한다. 근데 한 가지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는 건, 주인공의 20대 시절. 그니깐 아직 의식화가 되기 전, 그는 만날 라면만 끓여먹으며 지하 쪽방에서 구겨진 인생을 살더라도, 늘(물론 책 내용과 달리 ‘언제나’는 아니었겠지만) 여급이 서빙하는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아가씨의 가슴을 주물럭거렸으며(20대 중반의 청년이), 단골 창부에게 생활의 곤고함을 해소하고는 했다. 의식화된 후에도 그의 생활방식이 근본적으로는 고쳐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원래 선해서 결혼을 한 다음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던 건 물론 백퍼 사실이겠지만, 결혼 전의 그런 생활방식이라면 아무리 급여가 많아도 비용을 다 충당할 수는 없다. 또, 대학 다니면서도, 서울의 최고 사립 고등학교를 나왔으니(그땐 서울에 5대 공립, 5대 사립이라고 고등학교도 다 서열이 있었다) 일단 괜찮은 대학에 다녔다고 가정하고, 거기다 그리 항문이 째질 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대학에 보낼 정도라면 서열 낮은 학교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 당시에 그렇게 흔한 아르바이트, 입주 과외 한 번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아니면 그렇게 쉽게 돈을 벌었다는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든지. 그러니 박해운(하필이면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아주 성실한 젊은 정비공과 이름이 같다)의 기본 정서는 허무와 무기력.
 전두환의 서슬 퍼런 공포정치가 스모그처럼 하늘을 뒤덮은 1980년대 중반의 영등포와 구로공단에서 벌어진 노동운동을 통해 의식화된 박해운. 의식화는 행동 또는 운동, 싸움을 통해 공고화 한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박일해(박노해의 변형이겠지)가 쓴 시집 <노동의 아침>(역시 <노동의 새벽>일 거다)을 읽으며 노동문화가 가능하다는 걸 알아낸 ‘나’는 점점 가열차게 노동운동에 참여하지만, 역시 노동을 통해 얻는 밥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직업을 버리고 운동에만 몰두할 수 없다. 여기에 찬란하게 등장한 여인. 교사출신의 아내. 아내는 돈을 벌고, 남편은 하고 싶은 노동문화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 아, 생각 복잡해진다. 2017년에 쓴 노동운동 관련 소설을 2017년에 읽는 일. 거기다가 작가가 나와 거의 비슷한 시절을 산 사람임에야.
 다시 분석. (나 이런 거 되게 싫어한다)
 ① 주인공, ‘나’ 박해운이 여태까지 살아 온 인생살이
 ② 식품공장에서 호떡 뒤집으며 아직도 노동운동이 유효하다는 주장
 ③ 노래를 잃어버린 하태산(정태춘인 건 얘기 안 해도 다 앎)이 노래를 되찾는 광경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문제가 그리 쉽지 않다. 맞다 쉽지 않다. 지금까지 열라 써내려갔던 걸 한 방에 싹 지워버렸다. 내가 시대를 정의할 수준도 되지 못하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건, 책을 읽은 감상을 쓰는 독후감이지 비평이나 논문이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한 가지 작은 오류를 지적하자면, 책에서 주인공 박해운이 호떡 뒤집는 일을 하는 식품 공장의 작은 불만을 토로하면서, 2천 여 만원의 돈이 거론되는데, 그걸 작가는, 사장 입장에선 하룻밤 접대비 정도의 돈, 이라고 하는 장면. 시점이 2016년. 하이고, 손도 크네. 20대 중반부터 아가씨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술을 마셔왔으니 그 방면에서 나보다 훨씬 통달할 수준이겠지만. 중견기업이 우리나라 최고의 회사라고 일컫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들에게 하룻밤에 700만원 접대했다고 접대비 올리는 건 봤다. 회사 뒤집어졌다. 접대자인 영업사원이 그중 많은 돈을 삥친 거다. 소위 말하는 카드깡을 통해서. 노동운동 오래 하신 분이 어떻게 2천만 원을 그리 우습게 아는지, 참. 악덕 사장새끼도 자기 돈 아까운지는 안다. 그래서 직원들 달달 긁어가며 사탄의 아들 노릇을 하는 것이지.
 하여간 난 주인공 박해운이 드럽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 다니며 자기가 돈을 벌어봤다는 얘긴 전혀 없고(그러면 역시 째지게 가난한 무당 엄마가 등록금을 내줬단 얘긴데 하는 짓이라곤 술 마시고 인생 허무하다는 얘기 뿐), 공장 다니면서는 본격적으로 맥주에 아가씨 젖가슴, 단골 창녀에 빠졌으며, 결혼한 후엔 아내의 수입에 의존해 자기 하고 싶은 일 다 해가는 거.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질투난다. 내 마누라가 날 벌어먹였다면, 나도 하고 싶은 일,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우여곡절 끝에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가 호떡 열라 뒤집으며 이젠 한국타이어가 아니라 뭔 식품의 악덕 사장에게 칼끝을 겨누는 작가. 이 악덕기업을 깨부수기 위해선 회사의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정도는 인용했어야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누가 알아? 진짜 회사 사정이 어려웠는지. 이렇게 얘기하는 건, 작가의 시각 및 방법이 아직도 1980년대나 적어도 1990년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결코 이인휘에게 나쁜 감정, 없다. 어? 내 시각이 변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이제 나는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에 노동운동가 박해운에게 재무제표를 요구하는 것인지도.
 자, 결론.
 이 책? 한 마디로 말해서, 촛불 찬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광화문부터 시작해 숭례문까지 이어지던 촛불의 군집. 그 속에서 싱어송 라이터 하태산은 다시 노래를 되찾았고, 그건 시민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이번엔 진짜 이해 못할 것 하나.
 작가는 주장한다. "민의가 헌법에 우선한다"고.
 이거 정말, 진심으로 쓴 거야?

 

 "민의가 헌법에 우선한다"는 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할 수 없는 말. 헌법이 민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헌법을 고치기 위하여 투쟁을 해야한다. 헌법을 수정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민의가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건, 2017년 현재, 아웅산 수치나 김정은 또는 진심으로 시대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나키스트 아니라면 이야기 할 수 없는 비민주적 발상이다. 더구나 우리의 현대사에선 투쟁하여 헌법을 바꾼 적이 두번이나 있지 않은가. 4.19와 6.29. 혹시 포퓰리즘이 최고의 선이라 웅변하는 것인지 (내가 백퍼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갑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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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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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쓴 <귀향>을 읽고 나서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콱 박혀버려 ‘베른하르트 슐링크’라는 작가의 이름이 뜨자마자 서슴없이 골라 읽은 책. <귀향>은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소련군에 의한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우리가 생각하는 시베리아하곤 좀 다른 위치다. 우랄 산맥 서쪽이니까 중앙아시아 북방으로 생각하시면 될 듯)의 집단 농장에 끌려가 거기서 가죽과 뼈다귀가 서로 붙어버릴 정도까지 굶주리며 서쪽으로 걸어서, 걸어서 탈출하는 얘기였는데, <계단 위의 여자>는 통일 전후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무대로 한 여자와 세 남자 사이에 신기하게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를 썼다. 즉,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책. 그래서 슐링크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책 읽어주는 남자>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씀.
 옮긴이 배수아에 따르면, 슐링크 자신이 법학교수이자 판사였다고 하는데, 그래 화자 ‘나’의 직업을 변호사로 설정해 ‘나’가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만큼 남의 일에 당연한 듯이 참견할 수 있는 신분도 또 없기는 하다.
 40년 전, 당시 그냥 신예 화가에 불과한 큰 몸집의 카를 슈빈트가 큰 부자 군트라흐의 요청,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이레네의 젊은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녀를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 황금빛 머리카락과 음모를 가진 이레네의 누드가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는 순간을 그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여간 신들의 장난이란, 슈빈트와 이레네가 그만 정분이 나서 그림을 그려주고 둘이 살림을 합쳐버린 거였다. 난 화가들의 자기 작품에 대한 집착을 잘 모르는데, 군트라흐는 그림 ‘계단 위의 여자’ 허벅지를 일부러 불 가까이 댄 것이 분명하게 유화 물감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변질시켰고, 그걸 안 화가 슈빈트는 마치 자신의 허벅지가 불에 덴 것처럼 안달복달, 그림을 정상으로 수정하기 위해 난리를 부린다. 바로 여기서 주인공의 한 명이자 화자인 변호사 ‘나’가 사건의 열차에 합승할 수 있게 된다.
 그래 변호사 나의 개입으로 그림을 제대로 복원한 슈빈트. 그럼 됐지, 라고 생각한 나를 또 찾아왔다. 그림이 자빠져 여인의 유방이 뭉개졌다나. 좋다, 다시 고쳐줬다. 이번엔 군트라흐가 작은 주머니칼로 그림의 음부 부분을 그어버렸단다. 그러면서 변호사 ‘나’에게 은근히 한 계약서 작성을 주문하는데, 어떤 계약인지, 그건 내가 알려드릴 수 없음.
 근데 비록 사건을 위임한 의뢰인과 변호사는 완전히 일을 매개로 해야 하겠지만 의뢰인, 또는 의뢰인은 아니나 의뢰인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매우, 매우 고혹적이라면 변호사는 아이고 하느님 왜 날 사내로 만들어놓으셨나요, 타령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새파랗게 젊은 변호사, 하루에도 스무 번씩 불끈 솟는 넘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20대 초중반 남성이 불행하게도 그녀를 보고 느낀 건 소위 말하는, 약 먹어도 낫지 못한다는 ‘첫사랑’임에야. 그리하여 변호사는 그녀를 위하여 모종의 범죄사건을 꾀하고, 그 행위가 자신의 독일 내에서 법조계 인생을 끝장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무릅쓰고 성공적으로 범죄를 완성시켜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안 알려드림.
 첫사랑은 무참하게 깨져버리고 그간 세월은 능률능률 흘러(최승자의 시에서 따왔는데 어떤 시인지는 생각나지 않음) 화가 슈빈트도, 군트라흐도, 변호사 ‘나’도 40년 동안 장가들고, 새끼 낳고, 새끼들이 또 새끼들을 낳고, 이렇게 여전히 화가로, 대단한 사업가로, 기업 흡수 합병의 귀재 변호사로 번창하고 있다가, 나의 오스트레일리아 출상 도중 시드니의 화랑에서 문제의 그림 <계단 위의 여자>를 발견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대 전기를 마련하며, 스토리 소개는 여기서 마친다. 지금까지가 총 3부 가운데 1부의 줄거리란 것만 밝히면서.
 매우 거칠게 줄거리를 써 놓았으나,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런 줄거리를 미리 아는 것이 책을 읽는 기쁨을 절대 훼손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스토리 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진실들. 남자가 여자를 보는 시각이나, 동쪽 독일에서의 삶의 효용성과 안분한 만족감,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걸친 독일 내 사회운동, 가족 간 사랑에 관한 진지한 논의,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속물성 등 이런 것들이 매우 설득력 있게 토의되고 있어서, 사실 이 책은 스토리의 전개보다는 속에 숨어있는 자잘하거나 굵직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데 의의가 있지 않나 싶다.
 처음엔 그렇지 않은 거 같다가 진도가 나갈수록 문명 비판적, 자본주의 비판적이기도 하고, 좋은 책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삶과 죽음에 관한 사색을 포함하며, 급기야 인생에서 뭐가 중헌디? 라는 근본적 의문을 던지면서 책을 끝마친다. 기대하지 마시라. 절대 안 알려드린다. 좋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내시라.
 다만, 돈 많은 시공사답지 않게 자잘한 오자, 탈자가 약간 눈에 거슬리지만 책 읽는데 방해할 수준은 아니다. 비록 330 쪽에 달하지만 편집이 널럴해서(이 단어가 사전에 안 나온다. 신기하다. 근데 무슨 뜻인지는 아시겠지?) 반나절이면 다 읽는다. 그리하여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니 독후감이 재미없을 수밖에. 그만큼 독후감 쓰는 작자의 주둥이가 근질거렸다는 것만 이해 해주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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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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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제목이 <The Dubious Salvation of Jack V.> 우리말로 하면 <잭 필제의 의심스러운 구원> 정도 되는데 역자 서창렬은 그냥 <구원>으로 해버리고 말았다. Jack. V는 책의 주인공 잭 필제다. 잭은 V를 'ㅍ‘으로(또는 비슷하게) 발음하는 독일, 네덜란드, 하여간 유럽 대륙 북쪽 사람을 조상으로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열 한 살짜리 꼬맹이. 꼬맹이는 꼬맹인데 아주 일찌감치 까진 아이다. 좋은 말로 하면 조숙했다고 해야 할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한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의 소설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흑백 갈등(또 하나의 큰 이슈는 당연히 식민주의)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 잭 필제와 필제 가족 구성원에겐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별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필제 씨 댁은 마당에 수영장까지 딸린 저택에 사는 법률가 집안의 백인이어서 흑인 하녀 ‘수지’를 두었지만, 수지를 말 그대로 가족처럼 대우한다. 수지 역시 필제 씨 댁의 세 남매를 마치 자신의 아들딸처럼 자상하게 돌봐주고, 훈육하고, 대화하고, 그래서 사실상 진짜 엄마보다 더 엄마같이 양육하며, 특히 둘째이자 유일한 사내아이인 발랑 까진 잭과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백인 주인과 흑인 하녀의 관계는 자크 스트라우스의 시선엔, 그냥 돈 많은 집의 주인과 가난해서 하녀로 들어온 여인일 뿐이다. 아프리카 문학에서 이런 관계 설정은 이 책이 처음이다. 와우.
 내가 잭에 관해서 ‘일찌감치 까졌다’느니 ‘발랑 까졌다’느니, 그것도 만 열 한 살짜리 꼬맹이한테, 하는 건, 당연히 잭과 같은 시절을 아주 오래 전에 겪어본 노땅 입장에서 귀엽다고 하는 소리다. 잭이 1978년 생. 책의 시점은 1989년 여름부터 1990년까지. 열 한 살의 잭은, 놀랍게도 벌써 아홉 살 시절부터 자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몸은 아직 제대로 된 정액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상태다. 이러니 내가 ‘일찌감치 까졌다’는 얘길 안 하겠느냐고. 어느 날 하루는 집 욕실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글쎄 샴푸 병에다 아아아아아아직 여물지도 않은 자기 고추를 집어넣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만큼의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줄에 묶인 병속의 사과를 움켜쥔 잔나비가 손을 빼지 못해 사람한테 잡히는 것처럼, 샴푸 병 안의 것이, 그것도 사내새끼라고, 조금씩 부풀어 오르더니 급기야 도무지 빠지지가 않는다. 얼마나 부풀었기에 미끌미끌한 샴푸 병에서 빠지질 않는 거냐고, 참나. 하이고, 어린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난처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러다 피가 통하지 않아 썩어버려 싹둑 잘라내야 하는 건 아닌지, 평생 고추에다에 샴푸 병을 매달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도무지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아무리 어려도 쪽팔린 건 아는 법이라, 화끈화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엄마한테 이게 어떻게 하면 빠지겠느냐고 열 살 인생 통틀어 가장 진지하게 여쭙는다. “그냥 놔두면 저절로 빠져.” 한 번 힐끗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엄마. 엄마도 열 살짜리 아들이 벌써 자위를 하는지 꿈에도 몰랐던 거다.
 이 소년의 열 한 살 시절, 잭을 둘러싼 부모, 누나, 누이, 삼촌, 고모, 교사(들), 친구, 친구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애해마지않는 가정부 수지와 그녀의 아들 퍼시, 모든 사람들과 참으로 다양하게 펼쳐지는 관계, 관계 그리고 또 관계. 대표적인 아프리카너 가족인 아버지 계열 사람들과 영국인 출신인 어머니 계열 사람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가벼운 마찰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와 엄마의 고향 더반(홍수환이 아널드 테일러를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우리나라 두 번째로 프로권투 세계챔피언에 올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를 외치던 곳)의 해변을 무대로 참 다양하게 당시의 남아프리카를 묘사하고 있다. 근데 저자 자크 스트라우스가 참 기특한 것이, 이런 다양한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잭과 수지로 그리고 있다는 점. 여기엔 피부색에 따른 배척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잭은 늙은 수지를, 아니, 다시 쓰면, 수지의 애정과 그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려를 독점하고자하는 소년의 욕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잭의 수지에 대한 소유욕심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데, 혹시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 배경을 쓰고자하는 건, 출판사가 책 뒤표지에 이 내용을 이미 써놨기 때문이다.
 저 위에서 굳이 열 한 살짜리 꼬맹이가 아홉 살 때부터 여물지도 않은 연장을 가지고 자위를 했다는 얘길 쓴 이유는, 벌써 경력이 2년차라서, 이젠 완전히 취미생활로 여물지 않은 연장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마당의 수영장에서 그 짓을 하다가, 그만, 수지의 아들 퍼시에게 들켜버리는 일이 생긴다. 내가 아들만 둘 키운다. 얘네들 중학교 입학할 때마다 내가 해준 말이 있다. 자위할 때 들키지 말라는 거. 그거 하다가 들키는 놈들은 자위할 자격이 없는 놈들이라고. 근데 소설의 주인공은, 장하기도 하지, 그걸 햇빛이 훤한 수영장에서 하다가 걸려버린 거다. 그것도 클라이막스에 도달해 껌벅 넘어가고 있는 찰나, 퍼시가 저쪽에서 여태까지 눈 번하게 뜨고 바라보다가 으하하하하, 웃어젖히기 시작하니 그때서야 누가 자길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죽을 만큼 창피했다니, 아이고.
 그것, 자위하다가 퍼시한테 걸린 지상 최대의 수치가 수지의 귀에 들어가고, 기겁을 한 수지가 곧장 엄마한테 얘기하고, 엄마 역시 잽싸게 아빠한테 얘기하고, 아빠는 담임선생과 교장선생한테, 선생들은 학생들한테, 그리하여 요하네스버그 시민 모두가 수영장 앞에서 덜 여문 연장을 쥐고 흔들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 알게 되는 공포에 휩싸인 잭. 가뜩이나 수지의 애정을 양분하고 있는 경쟁자로서 밉기가 한이 없었는데, 이젠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바뀌어버린 거다. 퍼시에 대한 적의가 어떤 과정을 밟아, 정말로 친애하기 이를 데 없던 수지로 하여금 잭의 집을 떠나게 만들었을까.
 전형적인 성장소설. 성장소설이 언제나 그렇듯이 독자로 하여금 빙그레 웃게 만들고, 공감 속으로 초대하는 작품. 여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 특유의 문젯거리도 좀 등장하고. 권하지는 않겠다. 잘 쓴 성장소설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구성과 문화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외국어 번역서로 성장소설을 읽을 필요까진 없을 듯하여. 가장 최근에 읽은 잘 쓴 성장소설이라면, 이순원의 <19세>(이 책은 반드시 ‘세계사’에서 나온 중고 책을 골라야 함).
 왜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잭의 의심스러운 구원>이라고 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견을 지금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선 책의 스토리와 결과를 써야 하는데, 난 독후감에다가 책의 ‘중요한’ 내용을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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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뿔
윤순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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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 신께서 낙타에게 뿔을 주셨다. / 마음이 착해 상을 주신 것이다. / 어느 날 꾀보 사슴이 낙타에게 와 말했다. / “뿔 좀 빌려다오. 잘 차리고 서역 잔치에 가련다.” /낙타는 곧이 믿고 뿔을 빌려주었다. / 사슴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때부터 낙타는 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 사슴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위는 7쪽에 나오는 서문 비슷한 글이다. 서문만 읽어봐도 이 작품은 ‘기다림’에 관한 서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300쪽의 장편소설이라면(물론 편집을 최대한으로 늘려서 그렇지 250쪽 언저리로도 충분히 책을 꾸릴 수 있는 분량이다) ‘기다림’이 복합구조 속에서 발생하여야 할 것이라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기다림이 될 수밖에 없다, 는 걸 요샌 모르겠고, 수십 년 전 고등학교 현대문 시간에 배워 안다(그땐 이과 반에서도 국어 교과서를 교사 두 명 이상이 각각 고문, 현대문을 따로 가르쳤다).
 주인공 효은. 스물 네 살의 아가씨가 화자 ‘나’이자 효은. 당연히 오늘의 주제 ‘기다림’은 나, 즉 효은의 기다림을 얘기하는 거라서 무엇보다 ‘나’를 알리는 것이 소설을 소개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일이겠다. 나. 2년제 전문학교 출신. 일찍이 21세 때, 두 살 많고 잘 생긴데다가 오페라 노트 ‘섬머타임’을 숨넘어가게 잘 노래하는 수영선생 ‘규용’하고 정분이 나서 스물한 살 때 ‘황소개구리처럼’ 배가 불러왔다. 


잠깐. 이왕 얘기 나왔으니 우리 거쉰의 <포기와 베스>에서 나오는 Summertime 한 번 듣고 지나가자.

 

 

https://youtu.be/kgZAhiAFYZU

먼저 오리지날 연주. 사이먼 래틀, 런던 필하모니. 클라라: 해롤린 블랙웰

둘 다 같은 판이고 이 링크의 음원이다.

난 어마어마한 가격의 왼쪽 그림의 판을 샀는데

세월이 지나니까 EMI 리마스터링 시리즈로 반값에 나왔다.

이럴 때, 심장병 도진다. 

 

https://youtu.be/i6SPi7w5E_g

마할리아 잭슨. 가스펠 가수라서 그런지 공명이 대단하다.

아마존에서 태평양 건너까지 힘줘 던져줬다. 포장 뜯어보니 껍데기 깨졌다.

당시 한국에선 잭슨의 판 구할 수 없어서 그냥 참았다.

 

 

 https://youtu.be/i4HhG6DyoBU?list=PLSubR5WV5GnUHSDN1EG0azZBAF6S2abCp

웃기게도 Summertime은 재니스 조플린으로 처음 들었다. 물론 10대 때 였다.

당연히 LP였고, 듣는 순간, 뻑 갔다.

 

 

 


 그리하여 홀어머니에게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4천만 원만 있으면 중고 어선을 하나 사서 잘 살 수 있을 거 같으니 그거 하나 사달라고 얘기했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잘난 아들 공부 다 시켜 서울에서 어느 회사인줄은 모르겠지만 직장생활 잘 하고 있어, 그 밑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줄 서서 기다리는 동생들 교육비, 용돈 뭐 이런 거에 지대한 도움을 줄 수 있으려니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던 거다. 이 와중에 나 효은은 스물 한 살의 어린 색시답게 지극히 간단한 소원, 그저 마당이 있는 작은 집, 내 집이면 좋지만 전세라도 상관없는 오붓한 집에서 모빌이 달랑거리는 아이를 뉘어놓고 햇빛에 환하게 빛나는 기저귀 빨래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꿈만 꾸고 있었던 것. 그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장만하는 것이 또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는 아무 생각도, 노력도 할 수 없는 철부지여서, 자신의 모든 정기와 힘과 새끼 품은 암컷의 독기로 규용에게 그딴 거 못할 바에 차라리 아이하고 나하고 죽어버리고 말겠어! 찬란한 지랄 한 바탕을 해댔으며, 도무지 중고 선박을 살 4천만 원도 타내지 못하고, 그래서 서울은 아니지만 작은 어촌에서나마 살림도 살지 못할 거 같은 난감함에 에라 모르겠다, 실컷 소주로 병나발을 분 다음 마침 해수욕 나온 여자와 우연히 함께 빠져버려, 여자는 파도와 바다에 부딪힌 참담한 시신으로 발견됐고, 비록 술엔 취했지만 수영장 수영선생 규용은 그길로 행방불명. 아울러 실신해버리고 만 나 효은은 충격이 너무 심해서였을까? 그길로 심한 하혈을 하며 유산을 해버리고 만다.
 행방불명. 죽은 거 같지만 죽었다는 증거가 없는 상태. 규용. 규虯는 새끼 용, 용龍은 다 큰 어른 용. 그러니 작가가 이름을 규용이라고 지었을 때부터 독자는 남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확신하지 않는 상태, 즉 어디선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주장을 끝까지 유지하기를 바라는 거 같다. 그거 있잖아. 훈민정음訓民正音. “가난 엄쏘리니 군君짜 처엄 펴아나난 소리 가타니 갈바쓰면 뀨虯자 처엄 펴아나난 소리 가타니라.”(아래 아, 순경음 비읍 같은 예전 문자표기가 안 된다. 안타깝다) 규용. 갯가 것이 처음부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기엔 이름이 너무 크다. 왕들이나 쓰는 글자로 이름 자를 썼으니 명이 길기를 바리긴 처음부터 힘들었을 듯. 여기까지 작가가 생각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하여간 나를 포함한 독자가 규용이 익사했다고 생각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어떤 수를 썼느냐 하면, 내가 사는 연립주택 궁전빌라로 그림엽서가 한 장 도착한다. 쌍봉낙타가 그려진 엽서에 이렇게 써있다.
 “사막에는 그리움이 모래알처럼 / 퍼져 있습니다. / (근 한 페이지 중략) / 아득히 먼 기억 너머로 사라진 / 야생의 뜨거운 발걸음 식히며 / 가시 돋친 붉은 꽃으로 피어나 / 당신 앞에 우뚝 서겠습니다.”
 하면서 서명 대신 규용이 늘 사용하던 이니셜, “g"가 필기체로 갈려져 있는 거다.
 그래서 규용이 죽었어, 살았어. 현대문학에서 이걸 밝힐 수는 없는 일. 다 읽으신 다음, 한 번 거수, 다수결로 해 볼까? 난 죽었다, 에 한 표.
 왜 이걸 미리 얘기하느냐.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너무 센 스포일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따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건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미리 깔아놓는 밑밥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책의 스포일러를 혐오하는 내 입장에서도 별로 께름칙하지 않다.
 하여간 나와 규용 사이의 기다림은 산 자와 죽은 자, 혹은 산 자와 실종자 사이의 기다림으로 일단 다차원적이고 관념적. 그 다음은 당연히 실제적인 기다림이 하나 더 등장해야 하는데, 바로 이걸 난 안 알려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리움. 더런 삶의 지속을 위해 맺어야 하는, 형체가 분명한, 먹고, 싸고, 싸우고, 관심 없는 척하고, 사기치고, 배신하고, 훔치고, 울고, 웃는 육체를 가진 인격적 생체를 향한 그리움이 등장한다.
 윤순례. 이 작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한국 소설가들이 특히 장편을 쓸 때, 아니다, 단편집의 경우엔 단편의 편수만 조절하면 가능하니 장편의 경우만, 원고의 분량에 무척 신경을 쓰는 거 같다. 물론 출판사와 협의 하에 결정을 하겠으나 대충 300쪽 위아래로 만들기 위해 작품을 쓰고, 쓴 다음 조절하고, 조절도 모자라면 그냥 잘라버리고, 잘라버려도 좀 뭐하면 막 툭툭 끊어버리지 않나 하는 의문. 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얘기 몽땅 다 해버리면 좋을 것을. 굳이 이런 타박은 앞에서 얘기한 애 아빠가 될 뻔했던 규용과 나의 관계가 과하게 (전체 글의 분량과 비교하여)장황하고, 이어지는 이야기와 큰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 물론 난 지극히,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추어의 시선으로 책을 읽었으니 이 독후감을 읽는 다른 독자들이나 혹시 작가가 읽어본다면 작가를 포함한 모든 전문가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 바란다. 오히려 뒷부분, 즉,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을 기다리게 되는 쪽이 더 많았으면 하는데, 다시 강조, 오직 내 생각일 뿐이다.
 위에선 내 생각을 얘기했고, 이젠 내 주장을 하나 소개.
 모든 문학작품, 그것도 걸작이라고 일컫는 대 문호의 소설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에필로그는? 톨스토이 백작이 쓴 <전쟁과 평화>. 그건 그렇고, 이 책 <낙타의 뿔>에서 제일 뒤에 붙은 에필로그는? 백퍼 사족. 왜 그딴 걸 썼을까? 윤순례가 오늘의 작가상에 빛나는 소설가이기는 하지만 잠깐 돌았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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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전형적인 프랑스 소설. 무슨 뜻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채시라.
 루이 블레리오. 이 자가 최초로 영불해협을 비행해 건넌 사람이라고 한다. 프랑스에 블레리오랭게라는 집안이 있었는데 집안을 이끄는 블레리오랭게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엔지니어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등을 누비며 선진 프랑스의 공학을 널리 전파한 인물로 일찍이 교사 출신 아내를 얻어 외아들 하나를 낳고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프랑스에선 전설적인 비행사, 루이 블레리오라고 널리 불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루이라고 지었단다. 그래서 이 양반 뜻대로 이후엔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루이 블레리오,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까진 좋았지만, 교사출신 아내가 유전적 요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신경질환, 지독한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어 평생을 아내의 기분에 맞춰 사느라 자기 자신을 잊은 수준까지 이르렀던 거다. 이제 나이 일흔이 넘으니 그동안 뭐 하러 자신의 인생을 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데 다 낭비를 했는지 스스로의 영혼이 고갈되는 느낌이 자꾸 드는 모양으로, 급기야 블레리오랭게 씨가 중증 우울증에 입문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전형적인 이십세기 초반 태생의 부부. 이런 집안에서 낳고 자란 루이 블레리오. 성격상 조금의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자연선택에 의하여 그렇게 됐는지, 이혼 경력이 있는 연상의 여자를 골라 혼인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애인, 여자 애인을 둔다. 여기서 잠깐. 루이가 양성애라서 자연선택이니 성격상 문제니 하는 거 아니라는 걸 밝혀두자. 온 라인에서 이런 거 미리 안 밝히고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뭔 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양성애라서가 아니라, 혼인 상태에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에이, 굳이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니 자판 두드리는 맥이 딱 끊겨버리잖아. 이깟 독후감 하나 쓰기도 드럽게 어려운 드러운 세상.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모르겠다 걍 패스.
 루이의 남자애인은 간단하게 관계가 끊어지는데 ‘노라’라고 하는 영국 아가씨는 하이고, 정말로 사랑을 해버리는 단계까지 치솟는다. 노라. 노라? <인형의 집> 생각나시지? 노라한텐 또 애인이 한 명 더 있다. 잘 양육되고 잘 배운 미국인으로 영국에 와서 금융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엘리트. 거구에 얼굴엔 천연두의 흔적이 약간 패 있는 건장한 남자. 그러니까 노라는 영국에 있을 땐 미국인 ‘머피’하고 사랑을 다져나가고 때에 따라 그에게 2~3천 달러 정도를 얻어 쓰며, 연극을 더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오면 유부남인줄 번히 알면서 루이와 진한 사랑을 만들어가며 역시 5천 달러 정도는 그냥 말없이 집어가기도 한다.
 자, 얘기를 루이에게 집중하자면, 루이는 돈 잘 벌어 자신을 사실상 사육하는 아내도 죽자고 사랑하고, 노라 역시 없으면 죽을 거 같이, 세상 살면서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줄 정도로 몸 바쳐 사랑하는데, 둘 가운데 한 명과의 사랑이 깨지면 다른 하나와도 관계가 망가질 거 같은 암시를 자꾸 받는다. 근데, 루이의 아내 입장에선? 이런 거 다 개소리, 멍멍. 그렇지? 그렇다.
 인생은 짧다. 평생 아내의 중증 우울증을 옆에서 보며 간혹 와장창 터지는 폭발을 완전히 감수하며 살아온 늙은 남편은 어느 날 인생이 너무 짧은데 이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자각하지만, 어느새 남은 힘이 없다. 이루지 못하는 욕망을 좇다가 사랑은 내 인생과 그녀의 인생, 둘 다 사랑과 함께 사라지고, 아 도무지 더 이상 쓰면 분명 스포일러인 것을 알면서 계속 얘기할 수는 없고.
 대강 무슨 이야기인줄 아시겠지? 예, 맞았습니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 근데 문장과 문체가 어디서 많이 본 듯. 어디긴 어디야, 20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좀 색다른 문장 나오면, 아는 척 하는 법, 지금 가르쳐드린다. 무조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다, 라고 얘기하시면 거의 맞으며, 폼 또한 무척 난다. 이딴 거, 내 독후감에서만 배울 수 있다. 진짜다. 흐흐흐. 잘난 척은 언제나 즐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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