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어진 하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4
크리스타 볼프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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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타 볼프가 동독에서 이 책 <나누어진 하늘>을 쓰고 출간한 해가 1963년. 같은 토끼 해 자유 대한민국에선 놀랍게도 식민모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다카키 마사오가 원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박정희로 다시 개명하고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복무 중 남조선노동당원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한국전쟁의 와중에 승승장구, 초보 민주주의 공화국의 어지러운 틈을 타 와장창 쿠데타를 일으키더니 자기 손으로 별 네개를 달고 제대를 해 민주공화당 당수에 올라 선거를 통해 제 5대 대통령에 취임, 두번째 해를 맞는 제 1차 경제개발계획에 숨가쁘게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누어진 하늘>을 읽어보고 단언하건데, 1963년 빨갱이 나라 동독은 자유 대한민국보다 훨씬 사상과 표현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던 거다. 25년 후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건 동과 서가 정치적으론 비록 수많은 간첩을 파견하고 온갖 공작을 자행했겠지만, 독일민족 특유의 혈연과 이에 따른 동질감이 이어진데다가 상대적으로 매우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동쪽 독일에서조차도 이런 책을 발간할만큼 충분한 표현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니, 슬프게도 한반도의 남과 북은 아직 구호 말고는 통일을 위한 아무런 전조가 보이지 않는다.

 쓸데없이 길게 머리말을 썼는데, <나누어진...>은 동쪽 독일에서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약 15년이 지난 사이 서쪽 독일이 동쪽보다 월등하게 발전했고 당연히 저쪽 동포들이 훨씬 여유롭게 살고 있으며 이에따라 또다시 당연하게 문화적, 학문적 우월성도 확보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여러번, 일반 동독 인민까지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밝힌다. 위에서 같은 해 한국의 상황을 얘기한 건 같은 시기에 공산주의 국가 동독보다, 단언하건데, 파시스트 비슷한 대통령이 지배 또는 통치, 부드럽게 말해, 다스리고 있던 대한민국보다 훨씬 풍족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의 학문과 경제가 남쪽보다 우월했던 게 사실이라는데, 이 뻔한 사실을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에 와서야 일반적으로 알려졌고, 파시스트와 그의 아들들, 이름이 뭐라더라 전두환이라던가, 하는 파시스트 적的 아들 대까지 와서도 북이 남보다 더 잘산다던데? 했다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을 일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사실이 무엇보다 부러웠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가 도래하니 그 새 내 청춘도 몽땅 사그러지고 말았던 거다. 그래서 위에서 한 얘기 지금 또 중언부언. 하지만 이런 사실이 책의 소감으로는 어울리지 않아서 더 말하지 않겠다. 뭐라? 할 얘기 실컷 해놓고 더 안하겠다 하느냐고? 어때, 쓰는 사람 맘이지.

 동쪽 독일의 한 촌구석에 열 아홉 먹은 참한 아가씨가 (우리나라로 치면)고등학교 졸업 후 보험회사 출장소에서 한가하게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가씨 앞에 화학을 전공한 이학박사가 등장하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나이 차가 좀 나긴 하지만 사랑엔 국경도 없는데 그까짓 십년 남짓한 나이 차 때문에 연애를 못한다면, 서태지, 이병헌, 서경석, 이승환에다가 요즘들어 마동석까지 숱한 연예인들, 장가 한 번 못가고 다 총각귀신됐게? 나이많은 이학박사가 어떻게 열아홉 순정을 꼬드기냐 하면, 넌 똑똑하니까 대학에 가야지? 그럴려면 먼저 (공산주의 나라니까) 노동현장 경험이 있어야 하는 거, 몰랐지? 나하고 같이 살자. 낮엔 공장 다니고 밤엔 조금씩 공부하다가 공장 주임이 추천서를 써주면 대학에 가는 거야, 어때? 그리하여 열아홉 순정은 박사의 집에서 시부모 모시고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살게 된다.

 근데 이딴 얘기만 나오면 그건 전후 독일 얘기도 아니다. 먼저 이학박사 가족간의 갈등이 툭 튀어나온다. 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를 앞 세대로 둔 천형을 짊어진 독일민족. 문학 작품 속에서도 그들의 반성문은 숱하게 나오는데, 이 책에선 박사의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나치 친위대의 골수에다가, 나치 하에서 출세를 위해 아버지로서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박사에게 저질렀다고 설정했다. 자, 이해하자. 박사가 가족 문제로 전혀 존경, 존경? 존경은커녕 경멸해 마지않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밖으론 자신이 만든 기계장치가 학문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해 자존심 팍 상하고, 여기에다가 은근히 열아홉 순정과의 사랑의 농도도 좀 희석되는 거 같고, 해서! 서베를린으로 토껴버린다는 전제. 왜 상세히 이런 얘기를 다 알려드리느냐 하면, 비교적 책의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책의 뒤는? 뒤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나누어진...>은 한 개인이 동과 서로 나누어진 하늘 때문에 치명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 그걸 치유하는 과정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과정이 독자로 하여금 심장이 저릿저릿하게 한다는 거, 이거 만 얘기해도 이 책을 진짜 읽어보실 이유는 되리라 믿는다. 안타까움을 독자가 계속 갖게 하는 책. 힘들게 유지해온 사랑까지 동과 서로 쪼개버리는 세계에 대한 통곡.


 


 

 그.러.나… 역자 전영애. 설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괴테 학회장을 역임한 비까번쩍한 이력을 자랑하듯(남산에 있는 괴테 하우스 1977년이던가 78년이던가, 오픈하는 날 직접 가봤다. 독일에서 공부한 장혜원 선생이 베토벤의 <발트슈타인>을 연주했다. 거기 대빵이었다는 말씀은 아니겠지?) 깔끔한 번역이 눈에 띄는데, 시금치 동생, 근데, 어째 좀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는다.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전형적인 여류작가답게 여성의 섬세한 심리의 끈을 조밀하게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라 이런 소설을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가며 읽을 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가 이상하게 문맥에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럴 경우는 거의 대부분 번역문에 문제가 있는 법이다. 한 번 읽어보시라. 좀 길게 인용하겠다.


 "'……… 이 일이 가늠구멍이며 가늠쇠 너머 살아있는 표적에 겨누어 총을 쏘는 것보다는 목공일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지. 믿을 수 있겠어?' 그러나 그가 그 사실을 이해했다면 지나칠 것 없다는 거야 그녀도 분명히 인정 하리라고, 하지만 그가 전쟁에서 돌아오자 곧장 서른여섯 살 나이로 당에 가서 입당신고를 할 이유가 불분명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거라고.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충직한 마음으로 오기만 했다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느냐는 끈질기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06쪽)


 "그의 이러한 실추에는, 온 국민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해왔던 그라는 한 사람에 대한 불의 못지않게 국민전체에 대한 정의가 결부되어 있었다." (108쪽 : 썅 '결부'란 얼토당토 않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 때문에 얼마나 헤맸는지!)


 내가 내린 결론은 전영애가 단문의 경우는 매우 깔끔하게 번역을 하지만, 크리스타 볼프가, 이이 말고 다른 작가의 작품을 번역할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으나, 번역해야할 문장이 길어지기만 하면 헤매는 거 같다. 숱한 문장지도 책에선 문장을 길게 쓰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난 한 번도 그딴 책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내 문장도 상당히 긴 편에 속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할 수 없다. 박상륭과 이문구를 읽은 다음부터 이렇게 고정되어 버렸다) 그리고 긴 문장의 글은 (제대로)쓰기도 힘들뿐더러, 번역하기는 더욱 힘든 거 같다. 긴 문장으로 악명높은 작가들, 조이스, 프루스트, 포크너, 이 사람들이 쓴 작품을 읽고 쉽다고 얘기하는 사람을 아직 보질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영애 선생, 비문이나 적어도 비문에 가까운 번역을 하시면 돈 주고 책 읽는 사람 기분 별로지. 이 역자의 글이 비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 두개의 경우 특히 첫번째 문장들은, 같은 내용을 한 삼십번 읽어봐야 했는데 물론 첫째가 내 IQ에 문제가 좀 있어서 그랬겠지만, 앞으론 보다 더 친절한 번역을 해주시면 좋겠다.

 기억하시라. 단어 하나 때문에 문장을 서른 번 읽는 IQ 낮은 독자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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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4-2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상륭과 이문구 ㅋㅋㅋㅋㅋㅋ 거기에 김원우까지 합세하면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폴스타프 님 글은 쉽게 읽힙니다.

Falstaff 2017-04-27 11:49   좋아요 0 | URL
ㅎㅎ 쉽게 읽힌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문장 길게 쓰는 건 좋은 버릇 아닌 거 같아요. ㅠ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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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어디가 안 그렇겠는가만, 미합중국 사람들 얘기하는 거, 특히 헐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를 보면 유독 미국인이 '가족'에게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 같다. 근데 에드워드 올비가 쓴 드라마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읽어보니까 미국인들이 가치를 둔다고 대한민국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중간에 엄마 아빠, 밑으로 아들 딸들이 졸망졸망 달려있는 가족, 가능하면 흰 페인트가 칠해진 이층집에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자식들과 함께 사는데 가끔 아이들의 설익은 연애담이 부모 가슴에 안타까운 상실을 안기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럭저럭 만족해가며 사는 중산층 이상의 가족, 할아버지 할머니는 차 타고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옛집에 살며 적어도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엔 큼직한 칠면조를 잡아 자손들 모두를 불러 시끌벅적한 파티를 여는, 실선이 아니라 점선으로나마 거의 완벽하게 질서가 잡힌 일종의 대가족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거 같다. 뭐 이런 가족이 이젠 비단 미합중국에서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된 지도 꽤 오래인 것 같지만.

 그러나 눈을 가족에서 좀 더 분화된 부부로 돌리면 얘기는 좀 이상하게 변질한다. 에드워드 올비는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미국의 중년부부와 신혼부부를 한 집에 모이게 하여 각 부부들이 만들어가는 부부간의 권력투쟁, 의사불통, 가치의 상실, 그리하여 발생하는 개별적 존재의 소외와 고독, 기어이 상대를 경멸하고 상처를 주고 싶어하는 가학성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물론 이 작품과 장면들은 지식적으로만 상류층, 그것도 어느 한 부부를 특정하여 소외와 고독, 불통, 경멸과 가학의 극단적 샘플을 채취했겠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부부가 살면서 작게나마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런 행위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거나, 적어도 마음 속에서 저질러보지 않은 부부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미혼 남녀는 모르겠고, 결혼생활을 한 번 이상 해본 사람들이 이 책에 깊은 공감, 아니면 가벼운 긍정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새벽 두시가 되어 파티에서 돌아온 마사/조지 부부. 마사는 벌써 술에 만땅 취한 상태인데 두 명의 프로필을 한 번 보자.


 마사 : 덩치 크고 사나운 여인. 52세지만 다소 젊어 보인다. 풍만하나 지나친 편은 아니다.

 조지 : 마사의 남편. 46세로 말랐으며 머리가 세는 중이다.

 위의 프로필 말고도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으니, 마사의 아버지가 지금 조지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창립자이자 현 총장이다. 조지의 행정능력이 조금만 더 향상된 것을 마사의 아버지가 인정하면 조만간에 총장의 자리까지 따 놓은 당상이지만 암만해도 거기까지 조지가 이루기엔 힘이 많이 부치는 상태. 미국에서도 나이가 여섯살 정도 많으면 부부간에 그것도 권력이 되는 모양이다. 너, 내가 나이 많다고 지금 싫증내는 거 아냐, 그지? 내가 너보다 훨씬 늙고 못나서 나하고 못하는 건 이해 하는데 그러면 비아그라도 먹어 봐야지 그건 안 먹는 거야, 왜? 좋아 좋아, 다 봐줄 테니까 가서 물이나 한 잔 따라와. 얼음 두 조각 넣는 거 잊지 말고. 

 여기에 낀 젊은 부부 허니와 닉. 닉은 같은 대학의 서른 살 먹은 젊은 생물학과 교수이자 현명한 처세가.

 두 부부가 만들어가는 비극적 의사불통과 소외와 고독과 가학과 절망의 드라마.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한 불통의 현상학.


 그러나, 난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이 훌륭한 드라마에 가혹하게 추가되는, 두 부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 허위와 위선에 관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될 장치를 직접 확인해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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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4-2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동명의 영화로 보고(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 원작에 관심이 가서 읽어 볼 요량으로 챙겨뒀어요. 영화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ㅎㅎ

Falstaff 2017-04-26 15:19   좋아요 0 | URL
옙! 근데 전 못 봤어요. ㅠㅠ
DVD 하나 사야겠어요. 근데 공간이 워낙 한정된 작품이라 영화로 하면 좀 심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영화까지 봐야겠습니다. ㅎㅎㅎ

윽! 근데 DVD 가격이 그새 왤케 올랐을까요? 이거 공포수준이네요. ㅠㅠ

잠자냥 2017-04-2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켁 블루레이로 나오면서 가격 정말 후덜덜하네요.

Falstaff 2017-04-26 15:38   좋아요 0 | URL
하여간 봉급 빼곤 다 오른다니까요!!
 
둔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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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진작 좀 읽을 것을. 10년 전 만해도 일생의 로망이 한국산 SUV를 운전해 장안(지금의 시안)을 출발해서 감숙성甘肅省간쑤성을 지나고 사막 한 가운데 윈깡석불과 위구르 자치구역을 통과해 키르기스스탄과 가자흐스탄 고원, 늑대와 고산표범이 배회하는 광활한 고원지대까지 질주해보는 것이었다. 아니면 울란바토르를 출발해 고비사막을 관통하여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것도 염두에 두었었는데 이건 고비사막에서 바라보는 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 혹해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럽 문명, 주로 기독교 성당과 봉건시대 왕들과 귀족의 성으로 축약하는 유럽문명에 관해서는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대신 스무살 무렵부터 내 희망사항은 궁극적으로 눈 닫는 곳까지 이어지는 사막을 지나, 드넓은 초원이 지평선을 채우는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언덕배기에 오르는 것이었다. 젊어서는 걸어서, 조금 나이 먹어서는 카라반에 동행해서, 더 나이 들어는 SUV 차량을 운전해서, 이젠 꿈에서나마. 그리하여 지금 생각해보니 4월 14일 독후감 올린 단편집 산월기에서도 <이릉>을 제일 재미나게 읽었을 것이고 <둔황>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생각 안 하고 단번에 읽어버렸을 것이다. 나한테는 <둔황>이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명작, 단, 나 한 명을 위해 쓴, 말 그대로 '나홀로 명작'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행위의 마지막 목표점은 감상하는 자의 쾌락에 바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한 쾌락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둔황>이 명작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통일 중국 역사상 가장 약골이었던 북송시대. 어려서부터 동네 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조행덕이란 32세의 장정이 과거급제를 목표로 황제의 궁궐이 있던 개봉(지금 이름: 카이펑)에 와 과거를 봤는데 1차 합격, 2차 합격 이렇게 n차 합격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형식적으로 치루는 면접시험을 대기하는 도중에 이 패 죽일 게으름뱅이 놈이 바위그늘에 앉아 그만 깜박 잠이 들어 면접시험을 치루지 못해 낙방을 해버리고 말았다. 문화와 과학수준은 세계 최고였지만 무력을 키우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한 송. 나라의 수도 개봉, 카이펑은 지금 (한반도보다 낮은 위도에 위치한)중국의 하남성(허난성)에 있는 바, 당나라까지 수도 장안과 원나라 이후 수도 북경을 생각해보면 개봉에 도읍을 정한 송나라는 처음부터 북쪽 오랑캐의 시도 때도 없는 침공에 맞서 대차게 대처하기보단 오랑캐의 침공을 어떻게 좀 무마하는 수준에서 처리하려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5호 16국 시대의 무차별한 칼싸움에 넌더리가 난 때문이기도 하겠다 싶기도 하고. 하여간 이러한 때 과거 낙방한 조행덕이 개봉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모종의 사건을 우연히 보고 (역사는 중대한 우연이 매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법이라서) 단박에 장안 서쪽 저 사막 멀리 새로이 탕구르 족이 세운 서하西夏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겠다고 결심을 해버린다. 명색이 장편소설의 주인공이니 마음 먹은대로 진짜 서하로 가긴 갔지만 가자마자 서하의 포로가 되어 포로 한족으로 결성된 군대에 들어가게 된다.

 자, 여기까지.

 송나라의 경제를 결정적으로 거덜이 나게 한 서하와의 7년 전쟁. 이 와중에 인텔리겐챠 조행덕이란 인물이 사막을 건너 서하까지 기어가 과연 어떤 일을 했을까. 전투에만 나섰다 하면 죽기살기로 전투에 임하지만 원래부터 문관 지망생의 약골이라 언제나 전투 도중에 까무러쳐 말과 몸을 묶은 끈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목숨을 부지했던 조행덕. 역시 그의 진가는 붓을 통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저 야만과 불모의 땅, 사막의 도시 서하에서 붓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한 자루 붓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 현대, 20세기에 와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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왑샷 가문 몰락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3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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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왑샷 가문 연대기>를 읽어보신 분은 치버의 <왑샷 가문 몰락기>를 그냥 건너뛰기 힘들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만큼 재미나는 연작 장편. <....몰락기>에선 <...연대기>의 주인공 리앤더가 한편으론 난데없이 엉뚱하고 한편으론 낭만적이다 싶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 그의 늙은 여동생 오노라 왑샷이 조그마한 시골 바닷가 세인트보톨프스의 막강한 유지로 등장한다. 저 대서양 건너 영국의 록스포드에 살았던 빌로우스 여사, 시도 때도 없이 충실한 하녀 플로오오오오오렌스! 를 외치면서 동네 경찰서장, 주임목사, 학교 교장, 상인연합회장 등의 의견을 여지없이 묵살해버렸던 빌로우스 여사와 무지 비슷한 캘릭터라고 생각하시면 오차 없을 듯. 하여간 세인트보톨프스의 레이디 오노라 왑샷한테는 조카 둘이 있었는데 둘 다 죽은 리앤더의 아들들로 일찌기 왑샷 여사께서 둘 다 대처로 나가 반드시 성공해 금의환향하라는 엄명을 때려놓은 상태. 그래서 큰 조카 모지스는 도시로, 작은 조카 코벌리는 핵폭탄(을 은유하는 극한 냉전시대의 가공할 만한 무기)을 연구하는 사막 근처 기지에 직장을 얻어 생활을 하는데, 제목이 '몰락기'라고 했으니 궁극적으로 둘이 인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망가뜨리느냐 하는 데 촛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결론을 말하면 왑샷 가문은 말 그대로 산산히 부서져버린다. 정말? 아니, 천만의 말씀. 생물학적으로 몰락이라고 함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단어인데, 오노라 여사는 뭐 그렇다고 쳐도 조카 둘 다 어쨌든 자신의 Y염색체를 이어나가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사회적으론 모지스의 경우, ………… '작가 치버와 비슷하게' 라고 그의 망가지는 과정에 관해 몇 줄 썼다가 지웠다. 사실 이 재미있는 소설의 제목이 '몰락기'라고 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오노라의 두 조카가 망가지는지 성공을 하는지 내색도 하지 않고 시침 뚝 떼고 독후감을 쓰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그건 일찌감치 글렀다. 하지만 어떻게 망가지는지에 관해서는 '양심상' 여기다 밝힐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오노라 왑샷 여사의 몰락에 관해선 뭐, 이 정도야.

 그녀는 난데없이 탈세의 죄목으로 인생이 끝날 위기에 처한다. 옛날 여성 오노라는 많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 가볍지 아니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걸, 당연히 이해는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비슷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돈을 받는 게, 내가 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뭐 어때서? 이 의미가 아니라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만 도무지 진짜로 실행할 생각은 못하는 딱 그런 세대의 대표선수였다는 의미. 그리하여 동네에 같이 늙어가는 지방판사의 조언을 듣고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니 바로 해외도피. 그러나 다 늙은 할머니가 홀로 해외도피를 한 들 그게 맘먹은 대로 쉽나? 이제는 바닷가의 쓰러져가는 집에서 유령으로 출몰하는데 만족하는 그이의 동생 리앤더 왑샷을 만나러 가는 길 말고는 남지 않게 된다.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리앤더의 유령. 모잽이 수영으로 저 먼 바다로 헤엄쳐간 리앤더는 자신이 살던 집에 가끔 출몰해서 아들 둘이 똑같은 지분을 갖고 있는, 한땐 제법 규모도 크고 가격도 만만치 않던 집의 월세값 혹은 집값을 뚝! 떨어뜨리기만 한다. 유령출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둘째 아들 코벌리가 하루는 영 터무니 없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옛 고향을 한 번 들렀다가 우연히 옛집에서 하루밤 잠을 자러 들렀는데, 왑샷가문이 뭔 햄릿 가문인 거 처럼 코벌리의 아버지가 쿵쿵쿵 마루장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코벌리 앞에 우뚝 섰다가 또 쿵쿵 걸어가지만, 확실한 건 코벌리는 죽었다 깨도 햄릿이 아니라서 아버지의 유령을 보자마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쳐버렸다는 얘기.

 근데 여태까지 이 재미난 책의 스토리와 등장인물에 관해서만 열나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짜 이 책을 재미나게 하는 건 스토리보다도 무수한 문장들과 단락에서 마구 쏟아지는 해학과 풍자와 시절의 그리움과 익살과, 코미디 속에 잠들어 있는 비극성, 이런 것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 치버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반 가량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반 정도만 제대로 잡아챘다면 기꺼이 이 책을 읽고 다른 이한테도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 진짜 이유는 스토리와 그 속에 스파이처럼 잠입해 있는 시절과 감정들을 나꿔채는 일일진대, 치버의 <왑샷 가문 몰락기>는 이런 면에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즐기기 전에 <왑샷 가문 연대기>를 먼저 경험하시는 편이 매우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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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밀라 - 미다스 세계문학 1
칭기즈 아이트마토프 지음, 이양준 옮김 / 미다스북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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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밀라, 라는 젊은 유부녀 바람피는 이야기. 그걸 보고 '세상'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광고하는 책장사 사장님. 흑흑흑.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세상에나 돈이 그렇게 좋니?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다른 작품 <백년보다 긴 하루>를 읽어보신 분은 딱 그거 하나 갖고 아이트마토프(아쒸, 이름이 길기도 하다. 술 덜 깨서 타이프하기도 쉽지 않은데)한테 홀딱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얼마나 <백년보다....>가 좋은지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오랜만에 시내 나갈 일이 있어서 커피 파는 중고책 가게에 습관적으로 들렀다가 만일 눈에 이 책 <자밀라>가 들어왔다면 덥썩 주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좀 과장해 말하자면 커피 한 잔 마실 동안 종업원이 보내는 무언의 사인, 손님, 커피 다 마셨으면 이젠 제발 그만 꺼져주실래요? 이 은밀한 사인을 받을 때 쯤 <자밀라>를 몽땅 읽을 수 있었을 것이고, 종업원이 보내는 무언의 사인에 대한 답례로 2층 커피 파는 중고책 가게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 책 괜히 샀고 괜히 읽었다는 후회를,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란 전제로 말하자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트마토프에 대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주는 고마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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