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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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제는 《슬픔치약 거울크림》이라고 표기하고 각 시의 제목은 <구름의 노스텔지아>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하나 그딴 거 구분하지 않고 다 <우짜구저짜구....> 이렇게 쓰겠다. 특수문자 골라오기 귀찮아서.

 

 

 

 이이의 시는 아주 가끔 읽어봤을 뿐이다. 1979년 스물 네살 아가씨 시절에 데뷔한 이래 아직까지 꾸준하게 시집을 간행하는 저력있는 시인, 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이이의 시집을 한 번 읽어볼까 했는데 어째 손이 가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읽게 됐다.

 <슬픔치약 거울크림>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나처럼 시에 대해 일천한 사람은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초현실적 수수께끼와 많이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으로 채웠다. 나처럼 보통의 인간은 (아, 내 경우엔 애초부터 우울증 기질이 좀 있긴 하다) 기분이 저조하여 지금 내가 우울하구나, 이렇게 인식을 하지만 높은 단계에 있는 시인의 경우엔 그러지 아니한다. '높은 단계의 시인'의 우울은 일반 어린 백셩의 우울과 같지 아니하여 '우'와 '울'이 서로 교통하여 문학적 댓구를 이루기도 하고 때론 음악적으로 카운터포인트 즉 대위법적 화성을 만들어낸다. 문학적 댓구의 경우를 보면, 이 시집에서 첫번째 등장하는 시이기도 한데, "우는 구름을 덮고, 울은 그림자를 덮었네 / 우는 바람에 시달리고, 울은 바다에 매달렸네"(<우가 울에게> 부분 11~13쪽) 이런 식. 대위법적 화성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경우. "우는 산산이고, 울은 조각이고 / 우는 풍비이고, 울은 박산이고"(같은 시). 이런 '우'와 '울'의 댓구 또는 카운터포인트는 무려 세 페이지에 걸쳐 계속된다. 다 좋은데 문제는 나같이 무식한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건데, 또는 질문하건데, "근데 뭘 주장하는 거야?" 김혜순의 초현실적 초감각적 시각은 대상을 불문하고 도처에서 반짝인다. "눈뜨고 그냥 있는 거다. 멍하니란 말 참 좋다. / 멍하니? 멍하다. / 잠수부 아줌마가 있다. / 25미터 산소줄을 잠수복에 매고 / 우주인 같은 철모를 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 키조개를 줍는다. / 하루 8시간 심해 속을 걸어 다닌다." (<안경은 말한다> 부분 12~14쪽) 비단 시인뿐이겠느냐만 갑자기 멍때리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시인은 TV에서 봤던 잠수부 아줌마가 떠오르고 바닷속의 압력과 좁은 시야를 자신의 멍한 순간과 합치시킨다. 물론 우리는 초감각적 시를 읽는 착한 독자의 입장에서 시인은 일상 생활 혹은 시를 쓰는 행위 중에 가끔 멍한 순간이고, 잠수부 아줌마는 일상화된 수압으로 하여금 심각한 심혈관 계통의 질환을 무릅써야 하는 노동을 하고 있는 순간이라는 주장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이런 초현실적, 초감각적 엽기 잔혹의 극치는 <유리우리>에서 볼 수 있다. 유리우리? 이게 뭔 뜻인지 헷갈리시지? 척 보고 아시겠으면 나보단 시적으로 아주 높은 이해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난 몰랐다. 하지만 곧바로 나온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가득 찬 우물 속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어. / 아, 갈기갈기 울고 싶은 이 마음은 이 우물이 나에게 준 것. / 카페가 울어. 잔도 울고, 병도 울고, 화초도 울고, 웨이터의 앞치마도 울어. / 깨진 유리를 우산으로 받고 선 소녀가 아까부터 창문에 붙어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어. / 먼 옛날 내가 갖고 싶던 것들은 다 진열장 속에 있었어. / 그래서 그런지 유리 안에 든 것들은 일단 다 무서웠어. / 이 술이 무섭니? 왜 무섭니? 저 빵이 무섭니? 왜 무섭니? 유리창에 담긴 / 사람들이 무섭니? 왜 무섭니? 유리창 속에 담긴 / 사람들이 무섭니? 왜 무섭니? 애인들은 물었어." (<유리우리> 부분. 44~46쪽) 글쎄. 깨진 유리로 가득 찬 우물 속에 자맥질을 해?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우물 깊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분히 깊기만 하다면 사람 몸에 달려있던 껍데기는 홀다당 다 까질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사실 당신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에 비하면 그리 심각해보이지도 않는 고통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고, 또 그게 아픔에 대한 대단한 비유이긴 한데, 독자는 으째 으스스 엽기 괴기 잔혹 영화, 시인이 등단하기도 전에 나온 클래식 공포영화 <오멘>을 보는 거 같다. 독자가 그렇게 느낄 지는 전혀 몰랐겠지. 유리창이 깨져 깨진 유리 조각이 아래로 떨어지며 사람의 팔뚝을 아작내는 걸 시인이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을까? 없다는 데 만원 건다. 그러니 유리조각이 가득한 우물로 자맥질한다는 표현이 나오지. 스물네 살에 시인이 되어 이날 입때까정 유명시인의 계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뭐가 그리 고통스럽고 우울할까. 아, 알아, 알아. 세상의 누가 있어서 고통스럽지 않고 우울하지 않겠어. 나름대로 다 그런 것이지. 근데 좀 적당히 엄살을 피우라고. 물론 자신의 고통이나 우울이나 삶의 지겨움이나 권태를 이것 저것에 비유하여 푹푹 삶아내는 직업이 시인이긴 하지만, 김혜순 시인의 작업을 읽고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앞으론 차라리 논문을 썼으면 좋겠다는 거. 앗! 이렇게 얘기했다가 이이를 사사한 숱한 시인과 시인 지망생들이 와르르 모여 그 사람들한테 각각 한 대 만 얻어터진다 해도, 금새 맞아 죽을 거 같은데 이걸 어째? 싹 지우고 말까? 큰일이다.

 2부는 AI, 요새 유행하는 알파고 같은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니라 조류 인플루엔자를 얘기하는 건데, 오리, 닭, 거위, 타조? 같은 날짐승에 관한 비가 뿐 아니라 구제역과 광우병 등으로 인한 길짐승에 대한 살처분, 숱한 생명을 한 방에 생매장해 죽이는 비극성을 주제로 엮었다. 근데 정말 웃긴 것은 일부 염병할 평론가들이 이걸 읽고 살처분 당하는 축생들을 보고 사바세계 인간의 짓밟히는 광경으로 (고의겠지? 설마 그 의견을 진짜 그렇게 읽고 의견을 내는 것이겠어?) 오독하는 지경에 다달아, 이이의 다른 시집 《피어라 돼지》를 5.18 문학상으로 찍어주었다고 한다. 물론 시인이 정중하게 사양하여 상을 받지 않는 코미디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왕 조류 인플루엔자로 인한 조류 살처분에 관한 시를 쓸 거라면 새에 관해 공부를 좀 하시지,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안타까웠다. 아마 시인은 아직도 모를 것이다. 새의 수놈에겐 페니스가 없다는 걸. 평생 날아다니느라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1년중 극히 짧은 시간에만 필요한 페니스 따위의 무게를 감당하고 1년 내내 비행할 이유가 없어서 스스로 페니스가 없는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어? 근데 KBS 제1방송에서 송출하는 <동물의 왕국>에서 새들의 교미장면을 보셨다고? 아무렴. 새들은 그거 대신에 생식강이라고 하여 작은 구멍만 뚫려 있어서 유사시 암수 새들이 서로 생식강을 마주 대고 정액을 뿌리는 걸로 짧은 섹스를 마친다. 못 믿겠으면 하루종일 날아가는 새 쳐다보시라. 진짜 있는지 없는지. 시인은 2부의 <나무들 파티>에서 "청소부가 피티걸에게 꽃무늬 소파를 짊어지고 / 너의 그 넓디넓은 성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 청소부가 파티걸을 소파에 실어주었다 / 청소부가 파티걸을 숲 속에 버려주었다 / 파티걸이 무거운 소파를 숲 속에 내려놓자 / 새들이 소파에 오줌을 싸고 갔다" (<나무들 파티> 부분 82~84쪽)이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새들은 오줌을 싸지 않는다. 시인이 오줌을 누니까 새들도 오줌을 누는 거 같지? 시인은 요소를 방출하고 새는 시인보다 비뇨기적 측면에선 훨씬 진화하여 요산을 방출한다. 분뇨가 함께 배설되며 그래서 새똥이 언제나 묽은 거. 몰랐나보다.

 2부의 마지막 작품, 무려 35쪽에 이르는 장시 <맨홀 인류>를 아무 감흥 없이 읽고 3부로 넘어가면, 시인이 고등학교인지 대학인지 하여간 교사생활을 하는 장면, 자신의 학생시절과 비교하기도 하고, 요새 학생들 모습을 그리기도 하는 시들을 소개한다.

 김혜순 시인이 우리나라에서 방귀 깨나 뀌는 시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맨 앞에서 얘기하듯, 시인의 시들은 몇 개 간혹 읽기는 했지만 시집을 사서 전편을 다 훑어본 건 처음이다. 시가 대체로 길다. 사람마다 다 호오가 있겠으나, 시 독법에 관해 별 의견이 없는 내 생각으로 말하자면, 왜 언어를 낭비할까? 라는 의문. 물론 시가 잘 팔려서 아직도 왕성한 시 창작을 하고 있겠으나, 더욱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시들이 어째 인쇄기에서 팍팍 찍어져 나오는 느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이건 시에 관해 전혀 조예가 없는 사람의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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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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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네이셔스 라일리. 32세 미혼. 루이지애나 뉴 올리언스의 습기 많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초록색 사냥 모자를 언제나 쓰고 다니는 거구의 뚱보. 석사 학위까지 받아놓고도 홀어머니한테 얹혀사는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챠. 기하학과 신학이 사라져버린 현대 사회에 대한 통렬한 증오에 가득하여 모든 것에 관해 독설을 내뿜는 스콜라 철학자이자 사회 부적응자. 스스로 짐작하건데 유문 괄약근에 문제가 있어 거대하게 먹어치운 음식들이 위장에서 발효한 가스가 시도 때도 없이 끅, 꺽, 심각한 냄새와 함께 트림으로 분출하는 메머드 취향의 폭식증 환자. 코밑 두툼한 수염엔 언제나 음식 찌꺼기와 침, 콧물이 매달려 있는 인간. 지상 최고의 미덕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이 사람이 <바보들의 결탁>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책의 작가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박사과정 중에 세계대전에 참전. 와중에 <바보들의 결탁>을 쓰고 대박을 예감했으나 출판사마다 거절. 이후 루이지애나 주 뉴 올리언스 소재 어머니 집에서 숱하게 개작. 홀어머니한테 얹혀 살며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와 신경전. 그러나 주로 일방적 잔소리. 어머니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존 케네디 툴의 자존감은 날마다 곤두박질. <바보들의 결탁>을 출간해주겠다는 출판사는 결코 등장하지 않음. 절망과 우울 사이에서 드디어 1969년 12월이 오고 자살을 감행하여 서른 두 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성공을 거둠.

 존의 이름 미상의 어머니 툴 여사. 존이 죽고 7년 가까이 흐른 1976년. 무턱대고 루이지애나 소재 로욜라 대학의 워커 퍼시 교수 앞에 아들이 쓴 소설 <바보들의 결탁> 원고뭉치를 들고 등장. 이거 한 번 읽어보라 떼거지를 씀. 착한 퍼시 교수는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여사의 부탁이 하도 강고하여 부탁을 들어주기로 함. 읽어갈수록 글의 매력에 빠져들어 이 책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수배함. 드디어 책이 나오고 나오자마자 퓰리처 상을 수상. 이후 뉴욕타임스 선정 최근 25년 이내에 출간한 최고의 미국 소설 리스트에 오름.


 지독한 코메디. 외국 코메디 소설의 맹점은 그들의 웃음 코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스꽝스런 표지를 한 이 책 <바보들의 결탁>을 읽어보시기 권한다. 한 엉뚱한 뚱보가 뉴 올리언즈 온 도시를 헤집으며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걸 볼 수 있다.

 내 경우에, 처음엔 아무리 책의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이리도 자신의 생각 속에만 몰두하는 사회 부적응자의 이기심 넘치는 파렴치 짓을 계속 구경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혹평을 했다. 골통짓도 한두 번이지 자신과 이웃과 더 넓게 한 공동체에 전혀 책임감 없고, 소속감 없는 난리법석. 거기다 범상치 않은 지식과 지성을 무기로 온 세상을 향해 무참하게 퍼붓는 융단폭격. 단 한 명으로 인해 그가 사는 동네, 아주 짧은 기간 그와 함께 일을 한 모든 사람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황당한 곤경. 아무리 코메디 소설이라고 해도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역시 좋다고 소문이 났더라도 외국 코미디 물은 함부로 읽는 것이 아니었어.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도 빼지 않고 완전한 실패로 돌아오고, 그와 함께 엮이는 모든 시람을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한 이그네이셔스. 머나, 라는 이름의 대학 동창생 아가씨가 무위에서 그를 구출하기 위해 어머니 집 침대에서 빼내려 뉴욕에서 자동차를 1박2일 동안 잠 한 숨 안 자고 달려오고, 작가는 이 책을 쓰며 주인공, (외모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처지에 관해서는)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투영한 이그네이셔스, 그의 실패를 작가는 바라보면서, 비록 그가 만들었으나 이그네이셔스의 모든 행위는 바로 이그네이셔스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는 작가는, 글을 쓰면서 철저한 외톨이, 거구의 뚱보이자 사회 부적응자, 더러운 신체와 의복,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와 지독한 냄새의 트림을 뿜어내는 괴멸해가는 지식인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해, 그래도 살아야 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 해, 격려도 하고 갈망도 하고 굳센 의지도 주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자신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것, 책을 쓰면서 작가는 자신도 얼마나 더 살고 싶었을까, 얼마나 더 살고 싶었기에 이토록 절절하게 살아야 해, 그래도 살아야 해, 라고 몇번에 걸쳐 이야기를 했을까,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난 책을 읽으며 가슴의 많은 부분이 한 순간에 확 비어버리고, 이 지독한 코미디 소설을 읽으면서도 갑자기 숨이 컥 막혔으며 기어이 떨어지려고 하는 물방울 하나를 눈꺼풀 밖으로 흘리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책을 읽은지 일주일이 지나 독후감을 쓰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니 다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또다시 입천장 뒤쪽부터 눈가 까지의 한 줄기 선腺이 매캐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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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5-2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사 학위까지 받아놓고도 홀어머니한테 얹혀사는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챠.‘에서 그냥 끌려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17-05-24 10:56   좋아요 0 | URL
외아들이라서 사실 엄마도 기꺼이 아들한테 주눅들어 하면서 함께 살려고 하는데, 문제는 괜찮은 영감이 하나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ㅋㅋㅋ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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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후밀 흐라발, 정말 내 취향이다. 이 책이 지난 해 말 서울의 종잇값을 올린다고 소문이 짱짱해 1월에 사서 이제야 읽었다. 1월달에 책에 관해 별 정보 없이 샀다. 그러길 다행이지 만일 자세하게 살펴봤더라면 본문만 130쪽도 되지 않는 중단편 소설을 선뜻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월에 이 책을 받은 첫 느낌이, 출판사 문학돈내의 얄팍한 상술 말고는 별로 없었다.

 정말 내 취향이다.

 한 늙은이가 있다. 1인칭 시점의 주인공 한탸. 이이는 35년간 폐지 압착을 해오고 있다. 젊어서부터, 그니깐 한 1910년대 중반부터 폐지를 압착한 한탸에게도 세계사의 격랑은 피해가지 않아서 근대사의 화약고였던 발칸반도의 서북쪽에선 왕조의 멸망, 오스트리아에 의한 지배, 1차 세계대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인접국가와의 갈등, 독일의 심각한 영향력 전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 공산주의 체제 수립 등을 지하실의 압착기계와 더불어 겪어 나갔다. 35년 전부터  폐기되는 종이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던 한탸는 오래 전부터, 왕조와 귀족사회가 무너지며 그들의 개인 서재에 있던 고급 장정의 책들을 자연스럽게 읽게 되면서 스스로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알게 된다. 과거 어느 작가, 철학자가 써놓은 아름다운 글들과 사상에 관하여.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쪽)

 조상, 아니면 적어도 선배인류로부터 받은 지식과 지성의 선물을 압착, 즉 폐기하기가 너무나 아까워 그는 한 권씩, 인류사상의 보물들을 집에 가져가기 시작한다. 수천권의 책이 한탸의 침실에 쌓이고, 이제 침대 위 선반을 고정시켜 놓은 녹슨 못 하나만 툭 부러지더라도 한탸는 몇백 kg이나 되는 책더미에 깔려 몇년 남지 않은 목숨이나마 재촉할 수밖에 없는 처지. 35년이란 세월. 내가 올해 직장생활 만 31년 차. 지긋지긋하면서도 이미 내 일부가 된 느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한탸의 소망. 압착기 역시 기계의 수명이 다 했으니 그간 벌어놓은 돈으로 은퇴와 더불어 자신이 한 세월 함께 했던 고물기계를 사서 기계와 함께 사는 것.

 

 앞에서 말했듯 이 책은 매우 짧다. 더 이상의 스토리는 당신에게 분명한 스포일러. 근면하고 성실하고 대단한 지성까지 갖추게 된 늙은 한탸. 그의 소망대로 만족할 만한 죽음과 만날 수 있을까. 흐라발의 놀라운 비유. 인류의 지성은 격변하는 세계사에서 그나마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얼른 도서관으로 달려가시라. 책 너무 얇다. 문고판 형식으로 만들어 책값을 확 내리든지, 작가의 다른 작품과 합해서 한 권을 만들라는 의미로 직접 사지 마시라는 뜻. 작품은 진짜 좋은데 출판사가 넘 후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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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7-1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ㅎ 나중에 이 책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7-11 17:02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뭐 굳이 다시 읽어보실 것까지 있겠습니까.
도서관 다니시면, 지금 품절인 <영국왕 모셨지>는 ^^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만.
 
2번가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39
에스키아 음파렐레 지음, 배미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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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책인줄 알고 사서 읽었는데 사람들은 이 책 <2번가에서>를 에세이로 분류한다. 깜짝 놀랐다.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쓴 픽션 아니었어? 이 정도의 책은 장르 분류 없이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난 원래 에세이는 안 읽는 습관이 있지만 지금 읽고 있는 게 에세이인줄 모를 경우엔 그냥 읽는 습관도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뻔뻔한 느낌도 드네.

 어린 에스키는, 자꾸 에스키, 에스키 하니까 어째 '애새끼' 하는 어감의 혼동을 피할 수 없긴 하다만 하여간 주인공 에스키는 어려서 부모님과 헤어져 시골의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 왜냐하면, 1920년대 초반엔 도시 프리토리아에 흑인 가족이 살 수 없었으며, 직업이 있는 흑인만 거주할 수 있었는데 직업이 있는 부부 역시 동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종족들이 서로 살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아프리카 인들에게, 특히 줄루 족에 의하여 저질러진 학살을 그들과 전쟁을 벌여 잔인하게 진압해 멈추게 한 영국인이 무지하게 고마운 존재였으며, 그 후에도 보어인과의 전쟁에 승리한 영국인들이 자신들을 약탈과 학살에서 해방시켰다고 여겨 일부 흑인 원주민들은 모든 유럽에서 온 백인을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자식이라고 여기기까지 했단다. 사하라 이남의 원시 비슷한 야만의 상태, 조지프 콘라드의 말대로 암흑의 핵심에 거주하던 이들에게 현대문명과 눈부신 피부를 갖고 있던 백인들의 사려깊게 보이는 교묘한 착취는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도시에 비교하여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던 시골에서 에스키의 뛰어난 지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시험보는 족족 일등. 완고하고 정없고 툭하면 두드려 패는 할머니한테 어느날 엄마가 와서 에스키를 도시 프리토리아의 빈민 외곽지역, 폴란드의 게토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비위생적이고 초라하고 곧 쓰러질 것 같은 동네에 살게 된 에스키. 그리도 그리워하던 부모품으로 돌아가 행복할 거 같았는데 인생이 원래 행복이란 걸 되게 미워하는지라 어린 에스키한테도 괴물을 하나 던져주었다. 바로, 아버지. 아버지로 인하여 집안꼴은 나날이 개판이 되어가고 없는 살림 더욱 비렁뱅이 비슷하게 변해가다가 그것도 모자라 어느날 하루, 감자와 카레가 펄펄 끓고 있는 솥단지를 아버지가 번쩍 들더니 엄마의 풍성한 티셔츠 속에다 쏟아부어버린다.

 그 다음은? 뭐 어떻게 보면 뻔하지. 고생고생 또 고생하면서 끈질기게 공부해 장학금 받아 남아프리카에 있는 흑인 전용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얻고 또 고생하다가 결혼했는데 해고 당하고, 다시 직장을 얻고 공부를 더 하고 드디어 쨍하고 해가 떴다.

 그런데, 내가 자전적 에세이를 소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이 일반적 출세담하고는 거리가 있다는 점. 음파렐레의 글엔 마땅하게 있음직한 미움이나 증오 같은 것이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다. 불평등을 있는 불평등으로 묘사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는 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떻게 벌어졌고, 당시 아프리카의 상황이 이래서 그런 일이 생겼으며 그에 따른 현상은 어떠했다. 이렇게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분리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열을 받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면서 슬슬 차오르는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열악하고 악랄하기까지 한 제도임에도 피해를 입어가며 나름대로 서로 어울려 악착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 않다. 제도야 어차피 지배와 피지배, 수탈과 피수탈이 공식임을 알고 있으니까.

 다만 책의 후반부로 가면 완전히 성인이 된 에스키아 음파렐레, 너무 잘난 척을 해서 밥맛이 없어지기도 하는 게 매우 아쉽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잘 난 줄 다 아는데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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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을 위한 학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8
사샤 소콜로프 지음, 권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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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판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데, 이런 책의 맹점은 불과 닷새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어떤 내용이었더라, 한참을 생각해야 겨우 가늠할 수 있다는 거. 맞아, 지적 장애가 있는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생각의 확장 같은 것을 쓴 책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과 사울을 모티프로 특수학교의 교장, 지리교사, 생물을 가르치는 여교사 등에 관한 지적 장애아의 대뇌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을 순행과 역행의 기차노선을 빗댄 시간의 혼돈과 비벼버린 섞어찌개.

 이 책을 읽으면서 은근히 열 받은 건, 작가 사샤 소콜로프가 지적 장애와 정신착란을 헷갈려 하는 상태에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을 "나의 친구이자 이웃인 지적 장애아 비차 플라스킨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보아 진짜 지적 장애아와 무수한 대화를 나누어 아이(작가가 지적 장애'아'라고 했으니)의 생각 속에 벌어지는 여러가지 스토리를 채집했을 것이 틀림없지만, 문제의 장면이 나오는 모든 문장이 지적장애아의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이 아니라 그 아이가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도록 쓰여 있다는 거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유년기에 작은 소도구(장난감이라 생각하면 더 좋겠다) 하나만 가지고 온갖 스토리가 마치 진짜로 일어나고 있다는 듯이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유년의 아이가 자기가 지금 전개하고 있는 대하 서사시가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스토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 격렬한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그걸 무릅쓰고 홀로 적진을 향해 조자룡의 헌 칼을 휘두르다가도, 개똥아 염병하지 말고 얼른 와서 밥 먹어, 엄마의 성질난 한 마디에 여태까지 잘 가지고 놀던 소도구를 방바닥에 휙 팽개치고 밥 먹으러 달려간다. 정신의 상태를 측정할 때, (성인이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자) 이런 경우 엄마한테 줘박히지 않기 위해 얼른 밥먹을 태세를 갖추는 경우는 정상, 엄마의 열화와 같은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적군의 마지막 한 명 까지 조자룡의 헌 칼로 베어 자신을 정말로 영웅으로 확정한 다음에야 화면이 꺼지는 상태가 정신착란이다. 물론 내 생각. 어디 가셔서 인용하지 마시라. 개망신 당하기 십상이다.

 소콜로프의 <바보들을...>의 주인공(작가가 책을 헌정한 인물과 같은) 비차 콜로스킨은 사람들과 시간의 미궁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 과거에 이미 발생했던 것인지, 앞으로 생겨날 일인지, 아니면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상영되고 있다고 여기거나 아예 그에 관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턱대고 두드려 패기만 하는 교장선생새끼가 교실에 들어 왔서 난리를 치는 것인지, 자애롭고 친절한 지리 선생님이 스팀 파이프 위에 앉아 계신지, 어여쁘기 그지없는 생물 선생님이 앞으로 내가 결혼할 어여쁜 신부인지, 헷갈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인물, 시간, 사건의 사차원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게 지적 장애야? 정신질환 아냐?

 분명한 것은, 작가 사샤 소콜로프가 단 한 번도 지적 장애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거. 아무 생각 없이 읽고나서, 야 이거 참 참신한데,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시도야, 라고 하면 매끄럽게 끝낼 수 있는 독후감이지만, 난 기어코 시비를 걸고 넘어가야 하는 거다. 조또 모르면서 막 써대지 말라고. 장애는 질병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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