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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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집. 모두 아홉 편을 실었다. 책 앞날개에 간단한 작가 소개가 있다. “1987년 서울생.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펑크록 스타일 빨대 디자인에 관한 연구>가 당선되어 등단.” 검색해보면 2022년에 한국일보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소설 때려치우고 창업을 하려 했다가 소설을 좀 더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다. 이 책 이후에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두번째 작품집도 팔고 있다.

  이 책, 오늘 오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컵밥 먹고, 오후부터 읽기 시작해 네 시간만에 다 읽었다. 휴게시간 포함해서. 그냥 훌훌 읽으면 된다. 성장소설 비슷한 것도 있고, 새로 성인으로 진입은 했지만 조금은 갈팡질팡하는 청춘을 다룬 것도 있고, 나는 이게 제일 좋았는데, 여성 연대로 볼 수 있는 <흔한, 가정식 백반>도 있고, 그러고 보니 “가정식 백반” 들어간 여성 작가 작품이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근데 그건 내 소설 취향이 이미 한물 간 시대이기 때문에 나이 든 여성들이 나오는 사는 이야기라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여튼 그렇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책 뒤에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신샛별도 참 기가 막히게 입을 턴다. 이래봬도 내가 면허증 있는 평론가야, 평론가. 서평가가 아니라는 말씀이야, 하는 것도 같다. 신샛별이 첫번째 작품집을 낸 송지현을 두고 “에피메테우스 형 소설가”라고 선언한다. 와. 에필로그 더하기 프로메테우스. 아니다, 아니다. 프로메테우스, 즉 Pro가 앞에 나오는 거니까 형, 에피메테우스, Epi가 뒤에 따라붙는 거니까 아우, 동생이라는 말씀.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의 반대 요소만 생각하면 되겠다. 무슨 뜻이냐고? 모르겠다. 난 그런 거 모르고 그냥 읽었다. (평론가가)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걸 단어로 써서 설명하려면, 아니 그냥 모르겠다. 아니면 신샛별의 해설을 읽고나니까 야코죽어서 도무지 말을 보태지 못하겠다. 역시 사람은 가방끈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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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28 05: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마르그리트 뒤라스, <여름비>
화요일. 커트 보니것, 《아마겟돈을 회상하며》
목요일. 모드 방튀라, <내 남편>
금요일.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stella.K 2024-06-28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천하의 팔님께서 야코를 당하시다니요. 말도 안되십니다.
그래도 뭐라고 써놔는지 궁금하네요. 예전에 평론가들 주례사한다고 엄청 욕먹고 살았는데 요즘 평론가들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ㅎ

Falstaff 2024-06-29 04:54   좋아요 1 | URL
여전히 주례사입니다. 이젠 평론가들도 통통 튀어야한다는 강박이 있는 거 같아 짠하기도 하고 뭐 그렇더라고요 ㅎㅎ

2024-06-28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9 0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골동품 진열실 을유세계문학전집 13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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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표 구라, 장광설. 최고의 발자크인 <잃어버린 환상>의 최상위 귀족 버전. 게다가 짧기도 하다. 서문, 헌사, 본문 합해서 235쪽. 물론 활자 수는 만만치 않을 걸? 발자크의 능란한 문장에 별5를 바침. 나, 도서지원 안 받고 별5 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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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6-27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계속 발자크 읽고 있는데
발자크는 잘 나가다가 끝에서 조금 매끄럽지가 않아 좀 안타까워요.
골동품 진열실, 기대됩니다^^

Falstaff 2024-06-27 20: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발자크가 하도 많이 작품을 써서요.
여기서도 자잘한 에러가 숱하게 많습니다. 30만 프랑을 이야기했다가 뒤에는 10만 에퀴, 즉 50만 프랑이 되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빨리 작품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에러를 낳고, 마무리를 산뜻하게 하지 못하게 만든 거 아닌가 싶어요. 결론으로 가면 작가들이 좀 급해지는 경향도 있잖아요. ^^
 
호랑이 등에서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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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위대했던 오스만 제국에도 어느덧 황혼이 내린다. 오랜 세월 유럽 국가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은 선대 정복 황제가 쌓은 영광과 호사에 취해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들불처럼 번진 산업혁명을 외면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대항해 시대부터 유럽 열강이 전 지구를 식민지화 하기 시작한 건, 당시 오스만제국이 동남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인도 서쪽에 이르는 방대하고 방대한 영토, 그것도 석유 생산지역 거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제 비로소 오스만과 비슷한 수준이 된 것 뿐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과학의 세기”라고 불린 19세기가 되었건만 세계적 흐름에 전혀 눈을 돌리지 않은 결과는 참혹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며 바야흐로 모든 질서가 뒤집혀버린 것을 오스만제국은 모르고 있던 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학이 돈을 위해 복무할 때 과학 스스로도 가장 빨리 발전하며,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제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전쟁이어서, 오랜 세월 동안 마음만 먹으면 적어도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우습게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자만에 취해 있던 오스만제국은, 이제 놀라운 군비를 갖춘 유럽 열강들이 보기에 식탁에 오를 준비가 된 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제국의 황제들이 몰랐을까? 몰랐을 것이다. 알기는 해도 실제 격차가 그렇게 많이 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1855년, 제32대 황제 압둘아지즈는 황태자와 두 조카와 함께 나폴레옹 3세의 초대에 응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석해 유럽 각국의 기계공학을 실제로 체험하고 경악을 했을 것이다. 박람회에 오스만제국이 자랑스럽게 출품한 품목이란 그저 카펫, 촛대, 실크 제품, 금은으로 수놓은 보자기, 기도용 깔개, 터키 커피와 긴 담뱃대 같은 기호품 수준이었으니. 만일 이런 차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복잡한 민족 구성과 이슬람과 쿠란의 계율 같은 것이 유럽의 과학, 기술을 오스만제국 안에서 개화할 기회를 만들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쥴퓌 리바넬리의 의견인 것처럼 읽힌다.


  유럽, 이 가운데서 열강이라 할 나라엔 이미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던 독재 공포정치가 오스만제국에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황제는 언제, 어디서, 누가 배반, 반역을 도모하고 있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았고, 배반자, 반역자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자기 외의 모든 신하, 지방 군벌, 백성, 심지어 친척과 자식들까지 의심하고, 사찰해 그들을 색출해 먼저 처단해야 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영토 밖에 나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이어 영국까지 방문해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고, 선진문물을 견학했으며, 시시각각 위협으로 접근해오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협조를 요청하는 의의를 전한 압둘아지즈 황제도 1876년에 결국 신하들에 체포되어 두 손을 잘린 후 출혈과다로 죽음을 맞았다.

  이 정변을 주도한 장군들은 선황제인 31대 압둘메지드 1세의 큰아들이자 폐제 압둘아지즈의 장조카인 무라드 5세를 33대 황위에 올렸다. 유럽 신사 자체이며 빼어난 미남이었던 무라드 5세는 그러나 마음이 약해서 그랬는지, 삼촌이 양 손목이 잘려 죽는 것을 보고 정신줄을 놓아 불과 몇 달 만에 폐위되고, 무라드의 동생이자 <호랑이 등에서>의 주인공이자 오스만제국의 34대 황제인 압둘하미드 2세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미탓 장군은 청년 하미드에게 제위에 오르는 조건으로 영국과 비슷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을 약속하게 한다. 하미드 입장에서는 당연히 약속할 수밖에. 안 그러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칼 또는 비단 실뭉치 가운데 어떤 것이 될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즉위하자마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발칸반도의 패권을 넘겨준 압둘하미드 2세는 헌법을 제정하기는 했으나 1877년 곧바로 이를 폐지하고 자신을 제위에 올려준 미탓 장군을 체포해, 죽이지는 않고, 저 멀리 타이프,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지역 한 원격지로 유배를 보내고, 그곳 수용소 소장이 알아서 목 졸라 죽이게 한다. 오스만제국에는 이미 황혼이 내린 상태. 1881년엔 제국의 영토인 튀니지가 프랑스에 점령당하고, 이집트는 영국 영향권에 드니 이때 구 오스만 식민지 사람들의 피폐상을 그린 작품이 레바논 사람 아민 말루프가 쓴 <타니오스의 바위>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길도 보이지 않는 제국의 끝 무렵에 황제에 오른 압둘하미드 2세는 1876년부터 무려 33년간 황제의 위를 지킨다. 특히 황제 암살과 쿠데타의 이력이 화려한 오스만제국 같은 나라에서 황제 자리에 있다는 건 호랑이 등을 타고 앉은 것과 같다, 라고 리바넬리는 말한다. 가장 용맹한 맹수의 등에 걸터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 피와 살과 뼈를 분쇄하는 가공할 힘과 무기를 장착한 맹수의 근육을 다리 아래에 감각하면서도 아무리 피곤해도 절대 내려설 수 없는 자리. 등에서 내리는 순간 여태 타고 있던 맹수는 그 독한 송곳니를 사정없이 목덜미에 꽂을 것이라서. 이런 이치를 잘 이해하고 있던 압둘하미드 2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리를 지켰고,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의 희생만을 불렀을 뿐이지만, 다민족국가의 복잡한 신하, 의회, 장관의 행위를 모두 관여할 수 없었다. 책임도 오롯이 져야 했던 건 물론이다. 압둘하미드 2세 치하의 젊은 장교들은 황제를 “피를 토하게 만들고 숨을 틀어 막았던 잔인하고 흉포한 흡혈귀”라고 불렀으며, 프랑스 사람 알베르트 반달은 황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흐르게 만들었다고 별명을 “붉은 황제”라고 지어 신문 삽화에 게시했다. 이외에도 황제의 별명으로 피의 황제, 붉은 이교도, 아을드즈 궁전의 올빼미, 악마의 영혼 등 다양했다.

  테살로니키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연합진보위원회는 1908년에 혁명을 일으켜 헌법을 부활시키고, 1909년 4월 27일에 압둘하미드 2세의 이복동생인 메흐메디 5세에게 제위를 이양하게 만든다. 폐위의 사유는 “이슬람을 해쳤고, 무슬림이 무슬림을 죽게 했으며, 이슬람 율법서를 금지했다”고. 전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이자 누구보다 독실한 이슬람 교도인 그에게.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4월 28일에 압둘하미드 2세는 큰 키에 사슴 같은 눈을 한 체르케스 출신 미녀들로 구성된 다섯 명의 아내와, 세 공주,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밤열차를 타고 혁명군의 근거지인 테살로니키의 옛 로빌론 장군의 숙소건물인 알라티니 저택에 감금되면서 장편소설 <호랑이 등에서>를 시작한다. 그렇다.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느라 오늘의 독후감 전부를 사용했다.

  나라고 튀르키예의 근대사에 관심이 있었겠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아밀 말루프의 작품 <타니오스의 바위>를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뇌활동에 도움이 됐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라도 오스만제국과 비교하기조차 부끄러운 조선이라는 나라의 고종이 읽는 내내 떠올랐다. 나라와 사직은 급속도로 몰락을 향해 달음박질하는데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신하들은 통제가 되지 않으며, 곳곳에서 배반을 도모하고 있는 지경.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행위는 그들이 했을지언정, 책임은 오직 한 명, 최고 통치자가 지어야 하는 것이니까.

  이 책, 재미있다. 그렇지만 수작 <세레나데>를 읽은 독자들은 쥴퓌 리바넬리를 판정하는 기준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그것에 비견하거나 능가하지 못하는, 못하는 것처럼 읽히는 작품을 상찬하기는 힘들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기 전에 “쥴퓨 리반엘리”가 쓴 <살모사의 눈부심>을 먼저 읽는 게 도움이 될 듯하다. (아쉽게 아마 절판일 걸?) 오스만제국의 황위 세습과 이에 관련한 관습법, 하렘의 구성 같은 것을 이해하는데 특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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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26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네요. 세레나데 작가라고 해서 놀랐는데 살모사...를 먼저 읽으라고 하시니 산너머 산이네요. 더구나 살모사는 절판이라니 우주점엔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암튼 오늘도 친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 ^^

Falstaff 2024-06-26 16:38   좋아요 1 | URL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팍팍 진도 나갑니다. 살모사는 저도 도서관에서 읽었습지요. 안 읽고 그냥 이 책 읽는다고 설마 사달이 나겠습니까? ㅋㅋㅋㅋ
 
호른의 죽음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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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프 하인은 1944년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로 넘어간 접경지역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주로 라이프치히에서 활약한 소설가, 연극인 기타 등등 하여간 예술가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통일 독일의 통합 초대 펜클럽 회장을 지냈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표제에 이름을 올린 호른 씨도 라이프치히를 터전으로 하는 역사학 박사였으며, 화자 크루슈카츠 씨도 라이프치히 사람이다. 이렇게 작품 속에 흔적을 남기는 작가들이 많아 그들의 내력을 알고 읽는 것도 재미가 괜찮다.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전까지 하인은 동독 작가였다는 건데, 그래서 그런지 다른 동독 작가들 작품에서 자주 읽을 수 있는 불행한 일이 호른 씨에게도 들이닥친다. 독일 통일 이전부터 동독 사람들은 서독이 훨씬 더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여간 갖가지 수단을 써서 서쪽으로 월경을 도모했다. 관광여권을 갖고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 등 같은 동구권 지역으로 갔다가 거기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장면은 자주 발견할 수 있고, 페터 슈나이더인가 누군가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장대 높이뛰기 하는 식으로 겁나게 달리다가 작대기에 몸을 의지해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가는 것도 읽은 적 있다. 시기적으로 장벽 붕괴에 가까워지면서 월경의 위험과 영향이 점점 작아지다가 급기야 거의 없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호른의 죽음>의 경우엔, 호른 박사의 누이가 서독으로 탈출한 것이 1955년 경인데, 당시는 전 세계가 극도의 냉전상태에 있었을 때라 가뜩이나 수정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던 호른 박사한테는 기총소사 하듯 종파주의자라거나 당파성의 원칙을 훼손했다거나 하는 비난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호른 박사는 당에서 축출당하고, 학계에선 학위를 박탈당한 채 라이프치히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마을 굴덴베르크의 낡은 성에 달린 향토박물관의 학예사로 좌천당한다. 이때 당적을 몰수하고 학위를 박탈한 위원회의 위원 가운데 한 명이 앞에서 말한 크루슈카츠 씨였으며, 1년 후 크루슈카츠 씨가 굴덴베르크의 시장으로 선임되면서 이들은 재회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호른 씨가 종파주의나 당파성 같은 어처구니없는 명목의 피해를 당한 일에 초점을 맞추는 건 아니다. 호른 씨는 1957년에 죽는데, 이 때의 사건을 주민 다섯 명의 기억 또는 호른 씨와 얽힌 일을 담고 있다. 이후 사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1980년대 초반에 그해 여름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니 각기 다른 화자의 일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이들은:

  이곳저곳에 수많은 자식들을 살포한 바람둥이 부자 남자를 아버지로 둔 사생아이자 그의 머리 좋은 아들인 슈포테크 의학박사.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는 똑똑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대단히 삐딱하고 적어도 해발 8천 미터까지는 솟은 자존심 끝판왕에, 가시 같은 혀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귀를 따갑게 하는 독설가이지만 알고 보면 소심하고, 마음 약하고, 그러나 전혀 착하지 않은 인간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토마스. 일반 시민들과 구분이 되길 바라고, 실수라도 사람들이 자기한테 닥터라고 부르면 속으로 좋아 죽겠는 속물이지만 겉으로는 점잖고 근엄한 약사의 아들. 한 살 위인 껄렁한 친구 파울과 어울려 다니며 예전과 달리 한 달 정도 늦게 도착한 집시한테 시간 일자리를 얻었다가 천한 집시에게 고용되는 것이 아빠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저지른 짓이라서 외출금지도 당하기도 한다. 늙은 화가 골 씨를 도와 친하게 지내고, 결정적으로는 늦여름 아침에 파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가 마가목 나무에 목을 매단 호른 씨의 툭 튀어나온 눈과 쑥 빠져나온 거의 보라색의 혀를 보게 된다.

  마를레네. 화가 골 씨의 정신지체 딸. 1943년에 나치 정부가 아리아 인들의 품종을 개량하기 위하여 장애인을 수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을 대신해 엄마가 수용소에 들어가 죽는 바람에 죽다가 살아남았다. 세상이 바뀐 1950년대가 되고나서도 마를레네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성폭행을 당했고, 임신을 했으며, 아버지를 따라가 인공중절을 경험한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굴덴베르크에서 정신장애자를 다루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게르트루데 피슈링거. 파울의 엄마. 처녀로 결혼을 하고 파울을 낳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를 좇아 집을 나갔다. 같은 마을에서 사는 게 남부끄러워 남편더러 파울의 양육비를 받지 않을 테니 다른 데 가서 살라고 해, 파울과 함께 굴덴베르크에 남아 식료품점을 한다. 지방정부가 남은 방을 세놓으라 해서 들어온 사람이 호른 씨. 원래 1년 이하를 계획했지만 호른 씨가 죽기 전까지 계속 머문다. 사춘기의 극점을 달리고 있는 파울은 점점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고, 자기하고는 말도 하지 않으려 해서 호른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깨끗하게 거절당한다. 서로 소 닭 보듯, 예의만 엄청나게 지키는 드라이한 생활을 하지만 나중에 몇 달은 결국 같은 침대에 오르게 된다. 호른 씨가 생을 접기 전에 자살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다른 것들처럼 관계를 정리하기 전까지. 상점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다리에 류머티즘이 심해 퉁퉁 붓고 고통이 자심하지만 알아주는 인간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마지막으로 굴덴베르크 시장 크루슈카츠. 유서 깊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한 때의 사학자였으나 공직에 뜻을 두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골이기는 하지만 굴덴베르크의 시장에 취임한다. 취임하고 보니 굴덴베르크도 시골 특유의 배타성과 텃세가 여간 아니라 취임 첫날에, 타지인인 당서기만 방에 찾아와 축하를 했을 뿐, 시청에 근무하는 현지인은 누구 하나 고개 디미는 것들이 없었다. 문제의 1957년엔 5월 23일 목요일에 집시들이 도착해 여느 때처럼 도시 한복판인 블라이허비제에 캠핑카를 차렸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굴덴베르크의 시의회에서 집시 캠프는 변두리 늪지대인 블루트비제에 설치하게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세상에 말 잘 듣는 집시들이 있기나 하나? 집시들의 도착 보고를 듣고 당시 시의회 의원이자 시장대리이며 나중엔 크루슈카츠 시장을 음해해 어떻게 차기 시장을 한 번 해볼까 꿍꿍이를 꾸리기도 할 바흐오펜, 그리고 여비서와 함께 집시들을 찾아가 설득을 시도하지만 당연히 집시 대장한테 무시당하고 만다. 바흐오펜은 처음부터 경찰한테 위임해버리라고 조언을 했으나, 명색이 시장이라면 거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는 거라 생각했던 거다.

  크루슈카츠가 시장으로 취임하고 1주일 후에 시내 낙농장 앞 보도에서 우연히 호른 씨를 만나고야 만다. 같은 작은 도시에 살기도 하고, 향토박물관의 학예사니까 시장이 직속 상관이라 언젠가는 만나야 했지만 그는 1년 전 위원회에서 크루슈카츠를 바라보았던 바로 그 상처입은 눈길을 가지고 있었으니 좀 캥기기도 했을 듯. 당시 크루슈카츠는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며, 이를 호른 씨가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웅변하는 눈길을 여태 잊지 못했다. 크루슈카츠는 호른이 주관적으로 보아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당파성의 원칙을 맹신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체제에 큰 피해를 입혔음을 확신”해, 공동의 일과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그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용인한(누이의 서독으로의 탈출?) 호른의 비겁함을 인식하고 실수를 철저하게 떠안아야 한다고 생각해 당적 몰수와 학위 취소를 찬성했다고 변명했다. 이게 벌써 1년 전이니 시간이 약이라고 이젠 좀 상처가 아물었겠지. 그래서 “뜻밖의 재회를 위해 한 잔 해야지요?” 라고 반갑게 제의했지만, 호른은 “아닙니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같은 해 9월 1일 일요일 아침, 숲속에서 아이들이 호른의 시신을 발견했다.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련자들은 자살이란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집시와 연결 짓는 건 적절하지 못했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가. 나치 시절이 12년 전에 끝났어도 집시무리를 정상적인 시각으로 보지는 않았던 거다. 물론 이건 책에서 딱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이 숨겨놓은 코드라고 봐야 하리라. 당시 시장은 3년째 굴덴베르크에 살고 있었다. 처음 시의원으로 발령이 나고, 시장이 되자 라이프치히에서 살고 있던 사랑하는 아내 이레네를 굴덴베르크로 불러 살림을 합친다. 이때 이레네는 평생 시골에서 살게 하지 말라는 조건이었고, 정말로 그렇게 됐으나, 안타깝게도 이레네가 불치의 암에 걸려 라이프치히의 대학병원으로 실려가고 석 달 만에 생을 접었다. 그러나 남편을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요일마다 호른 씨가 주재하는 굴덴베르크 문화사 모임을 바흐오펜 씨가 음해하여 상부에 보고한 일을 시장이 모르고 있었으며, 라이프치히에 이어 같은 사람이 똑같이 아무 죄도 없으면서 같은 혐의로 명예가 훼손되려는 위기에 처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일이 벌어지자, 이레네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부부의 행위가 끝난 후, 이레네는 침상 위에서 말한다.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이제 당신은 역겨워요.”


  공산주의 치하였던 198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고, 출간할 수 있었다는 거 하나 가지고도 정말 기가 막히다. 크리스토프 하인은 참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비단 시장 크루슈카츠와 학예사 호른의 관계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등장하는 다른 화자 네 명도 모두 자신이 직접 사는 생활 속에 각기 다른 질곡을 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 사는 게 다 그렇기는 하지만 참 어렵다.

  새삼 하고 싶은 말은, 수정주의, 종파주의, 당파성. 지긋지긋한 단어들. 그러나 눈을 뜨고 귀를 열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종파주의와 당파성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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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24 0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4는 분명히 야박했다. 그렇다고 별5는 조금 과하고.

잠자냥 2024-07-11 22:39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제가 5별 줬습죠… 이제 이 책은 4.5별이 되는 겁니다!🤣🤣

Falstaff 2024-07-12 05:40   좋아요 0 | URL
앗, 그랬습니까? 잘 하셨네요. 이 양반 책 또 읎나.... 싶습니다.

잠자냥 2024-06-2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주말에 받아왔습니다요! 기대됩니다!

다락방 2024-06-2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저도 사야겠네요!

다락방 2024-06-24 11:15   좋아요 1 | URL
악 너무 비싸네요? 다행히 도서관에 있습니다. 후훗.

잠자냥 2024-06-24 11:43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내가 희밍도서한 거라능 ㅋㅋㅋㅋ 지만지 책 비싸서 못 사! ㅋㅋ
 
회개한 멜모스·아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파롤앤(PAROLE&)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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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 분량이면, 다른 작가한테는 중편이겠지만 적어도 발자크는 그냥 단편이라 해야 할 두 작품을 실었다. <회개한 멜모스>와 <아듀>의 공통점이라면 1812년 모스크바를 함락하기는 했지만 추위에 뒷덜미를 잡힌 프랑스군 최악의 퇴각전투인 “베레지나 도하” 참전 군인을 다루고 있다는 거다. <아듀>는 아예 내놓고 전투 장면을 상세 묘사하고 있다. 당연히 발자크가 썼으니 실제보다 더 혹독하고, 비참하고, 춥고, 살 떨리는 장면의 연속상영이다. 그리하여 <아듀>에 관해서는 독후감 열라 써봤자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거야말로 백문이불여일견, 아무쪼록 직접 읽어 보시기 권하고, <회개한 멜모스>를 이야기해보자.


  <회개한 멜모스>는 금천출납계원이라는 직업인에 대한 발자크 식 설레발로 시작한다. 사회계에서 문명이 밪어낸 희한한 인간종이며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이라고 했으니, 이게 인간, 즉 사람이란 얘기인지 사람도 아니라는 뜻인지 독자를 현혹하기 시작한다. 발자크의 눈부신 구라를 그래도 소개해보자.


  “영락없는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인 그 종은 신앙심을 통해 수분을 공급받고 단두대라는 지지대로 줄기를 꼿꼿이 세우지만, 악행의 손으로 자잘하게 가지치기되면서 건물 4층에서 참한 아내와 성가신 아이들에 둘러싸여 나무처럼 자란다. 파리에 서식하는 금전출납계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두고두고 생리학자를 괴롭히는 문제로 남을 것이다.” (p.10)


  이어서 발자크는 독자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덫에 갇힌 생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항상 돈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시겠는가? 방범 철창이 쳐진 좁은 공간 속에서 일 년의 7/8을 매일 7시간에서 8시간 동안 등나무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선박 조타실에 못 박혀 있는 항해사보다도 덜 움직이는 재주를 지닌 사람을 떠올려보시겠는가? 그런 일에 종사하면서도 무릎이나 골반 관절에 경직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보시겠는가? 왜소하다고 할 만한 몸집을 가진 사람은? 돈을 하도 많이 다루어서 돈이라면 신물이 날 법한 사람은?” (p.11)


  발자크가 관찰하고 경험한 금전출납계원은 역사를 이 잡듯 뒤져봐도 번듯한 지위라고 할 만한 자리에 올라간 계원을 발견할 수 없었고, 결국엔 중죄인 감옥에 수감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하거나, 마레지구 생 루이가의 어느 집 3층에서 죽은 듯이 살게 된단다. 이 당시 파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니, 생 루이가의 3층에서 “죽은 듯이” 산다는 걸 보면 결국 인생이 찌그러진다는 뜻이겠다. 금전출납계원. 지금 시대에는 거의 사라진 직종이다. 은행에 가면 플라스틱 박스 안에서 주로 현금을 내주고 받는 행원을 말한다. 현금 시대에는 은행마다 있었는데 지금은 본 것 같기도 하고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발자크가 이렇게 하루 종일 지독한 돈 냄새를 맡으며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한테 박한 평가를 했는가 하면, 견물생심이라고, 돈을 자꾸 만지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필요한 만큼 돈이 없는 사람한테 사고가 생길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나도 살면서 봤다. 돈 액수에 민감해지지 못하는 은행원. 출납계원과 은행,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부오나파르테 나폴레옹이 쌍코피가 터지고나서 프랑스에선 루이 18세가 왕정을 복고한다. 이 시절인 1815년 이후 돈의 원칙이 명예의 원칙을 대체해 우리 문명의 진정한 상처를 입혔다고 발자크는 주장하는데, 뭐 잘 모르겠다. 상처입은 “우리 문명”에서 ‘우리’의 범위에 아시아인이 들어가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이 시절 프랑스 파리 생-라자르 가에 뉘싱겐 남작이 자기 이름을 따 “뉘싱겐 은행”을 세우고, 1813년 모스크바 퇴각 당시 자신도 참전한 바 있는 스투드장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퇴역장교, 명예 대령인 카스타니에 씨를 월급 5백 프랑의 현금출납계원으로 고용한다. 카스타니에는 정수리가 빤질빤질한 대머리의 사십줄에 접어든 사내로 반백의 관자놀이에 동그란 얼굴이며, 뉘싱겐 남작처럼 윗옷 가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의 약장을 달고 다닌다. 나폴레옹 제정 시대 용기병 대대의 지휘관이었으며 부상당해 2천4백 프랑의 퇴직금을 받고 제대한 인물이다. 은행에서는 현금 출납 외에 가장 핵심인 회계장부 업무도 지휘하고 있다. 그러니까 은행장의 핵심 측근이라는 말씀.

  이 날도 카스타니에는 일과를 마치고 은행문을 닫은 후에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여러 은행 앞으로 발행된 신용장 중에서 런던의 와차일딘 은행 앞으로 발행한 신용장을 집어 들더니, 세상에, 뉘싱겐 행장의 서명을 위조해 슥슥, 신용장에 사인을 했다. 나는 작품을 다 읽었으니 어떤 서명인 줄 안다. 귀 와차일딘 은행께서는 폐 뉘싱겐 은행이 보증하오니 위에 밝힌 카스타니에 선생에게 현금 1백만 프랑을 지급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작 뉘싱겐 서명. 이제 이 한 장을 가지고 런던 와차일딘 은행에 가면 즉시 1백만 프랑에 해당하는 세계 각국의 돈을 받을 수 있게 된 거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휴무인 일요일. 월요일은 내용은 모르겠지만 출근하지 않기로 합의가 된 날이고, 화요일 정오에 나오기로 했으니 카스타니에는 적어도 3박4일의 시간을 벌어 놓았다. 이 동안 런던에 가서 현금을 찾고 위조한 여권과 변장을 위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페라로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여생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다. 페라로 백작은 1813년 젬빈 늪지 전투에서 죽은 불쌍한 대령이다. 이 젬빈 늪지 전투가 뒤에 실린 <아듀>의 핵심 장면이라서 이렇게 저렇게 다 연결이 된다니까.

  하여간 이렇게 신용장 또는 약속어음을 봉투에 담고 속주머니에 넣은 카스타니에는 왜 이 위험한 장난을 할까? 뭐긴 뭐야?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여자 때문이지. 아킬리나. ‘나키’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이 어린 불여우는 사십대 카스타니에의 정부가 되면서 겉으로는 그냥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남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동적으로 온통 비싼 가구, 옷, 귀금속, 보석, 신발, 언더웨어를 사 바치게 만들었다. 2천4백 프랑의 퇴직금과 월급 5백 프랑만 가지고 있던 퇴직 명예 대령 카스타니에는 애초에 정부를 둘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미 저질러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해. 이제 신용장에 서명하고 속주머니에 넣은 찰라, 에그머니, 이미 은행문을 닫아 걸었건만, 현금출납 철창 뒤편 작은 창구에서 웬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거다. 영국인처럼 보이는데, 프랑스 사람이 영국인을 예쁘장하게 그릴 수 없는 법. 발자크 눈에는, 시체의 피를 빨아먹은 것 같은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붉은 입술의 30대 남자. 그는 어음을 현금 50만 프랑으로 교환하러 온 고객으로 이름을 존 멜모스라고 영수 서명했다. 이제야 멜모스가 나온다. 카스타니에가 약속어음을 받으니 희한도 하지, 돈을 주려는 순간, 그가 없어졌다. 돈을 받았다고 서명을 했지, 금고에서 돈도 꺼냈지, 지금 문을 닫으면 화요일 정오에나 열지, 카스타니에는 당연히 현금 50만 프랑도 자기 주머니 속에 넣는다. 일을 다 마친 카스타니에는 남작이 없을 때 늘 그렇듯이 남작부인,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젊은 대학생 라스티냐크의 애인이기도 한 남작부인에게 런던의 와차일딘 은행에서 발행한 약속어음 50만 프랑을 지급했다고 보고하고 드디어 퇴근한다.


  길거리로 나온 카스타니에. 그는 잠깐 즐거운 고민을 한다. 오늘은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정부 아킬리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좋은 시간을 즐기고, 내일 일어나 마르세유로 갈 때는 아킬리나를 데려가야 하나, 데려가지 말아야 하나? 그는 손바닥에 침을 탁 뱉은 다음에 오른손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탁 때려 오른쪽으로 튀면 데려가고, 왼쪽으로 튀면 피렌체에서 새 애인을 찾는 걸로 하고 손을 번쩍 든 순간, 등 뒤가 서늘해 뒤돌아보니, 에그머니, 영국인이 또 나타난 거다. 존 멜모스가. 키 큰 멜모스가 카스타니에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인다.

  “너는 그녀를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더니 다시 선언하기를,

  “너는 떠나지 못할 것이다!”

  결론은? 언제나 불행한 예언은 들어맞는 법이다. 발자크는 결코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겠지만. 궁금하시지? 얼른 도서관 가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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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21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크리스토프 하인, <호른의 죽음>
수요일. 쥴퓌 리바넬리, <호랑이 등에서>
금요일. 송지현,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stella.K 2024-06-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우리의 발자크 옹께서 이런 단편을 쓰셨다니 저도 좀 놀라운데요? 부담은 적을 듯하지만 왠지 그의 악마같은 표현은 여전히 만만치 않을 것 같네요. ㅋ

Falstaff 2024-06-21 15:41   좋아요 1 | URL
발자크 치고는 장황한 편 아닙니다. 책이 얇아서 권하게 되지는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