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짧은 낮 거장의 클래식 3
츠쯔졘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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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려고 위키피디아로 작가 검색을 해보니, 세상에나, 츠쯔젠遲子建이라는 이름을 딸한테 지어준 사람이 다 있다. 중국의 위나라 초대 황제 조비는 삼국지에서 가장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조조의 아들이다. 조조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조앙은 아버지하고 함께 완성宛城 정벌에 나섰다가 죽었다. 이 일화가 재미있어 소개를 하자면, 이때 현명한 완성의 성주 장수는 세 불리 함을 깨닫고 조조한테 항복해 성문을 연다. 이후 환영잔치가 벌어져 술이 얼큰해진 조조가 성주 장수의 숙모를 겁탈(또는 합의한 동침)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나름대로 명문가임을 자랑하던 장수가 이걸 알고 크게 열을 받아 조조의 진camp을 급습했다. 이 바람에 천하 맹장 전위가 자다가 벌떡 깨 옷을 훌렁 벗은 채로 조조의 텐트를 지키다가 죽고, 맏아들 조앙 또한 위급에 처하자 조조의 옷을 대신 입고 달아나는데, 완성의 병사들은 옷을 보고 조앙을 조조로 알고 죽자사자 쫓아가 조앙을 두 조각 내버린다. 조조는 도망 중에 말 잔등 위에서 수염을 깎아버리는 불상사를 겪으며 명을 보존했으나, 이 와중에 가장 큰 덕을 본 건 둘째 아들 조비다. 조조가 죽고 죽은 맏아들 조앙 대신 조비가 대권을 잡은 다음, 후한 헌제한테 황위를 선양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문제文帝를 칭했다. 조비한테는 형제들 모두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왕조의 비운이지 뭐. 그가 가장 센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동생이 시인이기도 한 조식. 스스로도 한 문장 한다고 자부하던 조비가 조식을 불러 네가 시 좀 쓴다고 하니, 내가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그럴 듯한 시를 하나 지어봐라. 해서 목숨 걸고 지은 즉흥시가 칠보시, 즉 일곱 걸음 시다. 여기서 주목. 이 시인 조식의 자字가 바로 자건子建, 쯔젠. 1964년 2월, 중국의 저 최북단 헤이룽장성 다이싱안 지구 모하 시의 소학교 교장으로 있던 츠쩌펑遲澤鳳 씨는 평소 조자건을 흠모해 딸을 낳았음에도 이름을 자건, 쯔젠으로 지었다. 나는 그런지도 모르고 작품 속에 여자 주인공이 많이 등장해서, 남자 작가가 여자 마음을 참 잘도 아네, 어쩌구저쩌구 지청구를 해댔다는 거 아냐?

  다이싱안 지구, 즉 대흥안령 산맥 근방에서 출생한 츠쯔젠은 헤이룽장 성의 성도인 하얼빈에서 학교를 다녔고, 1981년에 다이싱안 사범대학에 들어가 열아홉 살이던 1983년에 『북방문학』을 통해 등단한다. 이후 베이징으로 옮겨 가 공부를 더 하다가 1990년에 다시 헤이룽장 성으로 와서 전업작가의 길을 가고, 1998년에 결혼을 하지만 한일월드컵이 열리기 바로 전인 2002년 5월에 과부가 된다. 어쩐지 작품 속에 과부가 된 30~40대 여성이 종종 등장하더라니까. 지금은 국가 1급 작가의 칭호를 달 정도로 출세를 했으니, 책을 읽고 팬이 되었다고 팬레터를 보내봤자 답장도 못 받지 않을까 싶다. 소개글에 작가 생활 30년에 1백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고 해서 단편 전문 작가인 줄 알았으나 대표작이라고 꼽기도 하는 <이얼구나 강의 오른쪽>은 장편소설이다. 이것도 도서관에 있다. 꼭 읽어 봐야지. 그만큼 단편집 《가장 짧은 낮》이 좋았다는 말씀이다.


츠쯔젠


  모두 열여섯 편이 실은 단편집. 그런데 놀랍게도, 굉장히 오랜만에 단편집에 실린 모든 작품 전부 다 마음에 들어 읽는 내내 잔잔한 기쁨을 즐겼다. 내가 단편집에 이런 찬사를 보내는 건 얼마 살지 않았지만 일생에 몇 번 없었다. 한 편도 예외 없이 무대가 헤이룽장 성에서도 벽촌지대인 다이싱안 지구와 산맥, 흑룡강의 중소국경 지역의 농촌과 삼림지역이며, 필요에 따라 하얼빈의 대형병원과 노르웨이의 해변가에 위치한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 기념관이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세어보지는 않았는데 다이싱안 지역의 섣달 그믐날과 설날이 여러 번 나와 다이싱안 지역 민속/풍습도 재미있게 소개한다. 그러나 츠쯔젠의 작품을 읽는데, 물론 이 작품집에 실린 것에 국한해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연민과 돌봄과 인애이며 둘째가 저 광활한 벌판의 웅장한 장면일 것이다. 영하 30, 40도 아래로 내려가는 엄혹한 추위와 큰 눈과 바람 속에서도 츠쯔젠에게 큰 유혹이었을 잭 런던 또는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같은 작가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얼어버린 손을 비벼주고, 불을 지펴주는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이래서 열여섯 편 가운데 비극은 없다. 정말로 없다. 작품의 무대도 촌스럽고, 인물도 촌스럽고, 작풍도 촌스럽고, 문장도 촌스럽다. 섬세한 문장도 없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쓴 문장들이 모인 문단, 문단들이 모인 전체는 독자를 웃음짓게 하고, 찔끔 소금물을 짜기도 하고, 한숨도 한 번 푹 내쉬게 만든다. 특히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섬세한 날줄과 씨줄의 감정적 난파와 간혹 발칙한 명징성이 빛나기는 하지만 (상당히 무례한 표현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걸 이해해주시면 좋겠는데) 비슷비슷, 고만고만한 작품집을 연타로 읽다가 난데없이 투박하게 아름다운 츠쯔젠을 읽을 때의 감격이라니.

  단편집의 독후감을 쓸 때 가장 난처한 것은 스토리를 옮기기 힘들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길지 않고 단순한 구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말하면 단박에 결말을 눈치챌 수도 있으니. 그저 처음 읽는 츠쯔젠이 촌스럽지만 정말 매력적인 작가였으며, 그래서 이제야 이이를 읽어 만시지탄을 금하지 못했으며, 앞으로 다른 작품도 찾아 읽을 예정, 혹시 이 책이 “나만의 명작”일 수 있어서 함부로 책을 사서 읽어보시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도서관에 있다면 꼭 한 번 골라 읽어보십사, 권할 정도라는 건 밝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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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5-10 0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피에르 르메트르, <대단한 세상>
수요일.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사냥꾼의 수기》
금요일. 김안, 《Mazeppa》

바람돌이 2024-05-10 09:18   좋아요 1 | URL
단편집 전체 작품이 마음에 들기는 참 어려운데 말입니다. 모르던 작가를 알게 해주는 Falstaff님 항상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4-05-10 11:47   좋아요 1 | URL
이 양반의 다른 책 한 권 빌려 놓았답니다. ㅎㅎ

다섯 2024-05-10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사드립니다. 일단 ‘가장 짧은 낮‘은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습니다. 읽어 보는 것으로 추천하는 분에게 보답코자 합니다.ㅋ

Falstaff 2024-05-10 10:42   좋아요 0 | URL
본문에 썼듯이 작품들이 전혀 세련되지도 않고, 그리 섬세하지도 않답니다. 오히려 투박해 돋보이는지라 독자마다 호오가 갈릴 듯하네요. 겁이 덜컥 나는군요. ㅎㅎ

은하수 2024-05-10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단편집 작품이 모두 맘에 드는데 줄거리를 말할 수도 없고
리뷰는 꼭 남기고 싶고... 딜레마라니까요
저도 얼마전 같은 경험을 한지라 그 마음 어떠한신건지 넘넘 이해가 됩니다
저도 일단 도서관 검색을 해봐야겠군요!^^

Falstaff 2024-05-10 10:43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 맘 알아주셔서 고밉습니다. ㅎㅎ
도서관 이용이 갑입니다!

젤소민아 2024-06-06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 소개 감사드리고 이달의 당선작 되신 것도 축하드려요~

Falstaff 2024-06-06 12: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 책 좋아요. 도서관 가시면 놓치지 마세요. ^^

coolcat329 2024-08-08 0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츠쯔젠! 저도 이 작가의 책 한 권 가지고 있어요. <뭇 산들의 꼭대기>
폴스타프님에게 가장 아름다운 단편집이라니 궁금하네요.
저는 이 작가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평을 듣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작가의 이름이 조비의 동생 조식의 字를 따서 지었다니 재밌네요.

Falstaff 2024-08-08 14:36   좋아요 0 | URL
주목하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세 권 읽었는데요, 연달아 읽으면 덜 좋아질 타입 아닐까 싶습니다. 내년에 한 권 더 읽을 생각입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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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무아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1
에밀 졸라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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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졸라와 역자 윤진? 망설이면 바보! 득달같이 장바구니 집어넣었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보니 이게 제르베즈 아줌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목로주점>이란다. <아소무아르> ㅋㅋㅋ 웃겼어! 귀여운 민음사. 많이 파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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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5-09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군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용. 뱅글뱅글@_@;;;

Falstaff 2024-05-09 21:22   좋아요 2 | URL
이 책은 펭귄에서 나온 <목로주점>을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개정한 판일 겁니다. 저는 역자 윤진을 좋아합니다만 펭귄판을 읽어보지 않아서 함부로 얘기하지는 못하겠네요. 하여간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한 편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ㅎㅎㅎ 꼭 읽어보셔요. 이른바 필독서 가운데 한 편입니다. 물론 다른 출판사 책들도 검토하셔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시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잠자냥 2024-05-10 0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이 작픔 출간된 거 보고 아니 졸라 작품 중에 이런 게??? 게다가 윤진?! 했다가 곧….. 아아아 이런 놈들 ㅋㅋㅋㅋㅋㅋ 했답니다. 제가 펭귄에서 나왔던 윤진 번역 목로주점 읽었거든요. 번역은 역시 좋았으므로 펭귄에서 절판되었으니 목로주점 아직 안 읽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좋은 선택이 될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4-05-10 06:35   좋아요 1 | URL
진짜 제목 너무했습니다. ㅋㅋㅋㅋㅋ <아소무아르>. 그래도 이렇게 찍어주니까 윤진 번역의 목로주점을 읽을 수 있으니, 다행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루공 마카르 총서 전권 번역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메이저에서 번역 판매한 작품은 빼고요) 오래 뒷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군요. 졸라 전문 역자 가운데 한 명인 박모 선생....

윤진 2024-05-15 13: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자 윤진입니다. 펭귄에서 절판된 책을 이번에 다시 내면서(오래 전에 한 책이라 다시 읽으니 당연히 손볼 곳들이 눈에 띄어서, 많이 고쳤습니다) 제목을 저의 제안으로 <아소무아르>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사실 펭귄 판에서도 <목로주점> 대신 <아소무아르>를 쓰고 싶었는데, 독자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진 제목이라 그대로 따라갔거든요. 아소무아르는 물랭루즈, 봉쾨르...처럼 구트도르 거리의 가게 중 하나의 이름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소인데... 뜬금없이 제목에서만 <목로주점>으로 하기보다는 이번에는 꼭 제르베즈의 운명을 바꾼 술집 이름을 그대로 두고 싶었습니다. 물론 고전 명작의 익숙한 제목을 바꾸는 부담이 있었고,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냈습니다.^^

Falstaff 2024-05-15 17:23   좋아요 1 | URL
앗, 윤진 님께서 직접 댓글을 주시다니. 아이고, 반갑습니다. 제가 오랜 팬입니다.
목로주점이건 아소무아르건 관계 없는데요, 민음사를 비롯해서 요즘 출판사들이 예전 작품을 제목을 달리해서 마치 새것인 양 포장하는 걸 여러번 봤습니다. 그래서 시비를 좀 했을 뿐입니다. ^^

윤진 2024-05-15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Falstaff님, 잠자냥님 글의 애독자입니다!

Falstaff 2024-05-15 20:43   좋아요 1 | URL
세상에나, 이렇게 고마울 데가... 오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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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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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까지 읽고 계속 진행중. 근데 이거 혹시 두껍게 당의 입힌 포르노 아닐까 의심 생기기 시작함. 마저 다 읽고 백자평, 별점 수정할 것. 다 읽었음. 포르노 맞음. 수정할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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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5-09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의 입힌 포르노라니 정말 표현이 절묘하십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9 20:14   좋아요 1 | URL
아휴, 공감해주시는 건 고맙고 반가운데요, 워낙 좋은 평을 많이 받은 작품이라 무지 조심스럽습니다. 여전히 잘 포장한 포르노그래피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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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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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풍월에 의하면 휴대폰 앱 가운데 “북적북적”이라고 책 읽은 내역, 읽고 싶은 책 같은 걸 관리하는 게 있어서 나도 깔았다. 이 앱에 의하면 연초부터 오늘, 4월 두번째 목요일까지 내 키가 111.83cm 자랐고 지금은 다른 책의 388쪽까지 읽었다. 두 개를 합해 22,754 페이지, 63권이다. 앱의 재미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책을 읽으면 별점을 주게 만들었다. 다섯 개 만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데,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어제 오후 한 시 정도에 읽기를 마쳤으며, 앱에 등록을 할 때는 틀립없이 별 다섯으로 나름대로 채점을 했건만, 26시간이 지난 지금 독후감을 쓰려니까, 도무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다행히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 둔 것이 있어 그걸 훑어본 다음에, 맞아, 이런 이야기였어, 어제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었다. 그래, 그래. 거창하게 말해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다.

  작가 셸리 리드를 검색해봐도 별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콜로라도에 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미국인이며, 웨스턴 콜로라도 대학에서 글쓰기, 문학, 환경 및 지속 가능성을 30여 년 가까이 강의했다고 했으니 50대 이상일 듯하다. 이 작품이 2023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라고 한다. 흠. 데뷔작이라. 미국의 대학에서는 작품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박사님한테 글쓰기 교수도 시킨다, 이거지? 좋아, 좋아. 시비하는 거 아니다. 경력 여부를 떠나 괜찮으면 흔쾌하게 교수로 임용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 그러는 거다. 리드는 매우 미국적인 소재로, 매우 미국적인 스토리로 <흐르는 강물처럼>을 썼다. 그래서 독자는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나 스토리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읽자마자 이 책은 별 다섯 만점이야, 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스토리를 통째로 잊어버린 건?


  주인공의 이름은 빅토리아(이하 “V”) 내시. 이제 나이 들어 오랜만에 고향 근처에 돌아온 V는 콜로라도 강의 지류인 거니스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블루 메사 저수지에 잠긴 아이올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깊은 회한에 잠긴다. 콜로라도 주의 건조한 남서부 지역에 물을 흘려 보내기 위하여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댐을 건설하는 바람에 생긴 수몰지역. V가 향수병 같은 것 때문에 회한에 잠긴 것은 아니다. 아이올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집과 농장과 과수원을 팔고 훌훌 떠나온 사람이 V였으니. 이 장면은 드물지 않게 보는 평범한 오프닝. 평범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차별적인 묘사가 있어야 할 터. 셸리 리드의 문장이 좀 매력적이긴 한데 크게 어필할 정도는 아니다.

  본문의 첫 장면은 1948년. 집에서 ‘토리’라고 불린 V는 방년 17세.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진심을 다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한 살 아래 폭력적이고 매사 말썽꾼이며 어린 나이에 알코올과 럭키 스트라이크를 애용하는 철부지 남동생 세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 징집당해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은 오그 이모부와 함께 산다. 그렇다. 내시 씨는 홀아비다. 전쟁이 끝나고 쾌활한 호남이었던 이모부가 우울한 상이 제대자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엄마와 비브 이모와 큰이모의 아들이었던 친절하고 올바른 청년 캘러머스 오빠가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커브를 돌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세 명 다 엉망이 된 채 생을 접었다. 이 사건은 아버지한테 크게 충격을 주어 이후 급격하게 말수도 줄어들고 농장 일도 신경을 쓰지 않는 우울한 중년 농부가 되었지만 딱 하나, 대를 이어 명성을 떨친 내시 복숭아 생산에는 여전히 전력을 다했다. 집안의 세 남자는 아무리 시대가 1948년이라도 그렇지, 겨우 열 두 살이었던 V한테 슬그머니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길 기대했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요구 자체가 무리였으니까. 그러나 V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름대로 충실히 가사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서 열일곱 살이 된 것.

  V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하는 거였다는 점을. 한 가정의 상실과 그로 인한 결여, 또는 결핍이 V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향하게 만든다. 열일곱 살의 V. 당연히 사랑 문제.


  윌슨 문. 그가 마을에 나타났다. 돌로레스 탄광에서 일하다 그냥 그곳이 지겨워져서 탈출해 석탄을 싣고 출발하는 화물차에 뛰어올라 아이올라까지 흘러든 청년 또는 소년. 1948년에 십대 청소년이 탄광에서 일한다고? 그렇다. 그래서 아이올라에 첫발을 디딘 윌슨은 까마귀 날개만큼 새까맣게 빛나는 눈에 담긴 다정함이 있었고, 눈빛만큼 새까만 석탄 자국을 얼굴과 옷과, 옷으로 가리지 않은 모든 부위를 덮은 꼴이었다. 조금 지나면 독자도 알게 되는 것처럼 윌슨은 백인이 아니다. 어느 부족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아메리칸 인디언, 즉 북미 선주민의 후예였으며 탄광에서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학대에 시달리다 도망한 거였다.

  이날 오후, V는 다부진 몸에 유난한 성질을 가진 개 복서종을 닮은 동생 세스를 저녁 식사 전에 집으로 끌고 오기 위하여 포커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되게 작은 마을이라도 메인 스트리트가 있고, 이 거리 한 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윌슨 앞에 V가 섰고, 윌슨은 V에게 자기가 머무르며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며, V는 행상이나 계절 노동자들 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묶는 던랩 여인숙을 추천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차리는데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유럽식 무릎절curtsy을 해버렸고, 윌슨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역시 한쪽 팔을 벌리며 답례했다. 사랑, 남자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현재의 순간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윌슨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잔뜩 술에 취한 세스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던 V. 가던 길에 비틀거리는 세스를 부축하다가 둘은 함께 넘어졌고, 세스의 몸에 깔린 V의 발목이 심하게 삐고 말았다. 처음엔 절뚝이며 걸어보려 했으나 결국 주저앉은 V.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세스한테 의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나무 그늘에서 다시 등장한 이가 윌슨이었다. 윌슨은 말없이 V를 두 손으로 안아 집에 데려다 주었다. 복서 종 같은 성질의 세스가 한낱 인디언 나부랭이가 누나를 품에 안고 가는 것에 열을 받아 있었다가,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보더니 윌슨의 등짝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윌슨이 당연히 반격을 해 세스의 코피가 터졌을 때, 아버지 내시 씨가 호통을 쳐 다툼은 짧게 끝나고 윌슨은 가버렸다. 이때만 해도 V는 길들일 수 없는 복수의 들불이 어떤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복수의 들불. 세스 마음 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불길.

  V가 추천한 던랩 여인숙의 주인 던랩 부인은 뽀얀 피부에 큰 키, 그리고 퉁퉁한 몸매처럼 친절하고 후덕한 여인이었다. 백인에게만. 부인은 윌슨을 인디언을 거의 욕설 수준으로 낮춰 부르는 ‘인전’이라고 일컬으며 인전 따위를 자기 여인숙에 머물게 하면 숙박객이 화를 내고 전염병도 옮을 것이라면서 그를 내쫓아 버렸다. 이 와중에 누군가 윌슨이 도둑질도 했을 거란 소문을 냈고, 이를 들은 마을의 유지 마틴델 씨는 보안관도 아니면서 윌슨을 현상수배 한다고 커뮤니티에 전단을 살포했으며, 이를 본 세스는 “저 20달러, 내가 따고 만다. 두고봐라.” 전의를 다졌다. 우리는 안다. 미국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결국 윌슨은 세스의 손아귀에 잡힐 운명이란 것을. 그러나 윌슨은 마을에서 도망쳐 콜로라도 산맥 한 봉우리에 있는 대피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몇 주 후, 내시 씨가 아들 세스를 데리고 농장일을 보러 길을 떠나 하루 묵고 올 일이 생겼다. 옆집에 이웃과 격리하여 홀로 외롭게 사는 할머니 루비앨리스 에이커스 여사를 통해 연락을 하고 있던 윌슨을 만나기 위해 V는 얼른 이모부한테 점심을 차려주고, 저녁 거리를 챙겨 알아서 먹으라 일러준 후 곧바로 윌슨을 따라 산꼭대기 대피소에 도착해, 둘 다 처음으로 다른 성과 밤을 새운다. 당연히 처음엔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으나 곧바로 익숙해졌고, 이날의 결과로 V는 임신을 하고 만다.

  아침이 되자 서둘러 집에 돌아오고, 나날이 갔으며, 가을이 되어 일손이 바빠져 내시 씨는 던랩 여인숙에 묵던 계절 노동자 포레스트 데이비스를 고용했다. 이게 V한테는 결정적으로 실패작. 가을 수확이 다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만나자마자 포레스트는 세스와 찰떡이 되어버렸다. 세스한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은 윌슨을 산 채로 잡는데 성공하고, 두 명 다, 아니면 적어도 한 명은 윌슨의 손과 발을 묶어 밧줄로 차의 뒷범퍼에 연결한 채 그대로 질주해 결국 산채로 피부가 거의 벗겨진 상태에서 윌슨은 숨을 거두고 만다. 넋이 나간 V. 계절이 또 바뀌고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자 V는 지겹고 지겨운 세 남자의 소굴인 집을 떠나 윌슨의 오두막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출산.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의 V가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V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삶은 그래도 이어가고, 미국 소설이니 결국은 해피엔드까지는 몰라도 그리 사나운 삶으로 생을 마치지는 않을 것이니 독자여, 결코 마음 조리며 읽지 않아도 되리라. V 앞에 어디선가 갑자기 큰 돈이 뚝 떨어지지 않겠는가.


셸리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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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08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북적북적이란 앱이 있군요. 저도 요즘 만보기 사용하고 있는데 안 쓸 때랑 걷는 게 다르긴 하더군요. 저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책은 무슨 식물학 책 같은데 예쁘긴 해요. 전 미국문학은 호불호가 있어서 당장 읽게될 것 같진않고 영화나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ㅋ

Falstaff 2024-05-08 13:34   좋아요 1 | URL
북적북적이 처음엔 그랬는데 좀 있으니 시들시들해지더군요. 다 그렇지요 뭐.
책도 재미는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같아서 아쉽지만요. ^^

페넬로페 2024-05-08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아는 브레드 피트의 <흐르는 강물처럼>과는 다른거네요.
V앞에 큰 돈이 뚝 떨어져 너무나 다행인데요~~
저 앞에도 그런 행운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8 13:39   좋아요 1 | URL
브래드 피트의 강물은 명작입지요!
돈벼락 쉽고 합법적으로 맞는 거 역시 상속이잖습니까.
근데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는 적절한 나이에 죽어서 자식들을 필요할 때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하긴 그것도 뭐 받을 거 있는 집이나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에휴...
댓글저장
 
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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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 소설의 본질은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등장하면 독자들이 헛갈린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초현실적 문장인지, 상징인지, 특정 장면의 메타포인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없이 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같은 작품 속에서 빠져나오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익숙해지면 어렵기는 하지만 읽을 수는 있다. 찬쉐의 다른 작품, 그래봐야 <마지막 연인들>, <황니가黃泥街>,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포함해 네 편밖에 읽지 않았지만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거 참 신기하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격정세계>도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장면/문장을 속속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문학적 재질이 뛰어난 대형쇼핑몰 매대의 계산원인 주인공 샤오쌍(小桑)은 문학적 스승이랄 수 있는 이(儀)아저씨와 한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짜리 구식 건물로 샤오쌍은 4층, 이아저씨는 3층에 산다고 숱하게 나온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같은 아파트에서 샤오쌍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에 있는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멍청(㑁城) 시내를 구경하는 장면이 있다. 이럴 때 당황하지 말기. 원래 초현실이 그렇다. 건물이 지그재그로 휘기도 하고, 가옥의 지붕이 머리에 부딪힐 정도로 낮기도 하고, 심지어 천장과 바닥이 결국 붙어버리기도 한다. 아마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아닐 수 있다. 기억력이 전 같지 않아서.

  작품에는 두 도시 멍청과 진청(京城). 진청은 서울(京)에 있는 성(城)이니 베이징으로 생각하면 되고, 멍청은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가야 도착하는 도시이다. 그런데 멍청은 인구 비율로 보면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판독하여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고급 독자들과, 비평가와, 심지어 소설가들을 무지하게 많이 배출하고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 가운데 딱 한 명, 차오쯔(雀子)의 전남편이자 학교 동창생 한 명을 빼고 모두, 적어도 문학 애호가이다. 즉, 도시의 이름처럼 멍청한 이들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소설 백날을 읽어봐라.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그것도 아니면 라면 국물이라도 한 방울 나오느냐는 말이지. 앞에서 이야기한 작품의 주인공 샤오쌍이 근무하는 대형 쇼핑몰에서도 샤오쌍을 필두로 샤오마, 한마(寒馬)를 멤버로 하는 북클럽이 활성화되어 정기적으로 책을 읽고 작품에 대한 토론을 한다. 그러다가 샤오쌍과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이(儀)아저씨가 젊었을 적 애인의 외아들 헤이스(黑石), 역시 대단한 문학 고수에게 샤오쌍과 연애를 해보라 해서 작업의 일환으로 헤이스는 마치 우연히, 오랜만에 샤오쌍을 만난 것처럼 위장을 해 자신의 ‘비둘기 북클럽’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비둘기 북클럽은 멍청에서 가장 유명하고 실력있는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곳으로 초기 멤버로 헤이스와 페이(費), 리하이(李海)가 있고, 뒤를 이어 옌(岩), 자오쯔, 샤오짱, 샤오미 같은 이들이 규합하여 스무 명에 이르는 호화멤버를 이룬다.

  한 가지 주제로 사람이 모이면 그 안에서 당연히 짝짓기가 생긴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비둘기 북클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비둘기 북클럽과 쇼핑몰 북클럽의 대장 격이었던 헤이스와 샤오쌍, 이들을 엮어주는 핵심역할을 하기도 했고 둘의 실질적 문학 교사이기도 한 나이든 이아저씨와 젊은 샤오마, 비록 짧은 기간 동안만 부부의 연을 맺기는 했지만 페이와 한마, 헤어진 후 다시 한마와 샤오웨. 처음엔 헤이스의 (속물) 애인이었고 동창과 결혼해 1년 남짓 살다가 이혼한 차오쯔가 훗날 진지한 문학적 깨달음을 얻어 연애를 시작한 깊은 시골 출신의 리하이. 몇 번 이야기했는데, 연애소설은 이별소설이기도 하다는 고금의 진리를 찬쉐는 깔끔하게 깬다. 위의 커플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말 그대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쉼 없이 사랑하고, 사랑의 행위를 하고 간혹 헤어지더라도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되살려 남은 생애 동안 가장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낸다. 이게 다 문학의 힘이란다. 그러니까 멍청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수련하는 고수들은 문학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이다.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가장 모범적인 소설. 이게 가능한 건, 본문만 68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작품 자체가 초현실적 관점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6층 구식 아파트가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 테라스가 있는 초현대식 아파트로 변용하듯이. 그리고 이들의 사랑. 특히 사랑의 행위. 거 참. 은근히 야하다. 그래서 좋다는 뜻이지 뭐.


  근데 이 작품의 주제가 뭐야? 멍청이라는 문학, 특히 소설문학의 유토피아를 설정해놓고 삶은 문학이 구원한다, 뭐 이런 식을 설파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과 이별에 대하여 쓴 것인지, 이것도 헛갈리는데, 아무래도 문학의 효용, 문학제일주의, 문학만세를 주장하는 측면이 더 강한 듯하다. 소설과 평론을 하는 사람들의 모색과 탐구, 노력. 지면 뒤에서 이들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찬쉐의 눈길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초현실주의 문학 같은 전위적 글쓰기에 관하여. 작품 속에서 연작 장편을 징청, 즉 수도에 있는 유명 잡지에 실을 한마의 입을 통해 찬쉐는 말한다. 찬쉐는 알다시피 중국의 전위적 그룹이었던 선봉파先鋒派의 기수이다. 선봉파 문학을 거칠게 정의하면 사회주의 문학에 반대하고 형식과 언어의 미궁을 실험하는 전위라고 할 수 있는 바, 찬쉐는 자신의 작업을 작품 중 작가 한마의 입을 통해 어느 정도 독자에게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창작이 이런 관습을 깨뜨리고 있다고 봐요. 나는 자신을 분열시킬 수 있는 현대 작가라고 할 수 있고 언제든 나 자신의 창작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창작과 관련해서 느끼는 생각을 쓰고 싶기도 해요.”

  이 말을 받은 연인 샤오웨가 말한다.

  “그거 잘 됐네요. 한마의 창작은 특별한 경우로, 전통에 얽매여서는 안 돼요. 작가는 소설과 떨어지면 자기 소설의 평론가가 될 수 있어요. 이 역시 미래 문학의 추세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아가 분열되어야 발전을 희망할 수 있어요. 원초적 역량이 가장 큰 사람이 중심이 되죠. 그 중심이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인식되지는 않지만요. 역사는 언제나 그래요.”  (p.523~524)


  작품의 무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시 멍청에서는 새로 작가의 자리에 오른 한마의 전위적 작품에 대하여 털끝만큼의 반대나 저항이 없이 찬사 일변도다. 그래서 혹시 찬쉐가 자신의 선봉문학 작품들을 위한 유토피아로 멍청을 설정하고, 선봉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천사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미래를 여는 가장 올바른 문학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실 전위 작품은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가자미 눈알을 하는 비평가들이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모든 전위 작업을 통해 역사는 진보해 나가는 법이기는 하다. 그래도 너무 했어. 전위문학의 유토피아 이름으로 하필 멍청이 뭐야, 멍청이.

  그러나 나처럼 이미 나온 문학작품을 오직 즐기기 위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과하게 전문적이다. 내용이 전문적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문학에 목을 매고, 실제로 소설작업과 평론을 하고, 중앙 문단과 연결을 하고,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문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것도 전위 문학을.

  전위적인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소수의 잘 교육받은 ‘탁월한 자’들이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그랬다. 예술의 효용이 쾌락이라고? 그건 탁월한 자들의 경우가 그렇고 나한테는 쾌락이기는커녕 고난의 행군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한데 멍청의 숱한 독자들이 그리 쉽게 이해가 되겠느냐고. 그렇다고 좌절금지. 문학적 소양이 대단한 샤오쌍조차 멍청 최고의 비둘기 북클럽을 찾아 가려해도 도무지 북클럽이 있는 고서점 거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다. 아무리 행인한테 물어도 아는 사람조차 없는 고서점 거리 안에 북클럽이 있었던 것. 여기까지는 나나 샤오쌍이나 그게 그거였다는 뜻. 글쎄 초현실주의라니까. 이런 장면에서 당황하면 책 못 읽는다.

  작품의 또 하나는 역시 연애. 연애소설 쓰기가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거의 비슷한 플롯에 비슷한 진도, 비슷한 결합과 분리 과정은 사실 이미 다 써먹었다.  그리하여 찬쉐가 연애소설을 다루는 방식은 문학을 매개로, 멍청이란 유토피아에서 문학공부를 하는 선한 사람들의 연애감정을 꽤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뭐 그냥 넘어가는 게 없을 정도로. 그리고 한 작품 속에 다양한 커플을 등장시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적절한 수준의 베드씬까지. 그럼에도 <격정세계>에서의 격정은 연애보다 문학을 향한 격정이라는 측면이 훨씬 강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인의 유토피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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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5-06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클럽을 찾아 고서점 거리를 걷는 모습은 너무 좋았어요^^ 어디에서 모이는지도 모르고 찾아가는데 헤매다 보니 그 장소에 도착해있는! 마치 그런 전위적인 문학을 읽는 독서과정을 비유하는 듯 합니다.
오향거리 읽다가 멈췄습니다.
틈나는대로 읽기엔 적합지 않아서, 나중에 한꺼번에 읽으려구요. 폴스타프님 리뷰는 책보다 재미있네요^^

Falstaff 2024-05-06 08:31   좋아요 1 | URL
예. 찬쉐가 참 흥미로운 작가더라고요. 대개 이런 선봉파 적 작품은 읽기가 곤란한데, 이이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워 하면서도 그래도 잘 읽히면서 뒷부분으로 가면 나름대로 감을 잡게 되더라고요.
저도 오향거리 읽어야 합니다. 근데 좀 뒤에 읽으려고요. 먼저 읽고 리뷰 남겨주세요. ^^

stella.K 2024-05-06 1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멍청이라는 지명이 나오나 보죠? 전 첨에 폴님께서 오타하신 건 아닌가 했습니다. 거 이름도 참. ㅋ 초현인만큼 현실에는 없는 그런 곳이겠죠? 문학을 위한 문학인의 이야기라니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4-05-06 16:55   좋아요 2 | URL
옙. 㑁城이란 지명인데요, 베이징 말고 대도시 중 한 군데를 모델로 했던 거 같습니다. 상하이 아닐까 싶기도.
이 책 재미있습니다. 찬쉐 작품 치고 좀 덜 골치 아프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것 참, 은근히 야합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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