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 강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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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다니아 쉬블리는 1974년에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태어난 범띠 여성이다. 이스트런던 대학에서 미디어 문화 연구로 박사를 받고 베를린 EUME 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쳤다. 노팅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팔레스타인 비르제이트Virzeit 철학과에서 파트 타임 교수로 있다. 이이가 널리 알려진 것은 2017년에 팔레스타인에서 발표한 <사소한 일>이 2021년에 영어, 독일어 등 기타 언어로 번역 출판한 이후이며, 독일어 번역본이 2023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문학상을 받기로 확정되었다가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공습으로 인해 원래 이스라엘/유대인한테 벌벌 기는 시늉을 하는 독일 관계자로부터 수상이 취소된 일이 국제적인 문젯거리로 확산되기도 했다. 나도 이 사건을 기억해 혹시나 해서 검색했고, 책이 나와 있다는 걸 알아 얼른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내가 작가에게 굳이 범띠 “여성”이라고 한 것은 2부작인 짧은 소설의 1부 주인공이 남성이고 그것도 군인인데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심리를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게다가 군인이라니.


  1부는 1949년 8월 9일의 일이다. 쉬블리는 이런 문장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기루만 빼고는.”

  시작부터 내 신경을 확 끌어당긴다. 기막힌 서두였다.

  그러나 독자는 팔레스타인 작가가 쓴 1949년이라면 그들의 내력을 좀 알아 두는 것이 좋다. 1년 전인 1948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조금씩 모여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침략해 점령해버린 해이며, 이후 ‘알나크바’ 즉 대재앙이라고 불리는 사건, 약7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해버린 악몽 같은 해였다. 5월에 영국의 위임통치기간이 끝나고 이스라엘 공화국임을 선포하자마자 1차 중동전쟁이 벌어진다. 전쟁 피로감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지원 없이 재래식 무기로 아랍 여러나라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운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까지는 뭐라하기 힘든데, 이후 그들은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말끔하게 소탕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1949년 8월 9일에 건조한 네게브 사막에 도착한 이스라엘 육군 소대는 두 가지 임무를 받고 먼 남쪽까지 내려왔다. 이집트와의 남쪽 국경, 휴전선을 지켜서 아무도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일. 그리고 네게브 사막 남서쪽을 샅샅이 뒤져서 잔존 아랍인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일이다. 전쟁 전, 그러니까 작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인은 물론이고 유목민인 베두인과도 대단히 바람직한 관계를 맺었다. 사막의 이스라엘인 개척지에 베두인들이 찾아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민트 차를 나누어 마실 정도였다니. 그러나 전쟁 중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어, 이제는 엄연한 이스라엘인 자신들의 나라 땅 안에 있는 아랍인종들은 당연히 제5열이거나 정보원의 끄나풀 정도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모든 아랍인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장교 한 명, 부사관 몇 명과 사병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파견군은 이집트와의 휴전 선언이 이루어진 이래 이렇게 먼 남쪽까지 도달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소대로서 지역 안전 유지를 위한 모든 책임(이라는 명목하의 과하게 넘치는 권한)이 주어진 거였다. 즉, 소대는 국가라는 권력을 대신해 이 지역에서 집행하기 위해 도착한 것이며, 언제나 권력은 주어진 순간부터 악으로 전환되기 십상인 법이다.


  아다니아 쉬블리는 사막의 소대, 이 가운데 특히 최고 지도자이자 단 한 명의 장교인 ‘그’를 관찰자 시점으로, 가장 건조한 방식으로 바라본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남아 있던 것은 두 채의 오두막과 부분적으로 파손된 세번째 집 벽의 잔해 뿐이었다. 장교는 오두막 하나를 숙소로 쓰고 지휘소 천막 하나와 부대원의 취사용 천막을 세우게 했으며, 옆에 병사용 막사 세 동의 천막을 설치하라고 지시한다. 오두막에 들어간 장교는 물을 받아 수건을 적셔 옷을 벗고 몸을 닦는다. 얼굴, 가슴과 복부, 손이 닿는 곳까지 등을 문지르고 이어 다리까지 꼼꼼하게 씻는다. 이후 사병들을 불러 군기를 확실하게 확립할 것과 특히 개인위생에 신경 쓸 것을 주문한다. 면도도 반드시 하루에 한 번 할 것까지. 이후 차를 타고 첫번째 순찰을 나가지만 극심한 더위 속 모래 언덕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날 밤, 더위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낸 다음이라 깊은 잠에 빠진 장교는 잠결에 자신의 허벅지에 뭔지 모를 물것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촉감으로 느끼면서 잠을 깬다. 어떻게 할까를 잠시 궁리하던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물것을 손으로 쳐 떼 버리고 랜턴을 켜서 확인을 하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 잠깐 사이에 그것이 허벅지를 물었는지 허벅지에 아주 작은 빨간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극심한 고통을 받기 시작한다.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것 같은 고통.

  이후 장교는 극심한 위통과 등에 경련이 나는 등 심하게 애를 먹지만 자신이 지휘하는 사병들 앞에서는 조금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위생병의 도움 없이 자신이 따로 가지고 있는 소독약과 연고, 거즈와 붕대를 이용하여 치료하고자 한다. 이런 상처를 숨기고도 그는 자신의 임무에 조금의 소홀도 없이 매일 차를 타고 순찰을 돌며, 밤이 내려도 혼자 총을 메고 진지 주변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11일에는 물린 곳의 가운데엔 고름이 차고 둘레에는 붉은 원, 푸른 원, 그리고 검은 원이 두르고 있는 상태에 이른다. 그럼에도 밤엔 홀로 소총을 메고 사막으로 나갔다. 새벽에 되자 돌연한 발작을 시작했고 결렬한 오한과 가쁜 호흡, 기침과 트림에 이은 구토까지 경험해 12일 새벽에 진지로 돌아온다. 이제 시야에는 검은 점과 회색점이 날아다니는 비문현상도 일어난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12일 오전에 장교는 다시 차량 순찰을 나가서 계속 직진할 것을 주문한다. 모래 언덕을 몇 개 넘으니 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에 다다른다. 빈약한 풀줄기 사이에 얕은 샘이 있고, 그것을 끼고 한 무리의 아랍인과 여섯 마리의 낙타, 그리고 개 한 마리가 있다. 그와 운전병은 그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해서 아랍인 남자 전부와 낙타 여섯 마리 모두를 쏴 죽여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흐느끼는 소녀 한 명과 개. 이들을 차 뒤편에 싣고 부대로 돌아오는 장교.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아랍인들이 습격할 수도 있어서 특별 경계 명령을 내린 장교는 진지 주변에 추가로 병력을 투입하고 소녀는 주방에서 일을 시키도록 하겠다고 하며 일단 옆 오두막에 가둔다. 숙소에 돌아온 장교는 또 옷을 벗고 깨끗하게 몸을 씻고 잠깐 쪽잠을 잔다. 이 사이에 병사 몇 명이 벌써 소녀한테 손을 댄다. 소녀가 울면서 소리치는 걸 보고 단번에 상황을 짐작한 장교는 병사들을 불러 양단간의 결정을 내리라 한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소녀를 진지 식당에서 일하게 하든지, 아니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소녀를 가지고 놀든지.”

  우물쭈물하던 병사들은 모두 소녀를 겁간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지만 장교는 소총을 짚으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이후 모든 병사가 보는 앞에서 소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수조에 호스를 연결해 샤워를 시킨 후 휘발유로 머리를 마사지시켜 머릿니를 제거한다. 밤이 오자 장교는 자신의 오두막에 야전 침대를 하나 더 설치하게 하고 소녀를 들여 잠을 자다가 휘발유 냄새가 지독하지만 겁탈을 하고 만다. 거부하는 소녀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하게 친 후에.

  다음 날, 1949년 8월 13일. 소녀를 다시 원래 오두막으로 보낸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두막으로 달려가 순서에 의해 겁탈을 하고, 장교의 허벅지 물린 곳은 하얀색과 분홍색과 누런 색의 고름이 한데 섞인 썩은 살의 작은 구덩이로 변해 그곳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난다. 정작 장교 자신의 악취는 베두인 소녀의 머리에서 나는 휘발유보다 훨씬 더 지독했던 거였다. 이날 오후, 장교는 병사 몇 명을 데리고 소녀와 함께 다시 사막으로 간다. 휘발유가 아까워 진지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해 가로 0.5미터, 세로 2미터의 구덩이를 파라고 지시하니 이 말은 들은 소녀는 울면서 장교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나 장교는 소녀의 머리통에 권총을 발사하고, 아직 채 숨이 넘어가지 않은 소녀에게 부사관이 여섯 발을 더 발사한 다음에 구덩이 속에 묻으면서 1부가 끝난다.


  2부는 이 살인이 있던 25년 후의 8월 13일에 태어난 여성 ‘나’가 등장한다. 인텔리에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직장을 가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이다. 어느날 베두인 소녀 학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사건의 실체를 알기 위해 그곳까지 갈 수 있는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의 가짜 신분증을 가지고, 직장 동료의 신용카드로 결제한 렌터카를 운전해 먼 길을 떠난다.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옛 팔레스타인 땅에 살기 위해서 반드시 조심해야 하는 경계선을 별 생각없이 곧장 달려가서 한 달음에 뛰어 넘거나 그냥 슬그머니 넘어버리는 성격을 가진 조바심 없는 성격의 ‘나’.

  아직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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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1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범띠 여성이라고 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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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국의 가장 유명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이런 코미디도 썼다는 게 장해서 별점을 다섯 개 준다. 스타인벡, 하면 당연히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이어서 <의심스러운 싸움>과 《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을 꼽는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생쥐와 인간>은 합본이 한 권 있고, 이미 절판된 책이 있어서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통조림공장 골목>은 스타인벡이 이런 작품을 썼는지도 몰랐던 참에 정말 우연히 개가실 책꽂이에서 발견했다. 열람실 제일 구석자리에서 잔뜩 어깨를 숙이며 키득키득 얼마나 들썩였는지. 집에 들어가다 로또 한 장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잊어버리고 그냥 왔다. 내일이라도 한 장 사야겠다. 1등 당첨되면 천만원어치 책 사겠다. 아, 취소. 더는 책 쌓아 둘 곳이 없다. 그리고 맞다! 이 책 바로 옆에 이미 절판된 <생쥐와 인간>도 눈에 보였다. 그것도 내버려둘 수가 없지.

  존 스타인벡을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한 시절을 풍미한 작가이며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좀 덜 유명하지만 미국인들이 국민 작가로 추앙하는 인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조지아를 방문해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자본주의 국가인 미합중국의 초대 FBI 국장 에드거 후버로 하여금 24시간 감시 처분을 내리게 했던 작가. 메카시 선풍에도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은 건 이미 세계적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부잣집 아들에 공부도 잘해 스탠퍼드 대학에 들어가, 스포츠도 오지게 잘한 엄친아 출신의 존 스타인벡은 굳이 공부를 열심히 할 이유조차 없어서 대학 6년인가 8년 동안 자기가 듣고 싶은 과목만 수강하다가 졸업장이고 뭐고 필요 없어, 하면서 그냥 자퇴해버렸다며? 이이가 젊은 시절에 동부에 가서 공부하고, 막노동도 하고, 도로공사 같은 막일 전문도 하다가 지쳐 결국 낳고 자란 캘리포니아주 샐리너스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글을 썼는데, 이 작품 <통조림공장 골목>은 고향 샐리너스 카운티와 접한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 즉 말 그대로 통조림공장 골목을 무대로 한다. 정말 몬터레이에 캐너리 로, 통조림공장 골목이란 곳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기 고향 바로 옆동네를 무대로 삼아 그런지 스타인벡의 문체가 전에 읽었던 무거운 작품들과 달리 날아다닌다. 피융피융.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Cannery Row는 시(詩)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탤지어이고, 꿈이다. 주민들은 창녀, 뚜쟁이, 도박꾼, 개자식들인데 이 말은 곧 ‘모두’라는 뜻이다. 이들은 성자와 천사와 순교자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같다.

  위 문단의 말이 궤변이라고? 아니다. 존 스타인벡은 진실을 서술한 거였다. 이 책은 초두에 자신이 적은 위 문장(들)이 왜 ‘참’인 명제인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그걸 구태여 미리 알 필요는 없다. 책을 읽으면 저절로 동의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리하여 스타인벡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그 시와 악취와 삐걱거리는 소음과 독특한 빛과 색조, 습관, 꿈을 산채로 포착할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는 포착하는 데 성공했고, 나는 서슴지 않고 갈채했다.

  작품 속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면은 중국인 리청의 식료품점. <에덴의 동쪽>을 읽어보면 스타인벡이 중국인한테 호의적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통조림공장 골목>에서 출연하는 리청도 매우 현명한 사람이다. 좁은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가게에 들여놓은 구색 면으로 말하자면 기적을 만든 사람이다. 한 마디로 없는 게 몇 가지 없으니 바로, 고양이 뿔, 암소부랄, 모기 눈알. 이것 말고 하여간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필요하거나 아쉬운 모든 품목을 구비했다. 게다가 캐너리 로의 모든 사람들은 리청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외상거래를 말하는 거였다. 이상도 하지. 그는 도통 외상을 거절할 줄 몰랐다. 현재 고객이 지고 있는 외상값 총계가 얼마인지 독촉하듯 확인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정한 선을 넘은 외상 고객에게는 단 한 푼도 초과해 외상 물품을 건네지 않았다. 리청에게 가장 큰 외상을 지고 있던 사람은 건조 물고기 가루(魚粉) 창고 소유주 호러스 애브빌이란 남자였다.

  아내 둘과 자식이 여섯 있는 호러스가 리청네 가게에 들어와 “내가 빚진 게 많은 거 같소.”라고 말했다. 자신도 외상이 한도까지 찼다는 걸 알고, 우리 아이한테 스피어민트 껌 한 통도 더 이상은 주지 않을 거 아니오, 라고 묻고, 그렇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리청이 대답하니, 자신의 어분 창고와 외상값 전부를 퉁 치자고 제안한다. 리청은 고개를 젖히고 속으로 열심히 주판을 튀겨보더니 통조림공장이 확장을 하는 시점에 부동산 가격에 큰 변동이 있을 거라 여겨 거래에 합의했으며, 기념으로 속칭 올드 테니스 슈즈라고 불리는 위스키 올드 테네시 사분의 일 파인트 짜리를 선물한다. 미터법으로 237cc. 호러스는 올드 테니스 슈즈를 들고 마지막으로 이젠 리청의 소유가 된 어분 창고에 들어가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이후 호러스의 아이들은 언제든지 스피어민트 껌을 씹을 수 있게 된다.


  이제야 등장하는 매력 만점의 쉰 넘은 늙은 부랑자이자 악당이자 절도범 혹은 절도 교사자인 맥이 등장한다. 맥, 하면 떠오르는 거? 나는 <서푼짜리 오페라>의 맥더나이프Mac the Knife. 이 친구도 건달이자 칼잡이. 비슷하잖여? 맥은 가족도 없고 돈도 없다. 동네에서 마실 것과 만족 외에 아무런 야심도 없는 몇 명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자 지도자이며 조언자인 한편 어느 정도는 착취자이기도 하다. 이런 남자의 대부분은 자멸하는 길을 걷는 반면, 맥과 친구들은 어렵지 않게 조용히 만족에 다가서서 살며시 흡수해버리는 재주를 가졌다. 친구라고 하면 아주 힘센 청년 헤이즐, 바 ‘이다’의 임시 바텐더 에디, 생물학 연구소에다 개구리와 고양이, 기타 온갖 생물을 조달해주는 휴이와 존스를 일컫는데 이들은 리청 가게 옆 공터에 있는 커다랗고 녹슨 파이프 안에서 살고 있었다.

  이 맥이 호러스의 어분 창고가 리청에게 넘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리 생각해도 리청한테 창고가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아 그한테 들러서 어분 창고에 자신이 들어가 살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본다. 다시 고개를 젖히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현명한 리청.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서 살라고 하면 맥과 일당들은 심통이 나서 유리창을 깨거나 불을 확 싸질러 버리지도 않을 것이며, 가게에 와서 물건을 슬쩍 훔쳐가지도 않을 것이며, 가끔 가게를 방문하는 취객이나 깡패 비슷한 것들과의 문제도 쉽게 해결해줄 것이다. 그럼에도 그냥 쉽게 들어가 살라고는 할 수 없다. 리청은 얼마로 정하든지 어차피 받지 못할 임대료로 주 5달러를 제안하고 이제 사업상 든든한 파트너가 생기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사업상 실수를 리청의 선함, 선의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킨 예로 들어도 손색이 없는 거래였다. 맥과 일당이 어분 창고에 들어가 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꽤 근사한 ‘사람 사는 곳’으로 변모했고, 이때부터 어분 창고 대신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 그릴”로 불리게 되니 이 아니 근사한 일일까.

  여기에 또 중요한 등장인물 한 명 더. 닥. 닥터의 닥이다. 웨스턴 생물학연구소의 소유자이자 운영자. 작은 몸집이지만 강단있고 아주 힘이 세고, 화가 치솟으면 몹시 사납지만 평소엔 세상에 이이보다 너그럽고 활수하고 남의 사정 잘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캐너리 로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턱수염을 길렀으며 (이게 기가 막힌 비유라고 읽었는 바) 반은 그리스도이고 반은 사티로스 같은 외모로 얼굴이 진실을 말해준다는 표본이랄 수 있다. 늘 맥주를 입에 달고 다니며 연구소에서 살면서 그레고리안 성가와 찰리 파커를 좋아한다. 사실 이이 때문에 작품에서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어쩌면 한결같이 불한당인 맥과 연결이 되는지, 그것도 팔자라면 팔자다. 우리의 맥이 어느 날 닥한테 주둥이를 얻어 터져서 위 앞니가 하나 부러지는 화를 당했건만 맥의 닥을 향한 존경은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한 명만 더. 도라. 훌륭하고 큼지막한 여자. 리청 가게 오른쪽 공터의 왼쪽 경계에 엄숙하고 당당한 도라 플러드, 매음굴 주인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악덕업체의 사장이 아니라, 나이와 병 때문에 무력한 아가씨도 내치지 않는 후덕한 포주다. 후에 ‘베어 플래그 식당’이라는 옥호를 달지만 어엿한 매음굴이라, 법에 어긋나게 살 수밖에 없으나 다른 누구보다 법을 두 배로 지키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기부금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이 1달러를 기부하는 행사에 50달러를 기부해도 그리 좋은 인상을 얻지 못하는 빌어먹을 운명의 여성. 하지만 현명하게 늙은 호걸이다.

  이렇게 천하의 부랑자 맥도, 매음굴의 호걸 사장 도라도, 식료품점 주인 리청도, 그곳에 종사하는 모든 종업원과 거리의 사람들, 주민들, 심지어 경찰, 소방관, 택시운전사 기타 등등도 캐너리 로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닥에게 뭔가 좋은 일을 좀 해줘야 하는데.”

  바로 이 “좋은 일”을 해주느라 통조림공장 골목의 사람들은 유쾌한 난장판, 포복절도의 비빔밥을 제대로 한 번 볶아낸다. 당신이 성적이 떨어진 학생이거나 실연당한 연인이거나, 마누라한테 얻어 터져 눈두덩이 부었거나, 붓기는 내려갔지만 아직도 시퍼렇다면 이 책을 읽으시라. 혹시 알아, 기분이 조금은 풀어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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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26 0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아다니아 쉬블리, <사소한 일>
화요일. 오에 겐자부로,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수요일. 강은교, 《벽 속의 편지》
목요일. 도리스 레싱, 《그랜드마더스》
금요일. 데어도어 폰타네, <얽힘 설킴>

호시우행 2024-01-26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독가이시네요. 글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그런데, 궁금한 것 하나 문의해도 될까요? 걸려있는 그림의 화가와 작품명은 뭔가요?

Falstaff 2024-01-26 10:25   좋아요 0 | URL
프로필 사진 말씀이군요. 삽화입니다. 삽화를 그린 화백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물은 셰익스피어에 몇 번 등장하는 배불뚝이 술꾼 폴스타프랍니다.
별거 없는 독후감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호시우행 2024-01-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psyche 2024-01-26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몬트레이에 실제로 캐너리 로가 있어요. 예전에는 통조림 공장이 있던 길이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음식점, 옷 가게, 기념품 가게 등이 늘어서 있죠. 예전에 이곳에 갔다가 이 책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까먹었었는데 심지어 재미있다니 꼭 읽어야겠네요.

Falstaff 2024-01-26 19:2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ㅎㅎㅎ 하여간 재미난 책입니다. 기회가 닿아서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

Jeremy 2024-01-26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속편인 <Sweet Thursday> 도 마지막 순간까지
스타인벡 특유의 유머가 작렬합니다.
<Cannery Row> 를 즐기셨다면 속편 <Sweet Thursday> 뿐 아니라
<Tortilla Flat>도 추천합니다.
읽는 내내 ㅋㅋ 웃음이 계속 배어나오는 책입니다.

National Steinbeck Center, 스타인벡 기념관이 미국 캘리포니아
Salinas시에 있는데 그의 전 작품들을 정말 잘 정리해놓았고
그 중에서도 <Cannery Row> Section 은 책을 읽은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숨겨진 웃음의 순간들로 꾸며져 있답니다.
제 <프로필 이미지>도 그 곳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Falstaff 2024-01-26 19:26   좋아요 1 | URL
옙. <달콤한 목요일>은 보관함에 넣어 놓았습니다. 스타인벡의 작품을 널리 섭렵하셨군요. 해주신 말씀 잊지 않고 책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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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여름, 오지게 덥기 바로 전인 7월 중순 지날 즈음해서 <마지막 연인>을 인상깊게 읽었다. 그러나 다른 찬쉐의 작품을 고르게 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중국의 선봉파 기수라는 타이틀을 여전히 견지하는 몇 안 되는 작가라서 이이의 아방가르드 적인 포스트모던 스타일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선뜻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그리하여 당시엔 <마지막 연인> 말고는 딱 한 편 밖에 없는 찬쉐의 단행본 <오향거리>를 보관하기만 했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읽겠지 싶어서. 시간은 흐르고 찬쉐를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망설이기를 벌써 반 년, 앗차, 도서관 개가실 신규 구입 도서 진열 선반에 이이의 데뷔작인 <황니거리> 즉 <황니가黃泥街>가 놓여있던 거였다. 그래 두꺼비가 파리 채듯 널름 주워들었다. 이게 읽은 내력이다. ‘주식회사 열린책들’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엽기적 책표지를 뒤로 한 채. <황니가> 이전에 단편소설 <더러운 물 위의 비누방울>을 발표했다고 책 앞날개에 쓰여 있기는 하지만 보통 <황니거리>를 데뷔작으로 치는 거 같다. 1987년 출간작품. 이후 (우리나라 출판사들의 헛갈리는 출판정보에 의하면) 다음 장편소설 <오향거리>를 읽기 위해서 독자는 30년을 기다려야 했다. 문학동네는 <오향거리>를 찬쉐가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광고하기도 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라, 30년? 그러면 2017년. <오향거리>를 읽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을 지도 모르겠다, 라고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랬으면 좋을 뻔했다.

  찬쉐를 일컬어 중국의 카프카니, 중국의 보르헤스니 하는 건 과장된 수사는 아니다. 특히 카프카 분위기를 <황니가>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황량한 디스토피아 지대. 세기는 끝나가고 도시 변두리 거리는 시간이 감에 따라 땅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쇠락을 넘어 멸실을 향해 그저 흘러가 버리는 광경. 콕 집어서 <성>을 둘러싼 마을, 물론 총동원과 문화혁명을 거친 20세기 중국이라서 <성>의 촌락보다 훨씬 살풍경한 도시 변두리 지역이지만 하여간 <성>과 그 일대를 떠올리게 되더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성>보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스너의 두 작품, <저항의 멜랑콜리>와 <사탄 탱고>와 더 비슷하다. 두 작품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카프카를 확장하여 (카프카가 모색한)한 개인을 넘어 도시/마을 전체의 집단적 히스테리에 초점과 관심을 두었다. 첸쉬의 경우도 황니거리에 사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들 모두의 점진적 몰락과 쇠퇴, 멸절에 렌즈를 맞추어 나간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에서는 몇 년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추위가 도시를 급습하거나(저항의 멜랑콜리), 새벽의 보헤미아 벌판을 가로질러 이미 무너져내린 교회당에서 들릴 리 없는 종소리가 이 가을의 첫번째로 쏟아지는 비를 뚫고 들려온다(사탄 탱고). <황니가>는 거의 결말 부분에 접어들기 전까지 잿빛 속에 약간의 노란색을 띄는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진다. 한 때, 예전에 황니거리엔 검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하늘에서 죽어버린 물고기가 쏟아진 적도 있고, 그것을 주워 소금을 뿌린 다음 말려 구워 먹다가 독창이 나 죽은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이기도 했다. 그런 시절은 아직도 계속된다. 카프카는 다음으로 하고 크러스너호르커이를 연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떠오를 만큼 비슷한 분위기. 이 정도면 아실 듯.

  아마추어의 의견이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독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작가는 전혀 모른 척할 것 같다. 찬쉐도 자신이 어떤 의도로 작품을 썼는지 굳이 독자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작품은 완전히 메타포에 입각에 쓰였으며 마치 측량사가 그렇게 한 번의 면담을 바랐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는 성주처럼, 독자는 <황니가>가 끝날 때까지 왕쯔광(王子光)이라 불리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존재,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존재. 사람인지 아닌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물건(이라 해두자). 아주 오래 전에 왔었다고 하는 일종의 암시이자 광상(光狀: 빛을 내는 형상) 또는 한 덩이의 불. 다만 찬쉐가 카프카, 크러스너호르커이와 다른 점은 동구사람들이 말이 거의 없어서 대신 사변적이고 서술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반면, 단 한 번도 정막 속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최고 번식력을 자랑하는 국가의 작가답게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말이 많다. 말은 정말 많지만, 그들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다. 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대신 각자는 각자의 말을 할 뿐. 다변 속의 고립.


  황니黃泥. 누런진흙. 황니가라면 길거리가 진흙으로 된 변두리 마을이다. 도시보다 더 오래 되었지만 이제는 더 없이 쇠락한 지역. 거리가 시작하는 곳에 S기계공장이 하나 있어 거리의 랜드마크로 기능한다. 황니가의 독생자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 마음 속에 유일하게 거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쇠구슬 생산공장. 5~6백명에 달하는 직원의 대부분은 황니가 사람들이고 이들은 매일 아침 회사에서 내주는 소형 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그러나 좁고 긴 거리. 지금은 너무 낡고 쇠락해서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 거리 사람들은 원래 모든 쓰레기를 강가에다 그냥 흘려 버렸으나, 언젠가 한 번은 동네 아낙이 집의 연탄재를 어느 음식점 앞에 쏟아버렸다. 며칠 후, 연탄재가 쌓인 것을 본 이웃 사람이 또 거기다 연탄재를 부었으며, 어느 새 연탄재는 자그마한 동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동네 사람들은 집안의 모든 음식 쓰레기와 심지어 요강까지 그곳에 비우기 시작해 썩는 냄새와 이 냄새를 맡고 새카맣게 몰려든 곤충과 그것들이 낳은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 즉 구더기들이 창궐하더니 거리엔 부스럼과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유난히 높은 암환자 비율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하늘에선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거리 옆의 화장장은 늘 바쁘게 가동해야 했는데,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공기 정화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 사람을 태운 그을음, 검댕이 굴뚝을 빠져나오자마자 기압골에 눌려 황니거리 상공을 포위해 밤새 진주했던 거였다. 미친개와 고양이, 미친개가 물어 죽인 닭과 돼지의 시체들 역시 광견병의 위협 때문에 먹지 못하고 쓰레기 산에다 내다 버리고, 이 와중에 밤새 몰래 낳은 영아도 거적대기에 둘둘 말려 던져버리는 게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검은 비가 내리고 하늘은 항상 검은 그을음과 먼지, 그리고 더러운 불순물이 떨어져 내려, 작품 속에 일관되게 높고 높은 습도를 유지해 온갖 곳에 곰팡이가 피고, 대가리와 몸통이 초록색인 파리, 모기가 들끓었으며, 어이없이 크게 자라는 시궁쥐들이 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거리. 띠 풀과 나무로 올린 지붕도 습기와 곰팡이와 세월을 이기지 못해 한 블록 씩 쏟아져 내리고, 집 전체가 일정한 속도로 땅 속으로 가라앉는 곳에서 사람들은 햇빛 속에서 기이하고 왕성한 생기를 토해낼 왕쯔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쯔광, 빛의 형상 또는 한 덩이의 불이 그러나, 사람이 죽기 직전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한 순간임을 모른 채. 그리하여 거리 사람들은 종이에 표어를 써서 벽에 붙인다.

  “어둠은 지나갔다. 곧 빛이 왕림할 것이다!”

  거의 망해버린 집단농장에서 “보란 듯이 잘 살게 될 것이다. 마음껏 즐기며 살게 될 것이다!” 라고 주민들의 옆구리를 쿡쿡 지르는 <사탄 탱고>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연상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쉽지 않다. 황니거리. 검은 비가 내리는 진흙 거리. 아스팔트 포장을 생각할 수 없는 멸실의 거리가 징그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가능한 만큼 오염시키고, 감염되고, 배설하고, 썩어 문드러지는 광경.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짐승들의 헐벗고 병들고, 죽어 함부로 버려졌거나 부패해가는 시신의 상태. 하염없이 쏟아지는 검은 비 때문에 재래식 화장실에서 넘쳐 마당과 부엌과 거실과 거리로 함부로 흘러가는 모습.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일을 보는 중국의 재래식 화장실 전경.  감염된 사람의 몸 속에서 억지로 잡아 빼거나 스스로 몸 밖으로 나오는 생명체의 덩어리. 이런 모든 것을 감수해야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수도물에서 며칠동안 비린내가 난 이유가 물을 끌어오는 입수 펌프 앞에 사람의 시체가 둥둥 뜬 채 파이프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물을 먹어도 아무도 즉각적인 몸의 이상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파리의 대가리와 날개를 떼고 요리해 먹는 것도 비위좋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일부(또는 많은) 독자는 이런 장면을 질색하지만 전향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중국 선봉파의 진짜 기수 찬쉐의 데뷔작품이다. 이이는 이런 허들을 데뷔작에 은닉해 놓았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더했다. 진짜 읽으실 분은 각오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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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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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톨트 곰브로비치가 1904년에 폴란드 작은 마을의 대단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건 확실한데, 인터넷 두산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이이를 유대계 폴란드 사람이라 하고, 정보라의 곰브로비치 연표에는 하급 귀족가문 4남매 가운데 막내라고 한다. 나도 전에 독후감 쓸 때, 부르노 슐츠,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와 더불어 비톨트 곰브로비치를 폴란드 문학 3인방이라고 조금 과장한 적이 있으며, 이들 세 명이 모두 유대계라고 알았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 폴란드에서는 유대인에게도 (하급)귀족 작위를 주었던 걸까? 아니면 곰브로비치 가문이 절묘하게 자신들의 유대 정체성을 숨겨온 걸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1939년에 우연히 폴란드에서 만든 여객선의 출항을 취재하기 위하여 탑승했다가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오지 못한 속내 가운데 하나가, 만일 유대계라면 조국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나치와 폴란드 정부에 의하여 몰살을 당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서. 그럼에도 곰브로비치는 폴란드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평생 폴란드 언어로 글을 쓴 것이 참 대단한 것일 테고, 아니면 외국어로 작품을 쓸 수 없는 언어의 지옥이 끔찍했을까, 생각의 갈피가 왔다 갔다 한다. 곰브로비치의 히트작인 <페르디두르케>가 나치 치하에서 금서로 찍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불태워진 것도 그러하고.

  이 극작품집을 읽음으로 해서 나는 우리나라에 번역해 출간된 모든 곰브로비치를 다 읽었다. <페르디두르케>, <코스모스>, <포르노그라피아>는 소설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은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말하건대 읽기도 참 힘들게 읽었고, 헉헉거리며 끝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음에도, 물론 읽고 8년에서 10년 정도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누가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아주 짤막한 단편斷片, 조각 정도만 생각이 나며, 그것도 어느 작품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세계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하면 가방끈 짧은 걸 광고하는 거 밖에 되지 않겠지만, 같은 간전기(1920~30년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눈썹이 휘날리는 활약을 했던 동료들인 슐츠, 비트키예비치의 작품과 비교하면, 표현의 방법이나 작품 속의 폭발력이 아무래도 얌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애초에 이 희곡집을 구입할 때부터 오늘 다 읽은 시점까지 내가 내 돈 내고 또다시 자발적인 “고난의 행군”을 하기로 했다는 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다.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에 유독 독자가 힘들어할 만한 텍스트를 소개하고 있어서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첫 페이지를 넘길 때도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야기엘로인스키 대학의 예쥐 야젱브스키 교수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읽는다. 근데 이번엔 다른 작가도 아니고 비톨트 곰브로비치. 세 번 읽었다가 세 번 코피 난 작가라서 처음부터 쫄아 있었던 건 고백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리하여, 후딱 읽어봤더니, 저 하늘 위에 먹구름이 조금 개기 시작해 활짝은 아닐지언정 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햇살이 비치는 거였다. 그것도 모자라 본문을 건너뛰고 뒤로 가서 엽기토끼의 작가이자 이 책을 번역한 정보라의 해설을 읽은 후에 드디어 본문을 펼쳤더니, 아이고, 훨씬 수월하다. 다음은 서문의 요약이다.


  곰브로비치는 자신의 희곡작품을 공연하는 걸 “보는” 일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에게 희곡이란 근본적으로 공연을 위한 대본이 아니다. “연극성”이란 그의 심리적인 특성이었으며 내면에서는 줄곧 가면을 쓴 여러 버전의 고유한 “나”들이 있어 다수의 “나”들이 끝없이 다툰다. 그리하여 이이의 희곡은 공연이라기보다 낭만주의 이전의 오래된 레제드라마Lesedrama, 즉 읽는 희곡에 속하고, 읽기에도 적합하다.

  곰브로비치의 희곡들은 무엇보다 20세기 역사에 대한 해석이며, 작품의 주요 주제는 20세기의 인간과 현대의 사회와 체제들, 정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변화를 포착한다. 우선 옛 질서에 대한 투쟁을 시도하고, 시도의 패배와 관습적인 존재 방식으로 회귀하고,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해, 존재의 자발성으로 돌아가든지, 형식을 파괴하든지, 이것저것 섞어찌개를 끓이든지 한다.


  위 두 문단의 요약을 미리 염두에 두고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읽으면 그나마 조금 수월하다. 아, 지금 “수월하다”라 했다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로 수월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하여간 작품은 부조리극이다. 몇 년간 프랑스 희곡을 중심으로 일반독자 치고는 부조리극을 열심히 읽은 편이라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읽었으며, 어라, 아들이 부왕을 폐위시켜 지하 감옥에 가둔 후에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건 알프레드 쟈리의 부조리극 <위비 왕>하고 유사한 걸? 뭐 이렇게 주접을 떨어가며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결혼식>과 <오페레타>를 연이어 정독을 하려니 머리속에서는 냉장고 신선실에 두고 온 삼겹살과 삭힌 홍어회가 삼삼하고,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욱신욱신 쑤시기도 했다. 그러니 권하옵기를 하루에 한 편 씩만 감상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대신, 집중, 집중 또 집중해서. 하, 젊어서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이 책의 매력이 하나 더 있다. 부조리극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인데, 사실 고도를 찾는 게 내가 읽어본 부조리극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쉽다. 당연히 무슨 뜻이고, 뭘 주장하는지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할 재주는 없으나 하여간 고도 빼고 나머지 출연진이 자기 잘난 맛으로 신발도 벗었다가 다시 신고, 혓바닥에 제트엔진을 달고 속사포 쏘듯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떠들어 대는 재미라도 있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 고도 씨, 물론 돌아오는 고도 씨도 있다, 나는 봤다, 이 고도를 부조리극의 평균이라고 여겼다가는 정말 코피난다. 쌍코피. 내가 읽은 프랑스 부조리극들도 역자나 출판사에서 희곡을 감상하는 포인트를 이 책만큼 설명을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조리극은 곧잘 줄거리가 지금 어떻게 꼬여가는지 읽으면서 헤매는 경우가 숱하다. 엽기토끼 정보라는 친절하게도 희곡 세 편 들어가기 바로 앞에 각 막마다 줄거리를 요약해놓았다. 줄거리 요약을 스포일러라고 치부해서 읽지 않고 그냥 작품으로 직진하지 마시라. 드라마 장면이 어떤 과정이고 무슨 장면을 위한 예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약. 내가 읽은 순서. 서문 – 역자 해설 – (각 희곡마다) 해설 및/또는 줄거리 – 본문.

  역자 해설은 책의 순서에 입각해 다 읽은 후로 돌려도 좋겠지만 ‘서문’과 ‘작품해설 및/또는 줄거리’는 반드시 읽고 본문으로 진입하시기 권한다. 만일 정말 이 책을 읽으시겠다면 말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얄밉겠지?

  정말로 읽으실 분들에게,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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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일기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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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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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96년 작품. 1990년 8월부터 1991년 6월까지 지속된 콜롬비아 기자 열 명의 납치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마루하 파촌은 삼촌이기도 했던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도무지 성격상 차이로 견딜 수 없어 가톨릭 대주교에게 요구해 친족간 혼인관계 불성립의 판정을 받아냈다. 원래 집안 대대로 신문기자인 인텔리 계급이라 자신도 신문기자로 다시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크지 않은 잡지사를 창간하기도 했고 두 달 전부터는 국영단체인 영화진흥원 포시네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마루하의 언니 글로리아 파촌은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에게 대폭적인 지지를 받아 거의 당선이 확정적이었지만 그만 테러리스트에게 표적이 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루이스 갈란은 “범죄자의 국외 인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강경파였다.

  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 문제가 되는 콜롬비아에서의 “범죄자 국외 인도”, 국외는 미국을 일컫는 말이다. 콜롬비아는 당시 전 세계 마약 공급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마약왕이라고 불린 메데인 카르텔의 설립자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는 마약을 팔아 한때 세계 제7위의 현금보유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문제는 콜롬비아 마약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흘러들어 마약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마약 중독자가 순식간에 불어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좌익 게릴라들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에 깊숙이 관여했던 전력이 있어, 비공식(미확인)적으로 마약 단체에 직접적인 소탕작전에도 개입하면서, 콜롬비아 정부에 마약 생산과 판매에 관련된 범죄자를 미국 법정에 세우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 입장에서 콜롬비아 내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약 카르텔을 정부가 체포해봤자 부패한 정부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가벼운 형을 선고받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체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도 여전히 마약 제조와 판매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필두로 카르텔의 지도자들은 미국으로 신병을 인수할 경우 최하 150년 형을 피할 수 없으며 90년이 지나기 전까지 가석방 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터에 도저히 “범죄자 국외 인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직 영화진흥원 원장이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자였던 사람의 친척인 마루하 파촌 데 비야미사르는 카르텔이 납치 대상으로 점찍을 완벽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마루하가 아이 다섯을 데리고 새로 결혼한 현재 남편 알베르토 비야미사르 카르데나스 역시 정치인으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대통령 세사르 가비리아의 집무실에 전화를 하거나 찾아갈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정부와의 협상에 적당한 미끼로 쓸 수 있음에야.

  영화진흥원 앞 오후 7시 5분. 마루하는 시누이 베아트리스와 르노 21, 관용차를 타고 퇴근한다. 베아트리스의 남편은 침착하고 경험 많고 유능해 명예훈장을 받은 신경정신과 의사 페드로 게레로 박사지만 이날 이후 우울증에 시달릴 예정이다. 일상적으로 시누-올케는 함께 차를 타고, 러시 아워 시간 속의 보고타 시내를 관통해 먼저 올케 마루하의 집에 들렸다가 베아트리스의 집에서 퇴근한다. 그러나 이 날 진흥원을 출발하자마자 메르세데스와 택시 한 대가 르노21을 바싹 뒤쫓기 시작했지만 마루하의 운전기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르노21이 82번가로 들어서서 집에서 2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회전길에서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었을 때, 택시가 난폭하게 다가와 앞길을 막는가 했더니 메르세데스가 바짝 뒤에 붙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눈과 입 부위에 구멍 세 개가 뚫린 복면을 쓴 남자 몇 명이 내리더니 소음기가 부착된 소총을 발사해 불쌍한 운전기사의 머리통에 구멍을 내버렸고 차 밖으로 끌어내 다시 네 발을 더 쏘아버린다. 기사는 사건이 알려져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숨을 쉬고 있었지만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던 중 절명해버리고 만다. 괴한들은 마루하를 메르세데스에, 베아트리스를 택시에 싣고 급하게 출발해 보고타 시내를 질주하는데, 붐비는 퇴근시간에 지들이 튀면 얼마나 튀겠는가. 이렇게 납치된 두 명의 여인이 모처의 좁은 방에서 다시 만난다. 군대훈련을 경험했고 예비역 대위 자격이 있는 베아트리스는 괴한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이들이 베아트리스는 원래 납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 돌려보내겠다고 하자, 올케를 바라본 베아트리스는 자진해서 남겠다고 말해 마루하는 감격해버리고 만다. 혹시 모르지. 곱게 보내줄 리가 없잖아. 그 결정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인지 누가 알랴. 이 작품은 이때부터 다음해 1991년 6월 이들이 납치에서 풀려나고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자수하여 스스로 교도소에 입소하는 장면까지다.


  마루하와 남편 알베르토 바야미사르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만난 것은 1993년 10월. 납치에서 풀려나 2년 4개월 만이었다. 이 자리에서 부부는 마르케스에게 마루하와 시누이 베아트리스가 납치되고, 갇힌 장소에서 겪었던 경험, 두 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각 계층 사람들의 노력과 납치한 쪽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다. 작품을 쓰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시점이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살인자인 에스코바르가 아직 처단되지 않은 상태였고, 국내 치안은 여전히 테러를 감행하고 있는 카르텔 쪽 단체 로스 엑스트라디타블레스의 기세 역시 주눅들기는커녕 에스코바르 자수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무차별 테러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들의 납치를 소설로 쓴다고? 그랬다. 물론 구상 단계에서 에스코바르가 은신처 지붕 위에서 집중적인 기총소사를 받아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얼마야, 안 그래?

  그런데 얼마 후, 작가는 마루하와 베아트리스 말고 여덟 명의 기자들이 이들보다 더 먼저 납치되었으며 결코 따로 떼어내서는 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차례로 이 시기에 납치됐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한편, 이들이 남긴 메모나 기타 자료를 수집해 엉클어진 모든 것을 정리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내게는 굉장히 낯선 마르케스 표 르포 소설이 완성된다.

  1990년 8월 30일, 가장 먼저 납치된 사람은 디아나 트루바이. 크립톤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이며 잡지 『뉴스&뉴스』의 편집자를 겸해 일하고 있다. 특종을 잘 잡아내기로 유명하며 좌익반군과 내란시기에 반군 지도자와 단독 인터뷰를 따내 장안의 스타가 된 경험이 있는 막강 커리어의 히로인이다. 디아나에게 에스코바르와의 단독 인터뷰를 제안했으니 이걸 덥썩 물지 않으면 가짜 디아나라서, 그날이 되자마자 뉴스 논설위원 아수세나 리에바노, 편집자 후안 비타, 카메라맨 리처드 베세라와 오를란도 아세베토, 그리고 콜롬비아 주재 독일 특파원 헤로 부스까지 모두 여섯 명이 길을 나섰다가 몽땅 납치당하고 말았다.

  마리나 몬타야는 마루하보다 두 달 먼저 납치당했다. 환갑이 넘은 노년이지만 여전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출렁이는 금발의 미인. 특히 손과 손톱이 돋보인다. 이 사람은 동생 헤르만 몬토야 때문에 납치당했다. 헤르만이 공화국 전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 막강한 스피커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 로스 엑스트라다타블레스가 데려왔지만, 납치행각을 벌인 뒤에 보니까 헤르만 몬토야는 이미 골방 신세로 떨어진 지 오래고 더구나 지금은 캐나다 대사로 나가 있어서 현 정부 정책에 감놔라 배놔라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납치가 있었고,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당연히 인질에 대한 처형을 동반하는 것. 이때 납치범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순서로 사형을 집행한다. 그리하여 마리나 몬토야는 불행하게도 첫번째 처형 대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그렇게 된다.

  마리나가 납치되고 불과 네 시간 후에 당한 프랑시스코 산토스. 일명 파초 산토스. 이이는 신문 『엘 티엠포』의 편집부장이다. 15년 전에도 파초의 아버지 에르난도스 산체스에 대한 납치기도가 있어서 그런지 산초는 납치 기간 내내 무지하게 적응을 잘 하면서 오히려 감시하는 청년들을 감화감복 시키기에 이르는 유쾌한 사람이다. 자신이 어디에 갇혀 있는 지도 척 보고 알지만 함부로 도망하기엔 날아드는 총탄이 겁나 그냥 있기로 한다. 나중에 절호의 찬스를 맞아 창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총 든 감시원이 “지금 뭐해!” 라는 외침에 “보면 몰라? 똥 누잖아.” 대꾸해서 자기 목숨 자기가 구한다.


  지금 두 권짜리 이 책은 절판이다. 이렇게 말하면 출판사한테 미안한데, 그렇다고 독자를 위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지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마시라. 이걸 소설이라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신동아나 월간조선에 5회에서 6회 분량으로 연재하면 딱 좋을 듯하다. 마르케스가 쓴 “르포소설”이라기 보다 그냥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게 맞다. 웃기게도 책 뒤표지에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사실적> 리얼리즘으로의 변신!>이라 써 놓았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다 마음에 들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으, 이거 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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