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DAVID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송옥 옮김 / 동인(이성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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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6월, 책도 안 읽으면서 책 욕심은 많아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책. 다른 작가도 아니고 D. H. 로렌스가 쓴 희곡이라니, 딱 그거 하나 보고 얼른 골랐던 책. 이제 책 사고 1년 반 만에 읽었다.

  로렌스는 <어머니와 아들>, <무지개>, 그리고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으로 거의 평생을 외설시비에 휘말렸던 작가. 나는 책을 사면서 이이가 정말 구약성서에 나오는 근엄한 다윗왕을 연극으로 만들었을 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그랬을 것이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근데 책의 첫 장을 열고,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사울이 기껏 아말렉과의 싸움에 이기고 왕을 잡아왔으나 팔자가 찌그러지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고, 아차, 괜히 샀다, 후회했다.

  생전 처음 구약성서를 읽어본 것도 벌써 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 몇 개 있다. 파밀리아 사그라다 성당, 쾰른 대성당, 노트르담 성당, 로마 대성당, 옛 성 소피아 성당 등등. 나는 이런 휘황찬란하고 요란뻑적지근한 성당은 야훼나 예수의 뜻과 관계없이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든 후세의 교황, 추기경, 대주교, 큰 목사 등 종교인들이 자기들 어깨에 힘주기 위해, 민중들은 태중에서 죽지 않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배고픔과 추위와 전쟁의 잔혹함에 떨고 있음에도 눈꺼풀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들을 무임으로 징용해서 세운 사치품일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는 거. 다른 잡신한테 가오가 망가지고 싶지 않았던 질투의 하느님 야훼가 솔로몬이 만든 최초의 성전부터 그렇게 만들기를 바랐다는 거. 음. 그랬구나. 그리하여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황소 2만2천 마리, 양 12만 마리를 공물로 태우게 해 야훼께서는 구름 위에서 그 미세먼지를 흠향했던 것이로구나. 그때 나는 잽싸게 계산했었지. 황소 2만2천 마리. 황소의 코끝부터 꼬랑지 끝까지 2미터라 잡고 한 줄로 늘어 세우면 44킬로미터, 화곡동에서 천호동까지 가겠구나. 양 12만 마리도 한 마리를 1미터라 잡아 한 줄로 늘어 세우면 120킬로미터, 서울시청에서 원주시청까지 가고도 10킬로미터를 더 가겠구나.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던 존재가 밤하늘의 도심을 빼곡하게 점령한 붉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을 창조한 야훼의 정체구나. 나도 어려서 외조부모 따라 감리교회에 열나 다닌 적 있지만, 종교는 명백하게 아편임이 밝혀지고는 멀리했다가, 구약성서를 읽은 다음엔, 기독교인들이여 미안하다, 기피하게 됐다. 당신들의 종교생활을 존중하지만 나더러 믿으란 얘긴 더 이상 말라. 대신 기꺼이 지옥의 불 맛을 볼 터이니.

  그런데 위에 쓴 건 전적으로 내 생각,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불신자, 선하지 않은 사마리아 종자들의 생각이고 선한 예루살렘의 후예들은 구절구절 읽으며 아멘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가슴에 콕콕 사무치는 모양이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는 (아멘!)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사람들을 전멸하였으나 (우우…)

  다만 백성이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느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왔나이다 하는지라 (우우….. 우우….. 너 잘났다, 우우…..)


  기독교인들은 다 아시겠지만 우매한 비기독교인들 들으시라 한 마디 설명을 첨언하자면, 야훼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사실이라기보다 내가 추리하기를, 사울을 왕에 올려준 사무엘이 보기에, 사울이 자신을 좀 냉대하는지라) 아말렉 족과 싸워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고 명령해, 사울이 전군을 이끌고 가서 싹 도륙을 냈지만 말이 그렇지 어떻게 몽땅 살육을 할 수 있나, 아말렉의 왕 아각과 아말렉 땅에서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야훼가 지시한대로 아말렉의 모든 생명, 어린이, 여인, 노인, 장애인을 망라한 모든 인간과 종을 불문한 모든 가축을 다 찔러 죽이지 않고, 그들의 왕을 포로로 데려왔으며 산 생명체를 전리품, 그것도 야훼에게 공물로 쓸 목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아니 그랬기 때문에 사울을 왕위에서 끌어내려야 마땅한 죄라는 뜻이다.

  근데 사무엘이 왜 사울한테 삐졌느냐 하면, 당시는 신권시대라서 제사장 사무엘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아달라고 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이거 불신자의 말이다. 교인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란다.) 사울을 왕으로 뽑아주었으나, 하루는 급하게 제사를 지내야 하건만 사무엘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사울이 제사를 지내 버렸기 때문이다. 즉 왕이 신권까지 행사한 것이 못마땅했다는 거. 물론 성서에서는 야훼의 말씀으로 등장한다. 아멘.

  근데 결론은 언제나 잘못을 세 가지 해야 나는 법. 동양이나 서양이나 삼세번의 규칙이 있으니까. 마지막 세 번째는 전투를 잇달아 치루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심신이 쇠약해진 사울이 전투의 승리를 점술가에게 물어보는 행위였다. 이렇게 삼진 아웃을 당하는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전사하고, 두번째 왕으로 등극하는 이가 오늘의 주인공 다윗이다.

  그러니까 세 가지 다 사울의 잘못은 야훼가 이렇게 하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무조건 복종하지 않고 인간 주제에 머리를 굴린 죄다.


  하여간 극에서는 사울이 했지만 성서에선 사무엘이 포로로 잡아온 아말렉의 왕 아각과 소, 양을 즉결처분하고 사울한테 영원히 아듀를 고한 다음 궁을 떠나 간 곳이 베들레헴. 이곳엔 양을 치는 이새라는 원로가 산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말해 이새의 아들을 몽땅 불러놓고 면접을 보는데, 역시 선지자라서 척하면 척, 한눈에 척 심중의 왕의 재목을 알아본다. 근데 없는 거다. 아들이 이게 다요, 하고 물으니 막내가 양을 몰고 집에 오는 중이란다. 크고 건장하고 씩씩하고 잘생긴 장남은 원래 구약성서에서는 인기가 없는 게 보통이라 이 집에서도 장자 엘리압은 예선탈락하고 영웅은 나중에 등장한다는 연극법 5조 2항에 의거하여 아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당한다.

  그리하여 한 판 잘 때려먹은 다윗네 집. 이 소문이 흘러흘러 사울의 귀에 들어가서 다윗은 길갈에 있는 사울의 성에 들어가 블레셋과의 전쟁에도 참가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블레셋의 최고 장수가 바로 골리앗. 9척의 키에 봉황의 눈, 익은 대추 빛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수염이 가히 관운장인데, 블레셋 군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장수 싸움, 1대1 맞짱을 떠서 승패를 정하자고 연일 시위가 대단했던 것.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면전을 하면 이기겠지만 유대군 가운데 누구도 골리앗을 이기지 못할 거 같아서 1대1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진영에 틀어박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혜성같이 등장한 목동이 다윗이다. 사울의 칼과 갑옷과 방패를 착용시키지만 도무지 갑갑해서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다 벗어버리고 (이미 야훼의 눈 밖에 난 사울의 기구를 쓰지 않고) 그냥 양치기 복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더니 돌팔매 한 방으로 자빠뜨려 버리고 득달같이 뛰어가 골리앗의 가슴을 발로 밟고 골리앗의 칼을 들어 골리앗의 목을 쳐버린다. 원래 유대인이 계산에 밝으며 이익도모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다윗도 예외가 아니라 골리앗의 대가리와 칼과 방패, 갑옷은 몽땅 아버지 이새네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사울의 맏딸 메랍의 약혼자가 된다. 물론 결혼하지 못한다. 구약에서 결혼이 어디 쉽게 되나.

  이 일 이후에 다윗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고 상대적으로 사울의 권위는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자기가 느끼기에 날로 사그라지는 것 같아 점점 위기의식에 빠지는 것도 모자라 피해의식까지 생긴다. 그리하여 위험한 전투엔 어김없이 다윗을 보내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이기고 돌아오니 사울이 보기에 참 난감하기도 했겠지. 그러다가 결국 메랍은 다른 장수에게 시집 보내버리고 다윗은 메랍의 동생 미갈과 결혼시킨다. 하지만 이미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거의 완벽하게 빠그러진 상태. 다윗은 바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충성을 맹세했건만 정치란 게 어디 그래? 사울의 질투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자 다윗은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망갔다. 아내 미갈은? 사울이 다른 남자한테 새로 시집 보낸다. 극은 여기까지. 사울이 범한 마지막 불순종도 나오지 않는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면 읽어보시라. 아니면, 읽든지 말든지 뭐 알아서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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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08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앤 타일러, <바너비 스토리>
화요일. 아모스 오즈, <블랙박스>
수요일. 윌리엄 트레버, <운명의 꼭두각시>
목요일. 조광화, 《조광화 희곡집》
금요일. 줄리언 반스, 《레몬 테이블》

유부만두 2023-12-08 0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세랑 소설에 등장하는 “거인” 문무왕도 “돌로 깎은 얼굴에 봉황 눈”이에요. 이런게 바로 골리앗상이군요.
성서의 인물도 다시 쓰고 재해석 혹은 우려먹기 좋은 소재네요. 그런데 이 극의 다윗은 좀 얄밉기도 합니다.

Falstaff 2023-12-08 07:35   좋아요 0 | URL
세상에 얄밉지 않은 영웅이 있습니까. 다 그런 것이지요. 세라비. ㅋㅋㅋ
제가 쓴 건 삼국지 관우를 염두에 두었었답니다. ^^

stella.K 2023-12-08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윗도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최전선으로 보내 죽게 만들잖아요. 못됐죠. 저도 첨에 성경 읽고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마음에 수양이 될 만한 말씀의 없고.
아고, 근데 폴님 당췌 그런 말씀은 마셔요. 뭐 폴님이 싫으셔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겠다면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다리 몽댕이가 부러져도 아파 죽느니 마니 하는데 지옥은 그에 몇 천배라는데 감당하시겠습니까? 저는 그저 폴님 행복하시기만을 바랄뿐이구만요. ㅋ

중학교 때 채털리 읽고 어찌나 화끈거리던지. 그래도 지나고 보면 문장은 참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문학성도 있고. 이 책 저는 읽어보고 싶은데 가격이 싸진 않군요. 나중에 혹시 중고샵에 나오면 그때ᆢㅋ

Falstaff 2023-12-08 15:55   좋아요 2 | URL
사람이 다 그렇지요 뭐. 사울이 자기한테 한 그대로 하는 것이지요. ㅎㅎㅎ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죽으면 끝이지. 글쎄 전 유물론자라니까요.
채털리를 중학생이 만나면 조금 그랬기도 하겠습니다. 전 중딩인가 고딩 때 실비아 크리스텔 나오는 영화로 봐서 읽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나중에 읽어보니까 정말 잘 쓰지 않았나요? 펭귄으로 읽으면 서문을 도리스 레싱이 썼답니다!

다락방 2023-12-0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자가 찌그러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2-08 15: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흔히들 팔자를 어려운 말로 쓰기 좋아하지요, 운명이라고.
 
고슴도치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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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 구 공산주의 국가가 배경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딱 여기까지인데 알라딘의 작품소개엔 불가리아와 마지막 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가 작품의 모델이라고 한다. 작중 주인공, 실각한 마지막 공산주의 독재자 이름은 75세의 스토요 페르카노프. 89년 동구 혁명 후 법과대학 교수를 하다가 검찰총장 직에 지원해 자리에 오르고 전직 대통령 재판 담당 검사로 활약하는 인물에게는 페테르 솔린스키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고슴도치>는 법정 드라마가 되고, 동구혁명 후 재판에 넘겨진 앙시앵 레짐(공산주의 일인 독재체제)의 변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작품 속에서도 나오지만 실제 근현대 동구의 국가 수반을 지낸 사람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어 선고를 받은 사람은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가 유일하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모스크바로 도망쳐 칠레 대사관에 몸을 숨겼고, 헝가리 공산당 총서기 카다르 야노슈는 77세의 나이로 충격을 받아 자연사했으며, 구스타프 후사크 체코 공산당 지도자는 암에 걸려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곧 죽었다. 폴란드의 대통령 보이체흐 야루젤스키는 자본주의를 신뢰한다고 변절했고, 끝까지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루마니아의 니콜라예 차우세스쿠는 1989년 크리스마스에 전국에 생방송되는 가운데 아내 옐레나와 함께 각각 총탄 160발씩 맞고(위키피디아)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지독하게도 많이 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굴까? 역자 신재실의 해설을 읽어보면 고슴도치는 자신의 방어에 털을 곤두세우는 동시에 고슴도치 글러브를 끼고 상대를 공격한다고 하면서 방어하는 전 대통령 테르카노프와 검찰총장 솔린스키 두 명 다 고슴도치이며, 이들의 대결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는 학생 네 명이 검사측 관객, 한 학생의 할머니가 앙시앵 레짐을 응원하는 관객 역할을 한다고 썼다. 학생과 할머니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고슴도치의 가시-털 또는 털-가시는 공격할 때보다 아무래도 수비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 곰곰이 생각해봐도 주인공은 검사가 아니라 피고인 스토요 페르카노프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12월. 6층 창문 가까이엔 흰 페인트로 반원이 그려져 있었고 높은 도수의 안경을 쓴 양복 차림 노인이 흰 선을 밟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천사 미가엘 성당 앞. 군주제 시절부터 군중집회 장소로 널리 쓰이던 곳. 오후 여섯 시에 메탈루르그 단지에 사는 여섯 명의 여성이 선두에 섰다. 이들은 두꺼운 사라사 드레스 위에 주머니 깊숙이 부엌 도구를 질러 넣은 앞치마를 두르고 보온을 위해 두터운 스웨터를 입었는데, 골목골목에서 빠져나온 여성들은 어느새 수천명에 육박했고, 남자들처럼 구호를 외치는 대신 스튜 냄비를 국자로 때리며 고고학 박물관 앞 광장을 지나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건물인 구 국가안전부를 에워싸더니 그곳도 그냥 지나쳐 최근까지 공산당 본부였던 우아한 신고전주의 풍 대통령궁을 거쳐 국회건물 앞에 집결해 한 시간 동안 침묵 속에 서 있다가 여덟 시에 해산했다.

  벌써 십년 가까이 외채가 늘어나 이젠 전 국민의 2년 연봉에 해당하는 수준에 육박했고, 공산주의 국가들 모두 비슷한 경제 위기를 맞아 예전처럼 같은 사상을 가진 나라들을 배려해줄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대부 격인 소비에트 연방마저 소비에트 루블화가 아닌 미국 달러화로 소련산 정유를 팔겠다고 선언해버린 상태. 도로에서 버스가 사라졌고, 상점엔 식료품을 찾을 수 없으며, 국가를 지탱하던 군인들조차 보급품을 지급받을 수 없었다. 건물 6층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던 일흔다섯 살의 전직 대통령 스토요 페르카노프는, 내가 집권했을 때는 다들 먹고 살았어, 이제 우리 민족과 국가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 가지 전망밖에 없어, 진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과학적인 길 말이지,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는 절도, 국고횡령, 부패, 투기, 통화위반, 부당이득, 시므온 포포프 살해공모, 고문 공범, 인종학살 미수 공범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 중이다.

  이 재판의 담당검사인 페테르 솔린스키는 암 투병중인 아버지가 페르카노프와 함께 파시스트와의 격렬한 싸움을 벌인 동지였으나 숙청당해 농촌으로 보내져 만년을 보내고 있다. 검찰총장에 오른 후, 정부로부터 더 넓고 방도 많은 아파트로 이사할 것을 권고 받았지만 전 정부인사의 대규모 특권 남용으로 기소하면서 신정부에 의해 눈에 띄는 특혜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제안을 거절했다. 대단한 투쟁경력을 지닌 할아버지를 둔 아내 마리아는 이게 큰 불만이다. 딸이 다 커서, 방도 더 필요한 걸 남편도 알면서. 아내는 그리고 할아버지를 닮아 조금은 앙시앵 레짐 편이고, 타협에 능하지 않다.

  여기에 중요한 인물 한 명. 육군 중위였다가 스스로도 겁이 날 정도로 고속 승진을 해 지금은 고도비만의 육군 중장이자 애국 보안사의 우두머리로 있는 게오르기 가닌. 중위였을 때도 비만이었던 가닌은 주도州都 슬리벤에서 소규모 데모가 벌어졌을 때 소심한 경비병 소대장으로 현장에 있었다. 시위대에 특이하게도 공산당 소년단의 붉은 보닛으로 머리를 치장한 일단의 ‘데빈스키 특공대’가 들이닥치더니 “우리, 충성스런 학생, 노동자, 그리고 농부들은 정부를 지지한다”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 만세, 정부 만세, 모든 영광은 스토요 페트카노프에게!”

  이어서 외치기를:

  “물가상승 감사한다. 식량부족 감사한다. 빵 아닌 이데올로기를 달라. 비밀경찰 강화하라. 스토요 페트카노프를 공경하라. 총알 감사한다. 순국 감사한다. 우리는 비밀경찰 출동을 원한다.”

  이후 가죽코트를 입은 낯선 남자가 가닌에게 와서 낮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의 머리 위로 총을 발사하고, 그래도 흩어지지 않으면 그들의 발에 발사하라고. 소심한 가닌은 이 명령이 공산당수로부터 하달되었다는 점, 어떤 얼간이가 조준을 낮게 해서 처음부터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병사들에게 총알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가닌은 혼자 데빈스키 특공대를 이끄는 청년에게 걸어가 일단 해산을 명령한다. 청년이 몇 명이나 죽일 셈이냐고 묻자 그는 “솔직히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총알이 없다. 탄환부족이다.”라고 까놓고 대답한다.

  우두머리 학생은 웃음을 터뜨렸고, 갑자기 가닌을 껴안더니 양 볼에 키스를 날려 가닌 역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스웨덴 TV에 고스란히 찍혀 전 세계로 송출되었으며 데빈스키 특공대는 새로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군인에게 더 많은 실탄을 주라.”

  이후 벨벳 혁명이 일어나고 한 소심한 중위에 불과했던 남자의 아내는 하도 빨리 진급하는 남편 군복에 새 계급장을 바느질해 달아주느라 고생이 여간 자심하지 않았다.


  스토요 페트카노프는 35년간 장기 집권을 한 노회, 노련, 똑부러지는 독재자였다. 자신이 한 모든 일은 법적으로 완벽한 일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조금이라도 기억될 만한 서류에 단 한 번의 서명도 남기지 않았다. 정말? 아니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 국가 정보부에서 비밀리에 개발한 급성 심장병을 초래하게 하는 약물 개발. 그것 또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정부나 대통령에 반대 또는 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제거하라는 서류에 SP, 라고 쓴 것. 이 서류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가닌이다. SP가 진짜 스토요 페트카노프일까? 자신이 서명한 서류 때문에 부하들이 알아서 대통령의 친딸이자 장관을 제거했을까? 그녀가 재즈 광에, 미국에서 햄버거를 비행기로 수입해 입에 달고 다니는 등 자본주의 물에 푹 적셔졌다는 이유로? 이 책이 지금 품절이지만 헌책으로 살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그리하여 페트카노프 전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고 30년의 국내 유형에 처해진다. 실제로는 불가리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지프코프는 1996년에야 마지막 재판을 통해 면소, 소를 면한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1998년에 폐렴으로 죽었다. 무척 재미있다. 줄리언 반스, 정말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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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07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포함해서 열린책들에서 나왔던 반스 책이 더 찐이긴 합니다....(라고 느낌)
그 이후 타 출판사에서 나온 반스 책들은 뭐랄까 좀 싱겁...

Falstaff 2023-12-07 16:28   좋아요 1 | URL
옙. 열린책들에서 낸 반스의 초기 작품 쪽, 아마 신재실 선생하고 계약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전기와 후기 작품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까 뭐 그럴 수 있다 싶습니다.

yamoo 2023-12-0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있지요...ㅋㅋ 열린책들에서 하드커버로 나왔던 반스의 초기작들...팩 표지도 좋고 번역도 괜찮아 소장중입니다..ㅎㅎ 이때 신재실 님이 주로 번역을 하셨는데...저도 이 고슴도치가 가장 좋았더랬습니다. 역시 별5개.. 근데 개인적으론 별4개 정도가 적당했던 느낌이에요..ㅎㅎ

당시 나왔던 반스의 책..
10 1/2 세계역사, 태양을 바라보며,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메트로랜드, 내 말좀 들어와, 고슴도치. 사랑 그리고, 레몬테이블

Falstaff 2023-12-09 16: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신재실 선생 반스를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말 솜씨도 상당해서 번역 작품이라도 진짜 재미나게 읽고 있답니다. 이제 소개할 책 두 권 남았네요. ㅎㅎ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 1
야로슬라프 하셰크 지음, 요세프 라다 그림, 홍성헌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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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로슬라프 하셰크.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중등학교 수학교사를 하다가 은행원으로 직장을 옮겼어도 궁벽하게 살았다고 한다. 열세 살 때 그나마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더욱 가난해져 이후 빈민가에 살면서 침울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단다. 성당의 복사를 오래 해서 그랬는지 김나지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반 독일, 반 정부 시위에 적극 가담해 퇴학을 당했다. 이후 약학을 공부해 프라하 체코 상업 아카데미에서 약학 전공 학위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게 약사 자격증을 의미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졸업 후에 아버지가 다니던 슬라비아 은행의 행원으로 입사하지만 곧 그만두고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으로 접어든다. 무정부주의자로 유럽 각지를 여행했지만 흔히 작가들이 하는 풍요로운 여행은 아니고 거의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닌 거 같다.

  1907년에 무정부주의 활동 때문에 짧게 교도소 구경을 하는 동안에 화백 요세프 라다와 친분을 맺는데, 이이가 나중에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 : 이후 “슈베이크”>의 삽화를 그린다. 이 책에 그의 삽화가 많이 들어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에 91연대에 자원입대해 전선으로 가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체제에 반감을 가져 1915년 가을에 스스로 러시아에 투항했다. 당시 다수의 체코 병사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만 따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만들어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것도 처음 알았다. 1918년 러시아 혁명 후에는 모스크바에서 체코 사회민주당에 합류해 러시아 적군에 들어가 복무했고, 우파Ufa에선 군 출판국 편집장도 지냈다.

  1920년 12월에 체코로 돌아온 하셰크는 또다시 ‘보헤미안의 삶’, 즉 방탕한 생활에 접어들어 알코올 중독 상태가 된다. 도저히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철제 침대 위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던 요세프 라다에게 <슈베이크>의 후반부를 구술하다가 결국 끝을 맺지 못한 채 1923년, 마흔 살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

  체코에서는 유명하다지만 역자 해설에 다른 작품을 소개한 것도 없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것도 체코 작가들의 단편 모음집 두 권에 단편소설 세 편 포함된 것이 전부다.


  이 작품 <슈베이크>는 블랙 코미디다. 경쾌한 문체로 되어 있다는 점을 미리 아시기 바란다.

  슈베이크는 몇 년 전에 복무했던 군대의 의무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바보’로 최종 판정을 받아 복무 중단 조치를 당한 개장수다. 체코 사람들도 개를 먹느냐고? 아니, 그런 개장수 말고, 개를 사고 파는 사람, ‘개고기’가 아니라 ‘개’로 장사를 하는 사람을 이렇게 번역했다. 그런데 슈베이크가 한 개 장사는 온갖 못생긴 괴물 잡종개들의 족보를 위조해 순혈의 진짜배기라고 구라를 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파는 사기였으며 그것도 개 사냥꾼이 몰래 훔쳐온 똥개를 파는 일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1권 뒷부분으로 가면 연대장이 애지중지하던 개를 훔쳐 자기가 모시던 중대장한테 줬다가 발각이 나서 편한 후방부대에 근무하던 중대 전체가, 일찍이 작가 하셰크 자신이 1915년에 입대한 91연대 산하로, 전선으로 배치되는 일이 벌어진다.

  작품은 집안일을 돕는 밀레로바 부인이 슈베이크한테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암살사건을 전해주며 시작한다. 이후 맥주집으로 향하는 슈베이크. 술집엔 사복경찰 브렛슈나이더와 입이 거칠고 박식한 술집 주인 파리베츠 딱 둘이 있었다. 브렛슈나이더는 자신의 건수를 올리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엮어 넣으려고 혈안이 된 당시의 보통 사복경찰이라 이들로 하여금 오스트리아, 체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게 만들려 자꾸 미끼를 던진다. 그러나 시민들도 밖에서 함부로 정부 욕을 했다간 치도곤을 당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여간해 넘어가지 않았다. 당연히 대공 피살 사건이 화제가 됐고, 슈베이크는 1912년 터키가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와의 전쟁 때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대공 부부를 죽였을 거라고, 이제 오스트리아가 터키에게 선전포고할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세르비아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체코, 즉 우리를 도와 터키를 쓸어버릴 거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사복경찰 브렛슈나이더가 술집 주인한테 묻기를, 어찌하여 요제프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있지 않느냐, 했다. 맥줏집 주인 파리베츠가 대답하기를, 초상화에 파리들이 얼마나 똥을 싸 놓았는지 얼굴이 온통 새까매져 떼어 놨노라. 그래 찾아서 보니까 정말 늙은 황제 얼굴에 까만 점이 촘촘했고, 갑자기 얼굴에 함빡 웃음이 번진 브렛슈나이더가 한꺼번에 두 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면서 슈베이크더러는 반역죄, 파리베츠한테는 황제 얼굴에 똥칠한 죄가 중하단다.

  슈베이크는 경찰서에 끌려가 브렛슈나이더가 작성한 조서가 사실이라고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을 해버려 다음날 아침 여섯 시에 지방형사재판소로 보내졌다. 근데 슈베이크가 하는 말이 좀 이상하거든. 그래 법정 의무관에게 진료를 의뢰했고, 세 명으로 이루어진 법정의무위원회는 “요세프 슈베이크의 완전한 정신적 마비상태와 선천적 백치상태증으로 미루어 요세프 슈베이크가 확실한 바보”라는 사실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낸다. 그러나 곧바로 귀가시키는 대신 심리를 중단하고 혹시 주변 사람에게 위험한 지 확인 관찰을 위해 즉시 정신병원으로 이송시키라고 권고하는 바람에 병원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정신병원의 전문의들은 법정의무위원회와 의견을 달리해 슈베이크가 “이성이 박약한 꾀병쟁이”라고 진단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 그냥 퇴원조치 해버린다. 정신병원에서도 잡다한 에피소드가 있으나 생략을 하고, 퇴원을 할지언정 당연히 점심식사 하고 퇴원하겠다고 병원 수위실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수위가 경찰을 불러 다시 경찰서로 끌려간다. 끌려가며 보니까 프라하 중앙통이 정신없이 술렁거리는데, 늙고 노망난 프란티세크 요제프 황제가 선전포고를 해버렸던 거였다. 경찰서에서도 이젠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왜곡된 법조항을 수호하기 위하여” 오직 형무소와 교수대 건수만 생각하는 가장 멋진 관료주의적 맹수들로 변해 있어서 밥투정 때문에 들어온 슈베이크 같은 날파리는 그냥 훈방 방면해 드디어 며칠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맥줏집 사장 팔리베츠는 어떻게 됐느냐고? 일 주일 전에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맥줏집은 팔리베츠 부인이 계속 경영하고.

  수다스럽지만 얌전한 (줄 알았던) 밀레로바 부인은 슈베이크가 없는 동안 슈베이크의 방을 불륜 커플한테 빌려주어 돈을 벌어왔는데, 이 에피소드도 넘어가자. 얼마 후 오스트리아가 수세에 몰리자 드디어 슈베이크에게 신체검사 통지서가 도착했다. 통지서가 오자마자 갑자기 류머티즘이 재발한 슈베이크는 밀레로바 부인에게 입대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류머티즘 증세를 잘 알고 있는 밀레로바 부인은 득달같이 의사를 불러와 3일 동안 관찰을 하게 하지만 날이 갈수록 증상은 더욱 나빠지기만 해서 드디어 참전은 꿈도 꾸지 말라는 진단을 받아낸다. 그러나 슈베이크는 부인이 다림질한 전에 입던 군복을 입고, 붕대를 친친 감은 다리와 목발로도 부족해 과자가게에서 예전에 쓰던 작은 수레를 빌려와 그걸 타서, 밀레로바 부인이 미는 수레 안에 누운 채 오스트리아 군가를 부르며 신체검사장으로 출발한다. 이 모습이 프라하 관보에 소개되기를, “노모에 의해 병자를 위한 수레에 실려왔던, 목발에 몸을 의지한 불구자의 아름다운 시위”라 했다.

  하지만 군의관 대장 바우츠가 딱 보고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것 속에 최전방과 총탄과 포탄의 파편을 회피하려는 기만적인 시도가 숨어 있다. 모든 체코 국민들은 거짓말쟁이 무리들이다.”

  판정에 의하여 영창으로 끌려가려는 순간 슈베이크는 기적같이 류머티즘이 사라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판정이 났으니 영창으로 가기는 했는데 영창 중에서, 영창 의무대로 갔다. 이곳을 찾아온 남작 부인. 프라하 관보에 난 아름다운 광경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영창 의무대 병실로 통닭구이 12마리, 전투용 리큐어 두 병, 와인 세 병, 담배 두 갑, 잘 제본된 <우리 군주의 인생 이야기>, 초콜릿 상자, 매니큐어 세트, 과일상자, 흰 히야신스와 함께 위문차 방문한 것. 남작부인이 돌아간 후에 영창의무대의 그린슈타인 박사에게 슈베이크가 하는 말이, “남작부인이 저의 계모랍니다.”

  최종적으로 군의관들이 위원회를 만들어 슈베이크를 찾아와 결론을 낸다. 슈베이크는 “생선처럼 건강하고 꾀병을 부리고 있고, 멍청한 소리도 지껄이면서 상관을 상대로 웃긴 짓을 하고 있음. 다만 자기 재미를 위해 여기에 있고 모든 전쟁이 장난이며 코미디 같은 것이라 생각함. 전쟁은 절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함.”

  그리하여 슈베이크는 유대인이며 호색한이며 분명한 알코올 중독자인 군종신부 오토 카츠의 당번병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본문만 1,623쪽까지 달려도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는 길고 긴 전쟁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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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12-06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코, 블랙코미디,,, 읽고 싶은 요소는 다 갖췄네요.^^

Falstaff 2023-12-06 16:25   좋아요 1 | URL
재미는 있는데 미완성이라 갑자기 뚝 끊어지는 바람에 김이 좀 샙니다. ^^

레삭매냐 2023-12-06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고책 계의 전설적인 책이라
나오자마자 사긴 했는데... 여적
뭉개고 있네요.

다른 재미진 책들이 계속해서
나오니-

Falstaff 2023-12-06 16:26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으셔요.
문체는 차페크의 희극 단편집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하고 매우 비슷하더라고요. 보헤미아 사람들이 이런 문체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번역자도 다른데 말이지요.
 
구리 이순신 범우희곡선 40
김지하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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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십여 년 전 교양과목 국어작문을 수강했다. 과제 가운데 하나가 “총장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불행했던 우리나라 현대사는 생떼 같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시너thinner를 뿌리고 구호를 외치다가 스스로 휴대용 라이터에 불을 붙여 온몸으로 아스팔트를 뒹굴며 생을 마감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베트남 승려들의 분신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인 이런 극한의 자살 시위는 나로 하여금 심각한 회의를 갖게 했다. 때마침 모교에서도 도서관 옥상에서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살포한 후 시멘트 바닥을 향해 장렬하게 몸을 날렸으나(그렇게 들었으나) 기가 막힌 순간에 학교에 상주하는 사복 형사 또는 무명의 백골단원이 그녀의 발목을 나꿔채는 바람에 명을 보존한 일이 있었다. 민주 투쟁을 하는 건 시대를 잘못 만난 젊은이로서 하나의 의무인 건 맞다. 그것을 위하여 법, 기존의 악법을 위반하는 것도 맞다. 악법을 올바로 고치려면 반드시 악법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고, 대신 그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희생 없이는 어떠한 법도 바로잡을 수 없으니까. 이 과정에 잘못된 법률에 의하여 죽음을 맞는 것과 투쟁의 방법으로 하필이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다르다. 그건 완전히 잘못된 죽음의 방법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시대였다. 나는 찌그러졌다.

  그리하여 교양필수 국어작문 시간에 몇 년 후 국무총리가 될 총장에게 당부의 편지를 썼다. 당시 모교 화장실에는 좌변기 이전 시대라서 쪼그려 앉는 수세식 변기가 있었는데, 앉은 상태에서 눈 높이에 가로 손잡이를 달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피가 끓는 청년 학생들이 눈 앞의 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쓰면 혹시 순풍순풍 매화타령을 하는 쾌변의 카타르시스를 만날 수 있겠으며, 해탈의 순간에 모든 스트레스가 함께 빠져나가 최근 도서관 옥상에서 있었던 현대판 ‘타잔 놀이’ 같은 아찔한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하필 장난기에서 그리 했을 것이 분명한, 유명하지는 않지만 소설가였던 강사께서 내 서한문을 뽑아 낭독을 했고, 계단식 강의실엔 홍소가 터져버렸으나, 나는 입대해버리고 말았다. 뭐 그때는 그랬다. 비겁한 남자새끼들은 회피의 방법으로 군대에 가버리고, 여자애들은 시집을 가거나 약혼을 해버리고.

  세월은 흘러 제대를 하고 실연을 당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다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직장을 위해 소도시로 옮기고 아이 하나를 둔 1991년. 조국에선 여전히 젊은이들이 시너를 뒤집어쓴 채 줄줄이 죽어 나갔다. 이때 많고 많은 신문 가운데 하필이면 조선일보에 김지하의 칼럼이 올라왔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이미 예전의 친구들과 완벽하게 격리된 나는 세상물정 모르고 ‘조선일보’의 칼럼임에도 열광했다. 역시 김지하. 그러지 않겠는가? 십 년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김지하가 웅변을 해 마지않았으니.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자는 건 좋은데 발언의 톤이 시원하기는 시원하지만, 논조가 필요한 것보다 과격하다는 거였다. 20여년 전 5적을 향해 일갈했듯이. 아니나 다를까, 노태우 정부와 당시 여권은 이를 반대파 공격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했고, 진보 진영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지하는 이후 기행의 시기로 접어들고 10년이 지난 2001년에 죽음의 굿판에 관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으나 2022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진보 진영과의 화해는커녕 변절자의 낙인도 지우지 못했다.

  변절자. 물론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변절자?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자기 진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변절, 배신이라 말하는 자체가 아집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닐까? 사상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게 소위 진보?

  김지하. 미당 이후에 어쨌거나 지하만큼 영욕의 대상이 된 문인은 없을 듯하다. 오늘 소개하는 《구리 이순신》에는 1970년 작품인 <나뽈레옹 꼬냑>과 표제작 <구리 이순신>, 1974년 작 <금관의 예수>가 들어 있다. 1970년은 지하가 그의 대표작인 담시 <오적>을 발표해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해. 당시 청년, 지식인들은 벌써 권력을 쥐고 10년차에 이른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적 폭력과 경제적 약자 수탈에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의 축재는 세상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저임금 대량생산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를 시작했으며, 이와 관련한 공무원, 군인, 기업가들은 서로 부패의 고리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독야청청? 돈 안되는 일이었다. 이 당시 진보 진영은 적어도 의식意識적으로는 행복했을 지 모른다. 무조건 권력을 쥔 자, 부유한 자를 공격하기만 하면 정당했으니까. 책은 벌써 반백 년 전 이야기들이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때는 이랬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읽어야지, 50여년 전에 했던 김지하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리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첫번째 작품 <나뽈레옹 꼬냑>은 에네시가 맛있느냐, 르미 마르탱이 맛있느냐 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양주라는 단어조차 귀했던 시절, 삼학소주가 진로와 함께 시장점유율을 다투던 시절에 서울의 절두산 인근에서 오빠가 운전하는 자가용 차를 타고 가던 정인숙이라는 아들 하나 딸린 젊은 여성이 의문의 총에 맞아 현장에서 죽고, 오빠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작중에서는 정인숙이라는 본명 대신 강변에서 총을 맞았으니 강변숙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국무총리를 했던 정일권이 정인숙이 키우는 아들의 친부라는 의혹(네이버 지식백과를 베낀 것. 내 의견 아님. 관계자분들은 고소하지 마실 것)은 여전히 미궁에 빠진 채라는 건 다 아실 터이고, 작중 강변숙의 남자는 그저 ‘고위 관리’ 당시 부자나 관료들을 대표하는 똥배 나온 대머리에 카이저 “수염”이 나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인데, 극은 이 수염 남자의 집에서 여사님의 대학 동창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단막극이다.

 베트남 파병 육군장교의 아내 통뼈, 공무원 아내 시엄마, 회사 사장의 아내 오만평이 수염의 아내 마마의 응접실에 앉아 서로 못 잡아먹어서 독살 맞은 말의 칼로 서로의 멱을 따려는 가운데 마마가 “나뽈레옹 곤냐꾸” 한 병과 코냑 잔을 들고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한다. 이들은 남편의 안전과 다음 번 승진 발탁, 관급 계약의 성사를 마마에게 청탁하러 온 것이고, 나중엔 방송사 PD의 아내 선녀가 바람난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가판대에서 산 신문 한 장을 갖고 늦게 도착한다. 친구들 앞에서 온갖 폼을 잡는 마마가 신문을 펴보더니 강변숙 살해사건에 수염 씨가 깊이 관여되어 있어 관직 박탈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 순간 친구들이 돌변해 마마에게, 화무십일홍이니, 권불십년이니, 위대한 나뽈레옹 곤냐꾸가 되어버렸다느니 비웃으며 자리를 뜬다는 내용이다.


  두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구리 이순신>은 세번째 1974년 작 <금관의 예수>와 매우 유사하다. <금관의 예수>를 자기표절 작품 또는 <구리 이순신>의 확장 각색 작품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구리 이순신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말하며, 금관의 예수는 부자가 만들어준 금관을 쓴 시멘트 예수상이다.

  세상은 갈수록 험해 가난하고 가여운 사람, 엿장수는 처자식 돌보느라 아무리 일을 해도 호구지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지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이를 슬퍼하는 거지 시인은 이순신 동상 아래에서 세상을 탄하다가 쪼그리고 잠을 청한다. 엿장수는 구리로 만든 이순신 장군의 몸통은 그만두더라도 집고 있는 칼이나마 훔쳐 팔아 마누라한테 목도리라도 하나 사주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칼에 손을 대는 순간, 이순신 동상이 엿장수에게, 세상이 이 지경인데 자신은 구리 틀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제발 구리 감옥을 벗겨달라고 부탁한다. 이 어려운 시기를 바라만 볼 수 없다고.

  마찬가지로 사창가에 살고 있는 문둥이와 거지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왕관을 벗겨 세상에서 소외된 가장 가여운 인간, 문둥이와 거지들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라고 말하고, 시멘트 감옥 안에 갇혀 도탄에 빠진 하느님의 자식들을 내버려두고 있는 처지를 한탄하는, 금관의 예수 이야기다.


  김지하라고 하면 문, 사, 철, 시, 서, 화, 무(춤)에 능하다고 하는 인물이다. 1970년에 발표한 <오적>에서 볼 수 있듯이 김지하의 다방면에 걸친 탁월함 중의 하나가 놀이판이자 담시譚詩다. 그리하여 <구리 이순신>에서는 엿장수가 한 판 사설을 늘어놓고, <금관의 예수>에선 문둥이와 거지가 듀엣으로 사설을 풀어내는데, 이게 김지하의 희곡, 마당극의 진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나뽈레옹 꼬냑>과 <구리 이순신>은 1971년 5월에, 축제 때 아닐까 싶은데, 공연을 준비했다가 대학 군사훈련 반대 시위로 휴교조치가 내려 무산되었다고 해설에 쓰여 있다. 만일 이때 공연을 했다면 최초, 아니면 상당한 초기의 현대식 마당극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다시 말하는데, 50년 전 작품이다. 그때의 시각과 지금 시각이 같을 수도 없고 같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터, 독자들은 스스로의 필터를 갖고 읽어 마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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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12-05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대학 다닐 때 <금관의 예수>는 연극으로도 상연하고 운동권 노래집에 노래로도 만들어져 실렸던 기억이 나요.
김지하 시인의 시가 그때만해도 마음에 금방 와닿지는 않았는데 ‘새벽 두시‘라는 시를 읽고 그나마 쉽고 공감이 되어 다른 시도 더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었지요.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이름을 이 시인에도 붙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분명히 그런데 말이죠.

Falstaff 2023-12-05 16:05   좋아요 0 | URL
저 다닐 때 김지하는 시대의 아이콘을 넘어 거의 신격화 수준이었습니다. 일종의 반작용이었겠지요. 당시 파쇼 정권이 워낙 혹독해서... 저도 물론 상당히 좋아했었습니다.

호시우행 2023-12-0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는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착각하는 자만심에 빠진 무리이기에 김지하 시인을 변절자라고 폄하하는 건가?

Falstaff 2023-12-05 16:06   좋아요 0 | URL
진보가 어때서요? 보수가 문제 없듯이 진보도 문제 없습니다. 보수나 진보나 제대로 된 것들은 문제 없습니다. 그저 보수라고, 진보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것들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호시우행 2023-12-0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허물어버린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96
문충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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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문충성의 시집을 샀다. 그리고 1년 하고도 열 달이 지나 첫 장을 열었다. 지독한 게으름이다. 문충성은 80년대 초반에 조금 읽고, 이후 드물게 우연히 읽게 되면 읽고, 아니면 말고, 그냥저냥 그랬다. 우리 나이로 마흔 살에 등단해 첫 시집 《제주 바다》를 당시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지, 빈 주머니를 털어 두부김치에 막걸리 한 통을 마실까 주저하다 돈 주고 사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읽었다. 별로 감흥이 없었나 보다.

  문충성이, 아이고, 그동안 “우리나라 나이”가 없어져 그냥 여든다섯. 하기는 내 턱을 따라 돋은 터럭에도 눈 내린 지 오래니까.  이 시집이 나온 해가 2011년. 일흔셋일 때 출간했다. 말이 일흔셋이지, 시인은 이제 서울 나들이를 하더라도 며느리의 삼촌이 대나무로 깎아준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선다. 시인은 병들고 시인의 아내는 아프다. 앞서거니뒤서거니 혹은 며느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행이 다반사다. 그래도 아직은 그림자가 둘이어서 조금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노인들은 조금씩 쇠하는 게 아니라 큰 계단처럼 한 방에 훅 가고, 얼마 있다가 또 한 방에 훅 가고, 몇 번 훅, 훅 가다가 툭, 떨어진다. 그걸 시인이라고 모를 턱이 있나.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꽃들 지고


  여름날

  왕잠자리 날 듯

  벙그는 연꽃들과 눈 맞춰뒀다

  고양시 호수공원

  연꽃 밭

  다리 아파

  갈 수 없다

  산책 갔다 온 막내딸애

  말한다

  연꽃들 졌더라고

  만딱!  (전문)



   마지막 행의 “만딱”에서 ‘만’은 “아래 아”를 쓰는데 지원이 되지 않아 그냥 ‘만’이라고 썼다.

  소감? 나도 딸 하나 있었으면. 아들 집에 가봐라, 서로 불편하다. 며느리는 호수공원을 바로 앞에 두고도 혼자 산책하러 나가기 눈치 뵈고, 갔더라도 연꽃이 졌다고 얘기하기도 눈치 보이고, 시부모도 마찬가지로 다리 아프다 한 마디 하기도 뻑뻑하다. 그냥 하는 얘기다. 딸이건 아들이건 다 크면 각자 사는 게 장땡이다.

  문충성이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시를 읽으면 “연꽃들 졌더라”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히면서 ‘나’의 시간도 이젠 질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이런 시를 쓸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터이니.

  민영, 고 오탁번, 정희성 등등 노년에 접어든 시인의 말년 시는 주변의 자잘한 사물, 일상 같은 것을 새롭게 보고 듣는 노래가 많다. 이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령 이런 시.



  동동



  파란 달빛 소리

  파르르

  눈 떴다


  아무런 생각은

  잠자고


  방 하나 그득

  넘쳐난다 달빛이


  파랗게 떠간다 파랗게

  아무런 생각이

  동동  (전문)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노년의 시인이 자다 깼다. 방 안 가득 달빛이 들어오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생각들이 동동 달빛에 희뿌윰한 어둠 속에 동동 떠있는 그림, 또는 노래. 어떠셔? 귀엽지? 또 이 시절의 시인한테는 과거를 회상하는 일종의 특권이 주어진다. 젊은 사람들이라고 추억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십년 오래 묵어 고릿하게 묵은 내가 나는 추억, 연상 만하겠는가. 문충성은 자신의 20대를 추억한다.



  가짜 사기꾼



  이제야 알았다

  사기꾼들 세상

  언어의 감옥에서

  동대문시장에서

  그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길 위에서

  도주하라

  1960년대 가난한 그

  전당포에서

  명동에서

  전차에서

  아니면 충무로에서

  이고 다니던 하늘

  싸구려로 저당 잡혔다

  냄비 우동 한 그릇 값에

  그리고

  얼굴 붉히며

  사기꾼들 사이에 끼어 아직

  사기꾼이 되지 못한 가짜 사기꾼

  120 당구를 치고

  막걸리 대폿집 지나 ‘달 다방’으로

  점심 값 살리고

  어깨 구부리고

  걸어 들어갔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브람스 들으러  (전문)



  여기서 “가짜 사기꾼”은? 시인 자신이다. 한 번 까볼까? 제주에서 살다가 서울 유학 온 “1960년대의 가난한 그”라고? 쇤네도 돈 아까워서 당구 한 판 안 쳐봤습니다. 당구 10분 칠 돈이면 막걸리가 한 되인데 어떻게 손 떨려서 큐를 잡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브람스도 열라 들었습지비. 학교 음악감상실에 죽치면서 듣든지, 한 겨울 종로1가 르네쌍스에서 그애하고 덜덜 떨며 듣던지. 시퍼렇게 얼 정도로 벌벌 떨다가 냄비우동은 자주 사 먹었군.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시인이나 소설가가 쓰면 그럴듯하고 나같이 무지렁이가 쓰면 꼴값을 하는 거다. 그러니 보통의 독자여, 어디 가서 함부로 궁상 떨지 맙시다. 괜히 가오만 떨어지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런 거 하나 더 있지? 첫사랑 이야기. 그것도 길게 해봐야 꼴값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그러나 이 시집 《허물어버린 집》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대사의 큰 비극 가운데 하나인 4.3 사건과 사라져가는 제주도 언어와 제주 사람들이다. 내가 4.3 사건과 제주에 관해 아는 것이 없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해 말하지 않았다. 시인이 열 살 때 직접 눈으로 본 산간마을에서 있었던 참사를 내가 뭐라고 아는 척을 할 수 있겠는가.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참수한 사람의 머리통을 죽 늘어놓은 광경. 그걸 본 열 살의 소년은 30년 후 시인이 되고, 다시 30년이 더 지나 본 것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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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2-04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 하나 있어봤자 되바라지게 아빠 드러워!! 꼰대애!!! 할 걸요 저기는 옛날 딸이라 연꽃 진 거도 알려주고 그러지 ㅋㅋㅋ 옛날 이야기 독후감에 잔뜩 팔아먹은 입장으로 꼴값처럼 보일 수도 있구나…안 본 눈 사드릴 수도 없고 어쩌지 계속 꼴값이나 떨어야지…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2-04 10:19   좋아요 1 | URL
그 딸도 ‘옛날 딸‘이 될 즈음엔 늙은 아빠한테 연꽃이 졌다고 하지 않을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