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흘러내린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0
구레이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다시 중국 현대 희곡. 극작가 구레이는 중국 허베이성 스좌쟝石家莊 1978년생이다. 베이징이공대학과 대학원에서 생화학공학을 전공해 석사까지 하고 고향의 제약회사에 취직 확정까지 했으나, 교내 연극 동아리에서 올린 뷔히너의 <보이체크>를 연출해 연극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은 것을 계기로 연극계로 전향한다. 구레이 스스로 “수신풍극단樹新風劇團”을 만들어 예술감독으로 활약하며 개방, 협력, 순수창작, 고 궐리티 지향의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역자 해설의 쓰여 있다. 구레이를 구글 검색해보면 “수정된 검색어에 대한 결과: 그레이”가 올라오면서 애먼 페이지만 죽 뜨고, ‘顧雷’를 검색해야 구레이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중국어 사이트와 연결되어 있어서 “중국 연극계의 빅 네임들보다 한 세대 뒤인 21세기의 소장 작가군에 속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역자는 해설을 통해 이이의 특징은 자신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하는 작가-연출가를 고집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작품을 “희곡” 대신 “극본”이라 칭하는 것이다.

  작가가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하는 것은, 그것이 바람직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이해할 수 있다. 작가로서 자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썼는지 분명하게 어필하고 싶을 터이니까. 어차피 세월이 흘러 작가의 시절이 가면 작품은 다른 연출가에 의하여 공연을 할 수밖에 없을 터이며 이 경우엔 당연히 일정 부분 작가의 의도를 수정하게 되리라. 그러나 구레이는 적어도 공연이 어떻게 이루어지기를 원했는지 원래 취지를 기억해주기 바랐을 지도 모른다.

  무대극의 원본을 이야기하는 ‘희곡’ 대신 ‘극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 가볍지 않은 일인 듯하다. 이제 연극의 기본 텍스트는 곡曲, 몇 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도도하게 흘러온 인류 최초의 예술형태인 곡에서 본本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도 된다. 내가 (다른 것도 다 그렇지만) 연극과 희곡/극본에 관해 아는 것이 짧아 곡과 본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저 이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랄 뿐. 그리스 시대 대표 희비극들, 중국의 다양한 곡, 우리의 판소리 같은 무대예술의 공통점은 운율 아닌가 싶다. 시와 노래로 극을 만들었으니 시와 노래를 문자로 쓴 것을 곡曲이라 했을 것. 희랍에서 절정을 이룬 곡 문학도 어언 스무 너댓 세기가 흘러 이제 무대에서 운율은 메말라 휘발했다. 운율의 빈 자리를 대사, 행위, 무대배경이 채웠으니 이를 산문적으로 본本이라 한 건 아닐까? 그냥 아마추어의 생각이다. 어디 가서 써먹지 마시라. 얘기해 놓은 나도 무식하단 얘기 들을까 겁나니까.


  2022년 중국의 출산율은 1.09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0.78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나은 듯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 우리나라도 2019년엔 1.05였다. 물론 2019년이 소위 “황금돼지해”여서 조금 많이 낳는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중국도 앞으로의 전망이 전혀 밝지는 않아 보인다. 이게 다 양육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리고 결혼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 때문일 것이다. 우리집만 보더라도 첫 아이는 사내 결혼으로 장가들어 2019년에 맏딸을 낳고 올해 둘째로 아들을 낳았다. 작은 애는 결혼이라는 것이 암만해도 노력봉사 이상이 아니어서 여차하면 코만 꿰는 결과를 초래하는 거 같아서 웬만하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사니, 너네가 살지. 이런 주의다.

  중국 허베이성에 스石씨 많이 사는 동네, 베이징 기준 7시에서 7시 40분 방향으로 고속철도 타고 8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스좌쟝에 어느새 70여 세에 달한 팡통광方同光 선생이 외아들 팡하오창方浩倡이 있었는데 이 외아들이 어려서부터 남달리 공부를 잘해 인근에 비교할 만한 학동이 없었더란다. 어려서는 아버지와 사이가 유난히 돈독하여 아버지가 항문을 비롯한 샅 일대를 씻어주면 신이 나서 좋아하기도 했으나, 아들이 점점 사내가 되면서는 유사이래 모든 수컷들이 그러했듯이 둘의 관계는 조금씩 크랙이 가기 시작했고 그만큼 서먹서먹해졌다. 하오창은 동네 처녀 아이를 좋아하기도 하고, 국어 선생님한테 홀딱 반해 수십장에 달하는 편지도 보내기도 하고, 배꼽아래 솜털의 색이 진해지기 시작하면서 밤새 하얗게 빨아 풀까지 먹인 욧닛에 한 번 더 풀칠을 해놓으면서 차곡차곡 부자 사이의 금은 어느덧 깊고 깊은 크레바스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공부 잘하는 거는 여전해 베이징까지 가서 의과대학을 졸업해 유명 종합병원의 심장외과 전문의로 활약 중이다. 중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뛰어난 의사라 숱한 의사 팔로워들을 거느렸는데, 심장외과 전문의로 만족하지 못하고 황사장이란 인물과 동업을 해 전동치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아버지 팡통광 씨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들 팡하오창이 자식 둘 생각은커녕 결혼조차 눈꼽 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

  아들 팡하오창이 37~38세이고 아버지 팡 선생이 70이 넘었으면 당시 중국에서는 적어도 32세에 얻은 귀한 아들일 터. 그러나 의사가 되어 베이징의 종합병원 전문의면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은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인지상정이다. 무엇보다 바쁘니까. 휴일엔 바쁜 몸 좀 쉬고 여유를 가져야 하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들이라서. 팡하오창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여성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냥 혼자 살고 싶은 것일 뿐. 근데 거기나 여기나 늘 아들 장가들어 손주새끼들 보는 게 꿈인 아버지가 사는, 냄새나는 집에 자주 가고 싶겠느냐고. 꽃노래도 삼세번인데 낯을 보일 때마다 색시는 생겼느냐, 언제쯤 국수를 삶아야 하겠느냐 같은 걸 취조 당한다면 사실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을 듯.

  그러나 전문의 팡하오창 선생께서 고속열차를 80분 타고 고향 허베이성으로 안 갈 수 없는 일이 생겼으니, 병이 깊어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팡통광 씨가 자신한테 병명을 일러주지 않고 아들도 내려와 간병해주지 않는다고 홧김에 화병을 벽에다 집어 던졌다가 애먼 ‘애기선생’ 천위써의 이마에 상처를 입혀버렸던 거다. 젊고 예쁜 흉부외과 전문의의 이마에 기스를 냈으며, 아버지가 아들 좀 불러달라고 파출소 경찰을 불러온 터, 아들 팡하오창이 득달같이 달려가 이를 수습해야 할 밖에. 하지만 전동칫솔 사업 초기라 광고 카피도 문제고, 황사장과 금전문제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초기 문제는 그리 크게 확장되지 않고 이제 부자간 갈등이 점점 폭발할 지경에 이른다.

  이 와중에 팡통광 씨의 병세는 환자가 직접 이마에 기스를 낸 천위써 선생으로부터 약물치료, 수술, 표적치료 모두 의미가 없는 소세포 폐암으로, 암이 인체 각 조직으로 전이되어 남은 여생이 겨우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땅땅땅, 선고를 받는다.

  그럼 남은 것은 돌이키기 힘든 이격거리를 가진 부자지간에 서로 화해하고 팡선생의 70여 평생이 잔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극이 끝나면 현대극은 아닐 걸? 아무리 아버지의 남은 시간이 두 달밖에 없다고 해도 거칠게 아들의 신경을 긁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우리 동쪽의 예의 바른 사람들이 들으면 경끼를 할 만한 상스러운 욕을 병상의 아버지한테 푸짐하게 던져놓고 내빼기도 한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대로 부자간 화해의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참, 내가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거야? 아, 몰라, 몰라. 이 이상은 직접 읽어 보시라, 하고 내빼야 했는데 깜박했지 뭐야.

  그럼 이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고 싶은 오빠 창비시선 396
김언희 지음 / 창비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세 미만, 심혈관질환자, 기독교 엄숙주의자는 안 읽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음)



  시인을 헷갈렸다.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을 낸 강기원하고. 김언희가 그 김언희인 줄 알았다면 시집을 살 때 훨씬 더 신중했을 듯하다. 뭐 그것도 팔자니까 괜찮다. 김언희의 《뜻 밖의 대답》을 읽고 용맹 용감한 시어들에 화들짝 놀랐던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이이의 이름을 다른 시인과 혼동해버렸으니 혹시 건망증 또는 초기 알츠하이머 아냐 이거?

  김언희의 시어는 참혹하다. 《뜻 밖의 대답》을 읽을 때부터 알아봤다. “예를 들어 주방기구와 섹스하듯이, 너무 모멸적인 섹스 파트너, 그것이 너를 삼키듯이 토해내듯이” (《뜻 밖의 대답》, 민음사 2005. <예를 들어> 부분 p.13) 같은 구절은 오히려 이 시인이 잘 정제하여 다듬은 듯한 문장들일 정도로. 《뜻 밖의 대답》을 읽을 때, 김언희가 틀림없이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런 시어들을 골라 사용했을 터인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거의 아무 시인도 사용하지 않는 회피단어들을 고의로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시에 강한 특징을 주어 어필하겠다는 속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시인이 들었으면 기절초풍을 할 의심까지 했었는데, 《보고 싶은 오빠》를 읽어보니까 참혹한 명사와 동사들의 반복 사용이 또 묘하게 시를 읽는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당연히 수고롭겠지만 다음 시를 소리내서 읽어보자.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


  나는 모든 것이 흘레이면서 흘레가 아닌 흘레의 나라에서 왔어요 빨기 위해 생니를 몽땅 뽑은 어린 창녀의 입속 같은 곳에서요 나라 전체가 음란한 유치원인 곳에서요 나무랄 데 없는 시체들의 재롱*을 실컷 보다 왔어요 입덧과 동시에 구더기를 토하다 왔어요 나는 머리도 내장도 없어진 여자의 사인(死因)이 자해인 나라에서 왔어요 묵살 묵살 묵살이 살인의 한 방식인 곳에서요 길고 긴 묵살의 터널 끝에 몰살이 기다리는 곳에서요 나는 여자의 완성이 얼굴인 나라에서 왔어요 여자의 피부가 신분인 곳에서요 죽는 날까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곳에서 왔어요 죽기도 전에 미라 먼저 된 여자들이 제 미라를 창밖으로 내던지는 곳에서요 나는 죽을 틈을 주지 않는 공중파의 나라에서 왔어요 흰 변기 위에 놓은 채 잊히고 만 황색 시인**들의 나라에서요 빗방울에도 살이 패이는 눈사람의 목소리로 귀여운 물방울의 목소리로 시를 쓰다 왔어요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 흘레 앞에도 ‘르’가 붙는 이 유명한 맛집까지요


  * 헤르베르트

  **  타나까와 슌타로오 (전문 p.17)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 (우리말 표기법에 따르면 “흘레” 대신 “를레”를 써야 하지만 뭐 그냥 넘어간다.) 파리에서 갈빗살 스테이크만 파는 맛집으로 특히 한국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찾는 곳이란다. 그러니 김언희도 파리에 가서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에 들러 능청맞게 자기가 “눈사람 같이 귀여운 물방울의 목소리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구라를 풀고 있다. 귀엽다. 물론 시 속에 김언희가 풀어놓은 그로테스크하게 참혹한 광경은 별개로 하고 말이지. 이게 시냐고? 현대 시 읽으면서 그런 질문하지 마시라. 시집 몇 권 읽어본 바, 시 속의 의미나 본질을 찾는 행위는 말짱 필요 없는 시절이 왔다. 시를 읽으며 즉자적으로 느끼기만 하면 대빵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시, 무슨 식당 간판이 제목인 이 시가 유독 참혹한 시어로 되어 있는 것뿐 아니냐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좋다. 그런 분을 위하여, 제일 앞에 나오는 시가 시집을 대표하는 경우가 흔하고 마침 짧기도 하니 그걸 읽어보자.



  회전축



  23도26분21초4119


  지구의 기울기는

  발기한


  음경의, 기울기


  이 기울기를

  회전축으로

  지구는


  자전한다 (전문 p.11)



  1953년생. 올해 일흔. 시집을 냈을 때 예순 셋. 63세의 중년여성이 본 발기한 남성의 음경 각도가 23도26분이란다. 북극와 남극점을 잇는 선이 23도26분 기울어져 있다는 거니까… 근데 여기서, 흠흠, 심각한 질문이 있는 바, 23도26분은 알겠는데 어느 방향으로, 설마 왼쪽이나 오른쪽을 꼬나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 그놈의 민대가리가 발가락을 내려다봤는지, 고개를 발딱 들고 쥔 아저씨 마빡을 올려다보고 있는지, 나는 그게 궁금하다. 하긴 뭐 발가락 쪽을 봤다고 해도 그게 얼마야? 그저 얼마간이라도 피식 쓰러지지만 않고 그렇게 버텨 주기만 하면 장땡이지, 그지? 이상한 감상이라고? 김언희의 시를 읽으면서 이렇게 감상문을 쓰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쓰라고? 이번에는 이 시집의 표제 작품을 인용해보자. 설마 또 그럴까, 싶지?



  보고 싶은 오빠



  1

  난 개하고 살아, 오빠, 터럭 한올 없는 개, 저 번들번들한 개하고, 십년도 넘었어, 난 저 개가 신기해, 오빠, 지칠 줄 모르고 개가 되는 저 개가, 오빠, 지칠 줄 모르고 내가 되는 나도


  2

  기억나, 오빠? 술만 마시면 라이터 불로 내 거웃을 태워 먹었던 거? 정말로 개새끼였어, 오빤, 그래도 우린 짬만 나면 엉기곤 했지, 줄 풀린 투견처럼, 급소로 급소를 물고 늘어지곤 했었지,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면서


  3

  꿈에, 오빠, 누가 머리 없는 아이를 안겨주었어, 끊어질듯이 울어대는 아이를, 머리도 없이 우는 아이를 내 품에, 오빠, 죽는 꿈일까…… 우린 해골이 될 틈도 없겠지, 오빠, 냄새를 풍겨댈 틈도, 썩어볼 틈도 없겠지, 한번은 웃어보고 싶었는데, 이빨을 몽땅 드러낸 저 웃음 말야


  4

  여긴 조용해, 오빠, 찍소리 없이 아침이 오고, 찍소리 없이 저녁이 오고, 찍소리 없이 섹스들을 해, 찍소리도 없이 꿔야 할 꿈들을 꿔, 배꼽 앞에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오빠, 우린 공손한 쥐새끼들이 됐나봐, 껍질이 벗겨진 쥐새끼들, 허여멀건, 그래도


  5

  그래도, 오빠, 내 맘은, 내 마음은 아직 붉어, 변기를 두른 선홍색 시트처럼, 그리고 오빠, 난 시인이 됐어, 혀 달린 비데랄까, 모두들 오줌을 지려, 하느님도 지리실걸, 낭심을 꽉 움켜잡힌 사내처럼, 언제 한번 들러, 오빠, 공짜로 넣어줄게  (전문 p.12~13)



  어떤가? 저 앞에서 한 말을 다시 해보자. 내가 이 김언희가 그 김언희인 것을 알았으면 이 책을 선뜻 샀을까? 정말로 강기원인 줄 알고 골랐다니까 그래. 강기원의 문법도 좀 생식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막장, 참혹극으로 가지는 않는다. 하여튼 그래도 소리 내 읽어보면 또 그럴듯한 리듬을 타는 것이 발음하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하여간 잘 굴러가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은 오빠>의 5연처럼 좀 지리긴 한다. 하느님도 지리실 거라는 데, 그것도 불알을 움켜 잡힌 사내처럼 지린다는 데 한갓 피조물인 우리야 좀 많이 지려서 흘러버린 들 또 어떠랴. 근데 그거 아시나? 5연에 보면 오줌을 지리는 게 전부 남자라고 보면 되는데 말입니다, 김언희는 나이는 많지만 여자라서 몰랐을 거다. 불알을 오지게 쥐어 잡혀도 오줌은 지리지 않는다. 죽거나 죽음 근처에 가면, 즉 거세게 불알을 쥐어 잡히는 극도의 고통/공포에 다다르면 말은 오줌을 지린다고 하는데 사실 그게 오줌이 아니다, 전립선 액이지. 방광보다 전립선이 더 요도에 가까이 있거든. 목매달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보면 뭔가 몇 방울 지린다. 그걸 채취해서 현미경으로 보시라. 글쎄, 내 말이 맞다니까. 전립선 액이라니까. 육군행정학교 법의학 시간에 배웠다니까. 후진 독후감 읽고 그래도 뭔가 하나 얻어 가시라고, 오늘의 교양으로 알려드리는 거다.


  김사인이 책의 뒤표지에 김언희가 또 “격렬한 자폭의 언사”를 저질렀다고 썼다. 격렬하게 자폭을 하면서 동시에 단정하단다. 얼음같이 찬 맨정신이란다. 물론 뒤표지에 쓰인 말이니까 다분히 주례사겠지만, 다른 시인도 아니고 김사인이 한 말이니 반 이상은 믿기로 하고 더 읽어보면, 김언희의 문장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말한 것처럼 참혹하고 어찌 보면 위악적이고, 하느님조차 지리게 만드는 논-필터링의 문장들. 근데 이상하다. 난 김언희의 시를 읽으면서 김사인이 낚아챈 “우리의 분노와 혐오가, 우리의 공포와 거룩함이 마침내 여기에 이른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이런 거친 자폭, 참혹한 문장의 사용이 비극성을 끌어오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당연히 이건 아마추어 시 독자의 의견이니 심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김사인이 이야기한 김언희의 문장에 관한 시를 읽으며 독후감을 끝낸다. 제목을 제외한 원문의 글꼴은 전부 이탤릭체로 되어 있다.



  문장들


  아비의 낯가죽을 손톱으로 벗기는 문장, 어미의 뼈를 산채 바르는 문장, 젖이 아닌 것을 물리는 문장, 젖이 아닌 것을 빠는 문장, 갈보 중의 상 갈보, 죽은 몸을 파는 문장, 죽은 몸을 대패로 밀어서 팔아먹는 문장, 부위별로 값이 다른 문장, 구석에서 대가리가 떨어져나가도록 하고 있는 문장, 대가리가 떨어져나간 줄도 모르고 하고 있는 문장, 떨어진 대가리가 개미떼에 떠들려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하고 있는 문장, 숨이 끊어진 다음에도 알을 까고 있는 문장, 컴컴한 물 밑에서 죽은 자의 항문을 쪽쪽 빨고 있는 문장, 창자까지 게워 바치는 문장, 다 게운 다음에도 더 게우는 문장, 부질없는 삽날을 물고 독을 질질 흘리는 문장, 손에 잡히는 건 뭐든 성기로 가져가는 문장, 세상의 중심을 혀끝으로 벌려보는 문장, 나를 아홉 구멍으로 범하는 문장, 어떤 죽음도 이미 죽음이 아닌 문장, 내 죽은 얼굴에 오줌을 싸는 문장, 내 죽은 얼굴에 칼질을 하는 문장, (전문 p.88)


.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3-11-03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구레이顧雷 <물이 흘러내린다>
화요일, 셰한 카루나틸라카 <말리의 일곱 개의 달>
목요일, 조르조 바사니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금요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선택적 친화력>

coolcat329 2023-11-03 13:00   좋아요 2 | URL
핀치콘티니 저도 지난 달에 샀어요. 기대됩니다!

Falstaff 2023-11-03 16:23   좋아요 1 | URL
핀치콘티니..... 화자 ‘나‘하고 제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아주 (염병을 한다고) 빠져서 읽었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dalgial 2023-11-03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언희 시집 중 어느 자서에서 남근 중심 세상과 싸우느라 시가 그렇다고 한 걸 봤습니다. 노투사는 언제 쉽니까. 말씀대로 짠합니다.

Falstaff 2023-11-03 16:19   좋아요 1 | URL
김언희의 의도는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그 말이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이 시집의 발문을 시인 김남호가 썼는데요, 발문을 읽어봤더니 남근 중심의 세상과의 투쟁이란 건 과장이거나 허사일 것 같습니다. 물론 시인은 진심으로 이야기했겠지요.
제가 제목에서 말한 ‘짠하다‘는 건 시인으로 자기 색깔을 내보고 싶어하는 시인들만의 애씀 같은 것이었답니다. ^^;;;

coolcat329 2023-11-03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오랜만에 왔습니다.
근데 시인의 화법이 엄청 직설적이네요.
도대체 누구실까 궁금해서 찾아 봤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이 시와 매치가 안되네요. ㅎㅎ
근데 그게 전립선 액이었군요! 하나 배웠네요 ㅎㅎ

Falstaff 2023-11-03 16:21   좋아요 1 | URL
정말 오랜만입니다. ㅎㅎㅎ
보편적으로 좋다는 평가를 받는 시,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만 추려서 읽을 수 없어서 가끔 모험 비슷한 걸 해보는데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시 읽는 것도 어쩜 그렇게 인생을 닮았는지 말입죠.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11-03 19: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전 팔백작님 질색팔색하는 책들이 느낌 있고 좋은 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1-03 20:0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 책은 질색팔색은 아니고요, 이 양반이 제 생각엔 오버, 크게 오버하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비등점 바로 앞에서 딱 멈출 줄 아는 미덕을 아쉽게 김언희는 갖추지 못한 걸로.... ㅎㅎㅎ 제가 뭘 압니까, 그냥 그렇다는 거죠. ㅋㅋㅋㅋ
 
별에 어른거리는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2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다시 다와다 요코. 이이의 삼부작 가운데 <지구에 아로새겨진>에 이은 두 번째 작품. 일본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다 마친 후 독일 유학 후 정착, 이국의 말과 모국어 두 개의 언어로 창작생활을 하는 극히 일부의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니 당연히 문자와 언어에 관하여 대단한 숙고를 할 수밖에 없을 터. 전작 <지구에 아로새겨진>에서 모어(母語: 일본어)를 잃어버린 주인공 Hiruko는 덴마크 오텐세에서 살며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종의 공용어 '판스카'를 개발해 사용하면서, 모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독일의 트리어로 향하고 다시 프랑스 남부 아를까지 내려간다. 드디어 만난 같은 모어를 가진 사람 Susanoo(우리말로 '수사노오' 비슷하게 읽자),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청년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Susanoo는 언어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여 Hiruko와 친구들은 Susanoo가 아니라 Hiruko를 위해 그의 실어증 치료를 목적으로 코펜하겐의 대형병원의 실어증 전문의 베르마 박사에게 보낸다. 여기서 2부는 시작한다.

  <지구에 아로새겨진>에서 주인공 Hiruko는 일본 창세신화의 여신과 남신, 이자나미와 이자나기가 낳은 맏딸로, 날 때부터 신체 허약하여 부모에게 조금도 귀여움을 받지 못해 추방당해버린 히루코(蛭子: 거머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래도 창세신의 맏이라 그런지 작품의 2부 <별에 어른거리는>을 시작하자마자 충실한 친구들이 주위에 모이는 바, 코펜하겐에 사는 언어학 전공 대학원생 크누트, (이하는 독일 트리어 거주자) 유학중인 인도인이자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성 전환을 결심하고 은근히 크누트를 연모하는 눈치인 아카슈, 그린란드 출신 에스키모로 덴마크 유학중에 어학연수가 끝나자마자 여행을 떠나 트리어에서 자리를 잡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스시 요리사를 하던 나누크, 마르크스 박물관 학예사이며 나누크를 사랑하는 노라, 이렇게 네 명의 친구가 Hiroko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 위해 조건 없이 Susanoo를 돕기로 했고, 즉 치료행위를 Susanoo가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크누트가 대학원에서 같은 강의를 한 번 들었을 뿐인 성질 더러운 베르마 박사에게 보낸 것도 모자라, 함께 지낸 시간이 그토록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Susanoo하고도 애틋한 우정이 솟구쳤는지 독일 남서쪽, 거의 프랑스 국경에 붙어 있는 트리어에서 모두, 그러니까 아카슈, 나누크, 노라가 멀고 먼 길을 히치하이크를 하거나 바이크의 뒷자리에 타고 가서 페리로 갈아타는 우여곡절을 거쳐 코펜하겐 병원에 집합시켰다.


  전작을 읽으면서 내가 끙끙거리다가 좋다, 수용하자, 했던 것이 이제는 지도에서 지워졌을 지도 모르는 열도, 즉 일본이 수면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는 가정은 뭐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젊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Susanoo였다. 공상 소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기 때문에.

  <별에 어른거리는>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각 섹션마다 한 명의 화자를 등장시켜 그의 서술로 진행하는데 처음 발언을 하는 화자는 Susanoo가 치료를 받을 병원의 식당에서 설거지 전담 직원 '문문'이다. 문문은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일종의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비슷한 증상이 있는 아가씨 비타와 함께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숙소에서 지낸다. 그래서 문문은 보통사람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닦을 접시를 보면서도 접시를 '납작해진 인간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문문이 하루는 접시를 닦고 있는데 접시 하나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손에서 놓쳐 깨뜨리고 만다. 접시에 형이 아를에서 오늘 온다고 쓰여 있어서. 나한테 형이 있었나? 당연히 형은 아를에서 도착한 Susanoo다. 문문은 Susanoo를 실어증 전문 의사인 베르마 박사 실험실에서 만나는데, 박사가 Susanoo와 의사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인 프랑스어를 Susanoo가 문문에게(문문한테만) 말하자 전혀 모르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듣겠는 거다. 그러더니 Susanoo가 문문더러 츠쿠요미, 달의 신이라고 불렀다. 달의 신? 그러면 문문의 형이라고 일컫는 Susanoo는 정체가 도대체 뭐야? 달의 신의 형이면 하여튼 달보다 조금은 더 높은 직위에 있는 다른 신일 터. 혹시 태양의 신? 그건 모르겠다. 하기는 뭐, 그 정도 되어야 수 십 년이 흘렀음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젊음을 지니고 있을 수 있겠지. 좋다. 이걸로 의혹은 해소됐다고 치자.

  다음 문제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논의 역시 언어와 민족, 사라진 나라의 언어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고 필요한 일인가, 같은 것이지만 차례로 문문, 베르마, 나누크, 노라, 아카슈, 닐센 부인(크누트의 엄마, 나누크의 후원자, 베르마의 애인), 크누트, Hiruko, Susanoo, 문문, 이렇게 아홉 명의 열 번에 걸친 이야기들이 재미는 있지만 산만하다. 와다다다닥 읽어 나가는 데는 전혀 어색하거나 애매모호하거나 이해불가인 것은 하나도 없이 남의 사생활을 엿볼 때 노상 그렇듯이 그저 재미있고, 흥미롭고, 조금은 자극적이고 심지어 감칠맛도 나지만, 작가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이런 장면을 삽입했을까, 이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3장 "나누크는 말한다"의 경우엔 히치하이크로 덴마크까지 가는 도중의 이해하기 힘든 여로가 나중에 어처구니없는 또는 경끼할 만큼 서프라이즈를 쏟아 부을 때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전편에서는 작가가 Hiruko로 체화하여 이국의 땅에서 자기 말을 잃어버린 이방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아쉽게 2부에 와서, 물론 아마추어 독자의 일천한 감상이란 전제에서, 동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2부에 이어 대미를 장식할 3부 <태양제도太陽諸島>가 이미 출간되었다고 한다. 2부는 Susanoo가 치료를 받고 있는 실험실에 닐센 부인을 제외한 출연진 전부 등장하여 이들 가운데 Susanoo와 Hiruko의 친구들이 이미 침몰해 없어졌을지도 모르고 지도상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Hiruko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원을 받아 케이프타운에서 배를 내려 간디 해운의 도움으로 배를 갈아타고 인도까지 가서 다시 한 번 배를 옮겨 타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기로 하는 것으로 2부를 마감하여, 여전히 Hiruko와 이젠 Susanoo까지 보태 이들의 오딧세이아는 계속된다. 그런데, 3부까지 다 읽기엔 2부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끝까지 다 읽어야 할지, 그만 두어도 좋을지 이게 영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 돈 주고 살 거 같지는 않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11-02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리 읽다 보니……. 보관함에서도 살며시 삭제.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1-02 07:16   좋아요 2 | URL
좋은 선택하신 겁니다.

yamoo 2023-11-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면서 드럽게 재미없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요..ㅎㅎ 이런 책을 완독하고 리뷰를 쓰신 뽈님! 대단하십니다요~~~ㅎㅎ

Falstaff 2023-11-02 16:52   좋아요 0 | URL
아구, 취한다. ㅋㅋㅋ 은퇴하니까 이거 하나 좋아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다 내 맘대로인 거. ㅋㅋㅋㅋㅋ 대단하긴요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그러는 것이지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3-11-02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 ^^ 넘 옛날스타일 ㅎㅎ

Falstaff 2023-11-02 16:53   좋아요 1 | URL
아이 그럼요. 억지로 쿨한 척, 아닌 척하는 게 쉽지 않아서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천생 꼰대입지요. ㅋㅋㅋㅋ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5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무지 빨리 읽을 수 없는 책. 단어 하나하나가 하 섬세해서 글결을 즐기느라 걸음을 빨리 하지 못한다.
다만. 예전 비채 출판사의 <소네치카>에 소네치카, 메데야와, 스페이드의 여왕 이렇게 실려 있던 걸 역자 별로 쪼개 두 권으로 팔아먹는다는 거. 문둥이가 그렇지 뭐. 부자되세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3-11-04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얼마전 소네치카랑 스페이드의 여왕 읽었어요. 저도 도서관에서 세 이야기가 묶여 있는 책 보고 헐...이렇게 다시 나눠서 팔다니! 했네요.
<메데야... >글이 섬세하군요. 울리츠카야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11-05 06:37   좋아요 1 | URL
예. 재미있더군요.
섬세.... 단어를 좀 수정해야겠습니다. 섬세하기 보다, 조근조근 합니다. ^^
 
프랭키스슈타인
지넷 윈터슨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한 달 만에 다시 지넷 윈터슨을 읽었다. 그만큼 이이의 데뷔작품인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프랭키스슈타인>에서도 윈터슨은, 물론 역자 김지현의 역할도 컸겠지만, 특유의 재치있고 자신있고 매력적인 문장을 과시한다. 제목 <프랭키스슈타인>을 발음하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듯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변주한 작품. 어린 시절부터 하도 많은 아동잡지와 만화책과 영화와 하다못해 상품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오히려 훨씬 나이가 들어 원작을 읽게 만드는 <프랑켄슈타인>. 나도 50대 중반에야 겨우 읽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생명의 창조와 연속성에 관한 담론으로 당당하게 명작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작품이, 단지 이마에 나사못이 박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괴물로만 알려질 수 있다니. 책을 읽은 후에 비로소 <프랑켄슈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더니 참으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이 작품을 변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랭키스슈타인>은 두 이야기로 나뉜다. 원작자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되는 1816년 우기의 스위스 레만호수부터 노년의 메리 셸리가 바이런의 딸 에이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가의 파티장에 참석해 에이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까지 하나의 줄기고, 메리 셸리의 작품을 현대적 시각으로 변주한 왕립학회 회원이자 대학교수 빅터 스타인(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 의사이자 웰컴 트레이드 소속인 라이 셸리(메리 셸리) 박사, AI를 장착한 리얼 돌 대량 생산자 론 로드(바이런 경), 국제 기술박람회 로봇공학 분야 안내 담당자이자 검은 피부의 미인 클레어(메리 셸리의 이복동생이자 바이런의 정부 클레어 클레어몬트), 잡지 "배니티 페어"의 기자 폴리 D(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 등이 등장하여 인간의 뇌를 스캔해 컴퓨터에 저장해 영생을 준비하는 다른 하나의 줄기로 구성된다.

  여기에 작가 지넷 윈터슨의 성정체성이 포함된다. 자전적 작품 <오렌지만이...>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윈터슨은 애초부터 레즈비언이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으로 삶을 시작했지만 젠더와 상관없는 존재로 살고자 유방 절제를 한 세미 트랜스젠더로 살고 있다. 즉 거의 화자 급인 라이 셸러는 스스로 원한 여성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 남성 외모의 존재로 살면서, 작품에선 남성 빅터 스타인 교수하고만 잠자리를 한다. 계속해서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투여해야 하지만 여전히 여성적 성감을 유지하며, 외모 때문에 남성 화장실을 사용하다가 술에 취한 거한에게 강간을 당하고는 2차 가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캐릭터. 라이 셸리의 '라이'는 그래서 라이언의 줄임말이 아니라 '메리'를 변형한 것.

  메리가 살면서 시인 남편 셸리와 야반도주해 이탈리아로 날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잃는 참척을 당하는 와중에도 셸리는 여전히 바람을 피우며, 이복 동생 클레어는 남편의 친구 바이런 경의 딸을 출산한다. 바이런 경은 아이를 수녀원에 맡겨 버려 죽게 하는 등, 19세기 초반의 극심했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곳곳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첫번째 이야기 줄기는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시작한다. 1816년 여름, 스위스 레만 호수 근처의 저택 두 채에 세를 든 영국인들. 웅장한 디오다티 저택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인 바이런 경과 그의 주치의 폴리도리, 메리 셸리의 이복동생 클레어 클레어몬트가 사용하고, 비탈을 따라 아래쪽 작고 매력적인 저택엔 셸리 부부가 세를 들었다. 남자들은 두 명의 여성을 공유하는 악마 숭배자이자 색정광 무리라는 소문이 나서 조금 떨어진 호텔 테라스에서 망원경을 든 숙박인들이 저택을 훔쳐보는 일도 잦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지내던 무리에게 드디어 자그마한 불운이 덮쳤으니 내리 7일 동안 무심한 듯 비가 내려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지내야 했던 것.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바이런 무리가 포도주를 마셔가며 어떻게 권태를 이겨낼 수 있을까 논의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을 했다. 의사 폴리도리는 귀신과 뱀파이어 가운데 고민을 하다가 뱀파이어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을 했고, 메리 셸리는 죽은 개구리 뒷다리에 전극을 연결하고 전기를 주입하면 부르르 경련하는 것에 착안해 죽은 생명체에 전기 충격을 주면 되살릴 수 있다는 이론, 갈바니즘을 떠올린다. 메리 셸리는 갈바니즘과 관계없이 어떤 수단을 통해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시체의 영혼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궁금해하다가 여러 시신들의 조각을 이어 붙여 괴물을 창조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쓰기에 이른다.

  두번째 이야기는 라이 셸리와 빅터 스타인 박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트랜스젠더 라이 셸리는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열린 기술박람회에 스타인 교수의 초청으로 참석을 했다가, 도착 첫날 첫번째 방문지에서 AI를 장착한 리얼돌, 작품 속에서는 XX-봇 공장을 고향 웨일스에 짓는 게 꿈인 청년 론 로드를 그의 부스에서 만난다. 이 론 로드는 직업이 직업인 만큼 우리 인체에서 장딴지, 허벅지, 날개죽지, 어깨죽지 말고 '지'자로 끝나는 두 단어를 매우매우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는 바람에, 하긴 그 단어가 비속어도 아니고 엄연히 널리 사용하기를 권장하는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다른 내용도 아니고 사람의 두뇌, 또는 영혼을 스캔해서 AI화 해 컴퓨터에 저장하는 이야기에, 나는 이미 식상을 했던 터. 물론 지넷 윈터슨의 필력이 여태 읽은 비슷한 내용의 작품들과 분명하게 차별이 되고 이야기도 더욱 풍부하더라도 독자인 내가 그렇다는데 이걸 어쩌겠는가. 물론 중병에 걸린 부자들이 심정지 상태이나 아직 뇌는 살아 있는 법적 사망 상태에서 급속 냉동해 시신을 보존했다가 먼 미래에 치료방법을 개발한 후에 해동해 생명을 이어가는 것도 포함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영생에 "전혀" 관심이 없고, 윤회를 믿지 않으며, 영혼이란 건 그저 뇌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데다가 심지어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라 별로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은 꽤 재미있다. 이 독후감을 읽고 괜히 <프랭키스슈타인>의 일독을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프랭키스슈타인>이 재수가 없어 나 같은 독자를 만난 것일 뿐이니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께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란다.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결국 책임은 당신이 지는 거. 이쯤에서 나는 ㅋㅋㅋ 웃고 싶어진다. 먼저 읽은 자의 여유로움이란. ㅋㅋㅋ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10-3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훗. 저는 영생에 관심있는 자..

Falstaff 2023-10-31 10:14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십니까! 읽어보셔야지요. 되게 재미있게 읽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