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키스슈타인
지넷 윈터슨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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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만에 다시 지넷 윈터슨을 읽었다. 그만큼 이이의 데뷔작품인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프랭키스슈타인>에서도 윈터슨은, 물론 역자 김지현의 역할도 컸겠지만, 특유의 재치있고 자신있고 매력적인 문장을 과시한다. 제목 <프랭키스슈타인>을 발음하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듯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변주한 작품. 어린 시절부터 하도 많은 아동잡지와 만화책과 영화와 하다못해 상품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오히려 훨씬 나이가 들어 원작을 읽게 만드는 <프랑켄슈타인>. 나도 50대 중반에야 겨우 읽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생명의 창조와 연속성에 관한 담론으로 당당하게 명작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작품이, 단지 이마에 나사못이 박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괴물로만 알려질 수 있다니. 책을 읽은 후에 비로소 <프랑켄슈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더니 참으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이 작품을 변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랭키스슈타인>은 두 이야기로 나뉜다. 원작자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되는 1816년 우기의 스위스 레만호수부터 노년의 메리 셸리가 바이런의 딸 에이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가의 파티장에 참석해 에이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까지 하나의 줄기고, 메리 셸리의 작품을 현대적 시각으로 변주한 왕립학회 회원이자 대학교수 빅터 스타인(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 의사이자 웰컴 트레이드 소속인 라이 셸리(메리 셸리) 박사, AI를 장착한 리얼 돌 대량 생산자 론 로드(바이런 경), 국제 기술박람회 로봇공학 분야 안내 담당자이자 검은 피부의 미인 클레어(메리 셸리의 이복동생이자 바이런의 정부 클레어 클레어몬트), 잡지 "배니티 페어"의 기자 폴리 D(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 등이 등장하여 인간의 뇌를 스캔해 컴퓨터에 저장해 영생을 준비하는 다른 하나의 줄기로 구성된다.

  여기에 작가 지넷 윈터슨의 성정체성이 포함된다. 자전적 작품 <오렌지만이...>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윈터슨은 애초부터 레즈비언이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으로 삶을 시작했지만 젠더와 상관없는 존재로 살고자 유방 절제를 한 세미 트랜스젠더로 살고 있다. 즉 거의 화자 급인 라이 셸러는 스스로 원한 여성의 생식기를 가지고 있는 남성 외모의 존재로 살면서, 작품에선 남성 빅터 스타인 교수하고만 잠자리를 한다. 계속해서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투여해야 하지만 여전히 여성적 성감을 유지하며, 외모 때문에 남성 화장실을 사용하다가 술에 취한 거한에게 강간을 당하고는 2차 가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캐릭터. 라이 셸리의 '라이'는 그래서 라이언의 줄임말이 아니라 '메리'를 변형한 것.

  메리가 살면서 시인 남편 셸리와 야반도주해 이탈리아로 날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잃는 참척을 당하는 와중에도 셸리는 여전히 바람을 피우며, 이복 동생 클레어는 남편의 친구 바이런 경의 딸을 출산한다. 바이런 경은 아이를 수녀원에 맡겨 버려 죽게 하는 등, 19세기 초반의 극심했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곳곳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첫번째 이야기 줄기는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시작한다. 1816년 여름, 스위스 레만 호수 근처의 저택 두 채에 세를 든 영국인들. 웅장한 디오다티 저택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인 바이런 경과 그의 주치의 폴리도리, 메리 셸리의 이복동생 클레어 클레어몬트가 사용하고, 비탈을 따라 아래쪽 작고 매력적인 저택엔 셸리 부부가 세를 들었다. 남자들은 두 명의 여성을 공유하는 악마 숭배자이자 색정광 무리라는 소문이 나서 조금 떨어진 호텔 테라스에서 망원경을 든 숙박인들이 저택을 훔쳐보는 일도 잦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지내던 무리에게 드디어 자그마한 불운이 덮쳤으니 내리 7일 동안 무심한 듯 비가 내려 집안에서 꼼짝 못하고 지내야 했던 것.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바이런 무리가 포도주를 마셔가며 어떻게 권태를 이겨낼 수 있을까 논의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을 했다. 의사 폴리도리는 귀신과 뱀파이어 가운데 고민을 하다가 뱀파이어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을 했고, 메리 셸리는 죽은 개구리 뒷다리에 전극을 연결하고 전기를 주입하면 부르르 경련하는 것에 착안해 죽은 생명체에 전기 충격을 주면 되살릴 수 있다는 이론, 갈바니즘을 떠올린다. 메리 셸리는 갈바니즘과 관계없이 어떤 수단을 통해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시체의 영혼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궁금해하다가 여러 시신들의 조각을 이어 붙여 괴물을 창조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쓰기에 이른다.

  두번째 이야기는 라이 셸리와 빅터 스타인 박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트랜스젠더 라이 셸리는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열린 기술박람회에 스타인 교수의 초청으로 참석을 했다가, 도착 첫날 첫번째 방문지에서 AI를 장착한 리얼돌, 작품 속에서는 XX-봇 공장을 고향 웨일스에 짓는 게 꿈인 청년 론 로드를 그의 부스에서 만난다. 이 론 로드는 직업이 직업인 만큼 우리 인체에서 장딴지, 허벅지, 날개죽지, 어깨죽지 말고 '지'자로 끝나는 두 단어를 매우매우 자연스럽게, 자주 사용하는 바람에, 하긴 그 단어가 비속어도 아니고 엄연히 널리 사용하기를 권장하는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다른 내용도 아니고 사람의 두뇌, 또는 영혼을 스캔해서 AI화 해 컴퓨터에 저장하는 이야기에, 나는 이미 식상을 했던 터. 물론 지넷 윈터슨의 필력이 여태 읽은 비슷한 내용의 작품들과 분명하게 차별이 되고 이야기도 더욱 풍부하더라도 독자인 내가 그렇다는데 이걸 어쩌겠는가. 물론 중병에 걸린 부자들이 심정지 상태이나 아직 뇌는 살아 있는 법적 사망 상태에서 급속 냉동해 시신을 보존했다가 먼 미래에 치료방법을 개발한 후에 해동해 생명을 이어가는 것도 포함하지만, 미안하다, 나는 영생에 "전혀" 관심이 없고, 윤회를 믿지 않으며, 영혼이란 건 그저 뇌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는 데다가 심지어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라 별로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은 꽤 재미있다. 이 독후감을 읽고 괜히 <프랭키스슈타인>의 일독을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프랭키스슈타인>이 재수가 없어 나 같은 독자를 만난 것일 뿐이니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께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란다.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결국 책임은 당신이 지는 거. 이쯤에서 나는 ㅋㅋㅋ 웃고 싶어진다. 먼저 읽은 자의 여유로움이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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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3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훗. 저는 영생에 관심있는 자..

Falstaff 2023-10-31 10:14   좋아요 0 | URL
앗, 그러십니까! 읽어보셔야지요. 되게 재미있게 읽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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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캐럴라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5
위니프리드 홀트비 지음, 정주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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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하게 번역해 출간한 홀트비 작품.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이이의 대표작은 영화로도 만든 <사우스 라이딩>이라고 한다. 1898년에 영국 요크셔주 이스트라이딩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작가,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낸 페미니스트다. 농부라고 해도 좀 큰 농부였던 듯, 아내, 위니프리드의 어머니는 이스트라이딩의 여성 의원을 지내고, 작가는 가정교사한테 교육을 받은 다음 옥스퍼드 서머빌 칼리지를 다녔다. 육군 여성 지원단에 지원해 프랑스에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영국에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연애와 저널리스트 활동으로 이름을 날린다. 페미니스트 단체 “식스 포인트 그룹” 일원으로 여성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남아프리카 흑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다가 아깝게도 1935년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삶을 접었다.

  장편소설 <불쌍한 캐럴라인>의 주인공 캐럴라인의 아버지 역시 요크셔 주 이스트라이딩의 농부 출신이며, 재종 그러니까 6촌 형제 로버트는 아직도 이스트라이딩의 마싱턴에서 밧줄 판매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캐럴라인의 7촌 조카쯤 되는 또다른 주인공 엘리너 데 라 루는 또한 홀트비가 상당한 관심을 쏟았던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이민과 영국 여인 사이의 혼혈로 대학을 졸업할 무렵 홀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영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했다. 자신이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지역에서 돌아온 인물이니 매사 깔끔하고, 야물딱지고, 똑똑하며, 정의롭고,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등장한다. 아쉽게도 그런데, 딱 거기까지. 위니프리드 홀트비가 페미니스트였다고는 하지만 1931년, 서른세 살 때 출간한 <불쌍한 캐럴라인>은 결코 페미니즘 문학으로 볼 수도 없고, 봐도 안 된다. 요즘에 “페미니즘”을 업기만 하면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지 유독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토마스 하디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도 글쎄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유명인사도 있더라니까!), 이 작품의 결말은 오히려 안티 페미니즘과 유사할 지경이다. 캐럴라인 말고 거의 주인공 급인 엘리너의 결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캐럴라인과 엘리너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아, 이 양반들은 생략하고 조금 짓궂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스토리를 전개해보자.


  헤링데일 백작의 후손인 헤링데일 경(백작의 맏아들의 맏아들의 맏아들….은 아니라는 뜻)과 외가쪽으로 재종, 그러니까 7촌 조카 정도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배질 레지널드 앤서니 세인트데니스,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와 귀여운 행실의 사랑스런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앙리 4세 때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 후 박해를 피해 영불 해협을 건넌 위그노 가문 출신의 시골 목사, 어머니는 헤링데일 백작’부인’의 후손으로, 목사의 뻔한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너무 큰 목사관을 유지하느라 등골이 빠져 버렸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 외동아들의 학비 대기에도 퍽퍽해, 이 꼴을 보지 못한 헤링데일 경이 흔쾌히, 라기 보다 자기 가문의 가오가 있어서 먼 조카 배질 군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의 학비를 원조하기로 정했다. 배질 군은 이튼 칼리지에 다니면서, 거기가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영국 각지의 난다긴다 하는 집안의 아이들만 빼곡한 가운데 배질이라는 뱁새가 학교 친구들의 행실, 차림, 언행, 발음 등 잉글랜드 고위계급 특유의 악마 같은 거만을 배우느라 가랑이가 찢어졌다. 그리하여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것이 보는 눈은 어느 새 정수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옥스퍼드에 들어갔다. 이후 배질은 본격적으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까불기 위해 신용카드를 무작정 긁어버렸고, 부자 중의 부자인 헤링데일 경이 보기에도 등록금을 몇 배나 초과한 카드 청구서를 받아 들고는 급기야 배질을 호출해, 배질한테 은근히 수치스러운 약속을 해야 계속해서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배질도 꼴에 사내라고 이를 거절한 후 시골의 목사관으로 돌아와 빈둥빈둥 거리다 드디어 1914년 여름의 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이때 배질은 참전으로 자리가 빈 노 귀족 판데일 경의 개인비서로 인생의 전기를 맞는 듯했으나 1916년에 사관후보생이 되어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에 복귀해 졸업장을 따고(아마 딴 거 같다) 소위로 임관, 프랑스 전선에 배치된다. 1918년에 팔꿈치가 박살이 난 채 칼턴 하우스의 한 병원에 입원해 이후 2년 간 수술실과 요양소를 전전하다가 적절한 연금과 함께 제대를 했고, 가뜩이나 이튼-옥스퍼드 물을 조금도 뺄 의향이 없는 배질은 이제 좀 뻣뻣한 팔꿈치를 핑계로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1923년에 마지막으로 헤링데일 경을 만나 경의 조언에 따라 이민을 가기로 결심을 해서, 기껏 간다는 곳이 몬테카를로. 이곳에서 병원 동기 윙 스트레턴과 카지노의 룰렛 총무일을 하며 길고 긴 청춘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뭐 팔자가 상팔잔 걸 어떡해, 그지?


  이때 나타난 여자가 글로리아 칼미에. 본명은 글래디스 아이린 메이블 윌콕스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영국 피터버러에서 변호사의 사무원으로 일해,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열여섯 때 연애사건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맞고 인생이 변하기 시작한다. 영국에서 좀 놀다가 보드빌 제작자와 특정한 계약 없이 미국으로 가서, 어리고 혼자 몸인 여자애가 이국 땅 미국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점잖은 아마추어 연주단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리옹 실크 상인의 나이 들어가는 아들, 점잖지만 무능한 가스통 칼미에를 만나 결혼을 하자마자 세계대전이 발발, 남편이 징집당해 전선에 도착한지 6주 만에 전사해버리고 만다. 닭 한 마리 못 죽일 착하고 작은 남자는 그러나 글로리아에게 상당한 재산을 법적으로 상속해주게 됐으니, 과부가 된 글로리아 팔자를 안 됐다고 해야 하나, 대박이라고 해야 하나. 글로리아는 몬테카를로 도박장에 등장해 하루에 많은/일정한 돈을 칩으로 바꾸어 돈이 떨어질 때까지 조금씩 써가며 칵테일을 홀짝 거리는 재미로 날짜를 죽이고 있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세계에서 게으름에 관한 한 저 유명한 오블로모프와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챔피언 배질 세인트데니스를 만나 결혼해버린다.

  이후 무려 5년간 유럽을 돌아다니며 도박과 투자를 해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런던에 도착해 메이더 베일의 작은 아파트에 들어가 산다. 이때에 이르러 겨우 배질은 이튼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다(고 분명이 쓰여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벌써 세월은 1928년 8월. 글로리아가 재산이 있다고는 하나 그동안 쓴 게 얼만데. 배질에게 일자리를 찾으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안 그러면 결국 배질은 미소와 뱃살밖에 없는 클럽의 죽돌이가 될 거라고 악담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하루, 배질 코 앞에 신문 “주간 국교도”를 내밀고 독자 캐럴라인 덴턴스미스 양이 투고한 기사를 보여준다. 캐럴라인이 생각해낸 가칭의 회사 “크리스천 키네마”. 양키 영화에 황폐화해가는 영국시민과 청소년을 구제하기 위하여 백퍼센트 순수한 영국영화 만을 제작하는 회사를 제안한다. 이에 글로리아는 배질이야말로 이 가칭의 영화사 대표를 맡을 최고의 적임자이니, 목사의 아들, 위대한 복음주의 귀족, 옥스퍼드 출신, 퇴역군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행복한 결혼생활 중, 예술을 아는 사람 등등 어디 한 구석 모자란 것이 없다는 의견. 만일 “크리스천 키네마”를 창립해 회장으로 앉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수 천명은 있을 캐럴라인 같은 사람이 돈을 어딘가에 투자할 곳을 찾다가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 주로 갑갑한 하숙집에 사는 독신녀와 과부들로 죽기 전에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 쌔고 쌨다는 걸 강조한다. 캐럴라인 덴턴스미스. 안 봐도 비디오인 것이, 그 여자가 여태 내놓은 아이디어 중에서 남들 관심을 끈 건 하나도 없을 것이라서 그걸 우리가 해주면 자기 생각이 실현되는 걸 보고 얼마나 흥분을 할지 생각만 해도 무지하게 웃기는 일이란다.

  어려서부터 공연과 극장을 굴러다니던 글로리아가 이런 말을 하며 몇 명을 배질에게 소개한다. 부부가 엑스레뱅에서 만났던 퀘이커 교도로 회사법 전문가인 거턴, 영화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캐나다인 존슨. 처음엔 이렇게 배질, 거턴, 존슨, 그리고 캐럴라인, 네 명이 의기투합해 회장, 이사회 임원, 이사회 간사가 되어 회사를 설립하고, 이어서 아들을 위해 이튼 졸업생 배질의 추천서를 받을 목적으로 유대인 조지프 이즌바움이 가세하고, 유성영화 시대의 총아가 될 신기술 토나퍼펙타를 장착한 기술자 휴 매커피가 가세하여 이름만 번듯한 재단법인 “크리스찬 키네마 유한책임회사”를 창설하게 되는데, 척 보면 삼천리라고, 이거 사기극 맞지? 누구 하나 신세 조져야 끝나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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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30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에서도 세계문학이 나오는가 봅니다. 세계문학집 열풍이네요..ㅎㅎ
근데 이 책을 제외하고 대부분 책 표지가 끝네주게 좋네요..^^ 놀라운 점은 몇 작가를 빼놓고는 완전 듣보잡 작가들이 대부분이라 매우 놀랍네요..ㅎㅎ

이런 책을 잘도 발굴하시는 뽈님은 문학 덕후 중 최고일 겁니다...^^

Falstaff 2023-10-30 16:54   좋아요 1 | URL
넵. 흥미로운 책도 (당연히) 섞여 있습니다. 고르는 거야 뭐... ㅋㅋㅋ 클릭하는 사람 마음이지요. 복불복입니다. 인생이 그렇듯이요.
아휴, 전 문학 덕후,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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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즐거운 육아 일기 위픽
오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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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우리 문학계의 문제아들의 모임 “후장사실주의”의 일원인 오한기의 단편소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오한기에게 청탁을 해서 단편소설 한 편을 받아, 단편 딱 하나로 책을 엮어, 그러니까 본문 페이지는 68 쪽이나 되긴 하지만 손바닥 만한 페이지에 편집이 가능한 한 최소의 글자 수로 채워 한 권의 책을 만들었으니 세상의 나무들에 대하여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불손한 방식으로 책을 만들어, 정가 1만3천 원을 때려버렸다. 내가 정말, 정말로 심심하면 글자 수가 몇 개나 되며, 그래서 한 글자 당 얼마의 정가를 매겼는지 세 보고 싶지만 내일이 한가위인데 그런 짓을 하느니 곧 들이닥칠 아이들, 며느리, 손주들 보기 창피하지 않게 청소기나 돌리는 편이 좋겠다. 근데 걔들은 올 필요 없다니까 왜 자꾸 오겠다고 그려? 여행이나 가지.


  오한기가 1985년생이다. 서른여덟 살. <나의 즐거운 육아 일기>에 나오는 ‘나’의 가족 이야기 가운데 비교적 믿을 만한 서술을 근거로 말하자면, ‘나’는 비트코인에 투자해 평생 먹고 살 정도의 재산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가 FTX가 파산하는 바람에 쪽박을 찼고, 가명이겠지만 아내 진진은 남편의 코인만 믿고 다니던 직장에서 팀장한테 “짜식아, 그만 두면 될 거 아냐!”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으나 결혼을 잘못했다는 거의 분명한 사실을 깨달아 경주에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에 경력직 사원으로 입사해 졸지에 주말부부가 되어 버렸다. 부부 사이에 유치원 다니는, 물론 가명일 것이 분명한 아이 주동主動이가 있었으니 ‘나’의 하루 일과는 주동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시작하며, 일주일의 마지막 일정은 이사온지 얼마 안 되는 고덕동에서 KTX 종착역인 서울역까지 주동이를 태우고 가서 진진을 싣고 오는 도중에 괜찮은 식당에 들러 저녁 한 끼를 먹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주말부부가 주말 밤에 정기적으로 뭘 하는 지는 어차피 다 아는 처지에 그냥 생략하기로 하자.

  근데 오한기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 이름을 왜 하필이면 주동이라고 했을까? 아버지인 ‘나’처럼 빌빌대지 말고 세상을 주동적으로 살아보라고 그랬다고 책에 쓰여 있다. 나같으면 죽어도 아이에게 “주동”이란 발음을 아무리 가명이라도 주지 않을 거 같다. <수호지>의 양산박 호걸 가운데 ‘주동’이란 멋진 수염을 지닌 영웅이 있다. 이이가 정의의 사자라, 절친 뇌행이 죄를 지어 유배를 가는데 호송하는 일을 맡았다. 뇌행이 가난한 노모를 모신 터라 친구를 도망하게 하고 자신이 그 죄를 받아 창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창주 시장이 주동의 됨됨이와 인품을 흠모해 아들의 교육을 맡겨 주동과 아이가 매우, 아주아주 사이가 좋아 보기에 마땅했다. 이때 양산박의 도적떼들이 주동을 영입하고자 해서 도적떼의 책사 오용선생이 꾀를 내어 쌍도끼 이규를 보내 설득을 하였으나 관신關神 비슷한 주동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용 선생은 미리 이럴 것임을 알고 이규에게 비밀리에 지시를 했던 바, 이규는 창주 시장의 아들을 유괴하여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참기름 소금을 찍어 먹는다. 시신은 빨래줄에 널어 놓고. 아이를 잃어버려 창망 간에 아이를 찾는 주동이 이 장면을 보고 이규를 죽이려 했으나, 때마침 등장한 친구 뇌행이 주동을 설득해 함께 양산박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어찌 ‘주동’을 가명일지언정 아이의 이름으로 쓸 수 있겠는가. 중국의 식인 풍습은, 일반 서민이 사람 고기를 먹을 경우엔 고기를 다져 만두소 같은 것으로 만들어 익혀 먹고, 상류층은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주로 간이나 심장을 날 것으로 소금 찍어 먹었다. (‘주동’과 식인 일화는 이문열 역 <수호지> 내용을 기억해서 썼음. 조금 착오가 있을 수도 있음)


  잡기가 길어진 건, 이 책이 말이 좋아 한 권이지 단편 한 편에 대한 독후감이라 쓸 게 별로 없기도 해서인데, 본론을 이어가자면, 서른다섯 살의 팔팔한 청춘, 아니다, 청춘 까지는 아니고 젊은 작가가 어째 쓰는 방식이 환갑은 지난 것 같다.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자신, 어차피 1인칭 화자 ‘나’를 채용하였으니 ‘자신’이라고 여겨도 그리 어색하지 않긴 하지만, 하여튼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소설 쓰기를 시니컬하고 이제 거의 다 산 것처럼 적고 있다. 마치 농담을 하는 것처럼.

  아내 진진은 신라의 고도 경주까지 내려가 직장을 다니고 있는 반면에 ‘나’는 꼴에 전업작가라고 집에서 빌빌거리는 처지라 아르바이트를 하나 얻어 “괴담창작”을 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시작하게 된 터에, 곧 출간되어 나올 단행본 <산책하기 좋은 날> 속지에 작가의 친필 서명을 첨부할 것이라고, 출판사로부터 속지 5백장이 도착한다. ‘나’는 공사다망해서 도무지 5백장에다 서명을 할 시간이 없어서 시급 1만2천원을 주고 사인 알바를 급하게 구하게 된다(이 책 <나의 즐거운 육아일기>의 속지에 작가 서명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타난 인간이 sb.

  sb. 작가가 누군가? 오한기다. 오한기는 sb를 service boy라고 주장하지만 설마, 후장사실주의를 주창하는 문단의 문제아가 sb를 service boy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돼? 나는 욕설 ‘씨b’ 아니겠느냐,에 한 표. 이 sb가 비록 시간제 알바지만 명문대 졸업에 삼성전자를 다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 때려치우고 알바를 전전하고 있단다. 정말로 sb한테 일을 시켜보니 ‘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작업의 포인트를 찍어 ‘나’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기 시작해, 이제는 작업은 ‘나’가 하고 해놓은 작업이 어떤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지 sb에게 먼저 보여야 할 판이 된다. 척하면 척이지? 그렇다. Sb는 서서히 ‘나’의 모든 작업을 장악하는 것을 초월해 주동과 진진에게도 ‘나’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나한테는 이 책이 두 번째 오한기로 전에 작품집 《의인법》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실린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엄청 순화된 오한기다. 그래서 읽기가 좋기는 한데, 이번엔 혹시 과하게 냉소적이지 않나?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 같기는 하고, 냉소적인 작품이라도 얼마든지 명작이 될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책을 만드는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 기획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지만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세상은 오한기 같은 문제아들의 반란을 통해서 발전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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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27 05: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위니프리드 홀트비 <불쌍한 캐럴라인>
화요일, 지넷 윈터슨 <프랭키스슈타인>
목요일, 다와다 요코 <별에 어른거리는>
금요일, 김언희 《보고 싶은 오빠》

독서괭 2023-10-27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단편 하나에 13000원이요?? 재밌다고 해도 빌려보고 말지.. 너무하네요ㅡㅡ;;

Falstaff 2023-10-27 20:17   좋아요 0 | URL
심하지요? 그죠? 에휴....

stella.K 2023-10-27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일 한가위 아닌디요. 혹시 지난 추석 무렵에 읽으셨나요?
근데 이 책 정말 좀 거시기하네요. 출판사 불경기인건 알겠는데 손바닥 책 요즘 7,8천원 하는 거 같던데 이렇게 때려버리면 누가 살까 싶네요. 혹시 중고샵에 나오면ᆢ 그래도 전 안 볼거 같습니다. 후장이고 전자이고 지간에 재미가 있어야죠. 저는 폴님의 공신력을 신뢰합니다. ㅎㅎ

Falstaff 2023-10-27 20:20   좋아요 2 | URL
달력 보니까 이게 한달 전에 쓴 거네요. 좀 자주 올려야겠습니다. -_-;;
이 책은 저도 안타깝지만 비추. 본문에 원래 들어 있었는데.... 편집 생각하면 별 하나 더 뺀다, 하는 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벽돌 애자인 모양입니다. 흑흑...

꼬마요정 2023-10-28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픽 시리즈는 위즈덤하우스인가 신청하면 메일로 단편들이 와요. 물론 이주일인가 있으면 비공개로 돌리는데 그 전에 읽을 만한 것들 읽어요. 솔직히 만 원 넘게 주고 사기는 너무 비싸요ㅜㅜ 위픽 시리즈 여러 편 묶어서 내 주면 몰라도… 흑흑
아, 세레나데 샀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28 16:22   좋아요 1 | URL
메일로 단편 ˝들˝이 온다고요? 그거 놀랄 노잡니다!
근데 종이 책으로 보면 이야기하신 대로 이건 상도의가 아니지 않나 해요.
요새 참 너무들 합니다. 식당에 납품하는 업소용 소주 한 병이 1,700원입니다. 그걸 5천원도 받고, 7천원도 받고...
세레나데는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꼬마요정 2023-10-28 21:51   좋아요 1 | URL
메일함을 보니 한 달에 한 편씩 오는 것 같네요. 신청 기간이 지났나 모르겠는데, 저는 제법 괜찮더라구요. 1년 기획인 것 같은데 이제 1년이 다 되어가서 좀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세레나데 기대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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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데 대산세계문학총서 185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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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미나게 440쪽까지 달리다, 술 약속 있어서 눈물을 머금고 일단 덮음. 내일 다 읽고 써야겠지만 오늘 오후나 밤에 이 책 검색해보고 혹시 안 사실 분 있을까봐 한 마디 안 할 수 없음. 명작 까지는 아니지만 바로 아래 자리 정도는 너끈하게 차지함. 하나도 안 야한데도 겁나게 재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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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26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만에 5별 주는겨?
독자 평은 11월 27일.

잠자냥 2023-10-2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Falstaff 2023-10-26 16:18   좋아요 2 | URL
올해 광복절 이후 첫 5별!

레삭매냐 2023-10-26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좀 더 일찍 봤다면
이창래 선생 신간 지르면서 같이
주문장을 날렸을 텐데 아숩네요.

Falstaff 2023-10-26 18:51   좋아요 1 | URL
오늘만 날입니까!

망고 2023-10-26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방금 책 주문 하고 왔는데 이 글을 좀만 일찍 봤으면 이 책도 샀을텐데요ㅠㅠ

Falstaff 2023-10-26 18:51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 책은 소장용입니다!

페넬로페 2023-10-26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야겠어요 ㅎㅎ

Falstaff 2023-10-26 18:51   좋아요 1 | URL
주저하지 마셔요. ㅎㅎ

다락방 2023-10-2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지?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보자.

Falstaff 2023-10-26 18:53   좋아요 1 | URL
그럼요, 작가 사진 가린 채 읽으면 여지없이 여성이 쓴 소설이라고 판정할 겁니다.

우끼 2023-10-26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고맙습니다ㅠ

Falstaff 2023-10-26 19:08   좋아요 1 | URL
아이고, 제가 고맙지요. ^^

꼬마요정 2023-10-26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진짜인가요. 지금 계속 장바구니에만 있는데 사겠습니다!!

Falstaff 2023-10-27 05:22   좋아요 1 | URL
옙. 손가락에 힘 줘서 클릭 하셔요!!

잠자냥 2023-10-27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산다며 세일즈포인트 왜 어제랑 똑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0-27 09:27   좋아요 1 | URL
시장조사 중입니까?ㅋㅋㅋ

우끼 2023-10-27 21:1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모아서 한꺼번에 사려고 ㅌㅋㅋㅋㅋㅋ 자냥님 그러고보니 자냥님도 아직 안사셨나보네요! 세일즈포인트가 그대로라면…(괜히 자냥님께 화살 되돌려드리기)

반유행열반인 2023-10-27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도 안 야한데도 에서 일단 거름...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27 20:21   좋아요 2 | URL
ㅎㅎㅎ 눈도 좋으셔요, 열반님은. 다 읽었어요! 재미나요! 거르지 마세요!!!

반유행열반인 2023-10-27 20:33   좋아요 2 | URL
원래 하던 대로 여기 있는 사람 다 - 보고 나중에 조용할 때 볼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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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9
그라치아 델레다 지음, 이현경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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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자주 낯선 작가를 소개하여 독자에게 다양한 읽을 거리를 선사해주는 미덕이 있다. <악의 길>을 쓴 그라치아 델레다Grazia Deledda도 처음 들어본 이탈리아 작가인데, 이탈리아 반도라기보다 반도 왼쪽에 떠 있는 두 개의 섬 가운데 아래쪽에 있는 샤르데냐 섬 특유의 문화와 민속을 작품 속에서 그대로 유지한다. 물론 제국 로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순종 로마인들이 보기에 야만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라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본토와 많이 다른 독특한 문화와 단어 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자 그라치아 델레다는 1871년생이다. 조선이 제물포조약을 맺고 나라를 연 것이 1876년, 그 이전에 태어났고, 작품의 수도 만만치 않으며, 게다가 쉰다섯 살 때인 1926년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는데, 아무리 이탈리아가 통일도 못하고 유럽에서 빌빌거렸다 해도, 이이의 이름이 아직도 귀에 설다면 이거 뭔 문제가 있는 거 아냐? 하여간 <악의 길>을 읽어보니까 여태 유럽의 문학작품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이곳 샤르데냐 섬 문화와 사람들의 행동양식 같은 것이 색다르고 흥미롭다. 어떻게 보면 시칠리아나 나폴리 사람들하고 비슷한 면도 있는 거 같다. 19세기 여성 작가가 유럽에서도 유독 강한 벤데타 문화를 작품에 자세히 서술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런 것도 얼핏 체감할 수도 있다. 하도 오래 이 민족한테 얻어 맞고, 저 민족한테 코피 터진 세월을 보낸 지라 재까닥 적응하는 순발력, 반대로 주민들 특유의 텃세 같은 것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71년생이 샤르데냐 섬에서 가정교사한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웠다면 소위 은수저 계급이며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 하인, 하녀를 두고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큰 갈등이 바로 주인과 하인 간의 계급 차이에서 벌어지니 하는 말이다.


  때와 장소는 1896년 이탈리아 샤르데냐 섬의 작은 누오로 시. 작가 그라치아 델레다 역시 낳고 자란 곳이다. 세상은 소위 벨에포크 시대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벨에포크의 은총의 손길은 저 변두리 샤르데냐 섬에서도 변두리 누오로 시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간신히 은총이 왔다 치더라도 일반 농민들한테 손길은커녕 고랑내 나는 입김이라도 한 번 훅 불어줄 수 없었을 터. 인민들은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죽느니 살거나 목구멍에 친 거미줄 걷어내기에도 허덕였던 건 꼭 눈으로 안 봐도 삼천리였다.

  동네에 남의집살이 하는 피에트로 베누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가난한 것들이 잘 생기면 여자나 남자나 팔자가 좋지 않게 풀리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으니, 바로 이 피에트로 총각이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에다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다. 청년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늙고 가난한 숙모 두 분이 지원을 해주어 그럭저럭 자라 이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그래도 언젠가는 집을 수리하고 마차와 황소 두 마리, 개 한 마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때 비로소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 지금 지내는 집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준다고 해서 니콜라 노이나 씨 집으로 요새 말로 이직을 하러 가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그가 면접을 보러 간다는 건 동네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니콜라 씨 가족과 먼 쇠락한 친척 사비나가 잡화점 여인에게 한 이야기가 퍼진 것이었다. 사비나 역시 호리호리한 몸매의 사랑스러운 금발 아가씨로 피에트로와 서로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눈이 맞은 상태였다. 피에트로가 청혼만 하면 ‘곧바로’ 응하지는 않겠지만 ‘거의 곧바로’ 승낙을 할 정도로. 이런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 점점 더 고양되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니콜라 노이나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젊어서 누오로 시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해도 시비 걸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그러나 누오로 지역 토박이가 아니라 램프용 기름 행상을 하는 떠돌이 출신으로 키 작고 좀 덜 생긴 부잣집 루이사 아가씨를 꼬드겨 결혼에 성공해 하루 아침에 시에서 일류 명사가 된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떠돌이 행상이 이 지역에서 최상급인 “프린치팔레” 계급의 아가씨와 결혼을 했으니 말 다 한 거지. 실제로 작가 델레다는 작 초반에 노이나 집안을 일컬어 “이 근방의 왕”이라고 했을 정도다.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 앞에서 했던 건 좋게 말하면 과장이란 것이 들통나기는 한다. 이런 니콜라 씨가 하루는 포도주 사러 더 큰 도시 올리에나에 갔다가 잔뜩 취해 돌아오면서 말이 푸짐하게 싸 놓은 개똥을 밟았는지 푸드득 거리는 바람에 말 잔등에서 떨어져 다리가 똑,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따로 하인을 두지 않고 직접 일을 하던 니콜라 씨가 더는 일을 하지 못해 하인을 한 명 고용하려는데 피에트로가 지원을 한 것. 물론 합격이다. 미남은 미남을 알아보잖여? 그건 다음으로 하고, 이 집에 마리아라고 하는 젊고 예쁜 딸이 있다. 피에트로하고 딱 어울리는 나이고 아빠 닮아서 통통하니 상당한 미인이다. 엄마는 자신이 생기기만 멀쩡하지 글도 모르고 재산도 없는 남자와 결혼한 것을 후회해, 마리아는 부자 또는 대학 졸업생, 아니면 대학을 졸업한 부자와 결혼시키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그리고 정말로 마리아는 피에트로를 단지 하인 그 자체로만 보고, 일을 시키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하는 거다.

  초반에 니콜라 씨 집으로 오는 도중에 피에트로가 이 집 따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연히 작품의 복선으로 둔 것이긴 하지만 피에트로가 하인 일을 시작하자마자 천성이 구두쇠이기도 한 마리아는 피에트로가 일 하는 곳곳마다 따라다니며 그가 작물을 가외로 챙기는지, 포도를 따서 먹어치우는지 끊임없이 감시를 하는 바람에 정나미가 똑 떨어져버리고, 갈수록 허해지는 마음을 마리아의 가난한 친척이자 역시 남의집살이를 하고 있는 예쁘고 착한 사비나 생각으로 채우고 있었다. 사비나는 마리아네 농원에서 배를 수확할 때 와서 일을 도와준 적이 있어서, 바쿠스의 후예들한테는 큰 축제를 겸하기도 했던 포도 수확에도 사비나가 올 줄 알았는데, 일이 바빠 올 수 없어 피에트로는 심통이 잔뜩 난 상태로 포도를 따야 했다. 그대로 인용하면, “슬프고 화가 났다.” 그리하여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쓸데없이 “로사, 당신은 샤르데냐의 순례자……” 노래를 하며 길을 가고 있었는데, 진짜로 동네 아가씨 가운데 “가시돋친 로사”라는 동네에서 제일 심술궂고 질투 많고, 성질마저 드러운 아가씨가 나타나 피에트로의 개 옆구리에다 돌을 던지는 등 패악질을 하다가, 소설을 뒤흔들어버리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맡는다.


  “사비나는 당신을 조롱하고 있어요. 당신만큼 가난하지 않고 거칠지도 않은 청년과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당신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라고 일러줬어요. 당신을 괴롭히고 화나게 하라고…….”

  “누가? 사비나가?”

  “아니요, 마리아가요. 피에트로 베누, 마리아는 사비나를 질투해요.”

  “무엇 때문에?”

  “당신 때문이죠, 멍청이!”


  피에트로는 확 돌아버린다. 어여쁘고 마음씨 고운 사비나는 이 말 한 마디로 마음 속에서 거의 완벽하게 소거되고 이제 그는 주인 아가씨, 아름답고 풍만한 마리아와의 사랑을 꿈꾸며 키스 한 번 해보았으면, 몸을 한 번 만져봤으면, 하고 이루어질 리가 없는 허공을 밟기 시작한다. 마리아 역시 피에트로를 관찰해보니 잘 생기고, 정직하고, 튼튼하고, 일 잘하고, 돈 없는 거 빼고 어디 한 군데 빠지는 데가 없어 점점 호감이 쌓여가기 시작했던 차, 이들은 포도밟기와 압착기 작업부터 급격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피에트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리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키스하는 데 성공하고, 이때부터 일사천리 둘은 가망 없는 사랑을 시작하게 되니, 저 가시돋친 로사, 하긴 로사, 가시 없는 장미를 어디다 쓰겠는가만, 성격 좋지 않아 청년들한테 눈길 받는 법이 없었던 맹랑한 아가씨의 심통난 한 마디 때문에 두 청춘과 이어진 몇 명의 신세가 골로 가버리고 만다.

  말은 언제라도 흉기가 될 수 있다. 삼가고 또 삼가야겠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양날의 검. 아무쪼록 내가 한 말 한 마디, 내가 쓴 글 한 조각에 마음 상하신 분들은 사과를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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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26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남은 미남을 알아본다더니 골드문트 님도 피에트로를 알아보셨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26 07:11   좋아요 1 | URL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18 킬로그램의 살덩이가 몸에서 빠져나가니까, 얼굴이 홀쭉해지는 것이 십대 시절 모습이 다시 돌아왔다는 거 아닙니까! 주름이 좀 많아져서 아쉽지만 말입니다. 머리숱도 형편없어지고요. ㅋㅋㅋㅋㅋ
요즘 마트 가면 늘 하는 일, 쌀 20kg 짜리 한 번 들어보고 오는 거. 이만큼 빠졌단 말이지....하면서요. 고민은.... 맞는 옷이 없어서 늘 포대자루 같은 걸 걸치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다락방 2023-10-26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재미있겠다 재미있겠어. 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3-10-26 07:50   좋아요 0 | URL
재미있지만 추천할 정도는 아닌 선입니다.

잠자냥 2023-10-26 08:38   좋아요 0 | URL
그거 일전에 읽은 그거(제목 벌써 까먹음 ㅋㅋㅋ) 그거보단 재미납니다.

다락방 2023-10-26 09:43   좋아요 1 | URL
저도 제목이 생각 안나요. ㅋㅋ 형수를 사랑하는 자극적인 내용인데 세상 재미없었던 그 소설 말씀이시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0-26 10:15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ㅋ 와 아직도 생각 안 나. 무슨 갈대였던 거 같은데...

다락방 2023-10-26 11:45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ㅇ 들어가는 글자로 시작하는 사람 이름이 제목이었을 겁니다.

다락방 2023-10-26 11:46   좋아요 0 | URL
찾아보고 옴. 엘리아스 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0-26 11:48   좋아요 0 | URL
미쳐 갈대는 왜 나온 거죠? ㅋㅋㅋㅋㅋ
아 내가 심각하게 갈등했었나봐요. 이걸 끝까지 읽느냐 덮느냐...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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