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오빠 창비시선 396
김언희 지음 / 창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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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가 그 김언희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 김언희를 샀을지 안 샀을지 지금도 모르겠어. ˝눈사람처럼 귀여운 물방울의 목소리로 쓴 시˝를 말이야. 이상해, 속으로는 따라 읽겠는데 도무지 공감은 못 하겠더라고. 이거 내 책임 아니지? 그렇다고 해 줘. 괜히 폼 잡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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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아닌 사람 대산세계문학총서 172
샤오홍 지음, 이현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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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선집. 샤오쥔과 공동출판한 《고난의 여정》, 샤오홍의 단독 소설산문집 《다리》, 단편소설집 《소마차 위에서》와 《광야의 외침》 이렇게 네 권에 실린 소설 전편을 실었다고 한다. 이이의 작품은 연극으로 공연하기 위해 후에틴신이 각색해 희곡으로 만든 <생사장>만 읽어보았다. <생사장>은 지주와 소작인, 소작인도 소작인 나름이지 관리직 소작인과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노예급 소작인,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운 일본군과 앞잡이 등을 등장시킨 시대극이자 참혹극이었다.

  샤오홍은 1911년 헤이룽장성에서 유지 가문의 맏딸로 태어났다. 헤이룽장성. 우리말로 읽는 대로 발음하면 흑룡강성. 겨울이 되어 바람이 불었다 하면 바가지 만한 돌덩이가 날아와 말 머리를 때려 피가 철철 흐른다는 북간도 이야기를 외할머니한테 들었다. 맏이로 나왔지만 딸이란 이유로 냉대를 받으며 산 작가는 먼 친척을 따라 베이징에 가 중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족이 압력을 넣어 스무 살에 시골로 이사한 집에서 지내며 농촌생활을 경험한다. 이때 고난 속에서 허덕이던 농민의 생활상을 목도한 것이 샤오홍의 작가 생활에 중요한 자산이 되어 <생사장>은 물론 《가족이 아닌 사람: 이하 “가족이”》의 몇 작품에서 절절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가족이》에 실린 열아홉 편을 구태여 주제별로 구분을 하자면 특히 동북 지역의 농촌을 배경으로 ①지주에 의하여 심각하게 수탈을 당해 거의 노예수준의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폭력에 노출된 농민, ② 대 일본 전투에 참가한 군인이나 이들의 가족 및 탈영병, ③ 대일 투쟁이나 혁명을 위해 집을 건사하지 않고 떠나는 극빈자 출신 지식인 또는 의식화한 청년, 그리고 샤오홍 자신이 그리 했듯이 ④ 일본에 살려고 갔거나 다니러 가 적응도 하지 못해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젊은 여성 이야기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샤오홍을 읽으면서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우리나라 작가가 있었으니, 강경애. 자칭 우리나라 국보였던 양주동과 열애를 나누었고 샤오홍보다 두 살 언니인 강경애의 십팔번은 아무래도 적나라한 가난의 참혹상이라고 할 터인데, 부모가 정해준 남자의 아들을 낳았지만 가난에 찌들어 입양을 보내야 했던 샤오홍 역시 강경애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가난을 묘사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1930년대의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의 삶이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나 보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입에 풀칠이나 한다고 가솔을 이끌고 간도 행을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중남부, 서부 지역의 농민들한테도 동북으로 가면 땅이 기름져 먹고 살 만하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끝없이 지주에 수탈을 당했던 건 조선이건, 중국 동남부와 서부 지역이건 간에 다 거기가 거기였으며, 동북부라고 별 다를 게 있었겠는가. 이주 중국인 가운데서도 김동인 <감자>의 복녀가 틀림없이 있었다는 데 만 원 건다.

  《가족이》 속의 작품을 읽어보면, 1930년대의 샤오홍이 공산주의자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산주의자 동맹 또는 모임의 멤버였을 거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강경애를 읽을 때와 같이. 시절이 아직 대장정 중이었거나 막 끝났을 때이다. 정치적 확신이나 배경이 없이 이런 작품을 쓰다가 재수없게 국민당 정부에 발각이라도 나면 일신 상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때였다. 강경애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카프에 가입하지 않은 채 프로 문학에 헌신했지만, 샤오홍은 데뷔작 <아이를 버리다>를 발표하던 1933년에 공산당원 문인들의 조직인 “별극단”에 가입한다. 그래서 1942년, 결핵으로 숨을 거둘 서른한 해의 짧은 생, 십 년이 채 되지 못하는 문인 생활 내내 아직 유보 상태인 봉건적 사회의 계급 상황에 천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샤오홍을 읽은 솔직한 감상은, 이이가 재수없게 196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면, 나이 쉰다섯, 이제 중국의 중견작가로 터를 잡고 연륜이나 경험으로 보아 가장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할 시기에, 청소년 근위대/홍위병에게 머리 끄덩이를 잡혀 조리돌림을 당했을 거 같았다는 거. 하여간 중국의 인텔리겐치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문화혁명을 피해갔던 사람들이 행운아다.

  책은 재미있다. 작품의 주제야 위에서 이야기한 바이지만, 문학작품을 주제만 알고 넘어갈 수 있나, 교과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주제를 품은 스토리가 조금 낡았지만 하나하나 다 재미있다. 이 가운데 표제작 <가족이 아닌 사람>을 그중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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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0-12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올리신 글을 읽으면 자연스레 감자랑 소금이 떠올라요. 강경애 단편집을 다시 읽어볼까 마음도 들고요.

잠자냥 2023-10-12 11:27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엔... 강경애보다는 샤오홍이 좀 더 잘 쓰는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10-12 15:49   좋아요 0 | URL
감자랑 소금. ㅎㅎㅎㅎ
재치 만땅이셔요.

잠자냥 2023-10-12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에 몇 편만 읽고 참 잘쓴다.. 생각하고 일단 덮었는데 마저 다 읽어야겠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 저도 인상 깊었어요.

Falstaff 2023-10-12 15:50   좋아요 0 | URL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참혹한 가난의 광경은 읽고 싶지 않아지더라고요.
혹시 크누트 함순 때문 아닌가 몰라요. 웬수 같은 함순....
 
새를 쏘러 숲에 들다 윤택수 전집 1
윤택수 지음 / 디오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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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택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시인이(었)다. (2023년) 9월 12일 시인 장석주가 한국매일경제신문에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편의 시”라는 제목의 컬럼을 읽기 전까지. 장석주는 컬럼에서 “내가 읽은 <새를 쏘러 숲에 들다>에는 낯선 상상력으로 빚은 무섭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시편이 그득했다.” 라고 하면서 “이 가을 아침엔 시인이여, 불량식품처럼 상한 언어 한 무더기 말고, 당신의 어깨 위에 까마귀를 앉히고 ‘이 피를 맑히려면 백년이 걸리리’라고 노래하라!”, 느낌표! 하나를 콱 찍었다. 장석주 본인도 1980년대 초반부터 《완전주의자의 꿈》 등으로 유명 인기 모더니즘 시인의 반열에 올랐던 시인인 만큼 시에 관한 한 칭찬이 박할 지도 모를 터인데 이렇게 상찬을 하니, 기사를 읽자마자 득달같이 읽어볼 수밖에.

  윤택수. 1961년 대전생. 충남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3사단 백골부대 포병대에서 군역을 마친 거 같다. 동문 선배로 보이는 시인 윤형근의 발문을 인용하면, 학교를 졸업한 윤택수가 홀연 자취를 감추더니 몇 년 만에 나타나 그동안 울산에서 용접공을 일했다고 말한다. 그의 시집을 읽으면 누구나 알겠지만 윤택수가 용접공으로 일했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노동운동 같은 것에 투신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먹물의 삶에 적응하기 싫었든지, 적응하는데 애를 먹어 선택한 길 가운데 하나였든지 할 것이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보이지 않았단다. 다시 한번 불쑥 등장해서 하는 말이, 이번엔 원양어선을 탔다고. 충남 홍성에 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홍주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도 몇 년 했고, 서울로 올라가 몇 잡지사와 출판사의 편집장도 한 모양이다. “전적으로 시를 읽고 판단하면” 마흔이 가깝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혹시 이이가 성소수자여서 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윤택수가 택한 마지막 호구지책은 학원 강사. 대전에서 학원 강사를 하다가 잠깐 쉬고 서울로 올라가 세월을 보낸다. 돈이 떨어질 만하면 다시 고향으로 가 학원 강사를 하고. 그러다가 겨우 서른아홉 살 즈음이었던 2000년 여름, 학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뇌졸중이 쳐들어와 강단에서 쓰러지고 만다. 이후 꼬박 2년 간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시인. 참 고단하게 살다 갔다. 등단도 하지 않고 그동안 써 둔 110편의 시를 선배 윤형근에게 버리듯 넘겨준 윤택수. 등단, 소위 시인 면허증이 없이 그저 몇 동인지에만 시를 발표했을 뿐이라 이 시집 《새를 쏘러 숲에 들다》가 그의 첫 시집이며 유고시집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그의 마흔 살 평생이 이 한 권에 실려 있을 터. 20대 초반의 치기도 들어 있고, 시대에 대한 부채감도 있으며, 시와 시를 쓰는 사람에 대한 탐색도 당연히 실려 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삶의 장소, 군대, 울산의 용접공, 원양어선 선원, 중학교 교사의 경험 같은 것들 모두.


  윤택수에게 시와 시인이란 무엇일까? 그는 제일 앞에 실린 시 <재난과 기아>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로 구애하고 말로 사업하고 말로 반란 일으킨다

  밀하지 않는 자는 망자와 신뿐이다

  정치에 관한 말 분배에 관한 말 절망에 관한 말을 하면 그들이 노한다

  그들은 노예의 말을 활용하지 않는다

  말을 다루는 기술은 먹을 수 없는 새를 쏘는 기술이다” (p.11 부분)


  그래, 시는 말로 하는 것이지. 말로 세상에 안 되는 게 있나. 정치, 분배, 절망, 그리고 인용하지 않은 시의 후반부에 나오는 불안하고 가냘픈 것, 지친 자와 지루한 자에게 하는 질문, 대지와 대기에 상감象嵌한 증오 같은 것들도. 시인이 시를 쓰는 것, 즉 말하는 건 자유다. 하다못해 세금도 안 낸다. 그러나, 구애하고, 사업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건 사실 알고 보면 “먹을 수 없는 새를 쏘는 기술”이란다. 이게 무슨 뜻일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하나는 죽자사자 그렇게 말로 수다한 사업을 해봐야 나와 내 가족들 목구멍으로 들어갈 양식이 되지 못한다는 거. 다른 하나는, 공들여 정치와 분배와 절망에 관한 말을 했는데 정작 시라는 새를 총으로 쐈더니 새는 이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다 흐트러졌다는 거.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돈이 안 된다는 건 비슷한데, 두번째 것은 아예 “새”라는 시가 되지도 못한 그냥 헛소리로 끝났다는 것이니 더 참혹하달까.

  이 “먹을 수 없는 새를 쏘는” 행위는 표제시 <새를 쏘러 숲에 들다>에서 더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총신에 온기가 쌓인다

  먹지도 못할 새라며 내심 언짢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쟁쟁해오고

  숲의 끝을 돌면서

  무슨 놈의 새가 깃 스침이 그리 눅눅한지

  집으로 돌아가서 책이나 볼 것이었다

  (중략)

  새는 어리고

  구우면 고엽같이 뼈째 부스러진다

  버려진 농막에 엎드려

  총탄을 세고

  소매에 튄 피를 털어내면

  늦은 불면이 온다  (p. 38~39. 부분)


  여기서 “먹을 수 없는” 상태는 위에서 이야기 한 두 가지 가운데 더 참혹한 경우다. 구워봤자 총을 맞은 새는 고엽같이 뼈 째로 부스러져버렸으니. 쏘려면 큰 새를 쏴야 하지만 아무나 다 큰 새를 쏘면 가뜩이나 세상에 넘치는 시인들 전부 랭보일 텐데 그러면 또 재미없지.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 올라 맞아도 아프지 않을 돌 있으면 한 번 던져보시라. 요즘엔 던졌다 하면 시인이나 화가가 맞을 테니까.


  윤택수가 1961년생. 빠른 61년생이면 79학번, 보통이면 80학번, 눈치를 보니까 재수는 집에서 안 시켰을 거 같다. 1980년 불행한 시절에 윤택수는 안전한 대전에서 흉흉한 소문을 통해서만 남도에서 있었던 잔혹한 사건을 듣고 크고 큰 부채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핏빛 소식은 천생 서정시인이고 모더니스트인 윤택수에게도 시절의 부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비 내리는 밤, 소주 한 잔 걸치더니 애꿎은 문을 열어 들이치는 빗속에서 울며 노래한다.



 



  나는

  이 밤에

  깊이 감상에 빠지고

  제 감동에 겨워 전전긍긍 살아가는

  시인이다

  나도 때로는

  격시를 쓰고

  절망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는

  힘찬 시도 쓰고 싶지만

  적에 의해 가슴에 아픈 못이 박혀

  철철 피를 흘려도

  개천에 버려져도

  나는 장엄하게 죽노라 호언하는

  용자도 되고 싶지만

  이 비 내리는 밤

  문을 열고

  울음 우는

  병신 같은 시인이다

  개새끼다

  나는  (전문)



  이렇게 노래할 수 있지. 그러나 이제, 물론 십여 년이 흐른 후에도 그러했겠느냐만, 얼마간 시인은 계절의 여왕 5월이 오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독후감이 길어지니 그건 그냥 넘어가자.


  그의 직업인 용접공과 원양어선 선원과 교사의 경험에서 나온 것들을 보자. 용접공을 할 때의 울산은 6.29를 기점으로 사업장마다 노동조합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즉, 새로운 노조의 탄생보다 기존에 있었던 사용자를 위한 어용노조의 개편 투쟁이 훨씬 격렬했다) 전국적으로 노동쟁의를 시작해 연간 임금 인상률이 20퍼센트에 육박하던 시기의 바로 전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최고조의 상태였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며, 아무리 모더니즘 시를 주창하는 시인이라도 현장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별곡 3>에서 노래하기를


  그해 여름의 울산은

  침잠의 뻐쓰와 침묵의 노동조합이여

  라디오 뉴스를 들음이어

  잘못하여 뉘우치고 잘해서 추억함이어

  무슨 큰 사랑인가 대학 못 간 청춘들아

  빨래도 마르지 않고 자꾸 눈물나네 용접공들아

  (중략)

  하느님 당신은 용접공이십니다

  찢어진 둑들을 때우시고 비인 가슴들을 때워주소서

  우리의 욕심들아

  아멘 청춘들아

  아멘 아멘 용접공들아

  선생께서는 어디로 가려시는가  (후략. P.52~53. 부분)



  윤택수는 또 <박물지 12>에서 자신의 교직 경험을 깊게 반성하고 있다. 스스로 나쁜 교사였다는 반성. 그래서 정식 교직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 그랬다면, 잘했다.


  교육은

  피교육자의 교육자에 대한 열광과 찬탄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수수되는 노래이다

  노력에 의한 숙련이나

  시간의 온축에 의한 노회만으로 교사가 되어

  피교육자들을 판단하고 추장하고 징계하는 예를

  우리는 흔히 목격하거니와

  우리들 스산한 추억의 대부분은

  나쁜 교사들에게서 왔다

  내가 좋은 예이다

  용서해줘

  제발 잊어줘  (p.148 전문)



  이 시집이 시인의 첫 시집이면서 유고시집, 그러면 젊은 시절의 연애 감정도 하나 인용해야 직성이 풀리겠다. 그렇지? 비록 마흔이 되도록 장가 한 번 들지 못하고 총각귀신이 되었을지언정 어찌 마음 속 흔들림 한 번 없이 시절을 보냈겠는가. 달달한 시 한 수 읽으며 독후감을 끝내자.



  심홍빛 나라



  들국화 핀 비탈이 보이는 날에는 편지 못 쓰네

  무슨 상념의 거품이 닿은 솜털이여 가슴 뛰네


  그 여름의 아가미의 스러져가는 열망조차 낙엽 지네

  오래오래 참아온 눈물의 향기 스미네


  아득한 나라의 추목秋木 가지에 놓이는 연흔漣痕이여 미치겠네

  들국화 핀 비탈이 보이는 날에는 편지 못 쓰네 (전문)



  * 연흔漣痕: 바람에 의하여 모래나 눈 위에 만들어지는 물결 모양의 흔적 (네이버 검색,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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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다 읽었다. 작년 10월에 시작해서 오늘, 9월 13일에 끝냈다.

  20여 년에 걸친 기번 필생의 역작 <로마제국 쇠망사>. 제목 그대로 쇠망, The Decline and Fall, 쇠퇴는 전성기 때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로마의 쇠망은 5현제,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기부터 서로마 제국이 문을 내리고,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는 순간까지의 역사다.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형제가 세웠는데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물루스.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동로마제국을 만든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제국의 용맹한 군인 황제답게 전세가 불리해지니 “내 목을 쳐 줄 기독교인 없소!” 외치며 성벽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난입한 적군 말단 병사의 창에 찔려 죽은 마지막 황제 역시 콘스탄티누스. 동로마제국은 그렇게 끝난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갈 곳이 없다.

  동로마제국은 <로마제국 쇠망사 5>에서 사실상 이미 끝난 상태였다. 이제 다시 중흥의 기회도 없을 만큼 쇠약해진 제국. 그래도 살 수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 비잔티움은 로마의 교황에게 인공호흡을 부탁한다. 비티니아에서 나라를 일으킨 투르크 족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십 년이 지나니 이제 비잔티움의 턱 아래인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 끝까지 바짝 올라와, 아직 정식으로 적대적 행위를 한 적은 없지만 상당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막강한 투르크 군대가 마음먹고 짓쳐 들어오면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은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황제 알렉시우스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기의식이 궁내에 퍼져 있을 때,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은자 페트루스가 예루살렘의 성묘 순례에 나섰다가 무슬림에게 탄압받는 기독교와 기독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도무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자기가 무슨 예수라고 저 황야에 앉아 40일 동안 옴마니밧메훔, 도만 닦은 줄 알았더니,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망가지는 걸 보고 비잔티움에서 군사를 보내 어떻게 해달라고 동방교회의 총대주교에게 하소연을 했다. 총대주교는 동로마제국 황제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나약한지 오히려 은자에게 오히려 넋두리를 하는지라, 은자 페트루스가, “좋소! 그렇다면 내가 대의를 받들어 유럽에서 군대를 일으켜 데리고 오겠나이다.” 큰소리 뻥뻥 치고 그 길로 정말 유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은자 페트루스는 왜소한 체구에 못생긴 얼굴, 꾀죄죄한 입성을 했으나 눈빛이 형형하고 무시무시한 웅변술을 장착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황야에서 은둔해가며 도만 닦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이는 유럽을 떠돌며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무슬림들의 무도한 행위에 관해 침을 튀기 시작했는데, 이 이야기가 교황의 귀에도 들어가, 솔깃해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 광신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확실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기가 산 광신도 페트루스는 주로 북 이탈리아와 인접한 프랑스, 독일 지역을 다니며 그의 설교에 현혹된 온갖 동네 건달, 양아치, 범죄자들이 먼저 성지 회복을 주장하며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이 때가 1090년대. 불과 십여 년 전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교황이 기거하던 한 겨울 산골 카노사 수도원까지 맨발로 걸어와 죄를 고백하고 사과했을 정도로 기독교의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물론 결코 수모를 잊지 않은 하인리히 4세가 나중에 로마를 점령했고, 위협을 느낀 교황은 (예수의 대행자도 죽는 게 무섭긴 한가 보다) 남부 이탈리아로 도망하다가 비참하게 죽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독교의 전성기였다는 말씀.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공의회를 열고, 성 베드로의 깃발 아래 뭉친 수만 명의 군사를 최고 지휘자인 툴루즈의 백작 레이몽이 이끌고 1096년 8월 15일에 출병하기로 결정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6>은 이렇게 책을 열자마자 십자군 전쟁으로 시작한다. 1차 십자군은 얘기한대로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 출발한 정규군을 일컫기도 하지만 페트루스의 입놀림에 홀딱 넘어가 이들보다 먼저 출발한 건달들을 말하기도 해서, 이 건들건들 거리기만 하는 부랑자들이 자기 영토를 관통해 지나가면서 주민들한테, 혹시 알아, 궁전을 향해 무슨 폭력을 구사할 지 몰라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해 말 그대로 거지꼴이 되어 비잔티움에 도착한다. 비잔티움에 도착해도 마찬가지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는 궁리를 하다가 건달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곧장 진격하라고 바람을 풍풍 내주면서 지나가는 길에 함께 싹 쓸어버린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거뭐쥔다. 동시에 한 방에 걱정이 없어졌는지라, 여태 로마를 향해 굽신거리면서 도움을 요청했던 태도를 싹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안면을 여러 모습으로 바꾸는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황제 시절은 아니더라도 네 번째로 십자군 원정을 온 라틴 사람들에게 그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당한다. 이게 첫 콘스탄티노플 함락. 그래도 황제의 대는 끊기지 않지만 두 번째엔 결코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어서 등장하는 흥미로운 주제는 칭기즈칸과 몽골군이 중국에서 폴란드까지 세상을 정복해버리는 일. 정말 역사의 거대한 한 페이지다. 여태 알기로 이때 몽골 왕가에서 초상만 안 났다면 신성로마제국이니 프랑스, 에스파냐까지 몽땅 거덜이 났을 거라는 것. 에드워드 기번은 그런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칭기즈칸의 손자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의 제위에 등극한 후 곧장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짓쳐 나가더니 난데없이 호시탐탐 비잔티움을 한 입에 먹으려 초고추장을 버무리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인 재미있는 스토리를 소개한다.

  지금의 터키에 터를 잡은 오스만 투르크. 이 사람들은 무슬림을 믿는 회교도지만 아라비아 반도, 그리고 페르시아와 관계없는 인종이다. 책에 의하면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고 살던 타타르 족이 훈족 등에 밀려 조금씩 이동해 정착한 민족이라고 한다. 그동안 투르크 족은 오스만, 오르한, 무라드 1세, 바야지트 1세 등을 거치며 탄탄한 군사강국이자 독실한 회교국을 거듭나 해협 건너 자리 잡은 휘황찬란한 문화의 보고,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가문의 과제로 남겨 놓은 상태였다. 이제 때가 무르익어 숟가락만 대면 저절로 꿀꺽 삼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무르익었는데, 난데없이 저 동쪽에서 티무르가 쳐들어온 거였다. 당대 서아시아에서 만난 최고의 영웅이자 호적수. 티무르 대 투르크의 왕 바야지트. 아무리 투르크라 할지라도 역시 칭기즈칸의 손자에겐 부족한 상대여서 싸움에 지고 바야지트도 포로로 잡히고 만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티무르는 바야지트를 극진하게 대우하고, 내가 이긴 건 우연이었을 뿐이오, 거 참, 립서비스도 맛깔나게 해주고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투르크는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치르느라 수많은 병력도 잃었지, 졌으니 전쟁배상금도 함빡 물어줬지, 부심에도 깊게 스크래치 가버렸는데, 원래 이럴 때 죽어라, 죽어라 하는 법이라 바야지트가 죽자마자 아들들끼리 내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중에 마호메트 1세가 권력을 잡고, 그의 손자 마호메트 2세 세상이 되어야 오스만 투르크는 그때까지 역사상 가장 커다란 대포를 말 마흔 마리가 끌게 한 채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 앞마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티무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50년 뒤로 미뤄진 것. 에드워드 기번은 말한다. “비록 우발적이지만 이 중대한 공헌이 바로 이 몽골 정복자의 일생과 인격을 소개하는 데 한 장 전체를 할애한 이유다.”

  비잔티움이 멸망한 후에는 당연히 그곳에서도 있었을 후손 몇 명에 의한 (언제나 실패하고야 마는) 복귀운동. 그리고 20년 동안 썼으면서도 그래도 하지 못한 이야기. 비잔티움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내 로마에서 있었던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의 성공과 몰락,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 정확하게 말해서 교회 수장들이라는 “인간”들의 역겨운 권력 투쟁, 더 역겨운 호색 이야기, 그리고 20년 과업을 마치는 짤막한 소감으로 채운다. 어쨌든 이것으로 여섯 권 다 읽었다. 격렬하게 운동하고 난 상쾌함 같은 기분. 그래 이 맛이야. 이 맛 때문에 두꺼운 책을 읽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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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06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화요일, 윤택수 <새를 쏘러 숲에 들다>
목요일, 샤오홍 <가족이 아닌 사람>
금요일, 알레호 까르뻰띠에르, <잃어버린 발자취>

stella.K 2023-10-06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축하합니다. 완독하시다니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학교 때 읽어 보라고 권장도서 였는데 저는 감히 손도 못ᆢOTL

Falstaff 2023-10-06 16: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1년이나 걸렸는 걸요 뭐. 그냥 살살 읽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얘기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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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인물 소개를 하는 게 새삼스럽다. 1922년생, 2010년 몰. 미국의 역사학자, 정치학자, 사회비평가, 사회운동가, 극작가로 <미국 민중사>의 저자다. 베트남 전쟁 반대를 비롯해서 모든 평등과 평화를 위한 운동에 참가한 골수 진보 좌파 인물.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의 원래 제목은 <Marx in Soho>다.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을 당해 프랑스에서 장가들어 살다가 치사하게 조국이, 얘 위험한 애래요, 프랑스 정부에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벨기에로 갔고, 거기서도 추방당해 런던으로 옮겨 진짜로 살던 곳이 ‘소호Soho’다. 진은 미국과 현대를 무대로 마르크스를 초청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무대를 영국의 Soho가 아니라, 마침 뉴욕에도 Soho라는 동네가 있어서, 마르크스가 귀신이 되어 뉴욕의 소호에서 예수도 못한 재림을 하는 것으로 정했다. 여기서 “예수의 재림”은 나 같은 유물론자가 불경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귀절이 아니다. 진이 작품 속에서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 한 말을 따왔을 뿐. 하워드 진은 열일곱 살 때 처음 <공산당 선언>을 읽은 이후에 마르크스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연히 반은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 아니면 적어도 마르크스 주의자로 살다가 1989년에 충격을 먹는다. 세상의 모든 볼셰비키는 쿠바나 북한 등 극도로 좁은 땅에서만 억지로 숨을 유지한 채 근근이 명을 이어가고, 소비에트, 동독, 동유럽, 남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한 순간에 증발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근데 말은 정확하게 하자. 공산주의가 사라졌다고?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진 건 확실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내 생각을 밝히자면, 인류는 공산주의를 한 번도 실천해본 적이 없다.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가,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공산주의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태까지 몇 번 강조한 거 같은데,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를 흔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해서 공산주의 체제는 애초에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심각한 오해다. 20세기 이후 공산주의를 하겠다는 국가에는 하나같이 공산주의를 빙자한 골통 파시스트들이 창궐, 번창했을 뿐. 카를 마르크스는 애초에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봤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하나. 천생 마르크스 주의자인 하워드 진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보고 있다.

  여태 인간의 역사는 한 번의 공산주의도 실현시키지 못했듯이, 앞으로도 공산주의는 결코 인간의 손으로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하게 순진하고 낙천적이지만 바쿠닌이 옳을 지도 모른다. 모든 특권과 특권적 위치는 인간의 지성과 마음을 죽이는 것이라고 애초에 권력 자체를 부정했으니 말이다.


​  이 작품은 마르크스의 유령이 (1999년 작품이니)20세기 말 뉴욕에 나타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모노드라마다. 그리하여 그라운드 제로 이전인 1999년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하워드 진은 공산주의의 새로운 실천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 이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혁명이 유효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인류 역사에 마지막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고, “마지막” 혁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말 하워드 진의 전망이 옳을까? 나는 어떻게 1999년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99년이라면 당연히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발호하기 시작해 자유무역협정 같은 것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절이다. 진은 이런 현상을 미국, 아니다, 세계의 모든 부를 극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는 반면 부자/자본가들은 대다수 임금노동자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착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리하여 딱 이렇게 쓰여 있지는 않지만 모든 (주식회사를 포함한)개인(들의)기업은 사회적인 악이라고.

  언제나 문제는 권력이다. 마르크스의 입을 빌린 하워드 진은 새로운 공산주의의 모델을 프러시아-프랑스전쟁 당시의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독자적으로 나폴레옹 3세를 퇴위시키고 수립했던 “파리 코뮌”을 제시한다. 프랑스 제3 공화국이 다시 왕정을 복고하고 독일과 굴욕적인 정전협정을 맺으려 하자 파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궐기한 사건이다. 당시 프러시아 출신으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여우 재상 비스마르크가 당당히 군대를 파리에 입성시켜, 시민들로 하여금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음을 시위만 하고 살짝 빠져버렸다. 보불전쟁을 프랑스 측에서 발발하게 만들고 정작 전쟁이 터지자마자 초장부터 프랑스를 싹 쓸어버렸던 비스마르크는 파리 시민들을 현혹시키는 데도 성공하여, 시민들은 객관적 전투력의 불리에도 불구하고 치욕적인 조건의 정전협정에 크게 불만을 갖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여간 이렇게 정부를 뒤집어 엎은 파리 코뮌은 불과 2개월 열흘 만에 정부군의 진압으로 3만명을 한 자리에서 총살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진은 코뮌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평가하지만, 그의 말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코뮌이 두 달이 아니라 반년, 일년을 가도 마르크스가 원했던 선한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누군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 필연이기도 하다. 아니라면 단박에, 적어도 일정한 가속도를 가지고 코뮌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이리 상태로 떨어질 것이란 점은 역사를 통해 너무도 많이 보아왔지 않나. 저 멀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좋다, 코뮌이라 하자!)부터 시작해서.

  만일 극소수의 부자들이 전체 부의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들의 부를 합리적이고, 합법적이고, 합상식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위 몇 퍼센트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고,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효과적이며 부작용도 적을 것이다. 이게 21세기의 진보, 21세기의 좌파가 따져야 할 과제 아닐까 싶다. 자신의 평생 소원이 강남 건물주인 사람은 이제 좀 왼편에서, 진보에서 꺼져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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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10-05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워드 진이 이런 것도 썼군요.
바쿠닌의
‘모든 특권과 특권적위치는 인간의 지성과 마음을 죽이는것‘이라는 말 확 와닿네요.

Falstaff 2023-10-05 16:09   좋아요 1 | URL
저도 진의 문학작품을 읽을 줄은 몰랐습니다.
바쿠닌은 덩치도 그렇고 우짜 저 프랑스 혁명기의 당통을 연상시키기도 하더라고요.

yamoo 2023-10-05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폴스타프 님의 서재에서 하워드 진의 리뷰를 보는 날이 있군요!!!ㅎㄷㄷ

대체로 민주주의 반대를 공산주의로 알더라구요. 민주주의 반대는 전제주의인데 말이죠..^^;;

그나저나 하워드 진이 이런 책도 썼군요. 근데 별3개라..흠..

Falstaff 2023-10-05 16:13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래서 일단 오래 살고 보는 겁니다.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제도는 자기네 주의가 아닌 다른 건 몽땅 적...아닌가요?
이 책의 편집까지 감안했으면 별 하나 더 뺐을 겁니다.

페넬로페 2023-10-05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완전한 패배나 포기보다는
로맨틱한 생각일지라도 혁명까지의 생각을 잃지는 않아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요즘 제가 자꾸 패배주의자가 되는 기분이라 힘이 빠진 상태이거든요.

Falstaff 2023-10-05 16:17   좋아요 2 | URL
˝모든 기업은 사회의 악˝이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제도의 개편,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의) 의식의 전환 같은 것도 혁명의 하나 아닐까 합니다만.

저는 이제 뭘 하던 간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부지런히.... 이렇게는 안 살려고 합니다. 아득바득 살아서 뭐하게요. 그래도 얼른 기운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바람돌이 2023-10-05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워드 진 선생이 소설을 쓴 줄은 처음 알았네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듯한데 그걸 이런 식으로도 쓴게 아닐까 싶고요. ㅎㅎ 맑스가 파리코뮌을 굉장히 크게 평가했죠. 하지만 그 코뮌이 좀 더 오래갔다면 아마도 Falstaff 님 말씀대로 되지 않았을가 생각합니다. 맑스 역시 그 시대의 한계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죠.

Falstaff 2023-10-06 07:29   좋아요 2 | URL
옙.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보기에 파리 코뮌은 정말로 찬스라고 생각하기 쉬웠을 겁니다. 문제는 하워드 진이 마르크스를 20세기 말의 뉴욕으로 모셔다 놓고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하게 만든 데에 있습지요. ㅎㅎㅎ
시간과 돈이 있어도 이 책은 굳이 읽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