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없는 사람들
하산 알리 톱타시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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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꽤 그럴듯했다. 튀르키예 사람 하산 알리 톱타시더러 발칸 쪽에서는 ‘튀르키예의 카프카’라고 한단다. 읽어보면 정말 그렇다. <성>과 <심판>을 합친 듯한 느낌. 카프카가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숱한 후배들이 그를 모사하고, 그와 비슷하게 세상을 조망하려 하고, 그의 세계를 다시 구현하려고 힘을 쏟으니. 그런데 톱타시는, 쇤네가 뭘 알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저 읽은 감상으로 말씀드립자면, 과하게 카프카의 세계를 모사하는 바람에 찬쉐나 크러스너호르커이처럼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거 같았다. 그리하여 요샌 이름 좀 났다 하면 어김없이 명단에 오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영원히 걸지 못할 것이다. 놀랍지? 어떻게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한 극동의 일개 서생이 나름대로 튀르키예 소설의 대표선수 가운데 한 명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지? 이유가 있다. <그림자 없는 사람들>을 재미없게 읽은 이유는 ①작품 속에서 카프카가 너무 구체적으로 떠올랐던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었지만, 지금 독후감을 쓰기 전에 하산 알리 톱타시가 누구인지 구글검색 해보니, 세상에, ②2020년 12월에 성추행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였는데 자신이 톱타시에게 성추행을 당했노라고 선언한 여성이 약 스무 명에 달해, 그동안 톱타시의 책을 출판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던 에베레스트 퍼블리케이션스마저 전속계약을 파기할 정도였으니, 이런 작가를 다분히 정치적 성향이 돋보이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아무리 톱타시의 작품이 좋더라도 겁도 없이 상장과 상금을 던져줄 리 없다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출판목록을 보면 2020년까지 15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2020년 이후로는 단 한 권도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그는 튀르키예의 포스트모던-모더니스트, 튀르키예의 카프카로 명성을 떨쳤으나 결국 타의에 의하여 절필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16년부터 영어권으로 번역 출판되기 시작해 이제 잘 하면 돈방석에 올라갈 수 있을 찰나에 그놈의 손모가지 때문에 인생 거덜난 거다. 이런 성추행과 혼외 연애는 감출 수 없다. 조물주는 사람의 입을 그렇게 무겁게 디자인하지 않아서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날 일, 아예 시도할 생각도 않는 것이 훗날 동네방네 사면팔방 쪽팔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거 뽀록나면 진짜 쪽팔릴 거 같다. 나 같으면 이민간다.


  튀르키예 작가라면 대개 이스탄불 근처에 살고,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근방을 무대로 하는 작품을 연상하게 된다. 톱타시는 그러나 더 동쪽, 수도 앙카라에서 가까운 작은 도시 바클란에서 태어나 자란 58년 개띠 아저씨다. 작품해설에서 바클란을 그냥 소도시라고 해 두었는데, 소설의 무대는, 만일 바클란이 정말 작은 ‘도시’라고 한다면, 이 도시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황량한 마을, 책 속에서는 편의상 읍이라고 했을 뿐인 오지, 한쪽으로는 마치 벽wall같은 절벽이 서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평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는, 치욕스럽게 신과 국가에게 버림받은 곳이라고 무려 16년째 역임하는 읍장이 스스로 평한 삭막한 곳이다. 만일 이 읍에서 무슨 일이나 사건이 벌어지면, 읍장은 말을 타고 적어도 하루 이상을 가야 도착하는 도시, 앙카라 급인지 바클란 급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도시의 관청에 가 일/사건을 보고하고 <성>에서 측량사가 그러했듯이 그저 말로만 알았다는 대답만 들을 뿐 아무런 대책이나 지시나 공문 없이 다시 터덜터덜 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그래도 튀르키예는 아무리 독재정권이 수십년 동안 권세를 잡아도 읍장도 선거를 통해 뽑는 지방자치가 활성화했던 모양이라, 이번에도 읍장이 또 연임에 성공했다. 그동안 읍장은 4년에 한 번씩 당선 축하 파티라기 보다 자축하는 의미에서 대낮부터 느긋하게 구운 닭과 파프리카를 안주로 잔뜩 라크(술)을 마셔대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읍에서 제일 먼저 실종된 사람은 이발사 즐근 누리였다. 읍장이 처음으로 읍장 선거에 당선하여 당선을 자축하기 위해 라크를 마시려 할 때, 즐근 누리의 안사람이 읍장을 만나러 집으로 쳐들어왔다. 여사님 하는 말이,

  “이 화상이 어제 이발질을 잘 하다가 난데없이 ‘내 영혼이 오그라든다!’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집에서 뛰쳐나갔지 뭡니까? 여태 돌아오지 않아 동네사람들하고 온갖 곳을 뒤져봤는데 보이지도 않는 거예요. 아마 대처로 내뺀 거 같은데 그러면 세 아이와 쇤네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깜깜무지하니 읍장님께서는 어서 제발 제 서방을 찾아주시든지 어디서든 그 화상을 끌고 오십소서.”

  누리가 왜 실종됐을까? 누가, 어느 기관이 슬쩍 접근해서 납치해간 걸까(K처럼)? 이발소 바깥에 한 발을 딛자마자 딱정벌레는 아니고 땅강아지로 변신해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갔을까? 주민들은 누리의 실종 뒤에 엄청난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실종과 비밀을 연상하자마자 한 순간에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진다. 그리고는 틀림없이 어떤 종류가 됐건 비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제 읍장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말을 타고 적어도 하루 이상 먼 길을 떠나 도시에 도착해 상급기관에 들러 누리의 실종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강구해달라고 하지만, 도시의 관리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정말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건 아니고, 도무지 <성>의 여관에 틀어박힌 관리처럼 엉뚱한 말만 해대고 거의 쫓아 보낸 거다. 관청 하는 일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은 읍장은 도시의 거의 모든 커피집, 목욕탕, 여관, 이발소에 들러 ‘즐근 누리’라는 이름과 생김새와 체격을 말하고 보는 대로 집에서 애타게 찾고 있다고 얼른 돌아오라 말해달라고 부탁한 후 다시 말을 타서 하루 이상 걸려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을의 한 방향엔 여전히 건조한 먼지들만 풀풀 날리고, 아주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우편배달부는 아무런 소식도 가져오지 않는다.

  읍민들은 동요한다. 즐근 누리는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시체가 된 지 오래지만 공식 기록부에는 트럭 운전수로 기록했을 거야. 전국을 떠도는 직업. 주소 없는 직업이잖아. 그런데 도무지 풀지 못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국가는 누리를 제거할 가치가 있다고 봤을까? 사실을 알고 보면 즐근 누리의 정체가 K라서? 트럭 운전수가 됐다는 말은 누구한테 들은 거야? 도붓장수가 그러던데. 다시 주민들이 머리를 굴린다. 만일 누리가 트럭 운전수가 됐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도붓장수가 틀림없이 국가 정보원이라는 증거야.

  이때 이슬람 지도자 이맘이 등장해 사람들을 꾸짖는다. 다들 정신이 나갔구먼! 도붓장수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은 게 벌써 몇 년 짼데! 그러나 도붓장수를 입에 올린 몇몇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를 보았다고 코란에 대고 맹세를 했던 거였다. 이야기는 갈수록 꼬이기만 한다.


  몇 년이 흐르고 새로운 이발사가 마을에 도착한다. 평온한 모습이지만 사형집행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과거가 지워진 인물. 이이는 읍장에게 누리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형집행인의 눈길로 누리의 아내를 40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 바라본다. 당연히 이이가 실종된 즐근 누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웃에 사는 구두장이는 생각한다. 누리가 모두 알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머나먼 어딘가에 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읍장은 마을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고, 누리의 아내는 누리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이발소를 써도 좋다고 승낙한다.

  그리하여 사형집행인의 눈길을 가진 이발사가 몇 년에 걸쳐 이발소를 운영하고, 귀머거리 아이를 조수로 두었는데, 하루는, 하필이면 화자 ‘나’가 이발소에 대기 손님으로 기다리고 있던 날, 이발의자에 앉은 손님의 얼굴에 비누칠을 잔뜩 해 놓은 상태에서 면도날이 변변치 않은 것을 발견하고 조수에게 얼른 달려가 면도날을 사오라 지시한다. 그러나 소년은 이발소를 나가더니 감감무소식. 핏대가 오른 사형집행인의 눈길을 가진 이발사가 조수를 찾으러 나가더니 그도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소설 속에는 몇 건의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실종자가 여성, 특히 미혼일 경우에는 누명을 써 읍장과 읍의 사실상 경찰 역할을 하는 파수꾼에 의하여 고문을 당해 정신이 헤까닥 돌아버리는 청년도 생긴다. 그러다가, 세상에나, 작품이 끝날 때까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이발사 즐근 누리가 누더기 꼴을 하고 돌아오고, 헤까닥 돌아버린 청년의 정신을 돌아오지 않은 채 허리가 잘라져 죽는 등, 실종에 이은 누더기 차림의 귀향과 여러 형태의 죽음이 마을에 내려 앉는다.

  이게 다다. 포스트 모던. 튀르키예의 카프카라기 보다 그냥 카프카의 사생아. 사생아라서 너무 닮았다. 앗참, 실수. 요즘 시대에 사생아라는 표현은 무례하다. 사과한다. 카프카의 체세포 복제품이라고 바꿔 말하겠다. 이 말도 먼 훗날엔 무례한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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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27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평점은 높게 주셨는데요? 깐깐한 폴님께서 그 정도로 주셨다면 꽤 괜찮다는 말인데 체세포 복제도 능력인 거 같습니다.
근데 사생활이 문란하네요.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절대로...ㅋㅋ

Falstaff 2025-03-27 15:37   좋아요 1 | URL
옙. 꽤 그럴 듯합니다. 문장이 재미가 없더라고요. 성추행만 아니었으면 몇 권 더 읽어볼 텐데 거 참. 하긴 뭐 이런 인간 말고도 읽을 책은 무지하게 많으니까요. ㅋㅋㅋ
 
M/T와 숲의 신비한 이야기 대산세계문학총서 193
오에 겐자부로 지음, 심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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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이다. 우리말로 번역 출간하는 족족 읽는 편인데, 물론 소설작품에 국한하지만, 웃기게도 최근에 읽은 오에가 데뷔작인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다. 이때 오에의 나이 스물셋. 그동안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작품들만 줄곧 읽는 바람에 오에 겐자부로라고 하면 탄탄한 조형미를 바탕으로 하는 서사의 모범적 건축가로 생각했었는데 데뷔작은 또 얼마나 감각적인 문장으로 메웠는지 깜짝 놀랐다는 거.

  그래도 누가 나더러 제일 좋아하는, 또는 오에의 대표작을 꼽으라 하면 생각하고 말고 없이 <만엔 원년의 풋볼>을 고르겠다. <새싹 뽑기…>는 이후 작가가 쌓는 일련의 작품들과 ‘아주’, ‘완전히’ 같은 부사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거리가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60년에 고등학교 친구의 동생 유카리와 결혼을 해서 63년에 첫아들 히카리光을 낳는데 헤르니아hernia, 즉 탈장은 탈장이되 뇌헤르니아, 두개골 일부가 완전하지 않아 밖으로 흘러내려 마치 커다란 혹처럼 불거진 상태로 출생했다. 젊은 오에는 이때의 상황/경험을 토대로 1964년에 <개인적인 체험>을 썼다. 장남 히카리는 이후 오에의 작품에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고기토’라는 이름의 화자 ‘나’와 함께 빈번하게 등장한다. 1960년대 초반의 일본 의술을 생각해도 뇌헤르니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발달장애는 피할 수 없었다. 시력을 잃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정도였으나 성격 까칠한 오에 겐자부로가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면서 주위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했을 지 짐작을 하실 터. 그의 마지막 작품 <만년양식집>을 통해 그리 자세하지도 않고 크게 뉘우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솔직하게 고백하고 죽었다.

  그리고 1967년. 오에 겐자부로의 집안 가운데 또 한 명의 Matriarch, 그러나 마지막 여가장, 여부족장, 대빵 가모장, 매이트리아크이며 오에의 작품에는 자주 ‘마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딸이 출생한다. 이해에 출간하는 작품이 <만엔 원년의 풋볼>.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분을 위하여 간략하게 말하자면, ‘만엔 원년의 풋볼’이라 하는 건 현금 만엔¥10,000 내기 축구시합이 아니고, 말기 에도 시대, 메이지 유신이 터지기 바로 직전, 원래 무신정권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던 일왕 고메이가 주제도 모르고 만엔万延이라 연호를 만들어 1년이 채 못되게 사용한 첫 해 1860년이란 거다. 이 시절 앞뒤가 오에의 증조부모, 주로 조부모 때였는데, 시코쿠 숲의 오지 중에서도 오지에 터를 이루어 지세가 험해 어느 번藩(영지)에도 속하지 않아 당연히 세금도 안 내던 자급자족 마을이었다가, 세월이 변해 이웃한 번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지역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사건, 이에 따른 구전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룬 작품이다.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소개하는 사실상의 민란 지도자 가메이 메이스케龜井銘助는 당시 열대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간혹 민란의 지도자로 이런 소년장수가 등장한다. 메이스케는 번의 군사들이 몰려오자 진입하기 어려운 마을의 입구에서 실제 사격이 아니라 허장성세를 위하여 허공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해 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일단 기를 팍 죽인 상태에서 곧바로 이 막강한 세력과 성공적인 교섭을 펼쳐, 주민 가운데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상식과 선례에 구애 받지 않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재주 좋은 녀석’을 Trickster라고 한다. 그럼 다 나왔다. 저 위에서 대빵 가모장, 여부족장, 여족장을 뜻하는 Matriarch와 합해서 M/T.

  만엔, 1860년의 민란에서 열대여섯 소년장군 메이스케가 T, 그의 어머니 또는 의붓어머니가 M.

  하여간 사람들이란. 누구 하나가 잘 나가면 꼭 딴지 거는 인간이 있다. 우리의 T, 메이스케 역시 번의 관료의 지략으로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천성이 낙천적이고 태평한 메이스케를 어렵게 면회한 어머니 또는 의붓어머니는 메이스케가 결국 죽게 될 줄 알고 “괜찮아, 괜찮아, 죽게 되더라도 내가 곧 다시 낳아줄게.”하며 그를 격려한다. 메이스케가 결국 형장에서 사라지고 1년이 흐른 다음에 이 (의붓)어머니는 남자 아이를 출산하고, 6년이 흘러 시코쿠 숲에 “혈세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흔연히 봉기에 참여해 또다른 가메이 메이스케 혹은 ‘환생동자’라 불리며 활약한다. 중요한 결정 사안이 있을 경우, 동자는 잠깐 넋을 잃었다가 ‘메이스케가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하며 봉기군이 해야 할 작전을 지시하고, 이 작전마다 전부 귀신처럼 들어 맞았다. 혈세농민봉기가 마감한 다음에 환생 동자는 어머니 앞에서 다다미 위에 누운 상태로 몸을 점점 부양하더니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더 빨리 회전하며 허공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 경우에 오리지널 메이스케와 환생 동자가 T, (의붓)어머니와 생모가 M. M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일 수 있고, 어떨 때는 T를 지혜롭게 돕는다. 그리하여 M과 T의 효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함수값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엔 원년의 풋볼>에 나온다고? 아니다. 전적으로 <M/T와 숲의 신비한 이야기> 줄거리이면서 <만엔 원년의 풋볼> 내용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앞에서 <개인적인 체험>과 <만엔 원년의 풋볼>을 거론했다. 이 두 작품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에 겐자부로를 읽으면 조금 헷갈릴 수 있다. 완전히 헝클어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선 독서가 있으면 순조롭게 즐기며 읽을 수 있는 것에 괜히 뇌세포 고생시킬 수 있다는 정도. 데뷔작인 <새싹 뽑기…>을 제외하고 내가 읽은 모든 오에 겐자부로의 책이 다 그렇다. SF 작품으로 볼 수도 있는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역시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과 핵셀터에 들어가 겪는 일이 벌어지며, 셀터가 있는 지형도 시코쿠 숲을 묘사한 동네와 도로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새싹 뽑기…>에서 청소년들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 동네도 오에의 고향집 근방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발달장애 아들이 출연하느냐고? 그렇다. 마지막 5장 “숲의 신비의 음악”에 중요한 등장인물로 나온다.

  <M/T…>에서는 K로, 다른 책에서는 대개 ‘고기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오에 겐자부로. 책을 읽어보고 내가 느낀 오에 겐자부로는 막강한 필력으로 한 시대의 거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면서, 스스로도 자신이 거장 가운데 일족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악마처럼 거만하다. 특히 뇌 사용 방면으로. 고기토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을까?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일본문학 그리고 세계문학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차지할 문학적 영웅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본인은, 다만 이 책 <M/T…>를 읽어본 소감에 입각해 말하자면, 스스로를 트릭스터, 재주좋은 녀석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떡잎을 알아본 작가의 할머니는 유독 ‘나’, K를 불러 시코쿠 숲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억하고 (똑 부러지게 이렇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록으로 남기기 바랐다. 그리하여 K겐자부로에게 M은 할머니가 될 수 있다.

  훗날 오에 겐자부로가 쓸 장편소설 <우울한 얼굴의 아이>에는 (다른 작품 속에서 K의 할아버지가 조성한) 시코쿠 숲에 ‘고기이’라고 하는 소년이 살고 있다. 이 고기이 소년이 바로 동자. 메이스케가 환생해 혈세 농민봉기를 성공으로 이끌고 다음 해에 홀연히 공중부양해 사라져 숲의 정령이 된 인격이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는데, 이 동자가 20세기 말에 K의 아들 히카리(<우울한…>에서는 ‘아카리’)를 통하여 환생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서로 영혼의 교환이 가능하다. K가 T이니 K의 아들이며, 발달장애를 갖고 있지만 절대음감을 가진 작곡가로도 이름을 낸 히카리 역시 T가 아닐 이유는 없으니까. 맞지? 맞다.

  그러면 히카리의 M은 누구? 히카리의 할머니, K의 어머니이다. 히카리가 태어나 1차 수술로 뇌헤르니아를 원래 위치로 집어넣고, 2차 수술로 없는 두개골을 플라스틱으로 대체할 때, 2차 수술 당시 잠깐 보고 20년 동안 얼굴도 본 적 없는 청년 손자. 할머니는 성인이 된 히카리에게 역시 시코쿠 숲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이것을 문자로 기록할 능력이 없는 손자는 문자 대신 피아노곡으로 남겨 제목을 <Kowasuhito: 파괴자>라고 한다. 파괴자? 파괴자에 관한 이야기는 유일하게 <M/T…>에 나오는 것으로 어떻게 시코쿠 섬의 두메산골에 마을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

  번의 무사계급으로 지체 높은 가문의 청년이 번의 책임자 가운데 한 명인 큰형의 아내, 그러니까 형수와 함께 도망쳐 숲 속 마을을 창건했는데 당시 형수 ‘오바’가 청년보다 열 살 위였다. 청년은 25명의 젊은이와 함께 바닷가에 도착했고, 지역 최대 해적 가문의 딸이었던 오바는 미리 바닷가에 배 한 척과 25명의 해적 집안 처녀를 대기시켜 능숙하게 시코쿠 섬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이러니 숲 속 마을이 오랜 세월 산과 골짜기 속에 거의 은신 수준으로 세상과 격리시켜 산 내역을 아실 듯. 처음에 마을을 찾아 내륙으로 들어갈 당시 커다란 암벽 장애물이 앞을 막아 더 이상 진입이 불가능했을 때, 청년이 가져온 폭탄을 터뜨려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깊숙한 분지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이름이 “파괴자”.


  근데 웃기는 건, 이 분지 사람들이 말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과 전쟁을 벌여 마구 난도질을 감행할 당시 중국과 조선의 독립군과 연대하여 대 일본군국주의 무장항쟁을 벌이는 장면이 4부 주요 스토리로 나오는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정말 웃겼고, 정말로 도서관 열람실에서, 키득키득 웃었다는 건 사족蛇足. 하여간 오에 겐자부로가 악마처럼 거만한 건 맞는 거 같다.

  악마처럼 거만해도, 제2의 메피스토펠레스라도 어쨌든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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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3-2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프 님, 오에 겐자브로 작품 3권을 갖고 있습니다만, 아직 못 읽고 있습니다. 겐자브로 작품이 좀 지루한 느낌이 들어서 선뜻 잡아들어 읽지 못하고 있어요. 이 리뷰를 보면서 조만간 한 권 들어볼까 합니다.

그리고!! <타임셀터> 말이지요...정확히 70페이지를 넘어서면서 아주 재밌어 지네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최애작품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듬니다. 역시 스타프 님의 별5개는 언제나 저를 실망시키지 않네요..ㅎㅎ

Falstaff 2025-03-25 16:06   좋아요 0 | URL
지루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원래 이 양반이 이야기 꾸려가는 스타일 말입죠, 그게.... 안 알려드립니다. ^^;; 귀띔은 드립죠. 완전 벽돌공이거든요. 아래 벽돌을 완전하게 고여 놓지 않으면 위 벽돌층을 쌓지 못하는... 에구, 제 생각이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타임셸터>도 사실 읽는 사람마다 호오가 많이 갈릴 작품이잖아요. 다행이 야무 님이 제 취향하고 비슷해서 안심입니다. ㅎㅎㅎ
 
밤의 몽상가들 알마 인코그니타
뤼도빅 에스캉드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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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이름이 뤼도빅 에스캉드. 1972년 9월 4일생. 작품에서 뤼도빅의 연인으로 나오는 막신이 뤼도빅에게 위키피디아에 이름을 올리라고 종용한다. 파리 외곽도시 되유라바드에서 직장 갈리마르 출판사까지 한 시간이나 PER을 타고 매일 길고 긴 시간을 출퇴근하기도 싫고,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전처와 합동 육아하고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어려워 파리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야 하는데, 프랑스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주택 임대 과정에 필요한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월 4일.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날.


  이야기가 삼각지로 흐르기는 하지만 좀 보태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는 마흔 살 되던 해인 1848년, 2월혁명의 결과로 국민투표를 통해 취임한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러나 공화정에 불만을 품은 나폴레옹 3세는 1851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나폴레옹 1세에 이어 프랑스의 제2 제정시대를 열었다. (나폴레옹 삼촌-조카 사이에 샤를 10세가 있었는데 어째서 제2 제정이냐고?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는 황제가 아니라 왕이었거든.) 집권 초기에 다양한 치적을 쌓던 나폴레옹 3세는 후기로 들어 경제불황을 맞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쓸데없이 군사력만 약화시켰다. 이때 새로이 강자로 떠오른 프러시아에 세기의 여우이자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가 등장해 프랑스 사람들의 염장을 슬슬 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발끈한 나폴레옹 3세가 겁도 없이 선전포고를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미 그럴 줄 알고 충분히 군비를 확장한 잘 훈련된 프러시아 군대가 프랑스를 도륙을 내버리고, 결정적 전투였던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까지 포로로 잡아 제2 제국의 문을 닫게 했으니, 바로 이날이 1870년 9월 4일이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떠들었느냐 하면, 프랑스 소설을 읽으려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에밀 졸라의 위대한 루공-마카르 총서가, 나폴레옹 3세의 친위 쿠데타에서 시작해 (루공가의 행운) 스당 전투에서의 패배 (패주)로 마감을 하기 때문이다(아직 마지막 작품 <파스칼 박사>가 번역 출판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다. <패주>의 주인공 장 마카르가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 파스칼 루공의 조카니까 뭐 별 무리는 없겠다). 그러니 루공-마카르 총서는 1850년부터 70년 무렵까지 프랑스의 도시와 농촌, 유산자와 무산자, 예술가와 혁명가, 부르주아와 매춘부, 맨발의 고아 소녀, 실업자와 노동자에 투기꾼까지 망라한 “시대의 질주”를 파노라마처럼 엮었기 때문이다. 골라 찾아 읽으시라고 하지 않겠지만 우연히 눈에 띄면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하여간 그리하여 뤼도빅이 연인 막신에게 위키피디아 제작을 위해 자신의 약력을 알려준 것이 이러하다.

  “뤼도빅 에스캉드는 1972년 9월 4일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공연 예술에 전념했다. 쿠르 플로랑에서 배우 과정을 이수하고 ‘테아트르 15’에 입단했다. 1998년 7월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쥘리앙 바스티아니의 <유리 속의 악마> 공연에 참여했다. 1999년 테네시 윌리엄스의 극작품에 헌정된 에세이인 첫 책 <프롬프터>를 출간해 호평을 받았다. 아를에 있는 악트쉬드 출판사에서 2000년부터 편집일을 했다. 파리로 와서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콜렉션 팀장으로 일하며 직업적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구소련의 공연 예술 창작을 장려하는 NGO인 ‘국경없는 무대’를 2005년부터 지원하고 있다.” (p.13~14)

  이 내용이 진짜 위키피디아나 책의 앞날개에 나온 저자 소개보다 훨씬 자세하다. 작품 속에 ‘뱅상’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하는 친구는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 실뱅 태송Sylvain Tesson과 함께 파리의 옥상탐험에 기둥뿌리 썩는 줄 몰랐다는 것만 추가한다. 파리의 옥상탐험? 아메리카와 유럽의 주로 피부색 허연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 고층건물에 올라가 체포된 일이 알려지기도 한다. 바로 그거. 대신 옥상탐험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며, 파리의 주거지 건물들은 높이가 서로 비슷하고, 예를 들어 화재 같은 사고가 날 경우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사다리나 철제로 만든 약식 계단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 번 옥상에 올라가면 지붕을 따라 한 구역 전체를 돌아다니거나 산책하거나, 지붕위의 바이올린을 켜거나, 가부좌를 켠 채 도를 닦거나, 건물을 지은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이 섹터에서 살던 예술가, 소설가, 시인을 상기하며 그들의 작품을 낭송하는 꼴값을 떨 수도 있다. 심지어 탐험하는 시기가 겨울이라면 휴대용 난로와 약간의 땔감을 가지고 올라 약소한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샴페인, 아니, 프랑스니까 샹파뉴를 즐기다가 흥이 오르기는 했는데 불이 꺼져간다면 양말부터 시작해 바지, 셔츠, 속옷까지 불태우며 몸을 녹일 수도 있는 거겠지. 정말 이런 장면이 책에 나온다니까.

  작중 등장인물이자 주인공 뤼도비크의 절친 뱅상, 실제 이름 실뱅 태송은 에스캉드와 함께 알고 지내는 의사이자 작가 크리스토프 뤼팽, 한 시절 암벽등반 세계챔피언 다니엘 뒤 락 등과 함께 다년간 암벽등반을 해, 주로 기어오르고 기껏 올라갔던 곳에서 줄타고 내려오는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파리 시내에서 주거용 건물까지도.


  근데 문제는 이 건물이 주거용이라는 거. BNP 방크 나쇼날 드 빠리 같은 은행 건물, 프랑스 텔레비지옹 같은 국영방송국 건물에 기어올라도 문제가 될 터인데, 주거용 건물, 즉 아파트에, 한밤중에 창밖에서 수상한 인물이, 밤이니까 검은색으로 보이면서 저게 사람인지 악령인지 잠결엔 도무지 분간하지 못하는 형상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슥, 스쳐 지나가는 걸, 셔츠에 넥타이를 맨 슈트 차림이 아니라, 사랑하는 반려자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벼운 샤워만 한 채 벌거벗은 채 자고 있다가, 무려 5층 창밖에 매달린 검은 형제를 보았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라. 유럽 사람들은 우리와 좀 달라서 집, 방 안은 완전히 사적인 공간, 전쟁 중이라 적군의 공습이 없다면 굳이 커튼도 꼼꼼하게 치지도 않는데, 희미한 조명이 있는 창문 밖에서는 컴컴한 방 안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이건 공포 자체 아니겠나? 5층에 동동 떠 있는 검은 형상.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왔는 지 누가 알아! 심장 약한 사람은 그대로 심정지 상태로 접어들 수 있지 않겠어?

  당연히 뤼도비크와 뱅상의 야밤의 옥상탐험은 주민들에 의하여 몇 번 목격되고, 세상에 비밀이 어디 었어, 벽을 기어오르는 인간이 누구인지도 알려져, 당장 경찰에 신고해 범죄예방을 위한 기동대가 새벽 시간에 뤼도비크의 집 현관을 두드리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뤼도비크는 자신과 뱅상이 누리는 한밤의 유희를 한사코 막으려 하는 파리 시민과 주민 공동체와 경찰력을 마땅하지 않게 생각할 뿐, 자신들의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불편과 위험을 초래하는지는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심지어 앞에서 말했듯이 바람부는 한 겨울 밤에 옥상 위에서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랭보의 시를 읊었으면서, 불을 지피는 행위가 화재로 이어지고 그럴 경우 건물소유주와 세입자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과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도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어련히 알아서 불의 뒤처리를 했을까봐 난리를 친다고 지청구를 해댈 뿐. 이들의 행위를 견딜 수 없어서 드디어 누군가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갖고 뤼도비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 선생님이 이 건물을 기어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우리가 경찰에 연락했다는 것을 선생님께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제 말을 오해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에스캉드 씨. 공동주택소유주협회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좋은 하루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주택소유주협회 사람의 말이 뤼도비크는 놀랍지 않다.

  “달콤한 어조, 매뉴얼에 있는 용어, 교활한 의심, 요컨대 돈의 세계를 특징짓는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뤼도비크 에스캉드와 뱅상은 책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의 야밤 건물 오르기와 옥상탐험이 공중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단 한 번도. 오히려 새벽이 오기까지 파리의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는 동화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 온갖 장애물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활기찬 맥박을 되찾은 도시의 모습을 음미할 줄 모르는 우둔함을 한탄할 뿐.

  뭐 어떻게 하겠어?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새벽 두 시에 5층 창문에서 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형체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 악령처럼. 그렇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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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24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상상하면 안되는데 벌써 상상이 되요 ㅎㅎ

Falstaff 2025-03-25 05: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진짜로 이런 경우 당하면 황당할 거 같습니다.
 
현대일본희곡집 10 현대일본희곡집 10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 연극과인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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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별 다섯 개 못 찍었다. 대표작만 골라 실었으니 작품이 좋을 수밖에 없겠지. 희곡 읽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다. 욕설 없음. 폭력 없음. 벗기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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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3-2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았음
 
카이로스 -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유영미 옮김 / 한길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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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예니 에르펜베크의 장편소설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읽었다. 사실 <카이로스>가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해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일종의 에르펜베크 워밍업을 위하여 읽은 거라 해도 틀리지 않다. 오늘 <카이로스>를 마저 다 읽었는데, 두 작품의 문장은 비슷하되 어쩌면 달라도 이렇게 다를까? 나는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가 훨씬 마음에 든다. 작가가 <카이로스>를 통해 무엇을 말하는 지는 알 거 같은데, 4백쪽이 넘어가는 내내 나이 들고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으며 당시 동독 기준으로 돈도 잘 버는 쉰세 살 먹은 소설가 한스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영출판사에서 조판을 배우고 있는 열아홉 살 카타리나 양의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이 독자를 끔찍하게 괴롭힌다. 물론 저 뒤 에필로그에 가서 이 두 세대 간의 사랑과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껄끄럽고 화가 나는 학대 수준의 집착이 어떤 현상에 관한 은유인지 밝히고 있지만, 만일 예니 에르펜베크가 책의 제일 앞에 실린 “친애하는 한국 독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충분히 기억한다면, 늙은 한스의 집착과 편집증의 정체를 책을 읽으면서 이 재수없는 은유의 정체를 내내 눈치채고 있었더라도, 그건 그거고 당장 읽기가 매우 피곤한 거는 피곤한 거다.

  책을 읽는 적지 않은 독자는 하필이면 서른네 살이나 많은 나이 든 남자와 어린/젊은 여자의 사랑이냐고 불평을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이런 기분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열다섯 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와 카프카보다 서른여섯 살 더 많은 쉰한 살 사에키 여사와의 베드 씬을 읽을 때 기분과 같았을까? 도리스 레싱의 <그랜드마더스>, 사춘기 아들들을 서로 스와핑해서 대낮에 어린 소년과 섹스를 벌이는 두 여사님 이야기는? 같았겠지. 같았을 거라고 믿는다. 혹시 당신이 한스-카타리나 커플은 재수없고 카프카-사에키, 그리고 두 여사님 로즈, 일리안과 이이의 아드님들은 괜찮다고 생각했어도 뭐 그럴 수 있다. 당신 마음이니까. 생각하는 건 소리가 나지 않으니. 그러나 만일 나이든 남자여서, 늙은 남자라서 재수없다, 화가 난다고 말을 하거나 특히 글로 써 놓으면, 그건 성차별이고 노인 혐오이니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동안 세상의 모든 차별에 대하여 반대한다고 주장해왔다면 조금 더.


  작중 두 주인공 커플은 1986년 7월 11일에, 비가 쏟아지는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버스에 내려 비를 긋다가 만난다. 한스는 1933년생, 쉰세 살의 소설가. 카탈리나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판을 배우고는 있지만 앞으로 할레에 가서 상업미술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기껏해야 열여섯 살 반 정도로 보이는 1967년생 열아홉 살. 한스는 카탈리나가 태어나기도 전에 첫 소설을 출간한 중견 작가이면서 방송국 고정 프리랜서로도 문화 전반에 걸친 방송을 하지만 음악학을 전공해 주로 작곡가와 연주가를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둔다. 스스로 히틀러 시대에 걸음마를 했다고 하고 1933년생이면 전쟁 말기에는 10대 소년으로 당연히 히틀러 소년단에 입단해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했을 것이라서, 어린 시절에 뇌 속에 박힌 전체주의적, 일인독재적 가치관 역시 한스의 어느 곳에선가 한 순간, 한 대상을 향해 발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한스가 카타리나를 한 눈에 알아본다. 한스의 아내 잉그리트의 첫 연구실이 있던 대학에서 일하던 에리카 암바흐의 딸인 것이 틀림없다. 노동절 시위에서 엄마와 함께 소리를 지르던 아이. 그러나 한스는 모른 척한다. 카타리나는 헝가리 문화센터에 가는 길이다. 한스가 따라간다. 마치 자신도 그쪽으로 가는 것처럼. 문화센터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5분. 5분 차이로 문화센터는 문을 닫았다. 둘은 마주보고 웃다가 헤어진다. 각자 조금 걸어가다가 한스가 커피나 한잔할까요? 제안하고 그렇게 한다. 카타리나는 조금이라도 나이들어 보이느라 평상시하고 다르게 설탕을 넣지 않은 블랙커피를 마신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스가 세상물정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알고, 경험도 많고, 가본 곳도 많고, 지식이 넘쳐흘러, 결국 오늘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제안도 받아들인다. 한스의 집에는 마침 잉그리트가 아들 루트비히와 함께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날이다. 한스는 자기 전공대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루빈스타인, 굴드, 하스킬이 연주하는 쇼팽과 바흐와 슈베르트, 그리고 모차르트를 들려준다. 다시 집에서 나와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드디어 밤이 깊어, 둘은 당연한 듯이 다시 한스의 집으로 되돌아와, 6백개가 넘는 모차르트의 작품 가운데 하필이면 진혼미사곡 K.626을 올려놓아 드디어 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입당송이 흘러나오면서 카타리나는 두 손으로 이미 중년이 넘은 쉰세 살 한스의 얼굴을 잡고 키스한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 그러다 Kyrie Eleison의 합창이 하늘로 치솟는 순간에 맞추어 카타리나의 이가 한스의 살에 박힌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음악 가운데, 6백개가 넘는 모차르트 가운데 라단조 진혼미사가 흐르는 동안 이 커플의 첫 섹스도 흘러간다. 독자는 이때 알아차린다. 이 커플의 사랑은 결국 해피엔드로 마감하지 못할 것임을.

  프롤로그에서도 그랬다. 누군가 ‘그녀’ 앞에 앉아 묻는다.

  내 장례식에 올 거야? 침묵. 내 장례식에 올 거야? 다시 묻고, 내 장례식에 올 거야? 세 번 묻는다. 넉달 뒤 그가 죽었다. ‘그녀’는 피츠버그의 호텔에서 새벽 다섯 시, 그가 묻힐 베를린 시간으로 열 시에 인터넷에서 음악을 골라 듣는다. 모차르트 라단조 협주곡 2악장.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 쇼팽 마주르카 내림가장조. 애초 이 커플, 특히 카타리나에게 고전 음악은 죽음 또는 그와 유사한 형태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국영출판사에서 조판 배우기를 그만 둔 카타리나는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의 극장에 무대미술 인턴으로 들어간다. 독일에 프랑크푸르트가 두 군데 있다. 차범근이 축구선수로 뛴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는 헤센 주의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이다. 카타리나가 인턴 생활을 한 곳은 폴란드와 국경을 맞댄 브란덴부르크 주에 속한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카타리나는 젊고 어여쁜 아가씨가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동베를린으로 와 한스와 데이트를 즐긴 다음에 다시 또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오데르로 간다. 이렇게 꼬박 일 년.

  사랑도 권력이 문제다. 카타리나의 넘치는 사랑을 한스가 너무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 사랑하는 것에도 경중이 있다면 더 많이, 더 진지하게, 더 철저하게 사랑하는 편이 상대방에 종속된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카타리나의 사랑이 더 깊고 진지하고 처절한 것을 믿는 한스는 이제 카타리나를 가스라이팅하기 시작한다. 물론 한스도 아무 탈 없이 혼외 연애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내 잉그리트가 이를 알고 집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자신의 가정을 해체하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다. 이 작품이 이젠 유령의 모습을 한 채 독일 땅을 배회하는 히틀러 또는 전체주의의 영향 또는 피 내림의 은유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다만 사랑 한 가지 측면에서 보자면, 한스는 천하의 잡놈이라 해도 조금의 변명을 구할 수 없다. 결정적 기점은 1년 동안 혼자 지내면서 오직 한스 한 명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다 던져야 하는 카타리나에게 당연하게 한 젊은 남자가 접근을 하고, 잦은 시도 끝에 결국 한 번 밤을 지새웠으며, 이것을 카타리나가 한스에게 말로 알려주는 대신 끄적거린 낙서를 우연히 읽는 바람에 한스가 알게 된 일이다.

  독자는 안타까워 미친다. 어찌 보면 당찬 아가씨 카타리나가 싹 안면 거두고 한스한테 똑 부러지게 이별을 고하면 그것으로 끝장이 나거나, 아니면 한스가 팍 무릎 꿇고 한 번만 봐달라고 오히려 거꾸로 애원할 거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나도 연애경험이 많지 않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씬이지만 이런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 그리고 작품 목적상 그렇게 끌고 가야 마땅하기도 하다. 카타리나의 사랑은 한 어린 아가씨의 순진한 사랑 하나만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유겐트를 경험한 세대가 사회의 주도권을 쥔 시대 아래에서 성장한 그룹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한스의 카타리나에 대한 가스라이팅, 역자 유영미는 ‘학대’라고 표현하기까지 한 것처럼, 그 말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 장면이 심하고 심했다. 꼭 이렇게, 그리고 길게 써야 했을까? 안 읽어본 분은 모르겠지만, 한스가 자신이 쓴 문자를 남기는 것이 싫어서 카타리나가 해야 하지만 결코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변명을 듣기 위한 질문을 카세트 테이프에 앞, 뒤 30분씩 한 시간 녹음을 해 전해주고, 카타리나의 육필도 읽기 싫어 그것을 타자로 친 문서로 받겠다는……. 말을 말자. 자꾸 생각난다.

  왜 영국의 유통업체였던 부커 리미티드가 이 작품에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주었는 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일견 타당하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읽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출판사와 역자에게 미안하다. 나는 이 책을 다른 독자한테 추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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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3-21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뤼도빅 에스캉드, 《밤의 몽상가들》
화요일. 오에 겐자부로, <M/T와 숲의 신비한 이야기>
목요일. 하산 알리 톱타시, <그림자 없는 사람들>
금요일. 이혁진, <누운 배>

건수하 2025-03-2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에 두 문단 읽고 자세한 내용은 제가 곧 이 책을 읽어야 해서 (책모임 책이라서) 건너뛰었습니다.
은유라고는 해도 53살과 19살의 사랑에 심란하고, 추천 안하신다고 하니 책에 대한 기대가 줄어드네요.

전 <모든 저녁이 저물 때>만 읽었는데, 그건 괜찮았는데 말입니다...

Falstaff 2025-03-21 16:05   좋아요 0 | URL
이 작품도 후졌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데요, 다만 읽기가 불편해서 그게 문제지요.

잠자냥 2025-03-21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리고 그 어린 애가 늙은이한테 빠지는 설정이 너무 처음부터 몰입이 안 되더라고요..... -_-

Falstaff 2025-03-21 16:10   좋아요 1 | URL
어린 애와 늙은이 연애는... 아니지, 소설 속에 많은 연애의 설정이 좀 황당하지 않아요? 전 어떻게 해서 그 시절에 데스데모나가 오셀로한테 넘어갔는지 아직도 잘 납득이 가지 않거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