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짐승들의 투표를 기다리며 대산세계문학총서 174
아마두 쿠루마 지음, 이규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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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은 아마두 쿠루마. 1927에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나 2003년 프랑스 리옹에서 삶을 마친 작가. 그가 쓴 다섯 편의 소설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이란다. 우리나라엔 네 번째 소설, 아프리카의 소년병 이야기인 <열두 살 소령>과 동화책 <아프리카의 사냥꾼 야쿠바> 이렇게 번역 출간했다. 이 책을 읽고 곧바로 <열두 살 소령>을 도서관 관심도서 목록에 올렸다. 처음 보는 작가의 첫 작품인 <들짐승들의 투표를 기다리며, 이하 “들짐승”으로 표기>를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다는 의미랄까?

  어느 곳이 됐건 간에 1927년에 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식민지, 독립전쟁, 독재, 냉전, 혁명 또는 내전 등등, 살면서 단 하나라도 겪지 않으면 좋을 다양한 불행을 모두 경험해보았다는 말이 된다.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프랑스에 저항한 할아버지를 둔 괜찮은 집안 출신인 쿠루마는 1950년부터 54년까지 프랑스 식민지 부대원으로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독립군들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작품의 주인공인 독재자 코야가의 이력 가운데 하나로 작품에 등장한다. 이후 프랑스 리옹으로 건너가 회계사 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2년 동안 일을 하다, 코트디부아르가 독립을 한 1961년에 귀국했다. 그러나 독립 정부는 쿠루마를 곧바로 체포하고, 악명 높은 아프리카의 감옥을 경험하게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독립을 했으나 여전히 신식민주의와 절정을 맞은 냉전시대의 기류 속에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던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얼마 안 가 석방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후 신생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일들에 관한 글을 써서 세상에 알리겠다고 결심을 한다. 이렇게 프랑스의 한 공인회계사는 문학적 투사로 변신을 하고, 한 편의 희곡, 다섯 편의 소설, 다섯 편의 동화를 남긴다.


​  <들짐승>은 구성이 특이하다. 우리나라의 판소리하고 비슷하다. 화자는 ‘빙고’. 사냥꾼의 위업을 노래로 칭송하는 소리꾼이며 음영시인으로 ‘그리오’라 불린다. 사냥꾼의 전통적 정화 의식인 돈소마나를 주관하며, 작품은 모두 여섯 마당의 돈소마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오에게는 제자이자 조수, 우리의 판소리와 굳이 비교를 하면 고수와 비슷한 티에쿠라가 하나 있어서 돈소마나 중에 코르두아, 즉 광대 비슷하게 춤도 추고, 고수처럼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토템이 매falcon인 ‘코야가’로 군인이자 대통령, 가장 위대한 장군, 가장 위대한 “사냥꾼”이다. 그리하여 코야가와 그의 오른팔인 교육부 장관도 하고 내무부 장관도 하는 마클레디오를 앞에 놓고 돈소마나를 열 수 있던 것. 코야가는 람세스 2세, 순디아타와 함께 인류의 가장 유명한 세 명의 아프리카 사냥꾼으로 골프 공화국의 독재자. 이이의 실제 모델은 차마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을 쓸 수 없었던지 토고의 지도자 ‘냐싱베 에야데마’란다.  내게는 코트디부아르와 토고, 하면 드로그바와 아델바요르, 각 한 명씩 잉글랜드 프로축구 선수 이름을 댈 정도로 아는 것이 없지만, 이들 나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는 참으로 다양한 독재자가 오랜 세월을 해먹었다. <들짐승>에서도 다양한 독재자의 스케치가 등장한다. 산봉우리 공화국 기니의 대통령 세쿠 투레, 흑단 공화국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 필릭스 우푸에부아니, 두 개의 강 나라 중앙 아프리카의 하이에나 토템 황제 장베델 보카사, 산악 및 사막 국가 모로코의 자칼 토템 왕 하산 2세 등등 쿠루마는 특히 중부 아프리카를 골라 내놓고 비아냥거린다.

  코야가는 토고의 산악지역에 사는 나체족 출신이다. 처음엔 나체족 역사상 가장 놀라운 에벨마, 즉 격투기 챔피언이었던 ‘차오’가 주인공인 줄 알았다. 차오는 의사소통 실수로 그만 프랑스 군대에 징집을 당해 1917년 1차 세계대전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베르됭 전투에 참전,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해 중위의 명령에 불복하고 독일군 진지로 혼자 뛰어들어 다섯 명을 죽여버리고 자신은 부상을 입는다. 이에 깜짝 놀란 프랑스 군은 차오에게 무공훈장, 십자무공훈장,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 식민지 훈장, 이렇게 사관왕에 올려놓는다. 아프리카 촌놈이 번쩍이는 훈장을 자랑하고 싶지만, 고향에 와봤더니 전부 발가벗고 다녀 도무지 자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차오는 나체족 역사상 처음으로 옷을 입었고, 옷 위에 훈장 네 개를 붙인 채 뻐기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이러니 차오가 주인공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차오가 옷을 입음으로 해서 프랑스 식민정부는 나체족을 포함한 모든 원주민에게 1년에 세 달 동안 무보수로 백인 이주민을 위해 의무적으로 노동을 하게 했고, 인두세를 부과하는 등 노골적인 경제적 착취를 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잔뜩 기대했던 차오는 독자의 기대를 무시한 채 금방 죽어버리고 대신 그의 아들 코야가가 등장해 아버지보다 더욱 찰진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코야가는 아버지를 닮아 힘도 좋고 날쌔고, 훗날 천하에 둘도 없는 사냥꾼이 되었듯이 다섯 살 때부터 동네에서 쥐 잡기의 명수로 불렸다. 게다가 똑똑하기도 해서 산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갔는데, 일년에 한 번 있는 축제 시기에 고산지역 소년들을 몰고 단체로 도망가 축제 때마다 벌어지는 격투기 시합에 참가했고, 당연히 1등을 먹었으며, 대가로 학교에서 퇴학조치를 받았지만 식민 정부의 백인이 퇴학 명령을 철회시키고 만다. 그러나 맹수는 길들여지지 않는 법. 이후 매년 산악 지역 축제인 하마르탄 때마다 탈출을 하고 그 벌로 수사 선생한테 서른 대씩 얻어 터지지만 원주민한테 그깟 얇은 회초리로 맞는 거야말로 껌이었다. 식민지 행정관은 코야가에게 도의적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군 다섯 명을 죽이고, 나체족에게 옷 입기를 도입했으나 자신이 바로 그 영웅 차오를 죽인 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무난히 졸업을 했고, 머리가 좋아 행정관은 계속 공부를 시키고 싶어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한 코야가는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불량한 선동꾼으로 자리를 잡았다. 학교는 그의 불량기에 진저리를 치다가 생루이의 군부대 자녀를 위한 학교로 전학을 시켰고 거기서 기어이 퇴학을 맞는다. 그리하여 들어간 곳이 세네갈 원주민 보병부대.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인도차이나로 파병됐다.

  프랑스에서 온 백인들은 베트남의 덥고 습기 많은 기후에 적응을 하지 못해 고생을 한 반면 원래 더운 지방에서 낳고 자란 아프리카 군인들은 미끈미끈한 진흙 구덩이에서도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고 주장한다. 백인들의 눈으로 볼 때, 아프리카 출신 보병. 가운데서도 산악지방 원주민, 이들이야말로 보병대의 꽃이었다. 산악 지역 출신 남자들도 코야가가 제대한 이후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으며, 여성들이 제대한 남자를 특별히 그윽한 눈길로 쳐다본다는 것을 알아챈 이후에 더했는데, 하여튼 줄줄이 징집이 아니라 지원병으로 들어가, 줄줄이 인도차이나로 파병을 갔다. 그들의 속셈은 제대 후에 고향에 돌아와 고향의 풍습에 맞게 제대로 약탈혼을 하기 위해서.


​  고국으로 복귀한 코야가는 아버지 차오처럼 나대는 대신, 때를 잘 만나 독립을 한 조국의 수도에서 한 번 투옥되었다가 탈옥에 성공을 한 후, 프라카사 산토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모의를 한다. 모반자들은 대통령 관저를 포위하고, 코야가가 이끄는 스무 마리의 아프리카 들개, 리카온과 함께 공격을 시작한다. 리카온 하나가 총으로 대통령을 쏘았으나 가까운 거리에서도 맞추지 못한다. 쇠붙이는 위대한 자의 살을 뚫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리하여 코야가는 독을 묻힌 수탉의 며느리발톱이 달린 화살을 쏘아 프리카사 산토스 대통령을 푹 쓰러뜨린다. 한 병사가 연속 사격으로 목숨을 완전히 끊은 다음 몸을 구부린다. 그는 이미 죽은 대통령의 바지 단추를 끄르고 익숙한 솜씨로 거세를 하고, 피로 뒤덮인 성기를 시신의 입 안으로 찔러 넣는다. 요사의 소설 한 장면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이걸 고문이나 지독한 복수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일종의 의식. 죽은 자는 자신의 살해자를 공격함으로써 죽음에 대해 복수하는 힘이 있는데, 살해자는 희생자를 거세함으로써 시신에 내재하는 힘을 제압한다는 거였다. 일종의 액막이. 이후 독자는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죽자마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죽기 전에 이와 같은 의식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여기까지는 독재자가 되기 전의 일. 이후엔 독재자가 된 후 독재를 지키기 위한 장면이 길게 나온다. 이에 덧붙여 이웃 나라 독재자들의 다양한 모습도 소개를 하고, 독재를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도 소개한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우리도 경험해봐서 아니까. 여차하면 등장했던 문구들. 북괴의 남침 야욕. 운운.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두려워한 미국과 서유럽이 공산주의보다는 차라리 독재자를 지원했던 것이 장기 집권과 부패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럴 듯하다고 본다. 서유럽과 미국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웃기고 있다.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서유럽과 미국의 부르주아들이 소비에트의 공산주의를 차단하기 위하여 히틀러의 군비확장을 눈감아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유로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독재자들을 비호한 것일 뿐. 공산주의가 폭망한 이유? 하여간에 권력이란.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 같이 독재를 해서 결국엔 부패한 것이 첫째고, 자본주의에 비하여 능률적이지 않아 경쟁에 실패했던 것이 다음이다. 마르크스가 너무 순진했다. 인간의 본성을 너무 선하게 봤다.

  우리나라 독재자가 자주 썼던 구절, 한국적 민주주의. 민주주의면 민주주의지 한국적인 건 뭐야? 독재 아냐? 파시즘 아냐? 파시즘/독재는 누구/어떤 집단에 의해 저질러지던 무조건 나쁜 거다. 동무들아, 현혹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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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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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개스켈을 읽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다. 2015년 여름이었으니 딱 8년 전이다. <남과 북>을 읽었는데, 빅토리아 시대에도 이런 ‘여류’ 작가가 있었어? 놀랐던 적이 있다. 과학과 산업과 무엇보다 자본의 세기, 19세기에 부르주아 계급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속에서 가난한 공장 직공들의 저항을 바라보는 시선이 놀랍도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에게 직원들의 복지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아내.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읽었다. 잉글랜드의 농업중심인 남부와 공업지역인 북부, 자본과 노동, 인권, 노동자 복지 등등, <남과 북>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조지 엘리엇 보다 더 재미있었다. 요새는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북과 남>이란 제목으로 새로 나왔다. 이후 <크랜포드>도 읽었고 그게 재미 있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읽기는 했지만 지금 기억하는 건 별로 없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클레그헌 개스켈의 책은 눈에 보이면 읽으려고 한다. 《고딕 이야기》는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한 달 만에 받아 뚝뚝 읽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낸 개스켈의 《회색 여인》하고 겹치는 작품(“늙은 보모 이야기”)이 있고, 마녀와 유령이 등장하는 플롯(“빈자 클라라 수녀회”)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은행나무 에세의 개스켈과 휴머니스트 캐스켈, 두 권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그건 돈과 시간이 많으면 그렇게 하셔도, 아니면 두 권을 각기 좌우 양편에 놓고 왼 손바닥에다 침을 탁 뱉은 다음에 오른 손가락으로 냅다 쳐서 침이 튀는 방향에 놓인 책을 고르시는 것도 현명하겠…….지?


​  다음은 역자 박찬원에 관하여. 박찬원은 좋은 교육과정을 밟은 후 지금은 전문 역자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나라 중견 역자다. 나도 이 양반의 번역서 꽤나 읽었다. 재미있게 읽은 순서로 치면 두 번째 자리에 가져다 놔도 고맙지 않을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부터 시작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 <벤자민의 시계…>, <펠리시아의 여정>, <아가씨와 철학자> 등등. 이렇게 꼽아보니 번역에 관해 내가 까탈을 잡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고딕 이야기》는 아니다. 왜 한자어를 쓸까? 자신이 한자어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쓰니 문장 속에 인용하기엔 엉뚱한 단어를 고를 수밖에. 난공불락하고 또 뭐가 있었더라, 하나가 더 있었다. 또, 사실 역자에게 이런 말을 하면 너무 가혹할 수 있지만, 여태 불만 없이 읽은 역자라서 애정을 갖고 얘기한다고 믿어주시면 좋겠는 바, 비문이 많다. 이이의 우리말 수준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발생하는 비문은, 독자가 읽으면서 뭔가 이상한데 하여튼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다, 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에 더 해롭다. 개스켈의 문장은 복문이 많다. 그리하여 크게 주어와 술어를 찾을 수 있지만, 문장 안에 든 절節이 비문일 경우엔 대책이 없다. 예를 들기 위하여 책을 다시 읽지는 않겠다. 같은 문장을 몇 번 확인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정도에서 끝내겠다. 역자를 포함해 글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비문을 발생시킨다. 이건 숙명이다. 그러면 문제는? 퇴고와 출판사의 칼 같은 교정작업. 나는 역자의 실력이 아닌, 이 “퇴고와 교정”에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다.


​  모두 일곱 편의 단편과 중편을 담고 있는 책. 전부 다 고딕 이야기. 고딕. “중세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는 유럽 낭만주의 소설 양식의 하나.”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나와 있다. 계속 설명을 하기를, “고딕소설들은 잔인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신비한 느낌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지금 시대도 고딕 소설은 쓰이고 있다. 나는 고딕, 하면 저절로 앤젤러 카터를 떠올리는데, 이이 외에도 카슨 매컬러스, 구스타프 마이링크(이 양반은 여기 끼기에 너무 올드한가?), 그리고 최제훈 같은 이도 고딕하고 관련이 있겠다. 나는 작년 봄에 휴머니스트와 은행나무에서 한 방에 두 권의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책을 내놓았고, 그것들이 또 모두 고딕 중단편이란 걸 알고, 어떻게 개스켈 같은 이가 고딕 소설을 썼는지 한 편으로는 의아해 하고, 한 편으론 흥미로웠으며, 또 한 편으론 조금 실망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개스켈의 고딕도 보통 고딕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고딕 소설의 구분법. 책을 읽다가 오소소해지는 느낌. 가족들 다 잠든 한밤이 아니더라도, 가을바람 스산한 그믐밤이 아니더라도, 한 여름 대낮에 고딕 소설을 읽으면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끼치면 그건 일류 고딕이다. 한밤이라면 갑자기 뒤통수가 뻣뻣해져서 혹시 뒷벽 창문에서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 비록 7층 아파트일지라도, 고개를 돌려 컴컴한 창문을 힐끗 쳐다보게 만들면 특급이다. 거기다 적절한 수준의 에로티즘까지 소스로 뿌려주시면, 환상이지 뭐. 그러나 일단 침을 닦으시라. 개스켈의 작품에서 에로티즘을 바라는 건 벼락맞아 죽은 살구나무에 꽃 피길 기다리는 것하고 비슷할 터이니.


​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은 19세기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 나오는 여러가지 상황이 예상 외로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일 확률이 높다. 예컨데, 네댓 살 정도에 갑자기 조실부모한 로저먼드 아기씨가 보모와 함께 후견인인 아기씨의 삼촌인 퍼니벌 경의 대저택으로 가서 살게 됐다고 치자. 저택엔 입구에 잡초 하나 없고 건물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도, 나무도 없이 황량한 저택인데, 저택의 주인인 퍼니벌 경은 거의 언제나 여행을 떠난 상태로 여든이 멀지 않은, 마르고 키가 크고 청각을 거의 상실해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는 퍼니벌 부인이, 원래 하녀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늙은 부인의 오래된 친구로 늘 옆에 있는 냉정하고 무감정한 스파크 부인이 저택을 지배하고 있다. 저택은 동관, 서관, 북관이 긴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어린 로저먼드 아가씨는 자유롭게 뛰놀 수 있다. 다만 동관 만 빼고.

  왜 동관을 빼? 고딕 소설에선 당연한 거다.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런 곳이니까. 곧이어, 아니면 뜸을 잔뜩 들인 다음에 결정적으로 파국이나 반전이 그곳에서 시작할 터이니. 많이 본 것 같다. 어려서부터 질리게 본 디즈니 만화에서. 또 숱한 영화를 통해.

  그런데 재미있다. 이 내용이 <늙은 보모 이야기>이고, 이것 말고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도 그렇다. 일곱 작품이 실렸다. 일곱 개 다 좋기를, 설마,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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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7-22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렇게 갑자기 끝내신다구요? 좀 더 써주시지...열라 읽다 휙 뺏긴 느낌..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는 아녀도 아무튼 재밌단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Falstaff 2023-07-22 13: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렇게 중간에 뚝 끊어야지 읽는 분들이 궁금하셔서라도 책을 읽어보시지 않을까 싶거든요.

잠자냥 2023-07-22 0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지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22 13:29   좋아요 1 | URL
귀신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3-07-23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고딕소설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장르여서...!

Falstaff 2023-07-23 21:01   좋아요 1 | URL
넵. 고딕은 여차하면 눈에 차지 않아서 오히려 쓰기가 더 힘들 거 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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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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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런 헤스. 그러니까 이이의 시댁 식구들이 헤스, 알파벳으로 쓰면 Hesse 집안 사람들이란 얘기다. 시할아버지나 증조 시할아버지 형제 가운데 혹시 ‘헤르만’이라는 이름을 쓰는 양반이 있었을까? 왜 나는 쓸데없이 이런 게 궁금한 지 몰라. 하여간 캐런 헤스는 1952년 용띠 여사님으로 메릴랜드 볼티모어 출신이다. 근처에 있는 토우슨 주립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다가 랜디 헤스를 만나 결혼하는 바람에 학교 때려 치웠다. 이후 메릴랜드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심리학과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 도대체 한꺼번에 몇 가지를 한 거야? 학교를 졸업하고 남편, 두 아이와 함께 버몬트주의 브래틀보로로 이주해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과 청소년문학에 전념하고, <황사를 벗어나서>를 이이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위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다.


​  캐런 헤스가 낳고 자란 메릴랜드 주도 그렇고, 가족을 이루고 산 버몬트도 그렇고, 다 미국의 북동쪽 지역인데 어찌 대표작이라고 하는 <황사를 벗어나서>의 배경을 오클라호마 북서쪽 끄트머리 팬핸들 지역으로 설정을 했는지 궁금했다. 1930년대 초반의 오클라호마라고 하면 우리는 어딘지 벌써 익숙한 기분이 든다. 이건 백이면 백 겉멋이 잔뜩 들어 폼잡기 좋아하는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 때문이다. 안 그런가? <분노의 포도>에서는 주인공 톰 조드가 만기 출소를 하고 오클라호마의 집으로 돌아가 대기근을 견디다 못해 캘리포니아로 갈 준비를 하는 가족과 합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31년의 마지막 풍작 이후 내리 몇 년 동안 극심하게 적은 강우량과 건조한 먼지를 견디다 못한 조드 가문의 오클라호마 탈출, 캘리포니아 생존기가 <분노의 포도>였다면, 죽으나 사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척박한 땅에 박힌 뿌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오클라호마 땅에서 곱디 고운, 먼지dust 같은 황사와 황사 폭풍, 이것에 동반하는 황사 폐렴과 모든 결핍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 <황사를 벗어나서>라고 할 수 있다. 조드네 식구들의 고향 탈출이 충분한 이유가 있듯이, 끝까지 헐벗은 팬핸들 고향을 지키며 상실과 가난 속에서 버티고 사는 주인공 빌리 조 켈비네 식구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여간 생존해 나간다는 것. 모진 목숨 가뿐하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그 속에서 자신을 형성한다는 것. 그리고 다분히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적? 그렇다. <분노의 포도>도 그렇고 <황사를 벗어나서>도 그러니, 어떤 결말이 날지, 읽으면서 속으로 초조해 하지 마시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터이니.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까 혹시 스포일러 아닐까 싶네.


​  이 책 이야기를 하면서 “운문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어본 바 있어서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푸시킨 보다 <황사를 벗어나서>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훨씬 더 현대적이라서 더 흥미롭고, 무슨 뜻인지 재까닥 알겠고, 호소력 있었다. 운문 소설, 시로 쓴 소설이라 작품의 길이가 짧아졌지, 이걸 스타인벡처럼 산문으로 썼으면 아무리 짧게 써도 5백쪽은 넘지 않겠나 싶다. 그만큼 운문, 시가 독자들에게 더 강하고 즉물적으로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빌리 조가 우울한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밤 열차를 타고 가출을 하는 한 부part가 있는데,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은 에피소드,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 같은 것 가지고도 한 권의 소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꾸 빌리 조, 빌리 조, 하니까 남자 아이 같지? 아니다. 1920년 8월에 부엌 바닥에서 맨발, 맨 엉덩이로 웅크려 앉은 폴 켈비가, 남편 베이어드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의사가 오기도 전에 출산한 딸이다. 아버지는, 암만해도 오클라호마 농촌지역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큰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아들을 원해 미리 이름을 빌리 조로 지어 놓았는데 딸이 나왔고, 다시 이름을 짓기도 그래서 그냥 빌리 조를 호적에 올려 버린 거였다. 이 빌리 조 켈비로 말할 거 같으면 어려서부터 다리가 길고, 입은 크고, 뺨은 자전거 손잡이처럼 옆으로 벌어지고, 훗날 피아노의 몇 옥타브를 한 손에 거머쥘 큰 손과 빨강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얼굴, 좁은 엉덩이를 가지고 있어서 학교 체육 선생이 농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꼬드길 정도였지만 정작 빌리 조 자신은 피아노 연주하는 것과 사과를 한 볼 가득히 베어 먹는 걸 좋아한다. 여기다가 총명하기도 해서, 다니고 있는 중학교가 오클라호마 전 지역의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성적을 기록하는데, 빌리 조는 여기서도 시험을 치룰 때마다 1등을 먹는다. 비록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 무심하게 말하고 넘어가지만.

  1920년생 빌리 조가 중학교 다닐 열네 살. 1934년 갑술해. 엄마는 빌리 조 이후로 처음 임신을 하고, 지난 세계대전 당시 말도 못하는 곡물 가격 상승에 힘입어 떼돈을 번 미국의 농부들이 초지와 산림을 무분별하게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한 순간에 전장에서 농지로 변한 유럽 땅에서 새롭게 농사를 시작해 미국의 농부들은 거덜이 나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개간은 토지를 건조하게 만들었고, 1930년대 들어와 큰 가뭄이 들자 오클라호마, 아이오와 등등엔 건조한 먼지들이 폭풍과 함께 사람의 일상에 공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고운 흙먼지는 농기계와 자동차 뿐만 아니라 집안의 세밀한 틈새를 뚫고 들어와 모든 세간 위에 뽀얗게 쌓이고 농부들의 코와 귀와 기도와 식도까지, 점막의 습기에 엉겨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 남고, 소년소녀들은 사춘기를 맞고, 누구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그러나 모든 가족들이 다 그런 건 아니라서 어떤 집엔 특별히 개별적이고 치명적 불운이 쳐들어오고, 어떤 집은 이 와중에도 별 어려움 없이 지나가기도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빌리 조네 집은, 아무래도 주인공 집안이다 보니까, 다른 집보다는 그래도 좀 특별한 불운을 맞이하며, 그 불운이 어떤 건지는 내가 차마 지금 이야기할 수는 없다.

  작품은 1934년 1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2년 동안 켈비 집안, 식구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캐런 헤스의 본역이 아동문학과 청소년 문학이라 했다. 굳이 그렇게 구분을 하자면 이 작품도 청소년 문학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물론 청소년 문학은 성인이 읽어도 재미있는 경우가 수다하다. <황사를 벗어나서>도 그렇다. 때로는 윌라 캐더의 지방주의적 건강함과 생명력을 보는 듯하고 때론 가슴이 찡, 한 장면도 나오고 그렇다.

  대체적으로 미국적이고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청소년 문학적이다. 이 정도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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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7-20 0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문학 맞네요. 뉴베리 메달 수상작이니까요. ^^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3-07-20 14:07   좋아요 1 | URL
옙. 재미납니다! ^^

잠자냥 2023-07-20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그 감동 포인트에서 울컥해가지고 별 다섯 줬던 거 같아요. ㅋㅋㅋㅋ
아니면 스무살 잠자냥이라 아직 뉴베리상 수상작에 꽂히는지도?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20 14:08   좋아요 1 | URL
저는 어느 장면인 줄 알지요. 그런 장면은 여기다 못 올립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7-22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클라호마에 남은 가족들 이야기군요. 분노의 포도에도 떠나지 않고 남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보려면 이 책을 읽으면 되겠어요~

Falstaff 2023-07-22 13:28   좋아요 1 | URL
넵. 운문 소설이라서 읽는 속도도 훨씬 빠릅니다.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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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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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독후감은 써 놓고 저장하는 걸 깜박 잊어버려 싹 지워졌다. 그래서 책 읽고 9일이 지나 다시 썼다. 기억이 가물거린다. 하여간 달려보자. 다른 이들의 소감과 차이가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짧게 쓰겠다.)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처음 읽는다. 브라질 작가를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19세기에도 물라토 출신 소설가 마사두 지 아시스가 엽기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포스트 모던하기도 한 <브라스 꾸바스 사후 회고록> 같은 것도 발표했을 정도로 그럴싸한 근대 문학의 전통을 이어갔으리라고 추측했었다. 브라질 작가 작품들이 활발하게 번역되어 나오지 않아 읽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던 건 아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러다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관한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20년에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리스펙토르는 태어나자마자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로스쿨을 다녔으며, 스물두 살 때인 1942년에 첫 번째 장편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써 다음 해에 발표해 브라질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후 외교관과 결혼해서 1959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이혼해 다시 리우로 돌아와 작품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다 난소암으로 생을 마친 작가다. (위키피디아 참조했음)

  리스펙토르의 일생을 검색하기 전에 책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쓰인 "리우에서 1942년 11월"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나는 이이가 인생을 이젠 제법 살아서, (연보에 의하면 이혼하고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 1959년 이후) 세상을 좀 알게 되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쓴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스물두 살짜리가 이런 작품을 썼다니. 아오. 책 광고 글 특유 극도의 찬사가 리스펙토르, 또는 이 작품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 관해서는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이 작품은 스토리로 읽는 책이 아니다. 나는 첫 문단부터 리스펙토르의 화법에 확 끌렸다. 한 번 보시라.


​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가 탁-탁... 탁-탁-탁... 이어졌다. 시계가 먼지 없는 뎅-그랑 소리로 깨어났다. 정적이 잠잠잠잠잠잠 이어졌다. 옷장이 뭐라고 말했지? 옷-옷-옷. 아니, 아니야. 시계와 타자기와 정적 사이에는 귀가 하나 있다. 듣는, 커다란, 분홍빛, 죽은 귀. 세 가지 소리는 햇빛과 반짝이는 작은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으로 이어져 갔다."


​  이것이 어린 주아나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장면이다. 아버지는 타자기로 시를 쓰고, 딸도 아버지를 흉내 내어 시를 써 보여주지만 아버지는 그리 다정하지 않다. 주아나는 인형 아를레치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아를레치는 파란 차에 치어 죽었다. 요정이 나타나 그녀를 도로 살려냈다. 딸과 요정과 파란 차는 주아나 자신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 놀이는 따분했을 것이다."

  주아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 사는 장면은 아주 짧다. 아버지는 가끔 자신을 떠난 여자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이제는 사소하고 아프지 않은 고통으로, 소리 없는 감탄사 '아!' 순간의 모호한 상념으로 남은 엘자. 딸 주아나를 낳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내.

  삼촌 집에서 살다가 기숙학교에 들어간 주아나. 아무리 엄격한 학교라도 선량한 교사는 있는 법이라, 교사가 말한다.

  "어쩌면 너는 행복해질 수도 있어." 주아나에게 드는 의문, 의문들.

  "행복해지면 얻는 게 뭔가요?" "행복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다음엔 뭐가 오나요?" " 행복해지는 건 무엇을 위한 거예요?"

  선생은 주아나에게 종이에 이 질문들을 적어 간직하고 있으라고, 훗날 성인이 된 다음에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하지만, 주아나는 대답한다. "싫어요."


​  이 모든 스토리에서 주아나의 내적 감정이 작품의 9할 이상을 차지한다. 이 감정이랄까, 의식이 함의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글. 이걸 읽는 일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은유가 범위의 제한도 없이 지평선과 수평선을 너머까지 펼쳐지는데, 절반 분량을 읽을 때 까지는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깊은 안개 속에서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2부에 접어들 즈음, 이제 눈에 익어서 그랬는지, 익은 게 아니라면 눈이 저절로 떠져서 그랬는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름대로 '추리'할 수 있었고, 초장과 비교하면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점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경탄할 수 있었다. 다시 이야기하면, 대책없이 쏟아지는 은유의 폭격, 이것들의 의미를 나는 '추리'할 수 있었을 뿐, 이해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모험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충분히 한 번 도전해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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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8 0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리스펙토르의 책을 한 권 도서관에서 빌려왔다가 다섯장도 채 못읽고 그대로 반납했어요. 전 도저히 못읽겠더라고요. 어휴,이건 내가 읽을 책이 아니다 싶었는데, 오늘 골드문트 님의 리뷰를 보니 왜인지 알겠네요. ‘스토리로 읽는 글이 아니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은유‘ 때문이었음을 …

Falstaff 2023-07-18 09:10   좋아요 0 | URL
자칫하면 안개 휩싸인 골짜기로 빠져들어가기 십상이더군요. 짧지만 함부로 읽었다가 쌍코피 줄줄 흐를 책입니다. 일찌감치 포기하신 게 어쩌면 더 바람직하지 않았겠는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저도 읽고나서 한 20일 흘렀는데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더군요. 위에 인용한 문장들하고, 행복에 관한 질문 정도만 남았습니다.

물감 2023-07-18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의 시간>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한 절반 읽고 접었습니다. 횡설수설 기법이랄까, 여튼 이렇게까지 인내해서 읽어내고 싶진 않았어요ㅋㅋ

다락방 2023-07-18 11: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대출했다가 못읽고 반납한 책이 <별의 시간> 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7-18 11: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예전같았으면 억지로 읽고 비평이라도 남겼는데, 이제는 시간낭비 감정낭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덮어야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18 15:28   좋아요 0 | URL
저도 <별의 시간>이 더 유명해서 그거 먼저 읽으려 했는데, 울 동네 도서관에서 이상도 하지, 그 책이 대출불가인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야생의 심장...>을 읽었다는 거 아닙니까. 다 팔자지요 뭐.

coolcat329 2023-07-19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사 실종. 의식의 단어화‘ 제목이 다 말해주네요. 이 책 읽고 조용히 포기하신 분들도 계시구요...올려주신 발췌문 읽어보니 저도 안 될 듯 싶네요. ㅎㅎ

Falstaff 2023-07-19 17:51   좋아요 1 | URL
저도 추천은 못하겠더군요.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독자 취향에 맞으면 대박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작품들....아니겠느냐, 하는 심정입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3-07-23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이런 책을 다시 기억해서 리뷰하신 건가요?

Falstaff 2023-07-23 21:00   좋아요 1 | URL
따옴표에 든 문장은 읽다가 메모해놓은 겁니다. 설마 기억했겠습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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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프, 바이 더 시 - 조이스 캐럴 오츠의 4가지 고딕 서스펜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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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이스 캐럴 오츠가 1938년생이니까 여든다섯 살인가? 다작의 여왕이다. 장편소설을 쉰여덟 편, 천편에 육박하는 중단편 소설을 썼다. 아침에 너댓 시간 쓰고, 오후에 또 쓰고, 저녁 먹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완벽한 전업작가. 쓴 작품의 양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되어 나온 책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곱게 나이 든 할머니인데 미국 현대 고딕 소설의 대가라고 하고, 그로테스크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전형적인 미국 작가로 이이의 관점은 전적으로 미국 위주다. 우리나라에서 이이의 대표작으로 꼽기도 하는 <카시지>의 경우가, 내가 읽기로는, 그랬다. 이럭저럭 맞춰보자면, 미국적인 작가이고, 그로테스크의 여왕, 현대 고딕. 이러면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으니, 하여튼 나는 글 좋은 대중작가라고 본다. 작품 속에는 리얼한 폭력을 담고 있으며 자주 철철 피가 흐르고, 그걸 역겹기 바로 전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카디프, 바이 더 시》도 예외가 아니다. 이 중단편집은 2020년에 초판 출간했는데 초판 표지에 내놓고 “네 편의 서스펜스 노벨라”라고 박아 놓았으며, 우리나라 번역본 표지에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추가하여 “4가지 고딕 서스펜스”라고 했던 바, 나는 깜짝 놀라길 “4가지”? 혹시 “싸가지”를 이야기하는 건가? 했는 줄 알고 말이지. "싸가지 고딕 서스펜스" 완전 새로운 장르의 소설 말씀이야. 하여간 네 편 모두 여성 피해자가 극한 상황까지 몰리는 사건을 그렸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악당은 권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다. 물론 다 죽어 마땅한 새끼들이다. 아니, 죽여 마땅한 새끼들. ‘죽어’와 ‘죽여’, 점 하나의 엄청난 차이란! 하여간 그렇다.

  내가 읽은 소감은 그냥 오츠. 오츠한테 기대했던 딱 그만큼의 오츠. 오츠, 하면 많은 독자들이 <좀비>나 <흉가>, <악몽> 같은 걸 떠올리는 듯한데, 나는 <카시지>와 <사토장이의 딸> 딱 두 작품 읽고 더 이상은 내 돈 내고 오츠를 사서 읽지는 않기로 했다. 《카디프, 바이 더 시》 역시 도서관 개가실의 신규 구입 도서 책장에 놓인 것을 보고 잽싸게 읽었다. 잘했다.


​  네 편의 노벨라, 중편 소설이 들어 있는데,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카디프, 바이 더 시>는 시poem 옆의 카디프(라는 이름의) 아가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몇 번 보신 바 있는, 또는 내가 생각하기에 누구나 한 번은 영화를 통해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시작한다. 술에 취한 건장한 남자가 엽총이나 권총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집엔 세 명의 아이들과 엄마가 있었다. 먼저 엄마의 머리를 향해 총을 두 방, 빵빵, 쏘아 죽이고, 큰 딸한테도 가슴과 목에 빵빵 쏴 아직 열살도 안 된 목숨을 거두었으며, 이어서 어린 아들이 눈에 띄자 역시 한 방, 빵, 쏴서 죽여버리고 만다. 이제 겨우 두 돌 아홉 달이 된 막내 클레어는 개수대 아래 어두컴컴하고 냄새나는 공간, 배수관 뒤편, 거미줄과 머리카락이 함부로 흩어져 있는 작고 작은 공간으로 몸을 구기고 들어가 더러운 공간보다 더 작게 웅크리고 있다. 조금 후, 남자의 발과 다리가 보이고, 시커멓고 축축하게 번들거리는 뭔가가 바짓단에 묻어 있는 것도 보이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거의 혼절 상태에 이른 막내를 발견하니 가족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살인자는 아빠. 처자식을 쏴 죽인 다음 남은 총알을 자신의 옆통수를 관통시켜 자살해버린 사건. 세월은 흐르고 흘러 클레어는 다른 가정이 입양해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한 통의 전화가 와 옛 사건이 벌어진 집과 일대의 땅을 상속받았음을 전해준다. 그리하여 저 기억 속, 어쩌면 평생의 트라우마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아 있던 아득한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야기, 이게 타이틀 롤 <카디프, 바이 더 시>다. 내 말 맞지 않나? 작은 피난처에 몸을 피한 유년의 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지? 이 책의 초판이 2020년이니까 오츠도 영화의 한 장면이 인상 깊어 그걸 꺼내 작품으로 썼을 거 같다. 뭐 아니면 말고.

  흠. 이거 스포일러 맞는데, 엣다 모르겠다, 얘기하자면, <카디프, 바이 더 시>에서 진짜 악당이 처자식 죽인 아빠가 아닐 수도 있어서 결론을 미루더라도, 두 번째 <먀오 다오> 부터는 진짜 개자식들이 나온다. <먀오 다오>에서 출연하는 개자식은 사춘기를 맞은 주인공 미아의 의붓아빠 패리스 로크. 하긴 이 중편에 나오는 남자 치고 개새끼 아닌 게 거의 없기는 하지만 이외에도 사춘기를 맞아 가슴이 봉긋해져 손만 대도 아픈 가슴을 고의적으로 툭 치고 “아, 미안, 젖소” 하며 지나가는 한 학년 위의 뎀스터도 마찬가지다. <먀오 다오> 악당들의 공통점은 성희롱, 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을 통해 처음 들은 단어인 ‘성비위’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개자식들은 충분하게 (또는 죄에 비해 과하게) 벌을 받기는 한다.

  세 번째 작품 <환영처럼, 1972>는 가장 역겨운데, 성공회 신부 공부를 하다가 때려 치고 대학에서 강사질을 하는 젊은 악당 사이먼과, 유명 시인의 계관/권력을 자랑하는 61세 늙은 교수 롤런드 B가 등장한다. 이 새끼들 가운데 한 명은 젊고 똑똑한 학부 2학년 학생 앨리스를 임신시키고, 당시에는 전 미국에서 낙태 수술이 불법이었으며 간혹 야매로 해주는 의사가 있더라도 학생신분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들 만큼 많은 돈을 요구해 절망에 빠진 앨리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하여 자신과 결혼을 해 애 낳고 키우자고 제의를 한다. <환영처럼, 1972>는 별로 주의하지 않고 읽으면, 읽다가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힐 만큼 분노하게 되고, 안타까워하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끝장, 그러니까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마지막 작품 <살아남은 아이>는 첫 번째 이야기 <카디프, 바이 더 시>와 달리 아이 죽이고 자살한 인간이 아빠가 아니라 엄마, 살아남은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 일 것 같은데 오츠 작품은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앞에서 내가 말하기를, 이 책에서 나오는 (사춘기 중이거나 지난) 남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 개자식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정말 이 집안의 아빠는 무고한 거야? 읽어 보셔야 안다니까. 하여튼 엄마가 죽는 방식도 어디서 본 거 같다. 차고 안에서 틈을 막아 놓고 시동을 건 다음 배기가스가 차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수면제 칵테일 한 잔 마시고 잠에 빠져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는 방법. 토미 리 존스와 수잔 서랜든이 주인공을 한 <의뢰인>에서 나오는 자살 미수 장면이다.


​  이제 소감. 딱 조이스 캐럴 오츠. 그러나 여태 오츠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로테스크의 여왕이란 별호가 어울리는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 그런 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가 알던 오츠 보다 강도가 훨씬 셌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오츠가 매년 거의 빠지지 않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올라간다고 하는데, 미국 땅 안에서 잘 팔리는 작가라 하고, 또 읽어보면 정말 글을 쉬우면서도 (아마 짧은 단문 위주로 써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흥미진진하게, 때론 복장 터지게 만드는 솜씨가 대단하다는 데 다른 의견이 없긴 하지만, 감동이라든가, 공감이라든가 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못할 것 같다. 심지어 어제 밤에 <환영처럼, 1972>의 마지막 장면이 꿈 속에서도 나와 아주 진저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자다가 벌떡 깼지 뭐야, 잠 깬 김에 방광 한 번 비우고 다시 자긴 했어도),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이 인상깊지는 않다. 높은 대중성으로 영화화하면 괜찮은 수준의 박스 오피스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조이스 캐럴 오츠. 여전히 나는 이이의 책을 돈 주고 사서 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백수거든. 아무 책이나 살 수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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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7-15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로도 짓눌려 숨이 막히는데요?
… 수고하셨습니다.

전 오츠의 “좀비”가 좋았고요 (역시 피 철철이지만 읽으면서 소설/문학의 보호막이 생생했어요) “카시지”는 실망스러웠어요.

오츠가 문학 교수여서 독후감을 여럿 썼는데 그 글들은 좋아요.

Falstaff 2023-07-15 10:04   좋아요 1 | URL
미국 소설 보면 오츠를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더라고요. 문화 차이인지 저는 여간해서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고요. 도서관에서 이이의 책을 좀 읽어보려 합니다.

stella.K 2023-07-15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그로테스크! 며칠 전부터 이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머리에 파리가 들어 앉은 느낌이었는데 여기서 보게되네요. ㅎㅎ
가끔 그런 작가가 있긴 하더군요. 하루종일 글만 쓴다는 사람. 그럼 책은 언제 읽지하는데 글을 안 쓸 땐 읽겠죠? 아니면 소싯적에 많이 읽어둬서 채울 건 없고 뽑아쓸 것만 남아있거나.
저의 엄니보다 하나 적네요. 근데 여전히 쓰고 있다니 대단해요. 그렇게 다작이면 대표작 몇권만 읽어도 될 것같네요. 문제는 제가 고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죠. ㅋ

Falstaff 2023-07-15 16: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로테스크...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많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막 미칠 거 같은 순간도 있어요. 전엔 걍 단어가 줄줄 떠올랐는데 이젠 영 아니더라고요. 뇌가 쉬었어요. 묵은지도 아니면서....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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