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경비원 - 2021년 퓰리처상 수상 장편소설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지예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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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카렌 루이스 어드리크는 1954년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어드리크 씨와, 반은 오지브웨 족 치페와 인디언, 반은 프랑스계 혼혈인 엄마 고노 여사 사이의 일곱 남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가 노스다코타 주 와페턴의 인디언 기숙학교 교사로 근무해 어드리크도 어려서부터 인디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장했다. 이이는 오지브웨 부족인 치페와 인디언의 터틀 마운틴 지역에 등록된 인디언의 일원이란 신분으로 소설과 시, 아동문학 활동을 하면서 미국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중견 작가이며, 대표적 “아메리카 원주민 르네상스의 2세대 작가”라고 불린다. 실제로 <밤의 경비원>을 읽으면 종종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 르네상스 1세대 작가라고 일컫는 레슬리 마몬 실코. 루이스 어드리크보다 여섯 살 언니로 미국의 대표소설 Top 100, Top 50 같은 걸 뽑을 때 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식Ceremony>을 쓴 바로 그이다. 아, 진짜 언니라는 말은 아닌 거 아시지? 실코는 곳곳에 메사 지형이 있는 황량한 사막 지대에 터를 잡은, 뉴멕시코의 라구나 푸에블로 족이다.


  "The Night Watchma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야경꾼’하면 될 거 같은데, 이 제목은 작품의 주인공 토머스 와샤스크의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로, 인디언 보호구역인 터틀 마운틴 지역에 입주한 “터틀 마운틴 보석 베어링 공장”에서 일하는 야간 전담 경비원이라, 우리말 어감으로 마치 방범대원이나 순찰 순경 등 말단 공적public 경비의 의미가 강한 야경꾼 대신 ‘밤의 경비원’이라 했다. 그러나 ‘밤의 경비원’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서문 격으로 쓴 메모에서와 같이 그냥 “야간 경비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책 파는 데 ‘밤의 경비원’이 더 유리할 거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의 외할아버지 패트릭 고노가 주인공 토머스 사향쥐, 와샤스크의 실제 모델이다. 고노 씨는 토머스 와샤스크처럼 터틀 마운틴에 있던 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지역 치페와족 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미합중국 정부는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 여러 부족과 “국가 대 국가”의 협정을 맺어 원주민의 시각으로 보면 형편없이 좁은 지역으로 추방해버리는 대신 약간의 지원을 하는 서류에 서명을 했던 것 같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파괴적 농업, 축산업, 공업, 상업 자본이 거의 비어 있는 원주민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이들은 합법적인 또는 불법적인 로비활동을 통해 정부와 원주민 사이에 맺은 조약의 종료를 법제화하는 순서로 접어든다. 사실 미국 근현대사에 무지한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반칙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그렇게 짐작하는 것뿐이니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란다.

  <밤의 경비원>은 1953년 8월 1일에 미국 의회가 실제로 발표한 “상하원 합동 결의안 제108조”에서 시작한다. 이 결의안은 “풀이 자라고 강물이 흐르는 한” 유효하기로 서약한 원주민 국가와 미의 국가 대 국가 간 협약의 파기를 말하는 것으로, 위 문단에서 짧게 언급한 미국 정부의 인디언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의미였다. 작 중 모르몬 교도이기도 한 아서 V. 왓킨스 상원의원이 이 법안을 제안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정치적으로 거물이 소설에서 거의 그렇듯이 매우 권위적인 악당이지만,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왓킨스 의원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단다. 이 책의 절반은 보석 베어링 공장의 야간 경비원 토머스 와샤스크를 정점으로 상하원 합동 결의안 제108조가 발동이 되지 않도록 성명을 발표하고, 호소문을 서명을 받고, 경비를 마련해 워싱턴을 방문해 청문회에서 발언을 한 후, 이에 합당한 활동을 계속하여 협정의 종료를 막는 일에 할애한다.


​  다른 절반은 건강하고, 힘도 세며, 수영도 잘하는 데다가 총명하기까지 한 픽시, 퍼트리스 퍼랜토를 주인공으로 하는 젊은이들의 광장.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아직 상하수도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벽촌 지역인 터틀 마운틴에서 도무지 비전을 찾지 못하는 청춘들이니 어찌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나. 퍼트리스의 아버지 퍼랜토 씨는 젊은 시절 대단히 총명하고 튼튼하고, 무엇보다 점프 실력이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였는데, 뭐 그래봐야 지역에서 그랬다는 것이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며, 살림을 하다가 입에 대기 시작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질병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에 덜미를 잡혀, 부족의 주택공급 대상자에 들지도 못해 낮고 기울어진 집의 가장으로 늘 술에 절어 폭력과 주사를 부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퍼트리스도 힘 좋은 처녀로 성장을 하고, 자신도 알코올에 뼈가 녹아버려 이젠 스스로 집을 나가 버렸고, 엄마 자낫과 딸 퍼트리스는 작은 도끼를 침대 밑에 놓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남편)아버지가 돌아오면 아예 죽여버리겠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켑투케 중단편집》에서 봤듯이, 이런 모진 환경에 사는 젊은이들 가운데 대개 남자들은 이 속에서도 고향에 남아 가족들이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마을 또는 도시로 가서 정착하려 하는 거 같다. 이 퍼랜토 씨 댁에서도 맏언니 베라는 연애를 해 새신랑과 함께 미니애폴리스에 가서 정착했다. 정착한 줄 알았다. 퍼트리스는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마침 들어선 군수회사인 보석 베어링 공장에 오퍼레이터로 취직해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하며, 회사에서도 ‘뛰어난 1등’의 솜씨를 발휘하는데, 미안하지만 회사에선 ‘뛰어난 1등’은 관심만 받을 뿐 진급이나 고과에선 오히려 감점요인이라는 건 몰랐겠지. 퍼트리스도? 당연하지. 터틀 마운틴 지역의 모든 원주민들은 안다. 이 아가씨가 똑똑하고, 예쁘고, 장작을 퍽퍽 팰 정도로 힘도 좋고, 말도 잘하고, 강단도 세고, 무엇 하나 꿀릴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루는 미니애폴리스로 가서, 간 것 까지는 좋은데, 가서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언니 베라를 찾겠다고 직접 열차를 타고 간다. 때는 1953년. 아직 인종차별 정책인 짐 크로우 법이 시뻘겋게 살아 있던 시절에, 유색인 아가씨 혼자서.

  퍼트리스는 미니애폴리스 역 앞에서 거의 납치당한다. 자신의 발로, 택시인 줄 알고 탄 것이긴 했지만 수상한 업소로 유인 당한 거다. 그리고 고향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당 50달러와 별도의 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고무로 만든 암소 모형의 잠수복을 입고 커다란 유리 수조 속에서 춤을 추는 수중 쇼걸 일을 하게 된다. 폐허 비슷하게 변한 언니의 주소지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다. 그런데 유독 수중 쇼걸을 하는 여자들은 아주 빨리 죽는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이 고무 잠수복 내부, 쇼걸의 피부에 닿는 면에 칠하는 유독한 화학물질 때문이라는 건 독자만 안다. 퍼트리스를 짝사랑하는 지역 권투선수 우드 마운틴이 날짜를 딱 맞추어 이 시점에 등장해 본인은 몰랐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퍼트리스를 구출해낸다. 베라 언니는 미시시피 강을 타고 왕복하는 배 안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가 되었을 거라는 언질 또는 귀띔을 한 채. 이들은 우드 마운틴의 씨 다른 누이의 집에서 베라의 갓난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퍼트리스도 우드 마운틴을 사랑하느냐고?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사랑이 뭐지? 나는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우드 마운틴의 복싱 코치이자 터틀 마운틴 학교의 수학 교사인 백인 로이드 반스도 퍼트리스를 사랑한다. 비록 퍼트리스가 그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아 결국 퍼트리스의 친한 친구 밸런타인 블루에게 시선을 돌리기는 하지만. 뭐 그런 거다.


​  여기에 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등장하는 초자연적 이야기. 영혼과 정령, 샤먼, 그리고 유령. 죽었지만 아직 영혼은 세상을 배회하는 유령들. 그들은 수시로 살아 있는 사람들 주변에서 서성이며 대화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심지어 워싱턴 의사당에까지 쫓아와 훈수를 두기도 한다.

  레슬리 마몬 실코의 역작 <의식>에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에 나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생을 해 PTSD에 시달리는 인디언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해주는 일종의 주술사 노인의 의식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을 보았기에 새롭지는 않았지만, 인디언들이 유지해가는 그들의 문화를 엿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일 터.

  책은 두 주인공, 토머스와 퍼트리스를 중심으로 해, 이야기 두 개가 엇갈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론 간혹 이야기들이 맞물리기도 한다. 저자 후기까지 580쪽에 달하는 장편이라도 읽기 힘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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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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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위화를 읽는다. <원청>이 위화가 <제7일>을 발표한 이후 8년 만의 작품이란다. 나도 가장 최근에 읽은 위화가 <제7일>이었다. 제일 처음에 읽은 위화는 당연히 <허삼관 매혈기>였다. 우리나라 초판이었는데, 1990년대 어느 날 한겨레 신문이던가 신문 서평에서 극찬하는 기사를 읽고 동네 책방에 갔더니 없다고 해서, 책가게 쥔한테 한 권 주문해 읽었다. 그게 재미 있었는지 위화의 작품은 제법 읽은 편이다.

  <원청>을 읽으면서 갑자기 팍, 머리에 이런 생각이 꽂혔다.

  “위화를 더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 대단한 거짓말쟁이의 대단한 입담이 이젠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거였다. <인생>, <형제>, <가랑비 속의 외침> 등등 중국 근현대사 인물들의 징글징글한 삶의 묘사가 마치 프레스에서 찍혀 나온 제품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작가는 진심을 다 해 쓴 결과물을 이렇게 단칼에 매도하면, 그게 비록 독자의 권리이긴 하지만 심하게 야박한 입방정이라는 것은 안다. 그저 입 다물고 나만 위화를 이제는 더 읽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걸 구태여 내놓고 이야기해서 위화를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는 다른 독자들의 김을 새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 여기서 잠깐. 위화는 여전히 재미있고, 독자의 감정을 적어도 세 옥타브 정도는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자유자재로 소위 “나빌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나빌리다”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래라”의 변형입니다.) 여전히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입담 덕분에 날 새는 지도 모르고, 엉덩이에 뾰루지 나는 지도 모르게 책에 빠지게 하는 중원 고수의 검법을 휘날린다. 내 이야기의 중심은, 이제 그의 화려한 검법이 다 그게 그거인 거 같다, 하는 아쉬움이지 조자룡 헌 칼 쓰는 듯한 그의 무공이 이젠 쇠한 거 같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그러면, 위화만? 아니다. 색채는 다르다. 그래도 위화와 더불어 중국 근현대사의 시골이나 소도시의 서민들이 시대를 겪어가는 광경을 그리는 비슷한 세대 작가들, 예를 들면 옌렌커, 쑤퉁, 류전윈 같은 이들이 물론 독특한 자신들의 세계는 각기 다르지만 거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이들을 (내 마음대로) 퉁 쳐, 3세대 중국 작가라고 한다면, 이제 이들 그룹의 소설이,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게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하기는, 내게도 잘못이 있다. 애초에 작품 수가 별로 없는 다이호우잉으로 중국 현대 소설에 매료되기 시작해서, 모옌을 거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3세대 작가들을 거치면서 다시 다이호우잉을 그리워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이들 말고 다양한 중국 작가들을 읽어봤어야 했는데 위화, 옌렌커 등에 너무 쏠려 버렸고, 급기야 그리하여 질린 것 같다는 말이다. 조만간 찬쉐의 <마지막 연인>을 읽을 계획이다. 이 작품은 3세대 작가들과 다른 이야기, 다른 문체를 하고 있기를 바란다.


​  린샹푸林祥福 우리나라 발음으로 임상복 씨는 황하에서 북쪽으로 구식 마차를 타고 하루쯤 되는 거리에 있는 농촌의 유지였다. 물론 가상의 농촌이라 황하 이북이라도 그게 푸양에서 하루인지 지난에서 하루인지에 따라 매우 다르지만 청나라 말기에 경성이라 불렸던 베이징이 가끔 거론되는 걸로 보아 지난에서 하루 거리 같은데, 그런 건 크게 의미는 없다. 린샹푸는 북중국 사람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힘도 장사였는데다가 손재주도 좋아 농한기를 이용하여 근동의 이름난 목수(들)에게 목공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이 건장한 청년이 목공에 관해서는 말 그대로 청출어람이라 남들 2년 걸려 배울 것을 2주일 정도면 뚝딱 해치워 버리는 수준이어서 부드러운 나무를 다루는 연목 목수일과 목공 최고의 기술이라고 하는 경목 목수일까지 다 마스터해버렸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고, 어머니마저 19세 때 세상을 접어, 4백여 무畝, 정확하게는 476무의 전답과 방 여섯 개 벽돌 저택, 그리고 백여 권의 책을 유산으로 갖게 됐다. 1무가 2백 평이니 476무면 9만5천 평이 넘는다. 린씨 가문은 대를 이어 농사를 지었지만 책 읽기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학제學帝였던 옹정제의 저술까지 나름대로 (시골 수준으로 보면) 깊이 있는 공부도 한 셈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일찍이 최고의 경목 목수이자 린씨의 선생이기도 했던 쉬경목이 평하기를 “부잣집 도령 같지 않게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린씨 사람들은 9만5천 평의 전답을 꾸리면서 매해 추수가 끝나면 소출을 마차에 싣고 현성을 나가 현물을 금괴 작은 것으로 바꾸었는 바, 일년 소출이 대강 작은 금괴 하나 정도였으니, 작은 금괴를 ‘참조기’라고 일컬었다. 참조기 열 마리가 모이면 큰 금괴 하나로 다시 바꾸었는데 큰 금괴는 ‘수조기’라고 했다나. 물론 중요한 건 아니다. 작품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당시에 린샹푸의 비밀 금고엔 수조기 열일곱 개, 참조기 세 개가 있었다. 이런 린샹푸 앞에 저 남쪽에서 도착한 사람들이 나타난다.

  총명하고 정의롭고, 영국 젠틀맨보다 더 신사인 린샹푸는 애초부터 믿지 않았으나 자기들이 남매라고 주장하는 젊은 남녀, 남자는 아창이요, 여자는 샤오메이가 나타났다. 점잖은 린샹푸는 아무리 안 보려고, 보면 지는 거다, 보면 지는 거다, 속으로 다짐을 해도 자꾸 샤오메이가 입은 밝은 꽃무늬 치파오의 옆 면이 좍 트여 있었고, 거기다가 젊은 샤오메이가 얼마나 어여쁜지 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남매라는 걸 믿지 않은 바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하루를 묶고, 다음날 아창이 부탁하기를, 자신들의 경성에 이모부를 찾아 의탁하려 하는데 어디서 사는 지 몰라 날이 걸릴 거 같다, 둘이 움직이면 비용이 많이 든다,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남자 혼자 다녀올 터이니 그동안 샤오메이를 머물게 해줄 수 있겠느냐는 거다. 활수한 린씨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아창 혼자 길을 나서고, 샤오메이는 남는 방에 거처하게 되니, 여섯 칸 넓은 집에 젊은 청춘 둘만 남았고, (19세기니까) 당연하게 샤오메이는 청소와 부엌일 등을 하며 순식간에 안주인 노릇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몇 달 후,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데리고 부모산소를 찾아 둘이 혼인하겠다고 고한다.

  둘이 신혼의 깨소금으로 열심히 참기름을 짜기 시작해 몇 달 후, 샤오메이는 고향의 부모를 위해 관왕묘에서 재를 올릴 예정으로 길을 떠났다. 출발하기 전에 린샹푸의 새 옷과 새 신발을 두 벌씩 손바느질로 깔끔하게 지어 놓고, 자기 없는 동안에 밥 굶지 말라고 밥도 한 솟 단지, 반찬도 찬장 가득 장만해 놓았어도 마음 좋은 린샹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샤오메이가 아주 나가버렸다는 것을. 기껏해야 며칠 있으면 와야 하는데 보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이상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비밀 금고를 열어보니 에그머니, 수조기 일곱 개와 참조기 한 개가 없어진 거다.

  그러나 한두 달이 흐르자, 다시 꽃무늬 치파오를 입은 샤오메이가 자기 발로 돌아왔다. 금괴는 탕진했지만 자신이 린샹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린씨는 저번 일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서 그랬다고 결론을 내고, 이번엔 정식 절차를 거쳐 결혼식을 올린다. 시간이 흘러 샤오메이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어느 날, 딸 아이가 목에 힘이 생겨 고개를 들어올릴 수 있게 된 날, 샤오메이는 아이가 먹을 죽 한 사발을 남기고 다시 사라져버렸다. 이번엔 금괴에 손도 대지 않고.

  린샹푸는 땅을 저당 잡히고, 금괴도 은표로 바꾸어 옷에 꿰매고, 참조기 하나는 은화로 교환해 주머니에 넣은 다음, 아이를 포대기에 잘 싸 가슴에 안은 채, 등엔 커다란 짐을 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아창과 샤오메이의 고향이라고 하는 원청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  원청이 어디일까? 황하를 건너고, 양쯔강을 건너도 아무도 원청이란 곳을 알지 못한다. 원청이 정말 있기는 한 것일까? 이 책을 읽은 중국의 한 독자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라 했다고, 작가 서문에서 위화는 말한다.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가야 할 곳. 평생을 걸고 찾아야 하는 사람, 연인, 아니면 프로젝트가 있는 곳. 또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 아니면 그저 누군가 지나가는 거짓말로 일러 준 허위의 도시.

  재미있는 작품이다. 독자를 웃기고 울리기도 한다. 비적(토비)가 벌이는 폭력이 과하게 적나라해서 가끔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좀 다른 위화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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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7-01 0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사회상 묘사는 덜한 편인가 보네요?

Falstaff 2023-07-01 07:14   좋아요 2 | URL
역사 소설까지는 아니더군요. 펄 벅의 <대지> 2부하고 비슷합니다.
그냥 사회가 청말, 군벌기, 민국으로 바뀔 뿐입니다.

stella.K 2023-07-0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작가들마다 자신만의 패턴은 다 있는거니까 어쩔 수 없을 것같아요. 또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 김이 빠지죠. 그래서 그걸 알게 될까봐 전작을 다 읽는다는게 염려스러운 것같고.
원청 요즘엔 중고샵에 나와있어 저렴하게 볼 수도 있더군요.
나빌리 저도 좋아하는 말입니다.

Falstaff 2023-07-01 18:04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죠, 나빌래라. 이 단어가 10대 골드문트한테 을매나 멋있었는지 말입니다.
근데요, 위화가 또 책을 내면, 읽을 거 같단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인생이란.....

coolcat329 2023-07-01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읽고 있는데 다이허우잉으로 중국현대소설에 매료되셨다니 기대되고 열심히 읽어봐야겠네요.

Falstaff 2023-07-01 18:05   좋아요 1 | URL
오, 다이허우잉. 진짜 좋습니다.이왕 사람아 읽으시는 김에 삼부작 다 완독하시기 기원합니다. ^^

jazz0924 2023-07-13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고르는 중에 마이페이퍼보고 방문했어요~추천하신 다이허우잉 책 읽어보려고요!

Falstaff 2023-07-13 17:16   좋아요 0 | URL
오, 세 작품 다 좋습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작가와 독자의 궁합이니까, 재즈 님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그레이스 2023-07-23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때 위화를 탐독해서 지금도 책이 새로 나오면 사놓습니다. 이 책 사놓기만 했어요 ㅠ

Falstaff 2023-07-23 20:5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말은 이렇게 해도, 위화는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
 
반마취 상태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9
이디스 워튼 지음, 손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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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이디스 워튼. 좋지 않은 인상으로 시작했지만 어떻게 하다 정이 들어 이제 일곱 번째 워튼을 읽게 됐다. 이 양반이 1862년 1월 24생. 7개월 후 프랑스에도 천재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컫는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태어난다. 1862년이 좋은 해였던 모양이다. 청년기 황금시절엔, 물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계급에 한하는 얘기겠지만, 벨 에포크 시대를 맞이하여 풍족한 문화의 향연을 누릴 수 있었고, 이후 1차 세계대전에는 시들시들한 척추와 쑤시는 무릎을 핑계로 참전하지 않을 나이가 된 이들. 전쟁이 끝난 후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세대의 방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도무지 자신들이 살았던 문화와 이질감을 숨기지 못해 젊은 그들에게 과감히 로스트 제네레이션 Lost generation, 길을 잃은 세대라는 딱지를 붙여준 꼰대. 이런 꼰대 그룹에 이디스 워튼도 당연히 포함되며, 워튼은 핏제럴드, 더스패서스, 헤밍웨이, 포크너, 등의 세대가 갖는 조급성, 개인성, 변화추구를 발견하고, 직접 대면하고, 조금은 당황했으며 그것들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과의 거리감은 분명히 있되, 그들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으려 하는 기존 그룹과의 정치적, 문화적, 의식적, 의사소통적 휴전 상태가 워튼이, 실 생활에서는 모르겠고, 소설 속에서 취한 행동이 바로 “반 마취 상대” 아니었을까, 이렇게 읽었다.


​  나는 “반 마취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마취가 덜 된 상태. 그러니까 아주 심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통을 느끼며 수술/시술 등을 하는 걸 말하는지도 모른다. 혹시 수면 내시경? 프로로폴? 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23쪽 각주를 보면 “반 마취 상태는 여성들의 산고를 줄여주기 위해 마취제를 사용한 분만 방식”이란다. 그러니까 딱 짚어서 분만 방식인데 당시에 돈 좀 있던 가족들이 산모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택하는 방식으로, 이 방식의 핵심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주인공 폴린 맨퍼드 여사를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폴린은 서부의 신흥 부르주아 출신으로 조상들이 펜실베이니아에서 탄광노동을 하다가 누군가가 자전거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이 양반의 똑똑한 후손이 또 하나 나타나 자전거에서 자동차 회사로 일을 벌여, 지금 미국 최고의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에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진짜 부르주아다. 폴린이 젊은 시절에 뉴욕에서 아서 와이언트라는 잘 생긴 남자를 만나 혼인을 했다. 아서는 동부해안에서 배를 내린 진짜 필그림파더스의 후예, 순종 WASP이지만 이젠 폴린이 ‘뉴욕 구혈통’이라 부를 뿐인데, 이렇게 얘기할 때 폴린은 그 계급에 대한 경멸과 자부심을 동시에 품으며 지칭하는 거였다.

  이들 사이에 아들 제임스가 태어났으나, 시더리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회계 잘못으로 아내의 돈을 탕진한 후엔 클럽에서 브리지를 하거나, 경마에 간헐적으로 관심을 쏟는 와중에 알코올 흡수 용량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당대의 뉴욕 부르주아 사위로서는 크게 문젯거리가 아니어서, 폴린 역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 아서가 사촌 엘리너와 몰래 연애를 하는 걸 알게 되고는 그건 못 참아서 깔끔하게 이혼해버리고 말았다. 암, 당연하지. 부처님도 돌아 앉는다잖아?

  이때 폴린의 이혼을 맡아 재판없이 깔끔하게 처리해준 이혼 전문 변호사가 덱스터 맨퍼드. 폴린은 키 작고 머리숱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일에 대한 열의가 자기 친정집 가문의 정서와 비슷해 스스럼없이 두 번째 결혼을 해버렸고, 이 사이에서 딸 니나를 낳았다. 그렇게 해서 폴린은 씨 다른 남매를 갖는다.

  이 희한한 집안은 대개 남자들 때문에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는 바, 전남편 아서는 주로 전시품 또는 ‘전리품 A’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하여간 A는 전 아내가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서 낳은 딸 니나를 자기 딸처럼, 딸보다 더 중요한 피붙이처럼 여긴다. 두 번째 남편 덱스터 역시 결혼하기 전에 아내가 낳은 제임스, 짐을 자기 딸만큼 중요한 진짜 아들처럼 돌본다. 심지어 아서의 어머니 와이언트 노부인이 사망한 후엔 아내의 전남편인 아서를 자기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까지 한다.

  하여간 아서와 폴린의 아들 짐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엔 다양한 관심거리와 야성적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붓 아버지인 덱스터 맨퍼드가 합병신탁회사에 취직을 시켜준 이후로는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경제적 유용성만 남은, 건실한 청년이 되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웃기네, 너네들도 한 번 먹고 살아봐라, 꼰대가 되는지 아닌지. 워튼의 이런 속내가 아니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음.) 짐이 은행원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개성있게 아름다운 아가씨 리타, 비록 돈 한 푼 없는 고아 출신으로 모든 것에 책임질 줄 모르는 ‘대단히 곤란한’ 이모 퍼시 랜디시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 이 자유분방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함이었다. 덱스터가 워낙 좋은 곳에 취직을 시켜주었고, 엄마 폴린이 또한 막대한 돈을 뿌려 지원해준 덕분에 모던 중에 모던하게 꾸민 집에서 집사와 요리사와 유모를 두고 편하게, 편해도 너무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 이들 사이에 6개월이 안 된 사내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태어날 때, 리타는 무통 분만, 마취제를 사용한 무통 분만을 해줄 것을 주장했고, 역시 아픈 건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성미인 시어머니 폴린이 흔쾌히 동의하여 “반 마취 상태” 분만을 했다.


​  폴린이 가진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돈밖에 없다. 돈을 매개로 사회 각지에 권력을 쥐었고, 두 번의 결혼을 했으며,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무조건 수표를 발행해 보기 좋도록 개선해야 하며, 주위 사람들이 겪을 고통 역시 거침없이 수표를 써서 최고의 조건에서, 제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주어야 복장이 편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다. 여기서 ‘기본적으로는’이라는 조건을 빼도 마찬가지다. 착한 사람이다. 나는 모든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폴린 만큼 착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뭐 착한 게 언제나 좋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폴린은 몸의 통감 신경에서 뉴런을 타고 전해지는 고통은 물론이고 마음의 부담도 만들지 않으며, 만일 만들었다면 빨리, 가능하다면 즉시 없애고 싶다. 그리하여 작중 초반엔 근사한 마인드 콘트롤을 하는 인도 사람, 마하트마라고 폴린이 줄여 말하는 사람의 운동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다가 마하트마의 운영방식과 동원된 사람들과의 외설적인 사진 같은 것이 매스컴에서 보도하여 시끄러워지자, 이렇게 나대서 시끄러워지고 누군가 창피함에 노출되는 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폴린은 잘 나가는 뉴욕 로펌의 대표변호사인 남편 덱스터 맨퍼드를 설득해 재판이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천만에. 맨퍼드는 당장 큰 돈이 되고 사회적으로 관심이 쏟아진 사건을 수임하는 것이 돈과 명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일간 유야무야 아내에게 무질러 놓은 맨퍼드. 그는 의붓아들 짐과 의붓며느리 리타를 많이 사랑해서 저녁 먹으러 자주 아들네 집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가다가 주머니에 넣은 신문을 펼쳐보니, 천상의 옷만 입은(쉬운 말로 ‘누드’) 여성들 사이에 아뿔싸, 며느리 리타의 얼굴도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겠어? 변호사 맨퍼드는 의뢰인을 찾아가, 사건을 재판에 붙이면 이긴다 해도 결코 좋은 꼴을 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의뢰인의 딸에게만 엉뚱한 꼬리표가 붙을 거라고 점잖게 설득, 사건을 무마시켜버린다.

  이디스 워튼이 이 다음에 준비한 아픔, 혹은 어쩌면 지독하게 아플 수 있는 일은, 자유분방하고 미국 역사상 거의 최초로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리타가 성실한 짐을 버리고 이혼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거다. 비슷한 성향을 지닌 부르주아 가족 구성원인 폴린과 맨퍼드는 리타-짐 커플의 이혼을 막기 위하여 두 주일간 리타를 현대적으로 개조한 시더리지 농장으로 함께 가 부활절 휴가를 보내는 거였다. 휴가 기간동안 리타는 덱스터, 폴린, 니나와 함께 충분한 대화를 할 수 있기도 하고, 여유롭게 인생을 생각할 수도 있으며, 어떻게 사는 게 더 본인한테 중요한 것인가를 숙고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꼰대들의 생각은,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긴 하지만.


​  아, 맞아. 나는 이렇게 돈지랄하는 아메리칸 부르주아 이디스 워튼을 좋아하지 않았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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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6-29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왜 이렇게 아재처럼 쓰셨어요. 한참 웃었잖아요. 전 이디스 워튼 별로 안 맞아서 하나 읽고 더 이상 읽을 마음 들지 않지만 소설 이야기 해주시니까 어쩐지 궁금해지긴 해요. 장마 무탈하게 잘 보내시기를~

Falstaff 2023-06-29 13:35   좋아요 1 | URL
˝오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ㅎㅎㅎ

1954년에 밥 호프가 매릴린 먼로를 데리고 우리나라 오산 미군 기지에 와서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호프는 두번인가 세번인가 더 왔더랬습니다만, 하여튼 54년 공연에서 연병장에 빼곡하게 앉아 있는 미군 병사들한테 농담을 하기를,
여러분이 깔고 앉은 땅 이름이 오산인뎁쇼, 그게 영어로 하면 miscalculation이란 뜻입니다.
이래서 장병들이 눈알은 매릴린 먼로만 바라보고도 열심히 웃어주었답니다.
그걸 패러디해서 간혹 써먹는 귀절이랍니다. 그러니까 아재 개그를 넘어 할배 개그.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3-06-30 06:33   좋아요 1 | URL
ㅎㅎ
리뷰도 재밌지만 댓글 넘 재밌어요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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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이언 무어가 누군데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가 싶었다. 1921년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유복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한 평생 글을 쓰면서도 아쉽지 않은 살림을 살다가 갔다. 부커 상에 세 번 후보로 올라 미역국만 시원하게 자셨다. 벨파스트 태생. 어쩔 수 없이 북아일랜드 독립과 관련한 엘리자베스 2세 군대의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인데,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택시 드라이버 한 명만 빼고) 가톨릭 교도들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바, 한숨 지난 다음에 읽으려 했건만 난데없이 도서관 신규 구입도서 테이블에 놓여 있는 바람에 넙죽 읽게 됐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스토리에 관해서는 일부러라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작가가 벨파스트 사람이고 무대도 벨파스트라 해서, 최근에 이 지역을 무대로 한 괜찮은 작품인 애나 번스의 <밀크 맨>을 떠올렸는데, 완전히 핀트를 잘 못 찾았다.


​  읽기 괴로웠다. 사실 독후감을 쓰기도 쉽지 않다.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주인공 주디스 헌만큼은 아니더라도 약한 의존증 증상이 있는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끙끙거렸다.

  제목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이지만 이렇게 바꿔도 괜찮을 거 같다. <주디스 헌의 드러운 팔자>. 기질적으로 우울증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많은 환자들은 살면서 고립된 삶을 거치는 동안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서, 주디스가 거울을 보며 거울에 비친 자신과 대화를 하고, 대화 속에 특정 상황을 현실에서는 비록 완벽하게 불가능할지라도 자기 뜻대로 전개하는 것을 읽으며, 안타깝게도 주디스가 우울증 증상이 있다고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이 아니라면 약한 멘탈 디스오더 같은 것이라도.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갑자기 부모가 다 세상을 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룰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이모네 집에 들어가 유소년 시대를 보내고,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독립을 하기 위해, 이 때가 1930년대였을 텐데, 당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봤자 타자수나 속기사밖에 없어서 열심히 타자와 속기를 배워 일자리를 얻기에 이른다. 이때 인연을 맺은 것이, 아, 인연이라 했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 마시라, 두 남자와 한 여자로, 두 남자 다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한 명은 타지로 갔고, 남은 하나가 바로 이때의 의리를 지켜 나머지 세월을 매주 일요일이면 헌 양을 집에 초대해 티 타임을 갖는 오닐 교수다.

  이제 사회인으로 생활을 시작할 찰나, 여태까지 자신을 키워준 다르시 이모가 뇌졸중을 맞고 만다. 뇌졸중이라는 것이 당시만 해도 3일, 석 달, 삼 년, 구 년이란 공식이 있어서, 3일 안에 죽지 않으면 석 달, 석 달 만에 죽지 않으면 3년 가고, 석 달부터 벌써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법인데 삼 년 동안에도 죽지 않으면 9년을 간다는 고질병이었다. 9년을 가면? 그냥 곱게 가나? 집안의 재산이란 재산은 몽땅, 싹, 싹도 싹 나름이지 완벽하게 싸~악 말아먹고 가버리는 거였다. 여기에 현대의학의 도움을 아주 조금 받으면 20년도 넘게 간다니까. 집안 다 말아먹고도 식구들까지 뿔뿔이 흩어버린다는 게 뇌졸중이었다. 그런데 주디스 평생의 은인일 수도 있는 다르시 이모는 여기에다 치매까지 겹쳐 버려 어떤 간병인도 환자를 볼 생각을 하지 않는 바람에 주디스는 나이가 꽉 차도록 집 밖 외출도 못하고 벨파스트 시, 리스번 가의 이모네 집에서 좋은 시절을 싹, 싸~악 말아먹었다. 이때 타자와 속기를 배울 당시 에디 마리넌, ‘에디’라고 헷갈리지 마시라, 여자다 여자, 에디와 어울려 젊은 여성들의 호기심으로 와인부터 시작해 위스키까지 제법 술 맛도 보고 그랬었다.

  하여간 세월이 흘렀더니 오래 오래 욕창 앓아가며 누워 있던 이모가 드디어 모진 숨을 거두었고, 변호사가 다르시 이모의 재산 상태를 점검해보니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싹, 싸~악 말아먹어버려, 거의 전 재산이 증발을 해버렸다. 완전히 말라버린 건 아니었던지, 이 와중에도 주디스도 조금의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연 100 파운드. 근데 물가가 만만찮은 벨파스트에서 1년에 100 파운드로 살아지나? 죽으라는 법이 없어, 자기 자신도 알다시피 재능 없이 피아노는 좀 치는 주디스는, 피아노 개인 교습을 하던 양반이 갑자기 숨이 넘어가는 바람에 그의 제자들 다섯 명을 인계 받아 제법 쏠쏠한 호구처가 되었던 거다. 물론 이야기가 시작하기 불과 얼마 전에 꼬맹이 한 명만 남기고 전부 교습을 끊었고, 꼬맹이마저 얼마 안 있어 다른 교습소를 찾아 가겠지만.

  세상에 아무도 없는 주디스 헌. 친구라고 오해하는 오닐 교수도 포함해, 하늘 아래 친구 한 명 없고, 친척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 의지가지가 없는 주디스가 새 하숙집으로 옮긴 다음 날 아침, 헌 양 앞에 하숙인들이 나타난다. 공립초등학교 교사를 하는 까다로운 성격의 프리엘 양. 점원 일을 하는 것 같은 나이 들고 교활한 레너한 씨. 그리고 하숙집 주인인 과부 라이스 부인의 오빠이자 북아일랜드 바로 아래 지역인 도니골 출신으로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가 30여 년 동안 뉴욕에서 별의 별 짓을 다 하며 살다가 마지막으로 밀크 맨이 아니라 타임스퀘어에 있는 대형 호텔의 도어 맨을 하다가 신호위반을 한 버스에 들이받쳐 두둑한 보상금 1만 달러를 갖고 귀국한 제임스 패트릭 매든 씨.

  어느덧 40대에 이른, 예의 바르고 독실하게 가톨릭을 믿는 신자이며 잘 교육받은, 그래서 콧대 하나는 겁나게 높아진 주디스 헌 양. 자기 앞에 등장한 거구의 미국인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미국인 매든 씨는, 벨파스트에서도 혼자 살다가 나이먹은 남자한테는 이가 서 말이나 끓지만, 혼자 살다가 나이먹은 여자는 금과 은이 서 말이라서, 당장 헌 양의 팔뚝에 두른 (심각하게 고장난)금시계만 보더라도 알겠다시피, 헌 양이 못 생기긴 했어도 만만치 않은 현금 보유자일 것이라고, 김치국물을 벌컥벌컥 자시기 시작한다.

  결론은? 제임스 패트릭 매든이 개자식이라는 거. 헌 양이 빈털터리란 걸 알고 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다른 행실, 비슷하게 힌트를 드리면 허리하학적으로도 개판이고, 헌 양의 사랑을 접수하지 않겠다는 통보도 악랄한 단어만 골라, 골라 폭격을 해버리고 만다. 가뜩이나 아픈 헌 양에게.


​  근데, 잘 읽히고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2백쪽이 넘어가면서 시작하는 주디스 헌의 고통이 너무 비통해 무지하게 불편했다. 무엇보다, 실감나서! 나한테는 너무 절절하기 때문에. 문학이니까, 소설이니까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허구가 진실보다 더욱 진짜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읽는 나는 진짜 미칠 뻔했지 뭐야. 이런 소설은 정말 안 읽고 싶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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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27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얼마전에 읽었는데, 내용을 너무 잘 정리해 주셨네요 ㅎㅎ 주디스 헌의 고통이 너무 비통해… 그렇죠 ㅠㅠ 별로 호감가는 인물이 아닌데도요.

Falstaff 2023-06-27 15:22   좋아요 1 | URL
에휴. 주디스의 제일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게 독후감을 쓰느라고, 하고 싶은 말은 별로 하지 못했는데,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려서 아휴....

다락방 2023-06-27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진짜 기다리고 있던 리뷰입니다.
오늘 피씨 로긴하고 27일에 올려준다 하셨어! 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더니 이렇게 똭-

흑흑 우리 주디스 헌 ㅠㅠ

Falstaff 2023-06-27 15:31   좋아요 0 | URL
공감이 가는 장면이 많아서 읽는 일 자체가 저한테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독후감 쓰기도 마찬가지였고요. 이 책 읽고 며칠 다른 책을 읽지도 않았답니다. 에휴....
진짜로 별 거 없는 독후감인데 기다리셨다니.... 괜히 미안해집니다. 여차하면 궁상의 골짜기로 빠질 거 같았거든요.

coolcat329 2023-06-30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잠자냥님 리뷰로 읽기 괴로운 책인 거 알고는 있는데 골드문트님이 미칠 뻔하셨다니...되게 궁금하네요.

Falstaff 2023-06-30 16:53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전 권하지 않겠습니다. 며칠 후에 꿈에서까지 나온 소설 장면도 소개할 예정입니다만... 7월 15일? ㅋㅋㅋㅋ
아, 그것도 잠자냥님이 백자평과 리뷰 올리셨던 겁니다. ㅎㅎㅎ
 
고금와카집 - 142수 정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기노 쓰라유키 지음, 최충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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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 한 시절 중앙일보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의 한국인 연구가의 글이 연재된 적이 있었다. 그때 학자가 누구였는지(김영회 씨였던가?) 지금 검색해봤지만, 도서관 PC가 하도 꼬져서 두 번 검색하면 먹통이 되는 바람에 포기했다. 하여간 도서관에서 《고금와카집》이 눈에 띄자 <만엽집> 생각이 났고, 내 돈 내고 살 생각은 아예 없지만 이런 기회에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얼른 골라 읽었다. 일본 소설 속에서 와카를 인용하는 걸 여러 번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책을 선택한 중요한 계기였다.


  모두 스무 권, 142 수의 와카를 실었다. 이 와카들이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5.7.5.7.7 조로 구성된 시가 와카라고 하는데, 와카 한 편 씩 가끔, 마음에 여유를 두고 감상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 터이지만 한 방에 읽으려니 심심하기 그지없다. 주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지은 시를 보면 자연에 대한 찬미가 유난히 많다. 이것도 예외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관한 찬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 주로 왕가의 사람들더러 오래 살라고, 바람벽에 똥칠할 세월을 넘어 천년, 팔천년을 더 살라는 노래. 이별의 노래, 여행의 노래, 그리고 사랑의 노래들이 실려 있다.

  그러다가 눈에 확 띄는 한 수. 제목 미상이다.


​  “우리 임금님 천년만년 되도록 장수하소서 자갈이 바위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  이 시가 제7 권, “축하 노래”의 1번으로 실려 있다. 아, 다들 아시겠지만 와카가 다 이런 식이다. 딱 한 줄의 시. 하여간, 나는 이 시를 읽자마자 즉각적으로 우리나라 국가가 떠올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는 많은 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인데 이 사람들은 모래알이 태산이 될 때까지로구나. 그잖여?

  그리하여 혹시 하는 마음으로 검색해봤다. “일본 국가 가사” 네이버 지식백과 왈, 노래의 내용은 “천황의 치세는 천대, 팔천대 계속되기를. 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다시 거기에 이끼가 낄 때까지 영원하기를.”이라며, “이 가사는 10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의 고전시가집 『고킨와카슈』에 나오는 작자 미상의 고대 시가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노래의 제목이 기미가요라는데, 그것까지 뭐 알 필요 있어?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검색 엔진이라는 네이버에서 천황이 뭐냐, 천황이. 기미가요君が代의 군君은 그냥 책에서처럼 “임금”이라 하면 될 것을.


​  이 책 《고금와카집》을 읽으면 일본인들이 자연을 보고, 느끼는 감각에 혀가 다 쭉, 나온다. 봄이 두 권, 여름이 한 권, 가을이 두 권, 겨울로 한 권, 해서 스무 권 가운데 여섯 권이 사계절에 관한 노래다. 봄엔 입춘과 꽃들, 여름엔 두견새, 가을은 낙엽이요, 겨울이면 눈이라. 하도 나오고 또 나오고 다시 나와서 눈이 다 지물거린다. 일본 사람들이 달을 묘사하는 단어가 7백가지란다. 반면에 프랑스 사람들이 여성의 생식기를 묘사하는 단어가 7백 개 비슷하단다. 자세한 건 어디 가서 내놓고 좋아한다고 얘기하기 쉽지 않은 의사 출신 일본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소설 <샤토 루즈>를 참고하시라. 그가 직접 한 이야기니까. 인용하고 싶어도 인용 못한다. 아이들 보면 교육상 좋지 못하다고 아내가 바가지 득득 긁어서 내다 버린지 벌써 이십 년 넘었다. 이 《고금와카집》 읽으면 그게 농담이 아니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  일본인의 자연 사랑이 아무리 지극하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재미난 건 사랑이다.

  이 책은 905년에 다이고 일왕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면 <겐지 이야기>하고 1세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당시 사회 발전 속도를 지금 사회로 치면 1세기라야 기껏해봤자 7개월에서 9개월 안짝일 터. 당시엔 귀족이나 왕족 여인들은 남자들 눈에 띄지 않을 구중궁궐 속에서만 있어야 했다. <겐지 이야기>에서 귀에 말뚝이 박히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젊은 여성을 우연히 한 번 보는 게 얼마나 근사한 경험이었겠는가. 그리하여 11권 “사랑노래 1”에서 마지막으로 실린 기노 쓰라유키라는 작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  “산벚나무 꽃구름 사이로 살짝 본 것과 같이 그대를 살짝 보곤 그리워 못 참겠소”


​  내가 이걸 노래했다면, “못 참겠소” 대신 “못 살겠소” 해버리겠네. 훨씬 더 목을 메잖여? 그런데 다음 노래는 어디선가 많이 들은 느낌이 나지 않나? 12권 “사랑노래 2”에서 첫 번째로 실린 노래다.


​  “그리워하다 잠이 들어 버려서 임이 보였나 꿈인 줄 알았다면 깨지 않았을 것을”


​  좋다, 좋아. 이제 짤막하지만 솔직한 감상.

  《고금와카집》을 읽으려면 《고금소총》을 읽겠다. 고려가요집이든지.

  뭐라? 다 읽고 지랄이라고? 할 말 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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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24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샤토 루즈가 땡기네요.

Falstaff 2023-06-25 06:4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엔 있더라고요! 일본식 야한 이야기가 줄창 쏟아지는 명작입니다. 명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