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마리즈 콩데.  카리브 해에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는 열도 가운데 프랑스령 과들루프에서 작은 은행을 설립한 오귀스트 부콜롱과 여학교 교사 잔느 퀴달 부부가 낳은 여덟 남매의 막내로 1937년에 태어났다. 나름대로 유복한 가정에서 낳고 자라 파리 3대학, 이이의 학창시절에는 소르본이라고 일컫던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과 비평, 그리고 극작품을 꾸준하게 발표하여 이제는 단골 노벨 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올릴 정도의 필명을 자랑한다. 콩데는 카리브 해역의 농장 인력으로 수입하기 시작한 아프리카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예제도, 식민주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페미니즘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콩데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아프리칸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티투바>의 첫 머리도 주인공 티투바의 어머니 아베나가 부족간의 전쟁에서 패한 아샨티 족으로,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배 이름도 참…)“크라이스트 더 킹”호에 실려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 항으로 오는 도중에 갑판 위에서, 모든 선원들이 보는 앞에서 한 남자에게 겁탈을 당해 억지로 임신 당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때가 1660년대 말 정도. 당시 아베나는 열여섯 살이 넘지 않았고, 흑옥 같은 피부에 높이 솟은 광대, 얼굴엔 부족을 나타내는 섬세한 상흔 문신을 지닌 예쁜 소녀로, 어느 백인 농장주가 안 그랬겠느냐만, 잔혹한 농장주 다넬 데이비스의 아내 제니퍼를 위한 몸종으로 팔린다. 제니퍼는 거친 성격의 남편을 증오해, 이제 입 무거운 흑인 노예를 맞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아베나에게는 기댈 수 있는 착한 벗이 되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티투바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데이비스는 비싼 값을 치루고 데려온 노예를, 엔틸리스 제도에서 노예들에게 행했던 관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베나와 함께 구입한 또 다른 아샨티족 출신의 노예 야오와 짝을 지어준다. 야오는 진심으로 아베나를 사랑했고, 화자 ‘나’가 태어나자 야오가 직접 ‘티투바’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자신의 핏줄 이상으로 극진하게 돌본다. 반면에 어머니는 티투바를 볼 때마다 갑판에서 만인이 보는 와중에 겁탈을 당한 장면이 생각나 진심은 어떤 지 모르겠으나, 티투바를 바라보는 눈길에 사랑은 끼어 있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티투바가 유년시절을 벗어나 일곱 살이 됐을 때, 농장에 나타난 주인 다넬 데이비스의 눈에 아직도 여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흑옥의 아베나가 들어왔고, 주인은 여러 눈치 볼 것 없이 아베나 앞에서 셔츠 단추를 풀고 동시에 바지를 내렸으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갑판 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던 아베나는 옆에 있던 딸 티투바에게 빨리 칼을 달라고 소리쳤고, 티투바는 손에 잡히는 대로 제일 큰 마체테를 집어주었는데, 아베나는 아무 생각없이 즉각 마체테를 들어 다넬 데이비스 ‘주인님’의 목을 겨눠 내리찍어버렸다. 그러나 목을 베는 대신 왼쪽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끝났지만 백인, 그것도 노예가 노예의 주인에게 칼을 휘두른 대가는 교수형이었으며, 아베나는 ‘나’ 티투바가 보는 앞에서 붉은 솜나무 가지에 낮게 목이 매여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눈이 튀어나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혀를 조금 빼물고 다리 사이에선 분뇨를 놓치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힘 좋은 노예를 그냥 둘 수 없다. 그렇다고 죽여버릴 수도 없다. 농장주는 야오를 산 너머 사는 농장주 존 잉글우드에게 팔아 넘겼지만 야오는 가는 길에 자신의 혀를 잘라 삼켜버려 스스로의 목숨을 정리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혼자 남은 티투바. 농장주 다넬 데이비스는 티투바를 데리고 있을 수 없어 그냥 쫓아내 버렸다. 흑인 노예 공동체는 절대 어려운 검둥이를 내치는 법이 없어서 아프리카 해안 쪽에 사는 나고족 출신으로 원래 이름이 예툰데이지만 크리올식 이름인 ‘만 야야’라고 불리는 과부가 거두었다. 만 야야는 남편과 두 아들이 바베이도스에서 흔하던 반란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당한 후 살짝 제정신을 놓아버렸는데, 정신이 나간 그곳에 아프리카 주술의 염력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만 야야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티투바에게 치료와 주술에 관하여 알려주고, 이를 위한 약초와 동식물과 그것들의 배합 및 의식의 세부 사항을 모두 물려주었다. 티투바의 초년 시절에 주위에 벌어진 세 명의 죽음. 만 야야, 엄마 아베나, 그리고 의붓 아버지 야오. 이들의 영혼은 저 먼 강을 건너 안식하는 대신 티투바가 훗날 생을 마감해 스스로도 여전히 세상에 머무를 때까지 아이의 주위에서 끊임없이 애정을 가지고 조언하고, 격려하고, 위안한다. 이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영혼은 당연히 만 야야. 만 야야 할머니는 티투바에게 속삭인다.


​  “넌 살면서 고통을 받을 거다. 많이, 많이. 하지만 넌 살아남을 거다.”


​  농장에서 쫓겨나 저절로 자유를 얻은 티투바는 바베이도스 섬의 외진 곳에서 혼자 움집을 짓고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수호 영혼과 교감하는 생활을 한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어찌하리. 아이의 눈에 들어온 남자. 스무 살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존 인디언. 키가 커서 휘청이고 피부색은 연한 데다가 머리카락이 곱슬거리지 않는 사내. 존의 아버지는 영국인이 학살하지 못한 극소수의 원주민 가운데 한 명으로 8키에(240cm, 과장이겠지)의 장신이었단다. 이이가 아프리카 나고족 여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만들어서 이름을 존이라 했고, 아버지가 원주민이라는 것만 알아, 이름 뒤에 성姓 비슷하게 ‘인디언’을 덧붙였다. 난데없이 티투바에게 몰아치기 시작한 갈증. 아이는 끓어오르는 갈증을 견디다 못해 만 야야를 불러낸다.

  “만 야야, 그 남자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만 야야는 안타까이 티투바를 내려보다가 대답한다.

  “남자들은 사랑하지 않아. 소유하지. 노예로 만든다고.”

  아베나의 영혼도 옆에 선다.

  “왜 여자들은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걸까? 이제 네가 물 저편으로 끌려가게 생겼구나.”


​  물 저편? 그렇다. 존 인디언은 과부 농장주 수재나 엔디콧의 가장 총애하는 노예였다. 검둥이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강퍅한 늙은이이지만 어울리지 않게 완강하게 노예제도를 반대해서 남편이 죽자마자 집안의 모든 노예한테, 존 인디언 한 명만 남기고 전부 자유를 주기도 했다. 수재나 엔디콧은 티투바에게 주술의 힘이 있는 것을 알고, 물론 몰라도 그랬겠지만,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혹독함을 보여주었다. 티투바 역시 여주인을 미워한 것이 당연하고. 누구를 함부로 미워하지 마시라. 미움을 받는 사람 역시 저이가 나를 미워한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같이 미워하게 될 터이니, 티투바는 마음 속으로 주인을 저주했다.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만 야야가 기겁을 해 티투바 앞에 나타나 티투바를 진정시킨다.

  “불편하고 창피한 병에 걸리는 정도만 해.”

  이틀 뒤, 수재나 엔디콧은 목사 부인과 티 타임을 갖던 중 다량의 오줌을 흘리기 시작하고 이후 침대에 누워 극심한 경련을 동반한 악취의 오줌으로 엉덩이를 적시다가 죽고 만다.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데, 노예제도 반대자답지 않게 존 인디언을 극도로 교조적인 칼뱅주의 목사 새뮤얼 패리스에게 팔아버린다. 자신의 전 재산을 구호단체에 기부한 반면에. 새뮤얼 패리스 목사는 바베이도스에서 장사를 해 한몫 쥐려 했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약간의 재산만 늘린 채 이제 고향 보스턴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리하여 자유인 검둥이 티투바도 남편 존 인디언을 따라 날씨도, 사람들 성격도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처럼 차갑디 차가운 북미 보스턴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


​  <나, 티투바, 세일럼의 마녀>는 처음 읽은 콩데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작품의 2부에 접어들어 무대가 바베이도스에서 보스톤을 거쳐 세일럼 마을로 넘어가자마자 다른 두 작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 하나는 아서 밀러의 <시련>이었고, 다른 하나는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였다.

  이 작품은 1692년에서 93년까지 정말로 있었던 마녀 재판을 토대로 쓴 픽션이다. 이 재판을 통해 열아홉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남자 한 명은 누운 상태에서 가슴 위에 차츰 무거운 돌을 올려 놓아 죽게 만드는 압사형을 당했다. 정말로 마녀가 있어서? 그건 안 알려드린다. 마녀의 마법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의 음모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마녀로 몰아 기꺼이 죽게 만드는 연극을 한 단위의 공동체에서 벌이는 일. 여기에 기꺼이 큰 역할을 맡는 소녀, 처녀들. 아서 밀러가 이미 이 주제로 <시련>을 쓴 바 있다. <시련>이 사실에 더 가까운지, 마리즈 콩데의 <…티투바…>가 더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두 작품 다 픽션이라는 점.

  재미있지만 읽기에 불편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아프리칸 디아스포라, 노예제도, 식민주의, 페미니즘, 인종주의까지는 좋은데, 표현이 내 수준에 과하게 직설적이라서. 그래도 이이의 대표작 <세구: 흙의 장벽>은 꼭 읽을 생각이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olcat329 2023-05-11 07: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 처음 읽어봐요. 저 <시련>은 연극으로 봤는데 이 소설도 그 시대 배경, 비슷한 주제군요.

Falstaff 2023-05-11 15:26   좋아요 1 | URL
연극 보셨군요. 전 희곡만... 그래도 충격이던걸요.

잠자냥 2023-05-11 11: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의 <이반과 이바나의 경이롭고 슬픈 운명> 읽고서 골드문트 님처럼 재미는 있지만 좀 불편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래서 그런가... 저 또한 <세구>는 꼭 읽어야지! 하고 아직 결심만 하고 있는 상태로 멈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5-11 15:26   좋아요 1 | URL
아, 그럼 다른 작품도 그렇다는 말씀이네요.
세구... 좀 걱정되네요. 뭐 인생이죠. ㅋㅋㅋ
 
왕은 없다 대산세계문학총서 183
응우옌후이티엡 지음, 김주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베트남 소설은 처음 읽는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  작가 응우옌후이티엡은 1950년 4월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출생시기와 장소,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생각해보면 도무지 응우옌후이티엡이 《왕은 없다》 같은 소설집을 냈다는 게 의아할 수 있다. 1950년 하노이 출생. 유년시대에는 프랑스 군의 잔인한 학살 전쟁을 거쳤고, 이어서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엔 스물다섯 살의 혈기방장한 청년이었을 텐데, 놀랍게도 근세 베트남의 가장 곤고하고 처절한 시기를 관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집 《왕은 없다》 안에서 독자는 전쟁의 참화와 후유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 현대사에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 전쟁은 아니었다. 베트남 통일이 정식으로 이루어진 1976년의 바로 다음 해인 1977년엔 캄보디아와의 국경 전쟁이, 1978년부터는 캄보디아와 동맹을 맺은 중국과도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이이가 소설가로 등단한 시기가 1986년임에도 소설은 격변하는 시대상을 산문에 담기 위하여는 일정한 숙성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시는 시인의 감상과 감정이 즉각적으로 터져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소설가들은 심지어 70년대까지도 줄기차게 전쟁과 관련한 작품을 쏟아냈다. 21세기에 와서도 5공화국의 독재와 폭력, 그리고 광주항쟁을 소재, 주제로 소설가들은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이런 폭력에 노출된 유년, 소년, 청년기를 거친 작가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음각된 상처를 여전히 문자화 할 수밖에 없어서, 베트남에서 딱 이런 시기를 거친 응우옌후이티엡의 작품집에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상처가 드러나지 않은 것과, 현대사에 관한 숱하게 많을 작품과 작가를 뒤로 하고 딱 이 작가를 선택해 세계문학총서 시리즈의 한 자리를 내준 문학과지성사의 선택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 아니다를 떠나 감탄과 찬사를 표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이라고 해서 모든 작가가 항 프랑스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만 쓰라는 법은 없다. 지금은 없다. 하지만 응우옌후이티엡이 등단할 무렵인 1986년엔 여전히 소비에트가 건재할 당시라서 성문법은 아니더라도 혁명과 공산주의 체제에 복무하지 않는 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랄 것은 연이은 전쟁의 참화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미국 등의 고립정책, 그리고 자연재해까지 삼중고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그나마 현명했던) 베트남의 지도부는 응우옌후이티엡이 등단한 1986년에 드디어 개혁개방을 통한 발전을 목표로 도이머우 정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등단시점이 절묘하게 이때와 맞물려 있는 것이 우연일까, 작가의 의도(서른여섯 살의 늦은 나이에 등단한 것이 혹시 기다림)일까? 어떤 경우라도 일단 《왕은 없다》 안에 실존주의, 리얼리즘,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문학이 끼어들지 않았던 것은 독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작품은 상당 부분 중국의 현대소설과 많이 다르고, 적게는 비슷하다. 작가는 전쟁중이던 1970년에 하노이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하노이 출생, 그러니까 대도시인 하노이 토박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엔 프랑스 식민군대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북부 평야 지대의 농촌 마을에 유랑을 하며 살았고, 외조부로부터 한학과 한시를 배웠으며, 이때 천주교 마을에서 지내면서 천주교 교리와 성경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품집 《왕은 없다》의 무대는 하노이를 비롯해 대도시, 중소도시, 시골, 산골, 소수민족이 거주지인 고산지대, 강변 등 거침이 없고 등장인물 역시 인텔리, 부자, 지주, 퇴역군인, 거지, 사냥꾼, 농부, 어부, 소수민족, 벌목꾼, 사기꾼 등을 망라할 수 있었다. 역자 김주영은 해설에서 “심지어”라는 부사까지 보태 말하기를 똥 시장 주인까지 등장시킨다고 했다. 똥 시장은 정말로 사람의 똥, 인분, 발효하지 않아서 “생 인분”이라 표시한 막 눈 똥을 거름용으로 판매하는 시장을 일컬으며, 똥 시장의 주인 혹은 매니저 또는 지배인은 아무리 자신이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못하는 일종의 열등감이랄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을 터, 이런 직업인까지 통틀어 집합시켰다. 불과 열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실은 책 한 권에. 등장하는 종교도 베트남의 토속신앙, 불교, 유교, 천주교, 심지어 샤머니즘까지 뭐 하나 더 보탤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 사는 맛이 나고 사람 냄새가 난다. 중국 소설처럼 악착같고 복수 같은 거 좋아하는 점도 있지만 그들처럼 과하지 않으며, 한 사건이 있으면 그것이 어차피 그렇게 마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다 그런 것이지, 라는 식으로 맺어지는 것이 많다. 굴곡 많은 시절을 누구 하나 징글징글하게 살지 않은 이가 있었겠는가만 응우옌후이티엡은 “사는 건 참 쉽지.”라고 말해버리고 만다. 지금, 21세기의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기엔 작품이 세련되었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소설이 세련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세련 대신에 뭔가 독자에게 전해주는 것이 세련보다 더 바람직할 수도 있는 바, 읽어보시라. 간혹 이이의 작품은 따듯하기도 하다. 따듯해서 해피엔드? 천만의 말씀. 전도연과 최민식 커플의 영화 <헤피 엔드>가 정말 해피했나? 해피하게 끝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따듯할 수도 있고, 해탈할 수도 있고, 초월할 수도 있다.

  “투박한 온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은 다만 조심하시라고 얘기할 수밖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대산세계문학총서 181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이자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몽테스키외의 소설? 작가 이름을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철학자이며 법학자. <법의 정신>이 세상의 명저로, 당대의 클래식으로 알려진 사람인데 설마 다른 집안 사람이겠지. 그런데 내가 아는 몽테스키외가 맞았다. 그가 소설도 썼다. 그것도 서간체 소설로 18세기 초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과 영국에까지 필명을 날리고 발행부수도 당시 수준으로는 거의 밀리언 셀러 비슷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나오고 서간체 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영국의 사무엘 리차드슨이 <파멜라>를 썼고, 피에르 쇼데를로 라클로도 <위험한 관계>를 썼단다.

  나는 우연히 <파멜라>도 <위험한 관계>도 읽어봤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더불어 18세기 작품이며 서간체 소설인데, 21세기를 사는 독자가 읽고 공감하며 즐기기에는 과하게 올드하다. 물론 그렇다고 읽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17세기 문학작품을 선택할 경우엔 처음부터 올드 스타일,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음, 당연시 여기던 젠더와 계급, 인종 차별 등을 충분히 감안하셔야 할 것이라는 도움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일 뿐이다. 물론 지금 읽어도 포스트 모던처럼 읽히는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도 있지만 로렌스 스턴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특히 서양의 문학 작품을 읽으면 작품 속에서 자주 거론하는 고전들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니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니, 심지어 인용 순위 1번을 차지할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마저도 일단 “읽어내고야 말겠다.”라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 당연히 내 경우에 한해서 하는 말이며,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만 골라봐도 그랬다는 거.


​  전에 읽은 어느 책에서 (율리 체의 <잠수 한계 시간>이다!) 대학원 졸업하면서 지도교수 인터뷰를 하는데, 학위 논문을 쓰느냐 아직 수준에 미치지 못했느냐, 하는 자격을 위한 구술시험에서, 교수가 인터뷰이에게 질문을 하기를, 답은 뻔하게 몽테스키외이긴 하지만, 질문의 핵심은 몽테스키외의 정확한 철자, 알파벳이었다. 주인공은 철자는커녕 몽테스키외가 어쩌고저쩌고 몽테스키외인 줄도 모르는 거라, 내놓고 교수한테 비아냥거렸고, 그래서 당연히 낙방하는 줄 알았지만 지도교수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는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읽은 적 있다. 이 독후감 읽는 분 가운데 무슨 몽테스키의 알파벳을 컨닝 없이 쓰실 수 있는 분께 만 원 드림.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어떠셔? 후덜덜하지?

  보르도 근교에서 태어난 귀족의 자재다. 혁명 이전에 귀족이었으면 정말 귀족이다. 혁명 끝나고 갑자기 정권을 잡은 코르시카 촌놈 보나파르테가 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개나 소나 싸움 한 번 잘했으면 그냥 던져주던 것이 작위였고, 이때 작위 받은 신 귀족들은 혁명 전 골수 귀족들한테 은근히 야코가 죽어 슬슬 눈치를 봤었다니까. 18세기에도 프랑스의 상류계층은 군인, 성직자, 즉 “적과 흑”이 제일이고 이 다음이 법관. 몽테스키외는 제3의 상류층이면서, 품위에 맞지 않게 소설도 썼다. 하긴 이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가 정점을 달릴 이 시점엔 몽테스키외와 함께 백과전서학파의 대표선수로 이름을 날린 드니 디드로도 재미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하기도 한 <운명론자 자크>를 썼으니 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 말은 슬쩍 하고 지나갔지만, 이 책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중요한 힌트 하나를 던졌다. 때는 바야흐로 절정을 달리던 계몽주의 시대. 게다가 몽테스키외는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의 대표. 이러면 책이 재미가 있을까, 없을까? 딱 부러지게 얘기하면, 당시엔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근데 지금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니, 몽테스키외가 엄숙한 법학자이며 철학자일지라도 일단 소설을 썼고, 상류계급에서는 적과 흑에 이은 넘버 3의 떨거지인지라 불만이 없을 수 없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불만을 다 털어놓을, 아니, 배설해버렸을 터이고, 당연히 이 와중에 적과 흑들의 심기를 조금이나마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책을 사 읽어볼 당시 세미 부르주아들이 볼 때 얼마나 상쾌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렇겠지? 그렇다니까. 하지만 이후 3백년이 흐른 지금 발랑 까진 현대의 독자가 읽으면, 그저 피식, 옛날엔 꼰대들이 이런 식으로 놀았군. 하고 그만일 확률이 높다. 나처럼.

  실제로 몽테스키외가 이 책을 출간하고, 진짜로 읽어본 적과 흑, 가운데 빨간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원래부터 책 읽기를 그리 즐기지 않아서 시비를 걸지 않은 것 같고, 흑black, 사제들이 열을 받아 주교한테 쪼르르 달려가, 주교님, 몽테스키외라고 하는 스키가요, 소설을 하나 써서 냈는데요, 주교님은 절대 읽어보지 마셔야 합니다. 뇌심혈관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특별히 조심하셔야 하거든요. 요 지랄을 했고,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게 나 같은 유물론자나 프랑스 주교나 비슷비슷해서, 주교는 득달같이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사 읽어봤더니, 이게 정말 스팀이거든. 그리하여 “신을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언어” 운운하며 비난을 한 바 있으며, 몽테스키외는 무려 흑의 두목께서 이리 얘기를 하시니, 상당부분을 수정 및 삭제해 개정판을 내기에 이른다. 물론 오늘날 번역 출판한 것은 다 원복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  몽테스키외가 왜 난데없이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썼느냐 하면, 프랑스에서 벌어졌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불만스러운 사태를 프랑스인의 입을 통해 원고지를 메꾸었다면, 부르봉 왕가와 그들의 똘마니인 적과 흑이 프랑스 산 주둥이를 내버려두었겠느냐,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점을 고민했겠지. 그리하여 프랑스에 처음 와보는, 그러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는 반 유배를 당한 페르시아, 당시 시각으로 얘기해서 대 아시아 지역 사람이 바라본 프랑스/유럽 문화의 모순점을 유럽인들이 미개한 종교로 치부하고 있는 무슬림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름 재미있게 스토리를 전개한다.

  때는 1711년 4월. 페르시아의 대 귀족 우스벡이 고향 이스파한을 떠나 수도 쿰에서 하루만 머물고 트뤼키예로 향하며 친구 루스탄에게 보내는 편지를 1번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앞으로 160 개의 편지가 더 나와 어느덧 1720년이 되고, 이 사이 7십여 년 동안 왕좌를 깔고 앉았던 루이 14세가 숟가락을 놓고, 증손 루이 15세가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으며 루이 15세가 15세 될 때까지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펼치게 된다. 페르시아의 대귀족이라고 하지만 우스벡은 뭐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왕의 눈 밖에 나서, 작품 내내 모든 아시아가 다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또 그게 크게 틀린 건 아니지만, 아시아 나라에서 왕의 눈 밖에 났다 하면 대부분 골로 능지처참이나 참수를 당해야 하는 것이 일반상식이라 우스벡 역시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페르시아 환도에 목이 잘리느니 일단 왕이 생각을 바꿀 때까지,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긴 하지만, 일단 페르시아를 튀자, 튀긴 튀는데 혹시 모르니까 이왕 가는 거 멀리 튀자, 하고 굳게 마음을 다진 후, 수없이 많은 처첩들의 장소, 하렘에 든다.

  페르시아 거 참 웃긴 나라였다. 대귀족이고 남편이잖은가. 두번째 아내와는 혼인 식을 올리긴 했지만 우스벡이 매일 시도를 했어도 아내는 무려 몇 달 동안 처녀의 몸이었단다. 결혼을 해도 남자와 피부를 대는 것 자체를 명예, 정절, 절개의 훼손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이거 확실히 비정상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스벡이 거의 유배를 떠나기 전날 밤에는 많고 많은 처첩들을 한 방에 몰아놓고, 이 사람들도 좌식 생활을 하니까, 금침에 비스듬히 누운 우스벡은 모든 처첩의 옷을 홀랑 벗기고, 이후엔 어떻게 했는지 나도 모른다. 책에도 안 나온다.

  다음날 길을 떠나며 환관 대장에게 하렘과 처첩들의 정조, 절개, 명예에 관한 권한을 위힘하고 길을 나서는데 가관은 가관이다. 당연히 책의 마지막에 가서 이 처첩들의 웅변으로 일부다처와 하렘의 일은 독하게 욕을 먹기는 하지만 우스벡은 유럽으로 향하면서 내내 하렘 걱정뿐이다.

  물론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는 무슬림의 시각으로 본 그리스도교 특히 로마 가톨릭의 부패, 허위 같은 것에 관한 신랄한 비난, 유럽 문명과 문화의 허실, 제도와 상업, 계급의 불평등에 관하여 침을 튄다. 이게 바로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였겠지.


​  이 책은 처음에 사서 읽고 책꽂이에 꽂아 놓을 생각이었다. 비록 재미로 치면 좀 떨어질 것 같지만 고전이고, 몽테스키외의 소설이란 희소성도 있고, 기타 등등 뭐 그랬는데, 가장 중요하게 망설이다가 결국 도서관 개가실에서 눈에 띈 다음에야 읽게 된 것은, 서간체 소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태 서간체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본 적이 없다. 암만해도 그게 께름칙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난 서간체 소설을 좋아하지 않나 보다.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3-05-06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골드문트님 리뷰가 더 재미날 것 같습니다 ㅋㅋ “몽테스키외라는 스키가요 책을 썼는데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5-06 16: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 독후감을 즐기셨다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stella.K 2023-05-06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 이 사람 이름을 들었을 때 공저자의 대표와
그 밖의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인 줄 알았다는.ㅋ
근데 좀 아깝네요. 제가 3초 기억자라 이 사람 이름이
그렇게 긴 줄 몰랐습니다. 한 번에 썼으면 문트님한테
도서지원금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ㅠㅋㅋ
이번 생에 이 사람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네요.^^

Falstaff 2023-05-06 16:2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이번 생이라니요. 그럼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한 번 더 사시려 했단 말입니까?
그냥 한 번 읽어보셔요. 이이가 싫으시면 몽테스키 등등 가운데 한 명인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깡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읽을 만합니다. 심지어 추천 목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요. ^^

2023-05-08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0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여태 네 권의 김희선을 읽었다. 처음 낸 단행본 《라면의 황제》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무한의 책>은 요즘 작가들과 완전하게 다른 김희선 만의 세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대로만 하면 앞으로 30년 후에도 독자들이 찾아 읽을 좋은 소설가가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미리 얘기해두자.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내용 모두, 내가 건방지게 무슨 견해가 있어서 하는 평론질이 아니라 한 독자로 작품을 읽고 난 감상, 즉 한 아마추어 독자의 독후감일 뿐이라는 점. 이런 의미에서 조금 매몰차게 이야기하자면 세 번째 읽은 단편집 《골든 에이지》와 장편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를 읽은 다음에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처음 두 권 이상을 기대했건만 작품(들)에 공감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다. 그래, 김희선은 조금 쉬고 나중에 읽자, 마음을 먹고 기다리다가 알라딘의 서평이 좋아 다시 이이의 단편집을 골랐으니 지금 읽기를 막 끝낸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다.


​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을 단 한 문장으로 쓴다면, “드디어 김희선이 돌아왔다.” 《골든 에이지》에서는 작품마다 억지와 작위 같은 것이 보여 즐거이 읽지 못했는데,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전 작품을 통해 시간과, 인공지능과, 차원의 연속 또는 순환과, 현실인식과 사회성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 요소들이 여덟 편의 단편 속에서 적절하게 변주, 연결되고 있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최적의 상태로 이야기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 것 같다.

  단편 소설이라서 각각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작품들이 독특한 주제를 갖고 있는 바에 미리 김을 빼놓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욕이나 먹을 일이다. 다만 몇 가지만 말하자면, 두 번째 실린 <달을 멈추다>를 읽으면서 나는 최민식도 출연한 헐리웃 영화 <루시>가 줄곧 떠올랐다. 사람의 뇌를 슬라이스 해서 스캔한 후 컴퓨터에 저장을 하면, 육신은 숨을 거두어도 뇌의 활동, 인간이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루시>에서 마지막 장면, 사람 자체가 컴퓨터와 결합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게 봤으며,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를 이런 식으로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즉, 우주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이게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비슷하게) 한 인간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쳐들어가 원래 있던 영혼을 간단하게 제압해, 그 인간의 영혼은 육신을 갈아타면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보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겠느냐, 하는 거다. 스웨덴의 뇌과학자가 저 통일신라 시대의 월명사와 같은 인물로 <제망매가>를 썼다는 것, 시간은 결코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이게 윤회인가, 아닌가. 아니다. 시간의 다양한 흐름일 뿐이다.

  사실 나는 유물론자로(20세기 말에 젊고 예쁜 문학 공부하는 한 여성이 나더러 그랬지, 흥, 유물론자 좋아하네! 그이는 지금 뭐하고 사는지 몰라.) 영혼 같은 건 뇌의 원자 신경조직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영혼=생각. 더 쉬운 얘기로 하자면, “영혼이란 없다.” 하지만 내가 영혼 따위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생을 이룰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까지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이 AI화 하고, AI화 했으니 당연히 컴퓨터 기억장치에 내장이 되어, 즉 영혼이, 창조까지 하는 AI 단계로 들어가 전압이 흐르기만 하면 언제까지라도 영생하는 단계라는 건데, 사실 영생이라기보다 인간 문명이 유지되는 선까지이기는 하지만, 인간문명이 사라지면 전기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기껏해야 대 빙하기가 도래할 3만년 정도라도, 그게 어디야 3만년이, 몸은 없어질지언정 영혼, 뇌활동, 생각일 뿐이겠지만,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을까? 하긴 생로병사가 없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이제 겨우 수십 년을 산 나도 그동안 경험하고 배우고 읽고 해서 쌓인 메모리가 즐겁지 않은데 무려 3만년동안 이 짓을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고. 난 그저 때가 오면 소멸하는 그런 인류가 되련다.


​  시간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일찍이 시간여행을 떠나는 소설작품은 좀 있었다. 저 멀리 <타임 머신>도 있고, 가까이엔 복거일이 쓴 <시간 속의 나그네>도 있었다. (모두 여섯 권으로 된 복거일의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3권까지만 읽으시라. 20년 후에 완결한 후반부는 완전히 그냥 보수가 아니라 꼴보수로 자리를 굳힌 복거일의 신자유주의 신념 빼면 아무것도 없으니) 이 두 작품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지만 시간의 흐름은 딱 하나밖에 없어서 후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미래 제작물,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금속제품 같은 것을 절대로 남기지 않아야 하는 반면에, 김희선의 경우엔 아무 제재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는 길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경우의 시간 길을 통해 우주가 흘러간다는 생각은, 또한 자연스럽게 현재의 우주가 커다란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이 커다란 거북이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다른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확장한다. 1990년대 초에 복거일의 시간여행에 매료되었는데, 이제 김희선을 읽으니 복거일도 확실히 낡았다. 근데 이 거북이 장면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화 MIB, <맨 인 블랙>의 로커(사물함)을 차용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로커 안의 로커, 그 안의 로커, 로커 밖의 또다른 로커.

  이 책에서 김희선의 시간에 대한 집요한 사색은 계속된다. 현상의 삼차원에 한 차원을 보태는 의미에서 시간이라면, 그것을 AI와 연결해,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니터가 진실인지, 모니터 밖에 앉은 당신의 세계가 진실인지도 당연히 의문문을 던져야 하고, 김희선은 정말로 그러고 있다.


​  김희선이 돌아왔다. 이 책이 내가 아는 김희선이다.


  옥의 티.

  “떡갈나무 탁자는,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고나서 얼마 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그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책 『고백록』을 그 떡갈나무 탁자에서 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p.49)

  :  『고백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니라 성직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글을 써서 돈을 받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할 터.


​  하나 더? 인류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이 1962년 소련 과학 당국의 ‘꿈의 기록’에 관한 프로젝트에 참여를 강요당하는 과정에 뇌과학자가 “블랙홀”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블랙홀이란 개념은 벌써 있었지만, 미국의 천체물리학자가 최초로 블랙홀이란 단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 해가 1962년이다. 소련은 블랙홀이란 단어를 최강의 냉전 상대국인 미국인이 제안한 게 재수없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걸로 기억하는데 어떤 단어인지는 잊었다.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23-05-04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시간은 정말 어려워요^^

영혼(정확히는 뇌)가 AI에 올라타는 것으로 우리는 영생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소설에선 늪 속의 유기물로 합쳐지고 어떤 소설에선 곰팡이 같은 균류에 합쳐지는데 이젠 가상세계에 남게 되겠네요. 뭔가 잊혀질 권리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Falstaff 2023-05-05 07:30   좋아요 1 | URL
오랜 인터넷 동무님하고 얘기하다가....
영혼이 AI에 올라타서 기계의 몸은 얻는 일, 다른 사람과 육체를 스왑하는 일은 이미 <은하철도 999>에서 나온 아이디어이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네 번째 남자>에서 이미 다른 육체로 영혼이 옮겨다니는 빙의를 경험했다 등등....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제가 은하철도 이전 세대, 많이는 아니고 바로 전 세대라서 미처 몰랐거든요.

꼬마요정 2023-05-05 10:11   좋아요 1 | URL
아!! 맞네요. 은하철도999는 기계몸으로 가는 거였죠? 다른 사람과 육체를 바꾸는 이야기 중에 오래된 건 달마대사 이야기일 거 같아요. 갑자기 생각나요. 그리고 울트라맨도 있네요. 테레시아스는 남자 여자 모두의 몸으로 살기도 했죠. 오오 소름 돋아요. 세상에 옛날 사람들 천재인가봐요!!!

얄라알라 2023-05-07 1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과 골드문트님,
알라딘 서재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계십니다. 물론 존재 자체로 감사드리지만, 이렇게 꼼꼼히 알려주신 덕분에 잘 모르고 실수할 경우를 줄여주시니까요. [고백록] 저자 이름 기억하는 데만도 3초 걸리는 저로서는 황제와 성직자를 구분해야함을 오늘 첨 생각해보았습니다.

김희선 작가님 골드문트님 리뷰 읽으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돌아왔다!˝^^ 애정 담뿍 담긴 응원!

Falstaff 2023-05-07 21:22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제가 어떻게 cyrus 님하고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저 그냥 황감하지만 기분은 좋네요.
제가 김희선 데뷔 때부터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그만 최근 두 권이 마음에 안 들어 왜 이러나 싶었었거든요. 뭐 그저 아마추어가 책 읽은 감상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답니다. ^^
 
아이리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대산세계문학총서 71번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별과 사랑>을 흥미롭게 읽어 포니아토프스카의 1988년 작품 <아이리스>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했지만, 정기구매 예정인 도서라 해서 신청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달 후, 정말 개가실 신규 도착 서가에 이 책이 꽂혀 있어서 마치 소매치기의 손놀림처럼 재빨리 낚아챘더니 책의 첫 번째 독자로 등록되는 순간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다른 사람이 갈피를 넘겨본 적이 없는 새 책은, 책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법이다. <별과 사랑>은 사실 읽은 지 오래라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할 줄 아는 건 천문 관측밖에 없는, 그래서 다른 방면의 것들에 관해서는 재수없기 그지없는 멕시코 과학자가 자기한테는 오직 천문학 연구가 낙후한 멕시코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애정이었다는 것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게 유행한 환상문학적 요소를 제거한 포스트 붐의 한 형태, 리얼리즘 방식으로 쓴 것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작품을 읽고 시간이 오래 흘러 확정하지 못한 채, 그저 “것 같다.”라 말하는 것을 양해해주시면 좋겠다. 이렇게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가 내 기억에 새겨진다.

  그저 작품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이의 독특한 신분도 흥미를 끌었었다. 25년 정도 오래된 인터넷 동무님이 일러준 내용.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우리가 마리 퀴리로 알고 있는 퀴리 부인이다. 퀴리 부인의 둘째 딸 에브 퀴리가 어머니 마리 퀴리의 전기를 썼고, 전기의 일부가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 나왔다고 한다.


​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예.”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아라.”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는 1764년에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보호하고 나라의 결점을 알아 대책을 궁리했지만 용기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  이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라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인 스타니스와프 2세이며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고조 할아버지다.

  그리하여 작중 주인공 마리아나가 프랑스에서 살 때의 베스 할머니는 당연히 공작부인이었고, 네 아들, 블라디미로, 에스타니슬라보, 미겔, 카시미로와 네 명의 며느리와 할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열 명의 공작과 공작부인이 밀접하게 지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아이리스>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자전적 작품이라는 걸 밝힌 셈이다.

  그러면 어머니 쪽은? 작가의 어머니는 멕시코 사람이다. 그것도 고위 귀족이어서 부르주아 귀족은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늘 타도의 대상이 되는 법이라,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에서는 혁명이 하도 많이 일어나 언제, 어떤 혁명을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프랑스로 건너와 살다가 폴란드 왕족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파리에서 엘레나를 낳았다. 이때가 1932년. 잔나비 띠 소녀 엘레나가 열 살이 되던 1942년엔 독일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비시 괴뢰정부가 나치에 협력하던 시기. 이미 연합군에 입대해 전투중이었던 아버지 때문에라도 더 이상 프랑스에서 사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아 어머니의 고향 멕시코로 떠나고, 작품에서도 아버지를 뺀 가족 모두가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같다. 맞다니까, 자전적 소설이.


​  작중 주인공 마리아나는 자매 가운데 언니다. 한 살 적은 동생 소피아는 매사 반항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시끄러운데다가 활발해 자유스럽게 춤추는 걸 즐기는 반면, 마리아나는 생각이 많고, 생각이 많으니 세상살이에 온갖 걱정거리가 많은 동시에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자기 주장이 있어도 그걸 굳이 주장해서 세상 시끄럽게 만드느니 차라리 입 속에 담아 놓고 조금 불편하지만 일신상의 편안함을 중요시한다. 하기 싫은 피아노 교습도 꾸준히 받지만 당연히 성과가 큰 건 아니다. 책 읽기와 엄마 루스의 눈길을 조금이라도 많이 받기를 소원하는데 어떤 성향인지는 이 정도면 아실 듯. 자매는 파리에서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다. 완벽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 프랑스 여성 가정교사 마드무아젤 뒤랑의 요강을 비우지 않았다고 귀싸대기를 맞으며. 물론 마리아나는 한 가지 이유로 두 번 따귀를 맞는 적이 없었지만 소피아는 마드무아젤 뒤랑에게 눈길로 칼날을 던지면서도 줄창 따귀를 얻어터졌다. 엄마 루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 매일 그리도 파티며, 쇼핑이며, 바람 피우는 거 같지는 않지만 그리도 맨날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지 마리아나가 엄마 얼굴 한 번 보기도 바쁠 지경이었다. 이렇게 살았다. 금발을 가진 마리아나는 자기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며, 엄마 역시 프랑스 사람이 아닌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미국 출신인 베스 할머니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에 나온 사진을 통해 보여준 멕시코는 가슴이 아래로 축 처지고 머리뼈가 울퉁불퉁한 흑인 여자들투성이며, 이 여자들은 사람을 통째로 구워먹고 삶아먹는 식인종으로, 이런 사람들만 사는 곳이었거늘.

  왜 할머니가 멕시코 사진을 나쁜 의도로 보여주었을까? 전쟁의 전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일단 남프랑스에 살고 있던 조부모댁으로 거처를 옮긴 마리아나 가족은 이미 어머니가 멕시코 행을 결심한 상태였다. 폴란드 공작인 할아버지와 미국 출신 할머니 기준으로 삼류국가에 지나지 않는, 심지어 미국의 변소로 불리는 멕시코로 친손녀들을 아빠도 없이 데리고 가겠다니 사실 손녀들과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진짜로도 그렇다. 그러니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없었겠지. 하여튼 그래도 갔다. 몇 달 걸리는 항해 동안 소피아는 죽기 바로 전까지 뱃멀미를 했지만 멕시코에 어쨌거나 도착을 했고, 이때부터 마리아나는 다시 갈등 속으로 던져진다.

  “넌 멕시코인이 아냐.”

  “아냐, 난 멕시코인이야.”

  “아니라니까. 넌 양키야.”

  “난 멕시코 사람이야. 내가 멕시코 사람으로 살고 싶으면 멕시코 사람인 거야.”

  “아냐, 넌 금발의 양키야.”

  마리아나는 엄마가 멕시코 사람이리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으면서 열 살 먹은 자신은 벌써 멕시코 사람으로의 정체성을 가지기로 작정을 한 것처럼 묘사를 했다. 뭐 그럴 수 있지. 라틴 아메리카 백인들의 문제는, 아직도 자신들이 유럽인인 것으로 아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로마 가톨릭 신부 자크 퇴펠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럽에서 건너와 멕시코 사람들의 고혈을 뽑아 돈을 벌어 저택을 짓고 살며 여름마다 두어 달씩 유럽으로 휴가 떠나는 것들. 마리아나 식구들이 프랑스에서 살다가 왔으니까, 주로 프랑스 출신 멕시코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는데, 그이들한테 너네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한단다.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멕시코 국적으로 가지고 있는 프랑스 이민자들을 동포라고 생각도 안 하는데 말이지.

  갑자기 자크 퇴펠 신부? 마리아나는 멕시코에서 살면서 드디어 중학교에 들어가고, 전쟁이 끝나서 아빠도 멕시코로 이민 와서 제약 사업을 하게 되는 세월 속에서 스카우트, 즉 소녀단 수련 과정에서 이 자크 퇴펠 신부에게 크고 크고 또 큰 영향을 받는다. 유럽 출신의 부르주아들이 멕시코 현지인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기름과 피를 빨아 치부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등의 혁명성을 심어준다. 이에 깊이 영향을 받은 마리아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부모를 설득해, 멕시코에선 흰 피부의 남자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짓, 예를 들면 가래침을 힘껏 뱉는다든지, 만인이 바라보는 데도 나무 이쑤시개를 쓱 뽑아 이 사이의 음식 찌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튕겨버리는, 손톱 밑이 새까만 신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이 결과, 아버지와 소피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반면에 어머니 루스와 마리아나는 완전히 자크 퇴펠 신부한테 반해버린다. 사회주의적 혁명을 웅변하는 신부는 식비와 주거비를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백인 부르주아의 저택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어 그곳에 들어와 살게 되며 어머니와 큰딸을 현혹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성장소설적 분위기로 탈이 바뀐다.

  재미있다. 종교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나는 신부 등장 이후에 오히려 흥미가 반감했지만 종교를 가진 분들은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5-02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소설가가 왜 이렇게 많은지요!^^
내용의 배경으로는 프란츠 파농도 생각납니다.
이 책도 저장합니다~

Falstaff 2023-05-02 11:38   좋아요 1 | URL
파농은 프랑스라도 앤틸리스 제도의 프랑스령에서 태어난 유색인이니까, 포니아토프스카보다는 다음 주에 독후감을 올릴 마리즈 콩데와 더 비슷할 듯합니다. ㅎㅎㅎ
파농.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

그레이스 2023-05-02 11:41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읽었는데, 유색인으로서의 심리와 문화정체성을 너무 잘 파헤쳤더라구요. 자신에 대한 정직한 탐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잠자냥 2023-05-02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왠지 금수저일 거 같았는데, 은수저였군요...
근수저인 저랑 다락방이 곧 읽어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5-02 13:34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정도의 출신 성분은 아직 구경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쟁 당시에 꼼짝 않고 파리에 있다가 아빠 따라 폴란드로 갔으면 숙청 최우선 순위였겠지만요.
이 책 역시 별점을 네 개 줄까, 다섯 개 줄까 고민하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ㅋㅋ

stella.K 2023-05-02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매치기의 손놀림처럼 재빨리 낚아채시다닛!
정전기가 파박 일어날 것 같습니다.ㅎㅎ
그런데 책을 잘 안 읽는 울나라 정서상 이렇게 잘 안 알려진 책은
그렇게 재빠르지 않으셔도 되지 않았나 싶네요.ㅋ
근데 평소 소설에 조예가 깊으신 문트님이나 재밌게 읽지
저같이 실팎한 사람은 읽을 수 있으려나 싶은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니
정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부가 등장하니 정말 구미가 당깁니다.ㅋㅋ

Falstaff 2023-05-02 19:26   좋아요 2 | URL
아주 재미나요, 신부가 등장한 다음 부터는요.
사춘기 소녀들이 딱 그 시절에 얼토당토 않는 사람을 흠모하는 감정이 드러나는데,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더 흥미로웠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

coolcat329 2023-05-03 0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조 할아버지가 왕이었다니 소설가들 중 최고 계급아닌가요? ㅎㅎ
지금 아는 작가도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한데 이렇게 자꾸 알게되네요~^^

Falstaff 2023-05-03 16:11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한 제일 높은 귀족의 자제입니다.
그럼 뭐해요, 벌써 21세기인 걸요. 촌스럽게 귀족은 무슨... 그죠? ㅎㅎㅎ
이 사람 작품이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