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양산
마쓰다 마사타카 지음, 송선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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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현 기타마쓰우라에서 1962년에 태어난 마쓰다 마사타카는 나가사키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토로 가서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철학哲學. 금속공학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철학을 했든, 금속공학을 했든 자기 전공과 상관없이 극장 주변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에 극단 “스페이스 앤드 타임 씨어터”를 창단해 7년간 운영하며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극작가가 직접 극단을 만들어 자기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건 우리한테도 낯설지 않다. <속살>을 쓰고 연출도 한 이은준 역시 스승 박근형과 함께 극단 “골목길”을 창단했고, 12년 후에는 스스로 독립해 극단 “파수꾼”을 만들어 자신의 대표작인 <속살>을 직접 연출했다. 교토조형예술대학의 객원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릿교立敎대학 현대심리학부 영상신체학과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영상신체학映像身體學이 무엇을 가르치는 공부인지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릿교대학에 전화해볼 생각까지 나지는 않는다. 설마 카메라(영상) 앞에서 신체를 어떻게 노출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건 아니겠지?

  <바다와 양산>은 1994년에 기시다 구니시 연극상과 오사카 가스gas 주식회사가 후원하는 OMS 연극(대상이 아니라) 특별상을 받은 작품으로 1년 전 OMS 대상을 받은 <비탈 위에 있는 집>과 더불어 마쓰다 영상신체학과 교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미리 내 감상을 말하자면, 딱 내 취향이다. 괜히 잡다한 대사와 과장된 연기 같은 거 없이 속으로는 쌓인 거 많아도 겉으로 특별하게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 다분히 그리고 특히 일본인에 많은 감정 숨기기와 조금 다른,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속 삭힘’ 같은 연극. 그리하여 공연을 직접 보면 혹시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짜냐, 내 취향에 맞을 거 같은 걸.

  역자 송선호의 작품 해설을 보면 마쓰다는 주요 작품의 무대로 일본식 거실인 “차노마”를 선택했다고 한다. <바다와 양산> 역시 마당이 보이는 차노마를 무대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 “평범한 부부의 삶과 죽음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지만 인물들의 심리와 내적 갈등을 정교하고 깊이있게 묘사한 아름다운 작품”이라 말한다. 내가 읽은 감상과 상당히 가까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규슈 지방의 작은 도시에 고등학교 교사이자 소설가인 요지洋次와 불치병에 걸려 곧 세상을 떠야 하는 아내 나오코直子가 세들어 살고 있다. 무대는 관객석 가까이 차노마가 있고 그 너머에 마당을 배치했다. 막이 오르면 요지가 마당쪽을 보며, 그러니까 객석을 등지고 앉아 손톱을 깎고 있다. 이어서 등장하는 주인집 여자 세토야마 시게. 시게는 사실 요지에게 밀린 월세를 독촉하려고 온 것이지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못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겠지. 고등학교 교사이고 소설가라면 수입이 웬만할 터인데, 극중에 시게의 작품을 받으러 출판사 직원이 와서 원고료도 주고, 지붕 수리하는 것을 도와줄 정도이니 그럴 것 같은데, 병든 아내의 진료비와 약값으로 많이 써서 그런지 사는 건 궁색하다. 세토 아주머니가 퇴장하고 나오코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등장한다. 병세가 조금 호전이 되어 시장에 다녀왔고, 오늘 길에 조금 지쳐 공원에서 잠깐 쉬다 오는 길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공원 벤치에 양산을 두고 온 거다. 그래 잠깐 부부끼리 서로 자신이 가서 양산을 가져오겠다고 하다 남편이 공원에 간 사이에 주인집 남자 세토야마 다케후미 씨가 와서 운동회에 사람이 모자라 요지가 장애물 경주에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한다. 시게 다시 등장. 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간 나오코는 그곳에서 기절해버리고 만다.

  의사 등장. 그리고 앞으로 3개월을 살 수 있다는 시한부 선언. 요지는 차마 나오코에게 의사의 판정을 이야기할 수 없다. 게다가 요지는 학교에서 잘렸다. 왜 잘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여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말한다. 출판사 직원이 요시오카가 야간 고등학교 교사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한 다음에야. 요시오카가 집에 와 지붕 물받이 수리를 도와주었고, 요시오카를 보고 있던 나오코는 전에 요지의 원고를 받으러 왔던 다다를 떠올린다. 그 여자 이름이 다다였어. 요지와 깊은 사이였던 것이 분명해. 사실이다. 그러나 극이 끝날 때까지 요지는 죽어가는 나오코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나오코 역시 자신이 그걸 알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도쿄 본사로 발령받아 전근 인사차 마지막으로 원고를 받으러 온 다다를 다시 직접 보고, 차까지 끓여 대접을 하면서도. 나오코 마음까지 평안한 건 아니겠지. 나오코는 다다의 찻잔을 엎지른다. 갑작스러운 침묵. 요지가 다탁을 닦으려 하고, 나오코는 그런 요지의 팔을 급하게 나꿔채 자신의 무릎 위에 돌려 놓는다. 이제 세 명 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다다는 더 이상 자리에서 버틸 수 없어 서둘러 퇴장해버리고 만다. 요지가 뒤따라 나갔다가 돌아와 아내와 마주친다. 나오코는 요지에게 부탁한다. 나를 잊지 마. 이날 부부는 바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다다 때문에 버스를 놓쳐 이들은 바다에 갈 수 없다. 이런 묘사가 참 좋다. 대사가 아니라 행동, 그것도 간단한 그러나 치명적인 행위로 무엇보다 효과적인 호소를 하는 장면. 이런 것이 한 번 더 나온다.

  다음해 1월. 나오코가 죽었다. 요지가 나오코의 유골을 들고 집에 온다. 우리나라하고 장례의식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죽어 분골을 아파트에 들고 들어온 걸 알면 아파트 주민들 난리난다. 반면에 일본은 집구석마다 다 귀신이 있어서 분골을 집에 모셔놓고 밥도 차려주고, 절도 하고 향도 지핀다. 우리나라하고 같은 점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거. 그래서 요지는 상을 펴고, 코끼리 밥솥에서 밥을 퍼 올려놓고 먹다가 마당을 보니 눈이 내린다. 요지는 무심하게 평소 나오코가 앉아 있고는 하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이봐… 눈 내린다….”라고 말하지만 당연히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요지는 그저 후루룩 소리내며 밥을 계속 먹으면서 막이 내려간다.


  서양, 그러니까 유럽과 아메리카의 연극과 달라도 많이 다르다. 그들은 주로 대사로 사건을 설명하고, 전개하며 해결하는 반면에 마쓰다는 절제된 대사와 절제된 행동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공백이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는 거대한 자원/재료임을 기막히게 보여준다. 여기에 껌벅 넘어간 거다. 차이콥스키 5번 교향곡 4악장 종결부분의 짧지 않은 휴지기. 그 정도도 아닌 현악사중주 중의 극히 짧은 완벽한 소리 없음 상태와 비교할 수 있는 여백의 힘이란. 이 양반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지만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책이 이것 말고 없다. 이 책도 절판. 정가가 7천원인데 상태가 별로인 중급 헌책이 1만5천원. 2만원 부르는 곳도 있다. 우리 희곡에 이런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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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4-09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짜시기는요? 그냥 좋아하시면 되죠. ㅋㅋ
마지막 단락 읽으니까 화~악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5-04-09 16: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좋으면 걍 좋은 것이지요. ㅎㅎㅎ
이 책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입니다.
 
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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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 참 구경하기 힘든 것 가운데 시인, 소설가, 극작가 중에서 남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 구경을 하는 거다. 이미 문학판은 여성시대라고 전에도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시중에 구병모라는 이름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이야, 오랜만에 남자 작가가 떴구나, 반가워하던 일도 있었다. 구병모의 작품을 꼭 읽어본다고 작심을 했건만 어떻게 지내다보니 세월만 죽였다가, 이번에 탁, 골랐다.

  <파쇄>. 단편소설 딱 한 편으로 책 만들어 비싸게 팔아먹는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 가운데 한 권.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페이지 수 적고, 판형 작고, 페이지 여백 널럴하고, 최소한의 활자만 들어가게 만든 신묘한 편집으로 찍은 위픽시리즈는 한 나절이면 책 다 읽고 독후감까지 쓴다. 준비, 땅, 해서 첫 페이지 딱 넘기니까, 엇, 이게 웬걸. 느와르. 10대로 보이는 여성이 산 속에서 성인 남자이며 전문적인 킬러로부터 수련을 받는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분히 저 오래 전 홍콩 영화에서 가족 몰살당한 청년이 외진 곳에 은거하며 홀로 사는 무림의 절정고수한테 무술을 배우는 것과 동일하다. 즉 초보와 비슷한, 이때 초보라고 하는 것도 우리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절정의 고수지만 고수들이 보기에 초보라는 뜻의 초보라서 상당한 싸움과 살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수준을 일컫는데, 이 초보가 고수의 지도편달 아래 날이면 날마다 저 먼 계곡에서 물을 날라와 큰 항아리에 채우고, 온갖 험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다가 상처도 입고 뭐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시험을 거쳐 결국 사부를 능가하는 초절정고수로 하산하는 것까지. 다만 단련하는 것이 쿵푸가 아니고 진짜 살육, 암살, 저격, 작업 후 도피, 은닉 기술 등을 총망라한다. 세월이 가니까 맨손 싸움에서 칼, 총으로 진화하는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아직도 취권, 당랑권, 외팔이 드래곤 하면 장사가 되겠어?

  그러나 아뿔싸,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는다. 나, 이런 거 안 좋아한다. 많고 많은 장르 중에 하필이면 죽고 죽이는 이야기를. 그러지 않아도 살기에 팍팍한 세월에 말이지. 그래서 얼른, 후딱 읽어 치웠다.

  놀라운 일은 책 다 읽고 독후감 쓰려고 작가 구병모를 검색해보는 중에 생겼다. 세상에. 구병모가 여자다. 본명 정유경.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76년 용띠 여사님. 피시식. 그럼 그렇지, 요즘 세상에 남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가 어디 흔해? 이제 여성 작가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쓴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월이다.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다. 나하고 맞지 않아서 좀 그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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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4-0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젊은 여성작가’ 분들이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길’을 놓고서 꽤 자주 글을 쓴다고 느낍니다. 여러모로 보면, ‘예전 젊은 남성작가’ 분들이 쓰던 글감이고 글결이었습니다. 이제는 ‘글쓴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여러모로 보면, ‘예전 젊은 남성작가’는 집·마을·학교·군대에서 몸소 깊게 겪은 바 있는 갖은 ‘폭력’을 녹이고 풀어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길’을 썼다면, 또 ‘예전 젊은 여성작가’는 한국전쟁이며 일제강점기라는 굴레를 거치면서 겪은 숱한 죽음을 녹이고 풀어서 썼다면, ‘요즘 젊은 여성작가’ 분들은 ‘사람을 죽이는 솜씨 아닌 솜씨’를 길들이는 ‘군사훈련’을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는 나라’라는 틀에서 바라보면서 쓴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은 피나고 쓰라린 나날’을 녹이고 풀어서 쓰는 ‘죽임질’ 이야기하고, ‘남성가부장권력 마초사회라는 고달프고 괴로운 나날’을 녹이고 풀어서 쓰는 ‘죽임질’ 이야기는 글감과 얼거리와 맺음말이 사뭇 다르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둘 모두 ‘평화’라든지 ‘삶’하고는 맞물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다만, 오늘날 ‘젊은 여성작가’ 분들이 쓰는 소설은 “나중에 연속극이나 영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쓴 밑글(시나리오)” 같다고 느껴요.

그냥 문학을 하고, 그냥 글을 쓰면 될 텐데 싶어서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Falstaff 2025-04-07 10:23   좋아요 0 | URL
구병모가 76년생이면 오십인데요, ˝요즘 젊은 여성작가˝라 부르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하는 데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그게 자기 삶 또는 지난 삶에 대한 아쉬움이면 어떻고, 돈이면 어떻습니까.

hnine 2025-04-07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병모 작가가 남성인줄 아셨군요 ^^
장르 소설, SF소설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작가로 알고 있는데, 이 희곡의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이네요.

그나저나 취권...추억의 영화 이름에 추억 돋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인가, 아버지와 극장 가서 봤어요. 동생들은 연령제한때문에 저만 으쓱하며 보고 왔던 영화였지요.

Falstaff 2025-04-07 10:16   좋아요 0 | URL
정말 남성 작가인 줄 알았습니다. 책 다 읽을 때까지요. ㅋㅋㅋ
취권을 중1 때 보셨다면 저보다 아주 조금 후배님이시네요. 왕우王羽의 외팔이 드라곤은 모르실 거 같고요. ㅎㅎㅎ
 
은밀한 속삭임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나윤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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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인생. 곳곳에 지뢰가 매설된 이차 함수. 발밑에서 언제 터질 지 모르고 아예 안 터질 수도 있는 지뢰. 명작은 아닐지언정 사람 마음 속의 소심하지만 귀여운 비루함을 스타르노네는 귀신처럼 포착해 독자를 미소짓게 한다. <끈>과 <트릭> 별점에 조금 박했던 것도 5별의 작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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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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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의 소도시 니츠키도르프에서 독일계 소수민족 신분, 즉 북부 체코에 사는 독일인을 일컫는 주데텐 독일인을 제외하고, 동남부 유럽 지역에서 생활하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바나트 슈바벤 Banat Schwabian 신분의 1953년생 뱀띠 여사님이다. 니츠키도르프는 2021년 12월 현재 인구가 1,5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독일인들이 많이 모여 살아 독일어만 사용하고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루마니아 사람들은 다중이 모인 곳에서 자기들 모국어로만 대화하는 이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겠지만. 뮐러 가족이 언제부터 루마니아에서 살았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현지의 부유한 농부이자 상인이었다고 한다. 동구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다음에 집구석이 거덜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중에 나치군의 SS 대원으로 활약한 아빠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트럭 운전을 해야 했고, 엄마 카타리나 기온은 전쟁이 끝나고 소련의 점령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을 강제로 수용하던 우크라이나 소재 노동수용소에서 5년을 견뎌 1950년에 22세의 나이로 해방을 맞았다.


  작품 속 방앗간 주인 빈디시의 아내 카타리나 역시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존해 돌아온 여성으로 설정했는데, 당시 소련 치하의 노동수용소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곳이었다. 작품 속 생활력 강한 빈디시의 아내는 수용소 첫해는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냈지만 이후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차례로 경비원의 철제 침대를 찾아가 감자를 먹었고, 의사의 철제 침대를 찾아가 사흘 동안 탄갱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질병증명서를 얻었으며, 사토장이 즉 무덤파는 인부의 철제침대에 들은 대가로 마을 초상집에서 가져온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늙은 러시아 여인의 집에 가서 노파를 돌보다가 초록색 트럭을 타고 수용소에서 해방된다. 물론 그동안 카타리나의 생명과도 같았던 겨울 외투, 털 담요, 털조끼, 털양말을 각기 빵 열 조각, 다시 빵 열 조각, 설탕 한 그릇, 옥수수 가루 한 그릇을 받고 팔아 텅 빈 위장을 달랬다.

  1950년에 마을에서 빈디시와 카타리나가 만났다. 빈디시는 러시아에서 죽은 바르바라와 결혼할 생각이었고 카타리나는 전사한 요제프와 결혼하려 했지만, 이제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서, 빈디시와 카타리나는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무덤들 사이, 예배당 뒤편 풀밭에서 만리장성을 쌓고 결혼했다. 빈디시는 카타리나가 소련에서 살아나오기 위하여 자기 몸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것이라,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소련에서 있었던 일을 입에 올려 카타리나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이건 죽음 앞에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였는데 세상에 비밀이 없는 법이라서 동네 한 아줌마한테 이야기를 들은 무남독녀 외동딸 아말리에도 “엄마는 소련에서 창녀짓을 했잖아.”라고 식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바람에 엄마의 기가 넘어가게 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빈디시가 아내를 미워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건 아니다. 무뚝뚝한 시골 사람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마찬가지인 루마니아의 시골 사람들답게 아무 생각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툭툭 말을 던져놓고, 그 말이 듣는 이의 가슴에 어떤 상처를 줄 것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빈디시의 아내도 그렇다. 2년 전에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후에 빈디시가 좀 집적거리려 할 때마다, “의사가 하지 말라고 했어. 당신 좋으라고 내 방광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라며 싹 돌아눕는 거다. 빈디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여간 아내가 몰인정한 인간인 건 맞다고 생각한다.

  세월은 아마 1970년대 초중반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도 없으며, 정치적으로는 차우세스쿠의 독재가 극을 달려 니콜라예 차우세스쿠 공산당 서기장은 국가의 아버지, 그의 아내 엘레나 차우세스쿠는 국가의 어머니를 칭하면서 당시 국제 독재자 연합 가운데서도 아주 효율적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세뇌하던 시기였다. 이에 염증을 느끼던 독일계 소수민족 주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루마니아를 떠서 조국 독일, 이 가운데 주로 서부 독일로 가기 위하여 공산주의 체제 특유의 길고 길며, 복잡하디 복잡한 행정절차를 밟고 있었다. 빈디시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방앗간을 하고 있는 빈디시는 소위 기름칠이라고 칭하는 뇌물을 이장과 경찰서장, 우체국장, 신부 등등에게 돌렸는데 주로 밀가루 몇 자루 씩이었다. 하루는 이장 집에 역시 잘 빻은 밀가루 두 포대를 실어다 주고 밤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방 안에서 뭔가 낑낑대는 소리가 나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슬쩍 문을 열어 보니 남편이 내려다보는지도 모르고 카타리나는 침대에서 열심히 자위를 하고 있다가, 남편을 보자 별로 놀라지도 않고 동작을 멈추었다. 빈디시는 자기 손길과 몸을 거부하며 혼자 열심히 즐기며 살고 있는 아내를 통해, 세상의 종말을 본 듯한 그리고 빈디시 자신의 종말을 맞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뭐라 하기도 참 거시기해서 그저 “방광이 어떠니 하더니 바로 이거였다는 말이지, 귀부인 마나님.”하고 말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속으로는 조금 켕기기는 했지만, 아내는 곧바로 그르렁거리며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에휴, 카타리나, 나이들어 힘든데 백 번 잘했다. 그짓을 뭐 복잡하고 힘들게 해, 혼자 간단하게 해결해버리고 말지. 하지만 문제는 있다. 내가 두 아이 키우면서 둘 다 사춘기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자기 방 하나씩 주면서 딱, 말했다. 너네 방에서는 너네 마음대로 해. 근데 자위하다가 들키면 그건 자위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야. 짤짤이 면허 취소시켜야 해! 카타리나야 너도 조심 좀 하지 그랬니. 아무리 남편이라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잖아. 입장 바꿔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이왕이면 손가락이라도 좀 씻고 잤으면 좋았을 걸.


  동네 야간경비원도 독일인이다. 조금 모자란 듯. 그는 절대 독일로 가지 않을 사람이다. 그냥 살던 루마니아 작은 도시에 머물러 여생을 보낼 심사인 것이 틀림없다. 그가 방앗간 앞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얕은 잠에 들었다.  빈디시가 벤치에 앉아 말을 붙혔더니 야간경비원은 빵을 씹으면서 나지막이 말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이이의 아내가 한 시절 빵가게 주인과 살과 뼈가 타는 불륜관계를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먼저 죽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나는 집사람을 전부 용서했어. 빵가게 주인 일도 용서했고 도시에서 한 짓도 용서했어. 그러나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다니 그것 하나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아내가 살았을 때 동네에서는 빵집 주인이랑, 그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도시에 나가서도 뼈와 살을 불태웠던 모양인데 그걸 용서한 거하고, 자기 혼자 내비두고 빨리 죽은 건 참 용서하기 힘든 것이, 어떻게 인간이 세상의 거대한 꿩인 것과 연결이 되는지 이건 책이 끝날 때까지 모르겠다.

  좀 모자란 야간경비원. 근데 특히 서양 소설에서는 이렇게 조금 모자란 사람이 놀랍게도 세상의 지혜를 많이 알고 있다. 많아도 정말 많이 알고 있다. 당시 해외 이주 서류에 경찰서장의 확인이 필요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성당 주임신부가 발행한 세례증은 왜 필요한 지 모르겠다. 이 시절 루마니아에서는 당연히 해주어야 할 대민對民 서비스도, 우리나라 1960~70년대가 딱 그랬듯이, 맨입에 되는 게 없었다. 근데 경찰서장과 신부는 취향도 신기하지, 주민등록은 우체국이 문 닫은 시간에 우체국 안에 매트리스를 깔고 경찰서장이 그 위에서 여자한테만 서명을 해준다고 하고, 언제나 서장의 입에서는 독하고 드러운 술냄새가 풀풀 난다는 놀라운 정보를 전해준다. 가톨릭 성당의 신부는 정상적으로 성당 안에서, 다만 성당은 성당 건물인데 사제관에 놓인 신부의 철제침대 위에다 마을 사람들의 세례증을 전부 펼쳐놓고 그걸 찾아야 한다는데 신부 역시 남자는 안 되고 여자하고만 서류를 찾는단다. 빈디시 생각으로는 아내 카타리나가 우크라이나, 당시엔 소련이었던 곳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비슷한 일을 했던 터라 한 번만 더 눈 질끈 감으면 될 거 같았지만, 현명한 바보 야간경비원이 하는 얘기가, 자네 아내는 나이가 너무 많아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네. 딸내미 아말리에는 좋을 거야.

  아말리에? 세상에나. 아직 어린 아이를 어떻게. 야간경비원은 한 번 더 훈수를 둔다. “걸을 때 앞 발꿈치가 벌어지면 이미 경험을 한 거야.” 아직 시간은 좀 남았다.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빈디시는 아말리에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자기 짐작으로는 모피가공사의 아들이자 유리 기술자로 저 높은 산 위에 지은 공장에 다니는 루디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 애초에 벌써 처녀가 아니라 짐작하고 있지만 혹시 또 알아? 이 말을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는 딸 아말리에가 확실히 숫처녀인 것으로 믿고 있다. 아말리에가 처녀가 아니면 세상에 누가 또 처녀란 말이야! 그러나 물론 몇 달 후이지만 아말리에가 우체국 외출 준비를 하다가 아버지 앞에서 핸드백이 열리며 뭔가 반짝이는 것이 떨어졌다. 엄마가 묻는다.

  “그게 뭐니?”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약.”

  “무슨 약?”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무슨 약은 무슨 약. 위대한 1960년대에 여성 해방을 이루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피임약이지.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 지나 아말리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체국의 매트리스 위에서 주민등록등본에 경찰서장의 서명을 받아오고, 덤으로 목에 검붉은 키스마크도 찍어 온다. 며칠 후에는 성당 사제관에도 가서 신부가 시키는대로, 그 엄숙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지시사항, “립스틱을 지워라.”, “슬립을 벗어라.” 그리고 당연히 립 서비스겠지만 “넌 참 예쁜 사과 두 개를 가지고 있구나.”에 이어 “두 다리로 내 등을 감아봐라.”에 고스란히, 아무 말도 않고 착착 일을 수행한다.

  20년 전에는 엄마가 배고픔과 소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몸을 허락했고, 이제는 딸이 루마니아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대표하는 경찰서장과, 신의 권력을 대표하는 가톨릭 사제에게 육체를 허여하고야 만다. 뭔가를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일 뿐이다. 살기 위한 것.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독후감에서 말한 적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그게 다른 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못할 일은 없다, 라고. 그래, 살기 위한 것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란 없는 거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발끝을 벌리고 걷는 아말리에를 보고 난 후, 이제 아말리에 차례인 것을 눈치 챈, 적어도 강하게 짐작하기 시작한 아빠 빈디시가 사람들이 이제 아말리에 차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장엄미사에도 참석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힌 채 눈을 감고,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


  딱 10년 전에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었다. 지금은 어떤 내용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는 것만 어렴풋하다. 당시 뮐러가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해 문학동네에서 광고를 많이 해 그만큼 기대가 컸건만 어째 그리도 합이 맞지 않는 것처럼 읽히던지. 그래서 오래 헤르타 뮐러를 멀리하고 지냈다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어도, 주저하면서 골랐다. 그런데 지금은? 매력적이다. 부사와 형용사를 과감하게 생략한 건조하고 짧은 문장으로 주인공 빈디시 일가와 마을 주민들의 상황, 독재정권과 사회주의적 재분배라는 이름의 착취 같은 것을 실감나게 이야기한다.

  진작 읽어볼 것을 그랬다. 앞으로 좀 더 파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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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04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구병모, <파쇄>
수요일. 마쓰다 마사타카, <바다와 양산>
금요일. 심재휘, 《중국인 맹인 안마사》
 
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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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열네 편과 에필로그로 구성한 작품집. 이렇게 말하는 건 의미 없다. 작품 열넷이 조밀하지는 않게, 알게 모르게 엮여 있는 큰 그림을 그린다. 사실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이런 것도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열네 편을 한 번에 다 추스려서 카브레의 명작 <나는 고백한다>처럼 장편소설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에필로그에 썼듯이 “삶의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열네 편을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는데 글을 쓰면서 작가는 “숨겨진 혹은 좀 더 명시적인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됐고,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틀림없이 각각 개별적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 읽은 후에 독자는 앞뒤가 헝클어진 한 묶음의 실타래를 정리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랬다.

  지난 겨울 내내 우리말로 번역한 가사를 읽어가며 다양한 성악가들이 노래한 <겨울 여행>을 들었다. 사흘에 한 곡씩. 그러면 겨울이 간다. 이 책의 제목 《겨울 여행》이 바로 그 <겨울 여행>,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에서 따왔고, 다만 가사의 번역은 뮐러의 독일어 시가 아닌 카탈루냐어 번역의 중역인 것만 다르다. 이 가운데 1곡 “안녕히”와 마지막 24곡 “길거리 악사”는 처음과 마지막인 만큼 더 중요하게 사용했다.


  제일 앞에 배열한 <사후 작품>의 주인공은 무대공포증을 겪고 있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페레 브로스의 리사이틀 장면. 원래 레퍼토리는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세 곡. D.958, D.959, D.960이다. 페레 브로스는 미세하게 맞지 않는 의자의 높이를 조절하고,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에 밴 땀을 닦는 김에 먼지 한 톨 없는 건반도 문질러 닦는다. 이어서 셔츠의 소매를 매만지는 브로스의 목은 타고, 혈관 속엔 가시가 떠다니며, 끝없는 걱정으로 심장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페레 브로스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벌써 4분 동안이나 손바닥에 스며든 공포를 닦고 있었는데, 그가 고문 수준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바르셀로나의 아우디토리 극장 3층에 앉은 관객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브로스가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고,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의 수군거림 속에 퍼진 건 레퍼토리의 마지막 곡 내림나장도, D960이었다. 죽음에 대한 내밀한 성찰이자 내림나장조로 흐느껴 울었다는 한 남자가 쓴 곡.

  42분 13초가 지나 마지막 음의 여운이 사라지자 브로스의 연주인생 처음으로 약 10초 또는 15초간의 고요, 완벽한 적요를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브로스의 오른쪽 맨 앞줄 7번 객석에 앉은 남자, 세련된 작은 안경에 넓은 이마, 곱슬머리를 한 채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인터미션이 지나도록 브로스는 연주 중단을 고집했지만 매니저 졸탄 파르도는 연주계의 큰손인 그로스만 부인을 접대한 뒤, 바티칸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브로스의 비공식 독주회를 섭외당하고 있었으며, 어쩔 수 없이 다시 무대로 나간 브로스의 머리 속에는 슈베르트의 나머지 곡이 아니라 시b, 라, 레b, 시, 도로 진행하는 불협화음의 사라방드,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시절을 살던 피셔의 작품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전위의 첨단으로 오랜 세월 매장당했던 곡. 브로스가 연주를 시작하자 관객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곡에 놀라 항의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성격이 조금 느긋한 사람들은 연주를 조금 더 들어보다가, 일어서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좀 더 주의깊게 들어보기를 권했으며,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일곱번째 변주로 넘어가자 이게 도대체 누가 쓴 곡인지 나직하게 묻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보다 더 현대의 작품인 것을 보니 분명히 리게티일 것이라는 추측이 공연장 허공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연주가 끝나고 페레 브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난다.


  이를테면 <사후 작품>이 흥미로운 변주곡의 아리아aria에 해당한다.

  페레 브로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나는 바람에 무산된 바티칸 비공식 독주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가우스 주교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던 렘브란트의 작품 <철학자>를 복제, 절도했으며, <나는 고백한다>에서 명품 바이올린 비알에 악과 범죄가 뒤따르듯이 명화 <철학자> 역시 몇 건의 비정한 살인사건을 동반하고, 브로스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피셔의 사라방드의 기원을 따라 18세기 바흐의 집안으로 시간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브로스의 매니저인 줄 알았던 헝가리인 졸탄 파르도도 과거에는 브로스 인생에 기념할 만한 D.960 연주를 할 정도의 피아니스트였지만 중도에 작파하고 음악사로 길을 바꾼 인물이다. 브로스가 아리아를 연주했다면 졸탄 파르도는 25년 전에 자기 성 ‘파르도’도 모른 채 서로 사랑한 마르게리타를,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서, 12월 13일 정오에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우산을 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게리타는 약혼을 한 상태였으나 자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어 빈에 와 졸탄을 만났고, 28일간 열렬히 사랑을 했으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으나 그래도 결국 약혼자에게 돌아갔다. 약혼자도 사랑했으니까. 졸탄은 비탄에 싸여 마르게리타에게 25년이 지난 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제안하는데, 그녀가 결정을 후회하는지 하지 않는지 꼭 알고 싶어서. 물론 졸탄도 사랑을 느껴 결혼을 해 20년간 함께 한 끝에 먼저 아내를 보내건만, 한 번도 살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죽은 아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어떻게 하나. 25년 동안 마르게리타를 잊기 위해 전념을 다해봤어도 얼굴은 점점, 조금씩 점점 잊혀질지언정 25년 후의 12월 13일 정오 슈베르트 무덤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절대 지워지지 않았던 것을.

  그리하여 마르게리타는 올까? 온다. 회색 머리칼로 변한 모습으로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장애 때문에 오래 소변을 참지 못하는 아쉬움을 호소하는 곱게 늙은 중년의 장애인. 결혼 2년 만에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졸탄을 잊지 못해 빈을 떠나지 않아, 바로 이웃한 구역에 살았으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마주쳤으면 알아볼 수 있었을까 싶은데, 그래서 지난 25년이 더 안타까운 졸탄. 이혼 후 졸탄을 찾아보려 헝가리 페스트 음악원에 가보기도 했지만, 페스트에서는 남학생 전부 졸탄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같이 많고 많은 졸탄이 있었으며, 졸탄의 성이 파르도라는 걸 모른 마르게리타는 그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될까? <겨울 여행> 24곡처럼 거리의 늙은 악사가 연주하는 드렐라이어에 맞추어 12월의 빈, 꽁꽁 얼어붙은 마을 변두리 골목을 거리의 늙은 악사와 함께 떠나가고 싶었을까?

  이 마지막 열네 번째 작품 <겨울 여행>의 내용은 정말 신파 자체이다. 그러나 세상에 신파만큼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 다만 신파 또는 뽕짝으로 사람을 후벼 파려면 그만한 곡조가 받쳐주어야 한다. 자우메 카브레는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람 미치게 후벼서 파고, 파고 또 파버린다. 그리하여 마음 속으로는 이건 신파야, 정신 차려, 끊임없이 귀에 대고 속삭이건만 독자는 결국 손을 저으며 그냥 감정의 파도 속에 빠지기로 작정해버린다. 그렇게 만든다. 문장으로. 역자 권가람의 뛰어난 우리말 솜씨로. 권가람. <나는 고백한다> 때부터 알아봤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 이야기하자면, 자우메 카브레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작품 속에 적절한 액션과 범죄 장면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악의 다양한 방식에 집중하는 것 같다. 물론 겨우 <나는 고백한다>와 단편집 《겨울 여행》 이렇게 꼴랑 읽고 하는 말이니 믿을 필요 없지만. 이 책에서도 앞에 말한 것처럼 몇 장면의 암살 씬, 암살이라기보다 잔인한 청부살인과 이 과정에서 살아남았지만 청부인은 제거된 것으로 여기는 살인자도 등장한다. <소피의 선택>과 유사하나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더욱 잔인한 또다른 선택의 장면도 나온다. 그런데 청부살인의 배후? 고전음악의 탄탄한 후원자 그로스만 부인의 남편, 그로스만 씨. 이렇듯 제일 앞에 실린 <사후 작품>이라는 아리아를 열세 번 변주한 작품이랄 수도 있고, 아리아고 뭐고 차라리 거대한 푸가로 읽을 수도 있으며, 출판사 책소개에 나온 것처럼 “죽음의 그늘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연약함을 환기시키는 ‘범성악 대위법’ 작품”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문자를 써서 음악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놓치지 말고 읽어보기 바란다. 카브레만큼 설득력 있게 음악을 이야기하는 작가도 지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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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0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주문 들어갑니다~~
자우메 카브레의 단편집도 있었군요! 닥치고 구매합니다요..ㅎㅎ

Falstaff 2025-04-02 15:52   좋아요 0 | URL
옙! 좋습니다. 탁월한 선택!!

coolcat329 2025-04-03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어요. 근데 저는 클래식 전혀 모르는데 문제가 될까요?

Falstaff 2025-04-03 20:24   좋아요 1 | URL
전혀 문제 없습니다. 어차피 음악을 문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