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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섬 기담 / 인간 의자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5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단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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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에서 낸 대산세계문학총서 151번에 빛나는 중단편집. 정말 빛나냐고? 흠. 캐묻지 마시라. 엔간한 대산총서는 얼추 다 읽었는데 2018년에 찍은 책을 이제 읽었을 때는 뭔가 있는 거다.
에도가와 란포는 순서대로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있었던 1894년에 일본왕국 미에현 나가군에서 군청 서기 해 잡숫던 히라이 시게오의 장남으로 태어나 히라이다로(平井太郞)이란 이름을 갖는다. 훗날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에도가와 란포로 바꾼다. 이이의 롤 모델이 ‘에드가 앨런 포’여서 일본 사람들은 ‘드’ 발음을 하기 힘들어 ‘에도가’로 하고 앨런을 ‘와란’인데 ‘와’와 ‘란’을 한 칸 떼고 ‘포’를 가져다 붙였다. 그리하여 에도가와 란포.
이름 얘기가 나오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포 선생을 어떻게 추리소설 작가로 보느냐, 당연히 고딕 작가로 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고 시비할 수 있다. 맞다. 이후에 이이의 책을 또 읽을 거 같지 않아서 시간을 써 검색해본 건 아니고 책 뒤의 붙은 연보로 추측을 해보면 에도가와 란포도 시작은 그로테스크한 고딕으로 했고, 이 책에 실린 두 편도 마찬가지로 그로테스크한 엽기, 잔혹한 고딕 소설로 이이의 초기작으로 구분할 수 있는 1926년과 25년 작품인데, 193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괴도 20면상>, <소년 탐정단>, <요괴박사>로 대중문학 쪽에서 도쿄의 종이값을 지붕 위까지 올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에도가와 란포 하면 추리, 탐정 소설의 권위, 뭐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겠느냐, 라고 추측한다. 다시 말씀드립자면, 이건 어디까지나 연보 내용을 읽고 아는 거 하나도 없으면서 추측하는 거니까 다른 곳에 옮기지 마시라. 여차하면 개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중편소설 <파노라마섬 기담> 한 편만 싣기가 아무래도 분량에 문제가 있어 보여 단편 <인간 의자>를 서비스 차원에서 붙인 거 같다. 그래 당연히 독후감 역시 <파노라마섬 기담>을 이야기해야 마땅하다. 하긴 이거나 저거나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허구 중의 허구지만, 세상에 만화 한 번 안 보고 사는 사람 있나? 그러니 책을 열기 전에 먼저 소설 말고 글로 된 만화 읽는 기분을 장착하는 편이 속이 좋다.
1920년대 도쿄 대학가 하숙촌에 히토미 히로스케라는 남자가 있었다. 본인은 철학과, 금속공학과 아니다, 철학이다, 필로소피, 철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데, 이이의 성격을 먼저 말하자면 쓸데없이 관심분야만 무지 다양하고 쉽게 싫증내는 성향이라서 도무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1도 없다. 이런 인간 가끔 있다. 사실은 나도 이 부류에 속하는 거 같다. 히로스케는 도가 좀 심해서 학교를 졸업하고도 자기 밥벌이하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직도 대학가 하숙촌을 떠나지 못하고 빌빌 거리는 중이다. 대개 이런 인간들은 대학 고시반에 있으면서 파면당한 우리나라 전임 대통령처럼 재수, 3수… 장수, 심지어 9수에 도전하는 게 보통이지만, 히로스케는 그것도 아니고 그냥 하숙집에 철퍼덕 자빠져 자신의 이상향을 설계하는 몽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이상향. 유토피아. 율도국. (이 책에서는)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그럴듯하게 설계하면서, 만일 나한테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의 많은 돈”을 손에 넣는다면, 광대한 땅을 사서,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부려 내가 늘 꿈꿔온 지상낙원이자 미의 나라, 꿈의 나라를 만들어 보일 텐데. 이런 잡생각만 열라 했던 거다.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의 많은 돈”으로는 턱도 없지요? “평생 써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많은 돈”이 맞는 말 아닌가요? 무한자뻑 문학과지성사도 요런 실수는 하는군요.)
그래도 하여튼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가족들이라고는 에도가와 란포 스스로도 집안이 폭삭 망해버려 결혼도 힘들게 한 인간이라서, 사면팔방을 봐도 비비적거릴 데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번역일을 하청받아 하는 것으로 시작해, 동화도 쓰고 드물게는 성인소설도 써가며 먹고는 살았다. 물론 간혹 진지한 중단편소설을 써 잡지사나 출판사에 송고한 적도 있지만 모두 신통치 않은 반응만 받아 스스로 문학의 길은 포기하고 말았다.
함부로 문학을 하네, 책을 쓰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게 한 번 쓰면 어디인가 자국이 남는다는 데 있다. 나도 작품 초기에 나오는 히토미 히로스케가 변변치 않은 소설 나부랭이를 보내고 전혀 쓸만한 반응을 받지 못했다, 했을 때는 (한 마디로 찌질이란 얘기군, 하는 거 말고)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가, 이게 저 뒤 결말부에 가서 아이고, 얼마나 세게 뒤통수를 치는지 거 참. 더 자세한 건 알려드리지 않겠다.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아주 가끔은 있다. 히토미 히로스케가 대학에 다닐 때 고모다 겐자부로라는 동급생이 있었다. 둘이 그냥 아는 사이로 눈이 마주치면 간단하게 눈인사 정도 하는 사이로 결코 친하지 않았다. 둘이 다른 점은, 겐자부로는 검정 턱수염을 길렀고 뇌전증, 예전 말로 간질병이 있어서 간혹 심한 간질경련을 겪는다는 거. 히로스케는 근시가 있어서 안경을 쓰고 다닌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오, 놀라운 클리셰. 아주 똑같이 생겼다. 우연히. 생긴 건 작품 목적상 말할 필요도 없고 키도, 체격도, 목소리도. 물론 옷에 감춰진 신체 각 부위에 관한 상세한 건 아무도 모른다. 아, 한 명 빼고. 돈이 없어 장가도 못 든 히로스케와는 달리 겐자부로는 M현의 최고 부자인 고모다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라서 무지하게 어여쁜 귀족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히로스케한테는 어마어마한 행운이 될 지 누구도 몰랐다. 기괴하면서 동화처럼 매혹적인 행운이라고 란포는 말하지만, 더 읽어보면 한 사이코패스의 짧은 편집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대학 동창들은 겐자부로와 히로스케가 닮은 걸 떠나 완전히 똑같이 생겨 농담 비슷하게 겐자부로가 쌍둥이 형, 히로스케가 쌍둥이 동생이라 할 정도였는데, 쌍둥이 형이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아 치명적인 간질 발작을 일으켜 숟가락 놨다고 중앙 신문에 뜬 거다.
이 정도면 스토리는 대강 맥이 잡힐 듯.
히로스케는 절호의 찬스를 잡은 거다. 만일 자신이 겐자부로의 대역으로 살 수 있다면 고모다 가문의 돈으로 자신의 평생의 몽상, 꿈, 환상인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건설하지 못할 이유도 없는 거였다. 히로스케가 꿈군 절대 지상낙원은 그러나 역사상 주로 폭군이었던 옛 제왕들의 눈부신 업적 속에서만 조금 눈에 띈 적이 있었을 뿐이다. 20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옛 시절의 폭군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부르주아, 이제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문제였다. 때가 온 것.
이제 본격적으로 그로테스크와 엽기, 잔혹.
일본 장례문화는? 옙. 화장입니다. 근데 소설이 되느라고, 일본 M현에서 태평양 쪽으로 T만이 펼쳐진 S군에서는 특이하게도 매장이 습속이란다. 그래 겐자부로는 죽고나서 흰옷으로 염을 해잡숫고 관에 들어가 땅에 파묻힌다.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한 히로스케는 당연히 야심한 밤에 겐자부로의 묘를 파헤치고 관을 부수어 이미 경직도 다 풀려 부패가 상당히 진행한 겐자부로의 시신을 꺼낸 다음, 흰색 수의를 벗겨, 시신유기를 해야 하는데 짧은 밤 시간에 혼자 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겐자부로의 할아버지 묘를 파고 뼈만 몇 조각 남은 할아버지와 함께 구겨 넣고, 다시 할아버지 묘에 흙을 덮고 (떼도 입혔을까?) 시체 썩은 물이 축축한 건 물론 극약 같은 냄새가 충분하게 밴 겐자부로의 수의를 자기가 입은 채 근처 사람들 눈에 뜨일 만한 장소에 쓰러진 척하며 새벽을 맞는다.
이렇게 고모다 가문의 전재산을 한 손에 움켜쥔 히로스케. 그는 S군 남단 태평양 쪽으로 뚝 떨어진 외딴 섬, 그래도 직경이 8킬로미터는 되는 가문 소유의 섬에, 엽기발랄한 그로테스크 고딕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탐미적 제국을 만든다. (과하게 일반화한 것 맞지만)하여간 일본 사람들이라니. 이렇게 환상적인 파노라마를 구비한 섬을 거의 다 완공하는데, 나는 이 섬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작품에서 옷 입고 등장하는 여성이나 남성은 한 명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짜? 혹 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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