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아시아 문학선 13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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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전윈의 전작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읽고 쓴 독후감에서 몇 달 후에 후속작인 <만 마디 말을 대신하는 말 한 마디>를 이어서 읽겠다고 했다가, 세월이 이렇게 빨라, 빨라도 너무 빠르고, 세월이 갈수록 더 빨라져, 몇 달이라고 했건만 그게 2년이 되어서야 겨우 읽었다. 그러니 이 책 읽은 건 밀린 숙제를 한 것과 조금은 비슷하다. 물론 안 해가면 손바닥 맞는 학교 숙제와 달리 전편이 재미있어 자발적으로 후편도 읽겠다고 작정해 스스로 만든 숙제이니까 즐겁게 읽었다.

  먼저 전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간략하게.

  후난성 옌진땅 두부장수 집에 둘째 아들 양바이순이 살았는데, 바이순은 식초 행상을 하며, 취미 수준을 넘는 초상집 관리, ‘함상장이’도 했다. 후딱 말해야겠다. 사연까지 쓰면 너무 길어진다.

  함상장이 하려 집을 빈 채로 두고 30리 멀리 있는 초상집에 갔다 오니 집에 양 한 마리가 도망가버렸다. 열받은 아버지한테 엄청 두드려 맞고 쫓겨나서, 이발사와 돼지 도살꾼의 도제를 거쳐 나중엔 천주교 신부의 도제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이름이 양바이순에서 양모세로 바뀌게 되고. 양모세는 동네에서 만터우 장사를 하는 과부 우샹샹의 데릴 남편으로 들어가 이번에 성도 ‘우’로 고쳐 애초 양바이순이 ‘우모세’가 되어버린다. 우샹샹은 이웃의 남편과 진한 사이라 모세와의 결혼으로 이른바 연막을 친 것뿐이었다. 결국 우샹샹은 이웃 유부남과 야반도주를 해버려 우모세는 우샹샹의 착한 딸 차오링과 그냥 사이 좋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난리 치기를, 이웃 남자와 바람이 나 도망한 아내를 잡아 둘 다 죽여버리지 않으면 풍기와 도덕이 무너질 터이니 당장 그것들을 찾아 나서라 한다. 그리하여 우모세와 차오링은 어쩔 수 없이, 애초에 잡것들을 잡을 생각은 1도 없이 두 명의 부덕자들을 찾는 시늉을 하며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다.


  1부와 2부 사이에 있던 속 끓고 사연 많은 이야기는 이제 많이 늙어 손주들까지 생긴 아명 차오링, 정식 이름 차오칭어趙靑娥가 둘째 아들, 원래 둘째 아들이 부모 사랑 못 받고 사는 자식이라 평생 나몰라라 하다가, 나이 들어 외로워지니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둘째 뉴아이궈한테만 들려주는데:

  아버지 우모세의 손을 잡고 엄마 우샹샹을 찾으러 가다가 신샹의 누추한 여인숙에서 쥐약장수이자 부업으로 유괴범을 하고 있는 랴오요우한테 납치당해 서쪽 지위안에 도착했다. 거기서 쥐약장수는 행상 라오사를 만나 은화 10대양에 팔아 넘겼고, 본격적인 인신매매범이었던 라오사는 손찌검을 해가며 데리고 다니다가 산시성 위안취에서 은화 20대양을 받고 라오비엔에게 넘겼다. 라오비엔은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거다. 게다가 돈이 떨어져 험한 잠자리만 골라 잔 터에 차오링이 고열에 시달리는 병이 생겨 이제 난감한 꼴을 당하게 됐다. 이때 샹위안현 원쟈좡의 지주 라오원의 마차꾼 라오차오가 마침 부부사이에 후손이 없는 집이라 차오링을 은화 13대양을 주고 딸로 입양을 해 드디어 정착을 하게 된 것. 라오차오의 정식 이름은 차오만창曹滿倉. 말이 없는 남자로 애초 차오링을 입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다꾼이자 집안 살림을 장악하는 아내의 뜻에 의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지역 풍습이 만일 딸이건 아들이건 후사가 없으면 동생의 큰 아들을 양자로 들여야 했단다. 아내는 그게 싫어 마침 차오링이 성도 같은 데다가 생긴 것도 예쁘장하고, 바지런하기도 해 썩 마음에 들었다.

  차오링의 지난 이야기를 죽 들은 만창의 처는 딸로 입양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앞으로 옌진을 생각해서도 안 되고, 새아빠(우모세)를 보고 싶어해도 안 돼.”

  차오링이 나이가 차자 양부모는 차오링을 몇 백리 떨어진 뉴쟈좡(우씨촌)의 뉴슈다오에게 시집보냈다. 나름대로 귀하게 키운 딸이라 고르고 골랐는데, 마침 라오차오와 새 지주 샤오원이 좋은 관계를 맺은 라오뉴의 집안 장남과 혼담이 오갔고, 신랑감 뉴슈다오가 그리 좋은 신랑감은 아니었지만 아가씨 집에 오기 전에 숱한 리허설을 거쳐 몸에 익힌 제스처와 말씨를 훌륭하게 시전해 단박에 점수를 따 성사된 혼인이었다. 그리하여 몇백리 떨어진 뉴쟈좡으로 시집 가 이제 차오칭어가 되어, 순서대로 아들-딸-아들-아들을 낳았고, 이 가운데 세번째, 둘째 아들이 작품의 주인공 뉴아이궈牛愛國이다.

  고진감래라고 늙은 차오칭어가 행복하게 살았을 거 같지? 남편 뉴슈다오가 드디어 삶을 다 살고 늙어 죽었다. 땅을 파 묻고나서 여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차오칭어가 땅바닥에 주저 앉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땅을 치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차오칭어를 달랬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말아요. 운다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진 않아요.”

  차오칭어는 눈물을 그치지 않고 말했다.

  “그 개새끼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우는 거예요. 내 한평생이 그 놈 손아귀에서 망가졌단 말이야.”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개새끼 또한 당신 때문에 한 평생이 망가졌는지도 모르지.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게 결혼생활이잖아. 좋은 건 표가 안 남고, 흉한 것만 표를 내거든.


  차오칭어의 둘째 아들 뉴아이궈는 부모한테 아무 정도 받지 못하고 살았다. 그렇게 믿었다. 그나마 아이궈한테는 누나 아이샹이 있어 살면서 처음엔 자잘한, 대가리 굵어지면서는 중요한 일을 상의할 의지가지나 있었지, 누나 아이샹 역시 부모한테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직 첫째와 막내만, 첫째는 아버지한테, 막내는 어머니 정을 듬뿍 받고 자랐다. 이런 유복한 아이들은 주인공 반열에 오르기 쉽지 않으니 이름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래, 나도 둘째 아들이다. 샘나서 그런다, 왜?

  누나는 우체부와 연애를 하다가 개자식이 양다리를 걸치는 바람에 헤어지고, 여러 번 후속 연애를 했지만 결국 전부 실패를 해, 거의 마지막인 열번째 연애까지 실패로 끝나자 농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죽으려다고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과 관장을 동시 상영한 끝에 살아났다. 대신 훗날 담배를 피우기 전까지 심한 딸꾹질을 자주 했으며, 목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도무지 똑바로 펴지지 않는 후유증을 겪었다.

  아이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에 실패하자 그냥 놀 수도 없고, 집구석이 지긋지긋하기도 해서 군대에 지원 입대했다. 운전병 모집이라 당시엔 운전도 기술, 그것도 나쁘지 않은 기술이어서 군대 가면 운전은 기본으로 배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운전병 교습소에 가서 운전을 배워, 딱 자대 배치를 받아보니 저 북쪽의 고비 사막. 부대에는 정작 차가 없다. 어쩔 수 없어 아이궈는 취사병을 하다 제대했다. 친구 두칭하이만 사귀고. 두칭하이는 보병으로 입대했지만 자대에 차가 있어서 운전병으로 복무한 것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세월이 더 흘러 뉴아이궈는 서른다섯이 됐다. 진한 연애 경험이 있는 아가씨 팡리나와 혼인해 예쁜 딸 바이후이도 낳고 살았지만 결혼 두 해 만에 부부는 서로 지극하게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팡리나가 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진관집 아들 샤오장과 바람이 나버리고, 처음엔 그렇구나, 덤덤하게 여기고 넘어가려던 아이궈한테 샤오장의 아내가 쳐들어와, 너는 소갈딱지도 없는 졸장부냐, 나 같으면 두 연놈을 다 칼로 찔러 죽인다, 어쩌구저쩌구 하는 바람에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고민하다가 35세 당시의 가장 소중한 친구 셋과 상의한 끝에 바람 난 아내를 극진하게 모시면서 살기로 작정을 했다. 샤오장이 이혼하지 않고 자기 아내와 더욱 깨가 쏟아지는 제2의 신혼을 만든 모습을 보면서.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팡리나는 이번엔 자기 형부와 얄짤없이 야반도주를 해버렸고, 이제 뉴아이궈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 우모세처럼 딸 바이후이를 데리고 넓디넓은 중국땅을 두 연놈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하여, 물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하기 위해 시늉만 내는 수준으로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여튼 가슴에 칼을 품은 척하면서 떠돌아다녀야 할 신세였던 거디었다.

  이렇게 해서 70여 년 전에 양바이순이었던 우모세가 자기 수양딸 차오칭과 함께 부정한 아내를 찾기 위해 옌진을 떠나 산천을 떠돌아야 했던 것처럼, 뉴아이궈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차오칭은 학교에 다녀야 해 결국 나이 많은 남자의 재취로 들어간 누나 아이샹의 순둥이 남편한테 부탁하고, 홀로 젊은 시절의 친구들을 찾아 떠돌다가, 우연히 만난 사내들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니 그곳이 바로, 또 옌진이었던 거다. 무려 70여 성상이 지나 거의 비슷한 이유로 옌진으로 돌아온 양바이순 또는 우모세의 어쨌든 손자 뉴아이궈.

  사람도 많고 땅도 많으니 사연도 많을 수밖에.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곰의 가랑이엔 털도 많은 법.




  그날이 오면 또 통음을 해야 하나?

  오늘은 4월 28일. 이 독후감을 업로드하는 날이 6월 3일. 21대 대통령 선거일일 것이다. 국민들, 아파트 주민, 친척,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식칼로 두부 자르듯 똑 잘라내어 서로를 꼬나보게 만든, 어느 쪽에 투표하든 서로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방향으로 사용하던 투표. 너와 나, 우리편과 네편으로 갈라져 기어이 서로가 서로를 저주의 대상으로 삼았던 지난 십수년의 투표가 반복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깟 1찍과 2찍의 다름이 뭐가 대수랴. 어차피 평생 서로 쳐다보고, 의지하고 아주 가끔은 사랑하고 살았고, 살고 있을 터이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할 같은 시민, 주민, 친척, 가족이 아닌가 말이지. 투표를 즐기지는 못하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향한 조소와 질시와 경멸을 이제는 멈추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편을 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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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5-06-03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다만 편을 가르고 싶어서 가르는 게 아니라, 당신 의사결정에, 이 문명의 의사결정에 정치적 생명이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엔 반영되지도 않는 삶이, 생존이 왔다갔다 하는 존재들에겐.. 어떻게 편가르지 않는 것만으로 생존을 도모할지가 항상 고민입니다.
편가르기 자체가 나쁜게 아니라고, 편가르기 대상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예 배제하는 이 문명에 문제제기하고 싶습니다.

Falstaff 2025-06-03 12:08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잘못 썼네요. 하고 싶은 말은 ˝질시와 경멸을 멈추었으면 좋겠다.˝이었는데, 사족을 너무 단정적으로 썼군요. 읽으시는 데 혼란을 드려 미안합니다.
 
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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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서울생. 중앙대 문창과와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석사 수료. 이후 계속 소설을 쓰고, 직장생활은 안 한 거 같다. 그랬다는 게 아니라 짐작이다. 여러 상을 받았다. 요즘엔 최우수상 혹은 대상 말고 여럿한테 주는 우수상 같은 것도 있어서 누구나 다 받는 거 같은데, 문학동네 주최 젊은작가상은 확실하게 대상을 받았다. 다른 상에 관해서도 검색해보려다 말았다. 하긴 소설 쓰는데 무슨 상 받은 게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바비의 분위기》가 내가 처음 읽은 박민정이다. 단편소설 일곱 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작품이 골고루 마음에 든다. 오히려 내가 놀란 것은 문학평론가 송종원이 쓴 해설 “괴물과 사실, 그리고 앎의 장치로서의 소설”의 앞부분이다.


  “박민정의 소설은 어딘가 다르다. 실험성이 강하다는 표현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하나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지금까지 읽어온 소설과는 확실히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이 다른가. 이 작가의 소설은 어딘가 좁은 길을 복잡하게 걷는 듯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다.” (p.240)


  음. 내가 여태 우리나라 현대 소설에 적응하지 못한 것을 잘 설명해주는 문장들이다. 나는 박민정의 소설이 매우 익숙하다고 느꼈던 건데, 이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소설이 “어딘가 좁은 길을 복잡하게 걷는 듯한 행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던 거다. 즉 스토리들이 하나의 길을 따라 최후의 순간을 향해 똑바로 진행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 소설을 읽는 독자들한테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을 세월 탓, 세대 차이라고 해도 불만 없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박민정의 소설을 같은 이유로 올드하다고 판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에 실린 일곱 작품 모두, 내가 (미안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걸 용서해주기 바라는데) 요즘 젊은 작가들은 한 어미의 배에서 나온 씨 다른 자매, 형제 같다고 한 적 있지만, 박민정은 그렇지 않다. 읽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겠으나, 박에게 다른 작가들한테 흔히 보이는 섬세한 디테일, 그러나 한결같이 이거나 저거나 비슷해 보이는 시선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핏줄 같거나 거미줄처럼 보이는 세밀한 감정의 떨림 같은 거, 이런 거 기대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좋다.

  이 책 읽고 3일 정도가 지났고 사이에 다른 책도 읽는 바람에 작품들의 내용이나 감상이 많이 흐트러져 자세하게 쓰지는 못하겠지만, 사회의 다양한 실제 모습에 근거하여 문제점과 폭력의 결과를 드러낸다. 물론 이것들의 해석에 집중하느라 해결에 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읽히지만.


  작가의 나이가 이제 마흔. 본격적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무방한 좋은 시절이다. 앞으로 더 낫고 다양한 작품을 쏟아내기 바란다. 처음 읽어봤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아마추어가 잘 읽었을 뿐이라서 작가가 그리 기뻐하지는 않겠지만.

  아무쪼록 건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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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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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아베 코보. 이 책은 <모래의 여자>, <불타버린 지도>와 더불어 아베 코보의 실종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 나도 아베 코보, 하면 당연히 <모래의 여자>와 <불타버린 지도>를 들 만큼 둘 다 재미있게 읽었다. 언젠가 실종 3부작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고 <타인의 얼굴>도 틀림없이 읽어보리라, 눈에만 띄어라, 하고 있던 중에 나 다니는 동네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지역 도서관에서 발견해 상호대차서비스 신청해 읽었다.

  이번 달 초에 아베 코보의 초기 단편집 《벽》을 읽고 사실 좀 놀랐다. 《벽》은 주로 1950년대에 쓴 작품을 모은 것으로, 1951년 작품 <S. 카르마 씨의 범죄>로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한 대표작을 필두로 작품들이 초현실주의적 아방가르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들 것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책을 직접 읽어봐야 안다니까. <불타버린 지도>를 읽을 때 이영미의 역자해설을 통해 아베 코보가 전위문학에 힘을 쏟았다는 것을 알았어도 설마 <S. 카르마…> 정도인 줄은 몰랐으니.

  그러나 책을 읽는 재미에 관해서 말하자면 초기 아방가르드 보다는 1960년대의 실종 3부작이 한 길 위로 읽혔다. 뭐 나만 그런 건 아닐 듯. 일단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일관된 스토리가 존재하니 훨씬 쉽게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독특한 사건 이야기라 흥미롭기도 하다.


  <타인의 얼굴>은 한 고분자 화합물 과학자가 실험 도중에 액체 질소가 폭발하는 사고를 당한다. 액체 질소의 폭발? 책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액체 질소. 영하 2백도에 육박하는 극저온 상태의 물질이 폭발했으니 그걸 뒤집어쓴 인간은 피부에 닿는 순간 급속 냉각에 의해 동상에 걸리게 된다. 이 상태를 화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리 큰 차이는 없다. 완전히 얼어버리거나 불탄 피부를 빨리 제거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그래서 표피, 진피, 지방층이라 부르는 피부의 3개 층 모두를 제거하면 이 자리에 붉거나 분홍색의 보기 흉한 새 살이 돋는데, 이걸 켈로이드라 부른다. 켈로이드는 유전, 나이, 호르몬에 따라 발생 상태에 차별이 있다고 우리나라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 포털에 쓰여 있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는 삼십대 남자이며, 액체 질소가 얼굴 바로 앞에서 폭발해 얼굴 전체의 피부가 전부 망가졌다. 근시가 있어 안경을 쓰는 바람에 눈과 눈꺼풀에 그나마 영향을 덜 받았고, 기적적으로 입술은 무사했지만, 유전적으로 켈로이드가 심한 체질이라는 불행이 덮쳐 ‘나’의 말에 의하면 눈과 입술을 제외한 모든 얼굴 부위에 마치 거머리 덩어리가 기어 나온 듯한 켈로이드가 서로 뒤엉겨 검붉게 부풀어 올랐고, 거기서 끊임없이 진물도 나오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직장인 K 고분자 화학 연구소에서 일할 때를 비롯해 어떤 형태로든지 외출할 때는 마치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에 나오는 투명인간처럼 머리에 붕대를 세 겹으로 둘둘 싸맨 상태이어야 하지만 일본의 여름은 덥고 습도가 매우 높아 진물과 땀이 섞이면 누구보다 당사자인 ‘나’가 제일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어도 집에 있을 때면 붕대 없이 맨 얼굴로 있었을 터. 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사고 후에 ‘나’ 앞에서 극도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조신한 아내. 반면에 ‘나’는 얼굴에서 악취가 나는 듯한 강박과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는 얼굴 구멍에 대한 연상으로 점차 피폐해져 성격이 갈수록 까칠해진다. 아, 앞에서 비유하느라 데려온 허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이 그러했듯이.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터이지만 어느 밤에 자리를 보아주고 방을 나서는 아내에게 달려들어 한 손으로 아내를 제압하고 다른 손으로 아내의 몸을 만지려는 순간, 아내는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한다. 순간 피식, 하고 욕망이 사라지자 아내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나’는 당연히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자기 맨얼굴에 촘촘하게 박힌 켈로이드, 검붉은 거머리 떼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지내던 하루. ‘나’는 학술지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공 기관에 관한 논문을 읽는다. 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생명의 유지가 최선의 목표이지 흉터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다가 막상 종전이 되자, 삶의 현장에서 상대적으로 흉측하게 보이는 절단 부위나 상처를 플라스틱 인공 기관으로 진짜 신체와 거의 유사하게 재현할 수 있는 신기술을, 고분자를 연구하는 일본의 의과학자가 발명한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에게 전화를 먼저 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

  의사의 진료실에는 놀랄만한 손가락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지문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진 손가락. 의사는 ‘나’의 상태를 듣더니, 얼굴에 땀샘이 살아 있어 무엇보다 통기성이 없는 소재로 얼굴을 덮을 수 없다는 것과, 얼굴은 정신위생학적으로도 매우 큰 문제라고 설명한 뒤, ‘나’를 위한 가면을, 적어도 지금 착용하고 있는 붕대보다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얼굴은 그저 신체의 한 부위가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통로라고 주장하면서.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영혼의 통로가 없는 독방에 갇힌 것이라는 뜻이고, 박사의 지나친 얼굴과 통로에 대한 주장에 화가 나, 엉뚱하게도 책상 위의 손가락만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진료실을 나선다.

  이후 ‘나’는 스스로도 고분자 화학 연구소의 소장 대리로 근무하고 있어서 박사의 논문과 제작 방식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다. 그래서 직접 ‘나’의 방을 작은 실험실로 꾸며 가면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성공적으로 가면 하나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새로 신축 아파트에 방을 얻어 아지트로 삼아 본격적으로 가면인간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아내에게는 1주일 예정으로 칸사이 지방으로 출장 간다고 말해놓고. 이 아지트에 입주하는 날, 관리인의 약간 지능이 모자라보이는 어린 딸은 얼굴에 붕대를 두텁게 두른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 여자 아이는 며칠 후 가면을 쓰고 외출할 때 가면을 쓴 ‘나’가 붕대인간임을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나’는 손길을 거부한 아내가 불만스럽다. 그리하여 백화점에서 실공예를 배우는 아내의 동선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30대 초반 나이의 가면을 쓴 ‘나’는 아내를 유혹한다. 놀랍게도 평생 조신하고 점잖고, 행실 바른 아내는 가면인간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날로 호텔에 들어 동침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남편이 지금 출장 중이라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아내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높은 수준의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에 호텔을 나온 가면 속 나는, 가면을 벗은 후에, 어처구니없게도 가면인간을 질투하기에 이른다. ‘나’를 거부한 아내가 망설임 없이 ‘나’의 부재를 말하면서 유혹에 굴복하던 잘 생긴 모습의 젊은 얼굴을 한 가면인간.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세 권의 공책에 기록했다. 검정, 흰색, 회색 공책에. 모든 기록을 끝마치고 ‘나’는 아내에게 아지트의 주소를 가르쳐 주고 아지트에 찾아가, 공책 세 권을 모두 읽게 만드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의 발표시기가 1964년. 이미 발표하고 60년 이상이 지났다. 그러니 독자는 결론을 읽기도 전에 어떻게 작품이 끝날 것인지 짐작할 수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독특한 작가로 한 세월 살다 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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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민음의 시 308
김경미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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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미는 1959년에 서울애서 출생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오는데, 경기 부천 출생이라는 정보도 봤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자. 한양대 사학과 졸업 후에 고려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수료했단다. 이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 이하 “빗소리와 작약”이라 씀》이 2023년 1월에 나왔으니 세는 나이로 예순다섯, 만 나이로 예순세 살에 냈다. 근데 젊다. 그래서 좋다.

  아주 오래 MBC와 KBS FM의 방송작가로 일한 경력이 독특하다. “별이 빛나는 밤에”. “김미숙의 음악살롱”, “전기현의 음악풍경”, “노래의 날개 위에”, “김미숙의 가족음악”, “윤유선의 가족음악” 등등을 통해 아마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거의 한 번 이상 김경미의 언어를 들어봤을 듯하다. 그게 시인 김경미의 말이라는 걸 몰라서 문제지. 시인들이 방송작가 생활을 이렇게 오래 하나? 이이는 시집도 여섯 권이나 냈던데.

  이이의 젊은 시. 젊다고 해도 예순세 살 중년 입장에서 젊다는 것이지 새파랗게 젊다는 건 아니다.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전문. P.11)



  정말 시가 재미있지 않나? 나는 읽으면서 키득거렸건만. 이래봬도 왕년에 내가 말이지, 하면서 폼 또는 가오 좀 잡는 듯한 모습. 정말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독자라 시를 읽는다 해서 백프로 다 믿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아니더라도 귀엽지 않나? 이런 거 보면 세상 사는 거 다 비슷하다.

  이게 《빗소리와 작약》에 실린 첫번째 시. 두번째 시에 시집의 제목에 나오는 ‘바다’, ‘빗소리’ 그리고 ‘작약’이 등장하는데 분위기는 바로 앞 페이지 <청춘>과는 사뭇 다르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작가 나름대로 중요한 시어가 나오는 시이니 조금 길더라도 전문을 옮긴다.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전문 p.12~13)



  1연에서 죽은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은 화자 ‘나’일 것이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했다가 괜한 미용사 눈물을 짜낸 사람. 죽음과 눈물, 그것도 내 눈물이 아니라 타인의 눈물까지 불러오는 우울과 “마음 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시인. 그리하여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시어 바다, 빗소리, 작약, 모두 페시미즘 적 분위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 바다와 빗소리는 자주 그런 의미의 시어로 사용하지만 약용식물이기도 한 ‘작약’이 같거나 비슷한 분위기의 시어로 등장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아마추어 시 감상자가 생각하기에) 작약이라는 꽃의 꽃말이나, 성분이나, 생김새보다는 ‘작약’을 발음할 때 공명하는 음색이나 분위기, 비록 양성모음으로 만들어졌지만 즐겁게 들리지 않는 발음상 느낌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소리 내 발음해보시라. 작약.

  그런데 이 시의 분위기를 포괄하는 건 역시 바다. 마지막 연에 바다 같은 작약과 빗소리라고 썼다. 작약과 빗소리를 듣고 시인은 바다를 연상하는 수준을 넘어 보는 단계까지 갔다. 시인은 묻는다.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당신은 아무 답이 없다. 애초에 답을 바라지도 않은 듯하다. 당신한테 답이 오거나 말거나, 소포, 요즘 시대니까 택배가 오거나 말거나 그저 시인은 작약과 빗소리를 보고 있을 뿐. 정말 <청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네.

  나는 시인의 우울에 많이 지쳐 있어서, 우울한 시들만 빼곡한 시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시집 《빗소리와 작약》을 그래도 즐겁게 읽은 이유가 <청춘>과 <취급이라면> 같은 시들이 자주 엇갈려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지. 그래서 시인 김택수는 추천사의 앞머리를 이렇게 썼다.


  “씹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다. 김경미 시는 슬픈 웃음과 유쾌한 외로움이 문장에서 계속 배어 나와 자꾸 곱씹어 읽게 된다.”  (p.141)


  평론가의 전문가 연하는 해설보다 같은 시인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간결하게 하는 말이 더 이해하기 쉽다. “유쾌한 외로움”의 시를 하나 골라봤다.



  지나치다



  어느 날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 초 전

  친구와 절연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이 있으므로

  입과 귀에서 그 친구를 없애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그 친구가 내게

  나 또한 그 친구에게

  우리는 서로 지나쳤으리라

  멀리 온 정거장처럼 도를 넘어섰으리라


  네가 억울하고 후련하듯

  나도 후련하고 억울하리라


  너는 나 없이도 친구가 많고

  나는 친구 없이도 하늘이 맑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또 지나치지 않도록 버스에서

  창밖을 본다

  창 속에 말 없이 앉아 있는 나를 본다


  멋진 밤이다   (전문. p.30~31)



  시를 쭉 읽어 나가면 다 읽는 순간 한 방에 팍 이해가 되는 착한 시. 내가 친구한테 절교를 선언한 건 아니겠지. 절연하고 1초 만에 알았으니까. 뭐 이런 친구도 있지 않나? 나도 무지하게 많다. 근데 이런 식은 아니고 살다 보니까 저절로 조금씩 멀어지다가 점점 그냥 그런 3인칭이 된 친구들. 이렇게 절연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 시에서 시인하고 친구는 아닌 모양이다. 서로한테 지나쳤다니까. 얼마나, 어떻게 지나쳤는지도 둘 다 알고 있는 거 같다. 에휴, 이 시를 환갑. 진갑 넘어 썼을 텐데 뭐 그렇게 뾰족하게 살아? 친구하고 절연을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아무튼 멋진 밤이라니까 뭐. 정말로 멋있고 근사한 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어쨌든 시가 외롭지만 궁상맞지는 않다. 김경미. 재미있는 걸.

  시인이 아무리 오래 시를 써도 역시 시를 쓰는 일은 곤혹스러운 모양이다. 내가 여전히 대학 4학년 기말고사 치르는 꿈을 꾸는 것처럼, 김경미는 시인, 작가 지망생 시절이었을 때를 생각하고 치를 떠는 모양이다. 뭐 숙명이겠지. 그런 시가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렸다. 한 학점이라도 F가 나오면 졸업을 하지 못하는 4학년 기말고사 꿈을 여전히 꾸는 나는 이 시의 작가 지망생의 곤혹스러움을 십분 이해한다고 오해하면서.



  한 겨울밤 11시 59분 작가 지망생의 귀가



  걸을 때마다 귓바퀴가 발밑으로 떨어진다

  코는 깨진 지 오래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끝까지 밀고 나가면 된다던 손가락도

  부서진 지 오래


  머리 위론

  몽땅 다 끄고 막고 가린 겨울밤의 검정색들과

  흰 종이같이 눈부신 가로등뿐


  저 흑백의 둘이서 저렇게

  형언할 수 없는

  세상 모든 표현 다 써 대니


  내가 적당한 문장을 쓸 수 없는 것   (전문. P.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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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5-29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송작가로 일하며 쓴 방송 “감성” 멘트를 다듬은 엣세이집도 냈더라고요. 그건 이 시집 보단 읽는 재미가 덜 했어요.

Falstaff 2025-05-29 16:49   좋아요 0 | URL
아오 김경미의 팬이시네요! ㅎㅎㅎ 저도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늙은 아이 이야기
제니 에르펜베크 지음, 안문영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

  예니 에르펜베크가 발표한 첫 소설작품. 표지에는 장편소설이라 했으나, 노벨라Novella, 중편소설로 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작품으로 세 번째 읽는 소설인데, 에르펜베크는 참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카이로스>를 소환해야 하나보다. 패전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히틀러 소년단 출신인 기성세대 한스 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회 시스템. 그것이 청년기에 들어가는 카타리나 세대를 억압하고 관리하는 시대를 비평한다면, <늙은 아이 이야기>의 늙은 아이는 성인처럼 큰 체격을 했으나 2차성징의 발현도 거의 보이지 않고, (자본주의 또는 통일 독일) 사회에서 적응하지도 못해 늘 서열의 마지막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동독 출신 주민의 처지를 은유했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일찍이 독일 소설에서는 소년 시절에 더 이상 나이 먹기를 포기한 남자가 몇 명 등장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오스카, 하인리히 뵐이 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의 주인공 한스. 이 두 소년들은 파시스트들의 사회, 파시즘의 광기어린 악행 속에서 성장을 스스로 멈추기로 결정해 그들이 저지른 죄를 비판하려고 한다.

  예니 에르펜베크가 만든 ‘늙은 아이’는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늙은 아이’가 조로증 같은 현상으로 몸은 성인의 것을 하고 있으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은 소녀일 수도 있고, 애초 나이가 많지만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성인일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일종의 조로증세가 있는 열네 살 소녀로 생각했다가, 점점 읽어가면서 정신과 성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성인, 갑자기 한 순간에 개방되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동독 사람을 비유한다고 읽게 되었다.


  독일 역사에는 이 소녀 같은 인물이 정말 존재했다고 역자후기에 쓰여 있다. 1828년에 뉘른베르크 시내 한복판에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당시 16세 소년 카스파 하우저. 그동안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아무런 사회적 성장을 하지 못한 카스파는 기초적인 말과 숫자를 배우며 사회 적응 훈련을 받다가 길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카스파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채 다시 한번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늙은 아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소녀’의 첫 구절을 읽으면 역자해설에서 소개하는 카스파 하우저하고 별로 틀린 것이 없다. 시내 한복판에, 한밤중에, 이 소녀가 빈 휴지통을 손에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경찰이 소녀를 발견해 말을 시켜봐도, 이름이 뭐니? 어디서 살아? 부모가 누구야? 몇 살이니? 물어봐도, 열네 살, 이라는 대답만 할 뿐이다. 완전히 고아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큰 몸집에 어울리는 뚱뚱한 소녀. 예니 에르펜베크는 본문 겨우 두번째 페이지에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판정한다. 경찰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들은 소녀가 쥐고 있는 쓰레기통을 빼앗고 통통한 손을 잡은 채 아동 복지원으로 데려간다.

  복지원에 들어간 후에 소녀는 그나마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작가가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하는 바람에 독자는 지적발달장애를 염두에 두었는데, 지적발달장애가 있는 소녀라고 보기에는 그나마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시작해서 조금 이상하다, 발달장애인의 마음 속 생각, 뇌의 화학작용을 에르펜베크, 작가의 시선으로 좇아가 해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 더 읽으면, 그러니까 소녀는 애초에 돌봄과 교육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깡통급 복지원 학생들보다는 조금 나은 지식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다만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여 큰 덩치와 피하지방과 내장지방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무척 많이 타는 데다가 만성 비염증세가 있어 늙은이처럼 맑은 콧물이 코에 방울방울 달려 있을 때가 많은데, 이를 닦기 위한 작고 얇은 손수건을 남한테 보이기 창피해한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희로애락을 다 느끼는 보통 사람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하여 독감, 감기에 쉽게 걸리고, 회복하는데 오랜 요양을 해야 한다. 소녀는 따뜻한 복지원 양호실의 깨끗한 침대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빨리 걷기도 힘들고, 뛰는 건 거의 하지 못하지만, 쉬는 시간이 있으면 철봉대에 올라 그 위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소녀.

  2차 성징이라고는 언제부터 했는 지 모르겠지만 생리를 하는 것 말고 없다. 가슴은 전혀 발달하지 않아 남성형 가슴에 남자 것보다 큰 젖꼭지만 달려 있다. 엉덩이도 발달하지 않아 그저 가운데가 불룩한 항아리형 원통처럼 생겼다. 소녀의 생존방식은 서열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러면 아무도 소녀를 경계하지도 않고, 문제가 터져도 원인제공자로 지목 받지 않으며 해결자 혹은 해결방법을 생각해낼 멤버로 여기지 않는 자유로운 자리가 바로 가장 낮은 서열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아서.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문제가 한 사람을 건너뛰지는 않는다. 8학년 동급생 다섯 명이 3학년 남자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소녀가 본 적이 있다. 아이들도 소녀가 자기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걸 앍고 전전긍긍한다. 소녀가 교무실에 가서 고발을 하기만 하면 다섯 명 전원은 규율상 퇴소를 당하게 되고 퇴소 후에 이들 역시 단 한 곳도 갈 데가 없다. 그러나 소녀는 결코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루, 다섯 명 가운데 하나인 뵈른이 어떤 식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생의 적지 않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뒤에서는 선생이 쫓아오고. 뵈른이 도망가는 길에 그저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소녀. 뵈른이 소녀와 꽈당 부딪히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소녀에게 쥐여주고 꽁무니를 뺀다. 소녀는 주머니에 얼른 돈을 집어넣고 완전하게 표정 없이 그냥 다시 서 있다. 결코 누구에게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뵈른은 잡혔지만 돈을 훔친 적이 없다고 했고, 선생은 돈을 도둑 맞았으며, 소녀의 주머니에 있던 건 뵈른에게 돌아갔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보육원에서 소녀의 사회생활은 전기를 맞는다. 이제 보육원의 주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

  그러면 좋을 것 같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후 소녀는 서열의 가장 아래 자리에만 머물 수 없다. 알고 보니 글씨도 예쁘게 쓰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보다는 아는 것이 있어서 그들의 시험지를 대신 메꾸어 주기도 한다. 이 단계가 되면 독자는 이 소설이 단순하게 외모가 늙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카이로스>처럼 일종의 정치소설일 수도 있고, 좀 개성있는 독자라면 정치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크게 재미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한 번 휙 읽고 던져버릴 작품도 아니다. 개방시대를 맞은 폐쇄사회에 있던 사람들의 곤란함을 콕 집어 쓴 작품으로 읽히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이 많기는 하지만 독특한 문법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노벨라, 중편소설이다. 예니 에르펜베크는 처음으로 쓴 소설부터 현상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비유하는 소재를 사용했다. 그래서 불편함을 주기도 하겠지만 하여튼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인 건 틀림없는 듯. 눈에 힘주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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