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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신부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9
도리트 라비니안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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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트 라비니안은 이스라엘 중부 샤론 지역에서 1972년에 이란계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중동 지역을 생활의 기반으로 하는 집안 출신 유대인 작가는 처음 읽는 것 같다. 아모스 오즈도 그러지 않나 싶어 검색해보니 라트비아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가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선입견인지 외모로도 약간 차이가 있는 듯. <페르시아의 신부>가 첫번째 발표한 소설이란다. 데뷔작이 아니란 얘기냐고? 그렇다. 데뷔는 1991년 시집 《예, 예, 예》로 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위키피디아를 읽어보면 2014년에 소설 <접경생활Borderlife>이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남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반 자전적 소설이라는데, 흠, 좀 놀랐다. 하긴 사랑에 국경이 어디 있나?
제목이 <페르시아의 신부>라서 나는 어린 소녀를 신부로 삼는 극한 조혼에 따른 사회문제나 무슬림 종교에서 신음하는 여권에 관한 페미니즘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극한 조혼 풍습인 건 맞는데 자꾸 그쪽으로 생각해보려 해봐도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다. 그냥 20세기 초∙중엽 이란의 유대인 게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을 어린 신부와 어린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를 주목하면서 그렸다고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당연히 이란, 페르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니까 남성의 가부장적 부당한 행위도 여러 번 등장하지만 라비니안은 그것을 강조하는 데 힘을 주지 않았다. 독자도 처음엔 좀 신경 써 읽기 시작했다가 진도가 나가면서 재미있게 후루룩, 배고플 때 덜 뜨거운 잔치국수 들이마시듯 즐기며 읽기만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씀.
열일곱 살 먹은 꽃 Flora플로라. 전보다 몸이 훨씬 불었다. 첫번째 임신이다. 근데 신랑이 토꼈다. 그래서 울고 운다. 울어도 그냥 우는 게 아니라 훨씬 분 몸에 걸맞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곡소리로 엉엉 온동네 사람들이 이미 다 알듯이 드높고 드높다. 얼마나 우는지 여인네들은 이제 쿠치크 마다르, 즉 어린 엄마의 임신이 이것이 끝이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참 별스러운 임산부. 엄마 미리암 하놈이 말하기를, 결혼하고 며칠 후 저주받은 월식일 밤에 그렇게도 말렸건만 하필이면 그날 악마가 밤하늘에 넘실거리는 시간에 아이를 만들어서 이 사달이 생겼단다. 근데 엄마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알려면 신랑의 직업과 영업 방식에 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알아야 한다. 왜 신랑은 습관적으로 질외사정을 고수했을까?
나한테 음란마귀가 씌웠나 어쨌나, 신랑 이름을 읽고 거 참 웃기네 했다. 이름이 ‘샤힌 보지도지’이다. 벌써 십여 년 전에 2차 호프집에서 노동조합 집행부를 우연히, 진짜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투쟁부장, 복지부장 기타 등등. 나하고 동석했던 이들은 당시 노무팀장, 생산실장. 우리는 노무팀장 면을 살려주려 합석에 응했다. 그래 서너 조끼씩 순배가 돌아가고 얼근히 취한 나는 어떤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웃음을 흘렸다. 그걸 본 위원장이 좋은 표정으로. 팀장님 왜 웃으셔요? 대답하기를 소학교 때 송창식과 변웅전이 하는 이야기 들은 생각이 나서 그렇지요. 뭔데요? 송창식과 변웅전이 서로 이름에 붙은 받침 떼고 읽으면서 티격태격, 거 가관이더군요. 그래서요? 우리 복지부장님도 받침을 떼고 읽으니 흐흐 재미 있습니다 그려. 이런 적 있었다.
이야기하기 전에 틀림없이 노조 사람들 모두한테, 말하기 싫다, 당신들 열 받을 지 모른다, 했고, 그들이 천만의 말씀, 전혀 그럴 일 없으니 마음 편히 이야기 해보시라, 해서, ‘받침 뺀 복지부장’을 꺼냈으며, 전원 우하하하하 거창하게 웃어 제쳤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심각한 사무국장 새끼가, 자기도 나더러 마음 편하게 얘기해라 해놓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조 간부한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했다. 그랬더니 단 1초도 안 걸려 같은 노동형제가 하는 말에 휘까닥 돌아버린 위원장이 아이고, 술병 깨고, 술잔 집어 던지고, 그런 생 난리가 없었는데, 그 사람들, 돈도 안 내고 그냥 가버렸다. 뭐 그런 일도 있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어쩄든 나한테는 좀 민망한 이름의 샤힌 보지도지(‘염소도둑’이라는 뜻)는 사기꾼 성향이 농후한 전형적인 유대인 포목상인인데, 온갖 변설을 떨어 무슬림 집안에 안주인한테 천 두루마리를 보여준다. 옷감 여러 필을 방에 촥, 펼쳐놓고, 노가리를 실컷 푼 다음, 말이 좀 먹히면 이제는 옷감을 직접 들고 사모님 몸에 척 가져다 대고, 세상에 이런 몸에 이런 옷감이 없으리, 울룰랄라 칭찬을 하면서 몸을 비비적 거리다가 슬그머니 뻣뻣하게 경직된 살을 슬슬 문지르는 단계까지 이른다. 그러면 결국 할 거 다 하게 되는데, 언제나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뇌리를 떠나지 않는 아버님의 교훈, “샅에 달린 누에를 이방인 여인의 고치 속에 넣으면 안 되느니라.” 이교도 나비들을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니까 그 순간이 오면 얼른 빼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비단 손수건에 사정을 하는 게 하도 버릇이 되었다. 그래 결혼식을 한 날부터 시작해 계속 비단 손수건을 꺼내다가 하필이면 악마가 허공을 채우는 불길한 월식날 밤, 그날부터 별을 따기로 결심을 했던 거였다.
페르시아 옴리쟌에 들어와 유대인 도살업자 집안의 사위가 된 샤힌 보지도지는 결혼식 포함해 6개월 동안 지내다가 머나먼 도시 이스파한으로 장사를 떠나 2개월, 아무리 길어도 3개월 안데 돌아올 터이니 몸 건사 잘 하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날들이 가고 점점 초조해진 라토리안 집안. 옴리쟌을 거쳐가는 상인들에게 샤힌 보지도지를 물어보니 한 장사꾼이 하기 싫은 이야기를 한다는 표정과 어투로 시투룽하게 하는 말이, 그가 지나간 길에 어린 신부 셋과 과부 한 명이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 있다는 거였다.
플로라의 아빠는 이름난 도살업, 정육점 가문의 쌍둥이 아들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동생 내외가 깨를 볶으면서 잘 살다가 하루는 식중독에 걸려 한날 한시에 딸 하나만 남겨둔 채 숟가락 놨다. 딸의 이름이 나지아. 사촌 언니 플로라보다 네 살이 어려서 열세 살.
플로라의 엄마 미리암 하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옴리쟌의 모든 유대인 게토 여성뿐만 아니라 게토 밖 무슬림 진영의 1부 4처 집단까지 아울러 가장 게으른, 게으르다기보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 물론 가정교육 문제인데, 원래 무진장 깔끔했던 집구석이 하루아침에 가장 어질러진 집안꼴로 변해버린 건 전적으로 못된 아빠 책임이었는데, 미리암은 아무튼 소녀시절부터 이런 미풍양속을 몸 깊이 간직한 채 시집을 와서 두 딸 역시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식탐 많은 여성으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날이 갈수록 지저분한 집구석 꼬라지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미리암은, 시동생 부부의 장례식에 갔다가 당시 겨우 일곱 살 난 시조카 니지아가 얼마나 야물딱지게 청소, 요리 같은 집안일을 잘 하는지 홀딱 반해버렸다. 이미 동서가 죽기 전에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아, 정말로 자네가 죽는다면 니지아를 내 며느리로 삼기로 맹세를 함세, 이래버렸기도 했고, 아다시피 유대교나 무슬림에서 한 번 맹세를 하면 이건 절대 인간의 힘으로 취소할 수 없는 거라서 께름칙하던 차에, 마침 남편도 이번 기회에 니지아를 집에 데려와 키우자 하는 걸 못 이기는 척했다. 딱 한가지 조건을 달고. 자기를 ‘아메 보조르그’ 즉 존경하는 숙모님이라고 부르라는.
근데 이 미리암이 워낙 미인이라서 순서대로 딸-아들-딸이 전부 생긴 건 하나 거의 완벽했다는 말씀. 비록 숙부네 집에 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하녀 수준의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지만 니지아는 잘 생긴 사촌오빠 무사와 결혼해 플로라처럼 어린 엄마, 쿠치크 마다르가 될 꿈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있을 게 아직도 없는 거다.
플로라는 열세 살에 초경을 했다.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몰라 종아리와 발꿈치에 꾸덕꾸덕한 피딱지가 앉은 걸 보고 그것의 근원지를 찾아 올라가다 보니 그게 초경인 줄 알고 나지아한테 말했고, 나지아는 앞날의 남편 무사에게, 무사는 누나 호마에게, 호마는 아빠한테 말했으며, 아빠는 엄마한테 한 마디 함과 동시에 집집마다 키우는 전서구, 우편용 비둘기를 몇 십 마리 날려 지역의 각 게토에 널리 소식을 알린 바 있다. 그러자 다음 주부터 페르시아 각지에서 청년과 청년의 어머니들이 속속 모여들어 결혼 신청을 하기 시작했던 걸 나지아는 봤던 것.
나지아도 빨리 초경이 터져야 무사 오빠하고 결혼을 할 터. 가만 보니 오빠는 더 기다리기 힘든 거 같다. 왜 힘든 줄은 모르겠지만 괜히 그렇게 보인다. 나지아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손가락으로 슬쩍 아래를 훑어, 아직 깜깜한 새벽이니 냄새를 맡아보고, 그때마다 실망한다. 이제 열네 살이 됐는데도 소식이 없으니 이걸 어쩜 좋아.
하지만 가히 소설 한 편의 주인공으로 발탁할 정도의 캐릭터라면 무슨 수를 쓸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걱정하지 마시라. 정말 독한 방법으로 아직 멘스가 터지지 않은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나지아, 이 아이의 소원은 이루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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