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 작전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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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목가>와 <휴먼 스테인>을 재미있게 읽고 단박에 필립 로스의 팬을 자임하고 다녔다가 <유령퇴장>에 급실망, 손절을 해? 말아? 적지 않은 세월 헤맸다. 무려 5년이나 망설이다 <우리 패거리들>을 읽고 으악, 이게 내가 알던 필립 로스 맞아? 작품 속에 간혹 경박한 면이 조금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폭력적으로 가볍게 입을, 또는 손모가지를 놀리다니 이제는 정말 가까이할 수 없군. 일단 마음먹었다가,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딱 한 번만 더 읽는다,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은 책이 <샤일록 작전>이다. 내가 기억하는 유대인으로서의 필립 로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프라이드도 갖지 않는, 그러니까 유대인이라기 보다 마치 한국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렇듯이 그냥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렇게 보였다는 거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샤일록 작전>을 읽으면서 세계 유대인 공동체에서 (어쩌면) 로스가 튀는 행동을 해 오랜 세월 유럽쪽에 머물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모르겠으나,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생활한 유대인들을 주축으로 한 시오니스트들 하고는, 아주 내놓고 그러지는 못했겠지만, 서로 앙금 비슷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이 책에서도 필립 로스는 시오니즘을 내놓고 반대하지 않는다. 그럼 어떤 식?


  로스를 읽으면서 아주 예외적으로 <샤일록 작전>에서 그는 놀랍게도 포스트모던이라 할 수 있는, 그러나 이젠 벌써 클리셰가 되어버린 방식을 채택한다. 1988년 1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친척 앱터가 뉴욕의 필립 로스에게 전화를 해 이스라엘 라디오의 보도 내용을 알려준다. 나는 분명히 뉴욕에 있는데, 또다른 필립 로스가 예루살렘에서 폴란드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공포의 이반Ivan’이라 불린 존 데미야뉴크의 전범재판을 방청하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혔고, 라디오에서도 필립 로스가 재판을 방청했다고 소개했다는 거다. 이를테면 문학 작품 속에 간혹 등장하는 “또다른 나” 혹은 “페르소나”가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 스위트룸 511호에 묵고 있으며, 스위트룸에서 강연회를 겸한 팬들과 만나는 행사로 할 예정이라고. 정작 진짜배기 필립 로스는 책 한 권을 끝마치고 그간 쌓인 긴장을 풀 겸해서 책을 끝마치면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맨해튼의 방 두 개짜리 호텔 스위트룸에서 아내 클레어와 함께 거의 5개월 동안 피난민처럼 지내고 있는데 말씀이다. 웃기지? 방 두 개짜리, 맨해튼의 이름있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5개월 동안이나 불쌍하게도 “피난민처럼” 지내고 있다니 말이지.

  이스라엘의 킹 데이비드 호텔 스위트룸 511호에서 로스 흉내를 내고 있는 미친놈의 입을 빌려, 필립 로스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이상적이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없는 이스라엘-이슬람,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기막힌 방안을 제시한다. 오죽했으면 나도 읽으면서 화들짝 놀랐겠느냐 말이지.

  이스라엘의 유명한 작가 아하론 아펠펠드가 뉴욕의 로스에게 전한 말에 의하면, 킹 데이비드 호텔의 필립 로스는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공포의 이반’, 존 데미야뉴크 전범재판을 방청하기 바로 전에 폴란드 그단스크의 모처에서 레흐 바웬사를 만나, 언젠가 폴란드에서 노동 솔리다리티가 정권을 잡을 때,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들의 재정착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고 주장했단다. 예루살렘의 로스가 주장하기를,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시 자기들이 살던 유럽으로 이주하는, 역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지면, 이스라엘의 인구가 대폭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선을 1948년 수준으로 되돌릴 수 있어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역시 1948년 이전처럼 별 다툼 없이 서로 이웃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만일 지금처럼 미국과 이슬람 세력간의 무력충돌이 계속되면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두 진영 가운데 한 쪽에 의하여 원자폭탄이 날아들어 한 쪽을 거덜내 완전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주장이다. 만일 생존자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지구인이 몽땅 멸망하는 순간까지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예전 나치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신세로 떨어질 것이며, 전세계 유대인들도 이마에 불그죽죽하게 찍힌 낙인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란다. 당연히 너무 순진하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과하게 낭만주의적인 발상이지만, 탁 읽어보면 어찌됐던 간에 아이디어 하나는 기발하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인물 한 명. 존 데미야뉴크. 1920년생 우크라이나인. 1940년에 소련군에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1942년에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다. 북한을 비롯한 붉은 군대 소속원들은 포로로 잡히는 것을 수치로 알았고, 포로였던 병사들이 교환으로 귀국을 해도 경멸을 받았으며 심할 경우엔 범죄인처럼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소련 시절의 숱한 수용소 소설 읽어보시라. 내 말이 맞다. 스물두 살의 데미야뉴크는 나치군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근무할 인원을 뽑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요, 저요, 손을 번쩍 들어 몇 군데의 절멸수용소에 들어간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데미야뉴크가 특히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공포의 이반이라는 별명으로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를 지휘하면서 나신 상태로 가스실로 향하는 수만, 수십만 유대인들에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갖은 악행과 고문과 폭행을 저질렀다는 거다. 천운을 타고나 수용소에서 생존한 자들이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특정한 반면, 존 데미야뉴크, 본명 Ivan Mykolaiovyxh Demjanjuk는 무려 43년도 넘게 지나 목격자의 기억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그곳 교도관이었던 것은 맞는데 공포의 이반은 다른 교도관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1951년에 미국으로 이민 가 포드 계열사에서 자동차 정비일을 하던 데미야뉴크는 1986년에 미국 경찰에 전범으로 체포되어 신병이 이스라엘로 넘겨진다. 이후 1988년에 첫 재판을 받는데, 이걸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 511호에 머무는 가짜 필립 로스가 방청을 했다는 거. 하여간 1심에서 데미야뉴크는 유죄, 사행 판결을 받지만 1993년 대법원에서 피고의 진술을 받아들여 진짜 ‘공포의 이반’은 다른 교도관이었다고 판결, 석방되어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2001년에 미국 정부에 의하여 절멸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것이 확실하다고 결정이 나 다시 체포되어 2005년에 이번엔 유럽, 독일이나 우크라이나 또는 폴란드로 강제송환할 것을 결정하지만 정작 독일 법정으로 보내진 것은 2009년 5월, 그의 나이 89세 때였다. 뮌헨에서 있었던 1심 결과 데미야뉴크가 2만9천 명의 유대인 학살에 관련이 있는 자라고 판결해 5년 형을 받았으나, 데미야뉴크는 이를 다시 부인해 항소했고, 독일 정부는 일단 그를 석방했다. 아무런 추가 정보가 없어서 모르겠는데 내 생각으로는 보석 아니었을까 싶다. 재판은 계속 진행되지 못하고 2013년 3월 17일이 도래해, 그는 최종판결을 받지 못하고 독일의 노인 복지 시설에서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B급 문화의 대변인인 나무위키는 엄밀한 의미에서 데미야뉴크는 무죄인 상태로 죽었다고 썼다.

  필립 로스는 <샤일록 작전>을 1993년에 써서 세번째로 펜/포크너 상을 받았다. 펜/포크너 상을 몇 월에 주는 지 모르겠으나, 1993년은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데미야뉴크에게 무죄를 선고한 해인데, 이 책에서 로스는 데미야뉴크가 빼도 박도 못하게 ‘공포의 이반’임을 확신한다. 독일 법정에서도 2만9천 명의 살해에 관련이 되었다고 했지,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공포의 이반으로 고문과 학대와 폭력을 <샤일록 작전>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실제로 했다면 유대인 관련해서는 거의 무조건적, 습관적으로 엄벌에 처하는 독일 법정이 왜 5년형만 때렸을까?

  하여간 나는 좀 이상하다. 지금 데미야뉴크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범인으로 확정하지 않은 시점에 한 인간을 뒤꿈치로 자근자근 밟고 있는 거다. 실제로 이 데미야뉴크를 이반으로 설정해서 다큐멘터리, 드라마 같은 것도 만들었다. 시청률과 박스오피스는 진실에 우선하니까.


  하나 더. 내 중딩 시절에는 확실하고, 고딩 시절에는 기억이 없는 거 보니까 그랬던 거 같은데,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대표하는 작품은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가 거의 유일했다. 확인하기 위해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을 검색해보니까 소설은 1979년, 영화가 1982년이다. 그럼 맞다. 내 청소년기 시절에는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알지 못했다.

  <샤일록 작전>에서 필립 로스 역시 1960년대까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멸절을 그렇게까지 강하고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처럼 <안네의 일기> 정도면 충분했다고.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다수의 홀로코스트 작품이 있었겠지. 로스의 주장은 ‘세계인의 주목을 크게 받을 만큼’이 아니었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러다가 1967년 6일 전쟁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이 거의 완벽하게 이슬람 세계에 승리하면서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홀로코스트가 알려지기 시작했단다. 유대인은 지난 2천년 동안 차별받고 탄압받은 역사와 아울러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동부 유럽에서 있었던 불행한 멸절 시대를, 돈과 정치력과 문화의 힘으로 세계만방에 알림으로써, 1차, 2차, 3차…n차 중동전쟁을 통한 무슬림에 대한 가혹행위를 무마하고자 했던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거, 나도 독후감을 통해 자주 주장했던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유대인인 필립 로스의 입과 펜을 통해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지니까, 비록 좋은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반갑기는 했다. 반가워? 아니, 아니. 이런 비극적인 사건에 적당한 다른 단어 없을까? 하여간 눈이 번쩍 띄었다니까.

  결론을 말할 시간이다. 분량이 너무 많다. 비슷한 이야기가 자꾸 중첩되어 지루한 느낌이 든다. 특히 “또 다른 나”와 “페르소나”와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별점을 준다면 셋 정도가 좋겠다고 생각이 들 즈음, 역 디아스포라를 주장하고, 중동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유행이 터져 별 하나 추가, 넷 정도가 마땅하지 않을까. 필립 로스가 60세에 발표해 펜/포크너 상을 받은 작품이다. 괜히 내 독후감과 선입견 때문에 이이의 작품을 멀리하실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말했다. 분량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했다고. 지루한 스토리를 굳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메모해둔 것이 아깝기는 하네.) 이것만 인용하자. 500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늙은 스파이 스마일스버가가 필립 로스에게 하는 말이다.


  “유대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배반했소. 그리스도교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했다는 뜻이오. 그들을 경멸과 예속의 대상인 ‘타자他者’로 만들어, 인간의 지위를 빼앗았소. 사실은 이것이오. 팔레스타인 민족은 전적으로 무고하며, 유대 민족은 전적으로 유죄다. 내게 있어 경악스러운 일은 소수의 부자 유대인이 PLO에 거액 기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대인이 자기도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중략)

  언젠가 팔레스타인이 승리한다면, 그래서 여기 예루살렘에서, 예를 들면 지금 데미야뉴크 씨의 재판이 열리는 바로 그곳에서 전범재판이 열린다면, 그 재판에서 거물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하급 관리들도 다뤄진다면,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난 앞에서 나 자신을 변호할 말이 하나도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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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2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필립 로스 손절했어요. <에브리맨>이 좋아서 입문했고, 몇 권 읽어봤는데, 제겐 카버가 더 맞는 듯합니다. 그래서 로스 책 모두 처분했어요..ㅎㅎ

Falstaff 2025-04-21 11:20   좋아요 0 | URL
평양 감사도 싫으면 안 하는데 까짓 소설가야 말 하면 뭐합니까, 싫으면 때려 치우는 거지요. 잘 하셨습니다! ㅎㅎㅎ
 
현대일본희곡집 10 현대일본희곡집 10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 연극과인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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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현대희곡은 그나마 자주 읽는 편인데 반해, 일본의 현대 희곡은 별로 기회가 없었다. 사카테 요지와 며칠 전에 읽은 마쓰다 마사타카가 언뜻 생각난다. 아주 약간 명의 작품을 더 읽었을 듯한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거나 동아시아에서 현대 문학 장르를 제일 먼저 도입하고 당시 조선과 중국으로 전파한 문화적 선진국 일본의 작품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책을 기다리는 중에 읽은 마쓰다 마사타카의 <바다와 양산>은 일주일 전에 독후감을 썼듯이 애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일본의 희곡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오래전에 베세토BeSeTo에 대해 들은 적 있다.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을 짓고 동아시아의 연극인끼리 의기투합해 교류를 모색하고 함께 발전하자는 취지의 단체를 이루었다고. 좋은 아이디어다.

  이 단체와 별개로, 혹은 일환으로 2002년에 한일연극교류협의회를 결성해서 도쿄에서는 한국현대희곡 낭독공연을 하고, 서울에서도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을 한 후에 희곡집을 냈다. 한국측 교류협회 회장 심재찬은 2022년에 현대일본희곡집 10편을 내면서, 2년에 한 번씩 일본 희곡 다섯 편을 실은 희곡집을 모두 다섯 번 출간하겠다고 했는데, 벌써 열 번째 책이 나와 기쁘다고 말한다. 좋은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건전한 교류가 이어지기 바란다.


  이 책에도 다섯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모리모토 가오루 (1912~46), <여자의 일생>

  야마우치 겐지 (1958~  ), <안경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

  이시하라 넨 (1972~  ), <하얀 꽃을 숨기다>

  다니 겐이치 (1982~  ), <1986: 뫼비우스의 띠>

  요코야마 다쿠야 (1977~  ), <만나러 갈게, 비는 오지만>


  극작가들의 생몰연대가 다양한 편은 아니다. 일본 문예의 시기별 특징에 대하여 알지 못해서 이렇게 배치한 이유 또한 짐작하지 못하지만 70~80년대생 극작가들의 작품에 셋이나 실린 것이 눈에 확 들어오고, 같은 이유로 1910년대생 모리모토 또한 색다르다. 20, 30, 40, 60년대생은 무슨 이유로 빠졌을까? 이유가 있겠지. 특별히 그 시기에 극작의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닐 터이니. 기회가 있으면 일본 희곡을 더 읽으면서 차차 알아가면 될 터이다. 근데 도서관에서도 일본 희곡집은 찾기가 참 힘든다.


  모리모토 가오루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서양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책 속의 작가 소개를 보면 서머싯 몸과 노엘 카워드, 손톤 와일더 등이 대표적이란다. 이 가운데서도 비록 퓰리처 상을 받았을지언정 지금 시각으로 보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와일더의 <우리 읍내>도 끼어 있다. 세월이 그런 것이지. 한 시절 각광을 받던 것이 이제는 한물간 것처럼 구석에 찌그러져야 하는 거.

  <여자의 일생> “초고는 태평양 전쟁 말기 전쟁 의식의 고취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선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일본문학보국회(日本文學報國會)의 위촉작이었다.” 그러니까 전쟁은 망해가지만 그럴수록 일본의 군부와 사회는 국민들에게 더욱 참전의 의지를 불사르고 심지어 옥쇄까지 요구하기 시작할 찰나인 1943년 말경에 의뢰를 받아 1945년 패전 바로 전에 공연을 했다. 당시 모리모토의 나이 34세. 근데 징집당하지 않고 희곡을 썼다고? 그렇다. 폐결핵이 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의 초고는 출판되지 않고 자필 대본만 남아 있어 훗날 간행되었고, 패전 다음 해인 1946년에 모리모토가 작품을 대폭 수정해 패전 이후의 일본 현실도 작품에 담았다. 이때 미군정의 검열을 걱정해 출판사에서 또 한 번의 삭제가 이루어졌는데, 연극이라는 장르 특성상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드라마투르그나 연출자에 의하여 대본이 수정되어, 이 책 속의 <여자의 일생>은 1946년 개정판의 번역이다.

  1막 1장은 1945년 10월. 불타버린 도쿄의 자기 집터 앞에서 망연하게 앉아 있는 주인공 케이 앞에 쓰쓰미 에이지가 나타난다. 둘은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세월도 세월이려니와 패전 속의 필연적인 굶주림과 누추함까지 더해 기억 속의 모습을 되살릴 수 없는 거였다. 케이는 이 자리가 자기네 집이 있던 터이며, 지금 움 같은 몸 뉘일 곳을 만들어 어떻게 해서든지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다. 이제 늙어 자신을 해꼬지하거나 훔쳐갈 것도 없는 몸이니 그거 하나는 편하게 마음먹어도 되는 신세. 에이지는 전쟁이 끝나고 갈 곳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그나마 식량이 있는 지방으로 가는 대신, 혹은 가기 전에 예전에 살던 쓰쓰미 가문의 집터를 한 번 둘러보고 갈 셈쳐서 와본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서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놀라서 숨이 거의 멎을 듯이, “당신… 에이지 씨?” 하는 순간 무대는 빠르게 암전된다.

  1막 2장은 1905년. 1장과 같은 쓰쓰미 일가의 집. 1905년은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눈부신 승전을 올린 군국주의 일본의 전성기였다. 이때 둘째 아들 에이지가 열아홉 살. 고모네 집에서 거의 쫓겨난 케이가 쓰쓰미 집 마당에서 땅에 떨어진 빗을 주워 가지고 있다가 도둑으로 몰린 일이 있다. 가족들이 물어보니 케이의 어머니도 죽었고, 아버지는 청일전쟁에 나가 전사해서 고모네 집에 얹혀 살고 있던 거다. 군국주의 일본의 국민들은 전사한 아버지를 가진 자녀를 돌볼 줄 알아 케이는 이후 쓰쓰미 집안에 살게 되고, 청일전쟁이 동학농민전쟁 이후, 갑오경장 직전 일이니까 1894년, 이때 케이는 열댓 살 정도 되었는데, 이후 쓰쓰미 가족의 일원이 되어 당당하게 쓰쓰미 상점의 운영을 거의 전담하는 위치로 격상한다. 당연히 아들 가운데 한 명의 아내 신분으로.

  이런 이야기다. 그러면서 패전에 따른 책임 같은 것도 케이를 통해 발언하는 등 미군정의 입맛도 적당하게 맞추어 주지만 그렇다고 정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진심의 한 자락은 깔고 있는 듯한 느낌.


  유일한 여성 극작가인 이시하라 넨의 <하얀 꽃을 숨기다>도 주목할 만하다. 아니, 이런 표현 가지고는 부족하고, 희곡을 즐기거나 즐기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NHK를 빗댄 것이 틀림없는 MHK 방송국의 의뢰로 다큐멘터리 외주업체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재판하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이 전세계에서 모여, 일본 정부와 천황을 ‘반인도적 범죄’로 심판”하는 여성들의 민중법정을 취재하기로 한다. 총 4부작 가운데 회사가 맡은 부분은 2화 여성국제전범법정, 3화 국제공청회의 소개와 전시 성폭력에 대한 생각이다. 이 이슈는 2001년 1월 30일에 실제로 NHK에서 방송한 특집 시리즈 “전쟁을 어떻게 재판하는가”에 관련한 일련의 소동이라고 각주에 설명이 나와 있다.

  결론은 버킹검. 결국 이들이 취재하고 편집한 여성국제전범법정과 전시성폭력은 무수하게 가위질을 당해 자신들이 찍어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은 거의 나오지 않고, 보나 안 보나 마찬가지 수준의 처참한 다큐멘터리만 나온다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우리도 알고 양심적 일본인들도 아는 것이지만, 여기에, 이렇게 말하면 이것도 성차별인지 모르겠는데, 여성만 표현할 수 있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다른 성보다 훨씬 더 호소력 있고 함축성 있게 포착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을 기가 막히게 드러낸다. 숱한 사람들이, 아동들이 당하고 있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아짱, 아짱,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하지?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 이 대사를 읽는 순간, 오조족 돋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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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8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필립 로스, <샤일록 작전>
수요일. 페터 플람, <나?>
금요일. 거페이, <산하는 잠들고>

그레이스 2025-04-18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스라이팅!
폴스타프님은 정말 많은 희곡을 읽으시네요.
그리스 비극 읽으면서 그제야 좀 희곡에 적응한듯해요.

Falstaff 2025-04-18 21:33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점점 나아지더라고요. 희곡을 읽지 말고 연극을 보자고 그랬었는데 이젠 희곡 읽으면서 무대를 상상하는 게 재미도 있고요. ㅎㅎ
 
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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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생이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을유생 해방둥이 닭띠. 생일이 12월이라 아직 일흔아홉 살이다. 독후감을 쓰느라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니, 이이가 아일랜드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거기서도 웩스퍼드 출생이다. 웩스퍼드에서 아마 매년 오페라 축제가 열리지? 마이어베어의 <북극성>, 안톤 루빈스타인의 <악령> 등 자주 공연하지 않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 다양한 레퍼토리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전엔 실황 음반이 종종 나왔다. 아쉽게도 녹음/화면 저장 장치의 시대가 끝나 이젠 구경하기 힘들지만. 웩스퍼드가 여태 스코틀랜드에 있는 줄 알았지 뭐야. 밴빌이 거기 출신이군.

  차고 직원 마틴 밴빌 씨와 아그네스 사이의 삼남매 빈센트, 존, 베로니카 모두 작가란다.

  존은 웩스퍼드에 있는 세인트피터스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칼리지College는 대학이 아니라 우리나라 학제로 고등학교를 생각하면 된다.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젊은 시절 4년 동안 내리 술을 퍼 마시느라 연애도 하지 않은 걸 이날 이때까지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그게 뭐 어때서. 죄도 아닌 걸. 너무 어려서부터 밝히면 뼈 삭는다, 뼈 삭아. 그렇다고 놀고먹은 건 아니고, 아일랜드 국적 항공사 에어링구스Aer Lingus에서 직원으로 일을 했는데, 직원들에게 주는 특별 할인 티켓을 이용해 그리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다고. 이후 일간지 몇 군데를 거치다가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잘했다. 존 밴빌 정도의 실력이면 당연히 전업작가를 해야지.

  어디서 주워듣기를, 더블린에 있는 책방 아무데나 가도 작가 세 명의 전문 가판대가 놓였으니 첫째가 조이스요, 둘째가 트레버이고 셋째가 밴빌이라. 뭐 믿거나 말거나. 그만큼 밴빌이 아일랜드에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는 말이겠지. 나는 세 권의 밴빌을 읽었는데 전기 소설 <케플러>와 <코페르니쿠스>는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 책을 골랐을까,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소년소녀 위인전집 같은 전기류를 무척 싫어했던 버릇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처음 읽은 밴빌 <바다>는 아직도 휴가를 맞은 가족과 주인공 소년을 둘러싼 쓸쓸한 바닷가 광경이 기억날 정도이다. 그때 역자 정영목의 번역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린 적 있다. 당시에 감히 유명 역자의 “한국어 문장을 만드는 솜씨”를 가지고 턱도 없는 불만을 터뜨리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얼굴이 다 화끈하다. 5년 전만 해도 내가 참 건방졌구나. 다시 말해야겠다. 정영목의 우리말 문장은 섬세하다. 어쩌면 (이게 문제인데) 밴빌의 원문보다 더 매끄러울 수도 있겠다. 가만 읽으면서 간혹 긴 복문複文 중에서 주어와 술어가 귀찮을 정도로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바다> 얘기가 아니라 <오래된 빛>의 경우이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작품은 일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독후감은 편의상 ‘나’ 대신 주인공 알렉산더 클리브, 알렉시라 하고 내 시점으로 쓰겠다. 알렉시는 60대 은퇴한 연극 배우이다. 어느 날 무대에 올라 갑자기 먹통 상태, 어린 시절부터 기억력이 남달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대사가 모두 휘발해 날아가버려 연극을 왕창 말아먹은 다음부터 불러주는 극단이 없어 사실상 강제 은퇴 당했다. 이 알렉시의 삶을 지배하는 세 가지 사건이 작품의 근간이다.

  먼저 반백 년 전 알렉시의 가장 가까운 친구 빌리 그레이. 그의 어머니 실리아 그레이와 사랑에 빠진 일. 당시 알렉시는 열다섯 살, 미시즈 그레이는 서른다섯 살의 원숙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알렉시는 기억을 확신하지 않는다. 너무도 오랜 시절이라 디테일은 가물가물한 안개 비슷한 막에 싸여 있다. 언제 미시즈 그레이를 처음 보았을까? 알렉시가 열한 두 살이었던 기억의 저편에 떠오르는 그림 하나. 왜곡된 것이 분명하겠지. 어느 봄날. 봄이어야 한다. 4월. 검정 자전거를 타고 성당에 가는 여인. 성당 앞 마당가에 이르렀고, 4월의 오전이었으며, 당시 여성들의 일상 외출복이었던 넓고 펑퍼짐한 치마가 허리까지 훌렁 올라가게 무심한 봄바람이 아주 짧게 훅 불어왔는데, 자전거를 탄 어른 여자가 겨우 열살을 넘겼을까 하는 소년하고 눈이 마주치자, 입을 알파벳 O자로 만들면서 콸콸 시원한 수돗물처럼 경쾌하게 웃으며 지나치던 기억. 이제 알렉시는 이 기억을 자신하지 못한다. 4~5년 뒤의 미시즈 그레이가 목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을 터뜨리며 자전거 위에서 내려다보던 소탈하고 흥겹고 너그러운 알렉시의 베누스, 가정주부이면서도 베누스였다고 확정해버렸다.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치마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라앉히던 손등의 우아함, 그리고 너그러움. 이후 알렉시가 살면서 유일하게 진정으로 뜨겁게 추구할 것들.

  4월, 프리아포스의 축일의 잔치 같은 기억.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빌리네 집에 놀러간 날. 방문이 조금 열려 있는 빌리 부모의 침실 속 부부욕실. 벌거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는 미시즈 그레이가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이 마치 트립티콘처럼 생긴 화장대의 3면 거울에 다시 비쳐 알렉시의 망막에 첫번째 혼란과 충격으로 다다랐다. 루벤스 때문에 갖고 있던 분홍과 복숭앗빛 색조의 배반. 미시즈 그레이의 피부는 거친 입자로 되어 있었으며 탁하면서도 희미한 광택을 발했다. 곤혹스럽게도 마그네슘 색에서부터 은색과 주석색, 불투명한 노란색과 연한 황토색, 심지어 군데군데 희미한 녹색 기운도 보이고, 우묵한 곳의 이끼 같은 연보라색 그림자까지 그리 밝지 않은 다양한 색조였는데, 거의 모든 것이 화장대 거울의 중앙 패널에 담겨 있었으며 양 팔과 팔꿈치는 양쪽 가의 거울 속 광경이었다.

  질풍과 갑작스러운 비와 씻겨 나간 광대한 하늘이 있는 수채화 같던 4월, 덜덜거리던 왜건 속에서 미시즈 그레이가 가볍게 입을 맞추기 전까지 알렉시는 그저 아들의 친구, 겨울 바지에 가랑이가 쓸려 옷을 벗기고 까진 허벅지 안쪽 말랑말랑한 살 위에 텔컴 파우더를 발라주던 조무라기였을 뿐이었건만 이후 154번의 낮과 153번의 밤 동안 지속된, 열다섯 살짜리 날 것 그대로의 소년과 삼십대 중반의 무르익은 유부녀의 불륜은 타운에서도 일찍이 알려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다. 아마 알렉시의 이런 생각이 틀렸을 것이다. 세상에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은 없으니까.


  리디아는 알렉시의 아내. 정식 이름은 리아 머서 클리브. 잘 생기고 큰 몸집에 극적인 옆모습을 가졌다.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시고 담배 역시 그렇다. 간혹 부부 사이에 마찰이 있고 말도 잘 하지 않지만 서로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몽유병이 있다. 차라리 몽주병夢走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로 집의 아래층, 위층을 뛰어다니며, 우리 캐서린, 캐스, 캐스가 아직 살아 있고, 다시 아이가 되어 집안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잠 속에서. 알레시는 이때마다 리디아를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혹시 어딘가에 부딪거나 뭔가 발에 걸려 넘어져 심하게 다칠까봐 항상 꿈 속의 리디아 곁을 따라다닌다. 딸 캐서린이 죽고 10년이 흘렀다. 삶과 죽음의 법칙에 잔인한 빈틈이 있어서 캐스가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하고 어떤 식이든 여전히 어둠의 땅에서 포로가 되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머니가 자기를 다시 살아있는 자들 사이로 데려가주기를 헛되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리디아는 꿈 속에서 딸을 찾아 달음박질 친다.

  캐서린은 학자 기질이 있고 실제로 아직 공부중인 스물일곱 살 학생이었다. 만델바움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정신결함으로 어렸을 때 고생한 적 있다. 이탈리아 리구리아의 포르토베네레 해안, 산피에트로 교회 아래에서 파도에 씻긴 바위들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몸이 으깨진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는 임신중이었다. 제노바만 안으로 길게 파고 들어간 곶의 맨 끝, 시인 셸리가 익사한 레리치의 맞은편에서. 알렉시는 미래의 아버지가 되지 못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로 알고 싶다. 그러나 찾을 방법이 없다. 찾으면 어쩌려고?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사라진 시신을 딸이라고 증언할 수밖에 없는 부모. 그 시신을 직접 눈으로 봐야 했던 어머니가 몽유, 차라리 몽주라고 해야 마땅한 몽유에 시달린다고 해서 이상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나머지 하나는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 한 통. 미국 여자로부터 온 전화. 영화에 한 번도 출연해본 적이 없는 알렉시에게 영화의 주연을 맡아달라는 의뢰. 마시 메리웨더. 캘리포니아 해안의 카버시티에서 온 젊지 않은 흡연자의 목소리. 영화사 펜터그림처스의 임원이며, 독립 스튜디오에서 건 전화였다. 악셀 판더라는 사람의 삶에 기반한 영화를 제작하려 하고, 영화의 제목은 “과거의 발명”이 될 것이란다. 토비 태거트라는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감독은 남우 주연으로 스크린에 새롭고 신선한 인물을 발탁해달라고 주문했다. 마시 메리웨더가 하는 말을 믿는다면, 메리웨더가 접촉한 첫번째 인물이 알렉시였다.

  그리하여 영화를 찍는다. 여우 주연은 돈 데번포트. 영화는 스케쥴을 따라 정연하게 진행하고, 그러나 끝까지 이렇듯 깔끔하게 마감을 할 수 있으면 소설이 아니라서, 불과 몇 컷을 남겨두지 않은 상태로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만다. 돈 데번포트가 수면유도제를 한 통 다 삼켜버린 것. 이 젊은 여성은 또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틀림없이 결국 죽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수면제 한 통을 다 삼켜 고통스러운 위세척과 후유증을 자초했을까? 이런 건 알렉시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서양 문학에서 거의 처음보는 듯한,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성 간의, 아마도 딸 캐서린을 빙의한 자살을 매개로 한 것 같은 아버지의 정 비슷한 심정으로, 아내 리디아의 허락을 받아, 둘은 이탈리아 리구리아 해안을 향해 떠난다.

  이 세가지 사건이 서로 맞물리면서 작품은 아일랜드 작가들한테 유난히 드러나는 쓸쓸한 아름다움 속으로 한발한발, 더듬더듬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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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4-16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별 다섯 또 출현이네욤!! 이번엔 밴빌..
요것도 질러야 겠습니다.. 또 한 권이 추가되네요...제게도 별5개였으면 좋겠슴돠!!

Falstaff 2025-04-16 15:21   좋아요 0 | URL
야무 님도 재미나게 읽으실 거 같아요.

blanca 2025-04-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바다>와 비교해서 어떠셨어요? 저는 그 작품이 너무 좋아 이게 그 아류인가 싶어 안 봤거든요. 풀스타프님 별 다섯 개 주신 거 보니 읽어야겠다 싶어요.

Falstaff 2025-04-16 17:56   좋아요 0 | URL
<바다>는 읽은 지 꽤 오래라 기억이 아스름합니다. 아류...는 아닐 겁니다. ㅎㅎㅎ 아류 아닙니다. 이 책도 다른 독자에게 권하고 싶을 정도로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바다>보다 좀 더 좋았습니다.

coolcat329 2025-04-16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이것도 별다섯!
친구의 엄마와 사랑이라니...내용이 심상치 않네요. ‘쓸쓸한 아름다움 속으로‘ 저도 들어가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5-04-16 2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추천작이 대개 그러하듯이 너무 기대가 크지 않기 바랍니다. ^^;;

그레이스 2025-04-18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영목을 칭찬하시니 제가 기분이 좋네요.
저도 이 책 궁금했는데,,, 폴스타프님의 별 다섯은 읽어야죠!

Falstaff 2025-04-18 21:3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이 정영목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뭐 이랬다 저랬나 장난꾸러기인 걸요. ㅋㅋㅋ
이 책 괜찮더라고요. 엇그제 읽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가 쓴 <그녀를 지키다>도 좋았답니다. ㅎㅎ
 
창궁의 묘성 1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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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다 지로. <철도원>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1951년 12월에 태어나 주오대학 (부속인지 아닌지 하여간) 스기나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 두 번 미역국을 먹은 김에 일본자위대에 입대, 복무를 마쳤다. 이런저런 직장을 다니며 이곳저곳에 투고를 하다가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91년에 <빼앗기고 참는가>로 데뷔했단다. 이이가 왜 자위대에 지원했느냐 하면, 당시(1970년) 일본 청년들의 젊음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미시마 유키오가 헌법개정을 주장하면서 한바탕 쇼를 벌인 다음에 (미쳤어, 정말)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어린 마음 깊이 충격을 받아서 그랬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이후 일본어로 “악당소설”이라 번역하는 피카레스크 계열의 작품을 쓰다가 위에서 말한 <철도원>으로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도 대박을 친 작가이다. <창궁의 묘성>은 아사다 지로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인 중국 청말淸末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다.

  <창궁의 묘성>을 읽고 검색을 해보니 우리나라에 이 사람 번역물이 무지 많이 나와 있다. 아마 그동안 내가 이이의 책을 선택하지 않은 건 유명짜한 단편집 《철도원》의 독자 리뷰가 너무 말랑말랑해서 그랬던 거 같다. <창궁의 묘성>은 동네의 존경하는 이웃께서 읽어보면 좋겠다 권하시어 네 권 모두 합해 1,462쪽짜리 장편소설을 독파하게 되었는데, 네 권에 1.5K 페이지라도 한 번 붙잡으면 도무지 손에서 놓을 방법을 찾을 길 없어 닷새에 걸쳐 눈알이 토끼눈이 되도록 읽어 치울 수 있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두 나라가 공동으로 (편집에 따라)일본에서는 25회, 중국에서는 28회짜리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하기도 했으며, 작품의 속편 격인 <중원의 무지개> <칼에 지다> 같은 것을 속속 출간한 모양이다.

  아사다 지로는 결코 예술성에 목매달지 않는다. 작품 목록을 보니 조폭, 폭력 등의 느와르로 시작해 역사물을 거쳐 달달한 최루 소설까지 두루 돈 되는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창궁의 묘성>도 소위 ‘정통 역사소설’로는 읽히지 않았다.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서 있을 법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하여 굴러가게 된 수레바퀴를 실제 인물과 가상인물을 섞어 돌리는 것이 역사소설일 터인데 아사다는 애초부터 다분히 현재의 시점으로 관찰한다. 심지어 철저하게 “청나라의 18세기 사람”인 건륭제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제로 자유민주주의를 꼽았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하지 못하기도 했다. 아이고, 아사다 씨,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신가? 뭐 이런 기분. 책은 1886년부터 광서25년(1899년)까지가 시대적 배경이다. 아사다는 청조 정부 조직을 설명하면서 난데없이 “지금의 외부무에 해당하는”이라는 표현을 써서 갑자기 시점視點을 흩뜨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소설의 전반전인 구조와 형식 같은 일종의 법칙에 굳이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심지어 판타지 장르에서나 볼 수 있는 죽은 사람과의 대화, 일화도 과감하게 등장시킨다. 그래서 유감? 그건 아니고, 여태까지 이런 형식의 역사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 낯이 설었다는 수준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역사소설이라면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나 몇 달 전에 읽은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소설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박종화 선생의 작품들을 떠올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월탄 선생을 ‘역사소설의 태두泰斗’라고 했다. 태두. 한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 태산과 북두칠성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별을 가져와 한 사람의 자리를 이야기하는 것. <창궁의 묘성>에서 묘성昴星도 별의 이름이다. 겨울 밤 오리온 자리에 나란히 늘어선 세 별의 위쪽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을 말한다는데, 나 참, 여기서 ‘위쪽’이 어느 방향인 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혹시 큰 개, 가장 빛나는 시리우스를 말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그렇다고 특정할 수도 없다. 국립국어원이 펼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황소자리의 플레이아데스성단에서 가장 밝은 6~7개의 별”이라 설명한다. 독자는 그냥 묘성이 있다고만 생각해도 무난하다. 묘성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만 알면 된다. 책에서는 묘성이 오랑캐의 별로, 천궁을 다스리는 부와 권위의 별이다. 여태 이 별자리를 타고난 사람이 딱 두 명 있었으니 청의 고종 건륭제 홍력이 하나요, 이 전에 진의 시황제 영정이 다른 한 명이었다고. 별자리가 점지한 이들은 천자가 사는 자미궁을 북두칠성의 국자로 퍼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천하의 모든 재물과 금은보화를 한 손에 거머쥐게 된다고 하니, 그것 참, 팔자가 세도 보통 센 것이 아니어서 평생 가만하고 편안하게 살 팔자는 못되겠다. 나 같으면 누가 이 별자리 주겠다고 해도, 돈 안 받고 그냥 주겠다고 해도 싫을 것 같다. 사람 한 평생 얼마나 산다고, 그저 편하게 사는 게 장땡인 걸 이제는 알만큼 알아서.

  다음은 창궁蒼穹. 창蒼은 푸를 창. 궁穹은 하늘 궁. 궁륭穹窿 할 때의 궁. 청나라 강희제가 지어 옹정제(당시 옹친왕 윤진)에게 하사한 건물인 원명원圓明園의 주궁을 말한다. 그러나 작품 속에는 이를 건륭제가 다시 예수회 사도 브노와와 카스틸리오네에게 설계를 맡겨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고급스러운 바로크 건축물과 부속 장식으로 만들었는데, 한 건물을 아마도 궁륭, 그러니까 돔 양식으로 짓고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를 이을 빼어난 화가이기도 했던 카스틸리오네가 직접 천장화ceiling painting를 그려 넣었으니, 푸르고 푸르른 가을날의 베이징 하늘을 그린 천장화가 진짜 하늘 딱 그대로라서 이 건물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게도 원명원에는 천장이 없는 궁이 있다고 헛소리를 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푸른 하늘, 창궁이다. 이 창궁은 1856년 제2차 아편전쟁 때 베이징까지 군화발을 들여놓은 영불 연합군, 이 가운데서도 특히 프랑스 군이, 감히 7대양 너머 미개한 동양에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화려한 바로크 건물이 있다는 데 질투가 폭발하여 자기들 수준보다 더 고급진 건물만 골라 파괴할 때 폭삭 무너뜨렸다. 당시에 파괴된 것은 맞는데 정말로 파괴의 이유가 그러했는 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사다 지로의 추측일 것 같다. 그저 약탈하다가 흥이 돋는 김에 폭파해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니 19세기 말에 말하는 창궁의 묘성은 이미 무너진 과거의 화려함 속의 권력이랄까 부귀영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중국에는 황제, 천자의 뜻임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다른 보물이 있다. 옥새玉璽. 사마천의 <사기 열전>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플이 전국시대 조나라의 문무를 책임진 인상여-염파. 독후감 분량 때문에 이 커플의 우정, 문경지교刎頸之交는 다음 기회로 하고, 천하의 보물인 완벽한 옥을 지니고 가장 강력한 국가인 진나라 조정까지 가서, 이 완벽한 옥을 구경만 시키고 고스란히 지니고 돌아온 인상여. 결국 시황은 조나라를 멸하자마자 이 옥을 손에 얻어 자신의 인감도장, 옥새를 만든다. 이후 이 옥새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황제가 위한 충분조건이 되어 삼국지연의에서도 옥새 때문에 손견도 죽고, 원술도 죽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 옥을 가리키는 말이 벽璧이다. 완전한 옥을 칭하는 단어가 그래서 티끌 하나 없는 진짜 옥 완벽完璧.

  <창궁의 묘성>에서도 이렇게 황제의 천명을 상징하는 보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사다 지로가 이 작품을 쓰던 20세기 말에는 중국 전통의 보물인 옥으로 황제와 제국의 천명을 대신하기에는 너무 저렴해보여 옥 대신 금강석을 선택했고, 무려 1천 캐럿에 달하는 금강석이 삼황오제 시절부터 오직 황가皇家로만, 황가도 그냥 황가가 아니라 하늘의 뜻, 천명을 지닌 황가로만 전해져 내려온다고 구라를 푼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 안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경산에 올라 목을 매 혀를 빼물고 죽기 바로 전에 이 보물, 용옥을 궁전 벽에 숨기고 새로 회를 발라버렸다. 난을 일으켜 명나라를 멸한 이자성은 자금성을 아무리 뒤져도 용옥을 발견하지 못한 채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도망하고, 이어 성에 든 청의 3대, 어린 황제 순치제는 단박에 옥을 숨긴 벽으로 다가가 바람벽을 부수고 용옥을 찾아냈다는 거다. 이거 진짜 아니다. 구라다. 읽는 분들은 헛갈리지 마시라. 하여간 이렇게 해서 청나라는 중국의 삼황오제부터 내려오는 황제의 천명을 얻은 왕조였다는 것이지.

  중국대륙을 평정한 만주족은 현명하게도 한족의 모든 관습과 문화를 유지시키고 심지어 솔선해서 그들을 따라 했음에도, 자기들 조상은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따로 궁을 짓고 일년에 한 번씩 황가와 왕가 사람들이 모여 술 한 잔씩 올리고 재배를 했는데 바로 그곳에 용옥을 안치시켰다는 구라. 세월이 흘러 6대 건륭제가 등극하고 무려 61년 동안 황위에 있으면서, 천재적이고 탁월한 정치력을 보유했으며, 정복왕이기도 했던 건륭제는 오랜 세월동안 아마도 스스로 민주주의를 터득하는 경지에 올랐는데, 민주주의라는 의회정치를 위하여 황제정은 당연히 무너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해 만년의 어느 날, 만고의 충신이자 불굴의 영웅인 노장군 조혜더러 베네치아에서 온 궁중화가 겸 과학자 겸 유리공예가인 선교사 출신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를 보필하여 만저우 족의 옛 터인 북으로 가 땅 속 깊이 용옥을 파묻어 버리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래야 황위를 이으라는 천명 역시 사라지고, 몇 대 가지 않아 청나라는 문을 닫을 것이며, 그래야 민주주의 청제政體가 싹을 돋게 하는 토양을 만들 수 있을 터이라서. 이미 죽어 귀신이 된 건륭제는 청나라의 문을 닫기 위하여 자기 자손들이야 어차피 더 이상 천명을 받은 황제들이 아닐 터라 신경쓸 거 없고, 왕조의 문을 제대로 닫을 실력도 되지 못해, 부득이 9대 황제 함풍제의 비, 후에 서태후라고 불릴 탁월하고 선량한 여인에게 청나라의 조종弔鐘을 울리게 한다는 거다.


  여기까지 <창궁의 묘성>에 관한 큰 그림이다.

  다시 저 위의 묘성으로 돌아가면, 진의 시황제와 청의 건륭제 이렇게 딱 두 명만 묘성을 타고 났다고 하건만, 제목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면 아사다 지로는 당연히 또 한 명의 묘성, 천하의 권력과 재물을 타고난 인물 하나를 더 만들어야 했을 터. 그래서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북쪽, 즈리 출신의 미주알이 째지게 가난한 집안의 넷째 아들 이춘운, 아명 춘아를 등장시킨다. 엄부자친 아래 평화롭게 살던 이춘운의 집에 불운이 닥친 건 아버지와 맏아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서부터이다. 특히 큰형은 인물 좋고, 정의롭고, 성격도 좋아 지역 양가둔梁家屯(양씨 성의 장원 정도)에 이름을 널리 알려 주인댁 작은 아드님과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였다. 그러면 뭘 해. 죽으면 끝인 걸. 둘째 형은 큰 병에 들어 오늘 낼 하고 있고, 셋째 형은 도무지 이런 집구석에서 버틸 도리가 없어 아마도 군대인 것 같은데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넷째인 춘아와 막냇누이 영령, 그리고 무능력한 어머니뿐이다. 춘아가 아직 너무 어려 양씨댁 주인한테 소작 한 마지기도 얻지 못해 입에 풀칠이나마 하기 위해 춘아는 하루 종일 동네의 짐승이나 심지어 사람이 눈 똥까지 모아 주민들한테 땔감으로 팔거나 곡식과 바꾼다. 이대로 두면 보나마나 엄마, 춘아, 영령 모두 겨울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 뻔하다. 그래도 춘아와 영령은 될 수 있으면 늘 웃는 얼굴을 하려 애쓴다.

  하루는 동네 점쟁이 노파 백태태가 춘아에게 와 하는 말이, 춘아야, 너는 광서 2년(1876년) 10월 11일 밤에 엄마 배 속에서 나왔단다. 너는 다른 별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오랑캐의 별인 묘성을 타고 나와서, 머지않아 도성으로 올라가 자금성 깊은 곳에서 황제를 섬기게 될 거란다. 목화토금수가 불길하게 만나는 병란의 와중에 파군성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너는 중화의 재물을 모조리 독차지하게 될 거야.

  여기서 말하는 황제는 노불야老佛爺, 즉 살아있는 부처님이라 불리며 사만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서태후를 일컫는 말이다. 광서제가 아니고. 근데 정말 이 똥 줍는 소년 춘아가 여태 진의 시황제와 건륭제만 타고났다는 묘성의 별자리에 올라탄 운명이었을까? 이것 하나만 알려드리겠다. 아니다. 현명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백태태가 보기에 춘아는 조만간 굶어 죽을 상이라, 착한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터무니없는 희망을 가지게 만들어 주어야만 뭔가 하나, 거미줄 만한 가능성을 바라고 그것에 온몸을 투신하며 집념을 태울 것이고, 그리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천명을 신명처럼 믿는 백태태 점쟁이 무꾸리도 인간이 노력하는 발버둥이라면 운명조차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봤다는 거다. 정말 춘아가 생존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안 가르쳐줌.

  노불야, 서태후 편이 있으면 반대 광서제 편도 한 명 나와야 한다. 춘아가 사는 양가둔의 작은 아들, 사실은 주씨 성을 가진 양씨 어른의 종첩이 낳은 아들, 즉 서출인데 주씨녀女가 자기 생모인 줄도 모르고 자랐어도 주씨를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는 했으니 어찌 핏줄이 끌리지 않았을꼬. 서출임에도 정실 부인이 자기 아들처럼 키웠고, 공부도 시켰는데, 아이고, 공부를 해도 너무 잘하는 거다. 장자가 탁월해 과거에 붙어 관직에 나가고, 둘째가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알아챈 작은 아들 양문수는 춘아의 큰형과 동네에서 짓궂은 짓은 다 하고 다니면서 날이면 날마다 술 퍼마시고, 음담패설 즐기는 망나니였음에도 단 한 번의 비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할 공부는 다 한 일종의 천재. 중국에서는 과거의 1차 관문에 붙으면 거인擧人, 최종 과거에 붙으면 진사進仕라고 했다. 가문에 진사가 생기면, 진짜 명문 말고 양씨 가문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는 건데, 정말 가문의 영광이지만 양선생은 속으로 큰 아들이 진사에 붙었으면 했지, 책의 스토리대로 둘째이자 서출인 문수가 진사 급제, 그것도 장원으로 진사에 오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원 급제하면 당연히 홍문관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역시 장원급제 출신의 대 선배 양희정을 만나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배워 훗날 그의 사위가 된다. 그러면서 양희정을 따라 친 광서제 파에 이름을 올려 광서제의 친정을 서두른다. 광서제는 오랜 세월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으며 옛 관습에 넌더리가 난 상태여서, 실제인물인 강유위의 개혁안을 읽어보고 그를 존경하는 단계로 발전, 실행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주둥이만 산 강유위의 급진적인 무술변법戊戌變法을 단행하려다 가상인물인 순계에 의한 시해미수 사건으로 광서제에 대해 정나미가 똑 떨어진 서태후한테 거꾸로 역습을 당해 유폐된다. 무술변법으로 거의 모든 변법파, 광서제 파는 숙청을 당해 죽거나 귀양을 간 반면, 당연히 사형을 받을 중죄인인 강유위는 영국 배를 타고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고, 같은 변법파 중죄인인 양계초梁啓超도 톈진에서 배에 올라 일본 망명을 떠난다. 양계초가 실제 인물인데 바로 이이가 양문수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하여간 같은 동네 출신이며 의형제의 동생, 친형의 의형제이니까 거의 형제지간이랄 수 있는 두 사람이 한 명은 서태후 진영, 다른 한 명은 광서제 진영에서, 신분상 서로 만나는 일이 법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교통 방법도 없으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좋고 나쁜 관계도 읽을 만하다. 왜 둘이 만날 수 없느냐고? 이춘운, 춘아는 어린 시절 동네 길거리에서 똥을 주워 그걸 내다 팔아먹고 살던 천민 출신이다. 그런 아이가 궁에 들어, 궁전에서도 다른 궁도 아니고 서태후 측근에서 태후를 모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바로 당신이 짐작하고 있는 것,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절판. 읽으려면 도서관 나들이나 헌책방을 들여다봐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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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4-14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러시면 읽고싶어지는데요.

Falstaff 2025-04-14 15:39   좋아요 0 | URL
아이고 답글이 그놈의 낮술 땜에 늦었습니다. ㅋㅋ 걍 패스도 좋은 선택 아닐까 싶습니다. ^^::
 
중국인 맹인 안마사 문예중앙시선 32
심재휘 지음 / 문예중앙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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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휘는 처음 읽는다. 며칠 전에는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던 반면, 이번엔 심재휘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였다. 아이고, 무식하면 가만이나 있지. 차라리 시치미 딱 떼고 조용히나 있던지 말이지. 이게 뭐야, 자만심 상하게시리.

  ‘재’자 돌림 심재휘는 강릉 출신의 1963년 토끼띠 교수님. 눈치를 보아 빠른 63년이라 범띠일 수도 있겠다. 고려대학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취득. PhD를 딴 1997년에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심재휘는 현재 대진대학 문예콘텐츠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제 나이 들어 학과장 자리를 후배한테 넘긴 거 같다. 개나 걸이나 다 등록되어 있는 네이버 인명사전에 심재휘의 이름은 없다. 그게 오히려 특색있군. 근데 인터넷 책방 응24에는 심재휘에 관해서 두 가지 자료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고려대학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강사로 재직 중인 심재휘. 거참 조금 헷갈리는 데 이 시집을 낸 시인 심재휘는 대진대 교수가 맞을 거다. 지가 설마 대학에 내는 이력서를 거짓으로 썼겠어?


  제일 앞에 배치한 시부터 톡 쏘는 맛이 있다.



  옛사랑


  도마 위의 양파 반 토막이

  그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빈집을

  봄날 내내 견디고 있다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겹겹이 쌓인 껍질의 날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있다    (전문 p.13)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양파 하나 자르면서 옛사랑을, 그리 허망했던 맹세를 떠올린다. 그래서 눈물 좀 찔끔거렸을까? 자꾸 옛사랑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다 진짜로 만나면 사고친다. 하긴 뭐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느냐고? 넘겨짚지 마시라, 안 알려준다.

  옛사랑을 시집의 선봉에 세웠다고 이런 시들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도서관에서 특히 시집을 골라 읽으면 앞서 읽은 독자가 좋게 읽은 시에 표시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 책에서 그런 시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소개해보자.



  어떤 무늬



  오후의 병실에 해가 지나가고

  나는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본다

  아주 천천히 몇 점의 온기가

  그의 걸음처럼 내게로 온다

  체온을 띠고 만나는 서로의 젖은 뼈 사이에는

  바람에 이는 잔물결들만 가득하다


  가장 적은 피와 살로 연명하는

  이생의 몸 하나를 만질 때

  내 아버지라는 무늬의 벽지로 도배해놓은

  이토록 낯익은 방 안에 들어와 볼 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생에 어룽대며 비쳤던

  벽지의 무늬


  그의 폐가 서서히 저물듯이 저녁이 오고

  나는 때늦은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린다

  낡고 여윈 무늬 하나가

  나를 쳐다본다


  아버지라는 무늬의 방

  누군가 이 방의 문을 걸어 잠근다면

  나는 그 안에 영원히 갇히게 되겠지만

  방 안의 무늬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겠다    (전문 p. 28~29)



  소설 속의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대개 취미생활로 술 마시기와 식구들 두드려 패기, 고기 안 먹는다는 딸 입 속에 억지로 탕수육 쑤셔 넣기, 오토바이 뒤에 개 한 마리 줄로 묶고 달리기, 치마만 입었다 하면 누가 됐든 자빠뜨리기, 도리짓고땡과 섰다 같이 비 오는 날 우산 쓴 남자와 개구락지 그림 구경하기 등등인 반면 시 속의 아버지는 개구락지의 사촌형인 두꺼비가 손등에 앉은 것처럼 막노동을 하면서 가족 먹여 살리느라 선비손이 거친 손으로 변해버렸거나, 라면을 끓이는 한이 있어도 그게 딸들과의 기쁜 만찬으로 변하게 하거나, 평생의 궁상을 접고 이렇게 세상을 마감해 남은 자식들 앙가슴을 울리고 만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소설이라는 산문은 삶의 곤고함에서 나오고 시라는 운문은 삶의 그리움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냐, 아냐. 이런 주장은 틀림없이 염병일 거야. 좋아. 실제의 아버지는 소설에 가까울까, 시에 가까울까? 참 나. 남의 시 읽으면서 별 엉뚱한 생각을 다 하네. 이런 분도 계시고 그런 새끼들도 사는 거야. 그게 인생이잖아.


  이 시집의 2부는 “북쪽 마을에서의 일 년”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위도 45도. 추운 곳. 처음 나오는 시의 제목이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나는 북쪽, 그러면 저 캄차카 반도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타이가 삼림을, 그걸 지나쳐 광활한 벌판과 목초지대, 그리고 사막을 연상한다. 내 상상 속의 북쪽 마을은 유라시아 반도의 북쪽, 한대림freezing forest과 황량한 벌판과 초원, 한때는 열대 삼림지역이던 거친 사막은 당연히 한 시절 나의 로망이었다.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3연과 4연은 이렇게 쓰였다.



  눈 쌓인 뒷마당가에는

  전나무 숲이 어둠을 품고 잠들어 있다

  마지막 남은 원주민인 듯

  마음이 서러운 갓 이민자인 듯

  자작나무 한 그루 젖지 않은 전나무들 사이에 서서

  온몸에 눈을 맞고 있다

  좁고 둥근 그의 발치로 달빛은 내려와

  여윈 뿌리를 손으로 가만히 덮어준다


  눈부신 날에 누군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자작나무 쪽으로 한 사람의 발자국이

  밤눈 위에 곧게 나 있다   (부분 p.64~65)



  무슨 근거로 이 시를 읽고 유라시아 대륙의 위도 45도 근처라고 했느냐고? 일간 시에서 위도 45도, 겁나 추운 곳이라 말했고, 시집의 제목이 《중국인 맹인 안마사》이며, <변방에서>라는 시 속에는



  섣달 중에도 흐린,

  옛 만주국의 어느 변방을 걸으면

  갑자기 들켜버린 마음처럼 나타나는

  러시아 거리가 있다

  (중략)

  1월의 햇살처럼 말없이 빛나는 곳

  영문도 모르는 중국 소녀들이

  조잡한 가로등에 기대어 서툴게

  눈빛을 보낸다 (하략)   (부분 p.22)



  얼핏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오르는 바람에 국경의 밤 비슷한, 그러면서도 친근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원주민”이니 “마음이 서러운 갓 이민자”라느니 해서 영낙없이 이 시인이 드디어 나의 로망, 유라시아 북쪽의 타이가 숲을 건드리고 마는구나, 잠깐 감격했다는 것이지. 근데, 하긴. 명색이 대학 교수인데 일년 동안 러시아의 타이가 숲에서 살았겠느냐고. 아무리 안식년이라 해도 그게 안식하라고 주는 안식년은 아니잖여? 그잖여? 눈치를 보니 딸과 함께 타이가 숲이 아니라 캐나다의 한 도시에서 살다 온 모양이다. 캐나다야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다 밀림이고, 원주민은 별로 구경할 수 없어도 있기는 있고 이민자는 많겠지. 그래서 좋다가 김 샜다. 그건 시인 책임 아니다. 미리 김칫국물 벌컥벌컥 마셔버린 내가 후졌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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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4-11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아사다 지로, <창궁의 묘성>
수요일. 존 밴빌, <오래된 빛>
금요일. 한일연극교류협의회 편, 《현대일본희곡집 10》

stella.K 2025-04-11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 리뷰 참 재밌게 잘 쓰십니다. 저는 어제 거의 25만년만에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라고 번역시도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선전해 읽기 시작했는데 뭔 말을 하는 건지 당췌 모르겠더군요. 번역시 좋고 나쁨을 떠나서 내가 시를 안 읽어도 너무 안 읽었구나 좀 반성이 되더군요.
소설 같은 시. 딱 제 취향인데ᆢ
근데 너무하십니다 시인의 이름 딱 봐도 남자 이름인데. ㅋㅋ

Falstaff 2025-04-11 16:02   좋아요 1 | URL
앗, 읽기 좋으셨습니까? 기분 좋습니다. 저는 우짰든 번역시는 읽지 않아요. ㅋㅋㅋ
휘는 대개 남자 이름에 들어갔었는데요, 20세기 후반 들어 여자 이름에도 왕왕 쓰더라고요. 빽빽이 소찬휘? ㅎㅎㅎ

stella.K 2025-04-11 16:40   좋아요 1 | URL
ㅎㅎ 하긴 탈랜트 이휘향 씨도 있죠.~

얄리얄리 2025-04-11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궁의 묘성>이라니요. 생각지도 못했던 책제목을 여기서 봅니다.ㅎㅎ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는데,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날 듯합니다.

Falstaff 2025-04-11 17: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독후감을 겁나게 길게 쓰기도 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