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1 - 신의 시대 그리스 신화 1
로버트 그레이브스 지음, 안우현 옮김, 김진성 감수 / 알렙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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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주책 심하고 질투도 많은 그리스의 숱한 신들에 관해 새삼스러운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로버트 그레이브스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레이브스Graves, 이 음산한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을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꼴랑 하나만 읽었음에도 독특한 인물을 독특한 시선으로 조망한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한 방에 반해버렸다. 그때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후 그레이브스의 다른 책을 구할 수 없어 아예 잊고 살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이 깊게 영향을 받은 선배 작가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로버트 그레이브스를 거론하는 것에 기꺼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이를 검색해보니 2년 전에 <그리스 신화>를, 올해에 <호메로스의 딸>을 번역 출판했다는 걸 알고 득달같이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이제 막 첫 권 <그리스 신화1 – 신의 시대>를 끝마쳤다. <그리스 신화2 – 영웅의 시대>와 <호메로스의 딸>은 이달 말이나 다음 달이 되어야 읽을 것 같다.

  나는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직업을 그냥 작가로만 알았다. 알고 보니 시인, (역사)소설가, 비평가, 고전학자, 신화학자를 겸했다. 살면서 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고 전쟁 말기에는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감에 걸려 스틱스 강변까지 다녀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면서도 쉬지 않고 150편에 육박하는 집필활동을 펼쳤다. 같은 그리스 신화를 썼다고 하더라도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쓴 소설가의 그리스 신화는 당연히 <…클라우디우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리스 신화1 – 신의 시대>는 소설가가 아니라 신화학자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쓴 신화 해설서이다.

  책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문명을 만든 그리스 사람들이 에게해와 섬에 도착하기 전부터 살고 있던 신석기 시대 선주민을 일컫는 펠레스고이족族의 창조 신화부터, 올륌포스 신들의 탄생과 이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 신과 인간의 교류를 거쳐 크레테의 왕 미노스와 그의 일가, 그리고 아테나이의 왕 테세우스까지 다룬다. 구성은 먼저 해당 신화를 소개하고, 이 신화가 등장하는 고전 작품 등의 출처, 이어서 진지한 신화학자로서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신화 해석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이런 구성이다. 신화의 내용은 일목요연하게 주제별로 나열되어 있다. 사실 이 신화 가운데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거의 없다. 다만 꽉 짜인 규격 속에서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첫 독서였다는 것이지 유럽과 아메리카 문학, 음악, 미술 작품을 읽고, 듣고, 보며 조각조각 알게 된 내용이었다. 그런 작품을 겪으며 호기심을 느껴 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거의) 다 한 번 이상은 자세하게 읽어본 내용들. 다만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 새로웠다.


  예컨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기러기로 몸을 바꾸어 도망가는 네메시스를 겁간하여 두 개의 알을 낳아 그것을 레다가 가져다 부화시켰다거나, 다른 버전으로는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직접 레다와 어울려 알을 낳았는데 거기서 헬레네, 카스토르, 폴뤼데우케스 그리고 버전에 따라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나왔다는 이야기. 그레이브스는 제우스 등 올륌포스에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먹고 마시는 신들은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그리스인들,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일군 헬레네스를 상징한다. 당시 그리스는 씨족, 부족, 그리고 후에 도시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신화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신들에 의한 겁간이 헬레네스들이 다른 씨족, 부족, 도시국가를 점령한 것을 신화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산들에 의하여 강제로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거의 빠짐없이 세 명의 후손을 생산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초기 그리스는 가모장제 사회였단다. 그레이브스가 자주 인용하는 작품으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가지>가 있다. <황금가지>의 부족장/왕들은 대개 제사장을 겸했으며 특히 비와 바람 등의 천기를 관장하는데 이들의 능력이 한계를 보이면 부족장/왕을 살해하고 후계자로 자리를 잇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레이브스는 그리스 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 단정한다. 그러면 그리스의 왕들은 얼마나 오래 왕좌에 앉을 수 있었을까? 즉 시간을 측정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태양력을 한 단위로 하려면 단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365일과 1/4일이 필요하다. 반면에 달의 공전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으로 측정하려면 30일이면 충분하다. 훨씬 쉽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달이 차오르는 시기(처녀)와 꽉 찬 만월 시기(뮤즈), 그리고 지는 시기(노파)로 구분했다 하며, 배란에 따른 여성 몸의 변화와 일치하는 등을 근거로 가모장제가 상당한 기간동안 지켜져 왔다고 주장한다. 문명이 조금 발달함에 따라 열두번과 열세번 달이 변하는 사이에 1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열세번의 달이 변하면 왕을 살해하는 일종의 제의식을 벌일 수 있었다고.

  이렇게 유지하다가 왕의 권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소위 큰 1년이 등장한다. 태음력과 태양력이 맞는 시기로 약 100번의 월이 지나는 기간, 8년에서 9년을 큰 1년이라 하여 왕의 임기로 삼았다가, 그것도 나중에는 왕이 직접 죽는 것이 아니라 미소년을 골라 딱 하루 동안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해서 다음날 진짜 왕 대신 제물로 죽음을 맞게 하고 진짜 왕은 다시 큰 1년 동안 새로운 임기를 맞았다. 이상한 방식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수긍이 간다. 한 사람에 의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리스 사람들. 일찍이 도편추방이라 해서 인기투표를 해 1등을 먹은 정치가를 아예 도시에서 추방해 버리기도 한 이들인데 한 왕을 오래 자리에 두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 즉 그리스 역사에 기반한 신화가 <황금가지>식 인류학과 매우 유사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신화1 – 신의 시대>가 다루는 시기가 기원전 3천년부터로 <황금가지>의 중요한 무대인 신∙구석기 수준의 미문명 지역과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대 이전, 그러니까 태고의 그리스 종교에는 남자 신이나 남자 사제는 없었고 오직 우주적 여신과 여사제만 있었단다. 여성이 단연 지배적인 성이었으며 남성은 두려움에 떠는 희생자에 불과 했단다. 아직 생명의 기원에 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나운 서풍이나 북풍에 엉덩이가 노출되면, 콩을 먹거나 벌레를 삼키면, 심지어 제우스와 다나에의 교합에서 보듯이 새는 지붕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물에 아랫도리가 닿기만 해도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기에 전쟁이나 희생을 제외하면 남성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족보는 모계를 기준으로 했고, 아버지 또는 남근을 나타내는 뱀은, 훗날 신성을 가진 동물로 격상하기는 하지만 죽은 이의 화신으로 여겼다. 이 가운데 ‘에우뤼노메’는 달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여신에 대한 호칭으로 수메르 식으로 ‘이아우’였으며 나중에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가 천지 창조자인 ‘여호와’가 되었단다. 즉 기독교의 여호와도 남성신보다 여신에 더 가까웠다는 그레이브스의 주장. 1955년에 영국인이 이렇게 발언할 때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리아드네, 미노스의 미궁에서 소대가리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때려 죽인 테세우스를 도와 미궁에서 탈출시키고 함께 낙소스 섬에 도착했으나 테세우스한테 바람맞고 디오뉘소스한테 시집간 아리아드네의 뒷 이야기. 포도주의 신이자 광란의 축제를 즐기는 디오뉘소스의 아내인 아리아드네는 크레테의 달의 여신으로 추앙받으며 포도알처럼 줄줄이 오에노피온, 토아스, 스타퓔로스, 타우로풀로스, 라트로미스, 에우안테스 등을 낳아, 키오스 섬, 렘노스 섬, 트라케 반도 등지에 헬라스 부족을 퍼뜨리게 하고 자신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목 매달아 죽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 특히 신화 속이라면 더.

  신석기 시대 수준의 문명에서 청동기까지 왔고, 아직 철기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쇠를 사용해 특히 왕가의 무기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에 철을 채취하지는 못했다. 어디서 구했느냐 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석 덩어리. 당연히 무지하게 귀한 것이기도 했다. 가공하지 않은 철광석 덩어리가 크레테 섬 고대 도시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태라코타 여신상, 조개껍데기, 제물을 담는 그릇 옆에서 발견되었단다. 초기 이집트 철은 모두 운석에서 뽑은 것이라서 니켈 함량이 높아 거의 녹이 슬지도 않았다. 여기까지는 알겠는데 이어서 난데없이 “켈미스가 레아를 모욕한 일로 인해 가운뎃손가락에는 디기타 임푸디카digita impudica라는 이름이 붙었다.”라는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왔을까? 레아가 대장장이의 후원자 여신이라서? 근데 가공하지 않은 철광석 덩어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하여간 역자 안우현은 각주를 달아 친절하게 “현대의 가운뎃손가락 욕은 그 연원이 그리스까지 올라가는 셈이다.”라고 설명해주었다. 흠. 그렇군.

  소개한 것 말고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들어 있다. 533쪽에는 보름달 아래 물개 가죽을 뒤집어쓴 여자들이 가죽을 벗고 나와서 알몸으로 모래사장에서 춤을 추는데, 한 영웅이 바위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물개 가죽 하나를 숨겨 이것의 주인인 여자를 아내로 삼고 아이도 낳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식 셋을 나을 때까지 참았어야 했건만 둘을 나았을 때 부부싸움을 거하게 하던 중, 여자가 물개 가죽을 우연히 발견해 얼른 뒤집어쓰더니 헤엄쳐 달아나 버렸다는 이야기.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과 거의 똑같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

  쌍둥이 아들인 아가메데스와 트로포니오스는 아폴론이 델포이 자기 신전에 몸소 놓은 주춧돌 위에 돌로 문지방을 쌓았다. 아폴론이 기특하게 여겨 신탁을 내렸다.

  “엿새 동안 즐겁게 살고, 세상 모든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거라. 그리고 일곱 번째 날이 되면 너희 들 심장이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다.”

  일곱 번째 날, 둘은 침대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단다.

  “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은 요절한다.”

  잘 죽는 거, 웰 다이잉well dying은 지극한 복이다. 그리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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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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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작품집.

  “입 속”, 하면 뭐가 생각나? 두 말 할 것 없이 그냥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의 시 안에서 ‘입 속’에는 정말로 ‘검은 잎’이 든 건 아니잖아?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은 스무 살 청년 시인이 용기가 없어서인지, 차마 말로 하기에는 너무 참담해서인지, 마음은 있지만 내뱉기에는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선지, 하여간 입에서 나오지 못한 말, 주장, 이야기였지 정말로 잎맥과 그물맥을 채운 조직에서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의 잎을 뜻하는 건 아니었는데, 슈웨블린의 “입속의 새”는 정말로 깃털과 부리와, 발톱과, 얇은 맨다리를 가지고 있는 작은 새다. 부리와 깃털을 단 새를 입에 물고 있다면 물고 있는 주체는 그럼 동물? 아니다. 사람이다.

  왜? 날 것을 새 잡아먹는 사람 처음 봐? 흠. 한 고조, 유방의 작은 동서 번쾌가 유명한 홍문의 잔치에 등장해 산 닭을 자기 방패에 올려놓고 칼로 쑥덕쑥덕 자른 다음 날 것으로 삼켜 항우 측근 장수들의 암살 의지를 꺾어버렸다는 말도 있지만, 정말로 부리와 털과 똥 묻은 발톱을 달고 있는 살아 있는 닭을 털도 뽑지 않고 육회로 즐겨 자신 양반은 한 고조의 저 먼 후손, 증산정왕의 수백명에 달하는 유전자 보유자 가운데 한 명인 유비의 의동생 장비였다. 그들과 사만타 슈웨블린이 주인공으로 만든 소년의 차이는, 번쾌가 사람들 기를 죽이느라 용맹 또는 야만을 과시할 목적이었다면, <입속의 새>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은 새 말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버릇이 들었고, 자기도 새를 먹는 것이 가히 엽기적이고 기상천외하게 놀랄만한 야만적인 일이라는 걸 알아서 꼭 사람을 등지거나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서 작은 새를 입에 넣고 오도독, 오도독 뼈째 씹어먹는다. 다 먹은 후에 만족한 얼굴로 뒤를 돌면 입 주위와 손가락에 새 피가 점점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입속의 새>만큼 엽기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읽으면 페미니즘 소설 같은 것도 있지만 굳이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 그저 문자가 드러내는 형태만 따라 읽으면 21세기의 잔혹 우화, 마치 그림 형제가 재림을 했으면 이런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몇 번이나 그림 형제 생각을 했는 지 모른다.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 <절망에 빠진 여자들>부터 그러하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펠리시다드. 결혼식을 하러 가는 중인지, 식이 끝나 이제 허니문의 여정이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웨딩드레스 자수에 밥풀 하나가 말라붙은 걸로 보아 결혼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의 스텝지역. 끝도 없는 벌판. 남편인 것으로 짐작이 가는 그는 펠리시다드를 차에 태우고 스텝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사방 팔백리에 건물이라고는 쓰러져가는 주유소 겸 휴게소 하나. 오래 운전해 지친 그는 휴게소 앞에 차를 세우고, 기름을 채우고 그동안 펠리시다드는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눈다. 눴다. 하지만 너무 오래 화장실에서 지체했다. 복잡한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속옷을 내리고 오줌을 누고, 화장지 두 칸을 뜯어 뒤처리를 하고, 속옷을 올리고, 드레스를 내리고, 변기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가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 틀림없이 상당히 지워졌을 화장을 꼼꼼하게 고쳤을 것이다. 눈썹, 색조, 가벼운 파우더, 그리고 립스틱까지. 입술을 몇 번 뻑뻑 거린 다음 화장실에 나오니 그가 없다. 차도 없다. 이거 뭐야? 버림받은 거야? 그가 사라진 도로만 망연하게 바라본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아.”

  어둠 속에 늙은 네네가 말한다. 그들? 잠시 후 밤의 적막이 내리자 길 건너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네네가 말한다. 하도 여러 번 하는 얘기라 최대한 간단하게.

  “남자들은 기다리다 지쳐서 당신을 떠나는 거라고. 아무래도 기다림이 남자들을 지치게 만드는 모양이야. 그러면 여자들은 울면서 남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정말로 도로 저편에서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밤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울고, 울고 또 운다고, 네네가 말한다. 이제 펠리시다드도 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야 하는 거다. 둘이 침울한 기분으로 앉아 있는 동안 다시 차 한 대가 도착한다. 여자가 내려 화장실로 간다. 가솔린을 채운 남자. 잠시 기다리다 화장실을 몇 번 바라보더니 차에 오르고, 시동을 걸고, 그냥 가버린다. 이렇게 남은 여자들이 무척 많다. 이들은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기는 해도 보살펴주지는 않는다. 시간이 감에 따라 오히려 더욱 서로를 미워하고 경원하는 거 같다.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기도 한다.

  조금 후, 다시 차가 도착했다. 이번에도 여자와 남자. 그러나 남자의 용무가 급한지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바지 자크에 손을 올리고 화장실을 향해 급하게 간다. 이때 네네가 서둘러 차를 타라고 말한다. 펠리시다드와 네네와 다른 여자들 몇 명도 차에 올라, 남자가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아무 방향으로나 도로를 따라 급하게 출발한다. 그렇게 이 광활하게 갇힌 스텝 지역에서 벗어난다. 이때 펠리시다드의 눈에 차량 여러 대가 급하게 이쪽 방향으로 오고 있는 것이 들어온다. 남은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혼자 남은 남자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네네가 말한다.

  페미니즘 소설로 읽히기도 하지만 현대의 엽기성을 그림 형제처럼 우화적으로 이야기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마지막 작품은 분량이 제일 긴 <베나비데스의 무거운 여행가방>이다. 이것은 페미니즘 소설로 볼 수도 있지만 역시 현대인의 엽기를 그린 그림 식 우화로 읽어야 제맛이다.

  베나비데스 씨한테는 바퀴 네 개가 달리고, 무릎 높이에 손잡이가 우아하게 솟아 있는, 겉을 갈색 가죽으로 덧댄 튼튼한 여행 가방이 하나 있다. 여행가방? 고유정의 여행가방에 들어간 건? 작은 토막으로 잘린 전남편.

  베나비데스 씨는 꼭 그럴 목적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아내를 칼로 찔렀다. 그는 칼로 찔러 죽인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바이지만, 살인의 동기를 이해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란 점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다음으로 수행한 일련의 일들은 아래와 같다.

  1. 시신을 쓰레기 봉투에 싸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는다.

  2. 침대 옆 여행가방을 열어놓고 결혼 29년 만에 죽은 아내를 바닥 쪽으로 밀어 넣는다. 가방 안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삐져나온 살을 마구 쑤셔 넣는다.

  3.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기보다 깔끔한 뒷정리를 위해 피 묻은 침대 시트를 걷어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일을 다 마치고 다시 두어 시간을 기다려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나선 베나비데스 씨는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예술 애호가이자 자신의 의사인 코랄레스 박사의 집으로 향한다. 박사는 파티 중이다. 약속을 하지 않은 베나비데스가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끈질기게 호출벨을 눌러 파티장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고, 면회를 신청해 딱 5분간 허락을 받는다. 그래서 아내의 시신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2층에 있는 박사의 서재로 끌고 가 사실을 고백하지만 박사는 믿지 않는 눈치다. 그냥 약 두 알을 주고 먹으라 하기만. 베나비데스는 약을 먹고 세상 모르게 골아 떨어진다. 수면제였지 뭐. 초청하지 않은 객을 우아한 예술가들 사이에서 교양있게 내다 버리는 방법.

  다음날 아침에 박사를 찾은 베나비데스. 그는 묻는다. 가방이 어디 있느냐고. 차고로 치웠단다. 사실 그 안에 정말로 아내의 시신이 있다는 베나비데스. 그와 박사가 차고로 가서, 베나비데스는 기어이 여행가방을 열어 아내의 시신을 바닥에 부려 놓아야 하는 순간, 경직이 일어난 시신과 이미 부패를 시작한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 박사는 경악한다.

  세상에나! 이런 놀라운 작품이 있나! 이렇게 완벽한 설치 미술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꼬? 그가 베나비데스에게 말한다.

  “베나비데스… 이건 좀 심하네요. 그런데 정말… 정말… 훌륭하군요. 당신은 천재예요. 지금껏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 생각 좀 해봅시다. 간단하지 않은 문제예요.”

  코랄레스 박사가 전화한다.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도노리오 씨. 득달같이 도착한 도노리오는 가방에서 꺼낸 베나비데스 씨의 죽어 부패하기 시작한 아내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조금밖에 새나지 않은 검붉은 피, 거기다가 특히 시취, 냄새에 뻑 가버려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예술작품이라고 선언한다. 도노리오는 코랄레스에게 당장 차고에 완벽한 냉장시설을 하라고 요구하고, 이 작품이 설치된 이곳, 차고도 중요한 예술적 가치가 있으니 작품을 미술관에 옮기지 말고 이곳에서 대중에게 공개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졸지에 천재 예술가로 등극한 베나비데스 씨.

  이제 베나비데스는 만장한 신사숙녀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짧은 연설을 했다.

  “제가 그녀를 죽였습니다.”

  열광하는 군중. 이렇게 베나비데스의 죽은 아내는 전설적인 작품 <폭력>으로 이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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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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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에 서울에서 나, 인천외국어고등학교 다니다가 때려 치우고 검정고시로 고졸학력 취득한 다음에 예술종합학교에서 문예창작으로 공부했다. 2005년에 창비 신인상을 통해 소설가 말석에 자기 방석을 깔았으니 이때 나이 약관 스물한 살. 떡잎부터 알아보는 빛나는 재능이었다는 말이지. 예전에야 고등학교 다니다가 수업시간에 얻어 터지면서 소설 끼적인 것이 신춘문예 당선하고 뭐 그런 일이 있었지 21세기 들어오면서는 이런 일이 굉장히 드문 것 같다. 하긴 전에도 무척 드물어서 이런 작가가 등장하면 신문에도 나오고 그랬겠다.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지 그동안 뭐 중대가리에 뿔날 일 있었겠어?

  김사과. 이름 들어본 건 오래 전이다. 당연히 본명은 아닐 터. 이이는 예명으로 하필이면 사과를 택했을까? 어떤 사과일까? 아담의 목에 걸린 사과? 트로이의 파리스한테 건넨 아프로디테의 사과? 아니면 하필이면 뉴턴이 낮잠에서 깰 때 바로 앞에 떨어진 사과? 홍옥? 국광? 부사? 골드? 루비에스? 아니다. 어쩌면 왕실에 들어온 두번째 왕비가 전처소생인 공주에게 내민 독약 묻힌 사과일지도 모른다. 앗, 말하고 보니까 독 바른 사과에 더 가까울 거 같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맛있니? 그래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사람 하나 낼름 잡아먹는 이야기 전문가. 사람을 먹는 행위. 이거, 섹스에 관한 은유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사람의 피부와 지방과 근육과 혈액을 요리해서 입에 넣고 씹으며 차례로 조금씩 혀로 이동시켜 식도 쪽으로 밀어 삼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세상에. 처음 읽는 김사과의 작품인데 처음부터 이러시면 우짜라고? 하긴 이름이 새큼해서 언젠가는 읽었겠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시면 끝날까지 김사과를 읽지 않고 조신할 수 있었을 텐데.


  작품의 주인공 정지용은 주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보드라운 살갗을 만질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아이고, 그럼. 말하면 뭐해. 세상사람 다 같은 기분이지. 하지만 아니다. 나는 틀림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보드라운 살갗을 만지면 기분 좋다. 그냥 좋다.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다. 근데 정지용은 그것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찢어 놓는 데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카니발리즘에 환장을 한 주인공의 이름이 정지용. 나는 순간 휘까닥 돌았다.

  정지용? 鄭芝溶?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전집1』 1988.7. 증보판. 민음사 p.46~47)


  이런 노래를 부른 정지용. 주인공 이름을 지어도 참.

  근데 정지용의 아빠는 또 정대철. 이이 이름도 입에 익숙하지? 직업은 오손그룹 회장이다. 1980년대 중반에 오손그룹 창업자이자 정지용의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놓는 바람에 크고 작은 아버지, 고모들과 질퍽하게 그룹 계승전쟁을 치뤄 최종적으로 승리한 정대철 씨는, 그냥 신비주의적 도라이 회장이라고 생각하면 맞다. 계승전쟁 이후 정대철은 점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신한 직후 소박한 교육자 집안의 이십대 중반 참한 처녀 은미라와 14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재혼했다. 정대철의 전처는 호주로 이민을 갔다, 모로코 부자와 재혼했다, 하는 불확실한 소문만 창궐했다.

  정지용은 소련 붕괴를 이틀 앞둔 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 정대철이 오손그룹 신입 남자 직원과 바람이 나 열흘째 소식이 두절된 가운데 엄마와 이모, 외할머니, 산부인과 여의사, 여자 간호사들, 온통 여자로 둘러 싸인 포스트 모던한 세상 밖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아들 정지용을 출산한 교육자 집안의 참한 규수 은미라는 이후 남편처럼 사람들이 점점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라의 상류 부르주아 계층을 지배하는 장치로 삼은 것은 매달 첫째 주 금요일 저녁 집 안뜰에서 연 자선 파티였다. 인기영화를 테마로 해당 영화에 걸맞은 상상 속의 부르주아로 변신, 계산된 인공적인 태도로 관계를 맺는 허위의 인종들.

  어떠셔? 이 정도까지는 즐겁게 읽었다. 엽기발랄한 상상력과 이에 맞춤한 문장들이 착착 감기는 맛이 상당했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적절하게 파국적이다. 신입 남자사원과 바람이 나서 열흘 넘게 세상에서 사라진 거대 그룹회사의 총수 정대철이 정말 호모섹슈얼? 만일 누가 정대철에게 직접 묻는다면 아마 그냥 껄껄 웃고 말 걸?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에서 뭐라고 하건 진실은 정대철의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오손그룹은 이렇게 사이코패스 성향이 조금은 있는 회장의 드라이브로 무섭다는 1990년대 IMF의 고공폭격도 무사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모든 회사는 위기를 한 번은 겪는 법. 2002년, 오손그룹이 부도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들고, 당연히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그룹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확히 2005년에 그룹의 회장부인 은미라가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인은 심장마비. 은미라의 시신은 이상하게도 5년 동안 왕래가 전혀 없던 여동생이 발견했다.


  엄마가 집에서 죽었을 때 주인공 정지용은 스위스 로잔의 숲 속에 있는 무진장 비싼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지용은 기숙사에서 탈출하지만 지가 가면 어디까지 가느냐고, 달랑 잡혀와 한국으로 송환해 버렸다. 이후 정지용은 강남의 공립 중학교를 다니다가 당연히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를 해서 억지로 검정고시를 마친 후 LA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거쳐 뉴욕대를, 전혀 학업적 성취의욕 없이 돈으로 강사를 구해 리포트를 대리로 작성시켜가며 억지로 졸업을 하기는 한다. 이럭저럭 뉴욕에서 10년 정도 지내는 동안 오손그룹은 기적적으로 생존하더니 제2의 성공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제 수출 중심의 제조업을 때려치우고 교육, 부동산, 추자 중심의 서비스업 회사로 거듭난 거였다.

  정회장은 미국의 사설 감옥, 유럽의 축구 리그, 그리고 아이비리그의 교육 산업을 깊게 연구해 이 모델을 사람에게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뉴욕 월가 직장인의 수학실력, 죄수의 야만성, 축구 선수의 체력을 갖춘 인간을 생산하여 세심하게 몸값을 매기고, 부풀리고, 다시 깎고, 또다시 부풀리는 무한경쟁의 인간시장을 만든다는 원대한 계획. 21세기는 진정한 인재 싸움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정회장은 L시와 손을 잡고 산업공단 부지 전부를 얻어 아시아신청년인재양성 센터를 건립하고 주위에 뉴타운을 개발하는데, 가장 중요한 거주 건물을 짓고 이름을 “레종드레브”라 했다.

  아들 정지용이 귀국하고 정대철 회장은 아들을 결혼시킨다. 상대는 교수 부모를 둔 역시 20대 처녀 최영주. 이젠 21세기를 맞아 지용의 엄마 은미라처럼 육체적 처녀라는 뜻과 같은 의미는 아니고 그저 젊은 여성을 그렇게 이를뿐이다. 최영주는 사랑은커녕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헷갈려 하고 있는데, 유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엄마의 적극적 조언으로 그래, 결혼해버리고 말지 뭐. 근사한 결혼식으로 하고,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아쉽게도 서울이 아니라 L시에 있는 아시아신청년인재양성센터 부지의 화려한 고층 주거 건물 레종드레브의 꼭대기 통합층 2백평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린다.

  이때부터 나는 책읽기가 지겨워졌다. 신혼부부가 하는 짓은 뭐? 당신이 생각하는 거 아니다. 이들은 서로 극존칭 비슷한 화법을 구사하며, 세상에서 할 일이 가장 없는 족속이며, 결혼 조건은 둘 사이에 아이 하나는 만들어야 하는 것. 그거 말고 뭐가 있을까? 뭐 별로 없다. 서로 사랑할 필요도 없다. 살면서 정이 들고, 그게 사랑으로 바뀌면 좋은 거고, 아니라도 뭐 그렇게 아쉬울 거 없는 사이. 그러니 할 거라고는 아내는 쇼핑, 남편은 바람. 이렇게 정식 코스를 밟아가는 정지용 앞에는 같은 아파트의 다섯 평짜리 단칸방, 그래도 월세가 150만원에 달하는 전망 좋은 방에 사는 독신녀이자 VJ 이하니. 이하니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고급스럽고 세련된 복장으로 차려 입고 건물 로비에 나섰건만, 정지용의 눈에는 어떻게 그리도 촌스러운 매치로 괜찮은 몸매를 둘렀는지, 한 눈에 봐도 사모님이 입다가 준 옷을 걸치고 외출한 가정부였다. 그런데 이 촌스러움에 끌리는 정지용.

  부르주아가 아주 가난하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자신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인물에게 호감을 느끼면? 당연하지, 선물하고, 생전 먹어보지 못한 비싼 밥을 사주고, 드럽게 무거운 병에 든 겁나게 비싼 위스키를 퍼먹이고, 한 번 하고, 정지용 정도의 최고급 부르주아가 이하나라는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면 다시 보고싶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서울시 강남구 도산공원 앞에 널찍한 아파트를 이하나의 이름으로 전세 얻어주고, 자신의 신용카드 한 장을 주어 기쁨이 넘쳐나는 사치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고, 암만해도 투자에 비해 효용이 너무 작다고 생각되는 날이 오면, 먹어 버린다. 정말? 정말 카니발리즘, 먹어 버린다고? 에이, 내가 그걸 어떻게 확정해. 읽어 보셔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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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리움으로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04
박재삼 지음 / 실천문학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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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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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저 깊숙한 곳에서 30년 묵은 시집 한 권을 찾았다. 시집 초판이 1996년. 내가 시집을 샀을 때도 1996년. 30대 혈기방장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그때 이 시집을 읽은 특별한 감회 없이 왜 그저 책꽂이에 꽂아두고 그것으로 말았는지 이제 알겠다. 젊은 시절 박재삼의 시집이었다면, 예컨대 <春香이 마음>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 江>의 마지막 연이었어도 그렇지 않았을 듯하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아마 외우고 또 외웠겠지. 하지만 《다시 그리움으로》는 지병인 고혈압, 만성신부전, 위하수, 신경통 등에 시달리던 60대 시절의 박재삼, “사라져버린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 대신 성큼 눈앞에 다가온 것 같은 죽음의 전조를 문득문득 보고 있었던 터. 실제로 그는 이 시집을 내고 다음 해에 64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접고 만다. 그러니 삶을 마감하려는 듯 세상을 정리하기에 몰두한 백조의 노래를 30대 청년이 즐거이 감상할 수는 없었겠지.

  이걸 다시 말하면, 이제는 어느새 박재삼보다 오래 살아 더 멀리 가버린 늙어버린 나는 그의 차분한 청산곡曲을 담담하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려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구비구비 굴곡을 겪으며 빠르고 느리게, 잠시 동안은 조금 멈췄다가 드디어 바다에 닿는 강물을 노래한 시인은 이미 길을 마감하는 언저리에 도착했다. 이 노래를 뭐라고 이름할까? 마땅하게 붙일 것이 없었겠지. 그리하여 시인은 無題, “제목 없음”이라 해버렸다.



  無題



  그대는 태어나기를 

  그럴 수 없이 예뻤다마는

  그 위에

  나의 想像力이 加味되어

  안 보이게 되어야

  더욱 美人으로 나타나는 것이여.


  그러나 어쩔꼬,

  그대가 이승을 떠났는데로

  자주자주

  내 앞에만 오는 걸 보니

  신통해 못 견디겠는걸.

  저승에서나

  다시 만날는가 싶지만,

  나는 저승이 있다고는

  이제는 믿지 않는걸.   (전문. P.14)



  시집에 <無題>라는 제목의 시가 무려 아홉 편이 들어 있다. 물론 거개가 죽음하고 깊이 연관된다. 무제만큼 시집에 자주 제목으로 등장하는 건 허무虛無. 허무 역시 바로 옆이 죽음 또는 죽음과 아주 가까이 있는 깊은 잠의 상태일 것이다. 박재삼은 이렇게, 시조 형식으로 노래했다.



  痛恨의 虛無



  그 사람 언제 오려나

  애터지게 기다려도


  죽어 땅 속에 묻혀

  영영 모른 체하고


  뒷산에

  산새 울음만

  멍청하게 들리네   (전문. p.34)



  그런데 제목은 참 촌스럽다. “통한의 허무.” 이것 말고도 “虛無의 내력”과 “虛無의 갈매기 울음”도 있다. 無題와 虛無에 필적하는 은유지만 이제는 직유가 되어버린 단어 가운데 청산靑山도 있어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아득한 靑山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아

  결국 거기에 가서

  묻힐 일만 뚜렷이 남았네.  (<靑山을 보며> 부분. p.48)


  이런 시들은 내가 20대 시절에 읽고 숭앙하던 시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때 이 시집을 읽었다면 여태 내 마음 속에 이렇게 아득하게 시인의 이름 “박재삼”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계유생 시인과 독자 나는 적절하게 연이 맞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청년 시절의 내가 젊은 박재삼을 읽었듯이, 이제 시집을 사놓고 30년이 흘러 나이든 나는 죽음을 한 발짝 앞에 둔 박재삼의 시를 읽는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더 無題.


  無題


  잠시라도 쉴 때에야

  하늘에 구름도 보지

  그것을 못 하고

  길만 바삐 가다 보면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구름도 숨어버려.  (전문. p.16)


  시인은 이렇게 살았나 보다. 쉬지도 못하고 길만 바쁘게 가는 바람에 어느새 구름도 숨은 어둔 밤을 향해. 그는 1967년, 서른네 살 때 고혈압이 발병, 1차로 6개월 동안 병원신세를 진다. 아마도 뇌졸중이었을 듯하다. 누룩 대신 카바이드를 섞어 속성으로 숙성한 막걸리와 불량한 필터가 달리거나 아예 필터조차도 없는 저급한 담배를 마다하지 않던 당시 삼십대들에게 드물지 않은 경우였다. 내 호적등본에도 한 분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저 앞에 인용한 “소리 죽은 가을 江”은 아주 작은 흔적으로만 보인다.


  산골물은 졸졸졸

  산 속을 누벼 흐르다가

  결국은 바다에 들고 만다.  (<불변不變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부분. p.44)


  이제 그를 한 마디로 하자면, “인생 다 살았다.” 보면 볼수록 인간 삶이란 것의 작음만 눈에 띄는 시인. 그것들이 서로 잘났다고 아웅다웅 하는 것이 마치 아이들 옹알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박재삼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나도 그렇게 세상을 보느냐고? 아니다. 아직 아니다. 박재삼은 뛰어난 시인이었고, 나는 그냥 한 명 범부일 뿐인 것을.



  자연과 인간의 차이 1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

  차례차례로 떠서

  하늘에서

  땅을 향하여

  늘 환히 밝히고 있건만

  말 없는 가운데

  하나 지치는 일 없네.


  그런 가운데

  오직 머리가 똑똑하다는 사람만이

  너무 변덕이 심해서

  늘 옥신각신 잘 싸워

  부끄럽기만 하네. (전문. p.30)



  이 시집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역시 내가 우러러보는 시인 민영의 발문을 읽는 일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던 민영과 박재삼이 당시 부산에서 이들의 스승인 김상옥의 소개로 만나 이후 오랜 세월 이어간 우정과 일화가 읽을 만하다. 죽도록 부지런히 써도 돈과는 거리가 먼 시 작업을 하는 친구들. 그러면서도 서로의 시업을 독려하고, 돕고, 그리고 더 자주 질투하는 젊은 민영과 젊은 박재삼을 읽는 일. 피싯 옷을 수도 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구나. 세월이 가는 일은 세상이 더 야박해지는 일일 수도 있구나.

  이제는 박재삼도 민영도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저승을 믿지 않는다니 두 양반이 넋이나마 만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 영혼이라는 것이 만일, 아직도 있는 거라면, 넋이나마 가난하지 않고, 아프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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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10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장 움푹한 곳에 오래된 시집이 저도 좀 있는데요. (아 정말 시집을 사지 않은게 너무 오래되었네요) 오늘 집에 가면 그 움푹한 곳의 시집을 꺼내 먼지를 털고싶다는 느낌이 드는 리뷰입니다.

Falstaff 2025-07-10 18:48   좋아요 1 | URL
아이쿠, 잘 읽어주셨다는 말씀 같아서 고맙기 그지 없네요. ㅎㅎㅎ
옛 시집, 읽어보시면 가끔 후끈 얼굴이 달아오를 수도 있고요, 그땐 그랬지 슬쩍 웃을 수도 있고요, 뭐 그렇더군요. 이런 걸 다 합쳐서 추억이라고 하잖습니까. 읽고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신병동 수기
크리스티네 라반트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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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은 크리스티네 라반트. 이 책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번역, 출판한 라반트인 모양이다. 유럽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을 떨쳐 국제 크리스티네 라반트 학회도 만들었고, 크리스티네 라반트 문학상도 제정되어 2016년부터 상을 주고 있다 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크리스티네 톤하우저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이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내용을 바탕으로 썼다.

  크리스티네 라반트는 1915년 7월 오스트리아 카린티아의 라반트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광부 아버지와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아홉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톤하우저Thonhauser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하던 1948년에 이름을 자기가 태어난 고장인 라반트Lavant로 바꾸었다. 20세기 초의 오스트리아. 패전국 산골의 다산 가정 자녀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줄 수 없었겠지만, 이중에도 불행한 아이들은 그로 인해 치명적 질병을 앓아야 했다. 이 악마의 발톱이 크리스티네를 할퀴었다. 신생아는 훗날 유방으로 성장할 오른쪽 가슴과 목, 얼굴에 ‘음낭’ 또는 ‘왕의 악마’라고 불리는 질병, 마이코박테리아 경추 림프절염에 걸렸다. 사진처럼 목 부분에 만성적인 종괴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음낭처럼 생겼다고 ‘음낭증’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 빈민 특별의료를 지원해 1924년, 아홉 살 때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종합병원에 입원, 안과과장 아돌프 프루처 박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어 거의 잃을 뻔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와 그의 아내 폴라 프루처 여사가 크리스티네의 문학적 소질을 알아보아 릴케의 시집을 선물하는 것으로 시작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출판사를 알아봐 주는 등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이름이 아돌프라고 다 나쁜 종자만 있는 건 아니다. 원래 흔한 이름이었다가 전쟁 이후에 다시는 “아돌프”를 구경하지 못하는 운명을 맞았지만. 시력을 완치한 어린 크리스티네는 집까지 갈 교통비가 없어서 엄마와 함께 6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던 모양이다. 이때 병원에 입원하고, 병동에 입원한 소녀들, 주임의사, 간호사, 기타 관리인, 그리고 엄마/언니와 함께 퇴원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이 책 《정신병동 수기》 제일 앞에 실린 <어린 아이>에 고스란히 나온다.

  대개 이 림프절염이 결핵부터 시작을 한다고. 그럴 확률이 청년일 경우는 대부분이고, 유소년일 경우엔 10퍼센트 미만이라지만 크리스티네는 1927년, 열두 살에 결핵까지 걸렸다. 혹은 결핵에 걸린 것을 발견했다. 다시 종합병원에 입원한 어린 크리스티네한테 병원은 고선량의 뢴트겐을 사용해 “실험적으로” 치료했는데, 이것에 효과를 얻었는지 결핵은 거의 완치, 림프절염도 놀랄만큼 좋아졌다. 다만 고선량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오른쪽 가슴과 목,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머리 부분이 온도변화에 유난히 민감한 성향을 지니게 됐다고. 그래서 이이는 이후 종종 머리에 스카프를 착용한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한 1930년대 초반, 직업교육을 받다가 중도에 그만 둔 크리스티네는 다시 부모의 비좁은 아파트로 돌아와 그림과 글쓰기에 전념했다. 작품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 거의 출판을 할 듯하다가 결국 거절을 당했을 때 이이는 이미 깊은 우울증 상태에 돌입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35년에 수면제 서른 알을 한꺼번에 먹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사흘만에 다시 깨어나, 또다시 극빈층 의료지원 프로그램 혜택을 받아 6주 동안 정신병동에 입원하니, 이 때의 경험으로 쓴 작품이 이 책의 표제작인 <정신병동 수기>이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당이 유대인 멸절에 앞서 시행한 것이 아리안 족의 탁월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형이나 불구, 유색인과 유대인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내용을 알고 있는 크리스티네 입장에서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1938년은 1년 안에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생을 접은 다음이었다. 이제 특별히 기댈 만한 의지가지가 없던 라반트는 더욱 불안에 휩싸여 숨죽이고 살다가 39년에 서른다섯 살 연상인 화가이자 지주출신인 하버니히씨와 결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병합 후 불안 속에 살던 크리스티네 라반트는 전쟁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이의 여러 산문 또는 소설 작품은 스스로 발표하기를 꺼려해 결국 사후에 출간되기도 했는데, <정신병동 수기>도 이 범주에 든다. 아마 작가적 부끄러움이 그렇게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 책에서 표제작을 제일 먼저 읽었다. 생소한 시각과 생소한 문법을 사용하여 사물과 인물을 응시하는 것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출판하는데 머뭇거렸을까? 실제 경험을 묘사한 작품이라 자신 스스로의 부끄러움이 많았으리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는 1964년에 과부가 되고 9년을 더 살다가 1973년 6월, 쉰여덟 살 생일을 한 달도 남기지 않고 뇌졸중으로 삶을 접었다.


  이이의 바이오그래피를 길게 쓴 것은, 책에 실린 세 작품 가운데 처음 두 편, <어린아이>와 <정신병동 수기>의 내용이 작가의 경험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번째 작품 <마귀 들린 아이>는 앞의 둘과 다른 내용, 서양 중세시절부터 내려오는 기형아이에 관한 미신을 아직도 믿는 시골 지역 이야기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체인즐링Changeling.

  아기가 기형이다. 이 책의 주인공 소녀 치타는 소리를 듣고 내용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 아마 선택적 실어증 같다. 아이들과 놀 때,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짧지만 한 문구를 우물우물 말하고는 한다. 북쪽의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렌츠라는 이름의 하인이 등장할 때까지는 그나마 어린아이 답게 천진하고, 귀여움도 받고, 벙어리라 은근히 더 배려도 받으면서 잘 지냈다.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일 터이니까 자연스럽기도 하다.

  렌츠가 체인즐링, 아기 바꾸기 이야기를 한다. 젖먹이 치타가 혼자 집에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나 치타의 몸에 자기 새끼를 씌우고, 치타는 마귀가 데리고 갔다는 거다. 유럽 지역마다 마귀가 아니라 집시일 경우도 있다. 하여간 렌츠는 마귀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진짜 치타를 다시 데려오려면 치타를 발가벗겨 놓고 외눈박이 하녀 엄마 부르가가 아주 힘껏, 모질게 아홉 번을 때려야 한단다. 너무 아파 마귀의 새끼가 치타의 몸에서 살 수 없어 자기 엄마인지 아빠인지 하여간 부모 마귀를 찾아간 다음에야 마귀가 진짜 치타를 치타의 몸에 보내줄 것이라고. 아니면 치타를 거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물에 빠뜨려야 한다고. 하지만 엄마 부르가는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딸 치타에게 그런 모진 일을 할 수 없다. 완벽하게 그렇다. 엄마가 무슨 이유로 사는 데? 근데 어떻게 치타를 때리거나 흐르는 물에 빠뜨릴 수 있을까?

  그러나 소설작법 7장 2절. 불운한 예언이나 주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기억하시지?

  처음에 <정신병동 수기>를 읽고, 별 다섯 만점, 했다. 이어서 <마귀 들린 아이>와 <어린아이>까지 다 읽은 다음에는 넷 반 정도. 하긴, 별점이 뭐가 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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