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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학생 시절 다니던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과 구라마 진화제(교토 구라마에 있는 유키 신사에서 불이 나지 않도록 신에게 기원하는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교토로 온 오하시. 그와 나카이, 다케다, 후지무라, 다나베는 10년 전에도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갔다가 일행인 하세가와가 홀연히 사라진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행을 만나기 전, 오하시는 시간이 남아 길을 둘러보다가 하세가와처럼 보이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그녀를 따라 어떤 화랑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기시다 미치오라는 작가의 <야행(夜行)>이라는 동판화를 보게 되죠.
-야행 열차의 야행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백귀야행(온갖 귀신이 밤에 나다닌다는 뜻)의 야행일 수도 있죠. -
낮의 경험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오하시는 무심코 일행에게 하세가와를 본 것 같다는 말을 꺼내고, 더불어 화랑에서 본 기시다 미치오의 작품 얘기까지 거론됩니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무엇인가 숨기는 듯한 기색이 엿보이고 가장 먼저 나카이가 오노키치의 호텔 로비에서 그의 동판화를 본 기억이 있다면서 경험담을 이야기해요. 작품에는 이렇게 모두가 만난,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夜行)>을 중심으로 그들이 겪은 기이한 경험담이 실려 있습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여우 이야기]를 통해 만난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입니다. 앞의 두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특히 이번 [야행]에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이야기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여름,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가 필요한 계절이죠. 그 중에서도 기이한 이야기가요. 하세가와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인가, 스릴러인가 싶었지만 그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씩 풀어지다보면 정체 모를 오싹함에 침을 꼴깍, 삼키게 되었죠. 기시다 미치오의 작품 <야행(夜行)>에는 동일한 등장인물이 있거든요. 머리가 길고 마치 이쪽을 보고 손짓하듯 오른손을 들고 있는, 마네킹처럼 눈도 입도 없는 여자. <야행(夜行)>은 연작 작품이라 <야행(夜行)-오노미치>, <야행(夜行)-오쿠히다>처럼 각각의 등장인물이 방문한 곳의 지명이 붙어 있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동판화에 그려진 여자에게서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군가를 발견합니다.
이 세계는 과연 ‘이 세계’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시공을 초월한 공간이 무수히 존재하죠. 그런 것처럼 다른 공간의 나도 분명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기시다 미치오의 그림 <야행(夜行)>이 있는 것처럼 서광(단 한 번뿐인 아침을 그린 것)도 존재하는 것처럼요. 각각의 이야기들은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경험들이었어요.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과연 어떻게 결말을 맺을 것인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각 동판화에 항상 등장하는 기묘한 여자, 등장인물들이 겪은 괴이한 경험들은 책을 읽는 내내,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혼란스럽고도 무섭고, 한편으로는 가슴 설레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독서가 좀 미진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다시 책에 대한 애정이 무한 샘솟습니다. 더불어 모리미 도미히코에 대한 기대치도 더욱 높아졌어요. 워낙 교토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특히 교토를 배경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를 애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