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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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던 [도쿄기담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더 일본의 괴담이나 기담에 빠져있던 때라 이 책도 당연히! 그런 요괴나 오소소한 괴담이야기인 줄 알고 덥석 집어들었던 것이 오산. 하루키식 기담이야기에 약간 실망했던 나는 그저 페이지만 술렁술렁 넘기다 책장에 꽂아두었고, 어느 날 책나눔을 할 때 같이 실려보낸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 책을 사들이기(?) 시작한 계기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였다.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랄까. 그 때 사들였던 책이 여전히 읽히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있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책이 나에게 오는 적당한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손에 들어오는 때와 읽히는 때가 다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읽히는 때에는 -지금이 딱!-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도쿄기담집]도 그랬다. 예전에는 ‘이게 기담이야?!’하며 시들했던 이야기들이 지금 읽으니 또 새롭게 다가온다. 하긴 기담이라는 것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의미이니 예전의 내가 ‘기담’의 범위를 한정지었던 탓도 있겠다.

총 5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단편집.

우연히 일어난 일로 의도치 않은 기쁨을 맛봤던 화자가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게이인 그는 피아노 조율사로서 매주 화요일마다 가나가와 현에 있는 쇼핑몰을 찾는다. 쇼핑몰 안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것이 습관인 그 앞에 한 여자가 등장. 우연히 같은 책을 읽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그 다음 주에도 차를 마시고 식사하며 대화를 나눈다. 교감을 나누며 게이인 그에게 매력을 느낀 그녀. 그 또한 그녀를 친근하게 느낀 이유가 있는데, 자신이 게이라는 걸 밝힌 탓에 관계가 소원해진 누나와 같은 위치에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여자는 남자에게 함께 있어주길 원한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는 여자. 그 여자를 만나고 난 후 그는 오랜만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고 놀라운 우연과 조우한다.-는 내용의 <우연여행자>. 서정적이면서도 일상에 숨겨진 미스터리함이 잘 조화를 이룬 재미있는 작품이다. 좋은 문구들도 꽤 있다.

플랑크는 게이였어요. 그리고 자신이 게이인 것을 사람들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죠. 당시로서는 그건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는 또 이런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죠. 내 음악은 내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점을 빼놓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라고.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 플랑크는 자신의 음악에 성실하기 위해 자신이 호모섹슈얼이라는 것에도 똑같이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음악이란 그런 것이고, 삶의 자세라는 것도 그런 거죠. -p17

나는 그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얘요. 그 도형을,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걸 목도하고는, 아아,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참 신기하네, 라고 화들짝 놀라죠. 사실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닌데. -p41

서핑을 하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매년 아들의 기일에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 여인의 이야기 <하나레이 해변>, 24층인 어머니 집에 갔다가 26층인 집으로 돌아오는 층계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자를 찾는 탐정이 등장하는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직업이 작가인 주인공이 쓰는 소설 내용을 소재로 현실과 상상 사이에 걸쳐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다른 것은 모두 기억하면서도 자신의 이름만 잊어버리는 여자의 성장담 <시나가와 원숭이>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호러라고 짐작했지만 아니었고, <시나가와 원숭이>에는 말하는 원숭이가 등장하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어느 하나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뭐랄까. 에세이에서 보여지는 하루키의 엉뚱한 발상과 유머들이 소설의 옷을 입고 펼쳐져있는 듯한 느낌?!

예전보다 하루키의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읽은 덕분인지 이번 [도쿄기담집]은 좀 더 깊은 이해 속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은 표지가 분홍색인 책이 왔다는 것. [도쿄기담집]은 연두색과 분홍색의 두 가지 버전 표지로 제작되었는데 분홍색 표지의 책이 온 것을 보니 처음 별명을 지었던 때가 떠오른다. 동시에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도. 그 때의 나에게 가장 따스하게 비춰졌던 분홍색. 어쩌면 이것도 우연이겠지만 그 우연 속에 숨겨진 신비한 삶의 일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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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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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시킨 적이 없던 작가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등장!!입니다. 어라, 근데 책을 받아보니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얇아요. 페이지 수가 많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해리 보슈 시리즈들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분량이라고 할까요. 마구 복잡한 사건은 아닌가보다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위기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어도 그 동안 보슈 시리즈에서 맛보았던 모든 것들의 압축판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동안의 해리 보슈 시리즈의 두께 때문에 쉽게 이 시리즈를 시작하지 못하고 계셨던 분들이라면 ‘입문서’ 정도로 가볍게 읽어보셔도 될 듯해요. 그렇게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 저처럼 출간되는 족족 사들이는 팬이 되실 거에요. 훗.

이번 작품은 표지부터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라색과 자주색이 어우러진 도시의 색감이 마음에 들었어요. 전혀 혼란스러워보이지 않는 도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고요함을 품고 있는 도시의 모습. [혼돈의 도시]에서는 [시인의 계곡]과 [에코 파크]에 등장했던 FBI 요원 레이철 월링도 재등장하면서 보슈와 은근한 로맨스 라인을 지속시키기도 한답니다. 사립탐정 일을 그만두고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으로 복귀한 보슈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처형당한 듯 뒤통수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사망한 남자의 시체. 잠도 자지 않고 사건 전화를 기다리던 보슈는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고 레이철과 맞닥뜨리죠. 그녀가 FBI 요원으로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한 보슈는 노련한 기법으로 진실을 알아냅니다. 살해당한 남자는 방사능물질 접근권한을 가진 의학물리학자로 그가 병원 금고에서 세슘을 대량으로 운반한 것까지 알게 된 보슈. 최대한 빨리 세슘을 찾아내려는 레이철과 살인사건으로서 범인을 밝히려는 보슈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또 멋진 한 팀으로 수사를 시작해요.

엄청난 테러의 위험을 안고 시작된 수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야말로 우리 주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사건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해요. 저로서는 'Life is simple‘ 이라는 문구가 생각나는 그런 케이스였다고 할까요.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단순한 사건이었지만 캐릭터, 스토리, 스릴러로서의 한 방까지 유감없이 갖춘 작품으로 기억될 듯합니다. 여기 <세인트 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의 평이 있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작품은 코넬리의 표준을 보여준다. 코넬리의 팬들은 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그가 가장 효과적으로 플롯, 인물의 성격 묘사, 그리고 고유의 색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매력 넘치는 보슈(+이야기)입니다. 레이철과의 은근한 줄다리기는 이대로 끝을 맺지 말고 그냥 줄다리기로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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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네임 이즈 메모리
앤 브래셰어스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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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윤회라는 단어에는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져오는 무엇이 있다는 것, 죽음 너머에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생명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한층 두터워지는 듯해요. 홀로 이 세상을 거듭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찌릿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갈망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붙잡으려는 허무한 몸짓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애달픈 존재들이니까요. 그 순간들 속에서 전생이라는 것, 다시 태어나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죠.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어떤 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추억과 마음은 더 풍요로워질까요, 더 외로워지게 될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고 어쩐지 나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조차 이루지 못했던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면요.

 

대니얼의 처음 기억은 541년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잔티움의 시민이었던 대니얼과 그의 형 조아킴은 비잔티움에 대항하는 베르베르족을 무찌르러 그들의 땅으로 향하죠. 그 곳에서 조아킴의 판단 부족으로 엉뚱한 마을을 습격하게 되고 대니얼은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 소피아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억겁의 시간 속 사랑을 잃었고 또 좇게 된 남자 대니얼. 형의 판단 부족을 상부에 보고하고 그와 형은 비뚤어진 운명의 선을 타게 됩니다. 각각의 생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태어날 때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게 된 대니얼은 소피아와의 만남을 염원하지만 얽히고 꼬여버린 운명의 실타래는 쉽사리 풀리지 않죠. 환생한 형의 아내로 직접적인 만남을 갖게 된 대니얼과 소피아이지만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조아킴의 존재는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맞추지 못한 채 계속되는 그들의 만남. 1900년대 초반, 잉글랜드 해스턴배리 저택에서 죽어가는 병사와 간호사로 소피아를 다시 만난 대니얼은 그들의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고, 마침내 소피아의 마음을 얻지만 대니얼은 부상이 심해져 다시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는 꼭 그를 기억하겠다는 소피아의 약속을 품고 또 다시 환생한 대니얼의 눈앞에 드디어 소피아의 환생 루시가 나타납니다.

 

대니얼의 계속되는 환생은 축복이라기보다 고통에 가깝습니다. 환생 자체라기보다 자신이 살았던 시간에 관한 모든 기억이요. 애처로울 정도로 안타깝고 슬퍼요. 예전에 전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면서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생과 인연의 시작에만 얽매이면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없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덕분에 대니얼의 삶 속에는 소피아 이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허무할 뿐입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요. 그런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소피아만 찾아 헤매고 그녀만 바라보다 이루어지지 않고 또다시 맞게 되었던 죽음들. 한 번의 삶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대니얼의 그런 시간들이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에요.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제가 소피아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런 그의 시간들을 알아챘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자신의 전생을 알아가는 루시의 시점, 그녀를 사랑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대니얼의 시점과 대니얼이 죽 살아온 전생의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진행됩니다. 소피아와의 인연의 시작,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시간, 그리고 운명의 훼방꾼 조아킴. 다음 생에서는 꼭 대니얼을 기억하겠다던 소피아의 맹세는 시간과 죽음을 뛰어넘어 루시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과연 그들의 사랑은 완성될 수 있을까요. 억겁의 시간 속을 살아낸 대니얼의 독백들이 잔잔한 감동과 설렘을 주는 붉은 실의 인연에 관한 아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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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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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는 세상에서 가장 짧다고 일컬어지는 5·7·5‘의 열 일곱자로 된 한 줄의 정형시이다. 하이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면서였는데 사실 그 때도 하이쿠의 매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었다. 나에게 하이쿠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시험을 위해 누가 무엇을 지었는지 알아두어야 하는 시였기 때문이다. 사실 5·7·5의 짧은 시를 읽고 무엇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본 것을 내가 똑같이 보고 있지 않으며, 그가 느낀 감정을 내가 오롯이 느낄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내게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와는 다른 차원의 처연함, 애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도 그것은 내가 아직까지 외우고 있는 한 줄의 와카와 닿아있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おもいつつ寝ればやひとのみえつらむ夢と知りせばさめざらましを

생각하면서 잠들었더니 꿈에서 그를 보았다, 꿈인 줄 알았다면 깨지말 것을 그랬다는 연정의 마음을 노래하는 이 시는 와카 중에서도 유명하기로 꼽힌다. 이 노래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분위기가, 어쩐지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공식처럼 일본의 시에 모두 대입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시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쯔오 바쇼, 고바야시 잇사, 요사 부손 등으로 대표되는 하이쿠는 언어의 기교를 중시한다기보다 삶의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앞의 와카처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데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하이쿠뿐만 아니라 류시화 시인의 해설이 들어가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을 눈여겨볼 수 있게 해준다.

하이쿠가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는 것은 ‘진실성’ 때문이다. 하이쿠 자체가, 언어적 기교가 시의 수준을 좌우한다고 믿었던 시대에 반기를 들 듯 진실한 경험에 얼마나 가 닿았는가를 좋은 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衣替えて座って見てもひとりかな

옷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봐도 혼자여라

류시화 시인의 해설에 따르면 ‘혼자’는 비관도 동정도 아닌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단어일 뿐이다. 꾸밈없이 자기연민도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치장과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성이고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있는 그대로를 중시하기 때문에 시적인 맛, 읽는 맛이 떨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바쇼의 제자인 기카쿠의 작품을 바쇼가 고쳐 쓴 것이 있다.

赤とんぼ羽根を取ったら唐辛子

고추잠자리 날개를 뽑으면 고추

唐辛子羽をつけたら赤とんぼ

고추에 날개를 붙이면 고추잠자리

하이쿠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고쳐썼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이 외에도 계어(계절어)를 사용하거나 단어의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시들을 읽어보면 이것이 바로 언어유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바쇼와 잇사, 부손 등 이미 알고 있던 작가들의 작품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았지만 그 외 기카쿠나 란세쓰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새로이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작가들의 사연, 배경 등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그들의 작품을 한층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꽤 두껍기도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작품을 꼼꼼이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다. 그러나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어딘가 다른 세상에 있다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작가들이 있던 방 안에, 대청마루에, 여름이 아닌 가을에. 어느 계절에 읽어도 좋을 멋진 작품들이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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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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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잔 데다 바람이 거세 창문이 소란스럽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이 뻑뻑해서 책읽기도 싫어 TV를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고정한 프로는 <사랑과 전쟁>. 좋지 않은 이야기들은 유독 머릿속에 쉽게 남는다. 영향을 받기도 쉽다. 그래서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프로였지만 시간은 밤을 넘고 새벽을 건너 아침을 향해가던 때라 취침예약을 해놓고 멍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 날의 주제는 <못생긴 남편>. 앞부분부터 보지는 못했지만 신부대기실에서 신부가 울상을 짓고 있는 데다 찾아오는 친구들은 신부를 불쌍해하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기에 신랑이 정말 못생겼구나 짐작은 했다. 결혼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변호사인 신랑의 선물공세와 주위사정에 의해 쫓기듯 결혼하게 됐다는 신부의 넋두리 뒤에 등장한 그의 얼굴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못생겼었다. 물론 분장을 과도하게 한 탓도 있겠지만 코주부 코에 툭 튀어나와 다물어지지 않는 입, 고르지 않다는 표현도 과분할 정도로 뒤틀린 치열. 아내는 아이를 임신한 뒤로 남편이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자기 할 도리는 다 했다며 육아를 남편에게 맡긴 채 다른 남자를 만나며 밖으로 겉돌기 시작한다.

예전 알랭 드 보통의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발톱이 발에 붙어 있으면 그건 괜찮아. 하지만 일단 떨어져 나가면 그건 쓰레기잖아. 예를 들어, 사람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보는 것하고 욕조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왜 발톱을 깎는 게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친밀한 거야?

섹스를 하는 상대는 그 앞에서 발톱을 깎아도 창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얘기일 뿐이야.

나는 이 문장들을 보면서 결국 사랑한다는 건 자신의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부분을 공유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은 아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깊은 부끄러운 부분들을 공유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사랑해서 결혼해도 헤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선물공세와 남편의 경제력에 떠밀려 결혼한 신부의 마음은 어땠을까. 쳐다보기만 해도 싫고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어지는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 약속을 한 그녀의 어리석음을 탓할 일이지만 그것이 과연 남의 일이기만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그런 때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가 밥 먹는 모습, 걸음걸이, 말투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사랑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그 모든 것들에 진저리를 치게 되는 날이. 발톱을 깎는 그의 모습이 싫어지게 되는 날이.

루이스 어드리크의 [그림자밟기]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아내 아이린과 그런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편 길의 이야기이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그녀가 쓰는 일기를 훔쳐보는 길. 그리고 그런 길의 행동을 알아채고 블루 노트북과 레드 다이어리, 두 권의 일기장을 만드는 아이린. 아이린은 블루 노트북에는 진실을, 레드 다이어리에는 길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용을 적으며 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화가와 모델로 만나 한 때는 깊은 친밀감을 느끼며 서로에게 애정을 쏟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비뚤어진 욕망만이 그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아내를 모델로 그녀의 속살까지 화폭에 옮겨담으며 그녀의 이미지를 통해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려했던 길. 그런 남편 옆에서 타인에게 소모되는 이미지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주체성을 되찾고 싶어하는 아이린은 이혼을 요구한다.

아이린은 생각했다. 이미지는 사람이 아냐. 심지어 사람의 그림자도 못 돼. 그러니 이미지처럼 모호한 것을 묘사한 그림, 설령 비약이나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그림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들의 관계는 기괴하다. 사랑이라기보다 이제는 집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길의 언행과 그를 감싸안는 듯 내치는 아이린의 모습. 특히 마지막에서 보여지는 아이린의 선택-그것이 정말 그녀의 선택일까 싶기도 하다-을 보면 그녀의 길에 대한 감정도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린은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 위니 제인은 아이린에게 자갈로 그림자를 덮어 없애려 하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로 병자들을 치료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자기 그림자에서 힘을 얻는 어느 사악한 위디고 전사는 딱 정오만되면 어린 소녀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영혼은 그림자를 통해 빼앗을 수 있었다. 이것을 오지브웨 언어에서는 ‘와바무지차그완’이라고 하는데, 거울을 뜻하는 이 말은 그림자와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영혼은 눈에 보인다는 것. 길은 아이린을 그리면서 그녀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녀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의 발에 짓밟힌 그림자의 실타래를 당길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을 통해 부부사이에서의 소유라는 개념과 애증이라는 감정을 표현한 작가는 대학시절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마이클 도리스와 결혼했지만 16년의 결혼생활 끝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이린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길에게는 남편 마이클의 모습을 투영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한 바 있다고 고백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이 작품을 어렵게 느꼈던 이유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것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엮이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있을 것이므로. 지금의 나는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다. 손에 잡힐 것처럼 잡히지 않는 생각들이 있다. 언젠가 내가 결혼을 하고 오랜 시간 누군가와 함께 보내게 된다면 이 작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지독하게 길을 밀어내고 싶어했지만 그의 심장에서 흔들리지 않는 빛을 봤을지도 모를 아이린의 선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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