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케이스 속의 소년 니나보르 케이스 (NINA BORG Case) 1
레네 코베르뵐.아그네테 프리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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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관해서는 작품 결말 부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로 인해 온전한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니나 보르. 깡마른 몸매에 짧은 머리, 약간 소년같은 외모를 한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한 남자의 아내이고 난민을 위한 적십자캠프에서 일하면서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의료봉사에까지 뛰어들고 있다. 어느 날 친구 카린의 부탁으로 기차역 보관함에서 슈트케이스 하나를 찾아오며 사건은 시작된다. 열어본 슈트케이스 안에는 어린 아이가 마취되어 죽은 듯이 누워있다. 이 아이는 누구이며 어째서 카린이 자신에게 맡긴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니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이미 피와 폭력으로 물든 잔인한 남자로부터 아이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니나.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제 발로 뛰기 시작한 시기타의 이야기가 불행한 개인사와 얽혀 함께 펼쳐지고, 결국 니나와 시기타의 만남으로 인해 어두운 진실이 밝혀진다.

 

작가가 여성 두 명인 것과 크게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슈트케이스 속의 소년]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니나 보르와 아이의 엄마 시기타이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된 시기타는 차마 그 사실을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못한 채 떨어져 사는 이모를 찾아가 아이를 낳고, 낳은 아이를 입양보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얻게 된 아이가 바로 슈트케이스 속에 있던 아이 미카스다. 이미 미카스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편과는 별거 상태였고, 그렇게 단 둘이 지내는 생활에 외로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시기타는 무엇보다 아이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시기타와 미카스가 공원에서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을 때 미카스에게 초콜릿을 건네는 수상한 여자. 그 이후로 시기타는 기억을 잃은 채 병원에서 눈을 뜨고 미카스 또한 자취를 감춘다. 수사에 진전이 없고 기다릴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시기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미카스를 찾아나선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니나 보르 시리즈를 계속하기 위해 중심적인 인물로 니나 보르를 내세웠을 뿐 실제적인 주인공은 시기타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모성으로 가득차 아이를 찾아나선 시기타라는 인물이 인상적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뚜렷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목적을 이루려는 남자와 역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폭력과 살인도 불사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전자의 남자는 돈이 많고 후자의 남자는 돈이 없다. 이 둘의 차이는 그것 뿐이다. 만약 전자의 남자가 돈이 없었다면, 하지만 문제는 동일하게 발생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살아온 환경에 따라 취한 행동이 달라졌을 수는 있겠지만 후자의 남자와 같은 선택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결국 이 둘에게 결여된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다. 남이야 어떻든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고 자신만 많은 돈을 챙겨 오직 눈앞의 여인과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상들에게 설명할 것이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 그랬노라고,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시기타를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기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므로.

 

주인공인 니나 보르는 슈트케이스 속에 있던 아이를 피신시키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한다. 이 아이가 고아원에 있던 아이였는지, 아니면 납치당한 아이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동유럽 여자를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니나 보르의 가족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그녀에게 가족은 오히려 벗어나고 싶은 대상처럼 보인다. 그리고 과연 니나처럼 다른 사람 일에 이리 목숨 걸고 홀로 대항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싶다. 지켜야 할 대상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말이다. 형사도 아닌 가녀린 여자 간호사가 이런 시련들을 모두 감당해내다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중심인물인 니나의 캐릭터가 조금 빈약하기는 하지만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여성 콤비의 작품이라 그런지 어쩐지 더 섬세한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한 가운데 긴장을 조율할 줄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시기타가 미카스에 대해 느끼는 감정, 아이를 찾기 위한 눈물겨운 여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시리즈인만큼 첫 작품만 읽고서는 완전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책날개에 예고된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여성 콤비의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스릴러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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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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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에는,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무젓가락을 만들기 위해 아마존의 삼림이 파괴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모르고 있던 내용은 아니었지만 막상 문자로 접하고나니 그 충격이 상당했다. 영화나 여타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충격이라고 할까. 어쩌면 그 때 내가 나무젓가락이나 종이컵을 사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보면서 ‘고작 이따위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아마존의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있다는 말이야?’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평소 에코컵을 사용하고 카페에 갈 때도 텀블러를 준비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커피 한 잔은 종이컵에 마셔야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밖에서 배달된 음식을 먹을 때는 나무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의 무게가 몸 전체로 다가왔었다.  

 

[녹색 고전]은 그 동안 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배웠거나 혹은 대강 넘겨왔던 우리의 고전문학들을 환경과 연결하여 다른 시각에서 소개해준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변과 그로 인한 자연재해, 그리고 각 국가별로 발표하고 있는 지구의 잔여수명. 어쩌면 2050년쯤에는 지구는 황폐화되고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갖춘 행성으로의 대이동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영화로만 봤던 그런 장면들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진다면...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인간들의 이기심을 지적하며 자연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사고할 수 있는 능력과 언어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그들만의 언어가 존재하며(<새들도 말을 하고>) 결코 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호질>에는 호랑이가 인간을 꾸짖는 장면이 등장한다.

 

너희가 이(理 )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적에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이지만, 하늘의 소명으로 보자면 범이나 사람이나 다 같이 만물 중의 하나이다......너희들이 먹이를 얻는 것이란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도다! 덫이나 함정을 놓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새 그물․노루망․큰 그물․고기 그물․수레 그물․삼태 그물 따위의 온갖 그물을 만들어냈으니, 처음 그것을 만들어낸 놈이야말로 이 세상에 가장 재앙을 끼친 자이다. -p76

호랑이의 꾸짖음의 내용의 대부분은 인간이 자연에 행하는 지나침에 대한 것이다.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탐욕이 지나쳐 그릇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질책. 조선 시대의 연암 박지원 선생은 일찍부터 인간들의 욕망에 대한 경계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베르나르의 [제3인류]는 지구에게 의식을 부여해 지구가 인간들로 인해 느끼는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지구가 고통을 느끼는 한, 인간들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이제는 자연을 존경하고 지구와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물론 현대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등장한다. 이규보의 <이와 개에 관한 생각>에는 개와 이의 죽음은 한가지이며 각기 기운과 숨을 받은 자로서 어찌 죽음을 좋아하는 존재가 있겠느냐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길손에게 ‘나’가 어떤 사람이 이글이글하는 화로의 불 속에 이를 던져 넣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는 말에, 길손이 자신을 놀리느냐며 화를 내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는 당연히 잡아야 하는 생물이다. 나도 어렸을 때 반 친구에게 이가 옮아 이약을 뿌리고 한동안 보자기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추억 아닌 추억이 있다. 그런 이의 생명조차 소중하다 여기고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은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니 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환경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렵다. 사소한 것을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라 더 어렵다.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물질에 사로잡히지 말기 등 대부분 우리 삶의 편리함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다. 그냥 눈 한 번 딱 감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았던 한 번의 눈을 떠야 할 때인 것 같다. 후손들의 일까지는 너무 멀어서 상상도 안 되지만 잘못하다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노년이 되었을 때 타행성으로의 이전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중에 살아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환경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우리가 지금 직면한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한 ‘녹색’ 고전 읽기는 그래서 고무적이다.

 

일 년에 백만 종의 영혼이 지구를 떠나고 있다. 매연과 소음과 농약으로 썩어가는 지구에서 살 수가 없어서 다른 별들로 이민을 떠나고 있다.  

-김백겸 <멸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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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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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지만 결말 부분이 언급되어 있으니 주의하세요~!!

 

어렸을 때는 어른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공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성적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일에 마음을 쓰고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죠.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의 삶은 생각처럼 그리 녹록하지 않고 어째서인지 때때로 마음이 공허해질 때도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은 더 복잡해지고 생각해야 할 것들은 늘어나며 하고 싶은 일들은 더 많아지고 학창시절보다 더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해 탐구하게 됩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하는대로, 안 하면 안 하는대로 나름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인생의 무게는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역시 남자면 남자인대로, 여자면 여자인대로 느껴야 하는 삶의 비애는 저마다의 몫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와 상황들을 보면 여자가 더 살기 힘든 세상인 건 맞는 것 같은데요, 그건 제가 여자여서 그런 걸까요? 갑자기 어떤 이의 -남자가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다녀야 하니까, 안 다니면 이상하니까 다니는 거지만, 결혼한 여자가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달리는 한 여성-이사도라-의 이야기입니다. 무역상 아버지와 화가였으나 외할아버지에 의해 꿈을 좌절당한 어머니, 레바논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거의 찬양하다시피 하는 언니와 그 뒤를 따르는 여동생들 사이에서 유난히 독특한 취급을 받는 그녀는, 두 번째 남편 베넷과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분석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 있죠. 거기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과거에 대한 회고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의 대상과의 환희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빠르게 진행됩니다. 부정하면서 살아왔지만 떨쳐버릴 수 없었던 나치에 대한 혐오와 분노, '여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자연스레 생리가 멈춰버린 몸, 그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정신과 상담, 결국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첫 번째 남편 브라이언, 현재의 남편인 베넷이 곁에 있음에도 늘 외로움과 방황에 힘들어했던 시간들, 그리고 마침내 환상을 채워주기 위해 나타난 남자 에이드리언까지 그녀의 성찰은 굉장한 성적묘사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사도라는 자유를 원하지만 남자-의존하고 함께 있어줄 사람-를 떠나지 못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에요. '지퍼 터지는 섹스'라는 말의 대상으로 인해 그녀가 원하는 것이 환상적인 섹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교감과 따뜻한 입맞춤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베넷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한없이 차갑게 침묵했던 베넷에게 이사도라는 희망합니다. 말을 걸어주기를, 따뜻하게 키스해주기를. 하지만 이런 친밀한 행위는 그녀 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남자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들이 갈망하지 않을까요. 아기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부당하고 외치죠. '여자'가 되는 것으로 인해 강요받아야 하는 것들,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작가로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여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 자립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음에 절망하고 계속적인 내적 고민을 끌어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에이드리언을 만나 인생에 한 획을 그을 일탈을, 그제서야 처음 해보게 되는 거죠.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되어 1973년 발표된 이 작품은, 그러나 지금 읽어도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을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이 그 시대에 나왔다는 게 더 놀라울 정도로 여성이 성에 대해 갖는 환상, 비유들이 거침없이 묘사되어 있어요. 프로이트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굉장히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소설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고민해왔던 것들, 그리고 고민할 수 있었을 일들이 생생하게 쓰여 있고, 아마도 많은 여성 독자들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왔던 시간들을 반추할 수 있고 공감하는 기회를 갖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의 진짜 의미는 뭘까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라면 아마 이 사회는 페미니스트로 넘쳐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비행공포]를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인 고민이 담긴 책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둘러싼, 그다지 반갑지 않은 환경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 작품의 화자가 여성이었을 뿐, 그래서 여성의 시각에서 쓰여졌고 또한 그래서 섹스에 대한 묘사가 많은 것에 어쩌면 보수적인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많은 남성 독자들도 이 부분-행복과 잘 살아기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떠났던 이사도라는 결국 그와 헤어져 다시 베넷을 만나러 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평소 자신이 상상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의 상황과 맞닥뜨리지만 이 때의 그녀의 반응이 또 재미있어요. 아직 베넷과 마주치지 못한 상태로 결말을 맺는 방식에서 어쩌면 이사도라의 고민은 종지부를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 편이 더 마음에 드네요. 그녀의 긴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등장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우왕좌왕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욕조 속에 들어가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으니까요. 우리 존재에 대한 고민, 우리의 행복에 대한 고민의 답은 없으며, 그저 순간순간 마주한 상황을 헤쳐갈 뿐이라는 의도가 담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사도라는 결국 늘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며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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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1명 신청합니다. 평소 그림 보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그림과 함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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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와 길을 걷다 -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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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싶은 글자들이 있다.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책장과 한 페이지를 지나칠 때마다 가슴에 박히는 감정들이 있다. 문학작품이 아닌 여행에세이를 읽을 때의 이야기다. 보통 여행에세이에 크게 감동받으며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여행서에는 동경과 부러움의 감정이 더 크며, 다녀왔던 장소에 대한 여행기에는 공감과 추억이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 이들과 '감동'은 조금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유독 오소희님의 여행서를 읽을 때는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 어디를 다녀왔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어떤 경험을 했을까 궁금하면서도, 읽는 순간조차 아쉽다. 그리고 그녀와 아들 중빈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정신 못차리고 책을 붙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감정을 부여잡고서. 그런 순간을 '감동'으로 이름붙일 수 있지 않을까.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는 여행에세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예전에 그녀가 지은 [나는 달랄이야! 너는?] 과 같은 동화책도 아니다. 그녀가 이 책은.

 

 "진심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출간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진지하게 질문한 독자와, 또 진지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독자들. 그녀는 같은 질문을 80년대나 90년대에 했다면 웃음이 터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절대 다수가 진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몰라 웃지 못한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질문과 더불어, 꿈과 희망, 안식같은 말들이 살아숨쉬는 곳이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어렸을 적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을 다시 읽게 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내가 동화를 멀리한 사이,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거기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애벌레 탑을 기어올랐었고, 굴러 떨어졌었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친구를 부럽게 바라보았었다. 애벌레가 좌절한 그대로 나는 좌절했었고, 애벌레가 희망을 품은 그대로 나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래전, 이런 삶에 대한 계시를, 생의 예고편을 미리 접했단 말인가. 이토록 감사하고 선명한 가르침을......

 

나에게 진심이 없다면 그것을 어디쯤에서 떨어뜨렸는지 동화가 알려주었다. 나에게 행복이 없다면 그 또한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는지 동화가 알려주었다. 동화는 그림으로 된 '인생 지도'였다. 그 안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의 좌표가 들어 있었다. 꿈, 희망, 행복, 베풂, 안식, 우정...... 

이렇게 그녀의 동화가 시작된다. 20편의 동화와 그녀의 삶의 이야기가. 그것은 때로는 여행기가 되기도 하고 넋두리가 되기도 하며 삶의 고백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가 다 주옥같다. 그것은 아마도 인공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된, 그녀가 직접 겪고 깨달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 듣고 배워서 아는 척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속에서 숙성시켜 내보낸 보석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일상 에세이처럼, 한 사람의 수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들에, 나는 자꾸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고 그랬었던 것 같다.

 

여행을 다녀왔더랬다. 이번에는 그녀처럼 자유로이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하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차에 타라고 하면 타고, 먹을 시간이라고 하면 먹고, 화장실 가야 한다고 하면 가는 여행사 상품을 통한 여행이었다. 동유럽은 처음이었으니 처음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았다. 가이드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역사와 문화 이야기도 평소보다 귀에 쏙쏙 들어왔고, 교통편이라거나 무거운 짐에 대한 소소한 걱정이 사라져서 한결 홀가분했다. 돌아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서 기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여행은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자꾸 마음이 답답한 거다.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충분히 만족했고 즐겼다고 생각했지만 뭔가가 모자랐던 걸까. 아니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러면서 여행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인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인가.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순간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닌데, 나는 자꾸만 뭔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답을 얻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은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밖을 보고 싶고, 단단하게 나를 지켜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주고받는 것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계산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절로, 계산을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p25

그녀의 책은 이렇다. 예전에 읽은 여행서들도 단순히 그 곳에 가고 싶다, 부럽다 뿐만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해준다. [어린왕자와 길을 걷다]도 동화에 젖어들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내 삶, 행복, 사랑, 희망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책을 연초에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더. 또 하나의 큰 바람은. 나도 언젠가 그녀와 같이 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를. 그리고 마음에 남는 진짜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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